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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

 

.”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

 

?”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빅터이글] 그 사람을 떠올리는

2016. 1. 26. 02:35 | Posted by 호랑이!!!

빅터의 키가 컸다.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 적어도 몇 피트는 더 커서 이젠 이글이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였다.

 

머리는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듯 짧게 잘라 뒤로 넘기고 공성전의 상처가 뺨에 남아서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빅터는 러닝셔츠에 겉옷 하나만 걸친 그 큰 몸을 카페테리아의 야외 테이블의 작은 의자에 구겨앉아서는 어릴 적에는 써서 싫다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글은 새삼 어릴 적의 얼굴을 그의 위에 겹쳐 보다가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식사는 하고 다녀?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러는 형은 담배까지 피면서. 몇 파운드는 빠진 것 같아.”

 

피자라도 시켜 줄까?”

 

됐어.”

 

이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길게 연기를 뱉었다.

 

빅터는 그 연기들이 제 가까이로 오지 못하게 하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눈동자를 굴려 이글의 혓바닥이 사탕 막대라도 물듯 가는 막대를 감싸 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보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다가 사례가 들리자 이글이 깔깔 웃었다.

 

그래, 이럴 때 난 네가 귀엽더라고.”

 

이글은 빅터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귀여운 거겠지.”

 

내가 연상시키는 누군가.

 

빅터가 노려보자, 이글은 배실배실 웃음을 띄웠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그 표정도야.”

 

“...”

 

이글은 커피자욱이 남은 빅터의 옷을 잡아당겼다.

 

내 집에 가서 세탁할까? 더러워졌는데.”

 

빅터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인상을 쓰자 이글은 샐쭉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걷다가 이글은 그를 툭 쳤다.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데 포기 못 했어?”

 

아직 몇 년밖에 안된거야.”

 

이글은 그 답에 다시 깔깔 웃으며 길쭉하고 가느다란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쌍풍] 북소리 둥둥

2015. 12. 10. 05:08 | Posted by 호랑이!!!

제아무리 이명이 삭풍이라지만 빅터 그에게도 겨울바람은 늘 싫을 정도로 추웠다.

 

아니, 어쩌면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가 싫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절도 그에게는 좋아할 이유가 없었지만 겨울은 특히 춥고 아프고 차가우니까.

 

바람을 다루는 만큼 공기에 민감하기 때문에 더더욱 살을 에는 듯한-.

 

빅터는 푸르르 머리를 털고는 옷깃을 여몄다.

 

야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한밤중이라 너무 추운데다가 어두웠다.

 

기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저 옆의 길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빅터가 빛 없는 어두운 길로 가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렇지만 그 길 건너에는 야학을 마친 사람들이 둘씩 혹은 셋씩 걸어가고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혼자서 걷는 빅터는 그 길을 피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고 후 숨을 쉬자 추운 공기에 하얗게 입김이 부서졌다.

 

새삼 혼자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둥 북소리가 났다.

 

카를로스가 왔다! 나 보고 싶었지?”

 

둥둥.

 

카를로스의 움직임은 항상 타악기에 맞춰 추는 춤처럼 유쾌했고, 그 주위의 바람은 항상 음악처럼 부드럽게 맥박쳤다.

 

어떻게 찾은 거야?”

 

난 빅터가 어디에 있던지 찾아낼 수 있지롱!”

 

쾌활한 웃음소리가 뒤이어 퍼졌다.

 

카를로스는 빅터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빅터는 그 때문에 고개를 돌리게 되었고 가로등이 켜진 길 너머 조금 멀리에 뭔가를 파는 가판대를 발견했다.

 

과연 거기로 갈 참이었는지 카를로스가 위로 휙 지갑을 던졌다.

 

나 오늘 용돈 받았거든. 이 형이 살게!”

 

형은 무슨.”

 

빅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카를로스는 히히 웃을 뿐이었다.

 

카를로스는 겨우 거기까지 가는데도 바람의 힘으로 통통 튀어갔다.

 

오렌지색 환한 가로등 아래를 뒤따라 뛰어가면서, 빅터는 다시 둥 하고 북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둥둥.

 

둥둥둥.

 

활짝 펴진 가죽 위를 둔탁하게 퉁퉁 내리치는 소리.

 

아무렇게나 썰어내 튀긴 감자를 받고 카를로스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더니 빅터의 손을 잡고 하늘 위로 휙 뛰어올랐다.

 

하늘 위는, 빅터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환한 가로등 아래보다 밝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나씩 빼먹던 튀김은 빅터의 집 앞에 가볍게 착지할 즈음에는 손에 기름기조차 남지 않았다.

 

내일도 또 올게.”

 

카를로스는 빅터를 놔두고는 가볍게 뛰어올라 멀어졌다.

 

바람에 감싸인 그 모습을 보다가 빅터는 문득 손을 자신의 몸에 대 보았다.

 

부드럽게, 북이 울렸다.

 

 

유달리, 빅터는 카를로스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과 논다고 한다면 겨우 길 위, 땅 위의 앞뒤좌우가 전부인 광장이었지만 카를로스와 함께 다닌다면 겨우 땅 위가 아니라 벽 위, 지붕 위까지 그들의 놀이터였으니까.

 

지붕 위이든 돌담 위이든 누구라도 원한다면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꽤나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어느 날의 야학 마지막 시간, 빅터는 맨 앞자리에서 칠판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뒤에서 날아온 쪽지를 주워 펴 보았다.

 

[날 좀 봐요, 카를로스가 왔어요]

 

뒤를 돌아보니 맨 뒷자리, 희뿌연 전등 빛도 제대로 안 비쳐 보이는 어둠침침한 구석 즈음에 왠지 익숙해 보이는 실루엣이 보인다.

 

하스 학생, 듣고 있나?”

 

,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주의에 고개를 홱 돌리며 빅터는 다시 책으로 코를 묻었다.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연달아 작게 접은 쪽지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선생님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책상에 툭 툭 떨어진다.

 

[나 왔어! 보고 싶었지!]

 

[빅터랑 같이 수업 들으니까 좋다~]

 

공부는 하고 있냐.

 

바로 옆에 있었다면 쏘아붙였을 말인데.

 

빅터는 보란 듯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옆자리의 누군가가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냐고 속삭여 물을 만큼, 빅터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무너지는 것을 억지로 잡았더니 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 오니까 좋지?”

 

“...자신감 과잉이야 그거.”

 

에이~ 좋잖아~”

 

그치! 하고 물어보자 빅터는 길에서 휙 뛰어올라 건물 위로 올라갔다.

 

뒤에서 카를로스가 쫓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다음 건물 위로 날아갔다.

 

- 터어어-”

 

이 술래잡기는 한동안 계속되다가 카를로스가 아래에서 뭔가를 발견함으로 멈추었다.

 

, 아이스크림!”

 

계절은 벌써 겨울이고 밤이라 가뜩이나 어둡고 쌀쌀한데, 카를로스는 아이스크림을 먹자며 빅터를 불렀다.

 

그러다 감기 걸려.”

 

걸리면 그거 핑계로 학교 안 나가지 뭐-”

 

배부른 소리 하기는.

 

빅터가 투덜거리는 중에 카를로스는 아이스크림을 사서는 입에다 들이밀었다.

 

빅터가 감기 걸리면 이 형이 간호해주러 갈 테니까 안심하라구?”

 

그거 별로 안심 안 되거든.”

 

핀잔을 주면서 덥석 베어물면 단 맛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이따끔 공장에서 밖을 내다보면 좋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옆구리에 책을 끼고 사탕으로 군것질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것이 부럽다는 생각은 한 적 없지만.

 

그래도 카를로스와 함께 지내는 이 때만은 빅터도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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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인가- 체감이 확 되네.”

 

이글은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 끝이 얼어서 톡톡 부러뜨리며 투덜거렸다.

 

빅터는 고집을 부려 공장을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글 보다는 집에 일찍 와서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던가 물을 끓여놓는다던가 하는 일을 했다.

 

야학도 계속 다니고 있어서 이글은 그 점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저랑 닮은 이 꼬마는 공장을 그만두고 낮에 학교를 다니게 할 만큼 저를 아직 못 믿고 있지만 그래도 제가 가출할 즈음보다 야무진 모양이다.

 

빨리 크리스마스가 되면 좋을 텐데, 그렇지?”

 

“...별로, 그러면 포장 일이 느니까...”

 

그러고보니 발렌타인에 초콜릿을 받았는데 그것조차 자기가 포장한 거라고 했던가.

 

이거 안쓰럽네.

 

그건 그거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스노우볼이라던가, 새 장갑이라던가.”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이글-........?”

 

~? 글쎄~ 좋은 술도 좋고, 뭐든지 재미있을만한 거?”

 

빅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 무릎에 당연하다는 듯 올라와 앉는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빅토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솜털이 보송보송했는데 이제는 그 티를 벗고 제법 자라서 이따끔은 몸은 자라고 머리는 덜 큰 청소년기 같은 티를 냈다.

 

빅터는 의자에다 묶어둔 고양이 낚싯대에 바람을 보내 흔들었다.

 

거기 냅다 달려가는 빅토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글 쪽을 향했다.

 

벌써 크리스마스 얘기를 해?”

 

미리미리 해 둬야지.”

 

아 그건 그거고.

 

이글은 품에서 공책을 몇 권 꺼내 내밀었다.

 

이거 뭐야?”

 

너 전에 쓰던 공책, 다 써가잖아.”

 

제법 질 좋은 공책이다.

 

덤으로 꽤 괜찮은 펜까지.

 

“...용케 무난한 거 골랐네.”

 

안그래도 옆에 개당 수십달러 하는 펜들이 있더라고.”

 

그런거 사주고 싶었는데, 안 받을 거잖아.

 

이글이 짐짓 삐진 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받았을 걸, 생일인데.”

 

빅터가 공책을 양 손으로 쥐어 들면서 작게 웅얼거리자 이글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홱 틀었다.

 

생일이었어?!”

 

몰랐단 말이야?!”

 

이글은 벽에 걸어둔(그러나 잘 확인하지 않는) 달력 쪽으로 뛰어가 확인했다.

 

빨간 동그라미가 있고, 빅터의 생일이라고 적혀있다.

 

그것도 자기 글씨로!

 

, 오늘은 외식을... 그 전에 케이크도 사고, 풍선도 사고...!”

 

어쩐지 오늘은 생전 좋아하지도 않는 단 것이 당기더라!

 

이글은 빅터의 공책을 뺏었다.

 

이거 말고 역시 펜을...!!!”

 

내놔 그거!”

 

빅터는 높이 쳐든 공책 쪽으로 펄쩍 뛰어 달려들었고 이글은 몸을 뒤로 빼며 공책을 못 잡게 했다.

 

그 몸 위로 냅다 올라타 바닥에 쓰러뜨려서는, 빅터는 그 손에서 공책을 채 갔다.

 

공책을 주더라도 좀 더 좋은걸 사올 수 있어!”

 

생일 아니어도 나 생각해서 사온- , 됐어! 내놔!”

 

빅터가 잡아채는 공책 끝을 잡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널 생각해서 사와서, ?”

 

“......”

 

말 해야지.”

 

또 도망가려는 것을, 냉큼 허리에 손을 둘러 잡았다.

 

“....고마워.”

 

그리고?”

 

“..........”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글은 공책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그리고?”

 

“......기뻐.”

 

잘했어.”

 

이글이 허리에 감은 손을 떼자 빅터는 이글의 몸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워서 키득키득 웃는데, 빅터는 손을 뻗더니 이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방으로 후닥닥 뛰어가더니 문을 쾅 닫았다.

 

...아 혹시 날 흉내내서 칭찬을 하는 건가.

 

그리고 이글은 빅토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그것이 불만인지 빅터가 들어간 방에서 문을 쾅 치는 소리가 났지만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서툴러 빠진 꼬맹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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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10 (완)

2015. 10. 16. 00:18 | Posted by 호랑이!!!

 

하루 더, 라고 말했지만.

 

그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그 이틀은 사흘이 되었고.

 

처음의 목적은 분명히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좋은 것을 주고 좋은 자리에서 재우는 것이었지만 어느샌가 그 말도 무의미해지도록 자연스럽게 빅터는 이글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이글은 빅터의 학교까지 손수 마중을 가서 집으로 데려왔다.

 

거실에는 방을 밝고 따뜻한 빛으로 물들이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그 앞 깔개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할짝이는 빅토르가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맞았다.

 

“...따뜻하네.”

 

원체가 크지 않은 집이라 그런지 방 모든 곳에 따뜻한 불빛이 닿아서 마치 집이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찬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우유 데워올게~”

 

“...초콜릿도.”

 

이글이 집안일을 돕도록 내버려 둔 뒤로, 빅터는 조금씩 말이 늘었다.

 

방금처럼 요구가 생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당근은 먹기 싫어같이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바닐라빈 향을 두어방울 떨어뜨리고 설탕도 조금, 초콜릿을 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밤중인데 무슨 일인지.

 

빅터, 대신 열어줘-”

 

대답은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은 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이글은 나름대로 귀기울임에도 별 소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태평하게 우유를 가지고 나올 즈음에, 어떤 남자가 빅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을 보아서.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검집째 들어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막아서며 쳐다보는 빅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뽑아 휘두를 것을 간신히 멈추고.

 

습관적으로, 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이거 처음보는 사람인데 여기에 왜 왔을까~?”

 

능력자들이란! 하여간 양아치같은 놈들 뿐이라니까!”

 

그 사람이 입을 열고 빅터의 뺨에 맞은듯한 자욱이 도드라질수록 언제쯤 베어버릴까 하는 기대감에 눈은 깜박임을 잊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위로 기어올라갔다.

 

빅터만 저리 가면, 잠깐 눈이라도 감으면...

 

, 빅터는 공성전에 참가하잖아? 그럼 이 정도야 익숙하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냉큼 검 손잡이를 잡아 한 뼘쯤 뽑았는데 빅터가 제 손 위에 손을 얹어 눌렀다.

 

“...... 돌봐주는 친척이예요.”

 

돌봐주는?

 

이글의 흥분감이 한 김 식었다.

 

대신 그 속에서 더 기분 나쁜 것, 흔히 노여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글부글 기포를 터뜨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돌봐준다는 것은 적어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플 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낮동안 학교에 보내는 대신 공장에 보내는 것도 아니었고.

 

우유에 설탕을 타 달라던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와 보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빅터는 싫다던가 좋다던가 하는 말이 늘었고, 굳은 표정이 풀어졌고, 어떤 때는 일부러 눈을 흘기기도 하고, 싫은 일에는 버둥거리며 반항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 친척이라는 작자를 만난 지 겨우 몇 분, 몇 초만에!

 

다시 바싹 얼어서는.

 

고양이를 주워 데려왔던 비오는 날 밤처럼, 얼어서, 긴장해서, 주눅들어서, 눈치보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침묵이 늘고, 표정이 굳고, 참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으로.

 

얘기는 우리끼리 다 했수. 그동안 신세 많았는데, 앞으로는 올 일 없을 거요.”

 

이글은 그 얘기에 눈을 굴려 빅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친척이라는 자가 멋대로 내린 결정인지, 빅터의 굳은 무표정 뒤로 겁먹은 표정이 번져갔다.

 

옷 갈아입고, 짐 챙겨서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멋대로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고 하기에, 이글은 검을 뽑아서 그의 목에 대었다.

 

“...내 집에 들어오려고~?”

 

, 친척을 밖에 세워두고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보니 빅터가 입던 옷은 아침에인가 빨아서 아직 축축할텐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젖은 옷을 입은 빅터가 빈손으로 서 있었다.

 

젖은거 말고 아까까지 입던 거 입어.”

 

대답이 없다.

 

다만 고개가 좌우로 딱 한 번 흔들렸다.

 

마치 이글의 집에 처음 왔던 그 날처럼.

 

갈거야?”

 

빅터는 입을 열었다가 한 마디 말 없이 닫았고, 대신 야간학교에서 사용한다는 질 나쁜 공책에 연필을 대었다.

 

[]

 

, 말해보라고. 갈거야? ? 지금까지 잘 있었잖아?”

 

꼭 지금 가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까지처럼 요리하고 청소하고, 낮에 일 가고 밤에 공부하더라도 같이 살면 재미있고, 편하고, 좋잖아.

 

이글은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에게 말했다.

 

집에 마련해둔 사탕, 초콜릿, 달콤한 과자들.

 

같이 가려고 계획하던 주말의 외출, 공원, 축제, 박람회.

 

따뜻한 벽난로, 빅토르, 그리고 많은 것들.

 

하지만 매번, 빅터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글은 빅터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얼마 안 있어 빅터가 그만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글은 입을 닫았고, 이번에는 빅터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길게 이어진 침묵으로 다시 쉬어들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않고.

 

익숙해질 것 같아서 더는 못 버티겠어.”

 

그 친척이 무서워서, 혹은 그 말을 들어야 하니까 간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길들여놓지 마.”

 

축축하게 젖은 파란 옷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글은 뒤에 남겨져서, 닫히지 않고 덜걱거리는 문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따끔하게 아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분노 때문이겠거니, 그 열린 문만 쳐다보며 옷을 콱 쥐었다.

 

 

 

 

 

 

 

 

 

다음날부터 빅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이면 공장으로 갔고 무거운 짐을 옮기면 힘들었고 빵에 물로 식사를 해결했다.

 

공장이 끝나면 지쳤고 학교를 마쳐 집으로 돌아오면 딱딱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껴입어도 추위가 이불새로 들어와서 잠을 깰 때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배가 고프면 억지로 물을 마셨고, 못 견딜 때에는 끓였다.

 

설탕을 넣은 따뜻한 우유라던가 난롯불은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

 

배고픔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편하게, 일도 않고 지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이 들어 고마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때로 새벽에 잠에서 흐릿하게 깰 때가 있었다.

 

돌아누워서 손을 뻗으면, 그 아래 있어야 할 다른 사람의 몸이 없었다.

 

잠결에 돌아누웠을 때 팔을 뻗으면 위에 얹혔던 다른 사람의 몸은.

 



 

[이글X빅터] 고양이 -09

2015. 10. 15. 00:46 | Posted by 호랑이!!!

 

빅터가 공장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때였고, 언제나 이글이 집에 있었다.

 

창 밖까지 퍼지는 냄새를 맡아보면-

 

오늘은 톡 쏘는 토마토 소스가 맡아진다.

 

초인종을 누르면 누른지 얼마 안 되어서 이글이 문을 열어주었고 빅터는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쳐두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다.

 

특별히 이걸 입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빅터가 벗어두었던 옷을 찾으러 연 문 앞에는 이글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와 파란색 반바지가 있었다.

 

바지야 그렇다 쳐도 셔츠는 좀 커서 소매를 접어서 입고 나오자 이글은 그제서야 젓고 있던 소스 냄비에서 눈을 떼고 인사한다.

 

왔어?”

 

.”

 

라디오라도 틀어줄까? 지금쯤 팝이라도 나올 텐데.”

 

빅터는 그가 소스 젓는 것을 빤히 보며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글 옆에 서서 그가 들고 있던 국자를 빼앗았다.

 

“...”

 

너 지금까지 일하고 왔잖아. 쉬어.”

 

그러나 빅터는 이쪽을 노려봤고, 이글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옆으로 물러나 파스타면을 삶기 시작했다.

 

파스타 좋아해?”

 

.”

 

이글은 옆을 흘끗 보았다.

 

양이 적어서 작은 냄비를 꺼낸 덕분에 빅터는 발돋움도 않고, 쉽게 소스를 젓고 있었다.

 

다음번에 대량으로 만들면- 그때도 도와줄래?”

 

“....”

 

이글이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모습에 빅터는 다소 안심한 것 같았지만.

 

좋아하지 말아, 꼬마야.

 

나는 너를 곯리고 싶을 뿐이니까.

 

높이가 두 피트(60cm 정도)는 되는 커다란 냄비가 있으면 네가 발돋움하는 정도로는, 바람으로 몸을 띄우는 정도로는 젓기 힘들 테지.

 

이글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익은 면을 휙 건져내 뜨끈뜨끈한 김이 오르는 것을 파스타 보울에 담았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외식하는 편이 나았을까?”

 

“...됐어.”

 

 

 

 

 

 

 

그리고 일요일의 밤, 이글은 보기 드물게 품으로 파고드는 빅토르 때문에 설핏 잠에서 깨었다.

 

원래도 밤이나 아침에는 사람 옆으로 오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맨살에 솜털이 닿아 간질거리도록 품으로 파고드는 건 또 처음이랄까.

 

옷 속으로 파고드는 녀석을 잡아다 끌어내서는 턱 아래를 긁어주는데 밖에서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빅토르를 안고 침실 밖으로 나가자 자신이 빌려준 와이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빅터가 서 있었다.

 

품에는 청소기를 안다시피 하고.

 

청소 중?”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다.

 

청소기가 있길래 써 보고 있어.”

 

이글이 사용하는 청소기는 흡입기에 먼지통이 붙은 것이 아니라 좀 구식인, 먼지통과 흡입기가 분리된 것이었다.

 

청소기는 성인이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만들어서인지 흡입기가 그저 길쭉한 봉 모양이라 하더라도 길고 무거워서 빅터는 끙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울텐데~”

 

괜찮아.”

 

괜찮긴?

 

이글은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다가 장식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빅토르는 후닥닥 뛰어 집안 어디의 구석으로 뛰어 사라졌다.

 

잠시간 벽에 기대 서서 빅터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국 무게를 못이기고 휘두르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글은 빅터가 잡은 청소기의 뒷부분을 잡았다.

 

, 천천히 다시 밀어봐.”

 

이글이 부드럽게 힘을 주자 아까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청소기를 들어 방향을 고치는 것도, 한 손으로 힘을 주어 누르자 손쉽게 들어올려졌다.

 

“...불필요한 도움이야.”

 

혼자서 할 수 있다, 며 눈을 흘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그러셔?”

 

이글은 빅터가 단단히 막대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흡입기의 뒤를 잡지 않은 손으로 빅터가 잡은 부분보다 조금 앞을 잡았다.

 

덕분에 몸이 바싹 밀착했고, 이글은 제 뺨에 닿는 색 연한 머리카락에 대고 입김을 훅 불었다.

 

뭐 하는-!”

 

글쎄~”

 

영차 힘을 주어 청소기를 들었다가 내려서 밀자 막대에 매달린 몸이 달랑 들려 흔들린다.

 

야아~ 혼자서도 잘~ 하네~?”

 

말하는 한 마디 박자에 맞춰서 청소기를 앞으로 밀었다가, 뒤로 당겼다가, 다시 밀었고.

 

거기 맞춰서 빅터의 발이 땅에 닿았다가, 달랑 들렸다가 다시 땅에 닿았고.

 

여지껏 검을 배우거나 하며 몸을 단련한 것을, 이글은 감사했다.

 

열다섯 먹은 소년이 매달려 바둥거리는데도 이렇게 간단히 놀릴 수 있다니.

 

속으로만 웃으려는 것이 조금씩 밖으로 기어나와서 입 밖으로, 작은 기침같은 소리에서 시작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나왔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빅터의 바둥거림도 심해져서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 삐졌어? ?”

 

이쪽을 보지는 않는데.

 

이봐, 목덜미가 발긋하잖아.

 

손을 뻗어 따끈한 목을 잡았더니 홱 빠져나간다.

 

~ 이봐, 빅터~”

 

이름을 부르는 건 또 간만인가.

 

빅토르처럼 어디 구석을 찾아 뛰어가는 모습에 청소기의 전원도 내리지 않고 이글이 뒤를 쫓아 뛰었다.

 

이상도 하지.

 

분명 처음에는 화가 날 정도로 불쾌했던, 그에게서 보였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이 싫지 않다니.

 

아니, 오히려.

 

오히려.

 


[이글X빅터] 고양이 -08

2015. 10. 14. 02:09 | Posted by 호랑이!!!

새벽에 가까운 아침.

 

이글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났어...?”

 

“....”

 

이글의 고집으로 결국 침대에서 자서인지 여름용으로 둔 베개가 눌려 있었다.

 

“...공장 가지 말고 더 자.”

 

“그러면 잘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 쉬어서 골골거리는 녀석이 무슨.

 

이글은 눈앞에 보이는 파란 소매를 잡아당겼다.

 

너같이 어린애가 무슨 공장일이야.”

 

나보다 어린애들도 다 공장에서 일해.”

 

시계를 보니 해는 떴나 싶은 시각이었다.

 

이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와.”

 

빅터가 순순히 욕실로 들어가자 찬장을 열어보았다.

 

도시락통으로 쓸 만한 것이 없잖아.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유리병이나, 저 정도인가.

 

이글은 냉장고에서 어제 만들었던 수프와 그 전에 만들어서 보관해둔 빵 몇 쪽과 버터, 우유, 과일을 꺼냈다.

 

그리고 빅터는 이글이 도시락이랍시고 흰 보가 덮인 커다란 바구니를 내밀었을 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유리병에 수프를 담는 정도로 타협하고 나가려는데 이글이 빅터를 다시 불렀다.

 

아침 먹고 가.”

 

늦었어.”

 

그럼 가면서 이거라도 먹어.”

 

이글이 계란과 감자를 삶아 으깬 것을 빵에 넣은 샌드위치를 주었다.

 

어제 저녁도 아파서 제대로 못 먹었지.

 

가져가라니까.”

 

이글이 두세번 더 권하자 그제야 빅터는 정말 받고 싶지 않지만 권하니까 받아준다는 듯 샌드위치를 받아 입에 물었다.

 

잘 다녀와.”

 

“...”

 

문이 닫혔다.

 

이글은 침대로 돌아가 풀썩 누웠다.

 

다른 누군가와 침대를 같이 쓰는 것은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

 

자신이 눕지 않은 쪽을 만져보니 작은 열이 느껴진다.

 

눈이 감겨왔다.

 

 

 

 

 

 

 

 

 

빅터는 길을 걸으며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신선한 양배추와 계란과 감자와 토마토와...

 

속으로 재료를 하나씩 대던 빅터는 이내 그만두고 샌드위치를 한 입 가득 베어물었다.

 

‘...맛있어...’

 

그리고 그 날 하루는 이상함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나서도 그렇게 지치지 않았고, 점심시간 직전에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단순노동을 하는 것뿐인데도 공장 일이 재미있었고 맛없고 퍼석한 빵이라도 유리병의 수프와 먹었더니 꽤나 먹을만했다.

 

좋은 잠자리에서 잘 자서 그런가, 맛난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하루가 편하고 힘들지 않아.

 

그리고 빅터는 문득 몰려오는 불안감에 손을 더 재게 놀려 작업을 빨리했다.

 

여기서 더 기분이 좋아진다면, 평소에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힘든 일이 아니야.

 

그래서도 안돼.

 

왜냐하면 앞으로도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살 거니까.

 

빅터는 돌아오는 길에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을 보았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집.

 

그 집 벽에다 대고, 이글이 수프를 담아준 유리병을 세게 던져 깼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나고.

 

빅터는 휙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이글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리병은?”

 

잃어버렸어.”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다.

 

빅터는 감기가 나을 때까지라며, 하루 더 자고 가라는 이글의 말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글X빅터] 고양이 -07

2015. 10. 12. 11:25 | Posted by 호랑이!!!

 

야간학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것도 내 머리가 좋은 덕이지.

 

이글은 다소 자만하며 정문에 가 섰다.

 

어디, 이 꼬맹이가 감히 며칠이나 내 집에 오지 않았단 말이지?

 

정문 한가운데에 서 있으려니 얼마 안 있어 학교의 문 쪽에서 사람들이 떼지어 나왔다.

 

과연 야간학교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다수.

 

빅터 같은 학생뻘 아이들은 오히려 적었다.

 

직업만 봐도 일용직 노동자들이 다수.

 

그리고 어린아이 한 무리가 나오고(그래도 빅터보다는 나이 들어 보인다).

 

어느 술집에 가서 맥주를 한 잔 하자는 소리를 하며 우우 몰려가는 무리 뒤로 익숙한 파란색이 보였다.

 

하얀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는 가방을- 아니, 가방조차 없이 옆구리에 책과 공책을 끼웠다.

 

고개를 들어 저를 볼 것 같지 않아, 이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하얀 머리가 퍼뜩 들렸다.

 

놀란 것처럼.

 

그리고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린다.

 

이글은 빅터가 무릎을 구부려 날아오를 준비를 하자 냉큼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가?”

 

“...”

 

손을 흔들어 떼려고 하는 주제에 입은 조용하네.

 

이글은 어린애를 안아올리듯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 가만있네.

 

비록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긴 하지만 예상했던 발길질은 날아오지 않고, 주먹질도 이 정도면 안 아픈거지 뭐~

 

이글은 그대로 제 집으로 데려갔다.

 

발로 툭 걷어차 소파를 벽난로 쪽으로 밀어 거기 빅터를 내려놓자 조그만 고양이가 달려들어 올라탄다.

 

핫밀크에 초콜릿?”

 

이걸 거부한 적은 없으니까 물으면서도 우유 든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는데, 흘끗 돌아보니 고개를 젓고 있다?

 

이글은 성큼성큼 걸어서 빅터 앞에 서 고개를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하는 숨소리가 들리고.

 

얼굴 빨간 것은 들쳐업느라 피가 몰려서라던가 벽난로 때문은 아니렷다.

 

“...말해보라고, .”

 

고개를 젓는데.

 

이봐, 난 그렇게 거칠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이글은 커다란 손으로 덥썩 빅터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감기구만?”

 

말을 하지 않은, 못한 건 목이 부어서네.

 

이글은 눈살을 과장스럽게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침 잘 됐네~ 며칠 여기 있으면서 내가 오븐으로 시험작 만드는 거나 좀 봐라?”

 

글쎄 어젠가 그제인가는 빵을 구워봤는데 글쎄 그게 까맣게 타서 훅 부니까 가루가 날아가지 뭐야~

 

빅터는 빅토르를 옆으로 내려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빅터는 이글 바로 앞에 서서, 안겼다.

 

사영도~ , 이건 부지깽이지만!”

 

이글이 유려한 손놀림으로 장작 뒤집는 쇠막대를 마치 칼처럼 써서 빅터를 제 앞으로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덥썩 안고.

 

빅터가 고개를 들자 이글은 씩 웃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자고 갈 거지?”

 

빅터는 굳어서 부지깽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간신히 대답 대신 고개를 푹 떨구자, 만족스럽다는 듯 이글은 빅터를 놓아주고 홱 뒤로 돌았다.

 

이글은 감기에는 닭 넣고 끓인 수프라며 부엌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깔깔 웃었다.

 

안아줄 때 엄청 긴장하더라?”

 

빅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우유 탄다고 한 마디 쏘아줄 텐데.

 

빅터는 투덜거리며 소파에 몸을 더 깊이 묻었다.

 



[이글X빅터] 고양이 -06

2015. 10. 11. 18:48 | Posted by 호랑이!!!

 

그 다음날의 아침, 화장실의 먼지낀 거울 속 빅터의 얼굴은 열이 올라 새빨갰다.

 

감기, 그것도 열감기인가.

 

친척은 아랑곳않고 공장에 나가라고 할 테고, 학교는 나가야 하니까-

 

아무래도 이글의 집에 가는 것을 쉬어야겠다.

 

어차피 옮기면 안 되니까.

 

이 꼴을 보였다가는 억지로 자고 가라고 할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빅터는 머리를 털어내었다.

 

뭘 바란다는 듯이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여느 때처럼 파란 겉옷을 챙기고 거리로 나갔다.

 

아침안개의 냄새, 사람 없는 적막한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것은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

 

작은 가판대 하나 열리지 않았고, 열렸다 하더라도 제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도 없다.

 

공장에서 주는 맛없고 퍽퍽한 빵과 차가운 물 한 잔-

 

이 빵이 맛없다고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이글이 제게 스튜를 먹인 다음부터겠지.

 

 

 

 

 

 

 

이글은 낮까지 잤다.

 

점심때가 되면 일어나서 연합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에 먹을 것을 생각하며 장을 봐 온다.

 

집에 있는 요리도구라고는 냄비, 작은 냄비밖에- , 큰 냄비도 있었군.

 

최근 빅터가 오면서 제대로 요리를 하게 되자 사 놓은 것이다.

 

오븐이 있었다면 좀 더 다채로운 요리를 하게 될 거고, 화덕이 있다면 이탈리안 요리도 할 수 있겠지?

 

...오븐이라도 살까- 고민하는데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요즘 펍에 안 가더라?”

 

돌아보니 레베카였다.

 

펍에 꼬박꼬박 들러 밤을 보낼 때 늘 합석하던 친구.

 

고양이를 주워서~ 그거 돌본다고 말이지.”

 

안어울리네- 맥주라도 사서 집에 찾아갈까?”

 

미안~ 안돼~”

 

레베카의 뒤를 보니 휴톤과 도일이 있었다.

 

오늘도 마시러 가나 보지.

 

손을 흔들어주고, 이글은 충동적으로 지갑을 열어 오븐을 샀다.

 

빵집에 들러 커다란 빵도 하나 사고.

 

설탕과 버터와 초콜릿을 아낌없이 쓴다면 좋아하겠지.

 

어디까지 단 것을 좋아하려나, 우유에 초콜릿도 타서 같이 먹일까.

 

이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 왔던 날부터 사흘, 빅터가 오지 않는다.

 

첫째 날, 이글은 오븐을 청소하면서 보냈다.

 

이튿날, 이글은 하얀 고양이 빅토르를 손바닥 위에 얹으며 놀았다.

 

셋째 날에 이글은 빅토르를 괴롭히다가 손가락을 물렸다.

 

이놈의 고양이.

 

이글은 빅토르의 우유에 설탕을 넣어 먹였다.

 

, 난 너 마음에 안 들어.”

 

고양이는 설탕 탄 우유를 작은 혀로 할짝할짝 핥았다.

 

듣고 있어? 맘에 안 든다고 꼬맹아.”

 

손가락으로 쿡 고양이의 뺨을 찌르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애앵 우는 소리를 낸다.

 

벌써 시간은 한밤중이지만-

 

야간 학교는 곧 마칠 시간이지.’

 

위치가 어느 즈음이더라.

 

이글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며 문을 열고 나섰다.




[이글X빅터] 고양이 -05

2015. 10. 11. 01:28 | Posted by 호랑이!!!

 

잘 교육받은 귀족집 도련님 답게, 이글은 깨끗한 발음으로 둘을 구분했다.

 

빅터, 그리고 빅토르.

 

빅터도 몇 번쯤 그 발음을 흉내내 보았지만 이글이 만드는 그 낮게 울리는 음은 나오지 않았다.

 

빅터가 빅토르라고 말하는 것은 꼭 빅톨처럼 들렸는데, 어쨌거나 그래도 이글은 알아들었고 잘 한다며 가끔은 빅터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아직도 계절은 겨울 한가운데라 빅터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바닥에 앉아 멍하니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이글이 자신을 빅토르라고 하는 상상을 하며.

 

빅터의 상상 속에서 이글은 빅터를 보고 빅토르라고 불렀고, 끝의 발음을 길게 늘어뜨렸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하얀 고양이 대신, 이글은 굳은살이 박힌 묵은 흉터투성이 손으로 웅크린 빅터를 몇 번이고 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쓰다듬었다.

 

그 때 이글의 표정은-

 

.”

 

퍼뜩, 빅터는 정신이 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벽난로 앞에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으면 어떡해? , 열 올라서 얼굴이 빨갛잖아.”

 

이글의 손이 빅터의 뺨을 잡았다.

 

정말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자고 가. 이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면 더 심해지니까.”

 

그 말에 빅터는 벌떡 일어났다.

 

빅토르가 무릎에서 굴러 떨어져 약하게 항의하는 소리를 냈다.

 

몇 시지?

 

벌써 열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간다.”

 

?”

 

이글은 못마땅함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 침대 넓어, 베개도 이불도 있고 옷도 좀 크지만 여분이 있고.”

 

아니, .”

 

공장 직원, 더부살이, 야간학교.

 

빅터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학교 가.”

 

상대는 개인 교사를 붙여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저보다 얼마 나이가 많지 않은데 어른이고 집도 있는데다 가족들도 더할 나위없이 상류층인 사람이다.

 

잊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에게 말하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아직까지 제 발을 공격하는 새끼 고양이를 번쩍 들어다 의자 위에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마 학교가 끝나면 한밤중일 테고 딱딱한 침대에 누워서 얇은 이불로 몸을 말고 웅크리면 따뜻한 난롯불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글이 빅토르하고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래도 차가운 침대 쪽이 낫지 않겠냐고.




[이글X빅터] 고양이 -04

2015. 7. 23. 19:08 | Posted by 호랑이!!!

 

“빅토르~?”

 

다음 날, 그 이름을 들은 빅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예상한 일이었지만) 눈을 치켜떴다.

 

“왜 눈을 그렇게 떠?”

 

어차피 한 마디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거면서.

 

이글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소파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날은 여즉 쌀쌀해, 그 손에는 데운 우유잔이 들려 있었다.

 

초콜릿과 바닐라를 타서 달콤한 향이 나는 것.

 

이글은 단 것이라면 그닥 내키지 않았지만, 아침 즈음 장을 보러 갈 때 빅터의 생각이 나 사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초콜릿도 바닐라도 커다란 통이라 혼자서는 다 비우지 못할 텐데.

 

언제까지 저 꼬마가 올 줄 알고.

 

“,,,아냐.”

 

거 봐.

 

이글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빅터의 손목을 잡아챘다.

 

“따라해.”

 

“...”

 

뭘? 이라고 말하는 듯 입술이 살짝 벌려졌지만, 결국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잡힌 손목 때문인지 잔뜩 굳어서는 가까이 붙은 자신을 간신히 올려보니까.

 

“자, 따라해 봐- 싫어, 라고.”

 

그러나 굳어서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더 가까이 붙어서,

 

“싫다고 해보라니까?”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말 해. 입 열어.”

 

대답하라고.

 

싫다고 말하라고.

 

“...비...”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안돼, 라던가 싫어, 같은 말은 아닐 것 같다.

 

심지어 그 목소리도 아주 작아.

 

“...비켜.”

 

“못 비켜.”

 

비키게 해봐.

 

네가 잘 하는 거 있잖아? 바람으로 밀쳐내기, 때리기, 찢기, 그런거.

 

휘이잉.

 

빅터의 손 안에서 바람이 작게 소용돌이쳤지만 그뿐, 금방 꺼질 듯 말듯하게 보였다.

 

잡은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애옹-

 

아직 한참이나 어려 높은 소리로 앵앵 우는 고양이 소리에 이글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손을 놓았다.

 

“...아, 장난이야. 하하하.”

 




[이글X빅터] 고양이 -03

2014. 11. 1. 18:03 | Posted by 호랑이!!!

 

이글이 자고 가라고 했음에도, 빅터는 저녁을 먹고 한두시간 고양이를 돌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 이름은 지어주고 가.”

 

고양이의 화장실 설치나 스크래처가 딸린 캣타워를 만드느라 시간을 한참이나 써버렸다.

 

피곤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빅터에게, 이글이 툭 던졌다.

 

말하고 보니 그럴싸한 이유다.

 

빅터를 그냥 보내기에 아쉬워 아무거나 집히는대로 던졌건만.

 

이름...”

 

나비? 야옹이? 복실이?”

 

농담삼아 몇 가지 얘기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 농담이야.

 

체르니... 바흐... 베토벤...”

 

“...너 음악가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어서.”

 

또 뭐가 있지, 오페라?

 

그러다 시계를 힐끔힐끔 본다.

 

벌써 열시였다.

 

그러고보니 저 어린이의 눈에 졸음이 매달린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착한 어린이는 침대로 갈 시간이긴 하지.

 

자고 가라니까.”

 

그건 싫어.”

 

고양이 이름이라도 빨리 결정할 셈인지 이름을 툭툭툭툭 내뱉는다.

 

에밀리? 엘리자베스? 샤를로트?”

 

“...그 전에, 쟤는 암컷이야 수컷이야?”

 

그러자 너무나도 당당하게 대답한다.

 

나야 모르지.”

 

그리고 자신도 고양이 성별에 신경써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신경쓰지 않을 예정인 이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는 이름으로 지어줘.”

 

에클레어.”

 

그건 음식 이름이잖아.”

 

빅터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더니 걸어가 문을 열었다.

 

내일 정할래.”

 

그리고 한 발을 문 밖으로 뺐다.

 

이글 형도 생각해봐.”

 

다른 한 발도 빠지고, 몸이 거의 사라지려는 찰나 머리가 쏙 안쪽으로 들어온다.

 

형이 지어줘도 상관없어.”

 

그리고 머리는 다시 문 밖으로 나가고, 문도 탕 닫혔다.

 

이글은 소파로 가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새끼고양이의 목덜미를 들어올리더니 자리에 털석 앉아 다리를 꼬았다.

 

빅토르.”

[이글X빅터] 고양이 -02

2014. 10. 30. 19:24 | Posted by 호랑이!!!

 

빅터를 맡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공장일을 마치자마자 돌아와 설거지와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칠 것.

 

시간을 빠듯하게 써야겠지만 조금 더 서두르고 자신에게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이글형네 집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아는 중에 유일하게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흔쾌히 맡아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빅터는 공장일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뛰어와 수프를 끓여놓았다.

 

집안을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마른 옷을 잘 다려놓으면 할 일이 일단락된다.

 

마지막 옷을 다려놓자마자 세탁이 다 되었다는 소리에 후다닥 나가 빨랫줄에 널고 나니 정말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원래라면 저녁 내내 할 일을 고작 두 시간 안에 하려니 피곤하고 지쳤지만 이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땀에 젖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차가운 물로 몸을 닦았더니 그나마 정신이 든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닦고 이글의 집으로 날아가 문을 똑똑 두드렸더니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고, 이글이 나왔다.

 

이제 왔어? 벌써 일곱시 반이야.”

 

“...”

 

“...늦은 건 아니니까 들어와.”

 

문을 열어주고, 빅터는 열린 문틈으로 들어왔다.

 

저녁 거의 다 됐으니까 거기 앉아 있어.”

 

저기, 고양이는...”

 

그러자 손가락으로 대충 소파를 가리킨다.

 

그리를 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말끔한 모습이었던 천 소파는 여기저기 튿어지고 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생각되는 은색 털에 초록색 눈을 가진 새끼고양이는 소파에다 앞발의 발톱으로 득득득 긁고 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치자 가냘프게 야옹- 하고 울었다.

 

! 소파를...!”

 

덥석 집어들자 이번에는 제 품으로 폭 뛰어든다.

 

털 때문에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폭신폭신하기도 하고, 그런데 잘못 쥐었다가 부러지거나 날아가거나 다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녀석이 그 소파가 참- 마음에 드나 봐.”

 

이글이 그쪽을 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

 

됐어- 예상했던 일이니까. 오히려 소파 하나로 끝나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글은 건성건성 대꾸하며 그릇에다가 스튜를 듬뿍 떴다.

 

한창 자랄 때라 햄버그나 양 갈비 같은게 먹고 싶겠지만 내가 그나마 자신있게 만드는 게 이것밖에 없거든? 오늘은 이걸로 참아줘.”

 

고마워, 라고 대답하고 머뭇거리던 빅터는 수저를 찾아 식탁에다 가지런히 놓았다.

 

- , , 임마.”

 

이글은 빅터가 자리에 숟가락을 내려놓자 손가락으로 홱 가리켰다.

 

?”

 

내가 앉아있으랬지, 누가 일하랬어?”

 

빅터는 다시 소파로 가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 제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는 새끼고양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윙- 하고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펄쩍 뛸 만큼 놀랐다.

 

, 뭐야, 놀랐잖아!”

 

머리 젖은 거 말려주려고 이러신다, ?”

 

이글은 드라이어를 가지고 빅터의 머리를 말려주다 새끼고양이가 쉬익 소리를 내며 발톱을 세우고 앞발을 뻗는 것을 보았다.

 

- 닮았다.

 

이글은 빅터의 머리를 말려주고 드라이어를 앞발로 툭 치고는 지레 놀라 화닥닥 도망가는 새끼고양이 쪽으로 드라이어를 밀어준 뒤 빅터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스튜 좋아해? , 이런 건 만들기 전에 말해야 하나?”

 

“...좋아해.”

 

빅터가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글X빅터] 고양이 -01

2014. 10. 25. 18:31 | Posted by 호랑이!!!

“도와줘.”

 

그건 비오는 날의 저녁이었다.

 

이제 슬슬 추워지는 날씨인데도 빅터 하스, 은발의 꼬마는 여름에 입던 그대로의 차림으로.

 

우산조차 쓰지 않고, 심지어 겉옷조차 입지 않아 새파래진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전혀 예상외의 방문객이었지만 이글은 빅터를 따뜻한 거실로 안내했다.

 

마른 수건을 머리에 씌워주고 벽난로 앞의 푹신한 의자에 앉혀 놓고, 이글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왔다.

 

원래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들일 예정이 없던 집이라 의자가 하나뿐이어서 이글은 테이블을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았다.

 

“우유 마셔.”

 

“고맙... 습니다.”

 

파랗게 변했던 입술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떨림도 멎었다.

 

뺨도 제법 발그레해져 보기도 좋고.

 

이글은 빅터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에 쫄딱 젖어서, 옷이라고 걸친 것도 빈약한 채로 외간 남자의 집에 무작정 와 ‘도와줘’라니.

 

왜?라고 생각했던 궁금증은 곧 풀렸다.

 

빅터가 안고 있던 파란 천꾸러미(겉옷)가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가냘프지만 분명하게 ‘야옹’이라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고양이?”

 

그러자 끄덕, 한다.

 

“왜?”

 

이글은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가 기울어짐을 따라 길고 결 좋은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애가, 얼마 전부터 종이 박스에 담겨서... 공장 근처에...”

 

뻔하지.

 

버려졌고, 새끼 고양이고, 자신하고 처지가 겹쳐 보여 내버려 둘 수가 없었는데 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장에 둘 수도 없고, 도와주십사 그거겠지.

 

이글은 빅터의 겉옷을 뒤져 예상보다도 훨씬 작은 고양이 새끼를 찾아 뒷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닮았네.”

 

“응?”

 

연한 회색 태비(줄무늬) 고양이.

 

색이 아주 연해서 불빛에 따라 은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못생긴게 너랑 닮았어.”

 

“익...”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른들한테 억눌려서 자기 의견 한 번 말하지 못하고... 지냈겠지... 그리고 그게 습관이 되어서...

 

이글은 즉흥적으로 결정해버렸다.

 

“좋아, 내가 맡아 주지.”

 

“정말?”

 

“하지만 조건이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답답했다.

 

그까짓 어른이 뭐라고.

 

뭐라고 그렇게 잔뜩 겁먹어서 이깟 조그만 고양이새끼 한 마리 얘기도 못 꺼내.

 

못생겼다고 놀려도 잠깐 발끈했다가 지레 겁먹어서 눈치나 보고.

 

정말 답답하고, 짜증났다.

 

“매일 저녁은 여기서 먹어.”

 

“하지만-”

 

“좁겠지만, 자고 가도 괜찮아.”

 

설마 나한테 저거 뒤치다꺼리를 다 맡길 건 아니지?

 

빅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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