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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바레] 서재

2017. 6. 29. 02:29 | Posted by 호랑이!!!

히카르도는 다이무스의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재라기보다는 사무실의 역할을 더 충실하게 수행함에도 값에 상관없이 책이 가득했기에 히카르도의 눈에는 이 곳이 도서관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다이무스는 서류를 붙들고 있고,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어서 서류작업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책을 대강대강 훑어보다가 적당히 얇은 책을 골랐다.

 

바닥에 주저앉고 책장에 기대 책을 펼치면 페이지 너머로 다이무스가 보인다.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나는 육중한 책상과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른 곳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펜으로는 바쁘게 무언가를 쓰는 모습은, 정말...

 

‘-를 갑니다, 사과, 오렌지-’

 

바깥에서 갑자기 메가폰 소리가 났다.

 

책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들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니 다이무스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완전히 서류 속에 빠진 것 같지만.

 

히카르도는 입을 열었다.

 

“everlasting”

 

"영원한, 변함없는."

 

“grave”

 

무덤.”

 

언제든 영어가 아직 어설프다는 구실로 말을 걸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듣고 답을 한다.

 

다음 장을 넘기다가 히카르도는 알아차렸다.

 

이 책은 이 서재의 여느 책과는 다르게 그림이 많고, 거기 더해 새 책이다.

 

책은 아이들의 나라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지만 히카르도는 더 이상 책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홀든.”

 

펜촉이 종이를 스치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love.”

 

"사랑."

 

사각사각, 부드러운 손길만이 낼 수 있는 소리지.

 

“love.”

 

사랑.”

 

다시 한 번 더.

 

“love.”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 쪽을 보며 웃고 있는 히카르도와 눈이 마주쳤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

 

다시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히카르도도 다시 책으로 눈길을 내렸다.

 

 

[이글다이글] 선상에서

2017. 3. 29. 15:50 | Posted by 호랑이!!!

여기에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

 








다이무스는 배에 올랐다.

 

대개의 시간은 서류 작업이나 가상 전투를 위해 쓰다보니 출장을 다녀오는 것은 간만이다.

 

본디라면 우편으로 계약서만 보내 처리할 일인데 이렇게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역시 교통이 발달한 덕이지.

 

이 배를 타고는 3, 배에서 내려서는 자동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겨우 일주일 남짓한 기간 안에 오고갈 수 있다니.

 

다이무스는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헬리오스에서 오셨군요,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방이 있습니다.”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서두르는 듯 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짐작되는 대략적인 무게, 성격, 주로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렸다.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긴 은발이 흐트러진, 낯익은 사람이 배로 오를 때 쓰는 계단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 안녕!”

 

“...너냐,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귀여운 동생을 만났는데 그게 다야?”

 

네가 배를 탈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지.”

 

그는 티켓을 검표원에게 내밀었다.

 

연합의 이글 홀든, 확인하였습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시면 객실이 있습니다.”

 

나도 볼일 보고 돌아가는 길이거든? 형 방은 어디야아? 나 놀러가도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티켓을 확인했다.

 

“...내 방으로 와라. 특실은 아니지만 그 방보다는 나을 거다.”

 

형 최고야!”

 

특실은 아니라고 했지만 다이무스가 받은 방은 꽤 넓었다.

 

1인실이었지만 물건들은 나름대로 여유있게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이글은 무언가에 흠뻑 젖은 부츠를 벗어던지고 가방에서 편한 옷을 찾았다.

 

아직은 안 된다.”

 

, 왜애.”

 

저녁 시간이 곧이다. 파티는 아니지만 단정하지 못한 차림은 안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짐 속에서 빗을 꺼냈다.

 

우선 그 머리부터 어떻게 하도록 하지. 머리끈은 있나?”

 

아니! 안 가져왔어!”

 

이글은 방긋 웃으며 거울 앞에 있는 의자에 털석 앉았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에 서서는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급한대로 땋아 주도록 하지. 나중에 내려서는 머리끈을 마련하던가, 아니면 아예 이 머리를 잘라라.”

 

목 위에 있는 거?”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두피에 돋아난 이 털 말이다.”

 

식사 예절은 제대로 알고 있겠지, 나이프가 어떻고, 사람과의 대화가 어떻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옷차림은...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서 귀를 닫아버린 이글은 거울을 보았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도료를 써서 비슷하게 만들어진 흉터에, 겉만은 본체와 같은 모습.

 

거울 너머로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투박한 손가락이 움직인다.

 

익숙하게.

 

이글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거냐.”

 

형이랑 있는 게 좋아서!”

 

[다이토마] 마녀AU로 전에 쓰던거 발견

2016. 12. 2. 19:05 | Posted by 호랑이!!!

intro

마녀의 이동 도구는 기본적으로 가사일에 도움이 되는도구이다.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 예로부터 여자로 한정되었고, 옛날에는 사람이 몸을 실을만한 가사도구가 청소용구인 빗자루(때로 흰염소, 솥단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이동수단은 청소용구가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빗자루를 잘 쓰지 않으니까 모임에 참가하여 확인해도 진공청소기 투성이다. 가끔 로봇 청소기도 보이기는 하지만 타기 힘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마녀들 사이에서 익스트림 스포츠 대용인 것 같다.

이렇듯, 마녀들도 현대 사회에 발맞추어 변화하는데, 이는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몇백년 전까지는 십대 초반에 독립하고는 했지만 현대에는 성인이 되면서 독립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Prol

 

토마스 스티븐슨의 특기 분야는 내지는 얼음마법이다.

 

본디 마녀의 독립은 마녀의 특기 분야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이래서야 큰일이다.

 

요즘은 누구라도 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고 인공눈까지도 만들고 있으니까.

 

인건비와 기계의 비용을 비교해도 자신이 더 싸다고는 할 수 없을뿐더러 기계 대신 써달라고 말하기에도 영 마뜩찮다.

 

자신이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이 기뻐해주는 것이야 좋지만 영 충족감이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 토마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같은 동아리 선배인 이글 홀든이었다.

 

이글은 척척 다가와 토마스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걸쳤다.

 

너 방 남냐?”

 

?”

 

, 그동안 큰형이랑 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형이 자꾸 구박하잖아! 확 나와버리려고.”

 

네에?!”

 

그런 이유로 집을 나온단 말이야?

 

토마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방 없어? 컴퓨터랑 TV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데. 일주일만... 아니, 사흘도 좋으니까 재워줘!”

 

제 방이라도 좋다면야...”

 

토마스는 수락했다.

 

그리고 토마스의 방에 들어와서 이글은 필터 없는 감상을 첫 마디로 삼았다.

 

폐가?”

 

무슨 말이예요! 이래봬도 제가 2년째 살고 있는 방이라구요.”

 

춥고, 좁고, 어둡다.

 

듣자하니 부엌의 스토브도 영 시원찮은 모양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방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으로 이 집은 못 살 집이다.

 

야아아옹

 

이글은 고양이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없는 듯한 검은 고양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 피터. 집 잘 보고 있었어?”

 

토마스가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코를 살짝 가져다 대어 코인사를 하고는 이글 쪽으로 다가갔다.

 

피터, 그 쪽은 이글 선배야. 몇 번 얘기했지? 선배, 그 쪽은 피터예요.”

 

안녕 야옹아~”

 

피터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 이글은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아니, 걔 말고. 토마스 스티븐슨. , . 걔네 집에 와 봤는데 집이 끝내주는 폐가거든?”

 

여기까지만 해도 토마스는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고, 당장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아, 얘랑 살아.”

 

이글 선배!?”

 

그런 걸 맘대로 정하면 어떡해요!

 

토마스가 외쳤지만 이글은 태평하게 그 형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서야 느긋하게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형이 너 만나보자는데?”

 

, 생각해봐.

 

형이 사는 저쪽 동네는 네가 다니는 단과대학과도 가깝고, 집 근처에 장보기 좋은 마트도 하나 있어. 방은 넓고 깨끗하고 동네 치안도 좋고, 관리도 잘 해준다고? 그야 여기보단 비싸지만, 둘이서 나눠 내는 거잖아. 지금 내는 거랑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야...

 

...에 기초한 이글의 설득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만나는 보겠다고 해 버렸다.

 

토마스의 대답을 듣자 이글은 만족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갔고, 요란스레 씻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야?’

 

피터가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꼬리는 책상 아래로 늘어졌고, 불쾌하다는 듯 탁탁 서랍을 쳤다.

 

뭐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나 외에.

 

피터는 책상을 꼬리로 찰싹 때렸다.

 

진짜 할 생각이야?’

 

일단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피터는 불만스럽다는 듯 낮게 우우- 소리를 냈다.

 

토마스는 무어라 하려다 이글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오자 드라이어를 찾아 내밀었다.

 

다음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이글은 일어나기 싫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토요일인걸요, 더 주무세요.”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난 토마스는 피터 밥을 챙긴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운지 오래였고 분주하게 움직인 다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 교재를 펼쳤다.

 

안돼, 벌써 열한 시 반인걸.”

 

그렇네요.”

 

벌써 점심때구나.

 

꼭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글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형이 열두시에 나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그걸 왜 지금 말해요!”

 

토마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원래도 아무것도 없던 방안을 청소하겠다며 청소기를 들었다.

 

“...그런데 선배, 선배네 형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예요?”

 

너랑 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잔소리를 빼면 조용한 편인데 형이 너한테 잔소리를 할 리도 없고. 배려심? 있는 편이지. 책임감도 강하고...

 

무엇보다! 맨날 야근하니까 술 마시고 놀다가 느지막느지막 들어와도 돼! 말이 룸메이트지 주말에나 만나는 주말부부나 다름없다고~”

 

나름 객관적인 정보니까 믿어도 돼!라며 이글은 팽개쳐둔 옷을 입었다.

 

오른쪽 양말까지 다 신은 순간,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 누구세요-”

 

문을 열자, 거기에는 더없이 이글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이글이 여기 있다 들었다만.”

 

형아~ 나 보고 싶었어?”

 

하나도 안 닮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지만 안 닮았다!

 

이글이 토마스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 않았고, 이글은 그게 또 익숙하다는 듯 소개를 시작해서 토마스를 당황시켰다.

 

토마스, 이 쪽은 우리 잔소리쟁이에 구박쟁이 다이무스 형이야. 절대 안 웃어.”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글.”

 

이글은 못 들은체 하고 토마스의 뺨을 꾸욱 찔렀다.

 

얘는 토마스 스티븐슨. 어때, 귀엽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목례로 인사를 마치고 그는 고양이용 간식 캔을 내밀었다.

 

고양이를 키운다기에 사 봤다.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무스 형.”

 

뭐냐.”

 

나 피자 먹고싶어.”

 

가서 먹을거냐 주문할거냐.”

 

역시 형은 상냥해.

 

양손으로 손가락 총 빵야빵야에 윙크라니, 막내는 정말 애교가 많구나.

 

토마스는 감탄했다.

 

 

홀든의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검을 받는다.

 

그 검은 지금까지 썼던 목검이나 가검, 혹은 날을 무디게 만든 예식용 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홀든의 이름 아래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글 홀든이 검을 받을 때 반대했다.

 

이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글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한 젊은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위의 두 형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다이무스는,

 

네가 그만한 무게를 보여주지 않아서다. 어른스럽게 굴어라

 

벨져는,

 

남들이 널 판단하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선택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글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벨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참 이글에게 검을 주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한 안으로 들어가서 대뜸 가장 무겁고 긴 검을 채어 나왔다.

 

왜 하필 가장 길고 무거운 검이었나.”

 

이글은 남들이 말하는 종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경써본 적 없었지만, 다이무스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답군.”

 

그래서 다이무스가 짧게 뱉은 마지막 말에는 상처받았었나 보다.

 

아니, 상처 같은 거창한 것 말고, 그냥 한 대 맞은 정도

 

...라고 이글은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글이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수많은 검이었다.

 

전부 홀든을 위해 만들어지는 고급품의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특기에 맞게 홈이 더 패어있다던가, 모양이 다르거나, 날이 셋 달리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가장 이글의 눈을 끈 것은 검집에 날개가 음각되어 가죽끈과 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을 끈 것은 검신이 두텁고 무게감이 강한 짧은 검.

 

어쩌면 그것이 이글에게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글은 그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을 집었다.

 

그는 절대로 벨져처럼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살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옆에 나란히 서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길고 무거운 검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검을 쉽게 잘 다룬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처음에는 검이었던 것은 계속 바뀌었다.

 

형을 따라 영국으로 간다면, 다른 세력에서 나 자신을 증명한다면, 나 혼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목표가 바뀔수록 마음 역시 바뀌어갔다.

 

 

 

 

 

 

어느 날 이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본가로 가자.”

 

“...얼씨구, 그 말을 왜-애 벨져 형이 할까나...?”

 

벨져는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망나니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말끔한 집이군.

 

덧붙여 집 안에서 셔츠는 고사하고 속옷이나 걸칠까 싶던 녀석은 의외로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서 네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축하? 무슨 축하? 아버지... 하암, 승진이라도 하셨어? 아니면 어머니? 아니면 삼촌들이나 뭐 문하생이 어디 나가서 훈장이라도 따 왔대...?”

 

태평한 척 하품을 하는 저 머릿속에서는 아마 최근 신문이나 벨져 자신, 혹은 다이무스 형의 태도에서 본가와 관련된 무언가가 없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 형인가? 그 형 요즘 외출하고 출장이 잦더라니.”

 

그래.”

 

, 축하는 축하고. 어차피 트와일라잇으로 돌아올 거 아냐. 난 됐어.”

 

벨져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글에게 어떤 말을 해야 데려갈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훈장이라던가, 어디에서 공적을 세우거나 하는 시시한 일이 아니다.”

 

! 하하하하, 형이 그런 말을 하니 되게 웃기네!”

 

이 웃음은 꽤나 진심이다.

 

이글은 폭소를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탁탁 털었다.

 

그럼 뭔데?”

 

결혼이다.”

 

벨져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들었는데 말이야, ?”

 

상대는 아버지 아는 분의 막내딸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양질의 결합인데 그 상대가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더군.”

 

“...5분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바깥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이글이 들어가고, 안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딴에는 제 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저 안쪽에서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지.

 

정확히 4분하고 45초가 지나고 이글이 뛰어나왔다.

 

벨져와 이글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용하군.”

 

뭐가?”

 

그런 여자랑 형은 어울리지 않아, 못해도 3일이면 형에게 질려서 결혼을 후회할 걸, 형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왜 하필 다이무스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형은 성실하니 마음이 없더라도 가정에 충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을 떠난 너나 기사단에 뼈를 묻을 나와 결혼할 수는 없잖느냐. ...라고 할 거잖아.”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다들 이글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하고 우려를 표했기에 이글은 축하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고, 행사를 하고, 연회를 즐기고, 그 모든 일이 끝나 쉴 즈음은 밤이었다.

 

이글은 방을 나섰다.

 

갑주도 없고, 장갑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맨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문을 열자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탄야의 독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운 것이 열린 문으로 흘러넘쳐서 이글은 잠시지만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다이무스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형의 일인데, 와야지.”

 

다이무스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간혹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서류나 편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술병이 놓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잔은 없고,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잔은?”

 

마시다보니 필요 없어져서 씻으라고 내놓았다.”

 

이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방이 어둡다.

 

이글은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

 

선물은 없어. 그야~ 나 형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도 나한테 집 얘기는 해주지도 않고~”

 

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잖느냐.”

 

아하하, 그랬나?”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이글이 웃을 때마다, 다이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청소한지 오래된 물건을 건드리듯 무거움이 피어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있잖아, .”

 

뭐냐.”

 

사람이 결혼하면, 어른스러움이 늘어나는 걸까.”

 

다이무스는 그 말에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나도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데, 그럴 리 없겠지.”

 

형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고?”

 

나는?이라고 이글은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다이무스가 이어 말했다.

 

너는... 그렇게나 다 큰 것 같은데.”

 

“...내가, 어른 같아?”

 

가장 무겁고 긴 검을 휘두르고,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내고 있으니.”

 

다이무스는 이글 쪽으로 새 병을 내밀었다.

 

마실 테냐.”

 

이글은 그 병을 받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시다가.

 

...아니, 사실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대화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글이 입을 열었다.

 

몇 년이나 망설인 말이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을.

 

다이무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만약에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바뀌었을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더라면.

 

다이무스는 몇 가지 가능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영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가 말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무거운 향에 익사하고 싶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글의 발은 움직였고,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에서 맑은 바람이 꽃과 풀의 향기와 탄산수에 넣는 레몬의 향을 싣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공기다.

 

차라리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낸다는 내가 형에게 묶여서 말조차 하지 못해.”

 

차라리 어리다고 해줘.

 

결혼하지 말라고 울면서 떼쓰게 해줘.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이글은 코와 입을 눌러 숨을 참았다.

 

 

 

[다이글] 살인하는 새 조롱하기

2016. 6. 22. 23:41 | Posted by 호랑이!!!

이글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에 있었던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역시나.

 

옆자리의 체온은 사라졌지만 체향은 남아서,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묻었다.

 

손으로 자주 잡는 베개의 옆 부분은 쇠와 가죽 냄새가 배었고, 머리가 닿는 부분에는 다이무스가 애용하는 샴푸와 화장수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아랫부분에는.

 

피 냄새

 

말라붙으면, 씻으면, 쉽게 사라지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떨어지지 않는.

 

아직 잠이 온다.

 

눈을 감고 설핏 잠들려는 찰나에 달그락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크지 않아서.

 

일부러 소리를 작게 하려고 노력하는 티가 나는 소리라 더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이어 들리는 발소리는 다이무스의 것이었다.

 

이어 풍기는 것은 다이무스와 아침까지 함께 보내며 익숙해진 피 냄새였고.

 

다이무스는 입었던 것 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 옷을 벗어 옆에 내려놓다가 다시 가져가 목덜미 같은 곳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이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일어나서 이번 주에만 벌써 두 건이잖아, 너무 많은 거 아냐?’라고 하면 놀랄까?

 

실행에 옮기는 대신 이글은 머리를 들고 욕실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다이무스의 칼에 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얼마 전에 엿들었던 방해물일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하자면 회사의 적들.

 

물소리는 금방 그쳤고, 욕실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진한 샴푸 향이 흘러나왔다.

 

“..., 일찍 일어났네.”

 

반쯤 감은 눈을 부비며 베개에 머리를 기대자 아직 물기가 남은 따뜻한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라, 이글.”

 

나른한 미소가 입가로 퍼졌다.

 

졸음을 이기고 가늘게 눈을 뜨자 다이무스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화악 휘날리는 것이 다이무스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있잖아 형아, 방금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날렸.. 후아암...”

 

일어날 거냐?”

 

여기서 보니까 꼭 날개 같아.. 흐흐, 새 날개.”

 

아마도 다이무스는 실없는 소리, 라고 일축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가서 식사를 만들 것이다.

 

다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들며 이글은 생각했다.

 

새라면 윙컷을 당한 새겠지

 

살인하는 새.

 

그리고 의뭉을 떠는 나.

 

 

[다이글] 봄비

2016. 4. 27. 21:11 | Posted by 호랑이!!!

비가 내렸다.

 

하도 조용히 내려서 내리는 줄도 몰랐던 것이 집을 나서보니 내리고 있기에 무심코 손을 내밀었더니 따뜻하여 내심 놀랐다.

 

과연, 봄이구나.

 

네가 태어난 봄이다.

 

꽃들은 피어나고 온갖 생물이 자라고 생명을 얻는 봄이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검은색, 낯익은 차였으나 내가 탈 일은 그렇게 많지 않던.

 

내가 탄 차는 비 내리는 거리를 지나갔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벨져 녀석이 웬일로 갑주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녀석이 언젠가 갑주가 아닌 것은 옷이 너무 가벼워서 입은 느낌도 나지 않더라고, 지나가는 말로 투덜거린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

 

너는 꽃에 파묻혀 있었다.

 

꽃들이 피어나는 때에, 피어난 꽃들은 목이 잘려 네 곁에 누워있다.

 

하얀 꽃들 사이에 조그만 풀꽃들을 빨간 리본으로 묶은 것이 눈에 띄었다.

 

리본은 익숙한 것이었다.

 

아마도 네가 예뻐한다는 그 꼬마 것이겠지.

 

그 애는 지금도 저 한쪽에서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싫어안돼만 반복하고 있다.

 

네 옆에 꽃 한 송이를 더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일터로 가려고 했지만 조노비치가 며칠 쉬다 와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도 갈 생각이었으나, 어쩐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지 말라면 좀 가지 마’, ‘언제까지 일만 할 거야?’. ‘아 좀! 이 일에 미친 인간아!’.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저 말밖에 없구나.

 

이렇게 가지 않는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가지 않았을 것을.

 

차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의 비는 이렇게나 차가운데.

 

차가울 터인데.

 

차가워야 할 텐데.

 

[다이글] 날이 덥다

2016. 4. 25. 20:44 | Posted by 호랑이!!!

날은 이제 더워지고 있었다.

 

말수 적은 피터라도 연합으로 들어올 때는 더워가 한 마디 추가되었고 빙결 능력자인 토마스나 루이스 곁에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간식으로 과자나 핫초콜릿 보다는 아이스크림이나 셔벗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그러나 이글로서는 셔벗이나 능력자의 서늘함으로는 뭔가 만족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여름이었으면 마음껏 살을 태우면서 땀을 흘릴 텐데, 뭐냔 말이다 이 애매한 날씨!

 

...이 말에는 지나가던 엘리가 봄이야 봄!’이라며 지나갔지만.

 

이글은 이 때까지는 선선한 저택을 떠올렸다.

 

널찍하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을 열면 얼마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데다 정원이며 구석구석에 녹음이 드리워졌지.

 

어쩌면 몸을 움직이느라 몸에 열 떨어질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소하게 꾸며졌을까.

 

...어쨌거나 저택이었다면 정원 가득하게 심어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트와일라잇 광장에는 울창하다고 부를 만 한 나무숲이 없었고, 때문에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이무스의 집은 깨끗하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잘 정돈되었다 정도로는 부족하고, 어딘가 지나치게 청결해서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서늘함이 있다.

 

비록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는 작은 방이지만 침대는 꽤나 널찍하고 나뭇잎이 해를 가려줘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아... 시원해...”

 

이글은 땀에 젖은 채 침대에 누우려다 마악 퇴근한 참인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던 다이무스의 눈총 아래 찬물로 몸부터 씻고, 샤워가운 하나만 입은 채 차게 식은 시트 위에 누웠다.

 

몸의 열기가 한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는 잘 말리라니까, 감기 든다.”

 

타박하면서도 다이무스는 쉴 참이라며 그 옆에 누웠다.

 

달그락, 얼음이 부딪히는 유리컵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만으로도 서늘하다.

 

눈조차 뜨지 않았지만 익숙한 체중이 푹신한 침대를 누른다.

 

이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좋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운데 이번 여름에는 정말 푹푹 찌겠어. 여름에는 매일 와야겠는걸? 맥주라도 한 캔 사들고... 형이 맥주를 마시던가? 형은 맥주보다는 와인 파였지? 그렇지만 형이 병맥주를 들고 마시는 건 왜인지 멋있을 거 같은데... , 듣고 있어? . , 다이무스 형아?”

 

“...듣고 있다.”

 

아이구 그러세요, 뭘 듣고 계시길래 질문에는 대답도 없어?”

 

다이무스는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가 이내 다시 감았다.

 

.”

 

형은 참.”

 

이상하다니까, 하는 뒤의 말이 흩어졌다.

 

 

철그렁, 사슬이 흔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이글은 제 손목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어떤 질 나쁜 장난인지 알아차리려는 듯 힘을 주어 당겨보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일 일까나?”

 

, 어제 일을 돌이켜 보자.

 

웬일로 벨져 형이 찾아와서, 휴가를 받았으니 형제끼리 꽃이나 보러 가자고 했지.

 

큰형이 감상에 젖은 모습을 보고 놀려나 줄까 싶어서 찬성했었고, 다이무스 형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한적한 곳으로 갔다.

 

처음에야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이 감상적인 인간이 어릴적부터 한 번도 제가 원하는대로 고집 부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의 야근도 그다지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리라 지레짐작하고 그만두기로 했었고.

 

한창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며 반은 강제적으로 형들이 제공한 고급 술을 부어라 마셔라 먹이고 또 먹고, 웬일로 싸움도 없고 서로 싫은 소리도 없이 실컷 즐겼는데... 역시 독한 술이었는지 잠이...

 

어째서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

 

이글은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벨져 그 이기적인 인간이 큰형 위문이니 뭐니를 얘기할 때부터?

 

다이무스 그 고집불통이 빠져나가지 않고 납치되어 준 데부터?

 

우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작고,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방치된 지 몇 달은 되었을 것 같고... 나 때문에 급하게 치운 모양이네~?

 

작은 창문조차 없는데다 저 구석에 있는 문은 아마도 화장실이겠지.

 

방 안에는 이글이 누워있는 1인용 철제 침대와 침대 옆 협탁 외에는 가구조차 없었다.

 

철로 뼈대를 짠 위에 매트리스 한 장이라니, 튼튼함만 생각하느라 편안함은 생각하지 않았나 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지 협탁 위에는 등에 담긴 촛불이 하나 방을 밝히고.

 

몸을 살펴보면 술이 아니고 약이어서인지 속이 조금 울렁거렸으나 이 정도는 몇 분 있으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손에 채워진 수갑은 신체강화 능력자도 구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이의 사슬 길이는 짧지 않아서 일상생활이라면 할 수 있다.

 

심지어 짧은 도라면 어찌저찌 사용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고.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져 있었는데 매달린 쇠사슬의 길이는 저만치에 보이는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2미터가 조금 넘었고 쇠로 만들어진 튼튼한 침대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 다리와 이걸 분리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침대 다리와 단단히 붙어 있고 침대 다리는 또 바닥에 고정되었다.

 

침대에 앉아 몸을 숙여 살펴보던 이글은 열쇠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이무스 혀~~”

 

대상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야? 전기도 없고, 촛불이라니!”

 

깨어났군. 배가 고픈가? 아니면 목이 마른가?”

 

수갑 말인데~ 형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이야, 놀랐지 뭐야?”

 

다이무스는 문을 닫고 기대 섰다.

 

이렇게 묶어둘 거면 망사 스타킹에 빨간 힐이라도 신어 주라~”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군.”

 

할 거면 잘 조사했어야지, 이거 잘못 긁히면 상처가 난다고. 요즘에는 안에 천이나 털이 덧대인 것도 있구.”

 

조만간 오스트리아로 이송될 거다.”

 

일부러 서로 다른 소리만 하던 그 신경전은 다이무스의 승리였다.

 

“...형이 그걸 용납했다고?”

 

내가 잠시 눈감아 주었던 것은 네가 그 뒤로 이어지는 책임도 짊어지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네 방종에 따라온 책임 중 하나일 뿐이다.”

 

“‘-중 하나’? 그럼 다른 것은?”

 

네 목숨이다.”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성큼성큼 이글 가까이로 걸어갔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 거냐. 매번 새로운 능력자들이 합류하는 이 국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던가? 벨져의 기사단은 하나의 패고, 나는 오스트리아와 가문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너는 지금의 방해물 자리에 앉아 있다.”

 

이글은 이를 사려물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 너무들 하시네~ 지금의 방해물은 언젠가의 패다, 그걸 고려하지 않을 리 없잖아? 강한 적은 강한 패가 된다, 그렇지?”

 

그러나 연합은 우리 쪽에 안겨주는 손실이 너무 크고, 너는 그 전력이 되는 사람이기에 가만 둘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우리’? 형의 그 우우리이가 누군데? 가문? 나라? 회사?”

 

기가 막히다는 듯 이글이 물었으나 다이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이글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말해줄 수 없다.”

 

정말로?”

 

다이무스는 이글의 눈을 피했다.

 

그 순간, 이글은 덤벼들어 다이무스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검과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혀 울렸다.

 

이글은 그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그의 팔을 누르고 양 손목에 감긴 사슬로 그의 목을 눌렀다.

 

열쇠 내놔.”

 

손목 사이의 사슬 길이를 더 짧게 해야겠군.”

 

목 대신 손목의 힘줄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쓸 수 있을 만큼 써야하지 않겠어?”

 

벨져가 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군, 너를 속인 것이 미안하다며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

 

이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벨져 형도 한통속이었다 이거구만? 꼴에 양심이 있는 척이라니, 웃겨 죽을 것 같네.”

 

벨져도 나도 네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다.”

 

정말 그러면, 내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지금은 날 놔주지 않을래?”

 

이글이 한쪽 팔을 놓아주자 다이무스는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는가 싶더니 이글의 얼굴을 잡고 몸을 뒤집었다.

 

재빨리 뒤로 뛰어 침대 너머로 넘어간 이글은 손목에 차고 다니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묶었다.

 

이 안에서 형이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일반적인 검보다 몇 배는 길고 몇 배는 무거운 걸, 이 좁아터진 곳에서 휘둘렀다가는 짐밖에 되지 않는데!

 

묶였다지만 이쪽이 훨씬 유리해.

 

이글은 사슬 묶인 발을 휘둘렀다.

 

다이무스는 발을 피하고 이어 날아오는 사슬을 뒤로 물러서 피했다.

 

함께 공성에 참전한지도 꽤나 오래 되었고, 서로에 대해서라면 자신을 보듯이 샅샅이 알고 있다.

 

머리를 제대로 써서 덤빈다면 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이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 즈음, 이글은 침대 위를 뛰어넘어서 몸을 날렸다.

 

봐라, 일단 달려들고 보지.

 

다이무스는 허리춤의 검을 꺼내 제 앞에 꺼내들고 버티고 섰다.

 

이글은 칼등을 누르고 곡예라도 하듯이 짚었고 다이무스는 검에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냈다.

 

내동댕이쳐진 이글은 뒤로 굴러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발에 묶어둔 사슬이 역시 너무 긴 건가.

 

다이무스는 혀를 차고는 사슬 아래에 발을 걸어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이글은 사슬이 당겨지자 거기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날아와서는 다이무스를 다시 타고 눌렀다.

 

침대 옆이라 길이가 남는 사슬은 다이무스의 다리를 묶고 있었다.

 

“...하아, ... 두 번이나 나한테 위를 내줬네?”

 

즐거웠다며 이글은 다이무스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우선 제 발목을 죄는 것을 풀어놓고 손목의 수갑도 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능력자용 수갑이라 그런가 묵직하게 철그렁 소리가 났다.

 

, 이것 봐. 역시 상처가 났어.”

 

“...아직이다 이글.”

 

뭐어?”

 

정말 포기할 줄 모르네!

 

발목도 묶어 뒀고, 이제 유유히 탈출할 차례, 인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글의 눈동자가 그 쪽으로 돌아갔다.

 

, 작은 형? 벨져?! 어떻게 여기...”

 

벨져는 예상했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글은 일어나려 했지만 다이무스의 손이 그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한번 더 의심했어야지.”

 

벨져는 주먹을 휘둘렀다.

 

 

[다이글] 독

2016. 1. 4. 02:14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 홀든에게 이글 홀든이 어떤 이냐고 묻거든 답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계속 걱정을 끼치고, 귀찮게 굴고, 제멋대로에, 귀족으로서 책임감이라고는 깃털 한 장의 무게만큼도 없는 녀석.


그러나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답이 이어 나오고 있다.


너는 달콤한 독이다.


미련한 내가 가느다란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것을 핥아내면 내 목을 틀어막고 내 심장을 꽉 쥐어내는 못된 독.


마치 귀찮다는 듯이 툭 던지는 너의 한 마디 말과 경박스럽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가는 짧은 네 손.


한 방울 한 방울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닥쳐와 나를 속에서부터 잠식한다.


나는 더 목말라하고, 나는 더 갈구하고, 원하고, 나는 더, , -.


나는 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것을 약해지는 것이라고 느꼈다.


마음이 약하면 행동이 분별없어지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


충동적으로 아버지에게 이글은 아직 어리고, 내가 그만큼의 일을 할 테니 가만히 두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후회했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보내고 불과 일주일만에 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 우연히 들었는데 말이야~ 아버지가 나 혼내려는거 큰형이 막아줬다며~? 하하! 웃기네 이거!]


웃기던지 말던지.


충동적인 일을 하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게 더 우습다.


달콤하게, 마음 깊은 곳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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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19금] 바나나

2015. 10. 19.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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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 말 안듣는 동생

2015. 10. 18. 04:28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씨, 전화 왔습니다.”

 

휴식시간, 다이무스는 눈을 감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사무직원 중 하나가 손짓을 했다.

 

어디에서 온 전화지.”

 

기사단입니다.”

 

벨져의 기사단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다이무스는 전화를 받으러 걸어가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보니 어제 저녁에 벨져가 음식을 남기는 것에 대해, 오늘 아침은 머리를 묶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짧게 잔소리를 했지.

 

그 때문에 지금 벨져의 상태는 아마.

 

1. 여기저기 성질을 부린다.

 

...라던가.

 

2. 기사단 앞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해 놓아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라던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왜 다들 벨져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군.

 

까탈스럽고 까다로운 아이이긴 하지만 어려워 할 아이는 아닌데.

 

[벨져 홀든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3. 가출.

 

다이무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전언 철회, 성질 더러운 동생이다.

 

벨져 이 녀석은 일전의 긴 가출 동안 자신이 사라지면 형이 찾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툭하면 가출해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찾으면 자신의 집 침실에서 누워 있거나 서재로 쓰는 방 구석에 있겠지.

 

어찌나 가출을 해대는지, 이젠 저 기사단도 자신에게 찾아달라고 전화를 한다.

 

바빠서 못 찾을 것 같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쪽이 뭐라고 하건 간에 수화기를 놓았다.

 

휴식시간은 아직 얼마간 더 남았으나, 빨리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 서류를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땡땡 종이 치고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종이 쳐서 퇴근 시간임을 알릴 즈음에도 계속 손을 바삐 움직였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옆으로 손을 더듬어 아까 타서 옆에 둔 홍차를 찾았으나,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벨져가 한 손에는 홍차 잔을 손에 쥐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벨져.”

 

형아는 나 걱정도 안 되는가?”

 

전혀.

 

무슨 불의의 사고에 휘말렸대도 사고를 친 쪽이 불쌍하지 휘말리는 벨져는 안 불쌍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건만, 이 동생들은 다이무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너무나도 능숙해서.

 

벨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목을 휙 뒤집어 다이무스가 보던 서류에 찻물을 확 끼얹어 버리더니 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벨져.”

 

찻물이 서류에 번져 글을 읽을 수가 없군.

 

벨져의 발소리는 멀어져만 갔다.

 

벨져 홀든!”

 

, 이 말 안 듣는 녀석.

 

다이무스는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 저녁에는 무릎 위에다 엎어놓고 빨갛게 자국이 나도록 때려 주지.

 

 

[다이글?/연령반전] 망나니가 되오리다

2015. 10. 17. 02:07 | Posted by 호랑이!!!

접니다 형님.”

 

어서와 다이무스.”

 

노크를 하고 들어서면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이글, 형이 보인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어 창문에 부딪힌 비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이 방 안만은 다른 세상인 양 따뜻하고 건조하다.

 

타닥타닥 난롯가의 불은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제가 끓여 들고 온 홍차는 좋은 향기를 주위로 퍼뜨렸다.

 

이번에 학교를 졸업했다지? 회사로 올 거야?”

 

“...아뇨,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글 홀든, 차기 가주는 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단? 벨져처럼?”

 

아니오.”

 

설마하니 연합으로 가겠다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비록 이글의 눈은 책에 박혀있다지만 그 너머로 자신 역시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검을 놓을 것입니다.”

 

.

 

책이 덮였다.

 

다이무스?”

 

이글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 자신의 막내동생이 어떤 이던가.

 

무뚝뚝하고 고결하여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고귀한 기사 같던 게 유일하게 승부욕을 보이고 즐거워하던 것이 검 뿐인 녀석이.

 

검을 놓는다니.”

 

놓을 것입니다.”

 

검을 놓는다고? 이글은 다시 다이무스가 한 말을 되뇌어 보았다.

 

상상이 안 가는데? 정말로? 지금 저 녀석이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얘기한 게 맞나?

 

형님.”

 

다이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글을 불렀다.

 

아주 진지한 결심을 말하면서.

 

저는 망나니가 되겠습니다.”

 

이글은 입을 떡 벌렸다.

 

팽팽하게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머리가 지금만은 굳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이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할나위없이 절도있고 격식을 차린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나가서는, 심지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오 세상에.

 

이글 홀든, 유서깊은 홀든 가의 차기 가주이자 유달리 출중하다는 평을 듣는 삼형제 중 첫째, 다시 말해서 장남은.

 

올해로 스물넷 먹은 제 동생의 때늦은 반항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랬던 것이 불과 며칠 전, 이글은 집으로 연락이 와서 어딘가의 변두리에 있다는 술집으로 갔다.

 

저보다 커다란 동생이라 간신히 어깨에 팔을 걸치게 해 부축하면서 이글은 한숨을 쉬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동생의 지갑은 벌써 다 털렸을 것이고.

 

중간에 싸움까지 했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는 길게 상처까지 났다.

 

망나니짓을 한다 해도 밤이면 돌아오고 아침에야 나가곤 하는데 분명 오늘 아침에는 얼굴에 저런거 없었단 말이지.

 

“...요령없는 놈.”

 

“...... ...니다...”

 

입을 열자 알콜 냄새가 훅 풍겨온다.

 

쯔쯔 혀를 차며 이글은 계속 걸음을 걸었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좁은 거리 위로 새까만 하늘에 구름이 끼어 달빛조차 흐린 곳을.

 

작정하고 반항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열 몇 살 때 하던 짓보다 못하니, 넌 아무래도 반항아는 못될 것 같네~”

 

어둡고, 사람 없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다.

 

적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하고 무뚝뚝한 막내는 술에 취했으니, 이글은 이 때가 좋으리라 싶어 딱 조용함에 어울릴 정도의 목소리를 조근조근하게 입에 올렸다.

 

“...그래서, 왜 뜬금없이 반항을 하는 거야.”

 

다이무스는 멈칫, 하더니 다시 걸음을 비틀거렸다.

 

“...저는 강해져봤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의 분란의 씨가 되고 싶지 않다.

 

괜히 여기저기 이용되다가 누군가의 짐이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

 

작은형은 결국 원하는 곳으로 떠나 가문에서 벗어났으나 자신은 쓸데없이 미련이 많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겠지.

 

이글은 두어번 더 채근했으나 다이무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가치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 형님 옆에 남아서.

 

온전히 가문을 받치는 작은 돌멩이이고 싶다.

 

기둥 따위, 주춧돌이 아니어도, 한 장 유리가 되어 창을 메우거나 한 겹 얇은 천이 되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디 보람차지 않을까.

 

이글은 그런 다이무스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령없는 놈.”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것과 반대라 자신이 막내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도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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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외식하자.”

 

이글은 여느때처럼 높게 묶은 머리를 살랑거리면서 다이무스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이무스의 눈빛이 탐탁찮다는 듯 바뀌자 이글은 허둥허둥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쏘는거야! 형 지갑 스틸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거 빌미로 뭐 해달라는것도 아니고 일부러 비싼거 시켜놓고 어라, 지갑이 없네에~’하려는 것도 아냐!”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은 가시질 않는다.

 

이글.”

 

약간의 침묵이 있었고 마침내 다이무스가 입을 열었다.

 

“‘쏜다는 말은 어디서 배운 거냐. 내가 분명 어린 나이니 연합에 간다는 철없는 선택을 할 수는 있을거라고 했지만-”

 

“...책임을 지라고, 네에 네에.”

 

이글은 건성건성 대꾸하다가 다이무스의 눈매가 사나워짐을 느끼자 헛기침을 하고 짐짓 예절바른 모습으로 팔을 움직였다.

 

금일, 홀든 다이무스님의 탄신일을 맞이하야 기쁜 마음으로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습니다만 저녁식사라도 함께 어떠십니까.”

 

다이무스는 무어라 한 마디 야단이나 잔소리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옷은 뭘 입고 가지? 평상복?”

 

아니! ~쁘게 차려입고 나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이글이 은행 아가씨들에게 수작질하는 소리가 들려 다이무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번처럼 정장을 입고 갔더니 허름한 펍으로 데려가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군.

 

경쾌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래도 내 생일 챙겨주는 건 저 녀석밖에 없군.

 

 

 

 

 

 

 

저녁, 다이무스는 늦지 않게 약속장소에 갔다.

 

차림은 격식에 맞게.

 

그리고 약속시간을 조금 넘어서 나타난 이글을 본 다이무스는.

 

본디 표현이나 말이 적은 그였지만.

 

놀라움을 짧게나마 얼굴 가득히 띄웠다.

 

이글?”

 

짜잔~ 놀랐지~?”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경쾌한 웃음소리에, 거기까지는 자신이 알던 그대로고 예상했던 차림이지만.

 

나머지 부분이 평소와 엄청나게 다르다.

 

방해되지 않도록 대충 올려묶은 머리는 단정히 빗어 아래로 내려 묶었고(한때 벨져가 그랬던 것처럼) 보기만 해도 거슬리고 답답한 한가닥 앞머리는 넘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갑주 안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벨트도 왜 하는지 모를 정도로 헐겁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녀석이 단정한 아비 프락(연미복)에 크라바트라니.

 

놀랐나보네! 아하하!”

 

이대로 사진관에 데려가서 사진 한 장 박고 싶구나.”

 

그 말은 들은체만체하고, 이글은 다이무스의 손을 이끌어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글 홀든으로 예약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자리에 앉자 전채로 훈제한 연어를 멜론에 싼 것이 나왔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가장자리의 포크를 집으며 다이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상 밖이구나.”

 

아하하, 어떠셔? 이 몸이 할 때는 한다는 말이지~”

 

기왕이라면 내 생일 같은 날보다는 집안의 중요한 일이나 그런 때 해줬으면 좋겠다만.”

 

에엥~ 무슨 말씀? 이글 홀든 24년 인생에 집안 최대 행사는 큰형아 생일이거든?”

 

전채요리를 담은 접시가 비워지자 수프가 나왔다.

 

다이무스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이글과 종류가 다른 것을 보아 신경 써서 예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후의 생선, 고기 테린, 메인, 샐러드에 곁들인 와인까지 전부 그가 특별한 날에 즐기는 것이라.

 

다이무스는 꽤나 감동받았다.

 

형아~ 어때~ 만족스럽지이~”

 

“...테이블에 팔을 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퉁명스레 얘기함에도 이글은 다 안다는 듯 씩 웃는다.

 

“.....동생을 키운 보람이 있다,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아 웃기셔, 형이 키웠나? 한나가 키웠지.”

 

다음은 디저트 차례다.

 

달지 않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게 좋겠지.

 

사실 어느 정도는 기대했다.

 

뻔히 마음에 차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한 마디 말이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칭찬을 받고 싶은지, 이글이 안절부절 못 하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디저트 있지, 다크 초콜릿이랑 과일을 써서 형이 좋아할만한 걸로 해 달라고 했다~?”

 

기대되는군.”

 

다이무스의 눈가가 누그러졌다.

 

이글은 그들의 테이블로 웨이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초조하게 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감아대었다가 풀었다.

 

저 모습은 어릴적과 하나도 안 바뀌었지.

 

다이무스는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접시가 제 앞에 놓이자 코를 씰룩였다.

 

초콜릿과 과일을 듬뿍 얹은 케이크, 그리고 굳이 코를 가져다대지 않아도 느껴지는 단내.

 

이글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이 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무스는 이글 앞에 다른 접시가 놓이는 것을 보고는 작은 스푼을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글은 제 앞에 놓인 디저트를 신나게 퍼먹었다.

 

제 형이 앞에서 보기만 해도 달아빠진 초콜릿 디저트를 덤덤하게 먹는 것은.

 

글쎄,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겠다는 상으로서의 위엄 같은 걸까?

 

마침내 다이무스의 그릇이 비워지고 딸그랑 소리를 내며 숟가락이 떨어지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디저트 먹는 속도가 느리던데~”

 

배가 불러서 그랬던 거다.”

 

아까 형이 미간 찡그리는거 다 봤거든요!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이글은 숨죽여 킥킥 웃으면서 냅다 달려들어 다이무스의 팔짱을 꼈다.

 

~, 그럼 오늘은 특별히...”

 

사진 찍으러 가지.”

 

? , ? 형아? 다이무스 형?!”

 

아이고 큰형이 나 납치한다~며 이글이 웃었다.

 

장담하는데, 이건 디저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거다.

 

냉철한 은행원이고 회사의 에이스에 홀든을 이을 장남?

 

...근데, 동생인 내가 봐도 귀여운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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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톰] 커피 마시고 갈래

2014. 12. 4. 01:16 | Posted by 호랑이!!!

눈 내리는 밤.

 

홀든의 장남 다이무스 홀든은 막냇동생이 부탁한 물건을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걸었다.

 

도대체가, 집에서 노는 대학생 주제에, 그냥 자기가 가서 사면 될 것이지 왜 야근하고 피곤에 절은 큰형에게 이런 걸 시키고 그러는지.

 

아니, 그 이전에, 왜 편의점에서 파는 몸에 나쁜 음식을 사서 먹으려는가 이 말이다.

 

집에 있으면 요리사들이 애피타이저의 샐러드부터 디저트 아이스크림까지 만들어 줄 텐데.

 

하기사 그 녀석은 어릴 적부터 속을 이해할 수 없긴 했지.

 

어서오세요~”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이글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사람이 카운터 너머에 서 있었다.

 

다이무스는 속으로 하던 투덜거림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이글 그 녀석은 좀 반성해야 한다.

 

이글보다 어린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그 녀석은 형을 부려먹기나 하고...

 

그는 편의점 안을 휘 둘러보았다.

 

주먹밥은 어디 있지?”

 

저 끝 오른쪽에 있어요.”

 

아르바이트생은 손으로 저쪽이라고 가리켰고, 다이무스는 고맙다고 한 뒤 그쪽으로 가 보았다.

 

보자, 그 녀석이 뭘 사달라고 했더라...

 

참치? 베이컨? ?

 

...주면 다 먹겠지.

 

종류별로 하나씩 집고는 카운터로 가져갔다.

 

-’

 

이글한테서 온 문자다.

 

다이무스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한 손으로는 지갑을 꺼내며 눈은 핸드폰의 액정에 두었다.

 

형 나 배고파~ 언제 오는데~

 

-’

 

계산해드릴게요~”

 

형아아~ 이렇게나 귀여운 막내가 배고프다구!

 

- -

 

[할인이나 적립 카드 가지고 있으신가요?]

 

발랄한 여자의 녹음 음성이 흘러나왔다.

 

-’

 

아 진짜! 다이무스 형! 동생이 배고프다는데 빨리 와서 줘야겠다, 그런 마음 안 생겨?

 

없다.”

 

[현금 영수증 발급받으세요~]

 

-’

 

! 읽는거 다 보이거든! 근데 왜 답장이 없어!

 

귀찮다.”

 

... , 죄송해요. 이 음성에 그렇게 진지하게 답하는 사람은 잘 없어서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 사람은 미안하다는 듯 서둘러 사과했다.


봉지에 먹을 것을 담고 계산을 해주더니 그는 카운터 너머로 와 캔커피 두 개를 꺼냈다.

 

여기, 제 건데 하나 드릴게요. 오늘은 눈도 오고, 좀 춥잖아요.”

 

다이무스는 커피를 받기 위해 핸드폰을 내렸고, 그제야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름.”

 

토마스 스티븐슨이예요.”

 

토마스는 제 가슴팍에 달린 반짝이는 플라스틱 명찰을 가리켜 보였다.

 

다이무스 홀든이다.”

 

다이무스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따뜻했다.

 

“...야간에 일하나? 손님도 없어 보이는데 지루하지 않나?”

 

뭐어... 조금요? 그래도 책도 읽고 공부도 틈틈이 하니까 시간은 잘 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토마스가 보여준 책은 여기까지 읽었다고 표시한 책갈피가 거의 끝에 가 있었다.

 

길어봐야 앞으로 30분만에 다 읽겠지.

 

다이무스는 카운터에 기댔다.

 

같이 커피 마시지 않겠나?”

 

-’

 

~ 언제 와~~~ 다이무스 형아아아아~~~~~~~

 

다이무스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꺼 버렸다.

 

 

[다이무스X이글] '지나치게' 감상적인

2014. 11. 2. 20:53 | Posted by 호랑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다이무스 홀든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광경이나 구름이 하늘에 흘러가는 모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시 쓰는 일을 좋아하니까.

 

자신은 감상적이다.

 

가주는 감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가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때로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벨져가 첫째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분명 좋은 가주는 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가 그 위치에 만족할 테니까.

 

다이무스는 창밖을 보다가 책상 위의 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글과 책을 읽던 일이 떠오른다.

 

그 책에서는 현학적이고 감상적인 현자가 나왔었고, 같이 책을 읽던 이글은 그 현자가 멋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렸던 자신은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현학적이고 감상적인 시라도 써 보려고 했다가 너무 형편없어서 물에 씻어버린 양피지도 여럿 되었었지.

 

그 생각에 이르자 굳어있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형아, 술 마시자."

 

갑자기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 이글이 말했다.

 

'같이 마실래?'가 아니라 '마시자'인 만큼 이글의 손에는 글라스 두 개와 포도주 병도 들려 있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걸까, 안색은 굳었고 불안해 보였다.

 

매일 실없이 웃는 얼굴을 하던 이글이 저런 표정이라니.

 

아무래도 이상해서 서류를 하는 대신 같이 술을 마셔주기로 하고 다이무스는 책상에서 서류를 정리해 한쪽에 쌓아두었다.

 

이글은 의자를 가져와 털석 앉더니 글라스에다 와인을 콸콸콸 따랐다.

 

"무슨 일 있더냐?"

 

", 나 말이야-"

 

이글은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저만한 양을 저렇게 들이킨다면 한잔으로도 취할 텐데.

 

"난 형이 좋아. 형이 날 좋아하듯 형이 좋다는 게 아니야. 사랑해."

 

젊은 남자가 연인에게 할 법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다이무스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글라스에 술을 따랐다.

 

자신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인간이다.

 

방금도 이글의 고백을 듣고 하마터면 흔들릴 뻔 했으니.

 

자신은 가주가 되어야 한다.

 

감상적인 부분은 잘라내야 한다.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된다.

 

다이무스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형의 반응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이글은 자신의 손 옆에 칼이 내려꽂히자 섬뜩함을 느꼈다.

 

아름답게 세공된 편지칼이 손목 옆에 꽂혀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옆으로 움직였다간 오랫동안 검을 잡지 못할 위치였다.

 

"... 다이무스 형...?"

 

"기분 나쁘다."

 

다이무스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지극히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천천히 손을 떼었다.

 

"네가 제정신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이무스는 자칫 흔들릴 뻔한 자신을 다잡듯 말했다.

 

"설마 내가 네 말을 듣고 기뻐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몸을 숙이자 자신의 눈 앞에 불안하게 떨리는 이글의 눈이 있었다.

 

"두 번 다시는, 내게 가까이 오지 마라."

 

이글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고 다이무스는 열린 문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쓰러지듯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팔을 앞으로 쭉 뻗더니 정갈하게 쌓여있던 서류를 옆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종이는 팔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고 다이무스는 책상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머리를 들고 엎질러진 잔에 와인을 다시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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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마법계는 꽤나 치열했다.

 

모두가 열광하는 퀴디치 시합 결과가 예언자일보 2면에 실릴 정도로.

 

퀴디치를 제치고 예언자일보 1면에 실린 내용은 머글 태생 초능력자에 관한 의견으로 싸우는 해리 포터와 지니 포터, 그리고 헤르미온느 위즐리에 관한 얘기였다.

 

프랑스인들 정치 얘기마냥 갑론을박이 온 나라에, 온 마법계에 치열했지만 딱 한군데, 이 모든곳과는 상관없는 곳이 있었다.

 

 

 

 

“...예언자일보도 참 할 일이 없군.”

 

다이무스 홀든은 1면을 다 읽고 감상을 말했다.

 

그에게 있어 이번 1면은 그저 유명인들이 가정 불화로 싸운다더라 하는 가십 기사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옆에서 우아하게 포리지를 떠 먹던 벨져 홀든이 제 형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지, ?”

 

“...이렇게 순순히 아침을 보내게 할 리 없는데, 불안하군.”

 

하지만 겉보기만 봐서는 태평하기 그지없다.

 

혹시 모르지, 이글이 드디어...”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스런 새 소리가 들리고 부엉이들이 한데 얼키고 설켜 거대한 새 덩어리를 만들어 깃털을 흩뿌리며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드디어 뭐?”

 

실언이었다, 형아.”

 

깔끔하게 말하며 벨져는 토스트 한 쪽을 들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이글 홀든!”

 

이글!”

 

동시에, 슬리데린의 다이무스 홀든과 래번클로의 토마스 스티븐슨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항상 미안하다, 스티븐슨.”

 

“...다른 기숙사 일에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옆에서 보던 벨져는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적 증거는 없겠지만 이 소동의 주범은 자신의 동생, 홀든의 막내 이글 홀든이렷다.

 

이 망나니놈.

 

그리고 벨져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망나니라는 천한 말을 생각했다는 것을 반성했다.

 

원래라면 형과 함께 이글을 혼내야겠지만 올해 래번클로 반장으로 임명된 토마스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 해주니 뭐.

 

벨져는 이글과 같은 기숙사의 반장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뒤치다꺼리와 기타 잡무로 고생하는 토마스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 잠깐, 내년이면 형은 졸업하고 없을텐데, 다음 잔소리 담당은 나인가.

 

벨져는 미간을 꾹 눌렀다.

 

하늘을 베껴온 듯한 아름다운 천장과 말끔하고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각 분야에서 이름난 마녀와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교수진.

 

저녁이면 길고 넓은 테이블 위로 수십가지 호화로운 만찬이 펼쳐지는 연회장.

 

그리고 여기저기로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동료들과 재밌다는 듯 같이 소리지르거나 비명을 지르며 숨는 선배들, 후배들.

 

바닥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수많은 부엉이 깃털, 귀를 울리는 꽥꽥거리는 소리.

 

그리고 신이 나서 무어라 소리지르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제 형에게 잡혀서 혼나는 동생.

 

이것이 창립 이래 우수한 마법사와 마녀를 무수히 많이 배출하였으며 세상을 위협했던 볼드모트를 막아낸 마지막 격전지.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평화로운 아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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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선택지

2014. 10. 7. 16:55 | Posted by 호랑이!!!

눈을 뜬 곳은 어두운 곳이었다.

 

어둡고, 춥고,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곳.

 

주위는 횃불이나 낡은 등불이 비춰주고 있었다.

 

숲인가, 나무가 많다.

 

그러고보니 좀 익숙한 곳이다.

 

...가문 소유의 사냥터?

 

옛날에는 사람 사냥도 빈번하게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오한이 끼쳤다.

 

머리를 젓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려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깼느냐, 이글.”

 

“다이무스 형!”

 

펄쩍 뛸 만큼 놀라고 반가워 돌아보려는데 몸이 기우뚱하더니 기세를 못 이기고 결국 쓰러진다.

 

뭐야, 하고 보았더니 밧줄이었다.

 

밧줄과 거기 묶인 자신의 몸과, 그리고 딱딱한 나무 의자.

 

“형아, 이것 좀 풀어줘...”

 

조금 이상한데.

 

왜 형이 칼을 빼들고 있지?

 

그러고보니 저 앞에 사람 같은 것이 보인다.

 

머리에는 검은 자루를 씌우고, 무릎 꿇려서 손은 뒤로 묶고.

 

“...루이스...?”

 

그중 하나, 옷이 낯익어 말을 걸었다.

 

“이글 홀든? 이게 무슨 일이야?”

 

“나야... 모르지...”

 

이상한데, 몹시 이상한데.

 

“선배예요?”

 

맙소사, 옆은 토마스.

 

그리고... 나이오비...

 

“형,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줄 좀 풀어주면 안 될까? 나랑, 쟤들이랑...”

 

“네 머리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잖아! 내 상상력은 빈약하다구.”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 한 모양이군.”

 

다이무스가 말했다.

 

그러고는 이해를 도와주겠다, 며 루이스 쪽으로 다가가더니, 단번에 칼을 내리쳤다.

 

피가 분출되며 따뜻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형아...?”

 

“사랑한다고 해 보거라.”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다이무스가 말했다.

 

“누굴... 형을?”

 

이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형이 아냐.

 

형일 리 없어.

 

다이무스 홀든은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역사서보다는 기사도 소설책을 좋아하면서... 질려하면서도 꾸역꾸역 성실하게 초콜릿을 먹어주고... 때때로 시나 지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흘리는....

 

검이 올라갔다.

 

횃불에 은빛으로 반짝 빛나 이글은 정신을 차렸다.

 

“미친거 아냐?! 그만둬 다이무스 홀든!”

 

가엾은 토마스는 무슨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면서 떨고 있었다.

 

“너무하는거 아닌가, 형한테 미쳤다니.”

 

“형! 다이무스! 그만두라고 다이무스!!!”

 

서걱.

 

그리고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의 검날이 다시 빛을 반사했다.

 

제발, 안돼.

 

엘리가 나이오비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동화책을 읽어 달라며 양손으로 커다란 책을 들고 침대 위에 앉아 있을 텐데.

 

이글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해! 사랑해 형! 사랑한다고!”

 

서걱.

 

머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잉게 나이오비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실망이다, 이글.”

 

다이무스는 한숨을 쉬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나?”

 

“했잖아! 했잖아 미친놈아!”

 

이글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친했던 세 사람은 죽어버리고, 여태까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따르던 큰형은 손에 검을 들고 피를 묻힌 채 무엇이 잘못이냐는 듯 평온하게 말을 한다.

 

“저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날 사랑해서 하는 말이 듣고 싶은 거다. 빨리 말하거라, 나는 인내심이 없다.”

 

“...제발, 형...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쩌면.

 

다음은 레베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리비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쩌면 엘리나 피터나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겠지.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만, 이글.”

 

다이무스가 재촉해 왔다.

 

“사, 사랑해... 형, 사랑해, 진짜 사랑한다고!!!”

 

절박하게 소리 질렀는데, 어깨로 검이 찔러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음에도 신음소리는 흘러나왔다.

 

“형이 거짓말은 나쁘다고 누누이 얘기했잖느냐.”

 

사람 어깨에 칼을 꽂아 놓고서 안타깝다는 듯, 나쁜 아이를 야단치는 듯한 목소리로 혀를 찬다.

 

검의 날이 다시 반짝이며 빛을 반사했다.

 

이번에는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이글은 섬뜩해지는 느낌에 조금 더 필사적으로 다이무스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사랑해 다이무스.... 흑... 흐으....”

 

“사랑한다고? 정말로?”

 

다이무스가 역겨우리만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 앞에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맞추고,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진심이야.. 흑... 사랑해... 정말로...”

 

문득 불빛에 비친 다이무스의 눈이 정말 자신을 죽일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시선을 마주치기 싫었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좀 더 말하고 싶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정말로-”

 

“고맙구나 이글, 형은 기쁘다.”

 

다이무스가 웃었다.

 

치켜올라갔던 눈꼬리는 미미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졌고 입도 천천히 확실하게 웃는 모양이 되었다.

 

“기쁘다.”

 

푸욱.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소리가 들리고, 몸 가운데를 무언가가 가르고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고.

 

고통은 그 다음에 찾아온다.

 

이글 홀든은 모래바닥에 뉘여졌다.

 

이곳은 사냥터, 이 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다이글] 선물, 서투름

2014. 10. 2. 05:19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 도련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꽃이었다.

 

인근의 장미란 장미는 다 긁어모은 것인지 한아름도 넘는 꽃다발이 제 품에 안겼고, 방이 장미 화원이라도 된 마냥 장미로 가득차 온통 붉었다.

 

공사다망한 큰형은 종종 며칠씩 집을 비우곤 했는데 최근 들어 그런 날이면 이런 ‘선물’을 보내곤 하였다.

 

처음에는 새 옷(을 지을 재단사), 그 다음에는 최신 유행의 모자와 신발, 그 다음에는 은시계와 백금 시곗줄(아니, 크리스마스의 선물도 아니고 대체 왜?), 이오니아 산의 금빛나는 오렌지와 향긋한 포도주.

 

그리고 오늘은 장미라.

 

이글은 메이드가 나가자 품에 안았던 장미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툭 찼다.

 

한껏 보기좋게 벌어진 연한 분홍색과 붉은색의 꽃잎이 바닥에 흩어졌다.

 

막상 집에 붙어있을 때는 담소는 고사하고 저녁식사 외에는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주제에 출장만 갔다 하면 특별히 가족애라도 생기는 건가, 웃기지도 않아서.

 

이글은 특별히 싱싱하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골라 들고 한나에게 갔다.

 

“한나.”

 

“이글 도련님.”

 

“선물이야.”

 

가시를 쳐내고 잎을 잘라 다듬은 장미송이를 내밀고 한나가 앉으라는 얘기를 하기도 전에 테이블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털석 앉았다.

 

“형이 이상해.”

 

“다이무스 도련님이요?”

 

“응-”

 

작은형은 항상 이상했으니까 새삼 이상한짓 한 대도 이상하지 않다구.

 

이글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곤 최근 받았던 선물에 대해 줄줄이 말하곤 짤막한 의견까지 덧붙였다.

 

“꼭- 남자가 여자 환심을 사려고 하는 멍청한 짓 같잖아. 조만간 직접 쓴 사랑시와 함께 반지라도 배달되면 딱이겠어.”

 

“또 가볍게 생각하는 거죠? 만약 진짜면 어쩌려구요.”

 

“뭐 어때~ 형 성격에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사랑하는 걸로 만족한다면 그러라고 하지 뭐. 내 용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도 들어오는데.”

 

물론 내 용돈을 올려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이라며 시큰둥하게 앞주머니의 은시계를 꺼내 흔들었다.

 

진짜일 리가, 어디서든 인기 폭발하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이런 서툴러 빠진 짓을 할 리가 있나.

 

“조만간 비둘기 깃펜으로 쓴 사랑시가 도착하길 바랄게요.”

 

“뭐어-? 농담도!”

 

우웩, 기분 나빠.

 

이글은 킬킬 웃으며 다른 얘기를 꺼내려다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노크 소리부터 절제된 인간은 자신이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나, 들어오라고 했더니 익숙한 얼굴, 다이무스 홀든이 들어왔다.

 

“이글, 네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유모.”

 

“어어- 나 여기 있어- ...?”

 

다이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봤는데?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유모의 손에 들린, 자신이 준 장미.

 

아 설마.

 

아닐거야.

 

별거 아니잖아.

 

그 커다란 장미 다발과 방을 가득 메운 장미의 물결 속에서 딱 한 송이라고.

 

게다가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릴 적부터 키워준 유모인데!

 

아- 설마, 설마, 설마!!!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 내가 손수 널 찾아다녀야겠느냐.”

 

“나가, 나간다고.”

 

문을 닫고, 다이무스의 뒤를 따라가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화났다는 건 알겠다.

 

“...이글.”

 

“어, 어엉?”

 

“...장미 말이다, 싫던가?”

 

“에에, 그건 아닌데-.”

 

다이무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너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이 함부로 다루어진다니 썩 기쁘지는 않더구나.”

 

함부로~?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까 장미 다발을 떨어뜨린 것도 있겠다, 찬 것도 있겠다, 거기에 보모에게 장미 준 것도 들켰고.

 

지금 한창 열받은 인간에게 변명을 해 봤자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밖에 안 되겠지.

 

아까 돌아볼 때 보니까 눈빛이 흉흉하던데 저기서 더 긁었다간 최소한 오늘 저녁은 다 먹었다.

 

다이무스는 팔에 달라붙는 이글의 팔에 힐끗 내려다보았다.

 

“형아야~”

 

다이무스는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가 들어가 착 달라붙는 것 같은 이 목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좋아해?”

 

농담의 껍질을 뒤집어쓴 속에는 이쪽을 바로 바라보는 시린 눈동자가 있었다.

 

심지어 떠 보는 것도 아닐 터, 의뭉을 떠는 것이다.

 

거기에 저 좋냐는 물음은 형제로서 갖는 당연스러운 호감을 묻는 것도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자신이 이것을 안다는 것을 이글도 안다는 것.

 

슬쩍 흘려버리는 일 따윈 불가능했다.

 

“...오늘 저녁은 다진 오리로 속을 채워 구운 송아지와 무화과를 넣은 케이크다.”

 

“형, 다이무스 형.”

 

이글이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었지만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질문을 무시하겠다고?”

 

“그렇다.”

 

이글은 다이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째려보듯 날카로워진 눈이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다이무스 홀든, 저 천하의 냉혈한이 지금 자신의 질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 아, 이거 정말 재밌는데.

 

놀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다만 형이 자신이 놀렸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만은 저도 모르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좋겠지만 상처 입은 짐승마냥 달려들어 공격이라도 하면 저는 끝이다.

 

“형아~.”

 

“...”

 

“혀엉아아~”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처해하는 것이 다 보인다.

 

회피하지 않고 무엇에도 당당하게 맞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한낱 망나니 동생의 질문에 쩔쩔매다니, 이거 꽤 기분 좋지 않은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던 이글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밝은 식당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시치미를 떼고 제 자리에 앉아 소스에 적신 송아지 요리를 덜어내는데 사용인 중 하나가 다이무스에게 무어라 전했다.

 

“뭐야, 형?”

 

“크리스티네가 물건을 전하러 왔다.”

 

헹, 퍽이나.

 

크리스가 진짜로 전하고 싶은 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겠지.

 

형이 그걸 모를까봐서- 아니, 모를지도.

 

모를거야 저 둔한 인간은.

 

이글은 속으로 히죽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크리스가 어떤 치마를 입고 왔을지도 궁금하지만 형아를 좀 더 놀려줄 것 없나 하여.

 

다이무스의 방문을 열었다.

 

빛깔 좋은 오크목의 책상이 깊은 색을 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묵직한 펜이 있었고 양피지도 펼쳐져 있었다.

 

서류- 라기엔 빛깔이 좀 다른걸.

 

아니, 양피지도 아니잖아.

 

그냥 종이다.

 

그것도 빨간 하트와 리본 그림이 있는.

 

한창 아가씨들과 연인들에게 인기 좋다는 그거다.

 

“우와, 징그러.”

 

입 밖으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그 냉혈한, 목석인 큰 형이 아기자기한 가게에 가서 이런걸 고르고 있다고?

 

“기분 나빠.”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집듯 손끝으로 편지지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는데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그것을 잡아채 찢었다.

 

“이글.”

 

그 목소리에 이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형-...”

 

“식사중에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아니, 형, 이건 말이야...”

 

“주인 없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

 

다이무스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읽어낼 수 없는데 냉기가 흘러나왔다.

 

다이무스는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더니 이글을 문 밖으로 떼밀었다.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안에서는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이글은 그답잖게 일찍 일어나 식사 자리로 갔다.

 

여느 날처럼 다이무스는 셔츠와 조끼를 입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

 

다이무스는 어제 같은 무표정으로 이글을 바라보았다.

 

“그... 있지... 잘 잤어?”

 

쭈삣쭈삣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더니 대답 대신 신문을 거칠게 펴 든다.

 

“있지이, 내가 어제 기분 나쁘다고 한 건 말야...”

 

“되었다.”

 

“...형이 그런 편지지를...”

 

“되었다니까.”

 

신문이 파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쓸 줄은...”

 

파각.

 

신문이 반으로 접혔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형! 미안하다고! 내가 뭘 잘못했던!”

 

다이무스는 마시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네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먼저 일어나마.”

 

다이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서재로 갔고, 이글은 다이무스의 방으로 갔다.

 

아직 메이드가 청소하기 전인 방은 평소보다 어수선했고 바닥에는 나무판 조각이 널려 있었다.

 

이글은 벽난로를 보았다.

 

타다 만 종잇조각에는 빨간 하트와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타다만 나무 위에는 어그러지고 녹은 은 목걸이가 있었다.

 

이 근처에서는 구하기 힘든 모양으로, 이글의 눈과 같은 색의 보석이 펜던트로 매달려 있었다.

 

형이 몹시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편안히 기대 응석을 부리던 관계가 마치 이 목걸이처럼, 자신의 손 안에서 우그러진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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