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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느낌으로 어쩌구

2023. 10. 16. 01:45 | Posted by 호랑이!!!

 

웬일이야.”

 

바질 실버루트는 전서구가 물어다 준 쪽지를 다시 눈높이까지 들어 읽었다.

 

오늘 수업은 빠질게. 좀 쉬려고 디디-

 

바질은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빛에 비추어도 보았지만 디에고 드라질리 특유의 날림체 외에 다른 문장이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픈가?”

 

디에고 드라질리가 아플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세상은 넓고 수많은 일은 일어나니까.

 

오늘의 방과 후에는 승마회가 하나, 저녁에는 독서클럽, 밤에는 마력학 복습을 하고 갈릭의 정령생태학 이론을 봐 주기로 했지만 얼마 전에 자신이 아플 때 디에고가 이것저것 해 주었던 일이 있으니까.

 

바질은 쪽지를 잘 접어 아카데미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10월이었다.

 

이번 주에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게 인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지망에서 3지망까지 황궁 마법부, 황궁 행정부, 황궁 소속 마탑으로 전부 황궁 지망이었고, 때문에 디에고와 한 내기도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정확하게는 엿새.

 

자의식 과잉에 공부만 잘하지 멍청하고 제멋대로고 나태한 녀석과 지낸 것치고는 꽤 즐거웠지만 역시 얼굴만으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구나.

 

상가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바질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와이셔츠를 정리한 뒤 낑낑거리며 커다란 냄비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퍽석.

 

들고 있던 도자기 그릇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감기에 좋다는 남부식 스튜가 피처럼 붉게 복도를 물들였다.

 

차라리 사 오길 잘 했어.

 

이걸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 비참했으리라.

 

바질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은 채 방 안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얽혀 있던 실루엣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떨어지자, 그제야 바질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도 디에고는 무어라고 소리쳤겠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디에고 옆에 있던 건 페퍼였어.

 

페퍼가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비웃을 게 뻔했다.

 

몸을 돌리고 바질은 달렸다.

 

멍청한 짓이야.

 

바질이 내심으로 속삭였다.

 

자신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발이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뭐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 그렇지?

 

비록 우리가 오십하고 오 일이나 연인처럼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내기잖아.

 

내기였잖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뒤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바질은 그 옆의 비상계단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계단은 불이 어둑했다.

 

담배 금지 마법이 걸린 후로는 누구도 오지 않았는지 딱딱한 구두굽이 디디는 소리만 공허한 공간에 울린다.

 

달칵.

 

뛰어내려갈 때마다 앞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앞은 어둡고, 계단 아래는 더욱 어두워서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소매가 잡혔다.

 

잠깐만! ...... 오해야.”

 

바질은 여전히 돌아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소매를 꽉 쥐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후우, ... ...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했어.”

 

목이 메었다.

 

소매를 당겨 보았지만, 조금도 멀어지게 둘 수 없다는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약간이라도 돌린다면.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자리를 옮겨서, 내 얼굴이, 표정이, 이 모든 감정이 드러나 버린다면.

 

바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겠구나, 드라질리.”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표정조차도 바꿀 수 없었다.

 

간신히 목이 삐걱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내는 게 한계였다.

 

때리고 싶었다.

 

욕설을 퍼붓고, 소리치고, 있는 힘껏 비난하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네가 말하는 그 오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황궁에서 볼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억지로 몸이 돌아갔다.

 

불빛이 어두웠다.

 

고개를 숙였으니 표정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소매를 잡은 힘이 빠지는 것을 보니 디에고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기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 거야.

 

입술을 꽉 깨무는데 디에고가 다시 어깨로 손을 뻗으려 했다.

 

바질-”

 

부르지 마!”

 

짝 소리가 나도록 손이 떨어졌다.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당장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머니 속의 망할 쪽지 뿐이다.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 타악-

 

아무렇게나 구겨진 쪽지가 잘 생긴 얼굴을 때렸다.

 

두 번이나 얼굴을 때렸지만 가벼운 것은 아프지조차 않았다.

 

닿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디에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바질이 서 있었던 계단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발자국은 희미해져서 그 앞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그 곁으로는 구겨진 쪽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서.

 

디에고는 그 두 장을 집어 들었다.

 

한 장은 아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봐. 기대된다

 

낡은 종이였다.

 

주머니에 넣고 오래 만지작거려 낡아진 종이였다.

 

그 날이구나

 

그리고 계단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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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린에게

2023. 8. 23. 12:42 | Posted by 호랑이!!!

 

디안, 왜 안된다는 거예요!”

 

마리, 마릴린, 마릴린 오슬리테아. 여기에 그런물건을 두면 안되지. 여기는 그저 휴식을 위한 조용한 정원이라고.”

 

이젠 아니에요.”

 

게다가, 이 정도는 그 작자들이 하는 데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며 마릴린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약하게 미혹하는 마법이 걸린 향낭을 차고, 같은 물건을 액체로 만들어 술이며 분수대에 뿌리면 마릴린을 찬양하는 향이 은근하게 흘러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속삭인다.

 

유일한 적자인 황녀에게 웃어 보이라고.

 

마릴린 오슬리테아는 목에 건 로켓을 꽉 쥐었다.

 

10년 전 리안 오슬리테아가 암살당한 후 그의 차림은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위압적이고 완벽하게 변해 갔지만 그 낡은 로켓만은 항상 그대로, 화려한 모슬린과 레이스 아래에서 그의 심장을 눌렀다.

 

금색과 적색으로 짙게 화장한 눈초리가 카디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카디안은 분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어렵잖게 읽어내며 손짓만으로 분수에 섞인 향수 방울을 분리했다.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마리.”

 

“...‘이에요.”

 

“...마리. 나의 황녀님.”

 

“...”

 

“...네 정책은 훌륭해. 백성들이 여가 시간을 갖거나 행복을 느끼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아는 머저리들도 솔깃할만한 이득이 있어. 너도 그걸 설득할만한 능력이 되고.”

 

그러니 이런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속삭이며 주먹을 꽉 쥐자 향수 방울은 그대로 사라졌다.

 

“...디안...”

 

마릴린은 정원 한쪽에 의자 대신 놓은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카디안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포켓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냈으나 마릴린의 손은 손수건 대신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목깃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로 금속 같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닥쳐. 카디안 웨르제.”

 

마릴린 님.”

 

오빠 친구라서 좋게좋게 대해주니 진짜로 네가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아?”

 

부드러운 실크 장갑 아래에서 물어뜯은 손톱이 천을 긁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빌어먹을 잡놈이 내 오빠의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봐. 오빠의 정책이 사장되는 꼴도 못 봐.”

 

오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개판이 되도록 놔둘 수 없어.

 

카디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마릴린은 품에서 그 향수를 꺼내더니 몇 방울 남지 않은 것을 병째로 분수에 내던졌다.

 

반짝이는 병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며 그 안에 든 분홍색 액체를 서서히 퍼뜨리고 분수에서도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뭐든 할 거야. 온 나라의 귀족을 세뇌하고 유혹해서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한다면 전부 내 손아귀에 쥐고 흔들 거야.”

 

카디안은 분수대에 빠진 유리병을 건져 왔다.

 

손수건으로 닦아 양 손으로 바치면 마릴린은 그 병을 한 손으로 받아 가방에 처박았다.

 

하지만 마릴린 님-”

 

황녀 폐하! 먼저 와 계셨군요. 오늘도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그 사이로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릴린은 언제 화를 내었냐는 양, 어느샌가 고귀하고 우아한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첫 손님을 맞았다.

 

후후, 고맙소. 이 정원은 오라버니가 내게 준 것이니 늘 신경써 가꾸고 있지.”

 

사람이 늘어난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향에 감싸여 마릴린의 정책에 고개 끄덕이며 집중하고 찬성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카디안은 젊은 귀족층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마릴린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이 정원이 잘 가꾸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리안이 살아 있을 적, 그러니 10년 전에는 리안과 카디안이 늘어져 시며 연극을 토론하고, 때로는 종이 검으로 유치한 칼싸움도 하고, 아직 어린 마릴린이 어린이용 차와 과자를 가져오면 인형이 쓰는 헤드드레스나 턱받이를 맨 채 자그마한 컵을 들고 오호호 웃었지.

 

그들만의 장소였기에 바깥에서는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번듯하던 리안도 제멋대로 늘어져 눕고 마릴린도 오빠를 따라한다며 드러누웠다가 풀물이 다 들었었고.

 

이제는 리안의 마지막 모습만큼 자란 마릴린이 뒷배도 없이 혼자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린 황녀님!”

 

아름다운 린 님!”

 

천사같은 린 황녀님!”

 

오빠의 장소에서, 오빠의 자리를 위해, 오빠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카디안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빠져나왔다.

 

“......”

 

네가 없으니 육체가 나이 들지 않는다.

 

너를 보고 하나씩 몸을 수선하면 그 바위에 옆으로 누워서는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라고 신기해했지.

 

나는 이제 한동안 이 모습으로 지내게 되겠구나.

 

“..., .”

 

카디안은 정원을 떠나려다 구석에 숨겨진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소리와 모습을 녹화하는 마법 도구다.

 

손 사이에 놓고 지그시 누르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서히 형체를 잃고 납작하게 변해 부서졌다.

 

너는 멍청이야.”

 

저만치에서 이 파티를 훼방 놓기 위해 다가오는 황자 무리가 보였다.

 

육중한 군마 위에 올라타서 난폭하게 몰아대니 잘 가꿔진 잔디는 엉망으로 패이고 낮은 관목은 부러지거나 꼴사납게 가지를 떨어뜨린다.

 

저런 것이 작은 정원을 지나가면... 뻔하지.

 

와하하하! 달려라 달려!”

 

휘이이익! 다 비켜라! 다친다 다쳐!”

 

거기! 비켜! 비키라고!!!”

 

카디안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저만치 놓인 정원 수레바퀴 아래의 쐐기를 없애버렸다.

 

흙과 태울 것들이 가득 실린 수레가 비탈을 따라 굴러오면 그 망나니들은 길을 막아서는 수레를 피하거나 걸려 날아가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 발걸음을 돌리며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나더러 마릴린을 돌보라고 했어야지.

 

사람 없는 곳에 다다르자 손짓이 어둡게 빛나는 포털을 열었다.

 

인간의 목을 꺾어버리는 것따위 어렵지 않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마릴린에게 축복을 내려 황제로 삼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린은, 리안은.

 

마릴린더러 카디안을 돌보라는 말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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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

2023. 8. 18.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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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와 뜨개 가방

2023. 6. 12. 01:20 | Posted by 호랑이!!!

A는 오래된 건물에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물은 부분부분이 깨져서 햇살이 들이치고 식물이 자랐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이모들은 건물이 과거에 ‘ktx’를 타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A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은 흰색 계단과 검은 색 계단이 있었는데 이모는 꼭 하얀 계단만 밟고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모는 아는 것도 많고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단 말이야.

 

ktx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탈것인데 바닥에 있는 을 따라 간다고 했다.

 

길이라... 저 아래 있는 거지?

 

움푹 파인 곳은 풀이 웃자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려다보던 A는 그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풀과 꽃으로 뒤덮인 사이에서 때묻은 이 보였다.

 

, 너무 작지 않나?

 

A는 몰래 길을 만져보았다.

 

이모가 보았다면 파상풍에 걸리니까 안돼!라고 하겠지만 A는 파상풍이 뭔지 몰랐다.

 

이모는 죽는 병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병은 어차피 죽는 병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이모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해 아래 나갈 때는 피부암!’이라며 모자라도 쓰게 했고 모르는 개가 다가오면 광견병!’을 외쳤다.

 

크든 작든 구분없이.

 

언젠가 한 번은 하얗고 작은 강아지가 다가오길래 잡으려 했더니 그건 다 큰 개라며 못 잡게 했다.

 

그렇게 작은 개가 어딨어!

 

이모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A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간.

 

A는 턱에 손을 대고 너비를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앉기도 힘들어 보이는걸.

 

그리고 왜 이렇게 깊은 곳에 을 만든 걸까?

 

이 곳에 물 같은 걸 채우고 배를 띄운 걸까?

 

A는 부서진 테이블 판을 그 레일 위에 올렸다.

 

이번 역은~ -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이모들은 이 근처를 지날 때면 합창하고는 그게 무슨 농담인 것처럼 키득거렸다.

 

A도 따라하곤 했지만 이모들은 늘 그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뭐 어때, 난 이렇게 할거야.

 

이번 역은 신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위 윌 어라이빙-

 

몸을 들썩일 때마다 단단한 합판 테이블이 덜그럭거렸다.

 

A는 이모가 만들어 준 가방을 아래 깔았다.

 

이모는 쇠로 만든 바늘이 든 낡은 가방을 갖고 다니는데 밤이면 늘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은 가방일 때도 있고 몸에 두르는 긴 천일 때도 있었고 함정에 쓸 재료일 때도 있었고 A가 어릴 때에는 안고 잘 수 있는 인형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더 커다란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 든 실을 하나씩 쓰다보니 점점 작아졌고 몇 번이나 다시 풀고 뜨고 하더니 이제는 겨우 바늘만 들어가는 종류가 되었다.

 

마지막 실로 A의 모자를 떠주던 날, 이모는 이제 식물 줄기에서 실을 뽑을 거라며 쾌활하게 웃었지만 그 날 밤 몰래 물을 마시러 나온 A는 이모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싼 실 말고 더 예쁘고 양 많은 실을 사둘 걸 그랬다며 우는 것을 들었다.

 

뭐 그렇겠지.

 

한참을 그렇게 들썩거리는데 저만치나 떨어진 곳에서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슴이나 토끼면 좋겠다.

 

다람쥐나 청설모까지도 괜찮아.

 

고양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아냐 역시 토끼가 좋겠어.

 

칼을 쥐고 조심조심 돌아보는데 다시금 육중한 발소리가 다른 곳에서도 났다.

 

높은 해자 위로 살점이 흘러내린 뼈와 피부가 녹색처럼 보일 정도로 곪아 흐르는 진물과 이지를 잃어버린 채 원시적인 위협음을 내는 유사 인간들.

 

A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불규칙하게 살점 붙은 몸이 해자 안으로 툭 툭 떨어지면서 철퍽 소리가 났다.

 

녹색으로 반짝이던 이파리며 노랗게 흔들리는 꽃에 질척한 살점이 달라붙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모들이랑 언니한테 토끼는 못 갖다주겠네.

 

칼이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다가오던 첫 번째 놈의 머리를 걷어차 날렸다.

 

딱딱하고 두꺼운 밑창 아래로 골반뼈를 으스러뜨리며 다음 놈의 배를 밀어내듯이 차자 살점이 떨어져 가벼워진 몸이 뒤로 밀려나다 벽에 부딪히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뼈가 드러난 손 네 개가 A의 움직임을 봉인하려 다가왔다.

 

잘 갈아둔 칼을 휘두르자 첫 번째에는 손가락이, 두 번째에는 손목까지 잘려 땅에 떨어진다.

 

세 번의 칼질로 마침내 목 두 개를 취하면 이번에는 뒤쪽에서 가까워진 소리가 났다.

 

보지 않고 주먹을 뻗는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머리통을 비껴나고 반쯤 드러난 턱뼈가 벌어지며 그 팔을 노린다.

 

그러나 A는 몸을 숙이며 그 품 안으로 더 빠르게 돌아 들어갔고 주먹보다 단단한 팔꿈치가 반쯤 삭은 갈비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팔이 밀리지 않게 주먹을 받치면 그 안쪽의 물어뜯긴 폐와 허상 같은 척추까지 허물어졌다.

 

이걸로 다섯.

 

이어서 여섯, 일곱, 여덟.

 

마지막으로 아호-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것의 목을 부수고 떨어뜨리는 순간 아래에서 몸이 솟구쳤다.

 

목을 끊지는 않았던 것이 스르륵 일어나 덤벼들었다!

 

A는 반사적으로 두껍게 뜬 가방 끈을 잡고 벌린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가 벌어졌다 다시 닫혔지만 끈을 재갈처럼 물기나 할 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거 폭신폭신 하는 기능만이 있나 했었는데 의외로 이 끈, 꽤 튼튼한 모양이야.

 

하지만 아끼는 물건이 더럽혀지는 것은 달갑지 않아-비록 아끼는 물건을 아까까지 깔고 앉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A는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다.

 

“..., 이거 제복이다.”

 

열쇠 같은 게 나오면 좋댔는데.

 

비록 좀비사태가 터지기 직전에는 전자식 도어락을 달곤 했다지만 자판기라던가 특정 문, 특히 일하는 사람들이 쉬는 곳은 열쇠를 쓰는 곳이 많았다.

 

옷을 뒤집어 털자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앗싸 신난다.

 

A는 열쇠가 몇 개나 붙은 열쇠고리를 신나게 들어올렸다.

 

금속 장식이 반짝거리는 것은 예쁘니까 가방에 넣고 해자에서 뛰어올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자판기, 아니고.

 

화장실, 아니고.

 

창고? , 돌아간다.

 

그렇지만 창고는 물건이 많을 테니까 내일 다른 사람들이랑 와야지.

 

A는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 마지막 열쇠에 딱 맞는 곳을 찾았다.

 

검은 색 네모판이 한 벽을 메우는 곳에 책상 몇 개와 의자와 캐비넷이 있다.

 

캐비넷도 볼 거지만, 책상 서랍을 뒤지는 것은 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라.

 

대다수는 필기구 같은 게 나오지만-이것도 잘 쓰기는 한다- 의외의 물건이 나오면 여기저기 자랑하기도 좋았다.

 

하나, 수첩.

 

, 사탕과 과자가 든 작은 통.

 

이건 이대로 가져가야지!

 

이것만으로 충분한 소득이었기에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가 A는 마지막 책상을 열었다.

 

세 번째 책상 서랍 맨 아래칸에는 보라색이며 초록색이며 사람 머리통만한 실이 가득했다.

 

둘러진 종이 띠를 살짝 만지면 버석했지만 실은 보드라웠다.

 

꽃잎보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자 머릿속까지 찌릿찌릿했다.

 

이게 오늘 얻은 최고의 보물인지도 몰라!

 

A는 과자통을 놓을 수 없었기에 몇 번이나 책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통은 가방에 쑤셔넣고 실 뭉치를 한아름 품에 안았다.

 

이걸 보면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풍요로웠고 기술의 극치를 달렸다는 과거의 산물답게 한아름이나 안은 실은 부드럽고 가볍기까지 했다.

 

이모는 이걸 보면 무슨무슨 얀이니 울이니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할거고 다른 이모들한테 이걸 만져보라고 하겠지.

 

그럼 다른 이모들은 이모가 첫 뜨개질로 만들었다는 그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또 웃을 거다.

 

고양이가 낚아채길래 목에다 매 줬더니 그대로 고장났다는 그거.

 

그럼 그 시대를 모르는 나와 B는 과자나 까먹으며 잡담을 하다 웃을 거고, 뜨개질을 배우는 B는 내일부터 이걸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모자를 만들든 판초를 만들든 가방 끈을 만들든 첫 번째 것은 무조건 나 달라고 해야지.

 

신이 디디는 바닥에서는 투박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지만 A의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오늘은 수확이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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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장마와 너

2023. 4. 19. 23:13 | Posted by 호랑이!!!

비가 쏟아졌다.

 

이례적인 장마라고, 근 십 년 내에는 비할 게 없는 장마라고 뉴스에서는 떠들어 댔다.

 

동시에 비가 그치면 작년보다 더 더운 날이 된다는 얘기도 나왔으므로 저 뉴스는 아무런 정보가 되지 못하고 빗소리에 맞서 어떻게든 공간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 불쌍한 소리를 눌러 죽일 생각으로 창문을 열자 소리가 한층 강하게 쏟아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후덥지근함 속에 유일하게 시원스러운 것이었다.

 

멀쩡한 침대에 멀쩡한 책상을 두고 찬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들척지근한 담배향이 가루처럼 입 안으로 새어들어와 타액에 녹았다.

 

혀 끝에서부터 입 안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필터에서 나오는 희미하게 역한 맛이며 입술 너머로 느껴지는 작고 동그란 구슬이며.

 

이것을 깨물면 상쾌하게 박하 향을 툭 터뜨리겠지.

 

그 깨지는 감각이 꽤 중독적이고, 향도 좋았으므로 잠시간 이것을 깰까 충동이 들었으나 내킬 때 나가서 이것을 피울 생각이었으므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

 

A는 손 끝을 조그만 진주알에 올렸다.

 

이렇게 물소리가 나는 날에는.

 

그래서 물에 잠긴 것 같은 날에는.

 

내가 호흡하는 것이 유달리 신경쓰이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 아이가 생각났다.

 

같은 동그라미라도 저 물방울처럼 흔하디 흔한 보통 사람인 나와 달리, 이 진주처럼 보통 사람이 아닌 그 애가.

 

입에 문 필터가 타액으로 젖어갔다.

 

축축한 것이 거슬렸으나 굳이 빼내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물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갑작스레 사라진 만큼 또 갑자기 나타날 것만 같았다.

 

뻐끔

 

그래, 이렇게.

 

A는 식어버린 채 며칠이나 방치되었던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뻐끔거리는 거 안 하잖아.”

 

너 보라구 하는 거지~”

 

시선이 마주치자 저 어두운 바닷속에서 보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놀러 갈게!”

 

사 놓을게. 언제 올 건데?”

 

“5분 뒤에 도착할거야!”

 

미리 말을 하고 오란 말이야!”

 

A는 허둥지둥 일어나 담배를 뱉다가 습관적으로 재떨이에 으깨버리고는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울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우산과 지갑을 챙겼고 신발 뒤축을 구겨신으며 뛰쳐나갔다.

 

그 서슬에 텔레비전이 꺼졌다.

 

무의미한 소음이 사라진 공간으로 폭포처럼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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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와 마법사

2023. 4. 4. 03:05 | Posted by 호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 네 공이 컸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메디아.”

 

해 아래 금발이 반짝였다.

 

미소가 또 다른 해처럼 눈부셨다.

 

메디아, 너도 가자.”

 

청년은 손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녀님. 제가 저런 자리에 갈 수는 없어요.”

 

네가 없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오늘의 영광도 네 것이지.”

 

그러나 붉은 머리의 그는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더 숨길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제가 원한 것은 명예도 부도 아니고...”

 

내가 다음 황태자가 되는 것. 알고 있어.”

 

틸렌은 메디아가 미는 손에, 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틸렌 황녀님이시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와 박수가 요란해졌다.

 

“...가세요.”

 

어휴, 황녀는 짧게 한숨 쉬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꽃잎과 쌀알을 뿌렸다.

 

미리 준비한 것인지 꽃 자수가 놓인 노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길 가운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갹출하여 마련했을 옷은 한 눈에 보아도 품이 들어간 멋진 옷이라 입은 아이도 가슴을 펴고 한 뼘이라도 더 커 보이려 했다.

 

안녕! 하세요! 황녀님! 저는! ... 트리엔! 마을 출신이에요! 황녀님의 덕분에! 낭냥 왕국에 팔려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어요!”

 

뒤에서 마우양 왕국!이라고 급히 정정해주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준비해 온 인삿말을 또랑또랑하게 말했지만 점점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은지 어...를 잇다가 결국 감사합니다!며 허리를 숙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와르륵 터져 나왔다.

 

틸렌 황녀는 아이가 내민 하얀 풀꽃을 단춧구멍에 꽂고는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아이의 짧은 생 내도록 이어진 고난이 아이의 팔에 흉터를 남겼고 괴로움이 아이의 몸을 말렸지만 황녀가 놀아주는 지금만큼은 웃음이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황자님, 저도요!”

 

아니, , 나가면 안돼!”

 

마르타, 돌아와!”

 

줄 서면 안돼!”

 

되었으니 두거라.”

 

황녀는 어느샌가 생겨난 작은 줄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두 바퀴씩 돌려주었다.

 

서른 명쯤 아이들과 놀아주자 여기저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틸렌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 아이보고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으나 아이가 질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짙은 꽃내음이 풍기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이 틸렌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해상 제독의 일과 순시, 행정 감독, 모든 일을 자신이 검토하고 행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 있어.

 

시작은 메디아가 권한 일이었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다 맡았지.

 

어쩌면 그것도 메디아가 계산한 그대로려나.

 

틸렌은 백성들이 꽃을 뿌려 만들어준 붉은 길 위를 걸어 황제가 기다리는 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는 사교계의 모든 춤을 섭렵했고 한때는 최전방에서 일만 군대를 호령했던 그는 이제 세월이 내려준 흰 서리와 눈을 이고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였다.

 

틸렌, 나의 딸아.”

 

황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의 자랑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네 인기가 그래도 내 절반은 되는 것 같구나.”

 

황제가 던지는 농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가볍게 웃음이 일었다.

 

황녀 역시 재기 넘치는 웃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는 맹약의 검을 들어올렸다.

 

틸렌, 메즈노어의 백작, 와이트워크의 후작, 아즐란 해의 제독, 셴차의 학살자, 헤르파노의 감시자, 기르파 용의 후손이자 적법한 황녀여.”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가 황녀의 호칭을 꺼내어들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대는 스스로의 막중한 책임을 마주하고 만백성을 위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계로서 무던히 노력할 각오가 되었는가.”

 

모든 강과 바다에 맹세코 그러하겠습니다.”

 

황제가 쥔 술잔이 불길하리만치 붉게 빛났다.

 

그는 한 손에는 빛나는 술잔을, 한 손에는 빛나는 검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대는 신성한 술로 그 맹세를 몸속에 새기거나, 스스로의 말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검에 몸을 던져 그 목숨을 끊으라.”

 

틸렌 황녀가 일어섰다.

 

잘생긴 얼굴은 의기가 충만하여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미소 위로 긴장감어린 떨림이 스쳐지나가자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금잔을 높이 들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틸렌 황녀는.

 

틸렌 황태자는 빛나는 맹세를 받아들였다.

 

흐뭇한 눈으로 후계를 바라보던 황제는 반짝이는 푸른 눈이 메마르는 것을 보았다.

 

금잔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황태자의 몸이 흙에 닿지 않도록 제각기 손을 내뻗었다.

 

비명소리가 났다.

 

모두가 지지하던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제 슬하의 두 사람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수도 근처의 큰 영지까지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 같았던 신뢰가 무너졌다.

 

평탄하게 일하고 풍요로이 식사하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던 일상에는 금이 갔다.

 

수없이 흐르는 그 피, , .

 

결국 외척의 손에 황제의 목이 떨어진 날.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황태자의 가장 신뢰하던 마법사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돌벽에 온통 메아리쳐 울렸다.

 

황제가 서거한 날이건만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온통 기쁨 뿐이라니.

 

웃음이 광물이라면 그것은 유황.

 

웃음이 꽃이라면 그것은 흰독말풀.

 

광기까지 그 지독함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그렇게 비명 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가 곱게 틀을 다지고 반석을 쌓은 나라였다.

 

모든 하중이 황태자라는 돌에 가해지도록 만들어진 그 아름답고 단단한 나라는 그 돌 하나만 빼내었을 뿐인데 형태도 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제국이 흔들리니 주변의 나라도 흔들린다.

 

어떤 나라는 사라졌고, 어떤 나라는 몸을 사리고, 어떤 나라는 이것이 기회라는 듯 호시탐탐 주위를 노려보았다.

 

문명, 신뢰, 애정, 상생이라는 그 아름다운 단어들은 피와 탐욕에 밀려나고 온 세상이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친다.

 

아아,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 가슴 벅찬 감정이야말로 사랑이겠지.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다시 쌓는 것조차 마다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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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실내 수영장에서 일어난 일

2023. 1. 13. 22:56 | Posted by 호랑이!!!

A는 눈을 떴다.

 

희부연 유리창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나뭇잎이 일렁였다.

 

물을 살균하는 것인지 멀리서 기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플라스틱 썬베드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자 어두운 수영장에 물결만이 반짝였다.

 

여기도 관리인이 있을 텐데 왜 사람을 두고 간 거지?

 

A는 널찍한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온수풀은 중단되었고, 미끄럼틀에서 나오는 물도 멈췄고, 파도풀도 멈췄고, 저번에 보았던 마감 직전 모습이랑 똑같은데?

 

A는 여기에 아주 자주 왔었다.

 

눈 감고도 수영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이제 성인이 된 지금까지 방학마다 주말마다 쉬는 날이면 날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할 것 없이.

 

직원이 기계를 끄는 모습을 보는 것이나 수영반 선생님이 이제 나가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도 한 해에 두 번씩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처럼 사람도 없겠다 이런 수영장을 독차지하게 되다니?

 

바로 물로 뛰어들려던 그 때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A는 난데없는 위화감에 물 가까이로 갔다.

 

창 가까운 곳은 물결이 빛으로 부서졌으나 위화감이 드는 곳은 조금 더 먼 곳이다.

 

빛이 들지 않아 검은 물이 한없이 깊고 무거워 보였다.

 

별 감정이 다 드네.’

 

이 곳의 물은 자신의 가슴팍 조금 아래까지 찬다.

 

어릴 때에는 바닥에 발이 안 닿을 정도로 깊었으나 이제는 얕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이 곳은 눈 감고도 걸어다닐 만큼 익숙한 곳이고 좋아하는 곳이다.

 

자신이 밤새 수영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릴 때 자신은 엄청나게 질투했겠지.

 

이런 곳에서 공포심을 느낀 것에 어이없어하며 A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그대로 물에 빠졌다.

 

익숙하게 미지근한 물이 몸을 감쌌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부드럽게 갈라지고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물이 튄다.

 

눈을 감은 채 레일을 따라 수영했다가, 레일을 피하며 가로로 수영했다가, 대각선으로도 헤엄쳤다.

 

다시 첫 번째 레일로 돌아와 숨을 고르는데 멀찍이 튜브 거치대가 눈에 띄었다.

 

튜브가 있었지!

 

여기 물에 튜브를 띄워놓고 거기 기대있으면 기분 좋겠다!

 

사람이 있을 때는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나 혼자니까!

 

A는 2인용 튜브를 몇 개 헤치고 커다란 1인용 튜브를 잡았다.

 

물 위로 휙 던져놓고 따라 걸어가는데 기대했던 탈팍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철벅, 하는 지나치게 큰 물소리가 났다.

 

작은 비명소리도 같이.

 

A는 후다닥 물로 뛰어갔다.

 

누구 있어요? 맞았어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튜브 거치대에서 물까지는 겨우 다섯 걸음 남짓이었다.

 

분명히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항의하는 소리도 없고 물에서 나오는 소리도 없고 자리를 피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저기요?”

 

물 가까운 데까지 왔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다시 위화감이 있었다.

 

그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위화감이.

 

다시 물 앞에서 몸을 기울였다.

 

저 멀리에서 일렁임이 있었고, A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영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 너 누구야! 왜 숨어!”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는 하나 A는 뭍에서 더 빨랐다.

 

A는 달렸고, 수영하느라 튄 물로 흠뻑 젖은 바닥에 쭐떡 미끄러져 버렸다.

 

땅까지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으으...”

 

A는 까끌까끌한 바닥에 쓸린 다리를 쓰다듬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금속성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피가 제법 나는 모양이다.

 

...”

 

옆에서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파라... 아니, 너 누구야?”

 

수면에서 스르륵 인영이 일어났다.

 

수영모 없이 긴 머리카락과 자그마한 체구에 묘한 짠내가 났다.

 

, 여기 머리도 안 묶고 들어오면 어떡해?”

 

그러자 저 쪽 인영의 입이 벌어지더니 놀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임마?! 언제 봤다고 야, ? 야는!”

 

그러자 A도 울컥해서 배에 힘을 주었다.

 

누구 있냐고 물어봤을 때는 왜 안 나왔는데! 너 뭐야!?”

 

뭠마! 내가 그런 것도 대답 다 해줘야 하냐!?”

 

안 할 이유가 뭔데! 이런 데 숨어가지고!”

 

숨어? 숨어어? 난 계속 여기 있었거든! 네가 몰래 살금살금 들어온 거겠지!”

 

몰래라고!!! 야 너 여기 나와봐라 가만안둬!”

 

저 멀리, 대각선 끝 즈음에서 험악하게 첨벙 소리가 났다.

 

“...뭐야, 또 누가 있어?”

 

“...”

 

가운데 라인에서 무언가가 부표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뭐지? 어떻게 아까 수영하면서 하나도 모를 수가 있었지...?”

 

너 눈 감고 수영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잠깐,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 애는 라인 가장자리로 다가와 사다리를 꼭 쥐었다.

 

그리고 불쑥, 물 위로 두 번째 인영이 일어났다.

 

아니, 저건 인영이 아닌데.

 

거대하고 둥근 것이 솟아났다.

 

그 위쪽에는 반투명하고 너풀너풀한 것이 달려 둔탁하게 빛을 여과시켰다.

 

그 두 번째 그림자는 서서히 가운데부터 벌어지더니 물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A는 입을 벌렸다.

 

너 인어야?”

 

뭐 그렇지.”

 

A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너풀거리는 지느러미까지 물에 잠기는 것을 지켜보자 인어는 어딘가 우쭐한 듯 보였다.

 

우와아아!? 인어!? 거대 인어? 진짜로!? 쩔어! 엄청나다! 이거 꿈 아냐? ! ...아니구나, 아 진짜 근데 우와아아아아아... ! 아 진짜로 아니구나... 스으읍... 나 만져도 돼? 만져봐도 돼? 우와 얼마나 길어? 불 켜고 싶다! 불 아 핸드폰 플래시라도 으아 핸드폰 거기 탈의실에 있어...”

 

한참이나 퍼덕거리던 A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까 튜브에 맞은 건 괜찮아?”

 

“...참내... 괜찮아.”

 

역광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이없어 하는 게 보이는 인어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 너 다리 줘봐.”

 

어어...”

 

무언가가 따끔하더니 다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가셨다.

 

이어 물이 몇 번 끼얹어지고, 여전히 어느 부위는 따끔거렸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A는 방금까지 상처가 있던 곳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

 

놀라긴.”

 

그러나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이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윤곽을 감지했다.

 

A는 그것을 보다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 만져봐도 돼? 화상 입어?”

 

넌 겁도 없냐!”

 

그러고보니 왜 여기 있었어? 어떻게 있었어? 낮엔 사람들 많이 오는데! 너 뭍으로 나올 수 있어?”

 

하이고...”

 

인어는 A의 손을 잡았다.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돼.”

 

?”

 

좀 하라면 해.”

 

?’라고 하면 그게 뭐든간에 안 해주겠지.

 

A는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감았다.

 

인어는 A가 숨을 들이쉬게 하고는 천천히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이 깊었다.

 

물이 차갑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몸은 부유하려 하는데 잡힌 손이 아래로 아래로 끌고 내려간다.

 

지금 무언가 환상적인 현장일 텐데.

 

A는 작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숨 막혀? 조금만 더 가면 돼.”

 

비늘과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일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따끔씩 들렸다.

 

조금만 눈을 뜨면 안 될까?

 

실눈이라던가?

 

어차피 인어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내가 조금 본다고 해도 따라서 갈 수는 없을텐데.

 

A는 마음 속 유혹을 들었다.

 

아주 조금만이라면.

 

아주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A는 살짝 눈을 떴다.

 

 

 

-13일의 금요일이니까

더보기

 

흐릿한 인영이 흔들렸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가까웠다.

 

문득 A는 알아차렸다.

 

비늘이 물을 가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웃음소리였다.

 

그들은 A가 언제 숨이 다할지, 인어의 손에서 빙빙 도는 것을 즐겁게 보고 있었다.

 

A가 작게 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거의 다 왔어.”

 

고개는 들지 않았지만 A는 인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A는 물갈퀴 돋은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고, 다음 순간에는, 발끝까지 젖은 채 하얀 썬베드 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엔딩

더보기

 

잡았던 손이 사라졌다.

 

A를 끌고가던 힘 역시도.

 

빠른 속도로 A를 스쳐지나가던 물살은 부드러운 벽처럼 A를 붙들었다.

 

검고 광활했던 주위는 마치 벌레를 가두는 풀처럼 A를 향해 우그러들었다.

 

새파란 타일과 하얀 시멘트.

 

낯익은 수영장 바닥이었다.

 

수영장은 언제 손님이 둘이나 있었냐는 듯 고요했고, 수면 아래에서 비치던 위화감은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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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_몰랐던_아름다운_계절

2022. 9. 12. 22:50 | Posted by 호랑이!!!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젓고, 눈을 감은 모든 계절들에게.

 

 

-겨울-

 

더보기

왜 세상은 이렇게 칙칙할까?”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을씨년스러운 길에는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늘어섰다.

 

그나마 색이 있다고 하면 어두운 색에 잎이 뾰족한 나무 뿐, 그나마도 몇 그루 보이지 않았다.

 

땅은 아무리 손을 써도 질척했다.

 

물은 딱딱하고 미끄러워서 멋모르는 누군가가 밟았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메말라서 사람들은 두꺼운 천으로 그들 몸을 가렸다.

 

좀 더 보드랍고, 따뜻하고, 색색이 아름다울 수 있을 텐데.”

 

남들은 새파랗다는 하늘조차 잿빛이다.

 

그는 도저히 이 계절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노란색이고, 붉은 색이고, 그런 것들은 다 다른 이에게만 허용된 것 같아서.

 

저에게 주어진 것이란 말라비틀어진 것 뿐이라서.

 

좀 더 다정한 것을 가지고 싶어서.

 

겨울은 고개를 돌렸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을 때마다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아래에서 누군가는 나무에 붉고 노란 꼬마전구를 감았고 누군가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얼음 위에 흙을 뿌렸고 누군가는 손수 뜬 모자를 기증했다.

 

겨울은 그것을 보지 못 했다.

 

 

 

-봄-

 

더보기

왜 세상은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그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추위를 경계하는 식물들은 앙상했으며 따스함을 믿었던 식물들은 그들의 믿음에 배반당해 시들어 떨어졌다.

 

덜 녹은 얼음은 위험했고 다 녹은 얼음은 길을 질척하게 만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얼었다.

 

얇게 입은 사람들은 추워했고 두껍게 입은 사람들은 더워했다.

 

좀 더 일정하면 좋을 텐데.”

 

제비가 울었다.

 

진흙을 떠 둥우리를 지어야 하는데 밤을 지나며 얼어 있던 탓이다.

 

섞어 쌓을 짚도 짐승의 털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는 도무지 이 계절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안정적인 것이 저 여린 생물들이 대비하기 쉬울 터였다.

 

햇볕 한 줌에 자라난 새싹은 다음 날 얼어 죽을 테다.

 

사람들은 병에 걸려 고통받을 터.

 

봄은 고개를 저었다.

 

짧은 고수머리가 잘랑잘랑 흔들려 그의 눈을 가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작은 싹이 흙을 밀어내고 고개를 드는 것을.

 

갓 태어난 짐승이 어미에게 보채고 어미는 다정하게 어르는 것을.

 

어른이 아이에게 옷을 겹쳐 입는 것을, 단추 여미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여름-

더보기

와씨 타죽겠네.”

 

여름은 티셔츠 목께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 옆의 사람들 역시 길을 걸으며 선풍기를 사용하거나 부채를 사용하거나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댔다.

 

저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차를 타든 건물에 들어가든 차가운 공기로 열을 식힐 것이고 물도 마실 테니까.

 

여름이 정말 염려하는 것은 어리거나 늙거나 여리고 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겨우 나무그늘 밑에서 해를 피한다.

 

아스팔트조차 녹아내리는 이런 날에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는 도무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더위는 끔찍하다.

 

때로는 마실 물조차 여의치 않다.

 

가장 약한 것들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해가 없는 밤조차도 열기는 식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힌다.

 

여름은 눈을 감았다.

 

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가게에 피서하러 오세요라는 종이를 붙이는데도.

 

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길짐승을 위해 물을 따라놓는데도.

 

저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지구를 지키자고 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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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장사 (글숨봇)

2022. 7. 4. 00:34 | Posted by 호랑이!!!

오늘 A의 아침은 정말 끝내줬다.

 

알람이 울리기 삼십분 전에 눈이 뜨였었는데 심지어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옷을 골라 입고 빵 두 쪽에 계란과 과일까지 멋지게 식사를 마쳤고 집을 나서자 신호등은 전부 초록색에 타야 하는 버스까지 자신의 앞에서 멈추지 뭔가.

 

아 세상에, 심지어 그 버스 안에는 B도 있었다.

 

B는 이 시간에 나오는구나. 가장 뒷자리에서 가장 앞자리를 훔쳐보며 A는 저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그날 밤, AC와 아침에 대해 한 시간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일찍 일어난 탓에 찾아온 지독한 피곤함으로 일찍 잠들어버렸다.

 

불이 꺼지고 숨이 고르게 변하자 A의 머리맡으로 갓을 쓴 사람이 스르르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로 A의 베개 위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은 그이는 창문을 열었다.

 

아침- 아침 팔아요-”

 

낭랑하게 들리는 소리에 그는 넓은 소매를 흔들었다.

 

아침 장수, 아침 파시오.”

 

아침장수가 14층 창문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은 어땠습니까? 정말 좋았지요?”

 

꽤 효과가 좋기는 했네만, 큰 맘 먹고 아주아주 굉장히 좋은 아침을 샀는데도 아이가 말 한 마디도 못 붙여보지 않았나.”

 

에이 그거야 오늘 처음 산 거니까 그렇죠. 그래도 만나기까지 했으니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말 정도야 몇 번 더 하면 될 겁니다.”

몇 번이라면, 얼마나?”

 

글쎄요... 이게 줄 수 있는 건 기회고, 물론 많이 만나다보면 잘 될 기회도 많기는 한데 사실 아이들 용기에 달린 일이라서요-”

 

시험삼아 일주일 정도 사면 어떻겠습니까? 네에?

 

아니, 우리 애가 오늘 친구랑 말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잠든 거 안 보여! 이걸 일주일씩이나 보란 말이야! 자네가 아직 애가 없어서 그래, 애가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어르신 그럼 닷새, 닷새만요.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 우리 애가 친구랑 말도 못 하고 트위터도 못 하고 만화도 못 보고 노래도 못 듣고 게임도 못 하고 자는 짓을 닷새씩이나 하라고! 이 나이 때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아이고 어르신 그럼 딱 사흘, 사흘 어떻습니까.

 

떼잉 쯧, 즐거운 새벽이하로는 받지도 않으면서!

 

어차피 애들은 많이 자야 건강해지고 키도 크지 않습니까, 제가 눈 딱 감고! 즐거운 밤하나랑 즐거운 새벽하나만 받을게요.

 

아침 장수와 어르신이 한참이나 수군수군 말을 하더니 결국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아주 굉장히 좋은 아침하나랑 조금 피곤하지만 꽤 괜찮은 아침하나, 이만하면 꽤 괜찮은 아침하나 구매하시는 거지요. 여기 있습니다.”

 

아침 장수는 아침 세 개를 꺼내고 어르신도 반짝거림이 각기 다른 밤과 새벽들을 내놓았다.

 

살펴 가게.”

 

평안하십시오-.”

 

아침 장수는 창문이 닫히는 걸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저 분은 정말 못 당한다니까.”

 

아침 장수, 개시 하였소?”

 

예 예, 어르신!”

 

아침 장수는 동네 몇 개를 가로질렀다.

 

다정한 인상의 어른이 B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오늘 우리 아이가 즐거워하는 걸 보았더니 기분이 좋소. 내일도 같은 것으로 주지 않겠소?”

물론입지요! 아예 사흘치를 한 번에 구매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한 번에 사신다면 좀 싸게 드리겠습니다.”

 

어디 얘기를 하여 보시오.”

 

억지로 눈을 뜨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것인지, B의 휴대폰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것을 귀엽게 보며 어르신은 모아둔 좋은 밤과 즐거운 새벽의 갯수를 헤아렸다.

 

 

라이언 왕자를 위해

2021. 10. 4. 01:13 | Posted by 호랑이!!!

 

사랑은 장미처럼 피어나고 우리의 운명은-”

 

아름답게 꾸민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시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노랫소리에, 청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에 한 번은 고개를 돌릴만했다.

 

그러나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사람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혹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인사도 없이 맨손으로 잡도록 손질한 새고기를 집었다.

 

이 나라, 이름을 말하자면 바르너는 수렵을 주로 하는 국가이고 고기요리도 그렇게나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궁에 오고서부터는 한 번도 나이프를 쥐어본 적이 없다.

 

무딘 나이프 한 자루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옆에서 몸소 본 덕분이겠지.

 

자신이 왕자 시절일 때도 가져보지 못한 자신만의 궁전은 마구간과 커다란 욕조와 그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넣어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침실이 있었고 만찬을 위한 곳은 그 방만큼이나 커다랬다.

 

커다란 궁전에 커다란 방에, 저녁식사를 위한 테이블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길고 넓은데 거기 앉은 것은 라이단 전 왕자를 제외하면 차르 하나뿐.

 

특별히 데려온 가수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어줄 시종조차 없어 그 넓은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기대어린 표정으로 라이단을 지켜보던 차르는 결국 몸이 달아 입을 열었다.

 

몇 번 들어본 노래지?”

 

라이단은 입을 열어 으깬 감자를 넣었다.

 

감자를 으깨고 양념하고 치즈와 생선알을 얹어 호사스러운 것이나 음식을 가르고 덜어 입까지 가져가는 동작은 감탄도 만족도 없이 기계적일 뿐.

 

기껏 가장 유명하다는 가수를 데리고 와서 노래까지 가르쳐 놨건만, 라이단은 차르는커녕 가수에게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라이언 왕자.”

 

낯간지러워하던 별명이 불리었음에도 라이단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차르는 가수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했다.

 

그것을 감지하면서 라이단은 지친 손짓으로 식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놀랍지도 않게 쨍그랑, 소리가 났다.

 

차르 앞에만 놓였던 고기용 나이프는 어느새 가수의 목에 그 날을 빛냈다.

 

저 나이프는 음식용이니 그렇게까지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은 그걸로도 치명상을 입힐 만큼 힘이 셌다.

 

톱날같은 나이프의 날이 살갗을 누르자 황제가 직접 불러 주었다는 자부심에 기뻐하던 가수는 덜덜 떨었다.

 

떨림에 나이프는 날이 조금씩 파고들었고, 차르는 그것을 보았지만 날을 떼지는 않았다.

 

라이단은 그 가수를 보았다.

 

공포에 입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이 라이단에게 닿았다.

 

눈동자가 그 마음을 대변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때는 저런 눈에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의무감에 가까울 정도의 목소리로.

 

라이단은 입을 열며 방치된 지 오래였던 경첩에서 나는 것 같은 삐걱거림을 느꼈다.

 

“...많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차르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여전히 제 쪽으로는 고개도 들지 않는 라이단이었지만 그래도 입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움직인다!

 

“...바뀌었군요.”

 

아무래도 궁전에서 불러도 될 만한 노래로 바꾸다보니까, 일부 가사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 김에 가사가 바뀌었고-”

 

내팽개쳐진 가수는 비틀비틀 물러나서 혹여나 다시 잡히기라도 할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후로 라이단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식탁에서는 이야깃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 옷이 커졌네.

 

라이단은 왕자 시절일 때부터 애용하던 바지를 쭉 잡아당기더니 허리끈을 꽉 졸라매었다.

 

딱 맞았던 바지는 점점 늘어나서.

 

...아니지.

 

라이단은 금과 염료로 칠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호사스러운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때 말을 타고 뛰고 구르던 몸은 고작 한 달 사이에 많이 상해서 근육도 살집도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이 새로 지어진 바지를 꺼내들었다.

 

얇고 부드러운 털가죽과 좋은 천을 쓴 편하고 따뜻한 바지였으나 라이단은 그를 못 본 척 끈을 잘 매듭지어 묶었다.

 

이 곳은 해가 빨리 진다.

 

하인은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새까만 하늘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두터운 천에 가로막히고 보온을 위해 벽난로에 잘 말린 장작이 들어간다.

 

침대 위에는 새의 부드러운 속깃만을 써서 만든 이불과 베개.

 

그 속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물주머니.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보온을 위해서는 방이 낮고 좁아야 할 텐데 새로 단장했다는 이 방은 다른 방의 세 배는 넓고 절반은 더 높다.

 

그 높은 천장에서 바닥에 닿기까지 벽에는 금실과 비단실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정교하여 그 위에 새겨진 많은 동물과 영웅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바닥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두터운 털가죽이 빈틈없이 깔렸고 가구 하나하나에 장식을 새겨 호사스러움을 드러냈다.

 

손이 직접 닿지 않게 만든 화로가 놓이고 불 위에는 물이 든 주전자가 부드러운 김을 내뿜었다.

 

왕이 끼고 도는 애첩이나 갓 태어난 왕자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어느 쪽이든 라이단에게 기꺼운 설명이 아니었다.

 

분명 호사스럽고, 유지하는데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 거고, 그 말인즉 말도 안되는 구조에 말도 안되는 편함이 있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 편하다는 것은, 또 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 위에 무언가가 얹히는 기분이다.

 

침대를 정리하고 하인 하나는 방 안에, 하인 하나는 테라스로, 하인 하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하인은 촛불 몇 개를 더 켜고는 양초를 조금 더 꺼내놓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촛대를 놓고 라이단은 습관처럼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밝고 따뜻한 곳이건만 머릿속은 갉아먹히는 것처럼 시끄럽다.

 

문 밖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차 트레이와 책이 몇 권 들어왔으나 라이단은 오늘도 차를 마시지 못할 것이고,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손에 책을 쥐어도 책은 넘어가지 않는다.

 

머릿속을 갉아먹는 것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게, 들어도 듣지 못하게 날뛰고 있다.

 

글자가 읽히지 않는다.

 

첫 장, 고작 몇 줄.

 

초점을 잃은 눈에 글자가 흐릿하게 번진다.

 

하인이 잡는 손에 정신을 차려보면 날카로운 책 옆면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벌겋다.

 

낫지 못하는 상처는 터지고, 또 덧씌워지고, 그럼에도 충분히 아프지가 않아.

 

하인은 상처를 싸매고 축 늘어진 손 위에 큼지막하게 만든 장갑을 씌웠다.

 

이 손으로도 책장을 넘길 수 있을까?

 

한 글자도 읽지 않은 페이지지만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책을 넘기려 해도 손이 미끄러질 뿐 책장이 잡히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걱거리는 소리만 이어서 이어서 나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하인이 자신을 위험한 것 보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자 마른 눈동자 위로 덮이는 피부까지 느껴진다.

 

하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밤에 사용하는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은 해가 늦게 뜨는 곳인데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하품을 하던 하인이 시간을 확인하였다.

 

아침식사를 내올까요.”

 

벌써 이틀을 꼬박 새웠으니 몸에 잠이 부족해서 뻣뻣한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속에 넣으면 잠이 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하인은 커튼을 걷고 손도 대지 않은 차를 트레이에 싣고 나갔다.

 

곧 해가 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하늘은 밀도가 높다.

 

테라스로 나가자 화로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던 하인은 얼른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더 자도록 하게.”

 

아닙니다. 모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테라스 밖으로 몸이라도 던질까 걱정하는 것인지 하인은 이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들어가기에 보기라도 쉬우라고 화로 곁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얼려버릴 것처럼 옷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들고 마른 장작을 몇 개비 더한 화로는 밝게 타오르며 이기려고 애를 쓴다.

 

불티가 검은 어둠 속으로 날아올라 사라지고 불은 일렁이며 기세를 키운다.

 

얼마나 불을 보며 멍하게 있었을까, 어깨에 두툼한 모피가 얹혔다.

 

다소 차가운 감은 있었지만 체온으로 데워지겠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차가운 하늘 위로 하얗게 빛이 밝아진다.

 

해는 하늘로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어쩌면 이 곳은 해 하나 떠오르는 것조차 마이언스와 같지 않냐는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같은 것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 타오르는 불 뿐이란 말이야.

 

충동적으로 하인이 가져다둔 나무를 한 묶음이나 들어 화로에 쏟아부었다.

 

마른 장작이라 한들 한꺼번에 처넣어서야 불이 붙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서서히 죽어가는 통에 하인이 급히 지푸라기를 쑤시고 부싯돌을 당겼다.

 

천천히 불이 붙느라 연기가 오르고 급히 대롱을 들어 후 불자 이내 활활 불이 타올랐다.

 

다시 의자에 앉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테라스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니 외려 불에 시선이 잠겨 한없이 보게 되었다.

 

많은 나무에 옮겨붙은 불은 거세게 타오르고 천장에 자란 고드름이 녹으며 아래로 뚝뚝 떨어졌는데 녹은 물이 흐르는 것에 걸레를 가져오던 하인은 라이단이 저도 모르게 화로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대경실색하여 그를 방 안으로 돌려보냈다.

 

불에 달아오른 금속이 참으로 따뜻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밝아지는 바깥을 보는데 목소리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티크타 전하께서 듭십니다.”

 

창가에서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단은 몸을 일으켰다.

 

명분이야 어쨌거나 포로의 입장이니 허락 같은 것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어주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에 밝은 녹색 눈의 사람이 들어왔다.

 

라이단은 난롯가에 걸린 주전자를 내렸고 아침식사를 가져온 하인은 그것을 차리는 대신 차르가 멋대로 두고 간 물건들 중에서 과자상자를 찾아왔다.

 

티크타는 권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찻잔에 입술을 대고 하인처럼 묵묵히 테이블을 차리는 라이단을 지그시 보았다.

 

고집불통.

 

전 마이언스 왕이 가장 사랑한 아들을 위해 가장 공들여 만든 물건.

 

‘...그 기분이 어떤지 알지

 

라이단은 다시 창 밖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날씨가 추운 바르너는 창문이 전부 작았지만 라이단에게는 마이언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만든 커다란 유리벽이 주어졌다.

 

하필이면 왕궁에 있던 것과 같아 어디선가 레지가 아장아장 기어와서 쌓기놀이라도 하다가 또 무언가 발견하고 걸음마로 지나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창이.

 

, 아니, 차르의 누나인 티크타가 앞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에도 무심코 빠져들게 되어 버린다.

 

라이단.”

 

.”

 

마악 빠져들 수 있는 참이었는데 티크타가 부르는 소리에 라이단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티크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마시던 차가 있는데, 그건 아마 네가 끓이는 쪽이 맛있을 거야. 내 방에 있는데 그것 좀 가져올래?”

 

“...제가 말입니까?”

 

리우나, 라는 이름을 부르자 문 밖에 있던 시종이 사뿐사뿐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둘이 같이. 나는 찻잔을 새로 가져올 테니까.”

 

.”

 

리우나와 라이단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티크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다른 시종에게 새 찻잔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하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차르가 보내준 온갖 화려한 장식물이 방 구석구석에 있고 귀한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도 몇 권이나 있다.

 

보석이 박힌 촛대도 있고 이 찻잔도 유리와 금을 사용한 귀한 것.

 

침대의 베개나 이불 같은 것에도 부드럽기 그지없는 털가죽을 썼다.

 

손 닿는 곳에는 간식거리가, 빈 공간마다 비싼 포장지를 사용한 선물상자들, 돌을 깎아 만든 체스 테이블에 침대 위에 놓은 쿠션에까지도 금사와 은사가 들어갔다.

 

자신이 사용하는 방보다 화려하고 황제의 방보다도 장식과 사치품이 많다.

 

그런데도.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물건들은 이렇게나 반짝이고 있는데도,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흙과 먼지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을까.

 

티크타는 옷장을 뒤지고, 서랍장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 사전이 다섯 번째 서랍에 있고.

 

티크타는 우아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다른 곳을 찾아보려다가 다섯 번째 서랍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미묘하게 빛깔이 다른 부분이다.

 

그 부분을 살짝 눌렀더니 서랍 바닥이 밀린다.

 

아래에서 나온 것은 귀금속이나 넣었을까 싶은 작은 상자.

 

“...이게 뭐지?”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패.

 

투박한 육각형, 납작하고.

 

뭔가 새겨져 있기라도 하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칼로 긁어내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아래에서 수첩을 발견한 순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티크타는 급히 서랍을 닫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차를 새로 끓이고 자리에 앉아 티크타를 마주하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라이단은 불쑥 입을 열었다.

 

차르 황제에게 저를 고문하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제 행동에 따라 마이언스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티크타의 손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의 끝을 쥐고 손가락에 감는다.

 

유감스럽게도 저 동작은 라이단에게 익숙하다.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샤르 역시 고민을 할 때면 온 머리카락이 새둥지가 되도록 꼬고 꼬고 또 꼬아댔다.

 

계속 티크타의 손을 보면 샤르를 떠올리고 말 것 같아서 라이단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널 알고 싶어서 왔어....라고 할까?”

 

“.....”

 

인간관계는 편협하지만 눈치만큼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티크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뭘 알고 싶다는 거지?

 

마이언스? 마이언스의 백성들? 마을? 공작에 대해서? 그도 아니라면 마이언스의 왕에 대해?

 

황녀님을 즐겁게 해 드릴 정도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며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이리저리 꼬이던 머리카락은 손가락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구불구불하다.

 

샌드위치 재료는 뭘 좋아하지?”

 

대뜸 티크타가 물었다.

 

뭐든 좋습니다.”

 

바르너는 마이언스에 비해 추운데 견디기 힘들지는 않고?”

 

티크타님과 폐하의 덕분으로 견딜만합니다.”

 

여기 와서는 쉬는 시간에 주로 뭘 하지?”

 

이렇다 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마이언스의 왕궁에서는 뭘 했나?”

 

왕궁에서 제가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는 라이단이 세우는 이 벽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티크타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가져가다가 단단하게 꼬인 것이 손가락에 닿자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내렸다.

 

라이단은 그 모습을 전부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티크타의 손가락이 라이단의 시선을 낚아채듯 고정시켰다.

 

마이언스의 무엇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했잖니. 무엇이든 좋아, 어떤 사소한 것이든.”

 

저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물론 녹색 기사 라이언이라면 20권 전부 다 있지만.”

 

라이단의 차가운 표정에 금이 갔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르너에는 20권밖에 안 나왔군요.”

 

이번에는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있던 티크타의 표정이 깨졌다.

 

뭐어? 마이언스에는 몇 권이나 나왔는데!?”

 

작년에 24권이 배포되었습니다. 계속 쓰고 있었다면 지금쯤 26권이 나왔을 겁니다.”

 

전쟁만 없었다면, 이라는 가시가 뾰족했다.

 

그리고 티크타는 라이단의 눈빛 사이에서 스쳐지나간 죄책감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하며 티크타는 과자를 깨물었다.

 

“...어어.”

 

맛이 이상한가요?”

 

“...아니...”

 

티크타는 다른 나라에서나 나는 과일로 만든 잼을 채우고 겉을 설탕으로 덮어 태운 과자를 와작와작 거칠게 깨물었다.

 

이 자식, 내가 이거 달라고 할 때는 겨우 몇 개 줬으면서!

 

동생놈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만.

 

라이단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과자가 든 상자를 통째로 가져다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천진난만 천사같은 화려한 미인은 그 녀석한테는 말하면 안돼, 라며 과자를 반토막냈다.

 

아 그 녀석은 정말이지!”

 

과자를 몇 개 더 먹다가 울컥한 티크타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니, , 라이단. 들어봐, 글쎄! 그 녀석이 말이야, 내가 이거 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 없다고 겨우 한 접시 주고 말더니!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우리가 말이야, 삼십 남매 중에서 서열로 따지면 한 십위쯤 됐거든? 위로 황후님 계셨겠다 집안 좋은 황비님들 있었겠다. 그나마 어머니가 평민이나 노예가 아니라 그 정도는 되었는데 그래도 그게 별로 높은 건 아니거든? 우리보다 낮은 신분인 애들은 슬슬 눈치보다가 적당히 백작위나 받거나 누구네 집안에 하사되거나 했는데 말이야... 어휴, 우리가 어쨌든 얼굴은 보기 좋잖아? 안 팔려가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휴.”

 

한참이나 투덜거리던 티크타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라이단은 어쩌다가 그 녀석을 만났어?”

 

라이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찻잔의 가장자리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재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

 

친애하는 나의 동생 레지날드 R. 마이언스에게

 

. 인적이 드물어 길 중간에마저 풀이 돋은 곳.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청년이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탄 말은 보기 좋은 장미색이고 갈기는 구름 같은 연회색이라 여느 집 도련님들이나 타고 다닐 법 했지만 로브를 눌러 쓴 청년이 입은 것만은 다 낡고 너덜거렸다.

 

나는 지금 야생동물로 유명한 래스퍼 백작령의 옆에 있는 산을 걷고 있단다

 

흔들리는 말 위인데도 마치 책상에서 글을 쓰듯 그 청년은, 가끔씩 자신의 말에게 한두마디 하며 식물의 속껍질을 모아 만든 수첩에 글을 써나갔다.

 

이맘때는 비가 적고 날씨가 선선해 노숙하기 좋아 마음은 한가롭고 몸은 여유롭구나. 지금 걷는 길은 붉고 누른 낙엽이 가득 깔려있단다. 궁에는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상록수만 심겨져 있으니 너는 아직 이 장관을 보지 못했겠구나. 언젠가 그림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보여주마. 그리고

 

여기까지 썼을 때, 저만치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청년은 수첩에 급히 몇 자 더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나중에 다시 쓰겠다

 

무늬가 새겨진 뿔로 만든 고급 활에 질 좋은 옷, 보석으로 장식된 비싸기 짝이 없는 신발을 보아하니...

 

여행자를 꿈꾸는 어딘가의 도련님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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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20. 00:55 | Posted by 호랑이!!!

 

아가, 또 왔어?”

 

너도 벌레면서 왜 나보고 아가래?”

 

그랬더니 가게 카운터에 난 버섯 위, 새파란 몸을 한 애벌레는 껄껄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껐다.

 

뭐야, 또 담배 피웠어? 내가 가게에서 피우지 말랬지.”

 

등에 커다란 날개가 돋은 백마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있는 힘껏 날갯짓해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날려보냈다.

 

같이 날아갈뻔 한 애벌레는 길쭉한 담뱃대를 카운터에 딱딱 내리치며 화를 냈다.

 

, 애기 왔네.”

 

손바닥만 한 작은 요정은 쟁반에 음식을 쌓고 종종걸음치다 인사를 건넸고 연못에서 상체만 내민 인어들은 과일을 넣고 만든 차가운 샹그리아를 홀짝였다.

 

지상의 여름은 진짜 너무 덥다니까.”

 

맞아맞아, 이런 걸 먹는 건 좋아하지만... ..., 거기 인간 아기. 우리랑 같이 바다 갈래? 거기 엄청 시원하다?”

 

인어들이 바위에 몸을 기대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거기 인어들, 뒤 좀 보지?”

 

길고 푹신한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는 대리석 매트 위에서 등을 대고 누워 있다가 앞발로 홱 가리켰고, 인어들은 뒤를 보았다가 그들을 엄하게 내려다보는 한 쌍의 새를 보고 깜짝 놀라 팔을 저었다.

 

아니, 저희가 뭘 하려고 한 건 아니구요...!”

 

날이 더우니까요! !”

 

쟤만 그랬어요! 저는 그럴 생각 없었어요!”

 

배신자!”

 

금방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고 물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 중에서 도포 소매를 적신 백호랑이가 있었는데 그는 혀를 끌끌 차며 흰까치가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시럽 좀 타오래도.”

 

어르신 나이를 생각하세요. 단 거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좀 먹게 두어라. 요즈음은 담배도 안 피우지 않나.”

 

호랑이님 담배를 피웠어요?”

 

, 인간 아기가 왔구나. 요즘 아기들은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라는 말을 모르나?”

 

알고 있어요.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아하, 요즘은 담배 먹는다는 말을 안 쓰는구나.”

 

백호랑이는 도톰하고 보송보송한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까치님은 왜 하얀색이에요?”

 

새 비단옷에 벼루 엎은 것은 내 손주놈이거든.”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방정맞기 짝이 없었지...

 

흰까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깃털로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푸르르 저었다.

 

아무튼 인간 아기야, 너 아주 잘 되었구나. 내가 이래봬도 길조란다.”

 

까치가 깍깍 울었다.

 

그리고 이 분이야 말해 무엇하랴, 존재만으로도 삿된 것들을 물리치는 길함의 상징! 모든 길짐승의 왕! 온 산의 산군!”

 

엣헴, 하며 백호랑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니 문 밖의 저것도 못 들어온 게지.”

 

그리하여 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니 백호랑이 앞발이 눈을 가렸다.

 

어허, 아기한테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얘야, 저런 것 보지 말고 이만 가 보아라.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구.”

 

사람들이 기다려요? 라고 묻는데 흰까치가 날개를 얼굴 앞에서 펼치는 바람에 차가운 연못 위로 넘어졌다.

 

인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에선 봉황새가 놀라 깃털을 퍼덕였다.

 

첨벙, 소리가 들리고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더니.

 

“-선생님, ㅇㅇ환자 눈을 떴습니다!”

 

방 안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문 밖으로 시선이 갔다.

 

열린 문 틈으로 검은 옷자락이 스르르 사라졌다.

 

코 끝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걸려 있었는데 그조차 점차로 희미해져 병원의 소독약 냄새만이 그 대신으로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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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탕 놀이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4. 00:30 | Posted by 호랑이!!!

다그락.

 

다그락.

 

각설탕이 비틀비틀 쌓였다.

 

비틀비틀, 비뚤비뚤 쌓인 각설탕은 기둥도 없고 주춧돌도 없이 성이 되고 산이 되었다.

 

이걸 좀 보라고 부르는 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며 두꺼비를 부르는 노래.

 

꼬마들이 하는 놀이.

 

빈 각설탕 상자는 바람에 굴러 날아가고 부스러진 설탕은 입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부스러지지 않은 것도.

 

마지막 아침으로, 세 개를 한 번에 입에 털어넣고 지레 찔려 웃었다.

 

각설탕 몇 개가 밥 한 그릇이라고 했더라?”

 

마치, 이 녹슨 버스 환승 정류장에, 내가 혼자이지 않은 것처럼.

 

마치 이 세상에, 나 외에 누군가 살아있는 것처럼.

 

 

Alien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2. 00:52 | Posted by 호랑이!!!

(※핸드폰이 읽어주는 문장은 실제로 번역기를 돌린 후 옮긴 것입니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쩌렁쩌렁하게 스피커가 울렸다.

 

그리고 손가락이 다시 세모 버튼을 톡 눌렀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금색, 오렌지색, 갈색, 반짝이는 머릿결의 청년들은 둥글고 삐죽삐죽한 구조물 앞에서 핸드폰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은 어느 모로 보나 한국인은 아닌 사람들이 내민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

 

, 누군가의 발걸음이 멈췄-

 

으르르르르르

 

어허, 안돼 보리야! !”

 

. .

 

우리가 외계인 있...”

 

형제님들 교회 다니세요?”

 

톡톡톡톡...

 

우리가 외계인... 배터리가 5퍼센트 미만입니다!”

 

핸드폰은 똑같은 문장만 수백 번 반복하다가 주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5! 퍼센트! 미만이라고!

 

그리고 픽, 화면이 꺼지자 핸드폰 하나에 옹기종기 붙었던 세 명의 청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 충전기 가지고 있는 사람]”

 

“[전 없음다]”

 

“[시간도 늦었고. 그냥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제 앞에 네이티브 노인이 멈추자 드디어 반응이 왔다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외계인...”

 

그건 실컷 들었어, 이눔아!!!”

 

따악!

 

금발이 찬란한 청년은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어어?”

 

“‘?’는 뭐가 ! 어어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외국 나오면서 외국어 한 마디 안 익혀서 나와!”

 

이 건방진 놈! 이 자문화중심주의 놈!

 

으아악 교수님! 미안해 학새... 어어, 아임 쏘리? 이 분이 나쁜 분은 아니셔!”

 

, 이 조교! 한국에서 이 좋은 한국어를 놔두고 양놈 말을 쓰다니! 너도 한패냐!”

 

교수님 진정하세요!”

 

저런 놈들을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맨날천날 존잘님의 연성에 ‘eng plz :)’같은 게 붙는 거야!”

 

아이고 교수님 트위터 그만 하세요!!!

 

이 조교의 손에 교수님은 질질 끌려갔고 지팡이로 위협당한 세 명의 청년만 폭풍이 지나간 뒤에서 심신이 낡고 지쳤다.

 

집에 가고 싶다.

 

해가 지고 어두컴컴하니 별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 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자신들의 우주선을 돌아보았다.

 

고향별 최고 기술로 만들어진 화력 무기가 실려 있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우리... 외계인이라고...]"

 

"[항복... 했으면 좋겠다...]"

 

 

동양풍/황제공 도망수

2021. 3. 16. 00:31 | Posted by 호랑이!!!

“폐하!”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폐하!!!”

 

높고도 높은 황제의 집무실, 여느 때라면 이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못할 시종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왔다.

 

두려움으로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흙먼지가 묻고 찢어진 옷은 이 아름다운 건물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데다 채 빗지 못하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시종들의 짧은 앞날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질질 끌려들어오는 모습에 영영은 주먹을 꽉 쥐다 바닥에 털퍽 엎어져 불경하게도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다.

 

“폐하! 도망한 것은 이 다리이고 저들을 속인 것은 이 몸이오니 제발 저만 벌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영영이 검은 비단 자락을 쥐고 빌고 또 빌자 소름끼치도록 우아한 손가락이 영영의 턱을 들었다.

 

“내 어찌 너를 벌하겠느냐.”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금과 귀한 홍옥, 진주로 틀어올려 화려하지만 그 아래 눈은 빛 드는 일 없이 새까맣다.

 

사랑하는 영영의 울음을 감상하는 내도록 모양 변하는 일이 없던 그 눈.

 

그 눈은 이번에도, 다정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입과 달리 매캐하기만 했다.

 

차마 고개는 떨구지 못하고, 영영은 시선을 내렸다.

 

저에게서 달아나는 시선에 황제는 기분이 나빠진 듯 끌려 들어온 이들 중 하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금을 받아 자리를 비켜주었다지. 그 좋아하는 금을 펄펄 끓여줄 테니 마음껏 손에 쥐도록 하라.”

 

영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시선을 들었다.

 

“폐하, 초하 형은 무인입니다! 그 전대, 전전대부터 황실을 섬긴 가문의-!!!”

 

그리고 당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던!

 

“...너는 어쩌면 울음소리까지도 새 지저귐 같구나.”

 

웃는 황제는 커다란 무쇠솥과 열 관의 금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금편이 절그럭 절그럭 솥에 담기고 아래 장작을 때자 그 불길이 거세짐에 따라 모양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영영은 필사적으로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으나 황제는 냉정해서, 그가 볼 것이 못 되니 병사들에게 영영을 방 밖으로 내보낼 것을 명했다.

 

“폐하! 다시 생각을, 폐하, 폐-”

 

문이 닫혔다.

 

둔중하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문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제가 몸을 돌리자, 붉은 관에서 검은 신발까지를 장식한 온갖 옥 장식과 보석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의 빛을 퍼뜨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일을 시작해야지.”

 

검은 비단에 붉은 빛이 어른거려 핏빛으로 보인다.

 

빛 드는 일 없는 그 눈도 불빛이 일렁여서.

 

마치 저 황제가 어릴 적부터의 친우였던 충실한 신하를 고문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하늘의 자손은 열둘에 왕의 이름을 얻었고 열다섯에 빼어남을 보이고 태자가 되어 마침내는 황제가 되었지.

 

그저 명석하고 빼어난 자질을 지녔을 뿐, 한때는 저 눈에도 어린 자다운 순진한 기쁨과 희망으로 빛이 어리었건만, 이제 그 텅 빈 눈에는 잔인함만이 무저갱으로 남고 굳은 얼굴에는 위엄과 무자비함만이 어린다.

 

초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편 들어간 솥이 끓으며 기포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

 

이 손.

 

4세에 검을 잡고 6세에 말고삐를 잡았던 이 손은 이제 다시는 쓰지 못하겠구나.

 

황제는 손수 그의 완갑을 벗기고 양 금군에게 명하여 잡아 눌렀다.

 

“용금군대장 초하여. 네 죄를 네가 알고 있으렷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잡은 두 군인은 처참한 얼굴로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로 황제가 속삭였다.

 

“아주 크게, 비명을 질러라.”

 

“죄인 초하, 명을 받듭니다.”

 

초하는 부글부글 끓는 솥을 보았다.

 

좀 멀리 있었다.

 
언제 옮길까?

그 솥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을 지르래도.”

 

“...예에?”

 

“이 몸에게 세 번이나 말하게 할 참이냐.”

 

귀를 기울이면 문 밖에서는 아직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하!

 

곧 명령을 이해한 초하는 다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숨을 훅 들이쉬고.

 

전방을 향해 5초간 함성을 발사했다!

 

...이렇게요?

 

...라는 눈으로 돌아보자 황제는 울화통이 터졌다.

 

“비명을 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더 고통스러워해라, 더 아파해라! 더 크고! 괴롭게! 비명을 지르란 말이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문 너머에서 귀를 대고 듣고 있던 영영은 문에 기대 주르르 쓰러졌다.

 

“죽강 영영, 얼굴이 창백합니다!”

 

“죽강 마마, 궁으로 드시지요.”

 

“화, 황제가... 폐하께서...”

 

미치셨어.

 

차마 불경죄로 입에 못 올릴 생각을 하며 영영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에 입술을 덜덜 떨었다.

 

 

쏴아아아.

 

요란하게도 소리가 울렸다.

 

이만하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A는 항상 자리에서 일어나 이 맑은 날 어디에서 비가 오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날은 맑고, 바람이 불면 사철 푸른 활엽수가 솨- 소리를 내고.

 

다시 A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기는, 요즘 애들이 어디에서 이런 소리를 듣겠어?

 

A는 닳아 부드러워진 마룻바닥에 벌렁 누웠다.

 

어디에선가 스르륵 천 스치는 소리가 났다.

 

곧 시야에 하얀 사람이 들어온다.

 

긴 머리, 새하얗고.

 

눈은 노랑, 동공은 악보에 그려지는 무언가처럼 생겼음.

 

자나?”

 

일어났어.”

 

이 자는 B라고 한다.

 

이천년 가까이 묵은 이무기다.

 

천 년 도를 닦고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 A의 조상이 뱀이라고 소리쳐 다시 천 년 도를 닦아서 조상의 업을 씻으라며 A를 끌고 왔다.

 

압도적인 무언가에 무서울 만도 하건만.

 

A가 이 집에 온 날 장장 30시간을 잤는데 오후에 눈을 떴더니 자기 때문에 놀라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봤더니 도무지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있잖아.”

 

A가 손을 내밀자 B는 그 손을 잡고 일으켜 앉혀주었다.

 

아무리 봐도 술잔처럼 보이는 도자기에 향긋한 차가 따라지고 종지처럼 생긴 작은 접시에 색색이 화려한 과자가 올랐다.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그치만 맛있다.

 

내가 용이다!’하면 어쩔 거야?”

 

집에 데려다주고 네 앞날에 행복을 빌어 주마.”

 

만약 뱀이다!’하면?”

 

내쫓을거다.”

 

A는 향만 달짝지근한 차를 마셨다가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나 사이다 마시고 싶어.”

 

B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인간의 천한 음식!이라고 말할 것만 같은 표정!

 

비늘도 안 보여주는 B의 인간 외적인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거렸더니 B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몸에도 나쁜 것이 뭐가 좋다고!”

 

“...어어?”

 

그거 다 설탕 덩어리다. 마셔서 몸에 하등 좋을 것 없는- 단 것이 마시고 싶으면 이따가 오미자차 타 주마.”

 

말에서 낯익은 사람이 느껴진다.

 

그게, 그러니까...

 

할머니...?”

 

“...아니다.”

 

이래놓고 나중에 마시고 싶으면 마셔야지하면서 한 캔 꺼내 줄 거야?”

 

B의 몸이 움찔했다.

 

그럴거야?”

 

결국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시선을 피하여서, A는 그와 시선을 맞출 거라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B는 휙 고개를 젖혀 뒤를 보았는데 A가 점점 더 가까이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었더니 점점점점점 뒤로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내는 균형을 잃은 A 아래 요란하게 깔려버렸다.

 

으아아!”

 

“...아이고... 이 망아지야.”

 

바람이 빗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옷자락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A는 조심조심 B의 머리카락을 걷어낸 다음 그 옆에 다시 드러누웠다.

 

난 네 할머니가 아니다.”

 

, 조상님.”

 

“...조상님도 아니다, 이놈.”

 

이 쬐끄만 녀석이 참.

 

B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반짝이는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쳐버렸다.

 

 

트친이 주는 한 문장으로 글쓰기

2020. 8. 1. 01:50 | Posted by 호랑이!!!

아주 먼 곳에서 A는 사람들을 보았다.

 

눈밭에, 흰 배경으로 선 것은 새까만 침엽수림.

 

하늘마저 흐린 무채색 사이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다채로웠다.

 

분홍색 옷에 녹색 허리띠, 진주 귀걸이, 금으로 만든 팔찌, 은으로 만든 목걸이.

 

풀쩍 뛰어오르는 사이에 드러난 맨 발목에는 파란 깃털이 붉은 끈에 매어 있고 장밋빛 발은 양말도 신발도 없이 눈을 밟는다.

 

화관이 흐트러지고 꽃잎이 휘날리는 사이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A는 그들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사박, 눈이 발 아래 으스러지고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를 잔가지는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나무 위 눈을 A의 머리 위로 조금씩 떨구었다.

 

문득, A는 긴 갈색 머리를 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 여자?

 

그는 새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고, 그 태양같은 웃음에 A는 미묘한 훈기를 느꼈다.

 

이리 와요!’

 

빙글 돌면서 또 누군가가 A와 눈이 마주쳤다.

 

밀짚같은 머리카락을 꽃과 함께 틀어올린 사람이 즐겁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A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열 명이나 될까 싶었던 그들은 어느샌가 A의 존재를 알았고, 그들의 비밀스러운 연회를 방해받았음에도 오히려 깔깔거리면서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A는 코까지 덮은 목도리를 내렸다.

 

머리에 눌러쓴 모자를 벗어 머리를 공기중에 헝클어뜨리자 누군가의 손이 머리 위에 커다란 화관을 씌워 주었다.

 

한겨울의 시린 공기처럼, 햇볕이 A의 몸에 내리쬐었다.

 

그 따뜻함이 폐를 채우고 서서히 서서히 피부에 스며들었다.

 

눈밭에 오래 있다 보면 추위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A는 어느 순간엔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어느 날.

 

나무를 베러 온 벌목꾼은 보았다.

 

눈밭 사이에서.

 

목도리가, 모자가, 장갑이, 외투가, 양말, 스웨터, 눈 신발까지 하나씩 떨어져 있는 것을.

 

 

 

 

바다는 1년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지만 유독 겨울에는 뱃사람들조차도 나오는 것을 꺼려해서 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면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렸다.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바위를 깎아내며 세차게 내는 휘파람 소리.

 

파도 소리.

 

저들끼리 부딪치고 들이박아 나는 기괴한 소리.

 

그리고 금속 같은 소리가 난다.

 

바다에서 얼음이 솟아오르고 바람의 군단이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칼날이 막힌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이 땅의 인간을 사랑한 얼음의 신이 있었다.

 

그가 파도를 밟고 팔을 휘두르면 얼어버린 바닷물이 날카로운 바람을 쳐 낸다.

 

군단은 땅에게로, 신에게로 바람을 쏘고.

 

신은 바다를 얼려 막고 또 막는다.

 

겨울 내내 그 싸움은 그치지 않아서 혹여 그 바다로 가게 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어버린 파도가 암초에 부딪혀 바스라지는 것을.

 

 

만년필은 만년필이다

2020. 4. 23. 00:18 | Posted by 호랑이!!!

수현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는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우는 것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거나 아버지의 친척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지.

 

사실 수현은 처음부터 장례식에 반대했었다.

 

장례를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랬을 때도 가장 짧고 초라한 것을 은근히 내밀었지만 사흘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이기지는 못했다.

 

하기는 일생 내내 그랬지.

 

“누나.”

 

현수의 양말에 있는 노란 곰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상주 나한테 주라.”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현수의 입에서는 열릴 때마다 소주 냄새가 났다.

 

“어른들이 그래도 상주는 남자가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큰아버지가 그 소리 하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랑, 고모랑 큰엄마도.”

 

그리고 또, 하면서 누가 거기 있었는지 떠올려보는 현수를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학교 가야 하잖아. 낮에도 있어야지, 상주 하려면.”

 

“어, 그런가?”

 

“어른들이 준다고 다 받아 마시지 말고 가서 자라.”

 

“으응.”

 

현수가 자러 가는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현이 이름을 좀 기다렸다 주는 건데.”

 

수현이와 현수의 사이에는 자그마치 팔 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억지로 공을 차게 하는 것 외에 첫 팔 년은 수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 팔 년은 갑작스럽게 길어진 양갈래 머리와 꽃무늬 치마가 생겼고, 그때부터 이름에 대한 불만어린 한숨소리가 늘어났다.

 

머리를 털고 수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잤어? 밥은 먹었고?’

 

‘오늘 피자 먹으려고 했는데 참고 너 오면 맛있는 거 먹기로 함’

 

아영이었다.

 

수현의 머릿속에서 한숨소리가 날아갔다.

 

 

 

 

 

 

 

 

다음날은 발인이었다.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까지 한 다음 친척들이 밥을 한 끼 하자는 것을 거절한 다음에야 수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자고 싶었지만 입출금 내역을 정리해야 했기에 책상 앞에 앉아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아버지는 핸드폰이 있는데도 굳이 종이와 펜을 쓰는 수현을 보고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는 이름자도 인색하던 아버지가 보여준 모처럼의 관심에 퍽 기뻤었지.

 

장례를 치렀기 때문인지 기묘하게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잡은 펜이 아버지가 선뜻 건네준 얼마 안 되는 물건이라 더 그런지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 펜대에 금색 테가 들어간 것은 짙푸른 잉크를 컨버터로 채워 쓰는 만년필로, 대학에 들어가 기말고사에서 1등을 하자 받은 것이다.

 

그 때는 이 펜이 아주 고급품처럼, 아주 보물처럼 느껴졌다.

 

수현의 눈이 펜꽂이로 향했다.

 

검은 만년필을 받고 난 이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펜들은 가격도 색도 가지각색으로 투명한 유리몸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푸른색 얼음같은 몸체를 가졌거나 청록색 장식이 반짝였다.

 

“수현이 왔어?”

 

방문이 열리고 아영이가 다가왔다.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

 

아영이가 팔을 벌려 수현을 안았다.

 

한때는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고는 했던 이 자세는 이제 꽤 편안해서 아영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몸을 기대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려지고는 했다.

 

지금처럼.

 

“이거 너 줄게.”

 

팔을 풀고, 수현은 펜꽂이에서 검푸른 만년필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남색 잉크, 회색 잉크, 펄이 들어간 잉크들, 밝고 파란 잉크, 금속 느낌이 나는 잉크를 한아름 안겨주자 아영이는 잉크와 수현을 번갈아보았다.

 

“갑자기? 이걸 다?!”

 

“당분간 만년필은 쳐다도 안 보려고.”

 

수현은 서랍을 열고 펜꽂이에서 만년필 한 움큼을 꺼내 그 안에다 처박았다.

 

“하지만 잉크는 아까우니까. 상하면 안 되고.”

 

“잘 쓸게!”

 

아영이는 수현의 펜과 잉크를 받아들었다.

 

정리부터 하겠다며 가지만, 아영이는 그걸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기만 할 것이다.

 

그걸 두고 정리를 한 거라며 우길 것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부터 칠이 벗겨진 낡은 펜이 생기 없이 빛을 반사했다.

 

“이거 줄 테니까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무슨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수현은 펜을 부숴 버리는 대신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일도, 아직 자신에게 상처를 남겨 숨 쉬고 볼 때마다 피를 흘리게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자신이 울고 화를 내던 모든 일이 이제 자신의 마음에 작은 스크래치조차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극복하면 좋았겠지만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언젠가는 흉터가 되고 잊혀졌다가 돌아보면 또 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나중에도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만년필을 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까지 그러지는 않겠지.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망설이다가 서랍을 열고, 넣고, 닫았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나 면 먹고싶어!”

 

“어 나 며칠동안 국이랑 밥만 먹었더니 그건 좀.”

 

“국물이 싫은 거지? 내가 만들 테니까 비빔면은 어때?”

 

“계란 삶아서 넣자,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만년필을 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물 좀 올려줘, 얼음도 넣을까?”

 

만년필은 만년필일 뿐이니까.

 

 

어느 화장품 요정의 엔딩

2020. 1. 10. 23:08 | Posted by 호랑이!!!

거짓말이지...?”

 

나는 멍하니 팩트의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난생 처음 사 본 팩트에서 나타난 내 작은 요정은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와 접점이 생기도록 도와주었고 화장으로 내가 더 예뻐지게 도와주었으며, 더 날씬해지는 방법과 더 또렷한 눈매와 더 나은 몸매를 얻게 도와주었다.

 

공부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피부가 나빠진다며 일찍 자라고도 알려주었고 시험지 풀이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면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가 피자와 치킨, 친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흔들릴 때마다 샐러드를 한 번 더 내밀며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비록 성적은 떨어지고 정말 친한 친구들은 멀어졌지만 같이 밥 먹고 과제할 친구는 많았고, 더 이상 단거리 달리기에 11초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옷을 골라도 내 몸에 맞았고 심지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선배와 사귀게 되었었고.

 

작은 성과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내 요정.

 

요정은 지금까지 무엇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별을 정복할 수 있어.”

 

요정은 기괴하게 깔깔 웃어젖히더니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고개를 홱 숙였다.

 

“100. 그 이전부터 하던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거든.”

 

? 어떻게?

 

전쟁? ? 환경오염?”

 

바보 아냐? 내가 지금까지 네 옆에서 뭘 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원반이 보였다.

 

하얗고 푸른 구름 사이에서 그것은 종말을 알리는 무언가처럼 땅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널찍한 화장대에 가득한 립스틱, 틴트, 립쿠션, 립글로즈,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프라이머...

 

겨우 저런 걸로?”

 

겨우?”

 

요정은 작은 창을 만들었다.

 

그 창 위에는 여러 뉴스 기사와 잡지, 신문 같은 것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천연+기능화장품으로 1030 女心 잡을 것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욕심이 없다

 

정규직 진입 비율은 9:1”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 17%에 불과...”

 

댓글도 드문드문 보였다.

 

요정은 그 옆에 작은 창을 하나 더 만들었다.

 

너도 곧 활용 될 테니까 보여줄게. 이 수치는 우리의 힘이야.”

 

한 쪽에서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잠시 흔들리더니 20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다.

 

우리는 작지. 지능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걸 전부 활용할 생각을 하거든. 우리 모두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

 

작은 창이 하나 더 생겼다.

 

180 정복할 수 없음

150 주의 요망

130 안전

 

이건 너희 수치야.”

 

우선 점수가 50 올라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크기 점수라고 했다.

 

그 점수는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80... 100... 117... 125... 128.... 130...

 

느려지는 속도에 애가 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속도라면 180은 안 되겠지만, 제발...

 

그러나 숫자는 135에서 그쳤다.

 

“...이것밖에 안 돼?”

 

허망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내 요정이 깔깔 웃었다.

 

이만하면 많은 거지!”

 

한 쪽은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 그 쪽을 깎아내리고 괴롭히는 데 열정을 쏟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꾸미는 데에 불필요하게 신경쓰잖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수술하면 마치 고장난 물건을 대하듯이 고쳤다고 하고!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진 거 알겠어?

 

고등학생 때까지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했다며? 지금 네 성적은 어때? 만족스러워?

 

네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느껴져?

 

아니겠지.”

 

요정이 웃었다.

 

눈가에 그은 선이 짝짝이인지 아닌지, 나시를 나같은 몸에 입어도 되는지, 화장품을 잘 안 쓰게 되면 괜히 돈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네가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지.

 

A는 거울을 보았다.

 

요정은 멋대로 떠들었다.

 

거울 위에는 수많은 플라스틱들이 반짝거렸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빛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얼마 전까지라면 예쁘다고 했을 그러한 장면이다.

 

사실은 지금도 예쁘다고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그 감동은.

 

내가 잘만 하면 얼굴과 미래, 주위까지 바꾸어줄 거라고 믿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는 예전만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기이함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의외로 외계인의 말이었다.

 

“...네가 그대로였다면, 저 수치에 1이 더해졌을 텐데 말이야!”

 

“1? 10도 아니고 1?”

 

“70억 중에서 한 사람이 1이라는 숫자를 더 올릴 수 있다면 대단한 거지.”

 

나는 숫자를 돌아보았다.

 

135

 

70억 명이 모여서 만든 135라는 숫자에 내가 1을 더하는 인간일 수 있었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너도, 사람들도 다 다시 활용될-”

 

찌익.

 

내 칼이 외계인의 날개를 찢었다.

 

눈썹을 다듬을 때 썼던 칼이 날개를 뚫고 벽에 박혔다.

 

이 절망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상하게 내 의식이 또렷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멀어졌던 친구 중 하나였다.

 

여보세요?”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너 괜찮아? 너 자취방이 나랑 가깝지, 내가 갈까?]

 

아냐, 아냐, 내가 찾아갈게.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다 가방을 찾았다.

 

핸드폰과 작은 지갑 하나만 넣어도 꽉 차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방이라 이걸 멜 때면 쿠션과 립스틱과 또 무슨 자질구레한 물건들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야 했다.

 

가방을 뒤집어 안을 비우고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외계인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제대로 주머니가 달린 운동복 바지에 핸드폰을 밀어 넣고 A는 집을 나섰다.

 

이 세상의 어디에선가 띵, 소리가 나며 1351이 더해졌다.

 

.

.

 

.

.

.

 

.

.

.

.

 

그리고 그 소리는 몇 번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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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30

2019. 10. 13. 19:33 | Posted by 호랑이!!!

 

새벽.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오른편에는 사나기가 몸 선이 비치는 잠옷을 입은 채로 얇은 이불을 몸에 감고 누워 있고 왼편에는 슈체른이 마찬가지로 몸 선이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자기 직전까지 공주가 내려준 잠옷을 입고 엎치락 뒤치락 장난을 쳤으니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자신도 그렇게 장난을 치고 놀았건만 왜 이 시간에 일어난 거지?

 

아라벨라는 밖을 내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떠 있고,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

 

겉옷만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어째서인지 아라벨라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온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를 화나게 하고 잠재울 수 있는 무언가가.

 

높이 자란 나무가 뽑힐 것처럼 흔들리며 땅이 같이 움썩거리고 누군가 잡아당기고 미는 것처럼 구름이 움직인다.

 

그 구름에 가리우고 드러나며 촛불처럼 흔들리는 달빛에.

 

아라벨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마치 산에서 보았던 것처럼.

 

흐르고 멈추는 무언가가 아라벨라와 나무들과 구름과 모든 것들을 둘러싸고 빛났다.

 

손으로 막으면 막히고, 헤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것은 비처럼 창문과 모든 물건들을 타고 흘렀다.

 

몸에 쏟아지는 이 거친 바람을 맞으며 아라벨라는 눈가를 문질렀다.

 

바람이 거칠어지며 더 자세하게 느껴졌다.

 

떠나야 한다.

 

짝을 잃은 거대한 것이 온다.

 

하지만 어디로?

 

그것은 분명 아라벨라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커다란 침대의 한 쪽에는 편안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사나기 공주와 아무튼 튼튼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슈체른이 누워 있었다.

 

“...꿈인가?”

 

뭐가 말입니까?”

 

으악, 깜짝이야. 언제 깼어?”

 

깨신 것 같기에 같이 깼습니다.”

 

으으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세찬 바람은 간 데 없고 산들바람이 지나가는지 나무 이파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햇살은 따스하고 맑게 세상에 빛을 내리고 있었다.

 

진짜 꿈인가.

 

아라벨라는 기지개를 쭉 켜고는 다시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일어난 김에 씻으십시오. 옷도 입고.”

 

“...잠을 설친 것 같아.”

 

안 피곤한 거 다 아니까 일어나시지요.”

 

아라벨라는 쳇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어떻게 알아? 그런 걸.”

 

그야 어제는 바람이 충만했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람, 하고 뒤돌아보았지만 슈체른은 이미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나간 차였다.

 

아라벨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나기 공주도 일어났고 셋은 사나기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에는 이미 아라벨라 나이 또래에서부터 마르틴보다 한두살이나 많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

 

길쭉한 테이블에는 문양이 다른 은접시가 늘어섰고 접시마다는 샌드위치나 케이크, 귀한 과일이 담뿍 놓여있었다.

 

심지어는 주전자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도 모를 단지가 제각각으로 몇개나 놓여있었고 아라벨라는 그 중 하나를 살짝 열어보았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흑색 설탕을 보았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아가씨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기를 맞았다.

 

응접실 문이 닫히고 잠겼는지 딸깍 소리가 나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지 미동도 없었다.

 

불쾌할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은 경계심을 숨기지 않아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 앞에 섰다.

 

그럼 이 모임에 처음 온 이를 소개해주어야겠지. 다들. 이 쪽은 렐리악의 아라벨라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라벨라가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일부는 인사를 해 주었고 일부는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만 있어 사나기가 일일히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카샤 백작, 아폴리칸 자작 영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 말리우 백작 영애, 루일라 후작, 덱스터 공작 영애, 라크 백작.

 

사나기는 그들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았었기에.

 

그것도 악명이.

 

카샤 백작은 사치가 심하고 남자를 좋아하고, 아폴리칸 자작 영애는 입을 벌리면 커다란 뻐드렁니가 보였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는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고, 말리우 백작 영애는 뚱뚱하고, 루일라 후작은 유행에 뒤떨어진데다 다리를 절고, 덱스터 공작 영애는 이상한 취미가 있고 분위기를 못 읽고, 라크 백작은 어린애를 좋아하고 잔인하다고 했지.

 

공작 영애가 손을 들었다.

 

바실리님과는 무슨 사이이지?”

 

제 할머니 되십니다. 왕궁에 오기 직전까지 할머니 댁에 있었습니다.”

 

에일라, 그 사람이야. 옛날에 렐리악 백작의 결혼식 때 바지 입었던.”

 

말리우 영애가 속삭이자 덱스터 공작 영애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더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럼 아라벨라가 여기 있는 거,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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