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크나트는 햇볕을 쬐었다. 오리지널이 말하기를, 그는 원래 피부가 희었다는데 야외활동을 오래 하다보니 그을렸다나. 도플갱어 크나트는(편의상, 크나트는) 날 때부터 태닝한 상태였던 손등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의 공기는 따뜻했다. 지는 낙엽과 마른 나무껍질 향이 햇볕 아래 퍼졌다. 저만치서 꼬리가 통통한 청설모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꼬리털이 폴짝거리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결쳤다. 청설모는 나무 위로 힘차게 올라갔고 시선이 따라 올라가며 크나트는 그 동그랗고 하얀 배를 구경했다. 이왕 누군가의 도플갱어로 태어날 거였다면 저런 청설모는 어땠을까. 연못 속의 물고기는, 나무 위의 흰 새는? 저기 바람에 흔들리는 잎 넓은 커다란 식물은? 저런 동물이나 식물이었다면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일 없이 마음이 평화로웠을까.
“형제님-”
“네에- 스호르씨.”
“...”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더니 저쪽이 눈을 질끈 감는다. 왜일까, 나는 이렇게나 무해하고 다정한 도플갱어인데.
“일단 오늘 할 만한 일을 스케줄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까만 옷에 물에 젖은 잎을 연상시키는 사람은 쪽지를 들어올렸다.
“이제부터는 베니스로 갑시다. 베니스로 가서 건축물을 구경하고 젤라토를 먹을 겁니다. 그 사람이 단 것을 좋아하니 당신도 좋아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 다음은 곤돌라를 타고 오 솔레미오를 들으며 한 바퀴 돌고, 가면극 구경도 하고, 여유가 되면 가죽 제품도 구경하고... 하는 식으로 읊는 것을 들어 주었다.
딱딱하고 비협조적으로 생겨서 자신에게 밖을 구경시켜 주라는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스케줄도 짜오고 바지런히 종종거린다니 참 귀엽지. 미간도 찡그리고 인상도 날카로워서 별로 내키는 얼굴도 아닌데. 크나트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잠시 매끈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손을 떼자 다시 깊게 골이 파인다.
“...”
어쩐지 표정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크나트는 몇 번 더 꾸준하게 문질렀고 미간이 빨갛게 되었는데도 골이 파이자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상하다, 이런 거 생길 나이는 아니라던데.”
“당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캬악, 그가 소리질렀다. 그러다 앞에 놓인 것이 겉늙어 보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채 한 살도 안 된 갓난아기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마른세수를 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알아두십시오. 다른 사람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은 범죄입니다.”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알겠어.”
율리안은 순순히 손을 떼는 것을 보고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마피아한테 범죄가 뭐 어떻냐느니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걸 이해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갑자기 그런 남자한테 던져지고 나서는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자기 맘대로여서 자신의 도덕성까지 고장날 것 같았는데! 정상적인 반응이다!
“울어?”
내가 울린 거야? 라면서 손을 뻗다가 허락이 없으니 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손을 보니 진짜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율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저만치 먼 곳을 가리켰다.
“갑시다.”
도착한 곳에서 크나트는 가면을 먼저 구해 썼다. 미색 바탕에 금색, 빨간색, 초록색 물감을 더한 평범한 카니발 용 가면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그에게 내려온 직업병... 아니지, 유전병인가? 율리안도 반강제로 고양이귀 가면을 썼다. 아마 이걸로는 모자라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크나트는 먼저 배에서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 위라고 들었는데도 물비린내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바다에서 으레 나고는 하는 소금 냄새 같은 것도 없어 이 안에 빠진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게 바다 위에 만든 인공 섬이구나.
율리안은 뒤따라 내리고 거리 노점에서 젤라토 두 컵을 샀다. 아이스크림보다 조금 더 쫀득한 질감이라 크나트는 이로 스푼 째 긁어먹었다. 그의 안내인은 성실한 성격인지 메모지까지 확인해가며 근처의 유명한 건물이나 장소에 대해 설명을 했다.
“...특히 이런 곳에서는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로비가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아마 대대적으로 보수하지 않는 한은 계속 그러할 겁니다.”
“장마가 오면 어떻게 해?”
“물이 오래 있으면 썩으니 모래주머니 같은 것을 두거나... 방수 대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따개비 같은 게 자랄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일부러 바닷물을 끌어들였다가 양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율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저것이 보이는대로 오래 묵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건 애다. 그러니 이런 대응은 그의 동심을 지켜주는 것일 테다.
이후로는 평탄했다. 날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곤돌라는 한 번 휘청이지도 않고 물 위를 미끄러졌다. 반쯤 녹은 젤라토를 떠먹었고 흔하지만 비싼 식당에 들어가서 별 것 아닌 음식도 먹었으며 사치스러운 정원과 오래된 건물을 구경하고 거리 악단이 공연하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율리안은 심란했다.
얼굴이며 행동이며 사소한 습관 같은 것이 닮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생물-생물은 맞겠지?-이니까. 하지만 모습이라던가 행동 외의 어딘가에서 동일인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무언가가 거듭 인지능력에 영향을 끼치려 해 자칫하면 헷갈려 버릴 것 같아.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보다 보니 크나트와 다른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발견해서, 자꾸만 본래의 크나트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양쪽에 실례일 테지.
“나 잠시만 저기 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누가 따라가자고 해도 가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 말은 제가 당신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율리안은 미묘하게 눈가를 찡그리며 크나트를 보냈다. 관광객 대상으로 자질구레한 잡화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을 보다 율리안은 핸드폰을 꺼냈다. 또 다른 당신과 곤돌라를 타고 젤라토를 먹었습니다. 전송.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송을 누르려는 찰나 등 뒤에서 단단한 것이 찌르듯이 닿았다.
“조용히 핸드폰 집어넣어. 네가 저 녀석 동행인이지?”
“저 녀석이라면...?”
“크나트 리비오 율리케.”
“...저 사람은 엄밀히 말하자면 크나트 당사자가 아닙니다.”
팔이 아프게 잡혔다.
“숨기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우리가 한두 달 따라다닌 줄 알아? 닥치고 따라와.”
크나트는 잡화점에서 이것저것을 사서 나왔다. 이런저런 미니어쳐, 엽서, 스노우볼, 포장지에 곤돌라가 인쇄된 과자며 초콜릿 등. 그러나 멋없는 가게 상호가 찍힌 갈색 봉지를 안고 나왔을 때 가게 건너편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쪽인가?”
예민한 기감으로 걸리는 곳이 있다. 겨우 전화나 하러 갈 만한 곳은 아니고. 저 블록의 가게들은 낮에나 장사가 될 만한 것들이니까 이제 슬슬 문 닫을 때지. 가정집들과도 거리가 떨어졌으니 이제 저 근처로는 일부러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기척이 잡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여기에는 없지만 저쪽에 한 패로 보이는 인간이 하나 더. 가까이 가자 점점 소리가 커졌다.
“그 놈만 죽이면 돼. 계급이 올라갈 거야.”
“얼마 전에 미카한테 한 짓 들었어? 미친 자식이야.”
아하, 이게 본체의 직업에 따르는 부산물이군. 크나트는 모퉁이를 돌았다.
“날 찾은 거로군.”
“제길, 어떻게 왔지? 안내인이 간지는 얼마 안 됐는데!”
“그건 네놈들 알 바가 아니고.”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골목 안으로 파고들었다. 크나트가 손을 뻗자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근거리에서 쏜 것이 안 맞을 리 없었고, 몸은 총알이 관통할 때의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다가 쓰러졌다. 율리안이 기겁해서 일어나려고 했다가 강제로 앉혀졌다.
“형제님!”
“어휴 끝났다~”
“이건 어떡하지?”
“그 쪽에 얘기가 들어가면 성가셔져. 역시 죽여야겠지.”
다시금 장전하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죽는다고? 골목이 어두워졌다. 율리안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이 어두워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려줘.”
누워있던 몸이 일어났다. 스스로 땅을 짚고 몸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몸에 실을 달아 당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에 마피아들은 다시 총을 뽑아 그 몸에 갈겼다. 연달아 총성이 울려퍼지고 총알이 떨어진 것인지 찰칵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이게 총에 맞는 느낌이군. 새로운데...”
길쭉한 손톱이 살을 파고 들더니 구겨진 총알을 꺼냈다. 금속 조각이 땅에 떨어지자 캉 소리가 났다. 손바닥에 총알이 하나 둘 올라가더니 까드득 소리를 내며 뭉쳐졌다가 땅을 굴렀다.
“눈을 감아, 스호르 씨.”
두 번째 크나트의 마음 속에는 본체가 가진 것보다 몇 배쯤 더 많은 비틀린 감정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어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며, 그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두 번째는 쭉 늘어난 팔로 첫 번째를 흉내내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율리안이 제대로 눈을 가렸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손톱을 휘둘렀다.
얼마 안 가 상황은 정리되었고 두 번째가 율리안을 불렀을 때 율리안은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골목에서 눈을 떴다. 해가 져서 붉었던 길이 이제는 완전히 어두웠기에. 가로등이 켜지기 전까지 율리안은 두 번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두 번째는 하얀 빛 아래에서 검은 역광을 드리운 채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갈까?”
피에 젖었던 손은 손수건으로 대강 닦여 있었다. 그러니 잡으면 틀림없이 끈적하게 손을 더럽힐 것이다. 그러나 율리안이 스스로 일어서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손을 잡으려는 찰나, 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달링, 나랑도 안 간 베니스를 그 녀석이랑 가서 그렇게 알콩달콩...?]
“...상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나 닮은 녀석이라면 이미 달링이랑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상상을...]
두 번째가 다음 배 시간을 가리키자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소 급한 발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하며 율리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둘은 배에 올랐다. 어느샌가 별이 떠오른 밤하늘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 웃는 소리가 났다. 율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배에서 제공하는 마실거리를 가져다주었다. 따뜻한 것을 한 모금씩 홀짝이다보면 배가 땅에 닿았다.
율리안은 멋대로 에스코트하려 내미는 손을 생각했지만 두 번째는 그 대신 엉망으로 구겨진 갈색 종이 봉투를 뒤적였고 그 안에서 금색 리본으로 띠를 두른 상자를 꺼냈다.
“가져가.”
“이게 뭡니까?”
“다음에 또 봐.”
다음에? 또? 율리안은 은근하게 찡그려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택시를 잡아야 하나. 율리안은 큰길가로 나왔고 낯익은 차 옆에서 손을 흔드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나 빼고 즐겁게 다녀왔어?”
“당신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아냐. 없었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며 크나트는 그에게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율리안은 두 번째가 준 상자를 꺼냈다. 리본을 끌러내고, 뚜껑을 들어 올리면. 그 아래에는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초콜릿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 녀석이 줬어?”
“그렇습니다.”
“지금 안 먹을 거지? 집에 좋은 걸 가져다 놨거든?”
당신이 말하니 수상쩍기 짝이 없다고 율리안이 눈을 치떴다. 크나트는 껄껄 웃었고 율리안은 편안하게 의자에 기댔다. 오렌지색 가로등이 몇 개 지나고, 낯익은 집이 보이자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문이 열리면 과연 크나트의 말대로 초콜릿 케이크와 과일들이 보였고, 옆에는 퐁듀 냄비에 초콜릿이 그득하게 녹아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율리안이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내려놓자, 크나트는 그 안에 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딸기 조각에 초콜릿을 묻혀 입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율리안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조금씩 베어 물었고, 오렌지 조각을 초콜릿에 푸욱 담갔다가 꺼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는 남자에게 주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 겁니다만.”
“응음?”
“미카라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미카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