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더, 라고 말했지만.
그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그 이틀은 사흘이 되었고.
처음의 목적은 분명히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좋은 것을 주고 좋은 자리에서 재우는 것이었지만 어느샌가 그 말도 무의미해지도록 자연스럽게 빅터는 이글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이글은 빅터의 학교까지 손수 마중을 가서 집으로 데려왔다.
거실에는 방을 밝고 따뜻한 빛으로 물들이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그 앞 깔개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할짝이는 빅토르가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맞았다.
“...따뜻하네.”
원체가 크지 않은 집이라 그런지 방 모든 곳에 따뜻한 불빛이 닿아서 마치 집이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찬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우유 데워올게~”
“...초콜릿도.”
이글이 집안일을 돕도록 내버려 둔 뒤로, 빅터는 조금씩 말이 늘었다.
방금처럼 요구가 생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당근은 먹기 싫어”같이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바닐라빈 향을 두어방울 떨어뜨리고 설탕도 조금, 초콜릿을 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밤중인데 무슨 일인지.
“빅터, 대신 열어줘-”
대답은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은 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이글은 나름대로 귀기울임에도 별 소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태평하게 우유를 가지고 나올 즈음에, 어떤 남자가 빅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을 보아서.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검집째 들어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막아서며 쳐다보는 빅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뽑아 휘두를 것을 간신히 멈추고.
습관적으로, 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이거 처음보는 사람인데 여기에 왜 왔을까~?”
“능력자들이란! 하여간 양아치같은 놈들 뿐이라니까!”
그 사람이 입을 열고 빅터의 뺨에 맞은듯한 자욱이 도드라질수록 언제쯤 베어버릴까 하는 기대감에 눈은 깜박임을 잊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위로 기어올라갔다.
빅터만 저리 가면, 잠깐 눈이라도 감으면...
아, 빅터는 공성전에 참가하잖아? 그럼 이 정도야 익숙하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냉큼 검 손잡이를 잡아 한 뼘쯤 뽑았는데 빅터가 제 손 위에 손을 얹어 눌렀다.
“...절... 돌봐주는 친척이예요.”
돌봐주는?
이글의 흥분감이 한 김 식었다.
대신 그 속에서 더 기분 나쁜 것, 흔히 노여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글부글 기포를 터뜨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돌봐준다는 것은 적어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플 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낮동안 학교에 보내는 대신 공장에 보내는 것도 아니었고.
우유에 설탕을 타 달라던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와 보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빅터는 싫다던가 좋다던가 하는 말이 늘었고, 굳은 표정이 풀어졌고, 어떤 때는 일부러 눈을 흘기기도 하고, 싫은 일에는 버둥거리며 반항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 친척이라는 작자를 만난 지 겨우 몇 분, 몇 초만에!
다시 바싹 얼어서는.
고양이를 주워 데려왔던 비오는 날 밤처럼, 얼어서, 긴장해서, 주눅들어서, 눈치보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침묵이 늘고, 표정이 굳고, 참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으로.
“얘기는 우리끼리 다 했수. 그동안 신세 많았는데, 앞으로는 올 일 없을 거요.”
이글은 그 얘기에 눈을 굴려 빅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친척이라는 자가 멋대로 내린 결정인지, 빅터의 굳은 무표정 뒤로 겁먹은 표정이 번져갔다.
“옷 갈아입고, 짐 챙겨서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멋대로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고 하기에, 이글은 검을 뽑아서 그의 목에 대었다.
“...내 집에 들어오려고~?”
쾅, 친척을 밖에 세워두고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보니 빅터가 입던 옷은 아침에인가 빨아서 아직 축축할텐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젖은 옷을 입은 빅터가 빈손으로 서 있었다.
“젖은거 말고 아까까지 입던 거 입어.”
대답이 없다.
다만 고개가 좌우로 딱 한 번 흔들렸다.
마치 이글의 집에 처음 왔던 그 날처럼.
“갈거야?”
빅터는 입을 열었다가 한 마디 말 없이 닫았고, 대신 야간학교에서 사용한다는 질 나쁜 공책에 연필을 대었다.
[가]
“야, 말해보라고. 갈거야? 왜? 지금까지 잘 있었잖아?”
꼭 지금 가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까지처럼 요리하고 청소하고, 낮에 일 가고 밤에 공부하더라도 같이 살면 재미있고, 편하고, 좋잖아.
이글은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에게 말했다.
집에 마련해둔 사탕, 초콜릿, 달콤한 과자들.
같이 가려고 계획하던 주말의 외출, 공원, 축제, 박람회.
따뜻한 벽난로, 빅토르, 그리고 많은 것들.
하지만 매번, 빅터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글은 빅터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얼마 안 있어 빅터가 그만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글은 입을 닫았고, 이번에는 빅터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길게 이어진 침묵으로 다시 쉬어들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않고.
“익숙해질 것 같아서 더는 못 버티겠어.”
그 친척이 무서워서, 혹은 그 말을 들어야 하니까 간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길들여놓지 마.”
축축하게 젖은 파란 옷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글은 뒤에 남겨져서, 닫히지 않고 덜걱거리는 문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따끔하게 아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분노 때문이겠거니, 그 열린 문만 쳐다보며 옷을 콱 쥐었다.
다음날부터 빅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이면 공장으로 갔고 무거운 짐을 옮기면 힘들었고 빵에 물로 식사를 해결했다.
공장이 끝나면 지쳤고 학교를 마쳐 집으로 돌아오면 딱딱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껴입어도 추위가 이불새로 들어와서 잠을 깰 때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배가 고프면 억지로 물을 마셨고, 못 견딜 때에는 끓였다.
설탕을 넣은 따뜻한 우유라던가 난롯불은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
배고픔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편하게, 일도 않고 지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이 들어 고마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때로 새벽에 잠에서 흐릿하게 깰 때가 있었다.
돌아누워서 손을 뻗으면, 그 아래 있어야 할 다른 사람의 몸이 없었다.
잠결에 돌아누웠을 때 팔을 뻗으면 위에 얹혔던 다른 사람의 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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