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침대 옆, 탁자에 있는 거울이었다.
하얀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겼고, 엄한 표정이지만 그럭저럭 잘 생겼으리라고 짐작되는 얼굴에는 가면 위에 간 금처럼 흉터가 있었다.
얼굴에는 흉터가 있고 손에는 두 가지 굳은살이 있었는데 하나는 검을 쥐었기 때문에 생긴 손바닥의 굳은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펜을 오래 쥐었기 때문에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이다.
거울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빤히 바라보았다.
오래 일해서인지 눈 아래에는 푹 잤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있다.
펜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팔뚝이 그렇게나 매끈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약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거울을 덮어두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연한 노란색 벽지에서 하얀 시트로 시선을 느리게 내리면서 머릿속 서랍을 뒤졌다.
이 침대에 눕기 전에, 눈을 감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진공 청소기’라는 단어를 누구에게서 들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 아까, 혹은 그 전에 내가 무슨 옷을 입었지? 내가 무엇을 마지막으로 입에 대었지?
수없이 많은 서랍장이 열렸다가 제대로 닫히지도 않고 다음, 다음으로 이어졌다.
한참이나 희미한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연노랑 벽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문득 열린 서랍장 안쪽에, 바스락거리는 포장지가 있었다.
빨간색,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포장지.
테두리는 황금색이고 동그란 초콜릿을 싼 것.
그 초콜릿을 집은 길쭉한 손이 있었다.
자신처럼 검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 울퉁불퉁한, 빈말로도 곱다고는 못 할 그런 손.
그 손가락이 동그란 초콜릿을 집어 제게 내밀었다.
이미 단 것을 지나치게 먹어 속이 더부룩한 상태였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기분좋게 삼켰던 기억이 났다.
그것을 입으로 받아 물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기분좋게 눈을 가늘게 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지었다.
“이글...”
“깨자마자 그 녀석부터 찾아?”
문이 열리고 아마도 알고 있을 사람이 들어왔다.
같은 색의 머리카락은 빗어서 물결치고 그야말로 우아하다는 느낌의 사람이.
“몸은 좀 어때?”
“누구냐 넌.”
“이글놈은 기억하면서 난 기억 못 하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누구지?”
“다이무스 홀든, 내 형이다.”
뭔가 필요한 거 없나? 물이라도 좀 가지고 오라고 이를까?
다이무스는 하얀 머리카락을 빤히 보다가, 짧게 말했다.
“초콜릿.”
같은 시각, 이글 홀든도 잠에서 깨어났다.
이글 홀든은 일어나자마자 몸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의 머릿속은 처음부터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안타리우스의 마크가 언뜻 드러난 단도가 달빛 아래 번뜩이는 기억이.
도의 날은 예리했고, 푸르스름하게 빛을 반사했고, 두 사람을 베었다.
단번에.
그리고 누군가 외쳤다.
그 능력자는 하나를 제외한 사람의 기억을 빼앗아간다고.
그래서 이글 홀든은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억을 빼앗아간 그 사람의 얼굴을 이 눈에 새겨서 반드시 처치해버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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