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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데임] 오지 마!

2024. 2. 17. 20:22 | Posted by 호랑이!!!

 

아니, 우린 왜 여기로 갑니까? , 목적지는 저 쪽이라면서요? 그런데, , 굳이 둘러서 갈 이유우와아아악!”

 

비명과 함께 청년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낙엽도 눈도 없는 흙바닥에 경갑까지 착용한 몸은 우당탕 소리까지 요란해서 숲 안쪽의 무수한 생물들까지 다 깨울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는 눈이 녹아 개울이 졸졸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싹이 터 녹색이 점점이 찍힌 땅의 평화로운 한때를 깨뜨리며 식식거리는 청년 곁으로 회색 털에 쫑긋한 귀를 가진 청년 둘이 와 섰다.

 

넘어지더라도 조용히 넘어져야 한다니까-?”

 

입을 막고 넘어져, 입을~”

 

갑옷 소리도 안 나게 말이야!”

 

, 그런... , 허어... 가능, 하겠! 습니까!”

 

넘어진 청년, 웨일런의 주위를 맴돌던 두 마리 청년은 그의 항의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둘은 어딘가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렸는지 동시에 귀를 까딱 움직이더니 그를 놀리던 것을 멈추고 물을 뜨러 간다, 나뭇가지를 줍는다더니 분주한 꿀벌처럼 윙윙거리며 떠나갔다.

 

, 드디어 혼자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위에 웨일런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불을 피울 자리를 잘 고르고 낙엽이며 이것저것을 긁어모아 쌓았다.

 

고요하다.

 

명예로운 일인데다 변방에서의 생활을 동경해 스콜드로 지원을 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지만... 창문조차 작은 좁은 건물 안에서 복닥복닥하게 여럿이서 생활하는 일은 영 좋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정말로 좋은 거였구나.

 

부싯돌을 딱 딱 맞부딪치면 자그마한 불꽃이 튀고 그게 지푸라기에 옮겨붙기를 기다리는 작업은 단순해서 금세 빠져든다.

 

불꽃이 쏟아지는 것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적인가?

 

아니면 식인을 하는 동물?

 

제길, 비스와 틸은 어디까지 간 거지?

 

불을 피우느라 숙인 시선 가로 다시금 흰 것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였다.

 

뻣뻣한 털로 뒤덮인 흰 꼬리다.

 

비스나 틸, 부대 사람들은 회색 털인데.

 

녹색이끼나 검은 흙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띌 법한 색이었다.

 

웨일런은 나뭇가지와 반쯤 썩은 잎을 그러모아 불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큰 육식동물이 제 주위를 맴돌 때는 갑작스럽게 움직이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 다시금 시야 끝에 흰 털이 스르륵 움직여 사라진다.

 

이 마물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피를 빨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인가.

 

틀림없어!

 

그러나 이 몸은 스콜드라고!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땅에 내려놓았던 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고,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한다.

 

조금씩, 조금씩.

 

제기랄,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나를 보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끝이 창대에 닿은 순간 그는 이대로 손이 붙어버려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창을 바투 쥐고 등 뒤의 적을 향해 홱 돌아선다.

 

으이야아아악!”

 

그 순간, 손이 창대를 쳐서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닌데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가 창대를 가볍게 밀어내고 떨어뜨릴 때에서야 웨일런은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희어서 겨울이라면 그가 제 앞으로 똑바로 걸어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녹지 못한 눈처럼 생긴 중년의 이는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친근함을 표시하듯 웨일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꾸욱 눌렀다.

 

아저씨!” “삼촌!”

 

때마침 비스와 틸이 쏘아지듯 날아와 그의 품에 안겼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기분 좋은 바람을 만들었다.

 

그는 방금 웨일런에게 한 것처럼 이마를 두 젊은이에게 번갈아 기대고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어린 새끼들처럼 그 곁에서 장난을 치고 폴짝거렸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전에 부대에 합류하게 된 웨일런입니다.”

 

남부 억양인데. 거기 출신?”

 

, . 항구 쪽이요.”

 

흉터가 남은 얼굴이 제법 매끈한 것과는 달리 목소리는 대화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거칠었다.

 

그의 목이 쇠로 줄을 한 현악기였다면, 한 번 켤 때마다 쇳가루가 부슬거리겠지.

 

삼촌, 그게 아니지-.”

 

아니지~!”

 

그러자 그는 비스와 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의도인지 짚어낸 둘은 스스로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이름!” “이름-.”

 

“....”

 

이해해줘, 삼촌이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일이 없거든.”

 

“...‘별로없는 거지.”

 

옛날에 황궁에 간 적이 있다는데 그 때 너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난 부작용일 거야.”

 

맨날 이런 데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 거야, .”

 

그는 신나서 까불어대는 두 청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꼬리로 그들의 종아리를 철썩 쳤다.

 

이히히히.”

 

아야야야-”

 

두 마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무 둥치에 걸터앉자 그는 웨일런이 넘어지며 부딪친 다리를 잡아들었다.

 

부츠를 벗기고, 발과 다리를 살피는 중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아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혼자 따로 나와 산다? 그래서 이 쪽으로 온 거야.”

 

여기 혼자 산다구요?”

 

응 응, 마수도 혼자 잡고-”

 

마수우? 이제는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들었는데!?”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 쪽으로 보았지만 그는 귀만 한 번 까딱할 뿐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답은 두 명에게서 나왔다.

 

요즘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본 적 있거든- 그냥 덩치 큰 동물 같은 걸 생각하면 안돼.”

 

물론 덩치도 크지만!”

 

이만한 거- 이만큼- 하면서 팔을 벌려보이는 둘에 웨일런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봄임에도 여전히 낡고 부드러운 가죽옷을 입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요?”

 

그는 웨일런과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나도 가능하지.”

 

나도라니?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가까이에서 고개를 돌리자 웨일런은 또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스콜드 부대원은 이제 봄이라며 머리를 잘랐고, 여름에는 깎는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웨일런의 다리가 괜찮으니 이제 다시 이동하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아직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배가 고픈데다 삼촌 집에 가고 싶은데다 부상자가(아닙니다!) 있다며 조르는 두 청년에게 격침당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의 겉에는 이끼가 앉고 작은 새가 둥지를 튼 흔적도 보인다.

 

문을 열자 향긋하게 마른 풀 냄새가 훅 끼쳐왔고, 아담하고 정갈한 첫인상과는 달리 약초며 건조식량이며 털가죽 같은 것이 잡다한 물건과 뒤섞여 영 엉망진창이었다.

 

웨일런은 손으로 깎은 듯한 장식적인 창틀을 구경하려다 천장에 덩굴같이 매달린 돌멩이에 이마를 부딪쳤다.

 

으악!”

 

조심해! 여긴 완전-”

 

전쟁터 같다니까?”

 

그의 손가락이 벽을 툭툭 두드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종의 신호인 듯했으나 두 청년은 못 본 체, 못 들은 체를 하며 이 어지러운 방안에 대해 곰팡이가 핀다니, 딱정벌레도 도망간다니 찧고 까불다가 그가 팔을 들어올리고 덤비자 엉망인 방 안에서 도망을 다니며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깔깔거리며 웃고 털이 흩날리는 한 켠에서 웨일런은 다시 방안을 찬찬히 구경했다.

 

잘 말린 나무로 창틀을 만들고, 탁자와 침상을 만들고, 선반을 깎은 것들은 오래 손을 탔는지 반질반질했고 오래 공을 들였는지 곰, 늑대, , 왕관, 전설 속의 거인 같은 문양이 다채롭게 아로새겨져서 실내의 불에 음영을 드리운다.

 

비스의 꼬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고, 틸의 다리를 걸지 않게 조심하면서-그는 발을 걸라고 소리쳤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움직이다 무언가가 웨일런의 시선을 끌었다.

 

이 집안에서도 화려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상자.

 

비스듬하게 열린 안에서는 가장 낡은 천으로 감싼 것이.

 

웨일런은 머뭇거리다가 녹은 촛대와 깃펜 덩어리를 살짝 밀어내고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들어올렸다.

 

내용물은 병 몇 개... 정도였다.

 

안에 든 것은 금 같았지만 상자가 움직이자 마치 액체처럼 기이하게 흔들렸는데-

 

달칵.

 

장갑을 낀 손이 뚜껑을 눌렀다.

 

주인의 물건을 허가도 없이 들여다본 셈이므로 웨일런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튜 그릇을 받아 들 때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연금술사인가요?”

 

, 연금술사?” “그게 뭐야?”

 

제가 스콜드에 합류하기 전에 연금술이 유행했었거든요. 돌을 무슨 금으로 바꾸는 거라던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두 젊은이들이 그릇이나 솥을 씻는다, 자리를 정돈한다며 돌아다니자 그럴 필요 없으니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했다.

 

아무튼 그런 것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날 때부터 스콜드였으니까. 조만간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술하게 둔 것이 아닌가.

 

솥에는 물을 담아 불 위에 걸고 벽난로 안에는 장작 몇 개비를 더해 잘 준비를 마치면 그가 나눠주는 모포와 가죽을 덮고 그들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웅크렸다.

 

웨일런은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올 듯 반짝이는 무수한 별과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한 흰 달빛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 병에 담긴 것들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미 주위 사람들은 잠이 든 뒤였다.

 

장작이 거의 다 타고 불빛이 사그라들던 어느 때에, 웨일런도 잠들었다.

 

 

 

 

 

 

 

잘 자네.”

 

이봐, 일어나. 이제.”

 

흐으어...?”

 

웨일런은 눈을 떴다.

 

어제의 지저분한 집안은 비스와 틸이 청소를 해 놓은 것인지 제법 정돈되고 비질되어 깨끗해져 있었다.

 

내 책상 건드리지 말라니까!”

 

아저씨 그 상자는 안 건드렸어!”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한두 번 온 줄 알구.”

 

이 망나니 녀석들!”

 

나 배고픈데. 밥 주세요!”

 

고맙다고? 별 말씀을~”

 

그는 두 젊은이를 향해 으르릉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부엌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이 나이가 되니 온몸이 삐걱거린다며 팔다리를 쭉쭉 뻗고, 신선한 새 알과 비스킷과 과일 같은 것을 잔뜩 내 왔다.

 

이거 먹고 가고, 다음부터는 오지 마. 와도 내가 없을 거야.”

 

? 어디서 지원 요청 들어왔어?” “?”

 

너흰 몰라도 돼. 어른들하고는 얘기 다 해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런 게 어딨어!”

 

우리도 인젠 어른인데!”

 

그는 코웃음으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좀 살만하다지만 스콜드에 자원하다니 특이한 녀석이야.”

 

꼬리가 등을 툭 치는 바람에 웨일런은 마악 입에 넣으려던 딸기 비슷한 과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스콜드, 멋지잖아요.”

 

“...우리 때는 그런 취급이 아니었는데.”

 

그는 비스가 마악 베어물려던 과일을 빼앗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와사삭 하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나고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중에 혹시 오거든, 기억해. 저 쪽에 약이 있고 저 쪽에는 건조 식량, 뒤편으로 나가면 샘이 있어.”

 

아저씨 보물은 더 없어?”

 

“...마쟈, 부대, 에 있는 그 엄청 화려한 공... 같은 거.”

 

어이구, 하고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음에 가면 가구 장식 좀 뜯어 올게.”

 

에이!” “에이이-”

 

짜식들이, 라며 그는 틸이 집던 비스킷을 낚아챘다.

 

그 투닥거림은 그들이 뒷정리를 하고 짐을 싸서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 갈게!”

 

오지 마, 이젠!”

 

우리 보고 싶을 텐데!”

 

안 보고 싶어-?”

 

그 말에 그는 그 둘을 쳐다보다가, 양 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빨리 가기나 해!”

 

에이이-” “-”

 

웨일런은 묵직한 짐을 어깨에 고쳐 지고는 끈으로 한 번 더 고정했다.

 

저 녀석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생각 없고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고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다 들려!” “코앞에서 뒷말하다니!”

 

“.........아마도, 착한 애들이니까...”

 

아마도라니! 하고 항의가 이어진다.

 

웨일런은 웃었다.

 

잘 지내십시오. ....”

 

데임.”

 

잘 지내세요, 데임 씨.”

 

 

[심피꽃+감자즈]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2023. 3. 24. 03:57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메로스는 눈물을 머금고 아끼는 바지를 조심스럽게 튿었다.

 

집에서면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나마 자신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

 

메로스씨!”

 

메로스는 급히 바지를 입었다.

 

어서들 오게.”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과자 사왔어요!”

 

급히 모자를 쓴 메로스는 웨이스트 코트의 뒷자락을 꾹 눌러 내리고 아이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 셋이 합심해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온 모양인데, 아이들은 그 상자를 들고 쪼르르 이동해서 안쪽 홀에다 내려놓았다.

 

“...잠깐, 저걸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걸어서?”

 

중간에 버스 탔어요!”

 

지하철도요!”

 

애들끼리 잘도 탄다.

 

메로스는 고생했다며 따뜻하게 끓인 코코아를 가져왔다.

 

그런데 뭘 가져온 거니?”

 

, 그게요.”

 

아이들은 상자를 힐끗힐끗 보았다.

 

심지어 연우는 상자를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무어라 속삭이기도 했다.

 

안에 생물이 든 모양이군.

 

강아지? 고양이? 여우일지도 모르고...

 

저만한 크기라면 의외로 커다란 새라던가.

 

얼마 전에는 사바나 캣이나 악어나 원숭이 같은 데에 목줄을 매고 데리고 다니는 게 유행했었는데 그 유행이 다시 돌아왔으려나?

 

그런데 웬일로 집에서 모자를 쓰고 계세요?”

 

“...어쩌다보니...?”

 

메로스는 헛기침을 하고 상자를 가리켰다.

 

사이즈로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인가?”

 

아이들은 급히 상자를 뜯었다.

 

“...아니지, 크리스마스는 지났는데 뭘까?”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이들은 급히 가위를 가져온다 뭘 한다며 뛰어다녔다.

 

메로스는 테이프를 끊는 용도의 가위를 가져다주겠노라며 집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눈에 띄었다.

 

내친 김에 살짝 열어보면 안쪽으로는 이미 먼지가 앉은 작고 화려한 의자가 보였다.

 

나중에 먼지를 털어내고 이 의자와 이 티테이블에도 먼지막이 천을 덮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로스는 가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손으로 테이프를 끊고 뚜껑을 열고 있었다.

 

“...”

 

이제서야 열면 어떡해!”

 

죄송해요, 블랑 언니!”

 

...이젠 놀랍지도 않군.

 

 

 

 

 

 

 

 

 

 

자네는 어쩌다 납치당했나.”

 

납치 아니에요!”

 

블랑 언니가 먼저 얘기했어요!”

 

데려와달라고 했는데 자루에 넣을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 자루에 넣을 수는 없지.

 

하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방법이 많았을텐데...

 

혹이 나지는 않았나? 긁히거나 멍들거나?”

 

“...지금은 괜찮아.”

 

그야, 뱀파이어니까.

 

메로스는 블랑이 머리에 쓴 모자에 시선을 주었다.

 

느슨하게 머리에 걸칠 수 있는 알록달록한 니트 모자였는데 커다랗고 하얀 방울이 블랑의 머리처럼 복슬복슬한...아니 정신차리자.

 

자네 혹시?”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메로스도...”

 

블랑의 손이 메로스의 실크 해트를 덥썩 잡았다.

 

잠깐, 그러면 안되지!”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왜! 벗어, 벗어!”

 

이러면 안되네...!”

 

메로스가 꺄아악 소리를 질렀으나 결국 그는 블랑의 손에 모자를 빼앗겨버렸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귀가 축 늘어졌다.

 

토끼 귀!”

 

뱀파이어는 박쥐 귀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져 볼래요!”

 

가까이 오지 말게.”

 

블랑은 아이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흉흉하게 호기심어린 눈을 한 것을 보았다.

 

저 뱀파이어가 곤경에도 다 처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귀라도 만져 보라고 부추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귀 엄청 보송보송하다?”

 

, 정말요?”

 

토끼 귀...”

 

만져도 되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은 일제히 블랑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블랑은 불길함에 모자를 끌어내려 푸욱 눌러 썼다.

 

뭐야, !”

 

“...혹시, 언니도...?”

 

뭐야? 뭐야? 기다려!”

 

기다려! 안돼! 앉아!를 외쳤지만 메로스는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Go! Fetch!”

 

안돼애애애!!!”

 

 

[레갈리엔/데임] 음문

2023. 2. 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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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 히에미스네에 놀러갔어요

2023. 1. 4. 01:27 | Posted by 호랑이!!!

안 돼요.”

 

“...어째서...?”

 

흰 머리 청년은 지독할 정도로 알콜 냄새가 나는 술병을 등 뒤로 감춘 뒤, 단호하게 창 밖을 가리켰다.

 

우리 줄여 보기로 했잖아요!”

 

그 때는 안 마신다는 얘기였지 줄인다는 얘기는...”

 

히스!”

 

그리고 창 밖의 사람들은 움찔하며 사사삭 벽 뒤로 숨었다가 다시 사사삭 창문에 붙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게 뭐야...?”

 

지금 술 뺏긴 거야...?”

 

가족인가 봐.”

 

가뜩이나 큰 덩치에 털이 북슬북슬한 가죽옷을 입어 곰 만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누군가는 가운데에 마른 장작 토막과 지푸라기를 넣어 급히 모닥불을 피우고 눈을 넣은 솥을 걸었다.

 

회색곰 털옷을 입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조카라는 애하고 말할 일이 있었는데, 그 애는 그렇게 격 없이 굴지 않았거든?”

 

눈 밑으로 굵은 흉터가 있는 사람이 턱을 매만졌다.

 

황궁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그랬지? 이번 지원자.”

 

젊은 축인 사람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아들인가봐요.”

 

아들? 아들이면 저렇게 친할 수 있나?”

 

다시금 그들은 바삐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손주인가봐.”

 

더보기

+

 

데임은 빼앗은 술병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이 시간쯤 오면 다른 부대원들과도 마주칠 것 같았는데 어째 보이지가 않았다.

 

, 그러니까 조금은 괜찮겠지.

 

병뚜껑을 자연스럽게 따고 한 모금, 두 모금 자연스럽게 마시고 캬 소리를 내며 입을 문지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든 데임은 우르르 몰려 있는 부대원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멈췄다가.

 

술병을 등 뒤로 감췄다.

 

“...저는 평소에 잘 안 마시니까 괜찮아요.”

 

[레갈리엔] 히에미스가 놀러왔어요

2022. 12. 27. 01:16 | Posted by 호랑이!!!

 

아니이, 이거 진짜 해요?”

 

그렇습니다, 덤비시지요.”

 

데임은 조금 울고 싶었다.

 

자신이 든 것은 봉이고 그가 든 것도 나무로 만든 봉이었지만 쥐는 자세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어릴 때야 무기를 배운다며 훈련하고 대련해본 적도 있지만 사람을 상대로 무기를 드는 것이 지나치게 오랜만이라 거부감까지 든다.

 

히에미스가 다치면 어떻게 해요?”

 

히에미스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당신에게는 무른 편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매우, 헛소립니다.

 

혹시... 그는... 전투광 같은... 걸까...?

 

데임은 봉을 꽉 쥐었다가 다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럴 거였으면 아까 좀 돕지 그랬습니까.”

 

히에미스는 너무 오래 한 자세로 있었던 나머지 굳어버린 손을 꽉 쥐었다.

 

분명히 털장갑을 꼈을 뿐인데, 까득 소리가 났다.

 

그치만 어린애들 때문에 엄청 곤란해하는 모습이 재미이으아아악!!!”

 

안 오면 먼저 갑니다!”

 

==

 

오늘은 히에미스가 지원 겸 놀러오기로 한 날이었다.

 

부대원에게는 황궁에서 알게 된 옆 부대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데임의 대단한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 부대원들은 데임을 지나치게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평소대로 늘어져 술을 마시거나 나무토막을 깎거나 잠을 잤고 심지어는 난로 앞에서 구멍 난 양말 째 발에 불을 쪼이다가 노크 소리가 나자 데임을 불렀다.

 

어이, 꼬마! 대단한 애기 왔다!”

 

그야말로 망나니들 같은 모습이었다.

 

이따가 정찰 때 이모랑 삼촌들이 같이 나갈 거니까 둘이는 먼저 밥 먹고 놀고 있어.”

 

친구 온대서 토시를 하나 준비했는데 맞을까 모르겠네. 여기가 좀 춥잖아.”

 

아니 북부가 춥지 그러면.”

 

친구는 남부 출신이라던데? 바다에도 들어가 봤대.”

 

뭐어? 나암부우? 아이고 얼어 죽겠네.”

 

문 가까이 있던 부대원 하나가 문을 열었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발로 문을 차 다시 닫아버리려 했으나 그 문이 닫기지 않도록 불쑥, 하얀 머리통이 들어왔다.

 

제길, 치사하게 노크를 하다니!”

 

애들, 애들은 다 있어?”

 

문 닫아! 무기 꺼내!”

 

말하지 않아도 제각기 칼이며 도끼며 하는 것을 꺼내들고 그들은 언제 드러누워 있었냐는 듯 문을 노려보았다.

 

염병할 문짝! 닫기질 않어!”

 

들어온 것은 거대한 회색 늑대의 머리였다.

 

노란 눈은 흉흉하고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벌어진 입에서는 피거품이 살벌하게 흘러나오는.

 

데임은 총총 다가가 그 머리를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잘 찾아오셨네요!”

 

잘 찾아오다니?

 

부대원들은 갑주는커녕 셔츠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제각기 무기를... 어라, 셔츠가 신는 거던가?

 

, 문 닫아!”

 

대단한 인간이 아니잖아!”

 

못 들어오게 해!”

 

“...저를 이르심입니까?”

 

그러나 회색 늑대에게서 들리는 것은 멀쩡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데임이 길을 비켜주자 회색 늑대가 툭 떨어지면서 늑대만큼이나 거칠고 커 보이는 인간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아주... 편히 쉬고 있으셨군.”

 

늑대의 노란 눈과 같은 호박색 눈이 좌중을 훑어보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든 무기를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헷갈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호박색 눈과 회색 머리카락에 특징적인 흉터까지.

 

눈 사이를 떼지어 누비는 회색 늑대는 물론 무섭지만 단신으로 회색 늑대 한 마리를 잡아 온 저 사람은... 그들의 짐작이 맞다면, 악몽이지 않은가.

 

, 이거 멋지네요!”

 

오다... 잡았습니다.”

 

그럼 그걸 잡았겠지!

 

혼자서!?

 

왜 그렇게 오다가 덫 하나 수거해 온 양 말합니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지 못한 히에미스는 주춤주춤 무기를 내린 어느 부대원이 내준 푹신한 방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로 바로 곁이라 일렁이는 불꽃이 그의 황금색 눈가를 훑었다.

 

저기, 혹시 히에미스...입니까?”

 

그러합니다.”

 

혹시 단신으로 독수리형 괴물을 잡았다는... ...?”

 

아무리 나라도 단신으로 잡기는 어려우니 과장된 면이 있군요.”

 

아 역시 그런가.

 

인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다소 안도했다.

 

그럼 같이 오신 분들은 어디 계신지? 나머지 늑대를 정리하고 있나요?”

 

혼자 왔습니다.”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 이제 나가?”

 

데임은 늑대를 정리하러 가버렸고, 정적을 깬 것은 아이들이었다.

 

잿빛 귀며 짧은 꼬리가 자란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였는데 어른들은 죄다 정적처럼 굳어서 단신으로 늑대를 잡았다는 사람 곁에 다가가려는 아이들을 말릴 수 없었다.

 

아저씨가 히에미스예요?”

 

그렇습니다.”

 

갈색 머리인 아이가 곁에 털썩 앉자 히에미스는 움찔했다.

 

엄청 커. 왜 이렇게 커요?”

 

“...가족력인 것 같습니다.”

 

가종녁이 머예요?”

 

가족력은...”

 

채소 안 먹으면 우리 잡아 먹어요?”

 

일찍 안 자도 잡아먹어요?”

 

왜 그렇게 애들을 많이 먹어요?”

 

아이 하나가 그의 종아리를 베고 눕자 히에미스는 다시 움찔했다.

 

내 조카도 나를 무서워하는데,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그가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더 가까이 다가왔고, 히에미스의 마음만은 그 두 배로 뒷걸음질했지만 늑대 가죽 정리를 마친 데임이 돌아왔을 때에는 가지런히 모아 내민 히에미스의 양손 위에 한쪽 팔과 머리를 얹고 잠들어버린 아이까지 있었다.

 

“......”

 

투박한 외모, 덩치는 크고, 일견 곰 같기도 한 모습에 표정은 오래 된 나뭇등걸처럼 거칠다.

 

그 위의 눈은 마치 한겨울 사시나무처럼 데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딸그락딸그락 하는 것이었겠지.

 

마치 지옥에 떨어진 거미줄을 보는 눈빛이 저러할까.

 

데임은 그 눈빛을 마주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

 

삼촌. 팔 토시 어딨어?”

 

데임?!”

 

내 방 서랍장 속에. 지금 가져오게?”

 

데임은 더욱 강렬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으나 역시는 역시.

 

.”

 

거미줄은 거미줄.

 

툭 끊어진 거미줄의 뒷모습을 배신감에 찬 히에미스가 황망한 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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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피는 꽃+감자들]음공으로 뱀파이어 잡기

2022. 7. 10. 16:08 | Posted by 호랑이!!!

블랑은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화창한 오후였다.

 

사실 해도 안 졌으니 뱀파이어가 활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으나 직업 특성상 블랑은-거의 밤낮이 바뀌다시피 할 정도로-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익숙했다.

 

붉게 져가는 노을을 커튼 너머로 감상하며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가늠하는 중, 나직하게 진동이 울렸다.

 

오늘 편집자와 약속이 있었던가?

 

블랑은 화면을 보지도 않고 통화를 연결했-

 

[블랑씨이이이!!!!!!!]

 

[언니ㅠㅠㅠㅠㅠ!!!!!!]

 

[여기 완전 큰일났어요!!!!!!!!!!]

 

내가 스피커폰으로 해 뒀던가!?

 

블랑은 순식간에 터지는 음파에 직격당해 비틀거렸다.

 

아니, 애당초 스피커폰이 이렇게나 컸었나!

 

핸드폰 쪽 귀를 문지르며 블랑이 한숨을 쉬었다.

 

요점만 말해.”

 

[메로스씨가 쓰러졌어요!!!!!!]

 

“...?”

 

귀를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블랑은 자신의 스피커폰 설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테이블에 폰을 내려놓았다.

 

“...미안한데 처음부터 다 말해줄래?”

 

감자 세 마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엉엉 우는 아이들의 말을 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콜린이 소리 질러서 메로스 씨를 잡았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저희가 소리 질러서 그런 거예요!]

 

[기절 시켰어요!]

 

[콜린이 맨드레이크예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저희가!]

 

[소리로!]

 

[메로스씨 귀에서 피가!!!]

 

귀에서 피.

 

거기까지 들은 블랑은 자신의 귀 아래를 더듬었다.

 

기분탓이겠지만, 어쩐지 축축한 것 같았다.

 

 

 

 

 

더보기

메로스는 아이들 먹일 피자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지라 자신은 입맛이 없지만, 자고로 아이들은 잘 먹여야 한다니까.

 

마실 것도 커다란 페트로 두 개, 피자는 네 판, 햄버거는 간식으로 먹으라고 네 세트 주문해서 식탁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이제 아이들보고 밥 먹으라고 부르러 가는데, 방 안에서 기척 죽이는 소리가 났다.

 

눈 뜨면 안돼

 

너네야말로 부수면 안돼!’

 

속닥거리는 걸 보니 무언가 놀고 있는 모양이지.

 

문을 살짝 열자 아이 세 명이 보였다.

 

하나는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무겁다싶더니 하나는 문에 매달려 있고.

 

그리고 하나는...

 

“......”

 

요즘 인간들은 우리보다 신체 능력이 좋은걸.

 

메로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쉬잇!’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한 팔을 떼서 입 앞을 가리는 시늉까지 한다.

 

그런데 저걸 내가 말한다고 잡을 수나 있나?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거지?

 

...악마인가? 소환서는 지하에 넣어둔 줄 알았는데...

 

잡았다!”

 

아까 소리를 냈던 탓인지 수건으로 눈을 가린 어린이가 메로스의 팔을 덥석 잡았다.

 

옛날 옛적의 아들 보는 기분에, 메로스는 답지 않게 장난기가 돌았다.

 

그래서 이를 드러내고,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을 무는 시늉을 했다.

 

내가 잡은 게 누구-”

 

메로스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섹서필] 발레리안의 여름

2022. 5. 24. 00:41 | Posted by 호랑이!!!

진한 여름 냄새가 났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모든 이에게 박한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기꺼웠다.

 

차갑고 냉혹한 계절의 밤이 되고 달이 떠서 좁은 골목을 거닐 때면 이따끔 날 리 없는 피 냄새가 걸음마다 쫓아왔기 때문에.

 

절대 잊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결국 얼굴은 잊혔다.

 

목소리도 잊었다.

 

냄새조차도 희미하다.

 

그러나 한겨울 밤에, 조명이라고는 달빛밖에 없는 때에 거리를 순찰해야 할 때면-

 

발레리안은 불과 피 냄새를 맡았다.

 

그와 다니는 후배들은 겨울에 담배를 피우는 횟수가 늘었다.

 

이제는 제법 쌓인 연차를 되돌아보는데 들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하게 섰다.

 

파이 아저씨!”

 

밤만큼이나 짙은 나무그늘 아래에서 아이 소리가 들렸다.

 

겨울밤에 내리는 눈만큼이나 하얗게 작열하는 햇빛과의 경계가 뚜렷했다.

 

발레리안이 돌아보자 허리만큼도 안 되는 아이들이 해 안으로 뛰어와 오늘은 과자가 없냐고 매달렸다.

 

그 너머에서는 아이의 보호자가 수줍게 손을 들어 흔든다.

 

꽃이 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계절이다.

 

여름에 피어나는 온갖 붉고 누른 꽃들과 겹겹이 드리워진 녹색 나뭇잎과 두터운 구름을 뚫고 내비치는 새파란 하늘까지 온갖 다채로운 것들이 세상을 메운다.

 

열기 품은 바람이 꽃과 땀과 아이들과 피크닉 바구니, 심지어는 담배 냄새까지도 온통 몰아 왔다.

 

목덜미에 매달리는 한기가 녹아내렸다.

 

여름이었다.

 

 

[심장에 피는 꽃] 메로스랑 블랑이랑

2022. 5. 11. 00:09 | Posted by 호랑이!!!

자네 여기서 뭐하나?”

 

으엉?”

 

블랑은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자신이야 일 관계상 이 시간에도 일어나긴 하는데, 대체 이 뱀파이어가 자신을 깨울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

 

시상식은 모레인데...”

 

그러니까! 어떻게 아직도 이러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뭐야, 뭔데.

 

어어하는 사이에 블랑은 납치되었다.

 

짙게 썬팅된 자동차 뒷자리에 실려버렸다!

 

아무리 짙게 썬팅되었다고 해도 아직 다 지지 않은 해가 비쳐 따끔거렸기에, 블랑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 몸값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필요없어!”

 

단호해.

 

얼마간 달리다 차가 멈추자, 블랑은 낡은 폐 창고 같은 것을 떠올렸다.

 

다 왔다며 문을 열어준 메로스는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차 밖으로 나오자 스쳐가는 비릿한 냄새, 흐린 하늘, 수상쩍은 양복 입은 사람들과 총기와 밀수용 상자...

 

같은 것은 없었다.

 

스파?”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다행이야. 코스를 예약해뒀으니 들어가면 되네.”

 

스파?

 

코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메로스는 여느 때와 같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여자 종업원에게 블랑을 맡겨버렸다.

 

, 이게 뭐야?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

 

어머나- 피부가 정말 하얗네요.”

 

크게 상한 곳도 없고, 관리를 잘 하시나 봐요~”

 

꾹꾹, 주물주물, 꾹꾹, 꾸욱.

 

으어어...”

 

장미를 베이스로 한 오일 향이 끝내줬다.

 

냉차 한 잔 드시겠어요? 복숭아랑 우롱을 넣어 끓인 거예요.”

 

꿀도 들어갔나봐, 끝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내주는 건, 숙련된 사람들의 마사지였다.

 

블랑은 마사지와 간식과 오일과 기타등등(그리고 다 못 깬 졸음까지)에 휩쓸려 순식간에 노곤노곤 녹아버렸다.

 

직원들은 블랑이 말랑말랑 녹아버린 틈을 타 온갖 팩과 마사지와 관리를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엷게 화장까지 해주었다.

 

왔나? 어땠지?”

 

마찬가지로 얼굴이 반질반질한 메로스가 로비에서 반겨주었다.

 

“...진흙 목욕... 끝내줬어...”

 

그치 그거 끝내주지, 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땅 팠을 때 그런 진흙은 안 나왔었는데.”

 

나도 땅 좀 파봤는데 그런 진흙은 잘 안 나오더라고 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남은 우롱차가 어쩐지 아까워서 꿀꺽꿀꺽 마시고 빈 컵을 내려놓자 어느샌가 다가온 종업원이 조용히 치워주었다.

 

이거하러 온 거야? 시상식 대비해서? 완전 좋았어, 시상식 가면 원작가보다는 배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딸기를 한입 가득 문 토끼처럼 금방이라도 우다다할 것 같은 블랑에게 메로스는 손을 내밀었다.

 

블랑은 아무런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았고.

 

다시 검은 차에 실렸다!

 

어어? 집에 가는 거 아냐!?”

 

누가 순순히 집에 보내준다고 했지?”

 

, 뭐야! 날 놔줘, 이 악당!”

 

얌전히 있으면 험한 짓은 안... 시트 차지 말게, 그러다 진짜 사고 난- 사고난다니까!”

 

차를 멈춘 메로스는 식식거리면서 뒷문을 열어주었고 발자국이 남은 뒷좌석을 보고 뒷목을 잡았다.

 

나중에 저거 다 세차 시킬거야!”

 

!”

 

“...손님, 열쇠를 주시면 주차해놓겠습니다.”

 

직원에게 열쇠와 팁을 주고 메로스와 블랑은 왁왁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삐뚤어진 표정으로 메로스는, 옷가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입혀주게.”

 

 

[미드가르드 드레이크] 사마낙 일상로그

2022. 3. 15. 00:04 | Posted by 호랑이!!!

털이 길고 근육이 단단해서 날렵하다기보다는 육중하다는 수식이 어울리는 말.

 

고삐를 당기면 사납게 발을 치켜들고 투레질을 하다 분에 못 이기는 것처럼 발을 내려찍는다.

 

그 사나운 울림에 나뭇가지마다 맺힌 고드름이 후두둑 떨어지고 땅에서 자라난 서리는 짓이겨진다.

 

그 말 위에서 두껍고 커다란 망토를 두른 기사는.

 

사마낙은.

 

그 사나움이 못내 흡족한 듯 더운 기가 물씬 오르는 목덜미를 두드려주었다.

 

말을 멈춘 아슬아슬한 절벽 끝에서 시선을 아래로 두면 새카만 바다가 아우성친다.

 

무거운 망토조차 들썩일 정도로 날카롭게 부는 바람에 검은 파도는 검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조각나 부서졌다.

 

하늘조차도 희끄무레하게 구름이 낀 곳.

 

비현실적으로 흑과 백 뿐인 경치.

 

녹색과 노란색과 붉은 빛들로 따사롭고 풍요로운 환경에 잠겨 있는 것도 좋았으나 때로 사마낙은 박할 정도로 인간에게 냉혹한 이런 곳이 그리웠다.

 

마치 숨겨두었던 본성을 풀어놓듯이 부러 거칠게 고삐를 당기자 아직 야생성을 잃지 못한 이 말은 등 위의 포식자를 위협하듯 앞발을 들었다가 뒷발질을 하며 날뛰었으나 결국 식식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분풀이를 하듯이 땅을 내달렸다.

 

거칠고 각박한 땅에 자갈돌과 나뭇가지가 우두둑 우두둑 부러지고 육중한 몸이 아무렇게나 던진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뛰었다.

 

그 날뛰는 위에서 겨우 다리 힘만으로 버티며 사마낙은 온 몸에 갈 데 없는 열이 솟는 것을 느꼈다.

 

열이 심장을 돌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고 등자를 당긴다.

 

마술처럼 가볍게 활을 잡고 낡은 과녁에다 화살을 쏘았다.

 

파공음을 내는 창은 한때 그가 가장 서툴게 다루던 것이었으나 이제 손 안에서 묘기에 가까울 정도로 능숙하게 돌아간다.

 

이제는 활이나 도끼 따위보다 석궁과 화승총을 쓰는 세상임에도 때로 사마낙은, 쇠 부딪치는 소리가 그리웠다.

 

때로 그와 합을 맞출 기사들이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로 나가서 자신이 어릴 적 살던 곳을 살펴보면, 아이들은 추위에 떨지 않는다.

 

배를 곯지도 않고, 숨지도 않고, 제가 어릴 적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기름진 음식을 입에 넣는다.

 

그런 평화와 사치스러움을 떠올려보자면.

 

이 정도 그리움은 자신이 치를 것 중에서도 아주 소박한 댓가일 것이다.

 

 

흐아아아...”

 

프시케는 자리에 드러누워 끙끙거렸다.

 

영국이니 약이며 처치에는 돈이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낫는 것에 시일이 달라지지는 않잖아.

 

비록 골절은 아니었으나 염좌며 상처 등등이 제법 있다.

 

이렇게 다친 이유?

 

최근 학생들끼리 팀을 짜 뱀파이어를 잡을 일이 있었다.

 

일부는 건물을 수색하고 일부는 문 앞에서 대기, 그리고 아주 일부는 멀리서 저격을 하기로 한 그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뒷문으로 도망쳐 나와 마라차에게 달려들어야 했던 그 뱀파이어는 창문으로 도망쳐 나와 하필 프시케에게 달려들었다는 점이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프시케는 거실로 옮겨진 침대에서 상체를 세웠다.

 

누워 있어.”

 

마라차의 양 손에는 물건이 주렁주렁 들려 있었다.

 

우선은 손부터 씻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은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시리얼과 빵은 찬장에, 환기를 시키며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밀대로 바닥을 밀고... 그릇을 설거지도 하고...

 

배고프지? 저녁 뭐 먹을래?”

 

마리, 아까 점심 먹고 사과주스 먹였잖아.”

 

한 개밖에 안 먹었잖아?”

 

누가 들으면 한 조각인 줄 알겠네! 사과 하나를 다 깎아 체리랑 파인애플까지 넣어 갈아 먹였으면서!

 

이 아니라 한 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녁은 채소 위주로 먹을 거야.”

 

과일이라던가, 익힌 아스파라거스, 오리나 생선 조금을 곁들이는 정도는 괜찮겠지.

 

아예 점심 먹고 간식으로 해 준 그 음료만 조금도 되지 않을까?

 

채소오?”

 

누가 봐도 떨떠름하다는 게 노골적인 표정으로, 마라차는 프시케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쟀다.

 

아파서 이러는 거 아니야. 하지만 마리,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 그렇게까지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나도 입맛도 없고...”

 

“...그래, 입맛이 없구나.”

 

알아듣는 건가? 프시케는 쾌적한 방 안에서 희망에 찬 눈으로 마라차를 올려다보았다.

 

, 그러니까 많이 차리지 말고...”

 

이것저것 만들어 볼 테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

 

...못 알아들은 거 같은데? 못 알아들었는데?

 

저 문장에서 건진 게 고작 입맛이 없어뿐인 거야!?

 

, 잠깐...!”

 

금방 올게! 라며 마라차는 주방으로 갔다.

 

뭘 만들어도 조금만 먹어야지! 라고 결심했건만.

 

샐러드 파스타, 붉은 살을 가진 생선 카르파초, 갓 발아한 새싹이 들어간 샐러드, 납작하게 튀겨 시즈닝을 뿌린 건두부, 체리향이 나는 셔벗...

 

마지막으로는 향신료를 조금 뿌린 커다란 미트파이까지, 요리과정을 잘 모르는 프시케가 봐도 전부 기합이 팍팍 들어간 음식 뿐이다.

 

... 이 유능한 바보 같으니...

 

근 사흘 동안 프시케는 깨끗하고 향긋한 집안에서, 몸을 씻을 때를 제외하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한 채였다.

 

아니 걸음이 다 뭐야.

 

밥조차도.

 

, 프시케, -”

 

“........”

 

물 마시게? 머리 받쳐줄게.”

 

나 그렇게까지 중환자는 아닌-”

 

말하면 사레들릴거야, 자 조금씩 마셔봐. 빨대 줄까?”

 

숟가락은커녕 손가락까지도.

 

채널 바꾸게? 이제 다큐멘터리 시작할 때니까 그걸로 할게.”

 

페이지 넘길게. 다음 책은 뭘로 할까?”

 

프시케는 위기감을 느꼈다.

 

빨리 나아야 한다.

 

빨리 낫지 않으면, 자신은 옷을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는 것까지 까먹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사람 보살피는데 천부적인 멍청이...!

 

이게 다 그 뱀파이어 때문이다.

 

아니, 그 뱀파이어가 뒷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나올 것을 계산하지 못한 팀 탓이다.

 

...그 뱀파이어는 그러니까 왜 뒷문으로 나오지 않은 거야!

 

그 뱀파이어의 지능을 너무 높게 평가한 팀 탓이야.

 

아무튼 뭐든 그거 때문이야!

[re:심장에 피는 꽃/마라차&프쉬케] 연료 공급

2021. 12. 25. 03:32 | Posted by 호랑이!!!

솜사탕.

 

핫 초콜릿.

 

바나나 스플릿.

 

와플에 사과잼과 시럽.

 

더블 마요네즈 타코야끼.

 

사과와 바나나를 간 과일 주스.

 

여러가지 채소와 쇠고기를 넣은 타코.

 

두툼한 빵에 머스터드, 케첩을 듬뿍 친 핫도그.

 

한국식으로 튀긴 어포와 매콤한 소스를 친 감자튀김.

 

생크림 바나나 크레페에 초콜릿 시럽과 아이스크림, 웨이퍼 과자 추가.

 

어딘가의 메뉴판 같은 이 목록은 한 손에 쇼핑백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든 어느 헌터의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들이다.

 

식도락 여행이라도 갔느냐고 의문이 들 법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손에 들린 쇼핑백에는 과자나 특산물 대신 하나도 빠짐없이 여성용 옷이 들어 있었다.

 

-, 이거 어때?”

 

우이엥...”

 

몇 번 웅얼거리다 마라차는 박수를 보내며 그 박수가 끝나기 전에 입 안의 초콜릿시럽과 바나나를 맹렬하게 삼키려고 노력했다.

 

옷 파는 가게에서 음식이라니 점원들이 말릴 법도 한데 이 거대한 쇼핑백과 또 쌓일 쇼핑백 더미가 그들의 눈이라도 가린 모양이다.

 

혹은 입은 사람이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손을 저을 때마다.

 

경쾌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걷고 움직이고 숨을 쉬는 그 모든 때마다 이 평범한 진열장 앞이 잘 꾸며진 화보집의 한 페이지가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느 장신구보다 빛나는 그 머리카락은 청회색 겨울 코트 위에서 구름같이 흐트러졌고 빨간 머플러 위에서는 잘 만들어진 목걸이처럼 흘러내렸으며 눈동자는 폭신한 모자 아래에서 은으로 주조한 종처럼 반짝였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트리며 녹색과 빨간색의 향연 사이에서 마치 눈의 정령처럼 도드라지는 그 모습이라니.

 

웃을 때면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 복숭앗빛으로 시선을 끄는 입술, 햇살이 내리쬐는 낮이면 잘 다듬어진 보석처럼 빛을 퍼뜨리는 미소.

 

검은 털을 댄 장갑 안의 손까지.

 

일반적인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눈을 떼지 못할 것이고.

 

프쉬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고.

 

저 손이 다정한 걸 알고 있다면 놓지 못하겠지.

 

그리고 저 손을 알고 있는 자로서, 마라차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프쉬케한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가가서 어깨에 머리라도 올려놓고 허리에 팔을 감아 몸을 붙이고, 손바닥에 뺨을 비비고 싶다.

 

하지만 아직 한창 쇼핑하는 중이고... 밖이니까...

 

직원이 내민 팔 위에 파카 한 벌을 올리고 이번에는 이거라며 프쉬케는 치마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보이네.

 

시무룩하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얇은 과자 껍질을 덥썩 물어뜯자 그 안을 채운 아이스크림이 채 녹지도 못하고 고깃점처럼 와일드하게 뜯겨 나왔다.

 

 

 

 

 

 

그리하여 장장 한 시간이나 더 지나고서야 둘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배고프지? 가는 길에 뭔가 먹고 갈까?”

 

샐러드, 파스타, 샌드위치 같은 것을 나열하며 프쉬케는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 좋아? 안 고르면 내 멋대로...어머, 마리?”

 

어째 조용하다 싶더라니 마라차가 없다.

 

그 가방을 싣는 것도 일일 텐데, 얘가 그새 어딜 갔지?

 

프쉬케는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기울였고, 갑작스레 뻗은 팔이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려들어가다시피했다.

 

, 래라!”

 

어깨를 찰싹 때렸는데도 이 도베르만 같은 헌터는.

 

다시 말해 개 같은 남자친구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더 꽉 끌어안는다.

 

마리, 피곤했어? 너무 끌고 다녔나?”

 

뒷좌석을 힐끗 넘어다보자 많은 양의 쇼핑백들이 엉망으로 들어차서, 자칫하면 쏟아질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헌터는, 이마를 프쉬케의 쇄골에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헌터면서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야~ 라며 프쉬케는 마라차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니까, 충전해줘.”

 

충전?”

 

이렇게 끌어안고? 이런 거 말하는 거지?

 

그 충전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프쉬케는 깔깔 웃었다.

 

때마침 밖에서는 새로 캐롤이 흘러나오려는지 종소리가 들렸으며.

 

그 웃음을 기점으로, ‘기다려가 끝난 개처럼.

 

마라차가 달려들었다.

 

 

두꺼운 커튼 너머로 어느 뱀파이어는 밖을 내다보았다.

 

자야 할 시간이었으나 때로 그는 이렇게, 창가에 앉았다.

 

그가 앉기에는 조금 작고 지나치게 발랄한 의자 위에서.

 

가장자리에까지 조각이 더해진 화사한 빛깔의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제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이런 두꺼운 커튼 너머로는 제대로 밖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는 따라놓은 차가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같은 자세로 있었다.

 

밤과는 달리 밖은 시끄럽다.

 

해를 받아 피어난 꽃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잘랑거리고, 새들은 그 사이를 누비며 지저귀고, 커다란 등교 버스가 도로 위에 나타나면 다시 보자는 인사가 재잘재잘 흘러간다.

 

한 차례 그렇게 소란스럽고 나면 그보다 조금 작은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인도를 지나갔다.

 

벤치 몇 개가 놓인 작은 공원이 코앞에 있는 덕분에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던지지 못해 굴리다시피 하는 공이 이제 푸릇해지는 잔디 위에 이리저리 오가고 양동이로 만드는 모래성은 높아진다.

 

누군가는 싸워서 울음을 터뜨리고, 손에는 모래와 풀물이 들고, 고함 지르는 소리도 들리고.

 

작은 아이들이 가고 나면 이제 학교가 파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 아이들도 가고 나면 상급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십 대의 중반을 보내는 아이들은 때로 미끄럼틀이나 그네에 걸터앉아 나름대로의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공 하나를 가지고 차며 놀거나 튀기며 놀았다.

 

그러면 이제 해가 졌다.

 

마지막 아이 하나까지 돌아가자 메로스 오르바토스는 그 고요 속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달빛에 방 안이 비쳤다.

 

이 방에는 자기 전에 장난감을 정리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아이가 있었다.

 

분홍빛과 노란색을 구분하기 어려워진 나무 블록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 의자는 누군가 갓 일어난 것처럼 빠져나와 있었다.

 

먼지막이 천이 그 아이의 재에서처럼 이젤을 덮고 있었다.

 

어느 아이가 좋아했던 커다란 거울은 흐려졌고.

 

어떤 아이들이 손에서 떼놓지 않았던 장난감 칼은 이미 썩어 없어졌다.

 

금방 낡아버려서 표지를 몇 번이나 갈아야 했던 책은 이제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뱀파이어는.

 

때로 잠들지 못하고 아이들의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소란스러웠다.

 

두꺼운 커튼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할 아이들의 실루엣이 즐겁게 뛰어놀 때면.

 

때로 그들이 탄성을 지르면, 그것이 비명으로 들릴 때면.

 

메로스는 창문을 열고 싶었다.

 

제 가슴이라도 쥐어뜯으며 소리지르고 싶었다.

 

해 아래는 위험해.

 

인간 가까이는 위험해.

 

집 안으로 돌아와.

 

돌아와.

 

내게로.

 

 

쓰으레기

 

킴은 생기없이 흐린 눈으로 교단에 선 메로스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베이지색 포근한 니트에 남은 연핑크색 립스틱 자국을.

 

도오둑노옴의 새끼...’

 

분명 그 애, 교복을 입고 있었지.

 

끽해야 삼십 후반인 놈이 잘도 고등학생 딸이 있으시겠다.

 

게다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까지 요일마다 자식이 바뀌지 뭔가.

 

‘x xx xx’

 

차마 활자로 옮길 수 없는 감탄사를 떠올리며 킴은 볼펜 끝을 물어뜯었고, 교단의 메로스 K. 오르바토스 교수는 자신과 필기를 열렬하게 바라보는 킴을 기특하게 여겼다.

 

방금 이야기한 분자 구조에 대해 할 말이 있나, 학생?”

 

왜 그렇게 붙는지 궁금한데요.”

 

좋은 질문이야!”

 

거기서부터 불이 붙은 메로스는 갑자기 ppt로 대체했던 칠판 앞으로 가 서더니 듣도 보도 못한 식을 쫘아아악 적기 시작했다.

 

여기 이 식은 다음 학기에 나오는 거긴 한데 증명은 우리가 배웠던 걸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재 218p에 있는... 다들 책 폈습니까? 그래요, 거기 두 번째 상자 안에...”

 

왜 다음 학기에 배우는 식을 지금 배운 걸로 증명할 수 있는데요?”

 

그건 이 식이-”

 

왜 증명을 해야 하는데요?”

 

그건 재미있는 질문인데, 그 당시의 학자들이...”

 

왜요?”

 

왜요?”

 

왜요?”

 

110분이 지났다.

 

쉬는시간도 없이 진행했는데도 아직 메로스 교수는 할 말이 남았다고 딱 한 시간만 더 하자고 했다가 학생들의 다음 수업이 있습니다!’ 세례를 맞았다.

 

... 이 설명이 참 중요한데...”

 

메로스는 정말 아쉽다는 듯 칠판을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열정적인 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킴은 가방을 다 싸둔 채였다.

 

아이고, 오늘 이 단원까지는 다 나갔어야 했는데... 오늘 수업은 이대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자네.”

 

제가 벌써 2학년인데 어떻게 제 이름을 모르실 수가 있으십니까? 저는 킴입니다.”

 

그래, 킴블리 플로리안 학생.”

 

이리 오라는 손짓에 킴은 종이에 뭐라고 작살나게 쓰고 있는 메로스한테 갔다.

 

무슨 일인데요?”

 

학생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적어두었네.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내 사무실로 오고... 그 아래쪽은 그 주제에 관한 자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적어두었으니 나중에 해 보게.”

 

, 딱 봐도 복잡하고 골아파 보인다.

 

거절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까지는...”

 

“‘너무 어려우면안 해도 되네.”

 

뭐씨?

 

99퍼센트의 확률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 말은 킴블리의 귀에 ?’이라고 번역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교수가 음흉하고 수상쩍고 비열하게 웃는 표정을 배경으로.

 

“‘븐드시흐 으긋슴느드...”

 

몬스터와 박카스의 힘으로 킴은 일주일 뒤 수업시간까지 과제를 해 갔다.

 

며칠간의 밤샘으로 독이 오른 킴은 그 시간에도 질문을 퍼부었고, 메로스는 기뻐하며 새 과제를 주었다.

 

물론 그 과제도 성공했다.

 

그래서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그러는 동안 킴은 조교와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언가가 수상쩍게 부글부글 끓는 소리.

 

불쾌한 냄새, 유독한 물질들.

 

사람들은 초췌한 얼굴로 조그마한 유리판을 들여다보았고, 무언가를 쉴새없이 써내려간다.

 

아아, 그 무시무시한 곳은.

 

메로스의 대학원 랩실이었다.

 

 

[라반차 오라틸로] 친구가 집에 놀러왔어요

2020. 7. 24. 10:45 | Posted by 호랑이!!!

잘 있었어?”

 

빽빽한 침엽수림의 초입에서 흰 머리의 청년이 검은 늑대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늑대는 코를 씰룩, 움직이더니 알타이르의 주위를 빙빙 돌며 냄새를 맡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철썩.

 

으악!”

 

사람이 견디기에는 다소 세차게.

 

꼬리로 얻어맞은 알타이르는 반바지 아래의 다리를 쓱쓱 문지르다가 커다란 박스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이거 다 갖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허리가 끊어질 거 같다고. 그런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걸 휘둘러서-”

 

아닌 게 아니라 허리가 정말 아팠다.

 

내 귀엽고 폭신폭신한 꼬리가 뭐? 어린이 늑대한테는 좀 거칠었던 모양이지?”

 

그런 걸 폭신폭신하다고 말하는 거야, 가슴?”

 

아니 이 어린이 늑대가?!”

 

라반차는 술과 음료수로 가득한 종이 박스를 들어 올리다가 알타이르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아 아파! 가슴! 가슴 늑대!”

 

아니 이 녀석이 아직도!?”

 

다른 쪽 귀도 쭈욱 잡아당겨졌다.

 

으어아아 아파! 아파! 이 가슴! 가슴! 가슴!”

 

심지어는 꼬리도 잡아당기고 있다!

 

! 못된!

 

알타이르는 분노를 담아 하울링을 했다.

 

가슴!!!!!!!!!!!!!!!!!!!!!!!!”

 

벌떡.

 

알타이르가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서 조그만 털뭉치가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워우우우.... 끼엥?”

 

정신을 차려보자 머리에서 굴러 떨어졌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강아지들이 분홍색 입을 뻐끔거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머리만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제 앞에는 방금 꿈속에 나왔던 검은 늑대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자고 있고 그 옆으로는 부숭부숭한 털감자들이 발을 허우적거리거나 입에 닿는 것들을 물면서 잠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제 머리에서 굴러 떨어진 감자... 아니, 아기 늑대 한 마리의 입가에 물린 흰 털을 조심스럽게 빼 주며 알타이르는 어쩐지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뛰고, 엎치락 뒤치락 구르고, 오후에는 덥길래 다같이 호수에 뛰어들었다가 간식 먹었고, 그러다 누가 누구의 고기를 뺏어 먹어서 싸우는 게 일이 커져서 한 마리씩 다 떼어 놓아야 했었지.

 

그리고 아이들이 들이받아서 넘어진 책장도 정리하고 낮잠 잘 이불도 털어주고 청소도 해야했고 또...

 

유달리 바빴던 일과를 떠올리자 멀미가 날 것 같다.

 

알타이르는 하얀 털 달린 귀를 퍼득였다.

 

눈을 반짝이면서 짤막한 다리로 뒤뚱뒤뚱 뛰는 것만 봤더니 그 행복한 표정이 마치 악몽 같았는데 이렇게 몽글몽글하게 모여 자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다.

 

솜털이 복슬복슬한 꼬마들이 제 몸에 몸이며 엉덩이를 붙이거나 주둥이 쪽 털이 빠진 청소년 꼬마들이 다리를 턱 얹고 자는 모습이 참.

 

푹신한 베개를 끌어다 턱 아래 괴고, 알타이르는 아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장난질을 부추겨댔던 늑대 한 마리를 보았다.

 

편안하신지 배도 까고 이따끔 뒷발질을 하며 자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하긴 실제로도 짝이 없구나.

 

라반차가 들었다면 이건 자발적인 독신생활이라고 펄펄 뛰었을 법한 말을 생각하며 알타이르는 뒷발로 그 새까만 등허리를 걷어찼다.

 

워어어엉!? ! !”

 

벌떡 일어난 라반차가 주위를 홱홱 둘러보았지만 이미 알타이르는 눈을 감은 뒤였다.

 

옆에서는 까만 늑대가 월월 짖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주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탈렌 O. 드라크와 후작

2020. 7. 22. 01:35 | Posted by 호랑이!!!

낮게 쉿쉿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메운다.

 

그 자만 없어지면 그 아가씨의 마음에 걸리는 게 없을 거야.

 

쉬이잇 쉿.

 

당장은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아가씨는 너와 영원히 함께하며 기뻐하겠지.

 

다 꺼져가는 장작불을 조명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이 열려있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꽉 눌러 닫았다.

 

다시 낮은 쉿 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그 사람은 서성거렸다.

 

다시 서성거리고, 또 서성거리고.

 

그러다 창문을 벌컥 열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든 채 뛰쳐나갔다.

 

마지막 남은 불씨는 서서히 재 속으로 잠겨 사라지고 흘러나온 연기 사이로 얼핏 눈동자가 빛나는가 하더니 벽난로 뒤의 그림자에서 길쭉한 인영이 나타났다.

 

얼굴이며 목에는 꽃이 밝은 색으로 그려져 있고 손에는 뼈 모양이.

 

붉은 색이 섞인 복숭앗빛 눈동자는 가늘고 길게 열려서 즐거운 듯이 휘어졌다가 다시 스르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꼬리가 부드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드라크와 후작의 성에서는.

 

후작니이이이이임!!!!!!!!!!”

 

아이고오.”

 

탈렌은 손을 들어 귀를 꽉 막았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욧!? 또 일 하셨지요!!! 인간 유혹하는 거!!! 그런 일은 저희 같은 부하들에게 맡겨달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수수한 검은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쬐끄만 악마가 저 멀리서부터 두다다닥 달려왔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하자 탈렌은 그 악마의 겨드랑이에 손을 들어 한 바퀴 비잉 돌려주었다.

 

으아아아-”

 

그래 그래.”

 

거대한 도마뱀 모습에 셔츠, 검은 조끼를 걸친 탈렌은 목에 감았던 검은 끈을 풀어 한 쪽 끝을 손에 쥐었다.

 

끈은 구불구불 뻗고 얽히더니 단단하게 늘어져 바닥을 딱 소리 나게 짚었다.

 

디쿤과 사비는?”

 

탈렌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자 기둥 뒤 그림자에서 스르륵 작은 주둥이가 나와 대답했다.

 

아직 남아있습니다.”

 

얼마나?”

 

디쿤님의 몸통, 사비님의 다리와 꼬리가 남아있습니다만 조만간 상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식사는 그걸로 하지. 남은 것은 고용인들 식사로도 만들어서 나눠줘.”

 

그러자 앞치마를 두른 악마는 가감 없이 활짝 웃었다.

 

야호! 후작님 만세! 만만세!”

 

많이 먹고 키 크렴, 데일라.”

 

후작님보다 더 커질 거예요!”

 

탈렌은 가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걸쳤다.

 

“...”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에도 이 키였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이렇게 안 클까.

 

탈렌은 다시 안경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라는 자신이 청소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탈렌의 손을 꼭 잡고 집무실로 이끌었다.

 

 

 

 

전편: blog.naver.com/yesjawoon/220832152636

 

 

[미드가르드 드레이크/2세즈] 뜻밖의 수출품

2019. 12. 13. 19:26 | Posted by 호랑이!!!

빵도리 안녕!”

 

안녕! 놀러왔어!”

 

아르카디아는 누가 감히 그런 이름으로!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시종도 없이 에샤드카와 일레하 쌍둥이가 양 손에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오더니 방 가운데 앉았다.

 

여간한 아이라면-혹은 어른이라도- 들 수 없는 무게의 상자는 땅에 내려놓자 묵직하게 흔들려서 아르카디아는 기대어린 눈으로 냅다 바닥에 쪼르르 뛰어갔다.

 

쌍둥이는 고작 몇 년 새에 또 훌쩍 커버린 아르카디아의 손을 잡고 바닥에 앉혔다.

 

이거 내 거야?”

 

, 이건 네 거야.”

 

아빠랑 아빠랑 일레하가 만들었어! 그래서 가져오는 건 내가 했다?”

 

상자를 열면 에셀리온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커다란 나뭇잎의 잎맥만이 엷게 남아서 눈가에 대어도 건너편이 훤히 비쳐 보인다.

 

그리고 과일을 듬뿍 사용한 과자, 향이 나는 나무와 비단천을 사용하여 만든 장난감, 무엇이 자라는지 모를 커다란 화분은 도자기였고 빵돌이는 모르는 무슨무슨 기법을 사용하여 새겨진 그림은 거대한 용과 과일 나무다.

 

거기에 깃털이랑 가죽이랑 육식동물의 이빨 같은 것이 나왔고 에샤드카는 내가 찾은 거야! 라며 활짝 웃었다.

 

호기심어린 손이 상자를 휘젓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금방이라, 아르카디아는 일레하가 에샤드카를 쓰다듬는 것과도 같이 손에 묻은 흙을 벨벳 바지에다 문질러 닦았다.

 

세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그러시면 안된다며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에는 셋뿐이었고 또 혈기왕성하였기에 엎치락뒤치락 장난질까지 쳐서 우아하게 지어진 반바지는 회생 불가로 보일 정도로 온갖 이물질이 묻고 구겨졌다.

 

으아아아!”

 

좀 더 괴로워해.”

 

이 정도는 괜찮지?”

 

그리고 쌍둥이 둘에게 깔려버린 빵돌이는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위에서 일레하는 히죽히죽 웃으며 빵돌이를 내려다보았고 에샤드카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주어 무게를 분산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다 돌연 빵돌이의 발이 웬 상자를 걷어차 균형을 잃은 에샤드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야야야...”

 

나 방금 뭐 찼는데? 걷어찼는데?”

 

빵돌이가 벌떡 일어나자 일레하는 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에샤의 옆으로 구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걷어찬 물건은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일레하의 능력으로 눈에 띄지 않게 들여온 상자는 빵돌이도 들 수 있었고 흔들었더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도 내 거야?”

 

아빠 방에서 몰래 갖고 왔어.”

 

상자는 귀한 것, 좋은 것을 다 보고 자란 세 황자의 눈에도 귀해 보였다.

 

백단목을 말리고 잘라 만든 모양은 얼핏 수수해 보였으나 장인의 손길로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잠금쇠의 모양은 잘 보았더니 긴 꼬리를 가진 용인데다 엷게 신성한 문양이 새겨져서 아이들 손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 종류로.

 

어른의 물건이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일레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 아이는 선물상자를 열어볼 때보다 가까이 둘러앉아서 몸을 기울였다.

 

외국으로 수출도 잘 안 하고, 성인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줄 수 없게 금지된 과자가 있어.”

 

그런 게 있어?”

 

거기에 에샤드카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정말 달콤한 맛이 나는데 딸기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과일의 맛도 안 나. 심지어는 꿀도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말이야. 폐하 아빠한테 올라온 보고를 몰래 봤어. 이걸 먹으면 잠을 안 자도 힘이 나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몸이 따끈따끈해지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한 번 본 글도 줄줄 외울 수 있대.”

 

약 아니야? 정말 과자야?”

 

나 그거 본 적 있어. 새까맣고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무지무지 좋은 냄새가 났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은 물건이니까 우리한테는 안 주는 것 같아. 폐하 아빠랑 아빠는 매일 밤 새니까 매일 먹는 게 아닐까?”

 

세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범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으로 일레하는 상자에 손을 대었다.

 

“...연다.”

 

아이들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용의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상자의 뚜껑은 가볍게 들렸고 천천히 일레하가 여는 것을 견디지 못한 빵돌이가 홱 열어젖혔다.

 

뚜껑이 넘어가며, 안의 조그만 상자들이 빛에 요란하게 반짝였다.

 

검은 바탕에 금색 띠를 두른 것, 은으로 무늬를 양각으로 음각으로 새긴 것들, 자개 장식이 달린 것, 진주나 산호가 박힌 것, 금과 은을 녹여 그림을 그린 것까지 호사스러운 작은 상자들이 정갈한 위에는 몇 겹으로 접힌 서신이 있다.

 

북쪽의 자비로운 빛, 생명의 지배자, 모든 풍요로움을 누리시는 분(...중략) 에셀리온 폐하께.

 

남의 편지는 보면 안 돼. 나중에 갖다드리자.”

 

우리는 지금 남의 상자를 가지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일 없이 다시 상자로 눈을 돌린다.

 

으리으리하다-”

 

얼른 열어보자.”

 

아이들은 제각기 하나씩 들고 상자를 열었다.

 

 

 

 

 

 

 

 

 

 

 

 

 

 

 

 

 

 

 

 

 

 

 

신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인간을 모두어 기르니 그 자는 대륙의 황제가 되었다.

 

그 신화는 사실이고 황제의 자부심이었기에 집무실이며 너른 복도의 벽에는 황제에 대한 이야기와 신에 대한 그림과 조각이 있었다.

 

웅장함은 그 사람을 닮아서,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가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깨진 접시와 사과를 건너뛰고 다가온 아르데스는 팔을 높게 든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이상한 가죽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즙액 같은 것.

 

인공적인 손길이 틀림없이 들어갔을 거대한 진주 다발.

 

길쭉하고 매끈한 몸체가 투명하여 유리나 보석인가 싶었으나 흔들었더니 고무처럼 탄력 있게 움직이는 것.

 

아르데스는 심호흡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썼느냐.”

 

그 안에는 여간해서 듣지 못했던 아르데스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우리 엄청 나쁜 일 했나봐.

 

엄청 큰일 났나 봐.

 

아이들은 움츠러들었다.

 

썼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말 하라 재촉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비죽비죽 비어지는 입술에 울먹이기까지 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끅, , ! !”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레하가 사으쟈를-”

“-아빠 방에으흑!”

잘못택.... 으흐어엉!”

 

잠깐, 울지 마라.”

 

사으, , 아아아아!”

으앙-”

무서어!!!”

 

괜찮아, 괜찮다니까!”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아르데스는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겠다 혼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야 했다.

 

간신히 달래고 황제의 몸으로 손수 마실 것을 가져오니 아이들은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면서 울음을 그쳤다.

 

다시 물어보겠다. 썼느냐.”

 

시무룩해진 에샤드카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

 

네라고?!”

 

에샤드카가 덜그럭 움직임을 멈추자 아르데스는 급히 목소리를 낮춰 아니다, 혼내는 거 아니다, 갑자기 목에 삑사리가 난 것 뿐이다 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이를 달래는 아르데스의 눈에, 일레하의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울면서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저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기에는...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끈적끈적한 액이 흘러나온 가죽 주머니가.

 

아르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 그 액을 손가락에 비볐다.

 

“......이건 다 무엇이더냐.”

 

과자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게 들어있었어요.”

 

아빠 방에 있길래 가져와봤어요.”

 

먹어봤는데 안 달아요. 이상한 맛 나요.”

 

빵돌이가 상자를 밀어주었다.

 

너희들, 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남의 물건을 막-”

 

찬란한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달그락.

 

딸깍, 찰그락, 딸깍딸깍.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사라락.

 

출렁출렁 끈적끈적 미끈미끈.

 

“...?”

 

“..., 막 들어가고 하면 안 되지. 막 가져가거나 열어보거나 그러는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빵돌이 너도 삼촌 물건을 가지고 놀면-”

 

딸깍.

 

위이이이-

 

딸깍!!!!!

 

덜그럭덜그럭덜그럭덜그럭!

 

놀면-?”

 

“...무슨 물건인지 먼저 물어보고 허락을 구한 다음에 했어야지. !”

 

상자는 아쉬운 듯한 손길로 닫혔다.

 

아이들은 상자 뚜껑에 가려져 아르데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래 보였다.

 

나중에 삼촌이 편지 한 장 써 줄테니까 가져가라.”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에샤드카가 아르데스의 팔에 꽉 매달렸다.

 

아빠랑 아빠한테 말하지 말아주세요!”

 

일레하는 머뭇거리다가 어깨에 매달렸다.

 

아르카디아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아르데스의 다리를 잡았다.

 

세 명 정도야 매달려도 꿈쩍 않았지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혼내라고 쓰는 편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서야 아르데스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

 

삼촌-”

 

땅에 내려서면서 아이들이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상하게도 호기심 같은 것이 아이들의 눈에 담겨 있었다.

 

여기서 뭔가 더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나? 하는 의아함에 아르데스는 왜 그러느냐 하는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저 상자에 있는 거 뭐예요?”

 

금방 후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이어 도망갈 길을 찾다가.

 

아이들이 그 흉한 것들을 쥐고 사람들한테 물어볼 상상을 했더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르데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 그거 곰방대다.”

 

곰방대?”

 

아르카디아가 물었다.

 

담뱃대?”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샤드카는 무어라고 묻는 대신에, 상자 중 하나를 꺼내 탱글탱글 신기한 감촉인 것을 찾아 아르데스에게 내밀었다.

 

한번 써 봐요-”

 

눈을 질끈 감고 아르데스는 손을 뻗어 대충 밀어냈다.

 

나는...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

 

아빠도 흡연자 아닌데, 하는 어린 조카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르데스는 나라 어딘가의 화산을 폭발시켰다.

 

물건 간수 잘 하란 말이다, 에셀리온!!!

 

 

 

물론, 물건은 사마낙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아르데스가 이를 알 리는 없었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에셀리온]

2019. 9. 25. 02:40 | Posted by 호랑이!!!

폐에하아 한 가정에서도 안주인이 없다면 그 가정은 엉망이 되기 마련인데 어이하여 이 황실에 내궁의 주인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무릇 안이 실하지 못하면 겉이 번듯하더라도 이내 병이 들기 마련이오니-”

 

저에게 나이 서른 된 조카가 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의 집이란-”

 

에셀리온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명절의 친척 같은 놈들.

 

꽃 만난 벌떼마냥 모여들어 붕붕붕 시끄럽기도 하다.

 

애가 있으니까 후사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결혼을 물고 늘어지냐.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해?”

 

신하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쟁쟁거리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붉은 천옷에 가죽으로 만든 갑주.

 

언젠가 잡았다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

 

전시가 아님에도 언제나 등에 지고 다니는 거대한 도끼.

 

붉은 색 화장은 대개 그 같은 사람이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언제나 눈가에 칠해 놓았다.

 

지금 폐하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직언을 올리는 중입니다.”

 

결혼하라고.”

 

사마낙은 그들이 올려놓은 듯한 길쭉한 두루마리 종이를 들어올렸다.

 

그러합니다. 사마낙님께서도 폐하를 위하신다면... 아니 무슨 짓입니까!”

 

참방.

 

횃대를 끌 때 사용하는 물동이에 두루마리가 처넣어졌다.

 

두루마리를 젓기까지하자 잉크의 검정인지 재의 검정인지 모를 것으로 물이 새까매졌다.

 

너네 조카 나이 서른 처먹고 끼니 못 챙기고 청소 못 하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결혼하면 다 나아진다니 결혼이 무슨 만병통치약이야? 그럼 결혼한 자네는 왜 안 고쳐졌나? 그 지-”

 

그만 그만.”

 

에셀리온이 다급히 손을 젓자 뒷말은 사라졌다.

 

자기 병명을 듣지 못한 신하는 희끗희끗하게 센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다가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말을 하고 홱 뒤돌았다.

 

아이고 어찌 그리 급히 가십니까 소리를 하며 그 무리도 새끼오리처럼 조르르 나가고 방이 비자 사마낙은 나머지 두루마리도 다 물동이에 집어넣었다.

 

백 세가 다 되어가건만 아직 머리가 새까만 사마낙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간 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서른일 때는 혼자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사람도 잡고 동물도 잡고 옷도 만들었는데 요오즘 젊은 것들은 배때지가 불러서...”

 

그 때는 그럴 때이긴 했지.

 

그건 됐고, 같이 저녁 먹어도 될까?”

 

그렇잖아도 네 사람 분 차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데리러 온 거라며 사마낙이 말했다.

 

여간한 거리였지만 둘은 걷는 것을 택했고 용기사를 위해 지어진 궁전 정원에 들어갔을 때 이 계절에 피었을 리 없는 꽃을 발견했다.

 

심지어는 사마낙이 나섰던 아침에도 없었던 꽃이다.

 

거긴 독이 있어.”

 

에셀리온이 꽃에 손을 뻗는 사마낙을 말렸다.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사마낙은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쉿- 소리를 냈다.

 

손바닥을 펴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자 에셀리온은 더 걸으려다 멈췄다.

 

망토자락을 걷어 어깨에 걸치자 풀숲을 걷는데도 놀라울 만큼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몇 걸음을 가던 사마낙은 두껍게 자란 나무 뒤로 홱 손을 뻗어 아이 두 명을 찾아냈다.

 

“...에샤드카.”

 

평소라면 냉큼 손을 뻗어 안기거나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할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다니.

 

일레하?”

 

아픈가? 다쳤나? 왜 이러지?

 

“...이제 움직여도 될까?”

 

이리 오십시오.”

 

애들이 자라면서 좌절이나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건 영 신경이 쓰이는구나.

 

에셀리온이 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왜 울었어?”

 

울었어?

 

사마낙이 무릎을 굽히자 망토가 떨어지며 털썩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따개비처럼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까지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방으로 가버리고 시종 하나가 가벼운 먹을 것과 술을 한 병 가지고 왔는데 사마낙은 시종이 상차림을 하는 동안 질문을 건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아까 재무와 교육 기관의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일레하님과 에샤드카님과 만나셨습니다.”

 

그랬겠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사마낙은 도끼를 잡았다.

 

그 놈들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머리를 갈라 알아봐야-”

 

안돼. 아직은.”

 

에셀리온이 말하자 사마낙의 인상이 팍 구겨졌지만 도끼는 다시 얌전히 제 자리에 놓였다.

 

두 분의 혈통에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누구 씨냐 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에셀리온이 짐작했다.

 

내가 누구나 지나치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모양이지.

 

조만간에 한 번 관료 체제를 확 바꿔야 정신을 차리려나.

 

황제 폐하.”

 

내 새끼로는 부족하다 그거지.

 

사마낙은 희번득하게 뜬 눈으로 에셀리온을 불렀다.

 

저희, 서로를 위해 작은 협정을 맺는 것은 어떠합니까?”

 

 

이 나라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용기사의 두 아들이 1.

 

황실의 기니피그님이 2.

 

황제 폐하는 3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 최근 시장의 대세적인 의견이다.

 

미드가르드로 내려온 지 벌써 수 달이 지나고 이레네오는 인간도 부러워할 삶을 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쳐지는 과일과 채소.

 

부드러운 톱밥과 찢어진 서류로 만들어진 멋진 집.

 

원목을 깎아 만든 집과 장난감과 심지어는 기니피그용 수영장까지.

 

작은 강아지만하게 커진 이레네오가 궁이나 정원 안을 걸을 때면 곱게 옷을 차려입은 시종들이 기니피그님~ 기니피그님~ 하면서 웃는 낯을 보인다.

 

어쩌다 작은 손이라도 내밀어주면 기니피그님의 손! 손톱! 귀여워!를 외치기도 하니 마흔줄에 접어든 기사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아이 같아 귀여운데다 외출을 허락받아서 궁 앞의 작은 시장에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황실의 기니피그님이라고 부르며 야채를 잔뜩 내미는 덕분에 요즘 밥값이 안 든다며 이야기 하는 것도 들었다.

 

우연히 예민한 후각으로 속이 곪은 과일 같은 것을 몇 개 집어냈을 뿐인데 기니피그님은 영험하시다 소리까지 들으니 인간 삶 따위 부질이 없지 않으냐.

 

기묘한 깨달음을 얻을락말락한 그 때.

 

문을 나선 이레네오의 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 즈음이면 사람으로 와글거릴 시간이건만 길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야채 가게는 한 곳에 모였으며 심지어 가게 앞마다 깨끗한 면보에 작은 접시를 올리고 그 위에 채소 조각을 올려두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뒷발로 일어섰더니 황실의 기니피그님을 위해 붙여준 고운 시종이 흐트러지는 비단옷을 고쳐 입혀주었다.

 

기니피그님이 어느 채소를 고를지가 요즘 시장의 최대 얘깃거리라 상인들끼리 자기네 것을 제일 많이 드셨다 하였습니다만... 그 이야기가 좀 과열되어 이렇게 자리를 만든 모양입니다. 상품은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벌 수 있는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하지요.”

 

?

 

다섯 배?

 

이레네오는 두 발로 선 채 생각하다가 천천히 네 발을 땅에 디뎠다.

 

그렇잖아도 자기가 당근을 잔뜩 먹은 탓에 당근값만 몇 배로 뛰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자리 싸움에까지 끼게 되었다.

 

사람이었다면 분명 원망 들을 일인데 기니피그라서 원망 들을 일은 없겠구나.

 

기니피그라서 참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좀 전까지 시종이 배를 만져주자 발라당 드러누워 짧고 통통한 네 다리를 허우적거린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이레네오는 근엄하게.

 

우선은 가장 가까운 가게로 발을 옮겼다.

 

후일 시종이 이 날을 두고 이야기하기를, 뒤뚱뒤뚱 토도돗 달려가는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팔 할이 쓰러졌다나.

 

여하간 기니피그님이 가까이 오자 가게 주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쥐어짰다.

 

이레네오는 눈인사를 건네고는 접시 위에 작게 잘린 당근 조각을 냉큼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

 

허어 이것은 달구나, 신선하고 단단하고 좋은 당근이로다.

 

작은 머리를 끄덕이고 다음 가게로 달려가니 이것 역시 나쁘지 않도다.

 

아니? 이것은 기름에 볶았구나! 그래 당근은 살짝 익혀 먹는 것이 몸에 좋다지, 훌륭한 향이야.

 

그렇게 하나하나 먹다보니 마지막 가게가 남았다.

 

슬슬 배가 부르니 이것은 어이해야할꼬.

 

심지어 마지막의 저 상인은 평소 행실이 나쁘다 소문이 나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배까지 불러버렸으니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가여운 일이 벌어진다.

 

지금도 보아라, 긴장을 해서는 개를 옆에 두고 자기 양배추를 쓰다듬고 있지 않느냐.

 

어허 심지어 떨기까지 하는구나.

 

이레네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까이 다가가 발등 위에 앞발을 척 얹었다.

 

그러자 상인은 화들짝 놀라 저 뒤로 도망가버렸다.

 

가여운 자로다.

 

이레네오는 총총 접시로 돌아갔다.

 

마지막 당근은 어째 주황색이 강하고 냄새도 좀 이상했으나 상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디어디, 앞발- 아니, 손에 들고.

 

그렇게 한 입 깨문 이레네오는 머릿속을 울리는 충격적인 맛에 당근을 툭 떨어드렸다.

 

아니, 이 맛은...!

 

왜 저러시지?”

 

저기 당근이 특출나게 맛있나?”

 

저 집은 싼 맛에 자주 갔었는데 맛도 다른데보다 나았던 모양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이레네오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자 시종이 조르르 따라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이 제일 맛있습니까?”

 

이레네오는 접시를 들었다.

 

가장자리를 야무지게 잡고 뒤로 돌자 사람들은 오오, 저것을 선택하셨나보다, 하고 감탄사를 여기저기서 내뱉었다.

 

그리고.

 

이레네오는.

 

틀었던 몸을 다시 돌리며 거대한 원반같은 접시를 상인의 머리에 던졌다.

 

"이놈! 먹는 걸로 장난질을 하다니 못된 놈이로다!"라는 말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겠지만.

 

 

 

 

 

 

당근에서 났던 것은 마약의 씁쓸한 맛이었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 책임에 대하여

2019. 9. 20. 16:03 | Posted by 호랑이!!!

(*아이들이 말할 때 아이들은 머릿속에 이미 완전한 말을 생각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발음을 다시 해보라던가 틀렸다고 말하면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본 소설에서는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귀여움을 강조하기 위해 포함시켰으나 사마낙처럼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배경은 스키르헤임입니다)

 

아빠 책임이 모예요?”

 

이제 글자를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이 물었다.

 

, 해야지.”

 

.” “.”

 

.”

 

.” “.”

 

, .”

 

모모모모!” “머머멈머!”

 

. . .”

 

모예요?” “머예요?”

 

사마낙은 읽던 책에서 눈을 뗐다.

 

아이들이 동글동글한 눈으로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책임은 행동을 하고 거기 일어나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 같은 거란다.”

 

행동을 하고?”

 

결과?”

 

그래, 예를 들면 감히 반역을-”

 

했다가 전부 참수 당한다던가, 라고 이야기하던 사마낙은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할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저기 보면 아빠 보이지?”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 “.”

 

법적으로는 너희 아버지가 아니란다.”

 

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지, 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마친 사마낙은 다시 책을 들 뻔 했다.

 

했다.

 

아이들이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정리를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

 

“...그거 지금 말해줘야 해?”

 

.”

 

똘망똘망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며 사마낙은 신음했다.

 

날씨도 좋겠다 공기도 따뜻하고 평화로운데 마음에 평지풍파가 일고 있고나.

 

결국 대답한 것은 이런 것이다.

 

생각 좀 하고 말해도 될까?”

 

이잉.”

 

왜애?”

 

사마낙이 대답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두 아이의 표정이 표독하게 변했다.

 

저 표정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지?

 

아빠 생각할 동안 저기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리고 말랑말랑한 뺨을 톡톡 건드려주었더니 알았다며 쪼르르 달려나간다.

 

사마낙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뛰어나가고 가장 처음 마주친 것은 아르카디아네 부모님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 잘 있었어?”

 

우리 빵- 아르카디아는 저기 밖에 있단다.”

 

같이 곰굴에도 들어갔던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들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바깥을 향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뛰어나가는 것만큼은 멈출 수 있었다.

 

있자나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요?”

 

그리고 그들 역시 당황했다.

 

? 사람?”

 

왜 그런 질문을...?”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몰라요?”

 

그러자 아르데스가 냉큼 안다며 입을 열었다.

 

-”

 

아르데스.”

 

프레드릭이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노련한 기사 답게 상황을 모범적이고 바르게 수습하기로 했다.

 

얘들아,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면... 그래, 여기 있군.”

 

프레드릭은 마련된 책꽂이에서 적당히 책을 집어들었다.

 

수정에 대한 게... 그래, 120페이지부터 170페이지까지-”

 

이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집어들자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반사적으로 끼악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다다닥 뛰어갔다.

 

공부 시러!”

 

시러!”

 

아이들이 다음으로 뛰어가다 마주친 것은 기니피그였다.

 

기니어피그다.”

 

쪼끄매.”

 

살살 쓰다듬어주고 다시 뛰어가려고 하는데 기니피그가 두 발로 일어서더니 사마낙만큼이나 커다란 기사로 변했다.

 

놀랐지?”

 

놀랐어! !”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면서 손을 뻗자 갈색 머리의 기사는 으쓱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래,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어? 그러다 넘어진다?”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요.”

 

뭘 물어보려고?”

 

아이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다가 기니피그의 요정에게도 묻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요?”

 

잠시 침묵.

 

그리고 이레네오는 무릎을 굽힌 모습 그대로 기니피그로 변했다.

 

황새가 물어다준단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이라며 사라지는 모습은 재빨랐다.

 

황새?”

 

큰 새?”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아까보다는 느려진 걸음으로 다시 자박자박 복도를 걸었다.

 

새가 물어다준다고?”

 

하지만 새 사냥 하잖아.”

 

그럼 출생률에 문제가 생길 텐데.”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자며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많이 있는 방이었다.

 

다행히도 한 번씩은 인사를 해서 아는 얼굴들이었다.

 

아이들은 문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로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마치 잘 지냈느냐고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묻는 말에 로엘은 잠시 당황했다.

 

아이들에게는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손을 내려 골반을 잡았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에 내가 사람을 좀 죽였는데~ 라고 아이들 앞에서 망한 농담을 했던 사마낙과도 같았다.

 

아래를 써서 만드는-”

 

그리고 동시에.

 

이 쪽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덮쳤다.

 

잡아!”

 

묶어, 묶어!”

 

“거기 잡아, 입 막아!”

 

애들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아아악!”

 

그 난장판을 은근슬쩍 몸으로 가리며 로브나프가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부터 미래에 관심이 많다니 장하구나. 너희의 미래가 기대되노라.”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머리를 빼 그 뒤를 기웃거렸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은 신성함으로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그게 왜 저희 미래예요?”

 

언젠가는 너희도 하게 되느니.”

 

동생이 태어나나? 하고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그 이상 답을 얻을 것 같지 않자 뒤를 가리던 신성이 사라지면 로브나프를 지나쳐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검은 머리가 물결치며 떨어지는 이 사람은 로안 경이라고 사마낙 아버지가 그랬지.

 

머리가 길다는 점이나 수염이라던가가 익숙해서 아이들은 냉큼 경의 양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질문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던 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뜸을 들인 다음 말했다.

 

“...사랑의 신으로서 로브나프님이 만들어 준단다.”

 

하지만 방금 할아버지는 우리가 한다고 했는데-”

 

정말이란다. 결국은 다 신의 손끝에 달린 일이지.”

 

그렇게 대답하고 웃는 얼굴은 선량해 보였다.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다가 방을 살금살금 나가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루카스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해줄 거예요?”

 

“...하하,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은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루카스에게 흉흉한 기세로 한 걸음씩 타박, 타박 걸어갔다.

 

우리가 애라고 그러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삐죽, 뾰족하게 변했다.

 

어디 가요?”

 

왜 그렇게 나가요?”

 

그것도...”

 

루카스는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눈은 그 뒤를 따라 나가려는 사람에게 향했다.

 

몸에 덩굴 문신이 있는 삼촌(중 하나)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칸 삼촌.”

 

“...도망가려는 거 아니지요?”

 

그리고 칸수스는 그 말을 듣자 아예 눈을 접고 웃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아이들은 표정이 더 뾰족해졌다.

 

“...아핫.”

 

그렇게 또 하나가 도망갔다.

 

이제 남은 것은 둘이다.

 

폐하 아빠.”

 

드미르 삼촌.”

 

각오했다는 표정으로, 에셀리온은 목을 가다듬고 드미르치카샤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얘들아, 그렇게 도망가면 안 되지.”

 

프레드릭이었다.

 

아이들은 그 기사의 옆구리에 끼어 온 것이 아르카디아라는 것을 보고 놀람에 시선이 흔들렸다.

 

아르...?”

 

빵돌아...?”

 

프레드릭은 방 안에 생겨난 거대한 황금 새장을 지나치며 한 손에는 커다란 책을 가지고 왔다.

 

순식간에 방 안에 책상과 의자가 셋 생겨났다.

 

공부 싫어! 라고 외치고 싶었던 에샤드카와 일레하는 손을 꼭 잡았지만 결국은 아르카디아까지 세 명의 학생이 되어 책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들이 뭘 하고 있나 확인하러 온 사마낙은 세 명의 아이들이 설명을 듣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황금 새장 속 로엘과 눈이 마주쳤다.

 

“...”

 

“...”

 

“..........”

 

“..........”

 

“....이거라도 받게....”

 

로엘은 사마낙이 내민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어째서인지 짠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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