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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벨져] 하얀 눈

2018. 6. 27. 05:26 | Posted by 호랑이!!!

루이스는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종이쪽에는 언제나 건성인 사람이 썼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글씨로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는 그 주소를 따라왔다.

 

종이의 주소는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촌구석이었다.

 

간판에 녹이 슨 식료품점과 문조차 지저분한 잡화점을 지나 마을 끝에 있는 집으로 가며, 루이스는 추천받은 대로 꽤 괜찮은 포도주 한 병을 샀다.

 

살 일이 드문 포도주 향을 맡아보곤 루이스는 이글이 건네준 잡화 꾸러미를 살짝 흔들어보았지만 깨지지 않게 천과 신문으로 싼 것인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을 끝의 집.

 

이 주소는 이글이 준 것이었는데, 이글이 잘못된 주소를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집을 본 순간 루이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원은 황폐하고 경첩은 기름을 치지 않았는지 끼익 하는 불쾌한 소리가 나고.

 

집의 벽에는 덩굴이 올라가고 있고 문의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지고 색이 바래서...

 

폐가... 아니, 흉가?

 

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이질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집으로 가니 문은 잠겨 있었다.

 

정말 제대로 된 주소를 준 것인지 잠시 의심했지만 이글이 맡긴 열쇠로 문을 열었더니 삐그덕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고,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났다.

 

"이글? 늦었다."

 

집은 지나치게 작았다.

 

이 작은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도 방이 네 개쯤 딸린 이층집에서 사는데.

 

이 집은 단층이다.

 

좁고 작은 부엌에 거실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도 난로와 소파에 다리 길이가 각각 다른 나무 테이블이 전부.

 

가장 안쪽에는 방이 하나 있었지만 열린 문틈으로 보건대 거실이나 부엌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다.

 

"늦었다니까, 빨리 이리로 와라."

 

루이스는 그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것은 아마도 침실인데, 가장 안쪽 벽에 침대가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탁자와 의자, 투박하고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침대는 철사로 만든 철사 침대에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시트를 깐 저급품이었는데 마치 어느 영화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벨져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서, 얇고 하얀 잠옷 하나만 입은 채, 그 긴 머리를 빗어 늘어뜨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뜬 눈동자가 흐릿하다는 것만 빼면.

 

[제키릭벨져] 릭 생일 축하해!

2016. 12. 13. 21:10 | Posted by 호랑이!!!

늘상 이 곳은 공기가 무겁고 눅눅했다.

 

알지 못했지만.

 

빛은 어렴풋하고, 때문에 차가웠다.

 

알지 못하지만.

 

그나마 빛이 드는 곳.

 

공간의 가운데.

 

그 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한때 우주의 별을 바라보던 눈은 빛조차 알지 못하게 되고.

 

한때 어디든지 걷던 발은 이 곳에 못 박힌 채로.

 

이 곳은 그럭저럭 넓다고 할만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갇힌 것처럼 좁게만 느껴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지만.

 

신도여.”

 

그 좁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이어 다른 사람 또한 들어왔다.

 

뒤이어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였고.

 

공간 안으로 두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 뛰쳐들어왔다.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침입자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일어나라, 나가야 한다!”

 

어딜 간단 말이냐.”

 

가느다란 줄기의 빛으로도 그 사람은 반짝였다.

 

머리카락도, 그리고 파랗게 타오르는 안광도.

 

침입자를 바라보며 아직도 앉아있는 그는, 문득 들짐승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단어조차 인식의 검은 물 아래로 끌려들어가 사라질 즈음 그가 교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도여.”

 

그는 교주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 반응을 하자, 그는 팔을 들어 침입자를 가리켰다.

 

이제 그 침입자는 그를 따라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잡혀 있었다.

 

아마도 그 침입자가 자신을 잡아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도망쳤겠지.

 

그러나 어째서일까, 침입자는 여전히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교주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없애라, 나를 위해.”

 

교주님을 기쁘게 해야 돼.

 

우주와 이 곳을 연결하면, 불이 끓는 화산과 이 곳을 연결하면, 저 차가운 심해 어딘가와 이 곳을 연결하면 사람 하나는 손쉽게 죽일 수 있다.

 

그는 팔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지나치게 가벼운 팔을.

 

, 톰슨!”

 

침입자는 사람의 이름 같은 비명을 질렀고, 때문인지 교주가 웃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는 자신이 교주를 기쁘게 했음을 알았다.

 

 

[벨루벨] 벨져 생일 축하해

2016. 1. 12. 02:45 | Posted by 호랑이!!!

좋아, 잘했어! 믿음직스럽군!”

 

그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공성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벨져는 루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잘했다, 믿음직스럽다니.”

 

그게 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덕분에 살았어요같은 소리를 하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새삼스러워서 그렇다.”

 

“...그게 얼마나 옛날 일인데.”

 

루이스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 오래지도 않았다.”

 

그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 루이스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지?”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 뒤에 시간 있어?”

 

왜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지.”

 

그러자 루이스는 잠시 어물거리다가 옷의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일전에 받은 티켓인데-”

 

안 간다.”

 

“-네가 오늘 생일이라는 말을 들어서, 괜찮다면 써 줄래?”

 

벨져는 성가시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티켓을 쳐다보다가 티켓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았다.

 

앞장서라.”

 

?”

 

내 생일 때문이라고 말한 건 너잖나.”

 

, 그건 그렇지만.

 

우리 너무 진도 빨라...!”

 

그러나 그 말은 무시당했다.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의 내부 구조는 말끔했고 꽤나 현대적이었다.

 

벨져라면 좀 더 고풍스러운 쪽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티켓을 제시하자 이어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요리들도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군.

 

루이스는 맛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맛이 어때?”

 

건넛자리의 벨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말 그대로 우아한 모습으로 애피타이저를 맛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먹던 것보다는 월등히 좋군.”

 

놀랍네. 항상 훨씬 좋은 걸 먹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많아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인처럼 빵 사이에 고기나 야채를 끼워 일을 하며 먹거나, 그조차 준비할 시간이 없으면 건량을 씹으면서 지냈지.”

 

오늘은?”

 

생일이라 억지로 쉬는 시간을 만들었지.”

 

의외로 대화는 부드럽게 풀려 나갔다.

 

메인을 돌려보내고 커피와 디저트가 나왔다.

 

과일을 얹은 달지 않은 케이크 조각을 잘라내다가 루이스는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것을 물었다.

 

대화가 잘 되네.”

 

그런 말을 들을 줄도 몰랐군.”

 

난 네가 날 싫어할 줄 알았어.”

 

? 네가 날 이긴 전적이 있기 때문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눈길을 아래로 내렸고 벨져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루이스가 아무 말도 없자, 벨져는 짧게 웃었다.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었던 거냐.”

 

벨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믿음직스럽군!이라고 외치게 된 녀석이.”

 

그거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다.”

 

그러자 루이스가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디저트 접시까지 비우고 일어날 차비를 하며 벨져는 툭 뱉듯 말했다.

 

축하 고맙다 루이스.”

 

“...별 말씀을.”

 

이 뒤의 찻집은 내가 내도록 하지.”

 

 

생일 축하한다 어린 신도여.”

 

어둑하게 빛이 새어들어오는 공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희뿌옇게 안이 비치는 곳은 푸르스름한 색을 띄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마악 방으로 들어선 사람으로 검은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 얼핏 푸른색으로도 보이는 녹색이었다.

 

그는 한 손에 작은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뒤로 빼어 무언가 큰 것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의 말에도 대답 없이 바닥에 앉아있던 사람은 어딘가 눈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연한 빛 아래에서도 결 좋은 머리카락은 후드 아래에서도 흰 색으로 빛을 반사하고 그의 입술에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흰 색이 어딘가 금속빛을 내며 칠해져 있었다.

 

자아, 선물이다 벨져 홀든. 이 내가 손수 축하하는 것이니 감격해도 좋다!”

 

케이크가 그의 앞에 놓였으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할 수 없겠지만! 크크크크큭.”

 

첫 번째 남자, 제키엘은 뒤로 빼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상처가 난 사람이 발목이 잡혀 거꾸로 들려 내밀어졌다.

 

어때, 이건 기억나나?”

 

“...나지 않는다.”

 

갈색 머리카락에 한쪽 팔을 덮을 정도로 가득한 손목시계.

 

코트와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아마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은 덧칠되기라도 한 듯 떠올리려고 애써도 검은 물 같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애써봐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가? 가령 어떤 말을 자주 했다던가, 표정이라던가, 특정 행동을 많이 했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웃음을 참는 것이 힘들어졌는지 말 중간중간에 웃음을 참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때로는 웃음 약간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것에조차 아무런 감정의 표현을 보이지 않는 채, 벨져는 제 눈 앞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 흔히 말하는 순해 보인다는 인상일 것 같음.

 

만져 보려 손을 뻗었지만 제지당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뿐이라 고개를 저었다.

 

...잠깐, 순간 검은 물 위로 기억 덩어리가 얼핏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어쩌면 초록색 눈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초록색이란 차가운 색 계열이지만 어쩌면 이 사람의 눈은 따뜻한 초록색일지도.

 

“...초록색.”

 

제키엘은 제 아래 앉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쥐어든 발목을 놓았다.

 

철벅 소리를 내며 사람의 형상은 무너졌고 하얀색 크림으로 덮인 케이크 위로 체액이 튀어 자국을 남겼다.

 

아직 갈 길이 남았구나. 그러나 걱정마라,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는 오싹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네가 완전히 다시 태어날 날도 멀지 않았을 터이니.”

 

 

[릭벨?] 조각글/이기적인

2016. 1. 10. 23:44 | Posted by 호랑이!!!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줘.”

 

여행자 릭.

 

어느 한 장소에 오래간 있기보다는 무수한 장소를 스쳐지나가며.

 

어느 누군가와 진득한 관계를 갖기보다는 무수한 사람들과 스치는 듯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아니, 만든다기보다는.

 

누군가와, 사람들과 무언가를 같이하는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와는 담배 한 대 태우는 시간을, 누군가와는 식사를, 누군가와는 또 술을 마실 수 있고 누군가와는 또 다른 무언가를 하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계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책임감이 없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릭 그에게는 원래 가진 비능력자 릭으로서 갖는 생활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여행자 릭으로서의 생활이 길었으니까.

 

비록 비능력자의 삶 속으로 능력자의 삶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 위화감을 만들어냈고 릭이 그것을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릭은 어느 한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결과가 현실과 비현실이 섞여들어 어떤 사람도 진지하게 사귈 수 없다,로 나왔지만.

 

릭은 타고난 낙천성으로 사랑을 하면 달라지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이와 여행을 하며 깊은 관계를 맺는다니.

 

그거 꽤 로맨틱한걸.

 

그러나 상대는 릭이 고심해서 건넨 말을 단칼에 쳐냈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로군.”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소. 나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녀줘, 이 외로운 여행길에 그대가 함께한다면 정말 멋질 거야.”

 

나는 릭 톰슨의 동반자가 되고 싶지 않다.”

 

동반자,를 강조하며 벨져가 말했다.

 

나는 널 위해 내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생각도, 내 휴식 시간에 너와 함께 어딘가로 떠날 생각도 없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좀 더 발전한 모습이라는게 내 삶을 네 삶에 끼워맞추는 것이라면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네 능력자로서의 삶에 돌아올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 비능력자로서의 삶에도 간섭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네가 트와일라잇에 있을 때만, 혹은 능력을 써서 여행하는 일에만 네 시간을 나와 함께하길 원하지.

 

그게 뭐가 나쁘오? 누군가와는 일 년간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일 수 있고, 누군가와는 주말 수영장에서 같이 만나 몇 시간을 보낼수도 있지. 그리고 누군가와는 연인으로서 능력자로서의 삶을 보낼 때에만 만날 수도 있잖아. 사람은 언제나 만나고 헤어져, 그 수많은 시간의 조각 중에서 그대와 보낼 수 있을 때 그대와 보내는 게 뭐가 나빠?”

 

연인이 네 삶을 알고 싶어하고 네 삶에 간섭하고 싶은 것은 뭐가 나쁜가?”

 

그거랑은 다르지 않소.”

 

너와 보내지 않는 시간에서, 너는 내 생각을 할까?”

 

나를 첫 순위로 두지 않는 사람과 정상적인 연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그대가. 이해해 줄 거라고.”

 

벨져는 고개를 저었다.

 

씁쓰레해 보이는 얼굴에서 눈만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그래서 그대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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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벨릭] 혼자가 아냐

2015. 12. 17. 13:20 | Posted by 호랑이!!!

가만히 있기만 하려니 좀이 쑤시는군.”

 

벨져가 그를 홀든가에 데려온지 사흘째에 한 말이었다.

 

검이라도 배워 보겠나?”

 

빌어먹을.

 

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 집안 어르신과 안주인은 첫날에 인사를 나누더니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우셨지, 형제 중 큰 쪽은 공사다망하다며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작은 쪽은 술이다 식사다 보는 쪽이 질리도록 먹고 마시더니 칼질하는거(본인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보여준다고 연무장에 끌고 나가 세 시간 동안 사람을 패지 않나, (그나마) 희망을 품었던 둘째는 릭 그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기본 운동만 한 시간, 대련이 두 시간째다.

 

하다못해 정원을 산책하고 말을 타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놈의 검잡이들은 하는 거라고는 칼질밖에 없으니!

 

운동은 좋은 거다.”

 

아무리 좋다지만 너희는 너무 해대.

 

이 아저씨는 체력이 약해서.”

 

헛소리가 지나치다.”

 

지나치다니.

 

의사가 권장하는 최저 운동 시간은 일주일에 땀나는 운동을 30분씩 2회차... 아니, 3회차던가.

 

아무튼 그 정도라고.

 

바쁘고 연약한 회사원은 그나마도 공성전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이제 돌아가도 될까?”

 

헛소리.”

 

이번에도 헛소리냐.

 

기껏 초대했더니.”

 

심심하단 말이오. 하다못해 근처의 명물을 보여준다던가, 있지 않소.”

 

“...명물이라.”

 

벨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쪽이라고 손짓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도 보여줄 모양인가.

 

그러나 그 발길이 향한 곳은 홀든의 쾌검사들이 연습이나 대련을 하는 널찍한 뜰이었다.

 

이 일대 최고의 명물이다. 신체강화 능력자들의 쾌검 대련.”

 

“...”

 

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네.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슬슬 검 말고 다른 것을 보여줄 때도 된 것 같소만.”

 

릭은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초대해주었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안 된다.”

 

애당초 부모님께 인사 드리라고 데려왔다며, 인사한 지가 옛날이다.

 

릭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벨져.”

 

안 된다.”

 

아무리 요즘 내가 휴가라 한가하다지만, 난 원래 휴가에는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여기도 네게는 충분히 외국일 텐데.”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소.”

 

벨져는 못들은 척 했다.

 

아저씨가 따지지 말고.”

 

“...너무하는군.”

 

아저씨라고 먼저 널 지칭한 것은 너다.”

 

더 이상 훈련을 하지 않는지 벨져는 수건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물을 마셨다.

 

아무래도 난-”

 

.”

 

인상을 찌푸리며, 벨져는 손가락으로 릭의 가슴을 쿡 찔렀다.

 

언제까지 이라고 할 건가.”

 

뭐라고?

 

릭은 벨져가 내미는 수건과 빈 잔을 받아들었다.

 

... , 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릭이 말하자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라.”

 

우리, 여행가지 않겠소? 외국으로.”

 

그러자 벨져의 표정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변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같이 가 주지.”

 

5분 기다려라.

 

벨져는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릭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겨졌다.

 


[릭벨] 11월의 꿈

2015. 11. 27. 01:03 | Posted by 호랑이!!!

오늘로 일주일,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동안 들었던 정보를 종합하면 이 곳이 맞을 텐데.

 

대뜸 액자가 나오거나 안타리우스의 본거지를 발견하는 일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실마리 정도는 나와야 할 것 아닌가!

 

여관으로 돌아와 벨져는 덧입은 겉옷을 벗어 침대에 던지고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길어도 너무 길다.

 

프리츠의 꼬마한테 연락이라도? 아니, 아직은 하지 않을테다.

 

벨져는 테이블에 놓인 것을 팔로 밀어내고 지도를 펼쳤다.

 

테이블에 있었던 쇠그릇과 안에 담긴 사과가 마루 위로 흩어졌다.

 

다녀왔소?”

 

수확은?하고 물어오는 이를 쌀쌀맞게 노려보고 벨져는 수첩을 펼쳤다.

 

분명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수첩에 구멍 뚫리겠소.”

 

방해된다.”

 

릭은 어깨를 으쓱하고 저녁거리를 사오겠다며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금 발품을 팔아 저만치 먼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치킨 샌드위치에 컵에 담아 파는 수프, 그 옆 거리로 돌아들어가면 파는, 디저트로 먹을 애플파이까지 샀더니 저녁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래도 이 거리에서 제일 맛있다는 것으로 샀으니 저녁시간을 한 시간 넘긴 것쯤이야 벨져도 눈감아줄 테지.

 

옆구리에 종이봉투를 끼고 우유 한 병을 사 들고 들어갔더니 방이 난장판이었다.

 

테이블은 뒤집어져있고 의자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의자 중 하나는 다리가 부러져 있었는데 부러진 다리는 바닥에, 나머지 부분은 조각조각나 침대 위에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 중에 술 때문에 실수라도 할 수 없다며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벨져는 한 손에 릭이 마시곤 하던 맥주병을 쥐고 침대에 상체를 기대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도 술병이 있군.

 

하나, , , ...

 

술도 약한 이가 참...”

 

릭은 테이블을 일으키곤 그 위에 저녁거리를 내려놓았다.

 

 

 

 

 

 

 

벨져는 낯선 향기에 눈을 떴다.

 

어두웠고, 일주일이나 머물렀던 여관의 냄새가 아니라 수풀의 향이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기도 하지, 분명 달까지 뜬 밤인데 밝다.

 

가스등 따위의 희무끄레한 빛도 아니고 반딧불이의 색도 아닌, 그런 밝음.

 

독어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릭이 벨져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소? 벨져.”

 

여긴 어디지?”

 

릭은 벨져가 일어나도록 손을 내밀어 잡게 했다.

 

이 길을 따라가 보시오.”

 

벨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덕 같은 곳에 풀과 나무가 가득하게 자라 있고 길은 달 쪽으로 나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길을 따라가면 달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벨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형의 감상적인 부분이 옮았던가.

 

아직 술이 덜 깨서 몽롱했지만 손은 릭에게 맡기고 달에게 걸어갔다.

 

길 끝으로 가자 따뜻한 빛이 눈부시게 자신에게 쏟아졌고, 달은 팔을 벌려 벨져를 안아주었다.

 

아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마을이었다.

 

길마다 구석마다 모든 곳에 촛불, 혹은 기름등잔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래서 밤인데도 모든 곳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촛불 특유의 따스한 빛깔이 땅에서부터 벽을 타고 공기 중에 퍼져나가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향을 태워 향긋한 향기가 감돌게 했다.

 

집 안팎으로 전통 무늬가 가득했고 아이들과 사람들은 발에 하얀 가루나 빨간 가루를 묻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남기며 기뻐하고 있었다.

 

따분하고 느긋하게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소.”

 

릭은 어느샌가 손에 빨간 가루를 들고 있었다.

 

", 보시오."

 

릭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발에 빨간 가루를 묻힌 뒤 하얗게 먼지가 이는 흙바닥에 발자국을 찍었다.

 

어떻소, 그대도 같이...?”

 

벨져는 고개를 저었다.

 

릭은 보란 듯 빨갛게 발자국을 남기며 마을을 돌아다녔고 다시 돌아왔을 땐 꽃과 말린 과일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무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져는 나무에 기댔다.

 

길은 달로 이어져 있고, 저 아래로 내려가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촛불을 태우며 기뻐하는 축제가 있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발자국을 남기고, 향을 사른다.

 

공기에 떠도는 향기는 달콤하고, 때때로 짤랑거리며 장신구로 찬 은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따뜻하고, 낯설고, 다정해서.

 

벨져는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것은 하얀색 침대 시트 위였다.

 

어제 엎어놓고 잤던 테이블은 원래대로 세워져서 위에는 샌드위치며 수프가 있었다.

 

방은 말끔했고, 릭은 의자에 앉아 사과를 베어물고 있었다.

 

잘 잤소? 어제 저녁거리를 사 왔는데 그대가 너무 잘 자길래 그냥 내버려뒀더니 다 식었지 뭐야.”

 

릭은 씻으러 간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데 문득, 릭이 신었던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얇고, 으레 고급 여관에서 주는 일회용 슬리퍼.

 

그 끝에는 붉은 자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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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꿈은 '짧은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인쇄하였습니다.


온라인 발행은 이쪽을 참고하여 주십시오 : http://posty.pe/ms2q7f 

[제키벨져] 립스틱

2015. 11. 11. 23:09 | Posted by 호랑이!!!

귀찮은 놈.”

 

벨져는 드물게 입술을 말아 이를 드러냈다.

 

사려문 이가 창백하고 어둑한 달 아래에서 번뜩 빛을 반사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핏자국도 상처도 보였고 옷도 찢어져 있었는데, 그가 벽에 기댄 앞에는 비교적 최근에 참전하기 시작한 안타리우스의 젊은 교주가 있었다.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

 

경박한 목소리, 벨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들어올린 고개건만 턱이 잡혀 젖혀졌다.

 

제키엘은 씩 웃으며 입을 벌렸다가 손에 힘을 주어 억지로 벨져를 일으키다시피 해서 입을 맞췄다.

 

, -

 

억눌린 소리와 밀어내는 손의 움직임이 보였고 마침내는 무언가에 놀란 듯 제키엘이 입을 떼었다.

 

꽤나 앙칼지게 물린 듯 피가 배어나오는 입가를 손등으로 밀어 닦는 중 벨져가 몸을 일으키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팔을 벌렸고 동시에 등에서 금속 가시가 뻗어나왔다.

 

그 가시에 몸이 걸린 벨져를 잡아 땅으로 누르며 제키엘은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크크크큭, 그렇게 움직여대니 삐뚤게 묻지 않았나.”

 

미친놈.”

 

입가에 묻은 연한 청록색 도료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모양을 내다가 제키엘은 벨져의 목에 매달린 크라바트를 뜯어냈다.

 

평소에까지 입던 재킷 모양 경갑은 어디 가고, 흰 셔츠 차림인 것을 자락을 들자 못잖게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수치심에 몸이 작게 경련하고 움츠러드는 것을 제키엘은 그의 양 팔을 잡고 눌러 막았다.

 

겉모양은 유약해도 속은 그 눈빛만큼이나 강하지, 마음에 드는구나.”

 

어디, 처녀애처럼 구는 이 몸뚱아리를 물어뜯어도 똑같이 구는가 보자꾸나.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가시가 뻗어 벨져의 몸을 억눌렀다.

 

한 번 입술을 대고 느릿하게 색을 입술에 칠하고 다시 입술을 대고.

 

그 일련의 행동은 지나치게 느릿느릿해서 벨져의 정신이 긴장으로 아득해지는 것에 충분했다.

 

달 뜬 밤에 시작했던 것을 희부옇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 끝내고 제키엘이 떠나도 벨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가 정신을 차리고 향한 곳은 기사단 거처가 아닌 다이무스가 쓰는 집이었다.

 

이 시간이면 없겠거니 하고 갔건만 예상 외로 다이무스는 신문을 읽을 때 사용하는 안경을 쓰고 집에서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고.

 

벨져는 이렇다 저렇다 인사를 건넬 생각도 않고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다이무스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안경을 벗으며 욕실 앞으로 갔다.

 

따듯한 물이 나오려면 좀 기다려야 할 거다.”

 

, 형아.”

 

저것도 부탁이라고.

 

다이무스는 제가 입는 옷 중에서 하얀 와이셔츠와 바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것도 꽤나 클 텐데 아예 새로 사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욕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펄럭 펄럭 옷이 떨어졌다.

 

쯔쯔, 아주 구르고 뛰고... 기사단이 벨져를 험하게 굴리는군.

 

안에서는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는 페인트에라도 담갔던 건지 초록색과 파란색 사이의 서늘한 색으로 물든 와이셔츠를 들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홀든] 말 안듣는 동생

2015. 10. 18. 04:28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씨, 전화 왔습니다.”

 

휴식시간, 다이무스는 눈을 감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사무직원 중 하나가 손짓을 했다.

 

어디에서 온 전화지.”

 

기사단입니다.”

 

벨져의 기사단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다이무스는 전화를 받으러 걸어가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보니 어제 저녁에 벨져가 음식을 남기는 것에 대해, 오늘 아침은 머리를 묶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짧게 잔소리를 했지.

 

그 때문에 지금 벨져의 상태는 아마.

 

1. 여기저기 성질을 부린다.

 

...라던가.

 

2. 기사단 앞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해 놓아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라던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왜 다들 벨져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군.

 

까탈스럽고 까다로운 아이이긴 하지만 어려워 할 아이는 아닌데.

 

[벨져 홀든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3. 가출.

 

다이무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전언 철회, 성질 더러운 동생이다.

 

벨져 이 녀석은 일전의 긴 가출 동안 자신이 사라지면 형이 찾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툭하면 가출해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찾으면 자신의 집 침실에서 누워 있거나 서재로 쓰는 방 구석에 있겠지.

 

어찌나 가출을 해대는지, 이젠 저 기사단도 자신에게 찾아달라고 전화를 한다.

 

바빠서 못 찾을 것 같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쪽이 뭐라고 하건 간에 수화기를 놓았다.

 

휴식시간은 아직 얼마간 더 남았으나, 빨리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 서류를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땡땡 종이 치고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종이 쳐서 퇴근 시간임을 알릴 즈음에도 계속 손을 바삐 움직였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옆으로 손을 더듬어 아까 타서 옆에 둔 홍차를 찾았으나,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벨져가 한 손에는 홍차 잔을 손에 쥐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벨져.”

 

형아는 나 걱정도 안 되는가?”

 

전혀.

 

무슨 불의의 사고에 휘말렸대도 사고를 친 쪽이 불쌍하지 휘말리는 벨져는 안 불쌍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건만, 이 동생들은 다이무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너무나도 능숙해서.

 

벨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목을 휙 뒤집어 다이무스가 보던 서류에 찻물을 확 끼얹어 버리더니 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벨져.”

 

찻물이 서류에 번져 글을 읽을 수가 없군.

 

벨져의 발소리는 멀어져만 갔다.

 

벨져 홀든!”

 

, 이 말 안 듣는 녀석.

 

다이무스는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 저녁에는 무릎 위에다 엎어놓고 빨갛게 자국이 나도록 때려 주지.

 

 

이글은 연합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맨발에는 쇠 양동이가 걸려 이따끔 발을 흔들 때마다 휭 돌았고 늘 올려 묶던 머리는 풀어져 몸이며 소파 위에 흘러내렸다.

 

발치에는 양동이와 같이 쓰는 빗자루나 대걸레가 같이 놓여서 소파에 기대고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발가락에 걸어 몇 번 더 양동이를 흔들던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비비꼬며 전화기의 번호판을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차르륵 차르륵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얼마간 기계음이 나고, 수화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다]

 

잘 있었어?”

 

[별 용건이 없다면 이만 끊으마]

 

매몰차긴, 우리 형.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 동양계 능력자들이 대거 참전했는데 말이야~ 그 중 둘이 그랑플람이거든?”

 

누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요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근황 정도로 들릴만한 정보들을 말하고 나자,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꼬는 것이 빨라졌고 어쩌다 실수로 양동이를 떨어뜨렸는데 조심스레 발끝을 뻗어 다시 걸었다.

 

있지- 이번에도 물어보는건데 말이야아-”

 

어딘가 머뭇거리고, 어딘가 말꼬리를 늘이고, 어딘가 수줍어하는 목소리.

 

마치 예닐곱살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길에서 꺾은 들꽃을 내밀기 직전의 목소리.

 

이글은 그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이스 때문에 영국으로 오지 않는거면- 내가 죽여줄까?”

 

뎅겅-.

 

이글의 발에 걸린 양동이는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루이스를 죽이는데 그렇게 집착하는 거냐]

 

그치마안- 내가 여기서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그것밖에 없단 말야-”

 

맨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이글은 해사하게 웃었다.

 

천진하고 밝은 웃음이라서 누군가 보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이게 해줘- ?”

 

[네가 루이스를 죽여도 내가 그쪽으로 당장 가는 일은 없다]

 

네에-”

 

이글은 짐짓 토라진 목소리를 내어 대꾸하고는 허공으로 새끼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 부를 거지?”

 

[...]

 

부를 거지?”

 

[...]

 

약속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이글은 끊어졌다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서 소파 위에서 굴렀다.

 

, . 벨져 형.”

 

너무 좋아.

 

바르작거리다 떨어졌는지 쿵,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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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도르의 루이스와 슬리데린의 벨져의 관계는 그거다.

 

친구보다 먼, 라이벌보다는 가까운.

 

아무리 학생수가 적다지만 루이스와 벨져는 사실 3학년까지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한두번 본 적은 있다지만 서로 예쁘네라는 감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런 그들이 제대로 얼굴을 마주본 것은 벨져와 루이스가 3학년이 되어 각기 추격꾼과 수색꾼으로 퀴디치 팀 멤버가 되었을 때였다.

 

결승전에는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이 맞붙게 되었고 후반 3분을 남겼을 때 스코어는 20:130이었고 루이스는 벨져에게 제안했다.

 

앞으로 3분 동안, 너 혼자서만 골을 넣는 거 어때?’

 

그 정도 핸디캡을 달더라도 내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지

 

그러나 그 이후 벨져는 다섯 번의 시도에서 한 골밖에 넣지 못했고, 그동안 그리핀도르는 두 골을 더 넣고 스니치까지 잡아 역전했다.

 

이러한 역전승에 그리핀도르를 응원하던 학생들은 전부 일어나 환호했고 벨져는 그 일 때문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퀴디치 연습까지 빠질 정도였다나.

 

어쨌거나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다.

 

벨져, 이거 뭐야?”

 

이건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설명해준 것 아닌가.”

 

방해받아서 짜증난다는 듯, 벨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여기서 만드라고라는...(중략)...이다. 그리고 거기, 오소리 가죽은 잘게 썰어서 넣어야 한다고 기술해야지.”

 

, .”

 

성의없이 대꾸하지 마라. 이따 읽어봐줄테니 다 쓰고 내놔.”

 

한창 소리죽여서 말을 하는데 저만치 토마스가 책장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쪽은 1학년들 추천도서가 있는 곳인데.

 

그러고보니 그거 들었어?”

 

뭐 말인가.”

 

피터 모나헌이라고, 래번클로 1학년. 걔가 스타이거 교수님 수업에 토마스 하나 보러 무작정 찾아갔다가 쫓겨났다더라.”

 

, 소문의 30.”

 

그 뒤로 피터가 보이지 않는다더니, 찾으러 다니나 보네.”

 

벨져는 잉크에 깃펜을 푹 담갔다가 꺼내 양피지에 글을 적으며 대꾸했다.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예전에 이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결국 정원 구석에서 덜덜 떠는 것을 찾긴 했지만.”

 

그건 좀 귀엽게 들리는데?”

 

실제로 귀여웠었다. 달래기 위해서 따뜻한 코코아와 마시멜로를 유모 몰래 가져다주려고 고생하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형이면 어쩔 수 없이 해주게 된다니까.”

 

그러고보니, 넌 형제가 있나?”

 

있긴 있어.”

 

거기서 루이스가 무어라 덧붙이려는 순간, 사서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들의 옆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 다, 잡담은 나가서 하도록!”

 

결국 쫓겨나, 그들은 양피지 다발과 잉크병을 손에 들고 복도에 섰다.

 

아 곤란하네, 도서실 다음으로 공부하기 좋은 곳은 휴게실인데 우린 기숙사가 다르고, 밖은 추운데.”

 

빈 교실이라도 찾아보지. 어지럽히지만 않는다면 교수님들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루이스는 옷깃을 여몄다.

 

아 춥다-.”

 

벨져는 루이스의 망토를 힐끗 보았다.

 

이 날씨에 입기에는 지나치게 얇은데? 그리고 안에 한 목도리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품이고.

 

루이스.”

 

벨져가 부르기 전에, 복도의 모퉁이에서 누군가 먼저 루이스를 불렀다.

 

트리비아.. 교수님.”

 

카리나 교수님, 안녕하세요.”

 

안녕, 홀든.”

 

박쥐 애니마구스이고 변신술 교수인 트리비아 카리나는 뱀파이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우아하고 뇌쇄적으로 아름다웠다.

 

들리는 말로는 팬클럽까지 있다지.

 

둘이 여기서 뭐하고 있어?”

 

공부할 교실을 찾는 중이예요, 교수님.”

 

그러자 트리비아 교수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저절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5층에 있는 내 교실이라면 써도 좋지만, 다 쓰고 정리하는 거 기억하렴.”

 

고맙습니다.”

 

다시 복도를 돌아가 계단을 올라갔다.

 

넓고 좁은 계단을 오르고 사라지는 발판을 뛰어넘어 5층까지 올라갔다.

 

루이스는 변신술 교실을 열었다.

 

변신술 수업 외에는 쓰이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교실 구석에는 달팽이가 가득한 수조가 몇 개나 놓여 있었다.

 

리포트 다 쓰고 주방에 간식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싫다. 내가 왜 너랑 간식이나 먹으면서 한가하게 굴어야 하나.”

 

그럼 빗자루 타러 갈래?”

 

루이스, 리포트에 집중해라.”

 

차갑게 거절하고, 한동안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종이에 글자를 적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정적은 이내 깨졌는데, 벨져는 다 쓴 리포트를 다시 점검하며 루이스에게 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 말인데. 장갑으로 할까?”

 

장갑은 받을 사람이 있으니까 다른 걸로.”

 

모자가 좋겠군.”

 



최근의 마법계는 꽤나 치열했다.

 

모두가 열광하는 퀴디치 시합 결과가 예언자일보 2면에 실릴 정도로.

 

퀴디치를 제치고 예언자일보 1면에 실린 내용은 머글 태생 초능력자에 관한 의견으로 싸우는 해리 포터와 지니 포터, 그리고 헤르미온느 위즐리에 관한 얘기였다.

 

프랑스인들 정치 얘기마냥 갑론을박이 온 나라에, 온 마법계에 치열했지만 딱 한군데, 이 모든곳과는 상관없는 곳이 있었다.

 

 

 

 

“...예언자일보도 참 할 일이 없군.”

 

다이무스 홀든은 1면을 다 읽고 감상을 말했다.

 

그에게 있어 이번 1면은 그저 유명인들이 가정 불화로 싸운다더라 하는 가십 기사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옆에서 우아하게 포리지를 떠 먹던 벨져 홀든이 제 형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지, ?”

 

“...이렇게 순순히 아침을 보내게 할 리 없는데, 불안하군.”

 

하지만 겉보기만 봐서는 태평하기 그지없다.

 

혹시 모르지, 이글이 드디어...”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스런 새 소리가 들리고 부엉이들이 한데 얼키고 설켜 거대한 새 덩어리를 만들어 깃털을 흩뿌리며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드디어 뭐?”

 

실언이었다, 형아.”

 

깔끔하게 말하며 벨져는 토스트 한 쪽을 들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이글 홀든!”

 

이글!”

 

동시에, 슬리데린의 다이무스 홀든과 래번클로의 토마스 스티븐슨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항상 미안하다, 스티븐슨.”

 

“...다른 기숙사 일에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옆에서 보던 벨져는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적 증거는 없겠지만 이 소동의 주범은 자신의 동생, 홀든의 막내 이글 홀든이렷다.

 

이 망나니놈.

 

그리고 벨져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망나니라는 천한 말을 생각했다는 것을 반성했다.

 

원래라면 형과 함께 이글을 혼내야겠지만 올해 래번클로 반장으로 임명된 토마스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 해주니 뭐.

 

벨져는 이글과 같은 기숙사의 반장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뒤치다꺼리와 기타 잡무로 고생하는 토마스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 잠깐, 내년이면 형은 졸업하고 없을텐데, 다음 잔소리 담당은 나인가.

 

벨져는 미간을 꾹 눌렀다.

 

하늘을 베껴온 듯한 아름다운 천장과 말끔하고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각 분야에서 이름난 마녀와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교수진.

 

저녁이면 길고 넓은 테이블 위로 수십가지 호화로운 만찬이 펼쳐지는 연회장.

 

그리고 여기저기로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동료들과 재밌다는 듯 같이 소리지르거나 비명을 지르며 숨는 선배들, 후배들.

 

바닥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수많은 부엉이 깃털, 귀를 울리는 꽥꽥거리는 소리.

 

그리고 신이 나서 무어라 소리지르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제 형에게 잡혀서 혼나는 동생.

 

이것이 창립 이래 우수한 마법사와 마녀를 무수히 많이 배출하였으며 세상을 위협했던 볼드모트를 막아낸 마지막 격전지.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평화로운 아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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