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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이글] 선상에서

2017. 3. 29. 15:50 | Posted by 호랑이!!!

여기에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

 








다이무스는 배에 올랐다.

 

대개의 시간은 서류 작업이나 가상 전투를 위해 쓰다보니 출장을 다녀오는 것은 간만이다.

 

본디라면 우편으로 계약서만 보내 처리할 일인데 이렇게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역시 교통이 발달한 덕이지.

 

이 배를 타고는 3, 배에서 내려서는 자동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겨우 일주일 남짓한 기간 안에 오고갈 수 있다니.

 

다이무스는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헬리오스에서 오셨군요,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방이 있습니다.”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서두르는 듯 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짐작되는 대략적인 무게, 성격, 주로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렸다.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긴 은발이 흐트러진, 낯익은 사람이 배로 오를 때 쓰는 계단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 안녕!”

 

“...너냐,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귀여운 동생을 만났는데 그게 다야?”

 

네가 배를 탈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지.”

 

그는 티켓을 검표원에게 내밀었다.

 

연합의 이글 홀든, 확인하였습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시면 객실이 있습니다.”

 

나도 볼일 보고 돌아가는 길이거든? 형 방은 어디야아? 나 놀러가도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티켓을 확인했다.

 

“...내 방으로 와라. 특실은 아니지만 그 방보다는 나을 거다.”

 

형 최고야!”

 

특실은 아니라고 했지만 다이무스가 받은 방은 꽤 넓었다.

 

1인실이었지만 물건들은 나름대로 여유있게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이글은 무언가에 흠뻑 젖은 부츠를 벗어던지고 가방에서 편한 옷을 찾았다.

 

아직은 안 된다.”

 

, 왜애.”

 

저녁 시간이 곧이다. 파티는 아니지만 단정하지 못한 차림은 안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짐 속에서 빗을 꺼냈다.

 

우선 그 머리부터 어떻게 하도록 하지. 머리끈은 있나?”

 

아니! 안 가져왔어!”

 

이글은 방긋 웃으며 거울 앞에 있는 의자에 털석 앉았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에 서서는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급한대로 땋아 주도록 하지. 나중에 내려서는 머리끈을 마련하던가, 아니면 아예 이 머리를 잘라라.”

 

목 위에 있는 거?”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두피에 돋아난 이 털 말이다.”

 

식사 예절은 제대로 알고 있겠지, 나이프가 어떻고, 사람과의 대화가 어떻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옷차림은...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서 귀를 닫아버린 이글은 거울을 보았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도료를 써서 비슷하게 만들어진 흉터에, 겉만은 본체와 같은 모습.

 

거울 너머로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투박한 손가락이 움직인다.

 

익숙하게.

 

이글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거냐.”

 

형이랑 있는 게 좋아서!”

 

[이글다이글] 클론 이글과 이글이 만났다

2017. 3. 27. 19:10 | Posted by 호랑이!!!

황혼의 도시에도 밤은 온다.

 

유달리 어둡고, 빛이라고는 겨우 달밖에 없는 그런 밤이.

 

이상한 일을 조사하느라 시간이 늦어진 탓에 이글은 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신을 사칭한 편지가 오질 않나, 갑자기 얼굴만 알던 사람이 아깐 왜 그랬어하고 말하지를 않나.

 

심지어는 엘리 꼬맹이가 아찌 머리 또 묶었네!’하고 알은체를 해 온다.

 

이 도시에서 수상쩍은 일을 한다면 역시 그 집단밖에 없지.

 

안타리우스, 뻔하다고.

 

그러나 목적이 뭘까? 하필 자신을 복제한 이유는?

 

걷다보니 문득 벽돌담에 엷은 빛줄기가 스쳤고 이글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검을 꺼내 뒤돌았다.

 

아슬아슬하게, 찔러오는 검이 막혔다.

 

안녕, 원본.”

 

낯익은 얼굴에는 익숙하지도 않은 칼질로 억지로 긁어내린 것 같은 흉터가 있다.

 

이 정도는 막는군, 그래, 그래야지.”

 

이글은 검을 넣고 손을 들었다가 과장스럽게 마구 팔을 문질렀다.

 

으햐아, 목소리는 난데 벨져 형 말투잖아? 으엑 징그러! 아 소름끼쳐, 끼친다구!”

 

다른 이글은 드럼통 위에 걸터앉았다.

 

원본은 그렇게 행동하는군. 좋아, 다음번에는 그렇게 굴어 보지. 좀 더 답게.”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볼일인데?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더니, 진짜의 자리를 놓고 죽고 죽이고 싶은 거야?”

 

아직은 아냐.”

 

아까 그건 인사, 인사.

 

차갑고 느릿한 목소리로, 그 이글은 다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난 겨우 4개월이란 말이야,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지.”

 

그래서, 나는 궁금해.

 

왜 너의 가장 큰 관계는 블레이드... ‘큰형인지.

 

무슨 소리야?”

 

인간에게 커다란 관계란 가족과 애인이 주라고 하던데, 어째서 너는 그 커다란 관계를 한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는 거야?”

 

계란은 한 바구니에 쌓지 말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상하다고.

 

어째서 둘 사이에는 그렇게 강한 믿음이 있고, 이해라는 것이 있고, 기타등등 많은 것이 있는 거지?

 

이게 사랑이야?”

보통 연인 간에는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나?”

그럼 는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이글은 그 이글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장식 술, 낯익은 크기와 모양,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알 것 같은.

 

공기의 긴장이 팽팽해진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예리해지고 시선이 따끔거리며 닿는 것이 느껴졌기에 다른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희미한 달빛에 비쳐, 이글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네가 형과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어?”

 

, 기분 좋은 반응.

 

다른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형이니까.”

 

이글의 검이 발사되듯 뻗어나갔다.

 

다른 이글은 재빠르게 드럼통을 걷어차고 자리를 피했다.

 

“...웃기지 마, 이 빌어먹을 호문클로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글은 한 단어씩 씹어 뱉었다.

 

난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야.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라니까.”

 

아기, 4개월짜리 아기라구.

 

그 이글은 낄낄 웃었다.

 

그러니까, 좀 빌려갈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고 싶다구.

 

어째서 그 사람은 내 편지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만이 단번에 나와 그를 알아보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에게 그렇게 짙은 관계를 느끼는지.

 

아아, 그 사람이 아니구나. -”

 

칼이 이글이 있던 곳의 뒤편 벽에 박혔다.

 

내 형이야. 이 살덩어리 자식이-”

 

뒤로 물러선 이글의 은발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이젠 내 거야

 

 

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

 

.”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

 

?”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홀든의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검을 받는다.

 

그 검은 지금까지 썼던 목검이나 가검, 혹은 날을 무디게 만든 예식용 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홀든의 이름 아래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글 홀든이 검을 받을 때 반대했다.

 

이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글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한 젊은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위의 두 형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다이무스는,

 

네가 그만한 무게를 보여주지 않아서다. 어른스럽게 굴어라

 

벨져는,

 

남들이 널 판단하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선택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글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벨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참 이글에게 검을 주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한 안으로 들어가서 대뜸 가장 무겁고 긴 검을 채어 나왔다.

 

왜 하필 가장 길고 무거운 검이었나.”

 

이글은 남들이 말하는 종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경써본 적 없었지만, 다이무스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답군.”

 

그래서 다이무스가 짧게 뱉은 마지막 말에는 상처받았었나 보다.

 

아니, 상처 같은 거창한 것 말고, 그냥 한 대 맞은 정도

 

...라고 이글은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글이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수많은 검이었다.

 

전부 홀든을 위해 만들어지는 고급품의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특기에 맞게 홈이 더 패어있다던가, 모양이 다르거나, 날이 셋 달리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가장 이글의 눈을 끈 것은 검집에 날개가 음각되어 가죽끈과 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을 끈 것은 검신이 두텁고 무게감이 강한 짧은 검.

 

어쩌면 그것이 이글에게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글은 그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을 집었다.

 

그는 절대로 벨져처럼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살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옆에 나란히 서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길고 무거운 검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검을 쉽게 잘 다룬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처음에는 검이었던 것은 계속 바뀌었다.

 

형을 따라 영국으로 간다면, 다른 세력에서 나 자신을 증명한다면, 나 혼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목표가 바뀔수록 마음 역시 바뀌어갔다.

 

 

 

 

 

 

어느 날 이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본가로 가자.”

 

“...얼씨구, 그 말을 왜-애 벨져 형이 할까나...?”

 

벨져는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망나니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말끔한 집이군.

 

덧붙여 집 안에서 셔츠는 고사하고 속옷이나 걸칠까 싶던 녀석은 의외로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서 네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축하? 무슨 축하? 아버지... 하암, 승진이라도 하셨어? 아니면 어머니? 아니면 삼촌들이나 뭐 문하생이 어디 나가서 훈장이라도 따 왔대...?”

 

태평한 척 하품을 하는 저 머릿속에서는 아마 최근 신문이나 벨져 자신, 혹은 다이무스 형의 태도에서 본가와 관련된 무언가가 없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 형인가? 그 형 요즘 외출하고 출장이 잦더라니.”

 

그래.”

 

, 축하는 축하고. 어차피 트와일라잇으로 돌아올 거 아냐. 난 됐어.”

 

벨져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글에게 어떤 말을 해야 데려갈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훈장이라던가, 어디에서 공적을 세우거나 하는 시시한 일이 아니다.”

 

! 하하하하, 형이 그런 말을 하니 되게 웃기네!”

 

이 웃음은 꽤나 진심이다.

 

이글은 폭소를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탁탁 털었다.

 

그럼 뭔데?”

 

결혼이다.”

 

벨져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들었는데 말이야, ?”

 

상대는 아버지 아는 분의 막내딸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양질의 결합인데 그 상대가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더군.”

 

“...5분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바깥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이글이 들어가고, 안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딴에는 제 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저 안쪽에서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지.

 

정확히 4분하고 45초가 지나고 이글이 뛰어나왔다.

 

벨져와 이글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용하군.”

 

뭐가?”

 

그런 여자랑 형은 어울리지 않아, 못해도 3일이면 형에게 질려서 결혼을 후회할 걸, 형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왜 하필 다이무스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형은 성실하니 마음이 없더라도 가정에 충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을 떠난 너나 기사단에 뼈를 묻을 나와 결혼할 수는 없잖느냐. ...라고 할 거잖아.”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다들 이글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하고 우려를 표했기에 이글은 축하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고, 행사를 하고, 연회를 즐기고, 그 모든 일이 끝나 쉴 즈음은 밤이었다.

 

이글은 방을 나섰다.

 

갑주도 없고, 장갑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맨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문을 열자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탄야의 독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운 것이 열린 문으로 흘러넘쳐서 이글은 잠시지만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다이무스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형의 일인데, 와야지.”

 

다이무스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간혹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서류나 편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술병이 놓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잔은 없고,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잔은?”

 

마시다보니 필요 없어져서 씻으라고 내놓았다.”

 

이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방이 어둡다.

 

이글은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

 

선물은 없어. 그야~ 나 형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도 나한테 집 얘기는 해주지도 않고~”

 

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잖느냐.”

 

아하하, 그랬나?”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이글이 웃을 때마다, 다이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청소한지 오래된 물건을 건드리듯 무거움이 피어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있잖아, .”

 

뭐냐.”

 

사람이 결혼하면, 어른스러움이 늘어나는 걸까.”

 

다이무스는 그 말에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나도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데, 그럴 리 없겠지.”

 

형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고?”

 

나는?이라고 이글은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다이무스가 이어 말했다.

 

너는... 그렇게나 다 큰 것 같은데.”

 

“...내가, 어른 같아?”

 

가장 무겁고 긴 검을 휘두르고,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내고 있으니.”

 

다이무스는 이글 쪽으로 새 병을 내밀었다.

 

마실 테냐.”

 

이글은 그 병을 받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시다가.

 

...아니, 사실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대화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글이 입을 열었다.

 

몇 년이나 망설인 말이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을.

 

다이무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만약에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바뀌었을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더라면.

 

다이무스는 몇 가지 가능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영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가 말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무거운 향에 익사하고 싶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글의 발은 움직였고,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에서 맑은 바람이 꽃과 풀의 향기와 탄산수에 넣는 레몬의 향을 싣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공기다.

 

차라리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낸다는 내가 형에게 묶여서 말조차 하지 못해.”

 

차라리 어리다고 해줘.

 

결혼하지 말라고 울면서 떼쓰게 해줘.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이글은 코와 입을 눌러 숨을 참았다.

 

 

 

[다이글] 살인하는 새 조롱하기

2016. 6. 22. 23:41 | Posted by 호랑이!!!

이글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에 있었던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역시나.

 

옆자리의 체온은 사라졌지만 체향은 남아서,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묻었다.

 

손으로 자주 잡는 베개의 옆 부분은 쇠와 가죽 냄새가 배었고, 머리가 닿는 부분에는 다이무스가 애용하는 샴푸와 화장수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아랫부분에는.

 

피 냄새

 

말라붙으면, 씻으면, 쉽게 사라지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떨어지지 않는.

 

아직 잠이 온다.

 

눈을 감고 설핏 잠들려는 찰나에 달그락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크지 않아서.

 

일부러 소리를 작게 하려고 노력하는 티가 나는 소리라 더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이어 들리는 발소리는 다이무스의 것이었다.

 

이어 풍기는 것은 다이무스와 아침까지 함께 보내며 익숙해진 피 냄새였고.

 

다이무스는 입었던 것 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 옷을 벗어 옆에 내려놓다가 다시 가져가 목덜미 같은 곳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이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일어나서 이번 주에만 벌써 두 건이잖아, 너무 많은 거 아냐?’라고 하면 놀랄까?

 

실행에 옮기는 대신 이글은 머리를 들고 욕실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다이무스의 칼에 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얼마 전에 엿들었던 방해물일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하자면 회사의 적들.

 

물소리는 금방 그쳤고, 욕실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진한 샴푸 향이 흘러나왔다.

 

“..., 일찍 일어났네.”

 

반쯤 감은 눈을 부비며 베개에 머리를 기대자 아직 물기가 남은 따뜻한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라, 이글.”

 

나른한 미소가 입가로 퍼졌다.

 

졸음을 이기고 가늘게 눈을 뜨자 다이무스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화악 휘날리는 것이 다이무스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있잖아 형아, 방금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날렸.. 후아암...”

 

일어날 거냐?”

 

여기서 보니까 꼭 날개 같아.. 흐흐, 새 날개.”

 

아마도 다이무스는 실없는 소리, 라고 일축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가서 식사를 만들 것이다.

 

다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들며 이글은 생각했다.

 

새라면 윙컷을 당한 새겠지

 

살인하는 새.

 

그리고 의뭉을 떠는 나.

 

 

[다이글] 봄비

2016. 4. 27. 21:11 | Posted by 호랑이!!!

비가 내렸다.

 

하도 조용히 내려서 내리는 줄도 몰랐던 것이 집을 나서보니 내리고 있기에 무심코 손을 내밀었더니 따뜻하여 내심 놀랐다.

 

과연, 봄이구나.

 

네가 태어난 봄이다.

 

꽃들은 피어나고 온갖 생물이 자라고 생명을 얻는 봄이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검은색, 낯익은 차였으나 내가 탈 일은 그렇게 많지 않던.

 

내가 탄 차는 비 내리는 거리를 지나갔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벨져 녀석이 웬일로 갑주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녀석이 언젠가 갑주가 아닌 것은 옷이 너무 가벼워서 입은 느낌도 나지 않더라고, 지나가는 말로 투덜거린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

 

너는 꽃에 파묻혀 있었다.

 

꽃들이 피어나는 때에, 피어난 꽃들은 목이 잘려 네 곁에 누워있다.

 

하얀 꽃들 사이에 조그만 풀꽃들을 빨간 리본으로 묶은 것이 눈에 띄었다.

 

리본은 익숙한 것이었다.

 

아마도 네가 예뻐한다는 그 꼬마 것이겠지.

 

그 애는 지금도 저 한쪽에서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싫어안돼만 반복하고 있다.

 

네 옆에 꽃 한 송이를 더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일터로 가려고 했지만 조노비치가 며칠 쉬다 와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도 갈 생각이었으나, 어쩐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지 말라면 좀 가지 마’, ‘언제까지 일만 할 거야?’. ‘아 좀! 이 일에 미친 인간아!’.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저 말밖에 없구나.

 

이렇게 가지 않는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가지 않았을 것을.

 

차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의 비는 이렇게나 차가운데.

 

차가울 터인데.

 

차가워야 할 텐데.

 

[다이글] 날이 덥다

2016. 4. 25. 20:44 | Posted by 호랑이!!!

날은 이제 더워지고 있었다.

 

말수 적은 피터라도 연합으로 들어올 때는 더워가 한 마디 추가되었고 빙결 능력자인 토마스나 루이스 곁에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간식으로 과자나 핫초콜릿 보다는 아이스크림이나 셔벗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그러나 이글로서는 셔벗이나 능력자의 서늘함으로는 뭔가 만족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여름이었으면 마음껏 살을 태우면서 땀을 흘릴 텐데, 뭐냔 말이다 이 애매한 날씨!

 

...이 말에는 지나가던 엘리가 봄이야 봄!’이라며 지나갔지만.

 

이글은 이 때까지는 선선한 저택을 떠올렸다.

 

널찍하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을 열면 얼마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데다 정원이며 구석구석에 녹음이 드리워졌지.

 

어쩌면 몸을 움직이느라 몸에 열 떨어질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소하게 꾸며졌을까.

 

...어쨌거나 저택이었다면 정원 가득하게 심어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트와일라잇 광장에는 울창하다고 부를 만 한 나무숲이 없었고, 때문에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이무스의 집은 깨끗하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잘 정돈되었다 정도로는 부족하고, 어딘가 지나치게 청결해서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서늘함이 있다.

 

비록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는 작은 방이지만 침대는 꽤나 널찍하고 나뭇잎이 해를 가려줘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아... 시원해...”

 

이글은 땀에 젖은 채 침대에 누우려다 마악 퇴근한 참인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던 다이무스의 눈총 아래 찬물로 몸부터 씻고, 샤워가운 하나만 입은 채 차게 식은 시트 위에 누웠다.

 

몸의 열기가 한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는 잘 말리라니까, 감기 든다.”

 

타박하면서도 다이무스는 쉴 참이라며 그 옆에 누웠다.

 

달그락, 얼음이 부딪히는 유리컵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만으로도 서늘하다.

 

눈조차 뜨지 않았지만 익숙한 체중이 푹신한 침대를 누른다.

 

이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좋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운데 이번 여름에는 정말 푹푹 찌겠어. 여름에는 매일 와야겠는걸? 맥주라도 한 캔 사들고... 형이 맥주를 마시던가? 형은 맥주보다는 와인 파였지? 그렇지만 형이 병맥주를 들고 마시는 건 왜인지 멋있을 거 같은데... , 듣고 있어? . , 다이무스 형아?”

 

“...듣고 있다.”

 

아이구 그러세요, 뭘 듣고 계시길래 질문에는 대답도 없어?”

 

다이무스는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가 이내 다시 감았다.

 

.”

 

형은 참.”

 

이상하다니까, 하는 뒤의 말이 흩어졌다.

 

 

철그렁, 사슬이 흔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이글은 제 손목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어떤 질 나쁜 장난인지 알아차리려는 듯 힘을 주어 당겨보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일 일까나?”

 

, 어제 일을 돌이켜 보자.

 

웬일로 벨져 형이 찾아와서, 휴가를 받았으니 형제끼리 꽃이나 보러 가자고 했지.

 

큰형이 감상에 젖은 모습을 보고 놀려나 줄까 싶어서 찬성했었고, 다이무스 형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한적한 곳으로 갔다.

 

처음에야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이 감상적인 인간이 어릴적부터 한 번도 제가 원하는대로 고집 부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의 야근도 그다지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리라 지레짐작하고 그만두기로 했었고.

 

한창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며 반은 강제적으로 형들이 제공한 고급 술을 부어라 마셔라 먹이고 또 먹고, 웬일로 싸움도 없고 서로 싫은 소리도 없이 실컷 즐겼는데... 역시 독한 술이었는지 잠이...

 

어째서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

 

이글은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벨져 그 이기적인 인간이 큰형 위문이니 뭐니를 얘기할 때부터?

 

다이무스 그 고집불통이 빠져나가지 않고 납치되어 준 데부터?

 

우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작고,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방치된 지 몇 달은 되었을 것 같고... 나 때문에 급하게 치운 모양이네~?

 

작은 창문조차 없는데다 저 구석에 있는 문은 아마도 화장실이겠지.

 

방 안에는 이글이 누워있는 1인용 철제 침대와 침대 옆 협탁 외에는 가구조차 없었다.

 

철로 뼈대를 짠 위에 매트리스 한 장이라니, 튼튼함만 생각하느라 편안함은 생각하지 않았나 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지 협탁 위에는 등에 담긴 촛불이 하나 방을 밝히고.

 

몸을 살펴보면 술이 아니고 약이어서인지 속이 조금 울렁거렸으나 이 정도는 몇 분 있으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손에 채워진 수갑은 신체강화 능력자도 구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이의 사슬 길이는 짧지 않아서 일상생활이라면 할 수 있다.

 

심지어 짧은 도라면 어찌저찌 사용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고.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져 있었는데 매달린 쇠사슬의 길이는 저만치에 보이는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2미터가 조금 넘었고 쇠로 만들어진 튼튼한 침대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 다리와 이걸 분리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침대 다리와 단단히 붙어 있고 침대 다리는 또 바닥에 고정되었다.

 

침대에 앉아 몸을 숙여 살펴보던 이글은 열쇠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이무스 혀~~”

 

대상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야? 전기도 없고, 촛불이라니!”

 

깨어났군. 배가 고픈가? 아니면 목이 마른가?”

 

수갑 말인데~ 형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이야, 놀랐지 뭐야?”

 

다이무스는 문을 닫고 기대 섰다.

 

이렇게 묶어둘 거면 망사 스타킹에 빨간 힐이라도 신어 주라~”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군.”

 

할 거면 잘 조사했어야지, 이거 잘못 긁히면 상처가 난다고. 요즘에는 안에 천이나 털이 덧대인 것도 있구.”

 

조만간 오스트리아로 이송될 거다.”

 

일부러 서로 다른 소리만 하던 그 신경전은 다이무스의 승리였다.

 

“...형이 그걸 용납했다고?”

 

내가 잠시 눈감아 주었던 것은 네가 그 뒤로 이어지는 책임도 짊어지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네 방종에 따라온 책임 중 하나일 뿐이다.”

 

“‘-중 하나’? 그럼 다른 것은?”

 

네 목숨이다.”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성큼성큼 이글 가까이로 걸어갔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 거냐. 매번 새로운 능력자들이 합류하는 이 국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던가? 벨져의 기사단은 하나의 패고, 나는 오스트리아와 가문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너는 지금의 방해물 자리에 앉아 있다.”

 

이글은 이를 사려물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 너무들 하시네~ 지금의 방해물은 언젠가의 패다, 그걸 고려하지 않을 리 없잖아? 강한 적은 강한 패가 된다, 그렇지?”

 

그러나 연합은 우리 쪽에 안겨주는 손실이 너무 크고, 너는 그 전력이 되는 사람이기에 가만 둘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우리’? 형의 그 우우리이가 누군데? 가문? 나라? 회사?”

 

기가 막히다는 듯 이글이 물었으나 다이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이글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말해줄 수 없다.”

 

정말로?”

 

다이무스는 이글의 눈을 피했다.

 

그 순간, 이글은 덤벼들어 다이무스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검과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혀 울렸다.

 

이글은 그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그의 팔을 누르고 양 손목에 감긴 사슬로 그의 목을 눌렀다.

 

열쇠 내놔.”

 

손목 사이의 사슬 길이를 더 짧게 해야겠군.”

 

목 대신 손목의 힘줄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쓸 수 있을 만큼 써야하지 않겠어?”

 

벨져가 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군, 너를 속인 것이 미안하다며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

 

이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벨져 형도 한통속이었다 이거구만? 꼴에 양심이 있는 척이라니, 웃겨 죽을 것 같네.”

 

벨져도 나도 네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다.”

 

정말 그러면, 내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지금은 날 놔주지 않을래?”

 

이글이 한쪽 팔을 놓아주자 다이무스는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는가 싶더니 이글의 얼굴을 잡고 몸을 뒤집었다.

 

재빨리 뒤로 뛰어 침대 너머로 넘어간 이글은 손목에 차고 다니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묶었다.

 

이 안에서 형이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일반적인 검보다 몇 배는 길고 몇 배는 무거운 걸, 이 좁아터진 곳에서 휘둘렀다가는 짐밖에 되지 않는데!

 

묶였다지만 이쪽이 훨씬 유리해.

 

이글은 사슬 묶인 발을 휘둘렀다.

 

다이무스는 발을 피하고 이어 날아오는 사슬을 뒤로 물러서 피했다.

 

함께 공성에 참전한지도 꽤나 오래 되었고, 서로에 대해서라면 자신을 보듯이 샅샅이 알고 있다.

 

머리를 제대로 써서 덤빈다면 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이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 즈음, 이글은 침대 위를 뛰어넘어서 몸을 날렸다.

 

봐라, 일단 달려들고 보지.

 

다이무스는 허리춤의 검을 꺼내 제 앞에 꺼내들고 버티고 섰다.

 

이글은 칼등을 누르고 곡예라도 하듯이 짚었고 다이무스는 검에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냈다.

 

내동댕이쳐진 이글은 뒤로 굴러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발에 묶어둔 사슬이 역시 너무 긴 건가.

 

다이무스는 혀를 차고는 사슬 아래에 발을 걸어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이글은 사슬이 당겨지자 거기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날아와서는 다이무스를 다시 타고 눌렀다.

 

침대 옆이라 길이가 남는 사슬은 다이무스의 다리를 묶고 있었다.

 

“...하아, ... 두 번이나 나한테 위를 내줬네?”

 

즐거웠다며 이글은 다이무스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우선 제 발목을 죄는 것을 풀어놓고 손목의 수갑도 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능력자용 수갑이라 그런가 묵직하게 철그렁 소리가 났다.

 

, 이것 봐. 역시 상처가 났어.”

 

“...아직이다 이글.”

 

뭐어?”

 

정말 포기할 줄 모르네!

 

발목도 묶어 뒀고, 이제 유유히 탈출할 차례, 인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글의 눈동자가 그 쪽으로 돌아갔다.

 

, 작은 형? 벨져?! 어떻게 여기...”

 

벨져는 예상했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글은 일어나려 했지만 다이무스의 손이 그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한번 더 의심했어야지.”

 

벨져는 주먹을 휘둘렀다.

 

 

[빅터이글] 그 사람을 떠올리는

2016. 1. 26. 02:35 | Posted by 호랑이!!!

빅터의 키가 컸다.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 적어도 몇 피트는 더 커서 이젠 이글이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였다.

 

머리는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듯 짧게 잘라 뒤로 넘기고 공성전의 상처가 뺨에 남아서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빅터는 러닝셔츠에 겉옷 하나만 걸친 그 큰 몸을 카페테리아의 야외 테이블의 작은 의자에 구겨앉아서는 어릴 적에는 써서 싫다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글은 새삼 어릴 적의 얼굴을 그의 위에 겹쳐 보다가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식사는 하고 다녀?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러는 형은 담배까지 피면서. 몇 파운드는 빠진 것 같아.”

 

피자라도 시켜 줄까?”

 

됐어.”

 

이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길게 연기를 뱉었다.

 

빅터는 그 연기들이 제 가까이로 오지 못하게 하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눈동자를 굴려 이글의 혓바닥이 사탕 막대라도 물듯 가는 막대를 감싸 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보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다가 사례가 들리자 이글이 깔깔 웃었다.

 

그래, 이럴 때 난 네가 귀엽더라고.”

 

이글은 빅터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귀여운 거겠지.”

 

내가 연상시키는 누군가.

 

빅터가 노려보자, 이글은 배실배실 웃음을 띄웠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그 표정도야.”

 

“...”

 

이글은 커피자욱이 남은 빅터의 옷을 잡아당겼다.

 

내 집에 가서 세탁할까? 더러워졌는데.”

 

빅터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인상을 쓰자 이글은 샐쭉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걷다가 이글은 그를 툭 쳤다.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데 포기 못 했어?”

 

아직 몇 년밖에 안된거야.”

 

이글은 그 답에 다시 깔깔 웃으며 길쭉하고 가느다란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다이글] 독

2016. 1. 4. 02:14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 홀든에게 이글 홀든이 어떤 이냐고 묻거든 답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계속 걱정을 끼치고, 귀찮게 굴고, 제멋대로에, 귀족으로서 책임감이라고는 깃털 한 장의 무게만큼도 없는 녀석.


그러나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답이 이어 나오고 있다.


너는 달콤한 독이다.


미련한 내가 가느다란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것을 핥아내면 내 목을 틀어막고 내 심장을 꽉 쥐어내는 못된 독.


마치 귀찮다는 듯이 툭 던지는 너의 한 마디 말과 경박스럽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가는 짧은 네 손.


한 방울 한 방울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닥쳐와 나를 속에서부터 잠식한다.


나는 더 목말라하고, 나는 더 갈구하고, 원하고, 나는 더, , -.


나는 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것을 약해지는 것이라고 느꼈다.


마음이 약하면 행동이 분별없어지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


충동적으로 아버지에게 이글은 아직 어리고, 내가 그만큼의 일을 할 테니 가만히 두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후회했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보내고 불과 일주일만에 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 우연히 들었는데 말이야~ 아버지가 나 혼내려는거 큰형이 막아줬다며~? 하하! 웃기네 이거!]


웃기던지 말던지.


충동적인 일을 하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게 더 우습다.


달콤하게, 마음 깊은 곳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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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인가- 체감이 확 되네.”

 

이글은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 끝이 얼어서 톡톡 부러뜨리며 투덜거렸다.

 

빅터는 고집을 부려 공장을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글 보다는 집에 일찍 와서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던가 물을 끓여놓는다던가 하는 일을 했다.

 

야학도 계속 다니고 있어서 이글은 그 점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저랑 닮은 이 꼬마는 공장을 그만두고 낮에 학교를 다니게 할 만큼 저를 아직 못 믿고 있지만 그래도 제가 가출할 즈음보다 야무진 모양이다.

 

빨리 크리스마스가 되면 좋을 텐데, 그렇지?”

 

“...별로, 그러면 포장 일이 느니까...”

 

그러고보니 발렌타인에 초콜릿을 받았는데 그것조차 자기가 포장한 거라고 했던가.

 

이거 안쓰럽네.

 

그건 그거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스노우볼이라던가, 새 장갑이라던가.”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이글-........?”

 

~? 글쎄~ 좋은 술도 좋고, 뭐든지 재미있을만한 거?”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 무릎에 당연하다는 듯 올라와 앉는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빅토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솜털이 보송보송했는데 이제는 그 티를 벗고 제법 자라서 이따끔은 몸은 자라고 머리는 덜 큰 청소년기 같은 티를 냈다.

 

빅터는 의자에다 묶어둔 고양이 낚싯대에 바람을 보내 흔들었다.

 

거기 냅다 달려가는 빅토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글 쪽을 향했다.

 

벌써 크리스마스 얘기를 해?”

 

미리미리 해 둬야지.”

 

아 그건 그거고.

 

이글은 품에서 공책을 몇 권 꺼내 내밀었다.

 

이거 뭐야?”

 

너 전에 쓰던 공책, 다 써가잖아.”

 

제법 질 좋은 공책이다.

 

덤으로 꽤 괜찮은 펜까지.

 

“...용케 무난한 거 골랐네.”

 

안그래도 옆에 개당 수십달러 하는 펜들이 있더라고.”

 

그런거 사주고 싶었는데, 안 받을 거잖아.

 

이글이 짐짓 삐진 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받았을 걸, 생일인데.”

 

빅터가 공책을 양 손으로 쥐어 들면서 작게 웅얼거리자 이글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홱 틀었다.

 

생일이었어?!”

 

몰랐단 말이야?!”

 

이글은 벽에 걸어둔(그러나 잘 확인하지 않는) 달력 쪽으로 뛰어가 확인했다.

 

빨간 동그라미가 있고, 빅터의 생일이라고 적혀있다.

 

그것도 자기 글씨로!

 

, 오늘은 외식을... 그 전에 케이크도 사고, 풍선도 사고...!”

 

어쩐지 오늘은 생전 좋아하지도 않는 단 것이 당기더라!

 

이글은 빅터의 공책을 뺏었다.

 

이거 말고 역시 펜을...!!!”

 

내놔 그거!”

 

빅터는 높이 쳐든 공책 쪽으로 펄쩍 뛰어 달려들었고 이글은 몸을 뒤로 빼며 공책을 못 잡게 했다.

 

그 몸 위로 냅다 올라타 바닥에 쓰러뜨려서는, 빅터는 그 손에서 공책을 채 갔다.

 

공책을 주더라도 좀 더 좋은걸 사올 수 있어!”

 

생일 아니어도 나 생각해서 사온- , 됐어! 내놔!”

 

빅터가 잡아채는 공책 끝을 잡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널 생각해서 사와서, ?”

 

“......”

 

말 해야지.”

 

또 도망가려는 것을, 냉큼 허리에 손을 둘러 잡았다.

 

“....고마워.”

 

그리고?”

 

“..........”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글은 공책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그리고?”

 

“......기뻐.”

 

잘했어.”

 

이글이 허리에 감은 손을 떼자 빅터는 이글의 몸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워서 키득키득 웃는데, 빅터는 손을 뻗더니 이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방으로 후닥닥 뛰어가더니 문을 쾅 닫았다.

 

...아 혹시 날 흉내내서 칭찬을 하는 건가.

 

그리고 이글은 빅토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그것이 불만인지 빅터가 들어간 방에서 문을 쾅 치는 소리가 났지만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서툴러 빠진 꼬맹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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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와트AU] 오늘도 학교는 평화롭습니다 -06

2015. 10. 27. 20:02 | Posted by 호랑이!!!

 

약이 완성된 것은 할로윈, 호그와트의 모든 학생들이 과식을 하는 날이다.

 

토마스 스티븐슨, 래번클로의 반장은 자그마한 약병 하나를 손에 감추고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좋아, 아직 이글 형 안 왔지?

 

피터도 이글 형도 토마스의 좌우로 와 앉곤 했으니까, 토마스는 연회장 문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손 안의 병을 열었다.

 

다행히, 맨 가장자리의 테이블에는 이글에 피터까지 가세하게 되면서 아무도 앉지 않았으니까, 호박 주스가 든 보울에 똑 똑 약물을 붓고는 포리지용 설탕을 슬쩍 떠 넣었다.

 

좋아, 맛은 문제 없겠지.

 

휴우 한숨을 쉬고 이글이 언제 들어오려나 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허공에서 히아신스 향이 나는 비누방울이 가득해졌다.

 

분명 저번 호그스미드 외출은 금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또 갔다온거야.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무난하고 무해한 편인가- 하는데 갑자기 비누방울들이 부풀어오르더니 요란한 폭죽이 그 안에서 터져나왔다.

 

필리버스터 박사의 불꽃놀이 세트인가.

 

요란하게 불꽃이 퍼지고 폭음과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토마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글을 찾았다.

 

이글 형!”

 

으하하, 토마스 안녕!”

 

좋아, 그래도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장난질은 꿈에도 없을 줄 알아!

 

이글은 깔깔거리더니 교수님이 오시기 전에 도망칠거라며 컵에다 호박 주스를 가득 따랐다.

 

토마스는 컵을 빤-히 쳐다보았다.

 

좋아, 저기서 한 모금이면. 딱 한 모금이면.

 

이글의 입이 벌어지더니, 호박색 주스가 흘러들어갔다.

 

좋아!

 

토마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제 이글은 적어도 한달간은 차분해지겠지!

 

아직도 연회장 여기저기에서는 펑 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펑, 이글 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겠지?하면서 토마스가 그 쪽으로 돌아보았으나 거기 이글은 없었다.

 

대신 연회장 안에서 요란스러운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이글?”

 

그리고 돌아보았더니 거기에 호박 주스가 든 커다란 보울은 없었다.

 

대신 연회장 천장에 커다란 새 같은 것이 펄럭거리면서 주스 보울을 가지고 날고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주스 방울이 몸에 튄 학생들은 팔이나 얼굴에 깃털이나 부리가 돋아나 비명을 질렀다.

 

오 설마.

 

야 이거 굉장한데! 할로윈 음식은 과연 뭐가 달라도 달라!”

 

머리 위에서는 이글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빈 보울을 땅바닥에 던졌다.

 

머리 위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는 울 것 같았다.

 

아냐, 그거 아니란 말이야.

 



[토마스X이글X토마스] 거짓말쟁이

2015. 10. 25. 04:33 | Posted by 호랑이!!!

※얀데레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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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 형!”

 

흠칫, 하고 팔이 떨렸다.

 

연합 성인들 중에서는 명실공히 막내, 주제에 성실하고 겸손하고 제법 능력까지 뛰어나 두루두루 인망 좋은.... 토마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 놀래라.”

 

하하, 별 건 아니고. 저기 물건 좀 내려달라고 하려구요.”

 

한창 재미있었는데-”

 

이글은 재미나게 얘기하던 중인 레베카 쪽을 보았고, 레베카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래도 간만에 얘기하는건데-”

 

됐어 됐어, 다음에 맥주나 마시러 가자.”

 

레베카는 다른 사람과 얘기할 생각인지 자리를 떴다.

 

레베카랑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얘기하는건데 말이야.

 

아니지, 요즘 들어서는 다같이 모이는 저녁 시간이라던가 임무때 외에는 얘기를 거의 안 했다.

 

게다가 묘-하게, 일이 있으면 꼭 간접적으로, 간접의 간접적으로 토마스가 연관되어 있었다.

 

마치, 도미노 놀이처럼 자신이라는 마지막 패가 쓰러지는 반대쪽에는 토마스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과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글은 묘한 기분이 들어 토마스를 흘끗 보았다.

 

사람 좋게 웃어보이는 녀석.

 

스물 한 살짜리 애송이.

 

그래 뭘 내려달라고~?”

 

토마스가 피터를 맡아 돌본다.

 

트리비아와 나이오비는 현재 연합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갔고 루이스가 거기 따라갔다.

 

원래라면 트리비아가 아닌 이글의 차례였으나 저번에 이글이 트리비아 대신 다녀온 일이 있어 바꿔 주었다.

 

그 때 트리비아와 같이 가야 했던 당번은 토마스였는데 하필 피터와 놀아주다가 한쪽 팔을 삐었었고.

 

덕분에 대신 하겠다고 자원했었지.

 

지금 이 시각 엘리는 피터와 함께 놀이터에 있을테고.

 

덕분에 이 연합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일이나 휴톤이나 레이튼... 그래, 레베카도 있지.

 

하지만 그들은 저만치 부엌에서 목청 좋게도 떠들고 있다.

 

토마스가 내려 달라고 하는 물품은 꽤 높은 곳에 있어서 의자를 가지고 와야 했다.

 

이런거면 차라리 휴톤 형님한테 해달라고 하지 그랬어?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데.”

 

아무리 그래도 내 키가 거진 180인데 그러고도 의자가 필요하다니 너무 높은 곳에 물건을 둔 건 아닌지.

 

이글이 속으로 꿍얼거리며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를 가져왔다.

 

거기 올라가서 상자를 잡아당겼더니 꽤 묵직했다.

 

그런데 토마스, 이건 어디에...”

 

어디에 쓰려는 거야?하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보았다.

 

토마스의 발이 의자를 툭 걷어차는 것을.

 

이래봬도 운동신경이 제법 좋으니까 잽싸게 자세를 잡으려고 했는데 얼음 결정이 그것을 방해해서 요란하게도 머리부터 떨어졌다.

 

그러게, 이성이 아니라 내 감을 믿어야 했는데

 

우습게도, 이글은 그러게 나는 토마스가 무서웠어라는 생각을 하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머리를 너무 세게 박은 것인지 눈 앞이 어질거려서 마치 토마스가 웃는 것 같았다.

 

==

 

이글이 다시 눈 뜬 곳은 하얀색 천장이 있는 병원이었다.

 

방싯방싯 웃는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띈 토마스가 있는.

 

“...까미유는?”

 

유감스럽게도, 친구분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해서 불려갔다고 들었어요.”

 

사나흘은 잡혀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이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일어나 앉았다.

 

토마스는 애써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전부 계산한거지?”

 

글쎄요, 뭘 말인가요?”

 

토마스가 생긋 웃었다.

 

새삼 이글은 안경으로 일견 동글동글해 보이는 토마스의 눈매가 날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마스는 보호자용 의자에서 일어나 이글 쪽으로 다가와서는 이글이 부담감에 조금씩 몸을 뒤로 물리다가 결국 누울 때까지 몸을 가까이 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이글 형이랑 같이 임무에 나간다던가, 잔심부름을 한다던가.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 같이 연합으로 돌아온다던가.

 

정말로 그 정도로 충분했었는데.

 

전부 형 탓이예요.”

 

다른 사람하고 말했잖아요.

 

다른 사람하고도 연합으로 돌아왔잖아요.

 

형은 삼남이죠?”

 

첫째도 둘째도 아닌 셋째, 막내.

 

첫째는 가문을 잇는다 정략 결혼한다 쓰임이 많고.

 

둘째는 첫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예비품.

 

하지만 셋째까지 쓰일 일은 거의 없지요.

 

심지어 형은 회사가 아닌 연합 소속이니까.

 

형의 가족들은 형이 전장에 나오지 못하면 오히려 안심할거예요.”

 

사흘이면 충분해요, 그렇게 토마스가 웃었다.

 

잘도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군, 이 거짓말쟁이.

 

이글은 코앞까지 다가온 토마스의 눈을 노려보았다.

 

 




11월의 이맘때쯤이면 학생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퀴디치컵!

 

벌써 아침 연습을 마친 기숙사팀은 땀이나 이슬, 진흙에 젖어 연회장으로 오기도 하고, 연회장으로 오지 않은 선수들에게 가져다준다고 휴지에 토스트를 싸가는 학생들도 종종 보인다.

 

작은 수첩에 전략을 적어 웅얼거리며 외우는 학생들도 있고 선수나 전략에 대해 토론하는 학생들도 여기저기에.

 

이번달의 경기는 그리핀도르와 후플푸프인데 학생들의 얘기를 조금 듣자면 이렇다.

 

후플푸프는 추격꾼 층이 탄탄하지.”

 

거긴 여자들이 꽤 많아. 파수꾼인 린도 여자애고.”

 

거기 수색꾼은 작년에 7학년이었잖아? 이번 수색꾼은 2학년 여자애래!”

 

그리핀도르에 대해 얘기하는 학생들을 보자면.

 

뭐니뭐니해도 영웅루이스가 파수꾼이니까.”

 

거긴 응원도 되게 화려하지. 저번에 클레어가 하는 거 봤어? 올해도 하려나-”

 

추격꾼은 그냥 그렇지만 파수꾼이 단단하고, 무엇보다...”

 

몰이꾼. 걔들이 대단해.”

 

아침의 연회장.

 

피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글을 찾아내었다.

 

토마스 형은?”

 

연습, 나도 하러 가는 길이고.”

 

이글은 토마스가 없다는 말에 부루퉁해지는 피터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놓고는 어깨에 빗자루를 맨 체 휙 돌아섰다.

 

늦지 말고 가라?”

 

“..., 잘난척은.”

 

피터는 그릇에 포리지를 덜다가.

 

티슈를 딱딱하게 뭉쳐 이글의 머리에 대고 던졌다.

 

“...좋아, 이 꼬마야. 지금 당장 미안하다고 하면...”

 

철퍽, 이번에는 끈적끈적한 호박 주스에 적셔 뭉쳐진 휴지가 얼굴에 날아왔다.

 

“...너 죽었어.”

 

 

 

 

 

 

 

 

오늘은 단언컨대, 토마스 스티븐슨 최악의 날이었다.

 

아침의 퀴디치 연습에서는 스니치 대신 던지는 골프공을 두 개나 놓쳤으며 연습하다가 도중에 나와서 연회장에서 피터와 이글이 대판 싸운 통에 엎질러지고 뒤집힌 테이블과 집기류를 원래대로 해 놓아야 했으며, 그로 인해 징계를 받은 피터가 자기는 징계를 받기 싫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것을 달랬다.

 

이제 한 숨 돌리는가 하여 포리지에 설탕을 듬뿍 떠넣었더니 설탕이 아니라 소금이었던 데다, 그 끔찍한 아침의 피날레로 요일을 착각해 교재를 잘못 들고 왔다.

 

래번클로, 3점 감점.”

 

그 말에 토마스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3점은 토마스가 학교에서 지낸 5년 동안 잃은 유일한 점수였다.

 

토마스가 선망하는 루이스나, 존경하는 다이무스가 잇따라 찾아오기는 했으나 루이스의 경우 점수를 잃는 데 있어 별로 거리낌이 없었고, 다이무스는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주의라 결국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생각을 새삼 하며, 토마스는 치료사용 약물 교재를 들었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만드는 약, 327페이지.

 

달이 없는 밤에 투구꽃과 쥐오줌풀 뿌리를 썰어서 뭉근하게 끓이는데 길면 길수록 좋다나.

 

토마스는 후우 숨을 내쉬고 자신의 냄비를 들었다.

 


[다이글/19금] 바나나

2015. 10. 19.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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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연령반전] 망나니가 되오리다

2015. 10. 17. 02:07 | Posted by 호랑이!!!

접니다 형님.”

 

어서와 다이무스.”

 

노크를 하고 들어서면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이글, 형이 보인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어 창문에 부딪힌 비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이 방 안만은 다른 세상인 양 따뜻하고 건조하다.

 

타닥타닥 난롯가의 불은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제가 끓여 들고 온 홍차는 좋은 향기를 주위로 퍼뜨렸다.

 

이번에 학교를 졸업했다지? 회사로 올 거야?”

 

“...아뇨,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글 홀든, 차기 가주는 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단? 벨져처럼?”

 

아니오.”

 

설마하니 연합으로 가겠다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비록 이글의 눈은 책에 박혀있다지만 그 너머로 자신 역시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검을 놓을 것입니다.”

 

.

 

책이 덮였다.

 

다이무스?”

 

이글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 자신의 막내동생이 어떤 이던가.

 

무뚝뚝하고 고결하여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고귀한 기사 같던 게 유일하게 승부욕을 보이고 즐거워하던 것이 검 뿐인 녀석이.

 

검을 놓는다니.”

 

놓을 것입니다.”

 

검을 놓는다고? 이글은 다시 다이무스가 한 말을 되뇌어 보았다.

 

상상이 안 가는데? 정말로? 지금 저 녀석이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얘기한 게 맞나?

 

형님.”

 

다이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글을 불렀다.

 

아주 진지한 결심을 말하면서.

 

저는 망나니가 되겠습니다.”

 

이글은 입을 떡 벌렸다.

 

팽팽하게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머리가 지금만은 굳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이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할나위없이 절도있고 격식을 차린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나가서는, 심지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오 세상에.

 

이글 홀든, 유서깊은 홀든 가의 차기 가주이자 유달리 출중하다는 평을 듣는 삼형제 중 첫째, 다시 말해서 장남은.

 

올해로 스물넷 먹은 제 동생의 때늦은 반항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랬던 것이 불과 며칠 전, 이글은 집으로 연락이 와서 어딘가의 변두리에 있다는 술집으로 갔다.

 

저보다 커다란 동생이라 간신히 어깨에 팔을 걸치게 해 부축하면서 이글은 한숨을 쉬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동생의 지갑은 벌써 다 털렸을 것이고.

 

중간에 싸움까지 했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는 길게 상처까지 났다.

 

망나니짓을 한다 해도 밤이면 돌아오고 아침에야 나가곤 하는데 분명 오늘 아침에는 얼굴에 저런거 없었단 말이지.

 

“...요령없는 놈.”

 

“...... ...니다...”

 

입을 열자 알콜 냄새가 훅 풍겨온다.

 

쯔쯔 혀를 차며 이글은 계속 걸음을 걸었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좁은 거리 위로 새까만 하늘에 구름이 끼어 달빛조차 흐린 곳을.

 

작정하고 반항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열 몇 살 때 하던 짓보다 못하니, 넌 아무래도 반항아는 못될 것 같네~”

 

어둡고, 사람 없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다.

 

적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하고 무뚝뚝한 막내는 술에 취했으니, 이글은 이 때가 좋으리라 싶어 딱 조용함에 어울릴 정도의 목소리를 조근조근하게 입에 올렸다.

 

“...그래서, 왜 뜬금없이 반항을 하는 거야.”

 

다이무스는 멈칫, 하더니 다시 걸음을 비틀거렸다.

 

“...저는 강해져봤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의 분란의 씨가 되고 싶지 않다.

 

괜히 여기저기 이용되다가 누군가의 짐이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

 

작은형은 결국 원하는 곳으로 떠나 가문에서 벗어났으나 자신은 쓸데없이 미련이 많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겠지.

 

이글은 두어번 더 채근했으나 다이무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가치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 형님 옆에 남아서.

 

온전히 가문을 받치는 작은 돌멩이이고 싶다.

 

기둥 따위, 주춧돌이 아니어도, 한 장 유리가 되어 창을 메우거나 한 겹 얇은 천이 되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디 보람차지 않을까.

 

이글은 그런 다이무스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령없는 놈.”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것과 반대라 자신이 막내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도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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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10 (완)

2015. 10. 16. 00:18 | Posted by 호랑이!!!

 

하루 더, 라고 말했지만.

 

그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그 이틀은 사흘이 되었고.

 

처음의 목적은 분명히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좋은 것을 주고 좋은 자리에서 재우는 것이었지만 어느샌가 그 말도 무의미해지도록 자연스럽게 빅터는 이글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이글은 빅터의 학교까지 손수 마중을 가서 집으로 데려왔다.

 

거실에는 방을 밝고 따뜻한 빛으로 물들이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그 앞 깔개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할짝이는 빅토르가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맞았다.

 

“...따뜻하네.”

 

원체가 크지 않은 집이라 그런지 방 모든 곳에 따뜻한 불빛이 닿아서 마치 집이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찬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우유 데워올게~”

 

“...초콜릿도.”

 

이글이 집안일을 돕도록 내버려 둔 뒤로, 빅터는 조금씩 말이 늘었다.

 

방금처럼 요구가 생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당근은 먹기 싫어같이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바닐라빈 향을 두어방울 떨어뜨리고 설탕도 조금, 초콜릿을 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밤중인데 무슨 일인지.

 

빅터, 대신 열어줘-”

 

대답은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은 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이글은 나름대로 귀기울임에도 별 소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태평하게 우유를 가지고 나올 즈음에, 어떤 남자가 빅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을 보아서.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검집째 들어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막아서며 쳐다보는 빅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뽑아 휘두를 것을 간신히 멈추고.

 

습관적으로, 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이거 처음보는 사람인데 여기에 왜 왔을까~?”

 

능력자들이란! 하여간 양아치같은 놈들 뿐이라니까!”

 

그 사람이 입을 열고 빅터의 뺨에 맞은듯한 자욱이 도드라질수록 언제쯤 베어버릴까 하는 기대감에 눈은 깜박임을 잊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위로 기어올라갔다.

 

빅터만 저리 가면, 잠깐 눈이라도 감으면...

 

, 빅터는 공성전에 참가하잖아? 그럼 이 정도야 익숙하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냉큼 검 손잡이를 잡아 한 뼘쯤 뽑았는데 빅터가 제 손 위에 손을 얹어 눌렀다.

 

“...... 돌봐주는 친척이예요.”

 

돌봐주는?

 

이글의 흥분감이 한 김 식었다.

 

대신 그 속에서 더 기분 나쁜 것, 흔히 노여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글부글 기포를 터뜨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돌봐준다는 것은 적어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플 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낮동안 학교에 보내는 대신 공장에 보내는 것도 아니었고.

 

우유에 설탕을 타 달라던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와 보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빅터는 싫다던가 좋다던가 하는 말이 늘었고, 굳은 표정이 풀어졌고, 어떤 때는 일부러 눈을 흘기기도 하고, 싫은 일에는 버둥거리며 반항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 친척이라는 작자를 만난 지 겨우 몇 분, 몇 초만에!

 

다시 바싹 얼어서는.

 

고양이를 주워 데려왔던 비오는 날 밤처럼, 얼어서, 긴장해서, 주눅들어서, 눈치보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침묵이 늘고, 표정이 굳고, 참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으로.

 

얘기는 우리끼리 다 했수. 그동안 신세 많았는데, 앞으로는 올 일 없을 거요.”

 

이글은 그 얘기에 눈을 굴려 빅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친척이라는 자가 멋대로 내린 결정인지, 빅터의 굳은 무표정 뒤로 겁먹은 표정이 번져갔다.

 

옷 갈아입고, 짐 챙겨서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멋대로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고 하기에, 이글은 검을 뽑아서 그의 목에 대었다.

 

“...내 집에 들어오려고~?”

 

, 친척을 밖에 세워두고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보니 빅터가 입던 옷은 아침에인가 빨아서 아직 축축할텐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젖은 옷을 입은 빅터가 빈손으로 서 있었다.

 

젖은거 말고 아까까지 입던 거 입어.”

 

대답이 없다.

 

다만 고개가 좌우로 딱 한 번 흔들렸다.

 

마치 이글의 집에 처음 왔던 그 날처럼.

 

갈거야?”

 

빅터는 입을 열었다가 한 마디 말 없이 닫았고, 대신 야간학교에서 사용한다는 질 나쁜 공책에 연필을 대었다.

 

[]

 

, 말해보라고. 갈거야? ? 지금까지 잘 있었잖아?”

 

꼭 지금 가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까지처럼 요리하고 청소하고, 낮에 일 가고 밤에 공부하더라도 같이 살면 재미있고, 편하고, 좋잖아.

 

이글은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에게 말했다.

 

집에 마련해둔 사탕, 초콜릿, 달콤한 과자들.

 

같이 가려고 계획하던 주말의 외출, 공원, 축제, 박람회.

 

따뜻한 벽난로, 빅토르, 그리고 많은 것들.

 

하지만 매번, 빅터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글은 빅터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얼마 안 있어 빅터가 그만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글은 입을 닫았고, 이번에는 빅터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길게 이어진 침묵으로 다시 쉬어들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않고.

 

익숙해질 것 같아서 더는 못 버티겠어.”

 

그 친척이 무서워서, 혹은 그 말을 들어야 하니까 간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길들여놓지 마.”

 

축축하게 젖은 파란 옷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글은 뒤에 남겨져서, 닫히지 않고 덜걱거리는 문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따끔하게 아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분노 때문이겠거니, 그 열린 문만 쳐다보며 옷을 콱 쥐었다.

 

 

 

 

 

 

 

 

 

다음날부터 빅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이면 공장으로 갔고 무거운 짐을 옮기면 힘들었고 빵에 물로 식사를 해결했다.

 

공장이 끝나면 지쳤고 학교를 마쳐 집으로 돌아오면 딱딱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껴입어도 추위가 이불새로 들어와서 잠을 깰 때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배가 고프면 억지로 물을 마셨고, 못 견딜 때에는 끓였다.

 

설탕을 넣은 따뜻한 우유라던가 난롯불은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

 

배고픔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편하게, 일도 않고 지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이 들어 고마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때로 새벽에 잠에서 흐릿하게 깰 때가 있었다.

 

돌아누워서 손을 뻗으면, 그 아래 있어야 할 다른 사람의 몸이 없었다.

 

잠결에 돌아누웠을 때 팔을 뻗으면 위에 얹혔던 다른 사람의 몸은.

 



 

[이글X빅터] 고양이 -09

2015. 10. 15. 00:46 | Posted by 호랑이!!!

 

빅터가 공장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때였고, 언제나 이글이 집에 있었다.

 

창 밖까지 퍼지는 냄새를 맡아보면-

 

오늘은 톡 쏘는 토마토 소스가 맡아진다.

 

초인종을 누르면 누른지 얼마 안 되어서 이글이 문을 열어주었고 빅터는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쳐두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다.

 

특별히 이걸 입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빅터가 벗어두었던 옷을 찾으러 연 문 앞에는 이글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와 파란색 반바지가 있었다.

 

바지야 그렇다 쳐도 셔츠는 좀 커서 소매를 접어서 입고 나오자 이글은 그제서야 젓고 있던 소스 냄비에서 눈을 떼고 인사한다.

 

왔어?”

 

.”

 

라디오라도 틀어줄까? 지금쯤 팝이라도 나올 텐데.”

 

빅터는 그가 소스 젓는 것을 빤히 보며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글 옆에 서서 그가 들고 있던 국자를 빼앗았다.

 

“...”

 

너 지금까지 일하고 왔잖아. 쉬어.”

 

그러나 빅터는 이쪽을 노려봤고, 이글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옆으로 물러나 파스타면을 삶기 시작했다.

 

파스타 좋아해?”

 

.”

 

이글은 옆을 흘끗 보았다.

 

양이 적어서 작은 냄비를 꺼낸 덕분에 빅터는 발돋움도 않고, 쉽게 소스를 젓고 있었다.

 

다음번에 대량으로 만들면- 그때도 도와줄래?”

 

“....”

 

이글이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모습에 빅터는 다소 안심한 것 같았지만.

 

좋아하지 말아, 꼬마야.

 

나는 너를 곯리고 싶을 뿐이니까.

 

높이가 두 피트(60cm 정도)는 되는 커다란 냄비가 있으면 네가 발돋움하는 정도로는, 바람으로 몸을 띄우는 정도로는 젓기 힘들 테지.

 

이글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익은 면을 휙 건져내 뜨끈뜨끈한 김이 오르는 것을 파스타 보울에 담았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외식하는 편이 나았을까?”

 

“...됐어.”

 

 

 

 

 

 

 

그리고 일요일의 밤, 이글은 보기 드물게 품으로 파고드는 빅토르 때문에 설핏 잠에서 깨었다.

 

원래도 밤이나 아침에는 사람 옆으로 오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맨살에 솜털이 닿아 간질거리도록 품으로 파고드는 건 또 처음이랄까.

 

옷 속으로 파고드는 녀석을 잡아다 끌어내서는 턱 아래를 긁어주는데 밖에서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빅토르를 안고 침실 밖으로 나가자 자신이 빌려준 와이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빅터가 서 있었다.

 

품에는 청소기를 안다시피 하고.

 

청소 중?”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다.

 

청소기가 있길래 써 보고 있어.”

 

이글이 사용하는 청소기는 흡입기에 먼지통이 붙은 것이 아니라 좀 구식인, 먼지통과 흡입기가 분리된 것이었다.

 

청소기는 성인이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만들어서인지 흡입기가 그저 길쭉한 봉 모양이라 하더라도 길고 무거워서 빅터는 끙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울텐데~”

 

괜찮아.”

 

괜찮긴?

 

이글은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다가 장식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빅토르는 후닥닥 뛰어 집안 어디의 구석으로 뛰어 사라졌다.

 

잠시간 벽에 기대 서서 빅터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국 무게를 못이기고 휘두르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글은 빅터가 잡은 청소기의 뒷부분을 잡았다.

 

, 천천히 다시 밀어봐.”

 

이글이 부드럽게 힘을 주자 아까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청소기를 들어 방향을 고치는 것도, 한 손으로 힘을 주어 누르자 손쉽게 들어올려졌다.

 

“...불필요한 도움이야.”

 

혼자서 할 수 있다, 며 눈을 흘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그러셔?”

 

이글은 빅터가 단단히 막대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흡입기의 뒤를 잡지 않은 손으로 빅터가 잡은 부분보다 조금 앞을 잡았다.

 

덕분에 몸이 바싹 밀착했고, 이글은 제 뺨에 닿는 색 연한 머리카락에 대고 입김을 훅 불었다.

 

뭐 하는-!”

 

글쎄~”

 

영차 힘을 주어 청소기를 들었다가 내려서 밀자 막대에 매달린 몸이 달랑 들려 흔들린다.

 

야아~ 혼자서도 잘~ 하네~?”

 

말하는 한 마디 박자에 맞춰서 청소기를 앞으로 밀었다가, 뒤로 당겼다가, 다시 밀었고.

 

거기 맞춰서 빅터의 발이 땅에 닿았다가, 달랑 들렸다가 다시 땅에 닿았고.

 

여지껏 검을 배우거나 하며 몸을 단련한 것을, 이글은 감사했다.

 

열다섯 먹은 소년이 매달려 바둥거리는데도 이렇게 간단히 놀릴 수 있다니.

 

속으로만 웃으려는 것이 조금씩 밖으로 기어나와서 입 밖으로, 작은 기침같은 소리에서 시작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나왔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빅터의 바둥거림도 심해져서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 삐졌어? ?”

 

이쪽을 보지는 않는데.

 

이봐, 목덜미가 발긋하잖아.

 

손을 뻗어 따끈한 목을 잡았더니 홱 빠져나간다.

 

~ 이봐, 빅터~”

 

이름을 부르는 건 또 간만인가.

 

빅토르처럼 어디 구석을 찾아 뛰어가는 모습에 청소기의 전원도 내리지 않고 이글이 뒤를 쫓아 뛰었다.

 

이상도 하지.

 

분명 처음에는 화가 날 정도로 불쾌했던, 그에게서 보였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이 싫지 않다니.

 

아니, 오히려.

 

오히려.

 


[이글X빅터] 고양이 -08

2015. 10. 14. 02:09 | Posted by 호랑이!!!

새벽에 가까운 아침.

 

이글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났어...?”

 

“....”

 

이글의 고집으로 결국 침대에서 자서인지 여름용으로 둔 베개가 눌려 있었다.

 

“...공장 가지 말고 더 자.”

 

“그러면 잘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 쉬어서 골골거리는 녀석이 무슨.

 

이글은 눈앞에 보이는 파란 소매를 잡아당겼다.

 

너같이 어린애가 무슨 공장일이야.”

 

나보다 어린애들도 다 공장에서 일해.”

 

시계를 보니 해는 떴나 싶은 시각이었다.

 

이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와.”

 

빅터가 순순히 욕실로 들어가자 찬장을 열어보았다.

 

도시락통으로 쓸 만한 것이 없잖아.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유리병이나, 저 정도인가.

 

이글은 냉장고에서 어제 만들었던 수프와 그 전에 만들어서 보관해둔 빵 몇 쪽과 버터, 우유, 과일을 꺼냈다.

 

그리고 빅터는 이글이 도시락이랍시고 흰 보가 덮인 커다란 바구니를 내밀었을 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유리병에 수프를 담는 정도로 타협하고 나가려는데 이글이 빅터를 다시 불렀다.

 

아침 먹고 가.”

 

늦었어.”

 

그럼 가면서 이거라도 먹어.”

 

이글이 계란과 감자를 삶아 으깬 것을 빵에 넣은 샌드위치를 주었다.

 

어제 저녁도 아파서 제대로 못 먹었지.

 

가져가라니까.”

 

이글이 두세번 더 권하자 그제야 빅터는 정말 받고 싶지 않지만 권하니까 받아준다는 듯 샌드위치를 받아 입에 물었다.

 

잘 다녀와.”

 

“...”

 

문이 닫혔다.

 

이글은 침대로 돌아가 풀썩 누웠다.

 

다른 누군가와 침대를 같이 쓰는 것은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

 

자신이 눕지 않은 쪽을 만져보니 작은 열이 느껴진다.

 

눈이 감겨왔다.

 

 

 

 

 

 

 

 

 

빅터는 길을 걸으며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신선한 양배추와 계란과 감자와 토마토와...

 

속으로 재료를 하나씩 대던 빅터는 이내 그만두고 샌드위치를 한 입 가득 베어물었다.

 

‘...맛있어...’

 

그리고 그 날 하루는 이상함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나서도 그렇게 지치지 않았고, 점심시간 직전에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단순노동을 하는 것뿐인데도 공장 일이 재미있었고 맛없고 퍼석한 빵이라도 유리병의 수프와 먹었더니 꽤나 먹을만했다.

 

좋은 잠자리에서 잘 자서 그런가, 맛난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하루가 편하고 힘들지 않아.

 

그리고 빅터는 문득 몰려오는 불안감에 손을 더 재게 놀려 작업을 빨리했다.

 

여기서 더 기분이 좋아진다면, 평소에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힘든 일이 아니야.

 

그래서도 안돼.

 

왜냐하면 앞으로도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살 거니까.

 

빅터는 돌아오는 길에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을 보았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집.

 

그 집 벽에다 대고, 이글이 수프를 담아준 유리병을 세게 던져 깼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나고.

 

빅터는 휙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이글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리병은?”

 

잃어버렸어.”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다.

 

빅터는 감기가 나을 때까지라며, 하루 더 자고 가라는 이글의 말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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