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많-이.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뭐,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아,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뭐...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거.”
“하.”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아,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형?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응.”
“왜?”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응.”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탕.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엉?”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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