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랑이 영국으로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나뉘는 신분제였다.
조선은 이미 양반이다 상놈이다 하는 신분제가 있었고 페로몬을 흘리는 오메가보다 그 페로몬에 자제를 못하고 달려드는 알파를 더 낮게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비록 저가 오메가라도 이따끔 약이나 먹으면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었다.
허나 이 영국이라는 곳은, 더더군다나 세계를 구하겠다고 모인 양반들이 말이야.
자기들 자제력 따윈 생각하지 않고 오메가를 겁탈하고도 오메가 잘못이라고 한다고?
알파와 오메가에 따라 신분이 나뉜다니, 상놈 자식이 양반되고 양반 자식이 상놈이 된다니 이 무슨 근본 흐릿한 양반네들이냐는 말이다.
“문화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군.”
“좀 받았어.”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도 좋다.”
“됐수다.”
하랑은 손을 내저었다.
자신은 힘을 원했고, 이들은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니까.
“어차피 난 무당 자식이라 상놈이야. 여기서도 내 신분이 상놈이라도 상관없어.”
“그렇군.”
새삼스레.
배에서 내려, 티엔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역시 지구 반대편이라 그런가 바다 냄새부터 다르구만.
무어라 떠들어대는 것도 귀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겠고.
그래도 알아들을 수는 있지~
얼씨구, 저 사람 오늘 저녁에 아가씨랑 약속이 있구만?
하랑은 스스로가 대견해 흥흥 웃으며 길을 걸었는데.
누군가가 대뜸 손목을 잡아챘다.
양반집 아가씨도 아니고 이 정도에 뭐 놀랄까.
“뭐야?”
“이거 동양인이잖아? 동양인 오메가!”
“오메가가 이런 거리를 혼자 다니다니 겁이 없-”
빠악.
이하랑은 넘어진 그 앞에 서서 손목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정티엔이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랍시고 열심히 훈련시키더니 이거 꽤 괜찮잖아?
부두 노동자였는지, 저 뒤쪽에서부터 덩치 큰 색목인 무리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휘파람이 흘러나오고.
즐겁다는 듯 눈꼬리가 올라간다.
“판을-”
벌려볼까!를 외치기 전.
자신의 어깨에 익숙한 손이 얹혔다.
“철없는 녀석. 힘을 써 보고 싶어 벌써부터 안달이라니.”
“시비 건 쪽은 저쪽이거든!”
“주먹을 내지를 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자기보다 작은 동양인 오메가에게 맞아 분한지 넘어졌던 사람이 덤벼들었다.
하랑은 팔을 뻗어 제쳐두고 티엔이 자세를 잡고 서서, 뒤로 뻗었던 팔을 앞으로 묵직하게 휘둘렀다.
“이 정도면 괜찮군.”
“괜찮~? 괜찮구운~? 이봐 정- 아니, 사부. 저기 사람 최소한 뼈 두세대는 나갔을걸!”
글쎄 어떨까.
티엔은 조금 흐트러진 겉옷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한 팔로 하랑을 끌어당겨 안고 검은 물이 든 손을 올려 하랑의 뺨을 감쌌다.
“Mine.”
딱 한 마디였으나 어쩐지 그들은 수긍했고, 곧 사라졌다.
“뭐야? 방금 뭐야? 방금 ‘Mine’이라고 했지? 광산? 지뢰? 건드리면 폭파시켜 버린다?”
“...내가 네 보호자라고 했다.”
“아 뭐야, 협박거리가 안 되잖아.”
얼마간 걸어서 번듯한 거리가 나오자 하랑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바빴고, 티엔은 하랑이 잠시라도 솜사탕, 유리 너머로 진열된 것, 거리에서의 공연에 시선이 팔리면 잡아오기 바빠서.
결국에는 손을 잡고 걸었다.
“...이거 부끄럽지 않수? 내가 일고여덟 먹은 애라도 부끄러울 짓인데.”
이제 딴데 안 보고 잘 따라갈게, 응? 놔주라~
티엔은 쫑알거리는 하랑을 힐끗, 고개만 돌려 내려다보다가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어 끌고 갔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끌고 다닐거다.”
“뭐어~? 정... 싸부! 사부~ 사부님~?”
결국 놔주지 않았고, 하랑은 입을 삐죽 내밀고서도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번듯한 거리에서 조금 더 항구 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그랑플람이 위치해 있었다.
“오늘은 네가 꼭 알아야 할 사람들만 소개시켜 주마.”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풍채 좋은 할아버지였다.
오오, 그 뭐시냐.
서부 활동사진에 나오는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구만.
“브루스 보이틀러씨다. 재단의 후원자이며 재단 소속의... 큰어른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빠르겠군.”
“응, 이해했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데 옆에서 갈색머리에 눈 푸른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재단 소속은 아니지만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릭 톰슨이다.”
“와, 손목에 시계가 하나... 둘.. 무지 많네? 유행하는 패션이야?”
“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목적이오, 동양 소년.”
그리고 대뜸 안겨서, 하랑은 깜짝 놀랐고 티엔은 거의 반사적으로 하랑의 뒷덜미를 당겨 빼냈다.
“인사야 인사. 좋은 향이 나는군.”
“그래?”
서양인들은 개방적이구만.
하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 다음에 또 만나게 할 사람이 있어서 이만 실례.”
티엔은 문을 열어 하랑이 먼저 나가게 했다.
“티엔 정.”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던 릭은 하랑이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소? 열일곱이라더니 직접 보니 훨씬 어려보이는데.”
“걱정은 감사한다만.”
티엔은 어깨를 으쓱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자네보다도 각오가 돼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다.”
하랑은 먼저 나가서 복도에 있는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색목인의 머리털은 색이 다양하다더니. 진짜로 연한 금 같은 색이야.’
양털 빗어놓은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만져보고 싶네.
너무 빤히 보고 있었을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 아, 안녕!”
“만져볼래요? 머리카락.”
“그래도 돼?”
납작한 모자를 벗자 햇살을 받아 머리가 더 반짝였다.
마악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사부 나왔어? 나 잠깐만-”
“특별히 갈 필요는 없겠구나.”
하랑은 뻗던 손을 멈칫했다.
정티엔 표정이 바뀌었어.
뭔가 아주- 싫어하는 걸 보는 듯한.
그런데 그 싫다는게 그냥 싫다는 건 아니고... 으음, 이거 뭐라고 부르지? 으으 모르겠다!
“그 사람이 내가 오늘 소개해 주려고 했던 마지막 사람이다. 이름은 마틴 챌피, 한 때 기울어져가던 재단을 지금 위치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지.”
“와- 대단한 사람이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군.”
저거 왜 저렇게 날을 세우지?
하랑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마틴 쪽을 봤는데.
어라, 이 사람.
웃고는 있는데 이 사람도 싫다는 표정이...
둘 사이의 분위기에 당황하던 하랑은 우물쭈물하다가 덥석 마틴 쪽으로 뛰어 안았다.
“반가워~ 조선 출신 이하랑이올시다!”
“...꽤, 격하네요 하랑.”
“아까 릭 톰슨이라는 사람을 봤는데 이게 인사라고 했거든.”
“하하, 그 사람다운 말이네요.”
다시, 티엔의 손이 이하랑의 목덜미를 잡아채 끌고 갔다.
“낯 익혔으니 되었지 않나. 어서 방으로 가 짐정리부터 끝내도록.”
“어 그치만-”
“가라.”
아쉬움에 뒤를 흘끗 돌아보았더니 마틴은 여전히 햇살을 받고 있었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다음에 만지게 해 줄게요.”
“다음에 봐 형씨!”
꽤나 경쾌한 발소리가 타박타박 멀어지자 티엔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직 멀었군, 마음을 읽히고.”
“꽤나 순진- 아니지, 순수한. 좋은 아이더군요.”
“...남의 제자에 눈독 들이지 마라.”
“‘제자’? 솔직해지지 그래요.”
마틴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흥 소리를 내자 티엔이 마침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복도는 조용했고, 영국의 하늘은 다시 구름이 끼려는지 어둑해졌다.
티엔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진중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선고하듯 말했다.
“내 것이다.”
“아직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한참이나 날 선 목소리가 비웃듯이 떨어졌다.
“곧이다.”
물건만 전해주러 온 것이었는지 브루스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왔다.
간단한 눈짓으로 인사를 마친 마틴은 서류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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