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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타페드는 사방이 뚫린 것이나 다름없는 돌고래 주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을 골라 앉았다.

 

돌고래 주점은 창문을 제외하고도 계단에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네 개나 있었으므로 어느 쪽으로 앉는다 한들 등이나 사각 중 한 곳은 드러나게 되어 있었기에 굳이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이 곳에서 제작 의뢰나 채집 의뢰를 받던 미숙한 모험자 시절에도 의뢰만 받으면 주점을 뛰쳐나가 어디든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제작을 했었지.

 

새삼스럽게 옛 생각을 하며 퀸타페드는 음식 몇 가지를 시켰다.

 

라노시아 특산품인 시트러스 류 과일이 듬뿍 들어간 과일 샐러드, 달걀이 올라간 피자, 그리고 품종 좋은 포도로 만들어진 포도주.

 

햇볕을 듬뿍 받고 자란 오렌지는 갓 껍질을 깐 것인지 온 샐러드 위에 단 향기를 뿌렸다.

 

레몬조차도 상큼하고 새큼한 향이 나기는 했지만 이걸 베어물면 단 맛이 날 테고.

 

씨만 솜씨 좋게 빼낸 올리브는 과즙이 들어차서 반질반질하게 빛났고 새까맣게 잘 익었다.

 

거기 섞인 포도는 까맣게 익어서 올리브와 헷갈릴 정도였는데 조금도 물러진 곳 없이 향긋하다.

 

퀸타페드는 준비된 식기를 밀어내고 손만 가볍게 씻은 뒤 냅킨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외지인을 위해 포크가 준비되긴 했지만 깨무는 순간 얇은 껍질이 툭 터지면서 과즙이 온통 줄줄 샐 테니 라노시아가 익숙한 모험가들은-혹은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하나씩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니까.

 

하나씩 집어 입에 넣고 살짝 깨물면 얼핏 질긴 듯한 껍질이 갈라지고 혀 위로 새콤하고 단 즙이 주르르 흘러서 입 앞을 손으로 가린 뒤에 씹어 삼켜야 했다.

 

다음은 술.

 

한 잔을 주문했더니 이 해적 가득한 도시의 점원은 한 잔만요?’라는 눈빛을 하고는 유리잔 가득히 짙은 색 포도주를 따랐다.

 

퀸타페드는 배운대로 조심스럽게 림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고는 향을 한 번 맡았다.

 

다음으로는 혀 끝만 적실 정도로 조금 물고, 굴려야 했지.

 

하지만 역시 탄닌 향이 나고, 그 달고 맛있는 과일로 만들었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쓰고... 이게 대체 무슨 맛이람.

 

이슈가르드에 처음 입성했을 때나 커르다스에서 헤매야 했을 때 감각을 둔하게 할 목적으로 술을 몇 번 마시기는 했지만 그 역시 필요에 의해 마셨을 뿐이라 역시 즐길 수 없었다.

 

라레타가 이런 걸 좋아하니 어떻게 취미라도 붙여보려고 했지만 수십여가지의 술을 마셔 보고도 자신이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쓴 맛, 신 맛, 바각바각 맛 정도일까.

 

몇 달에 걸친 대장정이 끝난 뒤 라레타가 낸 술 알아맞히기 퀴즈에서 점수판을 받아든 퀸타페드는 대단하게 절망한 적도 있었다.

 

...이것도 맛은... 신 맛인가...? 거기에 쓴 맛이 있는...

 

일단 라레타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맛이 나는 술을 한 병 가져갔는데 이게 아냐!’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전번에 마신 거랑 비슷하지 않나...?

 

끙끙거리던 퀸타페드는 어차피 자신의 감각으로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는 다시 점원을 불러 건포도가 있는지 물어보고 치즈와 같이 한움큼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라레타가 좋아할만한 것을 찾으러 온 것이니 역시 제 혀는 믿지 말아야 겠습니다.

 

아무래도 전문가일테니 점원에게 추천 레시피가 있냐고 물어보는 수밖에.

 

그렇게 먹다 보면 비스마르크 레스토랑의 특기인 비스마르크 피자가 배달되었고 퀸타페드는 나이프를 들고 반숙 상태인 계란을 노려보았다.

 

이걸... 터뜨리지 않고 먹어야 할 텐데.

 

피자 조각을 사다리꼴로 자르면서 먹다 보면 가운데에 노른자만 남으려나.

 

여태껏 미동도 없던 꼬리가 스르륵, 뱀처럼 좌우로 한 번 물결쳤다.

 

뿔과 같은 재질의 뾰족한 비늘 끝이 나무로 된 주점 벽을 긁었다.

 

드득, , 단단한 케라틴이 몇 번이고 스치는데 근처에서 나무굽이 바닥 스치는 소리가 났다.

 

비늘 끝이 미세하게 일어서면서 움직임이 느려지고, 퀸타페드는 조용히 나이프를 들어 피자에 대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면으로 근처의 사람이 한 번씩 비추어지고 은색 날은 덜 익어 흐물거리는 흰자 속으로 파묻힌다.

 

걸음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그제야 퀸타페드는 꼬리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상대는 미코테 둘이었다.

 

하나는 라랑 헤어스타일이 닮았고, 하나는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네.

 

의도하지 않았지만 페드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저기요~”

 

우리 저기서 마시고 있는데, 같이 마실래요?”

 

...?

 

“...저 말입니까?”

 

!”

 

, 라 같은 소리 냈어.

 

혼자인 것 같아서요. 그 비술서를 보니 비술사 길드 사람이죠? 카벙클 부를 수 있어요?”

 

그제야 시선을 내리니 한 사람은 낚싯대를 허벅지에 매어 두었고 한 사람은 쌍검을 달아 놓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림사 로민사를 모체로 둔 길드끼리 친목이나 다져보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한 손으로는 비술서를 펴고 다른 손으로 보지도 않고 수식을 적어내려가는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이 굴러갔다.

 

마지막 등호를 적어 답을 연산해내면 허공에서 빛이 갈라지며 노란색 카벙클이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 파란색이 아니잖아? 노란색은 처음 봐. 진짜 불러줄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를 듣던 어느 때에, 비상한 퀸타페드의 두뇌가 한 가지 가설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까딱?

 

그들이 의문스럽다는 듯 귀를 까딱 움직였다.

 

라 닮았어.

 

라 보고싶다.

 

저는 결혼을 이미 했습니다.”

 

!?”

 

! 그렇게 안보인다냐!”

 

제법 공용어를 쓰던 쪽 역시 놀랐는지 냐투리가 튀어나왔다.

 

라는 냐투리 안 쓰지.

 

얼굴도 몸도 말투도 잘 삶은 달걀처럼 매끈매끈...

 

이미 애도 둘 있습니다.”

 

뭐다냐!”

 

, 조용히 해라냐...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그렇지만 냐투리를 쓰면 그건 그것대로 귀여울 것 같... 아니, 틀림없이 귀여워.

 

보통은 놀라거나 해야 냐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라는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으니까.

 

그리고 굳이 놀래키고 싶지도 않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거나 하면 날 볼 때마다 긴장할 거잖아? 안 되지.

 

하지만 라가 침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던가... 그런데 보들보들한 꼬리를 살랑거린다던가... 그런데 졸린 듯이 눈을 깜박깜박 한다던가...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다던가... 하품을 한다던가, 고롱거리면서 배를 위로 하고 눕는다던가... 그러다가 냐- 한다던가...

 

어느샌가 미코테 둘은 떠나고 없었지만 퀸타페드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꼬리가 무의식의 발로처럼 물결쳤다.

 

그 무의식은 꼬리와 뾰족한 끝을 무디게 할 생각도 않고 마룻바닥을 탕, 내리치기까지 했다.

 

저 사람 한 잔도 다 안 마시고 취했네!라며 점원이 뛰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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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귈까?

2024. 7. 9. 00:30 | Posted by 호랑이!!!

 

 

A는 신나게 총질을 하다 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생각이 미쳤다.

 

잘 빠진 제 발이 액셀을 밟고 있으니 차야 어떻게든 구를 터지만 그 달리는 것은 제법 안정적이었다.

 

흔들림없는 총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여유부릴 때는 아니지만 옆을 흘끗 보자 태연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B가 있었다.

 

조수석에서 안전벨트까지 차고 잡은 터라 영 불편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여느 때처럼 조금 짜증스러워 보이는 그대로였다.

 

상황이 정리되고 A의 비서인 C가 모는 차와 약속한 곳에서 만나게 되자 A는 손수 B의 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B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깃 구겨놓았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서도 A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A는 차에서 내려 따라오는 차가 있는지 뒤를 살피는 B를 관찰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군.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A가 더 잘 알았다.

 

총을 딱히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웠다.

 

아픔도 느끼고, 그렇다면 두려움도 있을 터.

 

하지만 이건 제법.

 

B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A와 눈을 마주치더니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A는 그 눈빛을 받고 더없이 활짝 웃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양 말고 더 먹어.”

 

B는 자신의 잔에 와인이 차오르는 걸 감흥없는 눈으로 보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B는 스스로를 퍽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했다.

 

한 병에 월급 두 달 치인 와인이건, 여태 평생 올 일 없었던 라운지에서 음식을 대접받건.

 

특별히 해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보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어서 먹어봐. 잘라놨어.”

 

대체 언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B는 깔끔하게 잘린 튀김...같은 것을 입에 넣었다.

 

...이건 맛있네.

 

건너편에 앉은 A가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지만 B는 거기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잠시 음식에 감탄했다.

 

음식을 배 채우는 이상의 용도로 생각해본 적은 적은데.

 

다음 몇 조각을 입에 묵묵히 밀어넣는데 A가 와인을 삼키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럼 이건 용건인데, 내 회사에서 일하는 거 어때.”

 

싫어요.”

 

바삭.

 

월급 두 배. 연차도 두 배로 줄게.”

 

어제 한국에서 총격전을 보게 해놓고 승낙할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럴수가, 연애할 때도 이렇게 마음 쓴 적은 없는데.

 

당신이 하는 건 연애가 아니니까 그렇죠.

 

그렇게 핀잔을 준 B는 와인으로 입가심하고 잔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들어올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일자리는 왜 거절하는데?”

 

합법적이고 안전한 데서 일하고 싶습니다.”

 

합법적이고 안전한 일 하게 해 줄게.”

 

연차에 월급 두 배.

 

당연히 어제의 그런 위험한 일 시키려고 그러나?했건만 그조차 아니었다.

 

입막음인가? 하지만 그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 당신이 얻는 이득은 뭐가 있습니까?”

 

글쎄... 나랑 연애할까? 나는 B한테 좋은 일자리를 주고, B는 나랑 연애를 하는 거지.”

 

B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A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부자 놈의 이상한 취미 같은 건가보다.

 

만화책에서도 보면 돈이 너무 많은 재벌 같은 사람은 거대한 데스 게임도 만들고 이상한 쇼 프로그램 같은 것도 만들고 하지 않던가.

 

사람 죽는 것보단 연애 쪽이 차라리 온건한 편이긴 하겠지.

 

B는 으깬 감자를 삼켰다.

 

그럽시다.”

 

! 좋아. 그럼 계약서부터 쓸까?”

 

그럼 취직 쪽부터 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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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님... ...”

 

“...형제님...”

 

어딘가 곤란한 듯, 망설이는 듯이 부르는 소리에 크나트는 길게 하품했다.

 

“...으응... 달링...?”

 

“...이 새벽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으으음...”

 

크나트는 제대로 눈뜨지도 않고 얇은 허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넓적한 손이 닿자 조금 움찔했을 뿐, 피하지도 야단치지도 않아서 크나트는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문지르다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야한 상황인가?”

 

“...아닙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곤란해보이는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이런데 왜 야한 상황이 아니지? 크나트는 반쯤 몸을 일으킨 율리안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였더니 새벽 네 시.

 

네 시에 율리안이 자신을 깨울 일이 있나?

 

역시 야한 상황 아니야?

 

섰어?”

 

“...아닙니다. 그게... 이 시간에 정말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갑자기 폰 프라이모에서 파는 칠리 프라이즈가 너무 먹고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안 될까요?”

 

칠리 프라이즈 맛있지.

 

감자튀김에 새콤달콤한 칠리 소스를 듬뿍 뿌리고 두 가지 치즈를 쌓아서 오븐에 녹여 준다고.

 

율리안은 거기에 다진 고기를 추가하는 걸 좋아하지.

 

몇 유로 더 내면 나초도 먹을 수 있고.

 

세트로 된 것을 시키면 맥주나 탄산음료도 마실 수 있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먹고 싶어서 눈을 뜨다니, 건강하기도 하지.

 

그보다 율리안이 뭔가 먹고 싶다고 자신을 깨우다니 기특도 하고,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 율리안이 이 시간에 심지어 자신을 깨워서 말을 하겠어.

 

크나트는 대충 바지를 꿰어 입고는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폰 프라이모가 24시간 영업이라 다행이다.

 

차로 30분만 가면 되니 전화로 주문만이라도 먼저 해 둘까.

 

이전번에도 잘 먹는다 싶더라니 역시 마음에 든 모양이지.

 

슬쩍 돌아보았더니 율리안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안은 큰 손이 덥썩, 제 뺨을 잡고 이마에 입맞추는 것을 가만 두었다.

 

잘 관리된 자동차는 이 새벽에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 볼륨으로 시동이 걸리더니 스르르 떠났다.

 

이 새벽에 갑자기 그런 게 너무 먹고 싶어지다니.

 

면목이 없는 걸.

 

율리안은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채 헝클어진 침대를 정리했다.

 

다녀오는 데에는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지금은 일어나서 방 정리도 조금 하고 식탁도 미리 차려 놔야-

 

하암, 율리안은 하품을 했다.

 

테이블 매트만 미리 깔아 두고...

 

삼십분만 자고 일어나자 역시.

 

율리안은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다시 푹신한 베개 위로 쓰러졌다.

 

 

 

 

 

한 손에는 폰 프라이모의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든 채, 크나트는 불 꺼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율리안이 자신을 내보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혹시 필요한 것이 음식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일 그 자체였나?

 

크나트의 손이 품 속의 너클로 향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게 칠리 프라이즈를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크나트는 안방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 하나 없이 열린 문 안은 자신이 나가기 전과 거의 같았다.

 

잘 닫힌 커튼.

 

천장에 잘 매달린 커다란 텔레비전, 마찬가지로 잘 닫힌 욕실 문.

 

조금 더 문을 열면 멀쩡한 침대가 보이고, 그 위에 엎어진 율리안이-

 

달링?”

 

급히 다가가면 숨을 쉬고 있다.

 

덧붙여서 그저 잠든 것 뿐인 것 같고.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크나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냉큼 율리안을 바르게 눕혔다.

 

그 서슬에 깬 율리안은 길게 하품을 하다가 자신이 사람을 새벽에 내보내놓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는 것에 화다닥 일어나 앉았다.

 

, 죄송합니다. 얼른 식탁이라도 차리겠습-”

 

누워있도록 해. 당장.”

 

아닙니다. 혼자 잠들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율리안은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뜨뜻한 손이 자신을 눕히자 반쯤 뜬 눈으로 진지해 보이는 크나트를 올려다보았다.

 

프라이모는 데워 줄테니 내일... 자고 일어나서 먹도록 해.”

 

“...그렇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수면을... 하아암. 저도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임신 초기에는 잠도 많이 오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걱정 말고 자.”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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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2024. 4. 1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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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데임] 오지 마!

2024. 2. 17. 20:22 | Posted by 호랑이!!!

 

아니, 우린 왜 여기로 갑니까? , 목적지는 저 쪽이라면서요? 그런데, , 굳이 둘러서 갈 이유우와아아악!”

 

비명과 함께 청년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낙엽도 눈도 없는 흙바닥에 경갑까지 착용한 몸은 우당탕 소리까지 요란해서 숲 안쪽의 무수한 생물들까지 다 깨울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는 눈이 녹아 개울이 졸졸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싹이 터 녹색이 점점이 찍힌 땅의 평화로운 한때를 깨뜨리며 식식거리는 청년 곁으로 회색 털에 쫑긋한 귀를 가진 청년 둘이 와 섰다.

 

넘어지더라도 조용히 넘어져야 한다니까-?”

 

입을 막고 넘어져, 입을~”

 

갑옷 소리도 안 나게 말이야!”

 

, 그런... , 허어... 가능, 하겠! 습니까!”

 

넘어진 청년, 웨일런의 주위를 맴돌던 두 마리 청년은 그의 항의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둘은 어딘가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렸는지 동시에 귀를 까딱 움직이더니 그를 놀리던 것을 멈추고 물을 뜨러 간다, 나뭇가지를 줍는다더니 분주한 꿀벌처럼 윙윙거리며 떠나갔다.

 

, 드디어 혼자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위에 웨일런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불을 피울 자리를 잘 고르고 낙엽이며 이것저것을 긁어모아 쌓았다.

 

고요하다.

 

명예로운 일인데다 변방에서의 생활을 동경해 스콜드로 지원을 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지만... 창문조차 작은 좁은 건물 안에서 복닥복닥하게 여럿이서 생활하는 일은 영 좋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정말로 좋은 거였구나.

 

부싯돌을 딱 딱 맞부딪치면 자그마한 불꽃이 튀고 그게 지푸라기에 옮겨붙기를 기다리는 작업은 단순해서 금세 빠져든다.

 

불꽃이 쏟아지는 것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적인가?

 

아니면 식인을 하는 동물?

 

제길, 비스와 틸은 어디까지 간 거지?

 

불을 피우느라 숙인 시선 가로 다시금 흰 것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였다.

 

뻣뻣한 털로 뒤덮인 흰 꼬리다.

 

비스나 틸, 부대 사람들은 회색 털인데.

 

녹색이끼나 검은 흙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띌 법한 색이었다.

 

웨일런은 나뭇가지와 반쯤 썩은 잎을 그러모아 불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큰 육식동물이 제 주위를 맴돌 때는 갑작스럽게 움직이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 다시금 시야 끝에 흰 털이 스르륵 움직여 사라진다.

 

이 마물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피를 빨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인가.

 

틀림없어!

 

그러나 이 몸은 스콜드라고!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땅에 내려놓았던 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고,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한다.

 

조금씩, 조금씩.

 

제기랄,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나를 보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끝이 창대에 닿은 순간 그는 이대로 손이 붙어버려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창을 바투 쥐고 등 뒤의 적을 향해 홱 돌아선다.

 

으이야아아악!”

 

그 순간, 손이 창대를 쳐서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닌데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가 창대를 가볍게 밀어내고 떨어뜨릴 때에서야 웨일런은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희어서 겨울이라면 그가 제 앞으로 똑바로 걸어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녹지 못한 눈처럼 생긴 중년의 이는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친근함을 표시하듯 웨일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꾸욱 눌렀다.

 

아저씨!” “삼촌!”

 

때마침 비스와 틸이 쏘아지듯 날아와 그의 품에 안겼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기분 좋은 바람을 만들었다.

 

그는 방금 웨일런에게 한 것처럼 이마를 두 젊은이에게 번갈아 기대고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어린 새끼들처럼 그 곁에서 장난을 치고 폴짝거렸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전에 부대에 합류하게 된 웨일런입니다.”

 

남부 억양인데. 거기 출신?”

 

, . 항구 쪽이요.”

 

흉터가 남은 얼굴이 제법 매끈한 것과는 달리 목소리는 대화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거칠었다.

 

그의 목이 쇠로 줄을 한 현악기였다면, 한 번 켤 때마다 쇳가루가 부슬거리겠지.

 

삼촌, 그게 아니지-.”

 

아니지~!”

 

그러자 그는 비스와 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의도인지 짚어낸 둘은 스스로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이름!” “이름-.”

 

“....”

 

이해해줘, 삼촌이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일이 없거든.”

 

“...‘별로없는 거지.”

 

옛날에 황궁에 간 적이 있다는데 그 때 너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난 부작용일 거야.”

 

맨날 이런 데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 거야, .”

 

그는 신나서 까불어대는 두 청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꼬리로 그들의 종아리를 철썩 쳤다.

 

이히히히.”

 

아야야야-”

 

두 마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무 둥치에 걸터앉자 그는 웨일런이 넘어지며 부딪친 다리를 잡아들었다.

 

부츠를 벗기고, 발과 다리를 살피는 중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아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혼자 따로 나와 산다? 그래서 이 쪽으로 온 거야.”

 

여기 혼자 산다구요?”

 

응 응, 마수도 혼자 잡고-”

 

마수우? 이제는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들었는데!?”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 쪽으로 보았지만 그는 귀만 한 번 까딱할 뿐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답은 두 명에게서 나왔다.

 

요즘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본 적 있거든- 그냥 덩치 큰 동물 같은 걸 생각하면 안돼.”

 

물론 덩치도 크지만!”

 

이만한 거- 이만큼- 하면서 팔을 벌려보이는 둘에 웨일런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봄임에도 여전히 낡고 부드러운 가죽옷을 입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요?”

 

그는 웨일런과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나도 가능하지.”

 

나도라니?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가까이에서 고개를 돌리자 웨일런은 또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스콜드 부대원은 이제 봄이라며 머리를 잘랐고, 여름에는 깎는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웨일런의 다리가 괜찮으니 이제 다시 이동하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아직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배가 고픈데다 삼촌 집에 가고 싶은데다 부상자가(아닙니다!) 있다며 조르는 두 청년에게 격침당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의 겉에는 이끼가 앉고 작은 새가 둥지를 튼 흔적도 보인다.

 

문을 열자 향긋하게 마른 풀 냄새가 훅 끼쳐왔고, 아담하고 정갈한 첫인상과는 달리 약초며 건조식량이며 털가죽 같은 것이 잡다한 물건과 뒤섞여 영 엉망진창이었다.

 

웨일런은 손으로 깎은 듯한 장식적인 창틀을 구경하려다 천장에 덩굴같이 매달린 돌멩이에 이마를 부딪쳤다.

 

으악!”

 

조심해! 여긴 완전-”

 

전쟁터 같다니까?”

 

그의 손가락이 벽을 툭툭 두드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종의 신호인 듯했으나 두 청년은 못 본 체, 못 들은 체를 하며 이 어지러운 방안에 대해 곰팡이가 핀다니, 딱정벌레도 도망간다니 찧고 까불다가 그가 팔을 들어올리고 덤비자 엉망인 방 안에서 도망을 다니며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깔깔거리며 웃고 털이 흩날리는 한 켠에서 웨일런은 다시 방안을 찬찬히 구경했다.

 

잘 말린 나무로 창틀을 만들고, 탁자와 침상을 만들고, 선반을 깎은 것들은 오래 손을 탔는지 반질반질했고 오래 공을 들였는지 곰, 늑대, , 왕관, 전설 속의 거인 같은 문양이 다채롭게 아로새겨져서 실내의 불에 음영을 드리운다.

 

비스의 꼬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고, 틸의 다리를 걸지 않게 조심하면서-그는 발을 걸라고 소리쳤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움직이다 무언가가 웨일런의 시선을 끌었다.

 

이 집안에서도 화려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상자.

 

비스듬하게 열린 안에서는 가장 낡은 천으로 감싼 것이.

 

웨일런은 머뭇거리다가 녹은 촛대와 깃펜 덩어리를 살짝 밀어내고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들어올렸다.

 

내용물은 병 몇 개... 정도였다.

 

안에 든 것은 금 같았지만 상자가 움직이자 마치 액체처럼 기이하게 흔들렸는데-

 

달칵.

 

장갑을 낀 손이 뚜껑을 눌렀다.

 

주인의 물건을 허가도 없이 들여다본 셈이므로 웨일런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튜 그릇을 받아 들 때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연금술사인가요?”

 

, 연금술사?” “그게 뭐야?”

 

제가 스콜드에 합류하기 전에 연금술이 유행했었거든요. 돌을 무슨 금으로 바꾸는 거라던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두 젊은이들이 그릇이나 솥을 씻는다, 자리를 정돈한다며 돌아다니자 그럴 필요 없으니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했다.

 

아무튼 그런 것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날 때부터 스콜드였으니까. 조만간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술하게 둔 것이 아닌가.

 

솥에는 물을 담아 불 위에 걸고 벽난로 안에는 장작 몇 개비를 더해 잘 준비를 마치면 그가 나눠주는 모포와 가죽을 덮고 그들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웅크렸다.

 

웨일런은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올 듯 반짝이는 무수한 별과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한 흰 달빛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 병에 담긴 것들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미 주위 사람들은 잠이 든 뒤였다.

 

장작이 거의 다 타고 불빛이 사그라들던 어느 때에, 웨일런도 잠들었다.

 

 

 

 

 

 

 

잘 자네.”

 

이봐, 일어나. 이제.”

 

흐으어...?”

 

웨일런은 눈을 떴다.

 

어제의 지저분한 집안은 비스와 틸이 청소를 해 놓은 것인지 제법 정돈되고 비질되어 깨끗해져 있었다.

 

내 책상 건드리지 말라니까!”

 

아저씨 그 상자는 안 건드렸어!”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한두 번 온 줄 알구.”

 

이 망나니 녀석들!”

 

나 배고픈데. 밥 주세요!”

 

고맙다고? 별 말씀을~”

 

그는 두 젊은이를 향해 으르릉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부엌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이 나이가 되니 온몸이 삐걱거린다며 팔다리를 쭉쭉 뻗고, 신선한 새 알과 비스킷과 과일 같은 것을 잔뜩 내 왔다.

 

이거 먹고 가고, 다음부터는 오지 마. 와도 내가 없을 거야.”

 

? 어디서 지원 요청 들어왔어?” “?”

 

너흰 몰라도 돼. 어른들하고는 얘기 다 해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런 게 어딨어!”

 

우리도 인젠 어른인데!”

 

그는 코웃음으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좀 살만하다지만 스콜드에 자원하다니 특이한 녀석이야.”

 

꼬리가 등을 툭 치는 바람에 웨일런은 마악 입에 넣으려던 딸기 비슷한 과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스콜드, 멋지잖아요.”

 

“...우리 때는 그런 취급이 아니었는데.”

 

그는 비스가 마악 베어물려던 과일을 빼앗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와사삭 하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나고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중에 혹시 오거든, 기억해. 저 쪽에 약이 있고 저 쪽에는 건조 식량, 뒤편으로 나가면 샘이 있어.”

 

아저씨 보물은 더 없어?”

 

“...마쟈, 부대, 에 있는 그 엄청 화려한 공... 같은 거.”

 

어이구, 하고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음에 가면 가구 장식 좀 뜯어 올게.”

 

에이!” “에이이-”

 

짜식들이, 라며 그는 틸이 집던 비스킷을 낚아챘다.

 

그 투닥거림은 그들이 뒷정리를 하고 짐을 싸서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 갈게!”

 

오지 마, 이젠!”

 

우리 보고 싶을 텐데!”

 

안 보고 싶어-?”

 

그 말에 그는 그 둘을 쳐다보다가, 양 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빨리 가기나 해!”

 

에이이-” “-”

 

웨일런은 묵직한 짐을 어깨에 고쳐 지고는 끈으로 한 번 더 고정했다.

 

저 녀석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생각 없고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고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다 들려!” “코앞에서 뒷말하다니!”

 

“.........아마도, 착한 애들이니까...”

 

아마도라니! 하고 항의가 이어진다.

 

웨일런은 웃었다.

 

잘 지내십시오. ....”

 

데임.”

 

잘 지내세요, 데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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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느낌으로 어쩌구

2023. 10. 16. 01:45 | Posted by 호랑이!!!

 

웬일이야.”

 

바질 실버루트는 전서구가 물어다 준 쪽지를 다시 눈높이까지 들어 읽었다.

 

오늘 수업은 빠질게. 좀 쉬려고 디디-

 

바질은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빛에 비추어도 보았지만 디에고 드라질리 특유의 날림체 외에 다른 문장이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픈가?”

 

디에고 드라질리가 아플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세상은 넓고 수많은 일은 일어나니까.

 

오늘의 방과 후에는 승마회가 하나, 저녁에는 독서클럽, 밤에는 마력학 복습을 하고 갈릭의 정령생태학 이론을 봐 주기로 했지만 얼마 전에 자신이 아플 때 디에고가 이것저것 해 주었던 일이 있으니까.

 

바질은 쪽지를 잘 접어 아카데미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10월이었다.

 

이번 주에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게 인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지망에서 3지망까지 황궁 마법부, 황궁 행정부, 황궁 소속 마탑으로 전부 황궁 지망이었고, 때문에 디에고와 한 내기도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정확하게는 엿새.

 

자의식 과잉에 공부만 잘하지 멍청하고 제멋대로고 나태한 녀석과 지낸 것치고는 꽤 즐거웠지만 역시 얼굴만으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구나.

 

상가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바질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와이셔츠를 정리한 뒤 낑낑거리며 커다란 냄비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퍽석.

 

들고 있던 도자기 그릇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감기에 좋다는 남부식 스튜가 피처럼 붉게 복도를 물들였다.

 

차라리 사 오길 잘 했어.

 

이걸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 비참했으리라.

 

바질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은 채 방 안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얽혀 있던 실루엣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떨어지자, 그제야 바질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도 디에고는 무어라고 소리쳤겠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디에고 옆에 있던 건 페퍼였어.

 

페퍼가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비웃을 게 뻔했다.

 

몸을 돌리고 바질은 달렸다.

 

멍청한 짓이야.

 

바질이 내심으로 속삭였다.

 

자신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발이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뭐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 그렇지?

 

비록 우리가 오십하고 오 일이나 연인처럼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내기잖아.

 

내기였잖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뒤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바질은 그 옆의 비상계단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계단은 불이 어둑했다.

 

담배 금지 마법이 걸린 후로는 누구도 오지 않았는지 딱딱한 구두굽이 디디는 소리만 공허한 공간에 울린다.

 

달칵.

 

뛰어내려갈 때마다 앞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앞은 어둡고, 계단 아래는 더욱 어두워서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소매가 잡혔다.

 

잠깐만! ...... 오해야.”

 

바질은 여전히 돌아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소매를 꽉 쥐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후우, ... ...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했어.”

 

목이 메었다.

 

소매를 당겨 보았지만, 조금도 멀어지게 둘 수 없다는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약간이라도 돌린다면.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자리를 옮겨서, 내 얼굴이, 표정이, 이 모든 감정이 드러나 버린다면.

 

바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겠구나, 드라질리.”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표정조차도 바꿀 수 없었다.

 

간신히 목이 삐걱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내는 게 한계였다.

 

때리고 싶었다.

 

욕설을 퍼붓고, 소리치고, 있는 힘껏 비난하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네가 말하는 그 오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황궁에서 볼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억지로 몸이 돌아갔다.

 

불빛이 어두웠다.

 

고개를 숙였으니 표정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소매를 잡은 힘이 빠지는 것을 보니 디에고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기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 거야.

 

입술을 꽉 깨무는데 디에고가 다시 어깨로 손을 뻗으려 했다.

 

바질-”

 

부르지 마!”

 

짝 소리가 나도록 손이 떨어졌다.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당장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머니 속의 망할 쪽지 뿐이다.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 타악-

 

아무렇게나 구겨진 쪽지가 잘 생긴 얼굴을 때렸다.

 

두 번이나 얼굴을 때렸지만 가벼운 것은 아프지조차 않았다.

 

닿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디에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바질이 서 있었던 계단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발자국은 희미해져서 그 앞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그 곁으로는 구겨진 쪽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서.

 

디에고는 그 두 장을 집어 들었다.

 

한 장은 아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봐. 기대된다

 

낡은 종이였다.

 

주머니에 넣고 오래 만지작거려 낡아진 종이였다.

 

그 날이구나

 

그리고 계단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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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린에게

2023. 8. 23. 12:42 | Posted by 호랑이!!!

 

디안, 왜 안된다는 거예요!”

 

마리, 마릴린, 마릴린 오슬리테아. 여기에 그런물건을 두면 안되지. 여기는 그저 휴식을 위한 조용한 정원이라고.”

 

이젠 아니에요.”

 

게다가, 이 정도는 그 작자들이 하는 데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며 마릴린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약하게 미혹하는 마법이 걸린 향낭을 차고, 같은 물건을 액체로 만들어 술이며 분수대에 뿌리면 마릴린을 찬양하는 향이 은근하게 흘러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속삭인다.

 

유일한 적자인 황녀에게 웃어 보이라고.

 

마릴린 오슬리테아는 목에 건 로켓을 꽉 쥐었다.

 

10년 전 리안 오슬리테아가 암살당한 후 그의 차림은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위압적이고 완벽하게 변해 갔지만 그 낡은 로켓만은 항상 그대로, 화려한 모슬린과 레이스 아래에서 그의 심장을 눌렀다.

 

금색과 적색으로 짙게 화장한 눈초리가 카디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카디안은 분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어렵잖게 읽어내며 손짓만으로 분수에 섞인 향수 방울을 분리했다.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마리.”

 

“...‘이에요.”

 

“...마리. 나의 황녀님.”

 

“...”

 

“...네 정책은 훌륭해. 백성들이 여가 시간을 갖거나 행복을 느끼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아는 머저리들도 솔깃할만한 이득이 있어. 너도 그걸 설득할만한 능력이 되고.”

 

그러니 이런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속삭이며 주먹을 꽉 쥐자 향수 방울은 그대로 사라졌다.

 

“...디안...”

 

마릴린은 정원 한쪽에 의자 대신 놓은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카디안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포켓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냈으나 마릴린의 손은 손수건 대신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목깃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로 금속 같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닥쳐. 카디안 웨르제.”

 

마릴린 님.”

 

오빠 친구라서 좋게좋게 대해주니 진짜로 네가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아?”

 

부드러운 실크 장갑 아래에서 물어뜯은 손톱이 천을 긁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빌어먹을 잡놈이 내 오빠의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봐. 오빠의 정책이 사장되는 꼴도 못 봐.”

 

오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개판이 되도록 놔둘 수 없어.

 

카디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마릴린은 품에서 그 향수를 꺼내더니 몇 방울 남지 않은 것을 병째로 분수에 내던졌다.

 

반짝이는 병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며 그 안에 든 분홍색 액체를 서서히 퍼뜨리고 분수에서도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뭐든 할 거야. 온 나라의 귀족을 세뇌하고 유혹해서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한다면 전부 내 손아귀에 쥐고 흔들 거야.”

 

카디안은 분수대에 빠진 유리병을 건져 왔다.

 

손수건으로 닦아 양 손으로 바치면 마릴린은 그 병을 한 손으로 받아 가방에 처박았다.

 

하지만 마릴린 님-”

 

황녀 폐하! 먼저 와 계셨군요. 오늘도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그 사이로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릴린은 언제 화를 내었냐는 양, 어느샌가 고귀하고 우아한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첫 손님을 맞았다.

 

후후, 고맙소. 이 정원은 오라버니가 내게 준 것이니 늘 신경써 가꾸고 있지.”

 

사람이 늘어난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향에 감싸여 마릴린의 정책에 고개 끄덕이며 집중하고 찬성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카디안은 젊은 귀족층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마릴린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이 정원이 잘 가꾸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리안이 살아 있을 적, 그러니 10년 전에는 리안과 카디안이 늘어져 시며 연극을 토론하고, 때로는 종이 검으로 유치한 칼싸움도 하고, 아직 어린 마릴린이 어린이용 차와 과자를 가져오면 인형이 쓰는 헤드드레스나 턱받이를 맨 채 자그마한 컵을 들고 오호호 웃었지.

 

그들만의 장소였기에 바깥에서는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번듯하던 리안도 제멋대로 늘어져 눕고 마릴린도 오빠를 따라한다며 드러누웠다가 풀물이 다 들었었고.

 

이제는 리안의 마지막 모습만큼 자란 마릴린이 뒷배도 없이 혼자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린 황녀님!”

 

아름다운 린 님!”

 

천사같은 린 황녀님!”

 

오빠의 장소에서, 오빠의 자리를 위해, 오빠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카디안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빠져나왔다.

 

“......”

 

네가 없으니 육체가 나이 들지 않는다.

 

너를 보고 하나씩 몸을 수선하면 그 바위에 옆으로 누워서는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라고 신기해했지.

 

나는 이제 한동안 이 모습으로 지내게 되겠구나.

 

“..., .”

 

카디안은 정원을 떠나려다 구석에 숨겨진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소리와 모습을 녹화하는 마법 도구다.

 

손 사이에 놓고 지그시 누르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서히 형체를 잃고 납작하게 변해 부서졌다.

 

너는 멍청이야.”

 

저만치에서 이 파티를 훼방 놓기 위해 다가오는 황자 무리가 보였다.

 

육중한 군마 위에 올라타서 난폭하게 몰아대니 잘 가꿔진 잔디는 엉망으로 패이고 낮은 관목은 부러지거나 꼴사납게 가지를 떨어뜨린다.

 

저런 것이 작은 정원을 지나가면... 뻔하지.

 

와하하하! 달려라 달려!”

 

휘이이익! 다 비켜라! 다친다 다쳐!”

 

거기! 비켜! 비키라고!!!”

 

카디안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저만치 놓인 정원 수레바퀴 아래의 쐐기를 없애버렸다.

 

흙과 태울 것들이 가득 실린 수레가 비탈을 따라 굴러오면 그 망나니들은 길을 막아서는 수레를 피하거나 걸려 날아가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 발걸음을 돌리며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나더러 마릴린을 돌보라고 했어야지.

 

사람 없는 곳에 다다르자 손짓이 어둡게 빛나는 포털을 열었다.

 

인간의 목을 꺾어버리는 것따위 어렵지 않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마릴린에게 축복을 내려 황제로 삼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린은, 리안은.

 

마릴린더러 카디안을 돌보라는 말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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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

2023. 8. 18.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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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덩] 위그님 리퀘

2023. 8. 9. 02:21 | Posted by 호랑이!!!

@: 저는 그냥.. 슬덩/호열이 나오는 걸로../알바처에서 알바하는데 농구부애들와서 매상 올려주고 일찍 칼퇴하면서 같이 퇴근하는 그런 연성이 보고싶어요.. 캐해석은.. 양키가 성실하네.. 이런 느낌으로..

 

 

 

 

 

 

 

여기 라면 하나~ 계란 추가해서!”

 

카레하고 가라아게 정식! 햄까스도!”

 

! 돈까스 덮밥! 이 몸은 곱빼기로! 그리고 만두!”

 

이야아,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데? 나도 라면!”

 

사람 적은 가게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퇴근 후 한 잔을 즐기던 사람들마저 돌아간 늦은 시간, 닭꼬치며 우동에 맥주 같은 것을 앞에 놓고 빈둥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밀도가 높아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백호 군단이다!”

 

강백호랑... 기타 등등!”

 

작은 소리였는데도 기타 등등으로 칭해진 세 사람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이어이-”

 

-기타 등등이라고?”

 

손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팰 거면 나가서 하라니까-”

 

말리는 것을 포기한 양호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한편으로 백호가 예의바르게 사장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쇼.”

 

어서 오렴, 돈까스 덮밥이라고 했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앞치마를 맨 사장님은 1인분이라기엔 너무 커다란 돈까스를 기름에 넣었다.

 

촤아아 소리가 나고 저만치에서 폭력이 끝났는지 주섬주섬 사람들이 일어나자 사장님은 면을 끓는 물에 담갔다.

 

호열 군, 계산~”

 

-”

 

순식간에 사람이 적어졌다.

 

계산하고, 백호 군단이 앉을 테이블을 닦고, 물수건과 물컵을 가져온 양호열은 망나니들이 싸우느라 엉망이 되었던 안쪽 테이블과 의자가 반듯하게 놓여진 것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걸 치우는 건 결국 양호열 자신이니 이왕이면 가게 밖에서 싸워 줬으면 했지만, 사장님이 백호 군단의 난장판을 두고...

 

덕분에 요즘은 가게를 일찍 닫을 수 있어 좋더구나.”

 

...라고 한 뒤로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게 되었다.

 

반찬 한 가지에 술 한 잔 놓고 몇 시간씩 있다가 패악질이나 부리던 사람들이 백호 군단이 푸닥거리를 한 판 하면 스르륵 사라지니 사장님도 오히려 반기는 느낌이랄까(다만, 저녁시간 그릇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곧 음식이 나왔다.

 

묵직하게 담긴 라면, 바삭바삭하게 튀긴 돈까스에 밥이 정량보다 확연히 많은 덮밥, 그릇에 넘치도록 담긴 카레, 산처럼 쌓은 가라아게와 두 배는 될 법한 햄까스, 철판에 구워낸 만두도 접시 가득히.

 

, 나왔다!”

 

각자 가져가면 안 되나?”

 

괜찮으니 앉아 있어.”

 

이 천재의 계산으로는 한 사람이 하나씩 쟁반을 가져가면 훨씬 빨리-”

 

깰 것 같으니까 앉아. 있어.”

 

양호열도 힘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몇 번이나 카운터와 테이블을 왕복하며 그릇을 날라야 했다.

 

사장님, 요리 하나가 더 나왔어요.”

 

그건 호열 군 거야. 친구들이 온 김에 같이 먹도록 해.”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의젓하게 대답한 양호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순간 그 나잇대 아이들처럼 와하하 웃었다.

 

만두랑 햄까스 하나랑 바꾸자.”

 

만두 몇 개 줄 건데?”

 

하나! 인심 썼다!”

 

뭐어? 두개 더 줘!”

 

라면 위에 고기랑 만두랑 바꾸자.”

 

왁자지껄하게 나눠 먹는 모습에 입가에 점이 있는 사장님은 후후 웃으며 카운터 안쪽 정리를 했다.

 

많은 양이었는데도 음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열 군, 다 먹었니?"

 

"넵-!"

 

"미안하지만 저기 포대 좀 내려줄래?"

 

양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의 묵직한 쌀포대를 꺼내어 어깨에 턱 메면 사장님이 호열 군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며 기뻐했다.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라던가 별 것 아닌걸요, 라던가 무어라고 했을 법도 하지만 어째 가게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다.

 

또 무슨 수상쩍은 짓을 하는 걸까, 하는 눈초리로 가게로 돌아오면, 앞서 걸어가던 사장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이게 뭐야?!"

 

"짜잔!"

 

"라면카레덮밥 봇이다!"

 

"이건 만두까쓰정식 봇!"

 

남은 그릇과 젓가락으로 멋지게 로봇을 만들어낸 네 사람은 방해하지 않겠다며 가게 밖으로 우르르 나갔다.

 

“...설거지랑 청소는 제가 마저 할게요.”

 

그래줄래?”

 

사장님이 매출을 계산하고 물건의 재고를 확인하는 동안 양호열은 그릇 로봇들을 조심조심 개수대로 옮겨 닦고 화구 아래까지 구석구석 말끔하게 청소했다.

 

“..., 사장님.”

 

?”

 

잔머리가 나오지 않도록 가지런하게 묶은 머리에서 머리수건을 벗으며 사장님은 땀까지 흘리는 아르바이트생을 흘긋 보았다.

 

잘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렇게 많이 주셔도 괜찮나요?”

 

후후.”

 

들리는 소문이며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걱정했지만, 일해 보니 성실하고 친구들도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지.

 

사장님은 어쩐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작게 웃었다.

 

호열 군 친구들인데 뭘. 운동하는 애들은 많이 먹어야지.”

 

“...감사합니다.”

 

이제 청소도 다 되었고, 매출도 맞네, 이제 퇴근할까? 가방 가지고 나오렴.”

 

가게 밖으로 나오니 압도적인 포스를 흘리는 덩치 넷이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최근에는 사장님도 익숙해진 장면이다.

 

가게 문을 잠그면 양호열이 손을 뻗어 셔터를 내렸다.

 

한때 셔터를 내릴 때 썼던 막대는 먼지가 앉아 쓸쓸하게 놓인 것이 눈에 밟혔다.

 

저것도 나중에 치워 놔야지.

 

그럼 잘 가, 호열 군. 친구들도.”

 

내일 뵙겠습니다!”

 

양호열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주위 친구들도 나름나름 성실함을 가미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누님!”

 

안녕히 가세요~”

 

바이바이!”

 

방향은 반대인데도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문득 돌아보았을 때.

 

의젓하고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은, 어느샌가 평범하고 놀기 좋아하는 학생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빨간 머리 학생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이좋은 아이들이라니까.

 

사장님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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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와 뜨개 가방

2023. 6. 12. 01:20 | Posted by 호랑이!!!

A는 오래된 건물에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물은 부분부분이 깨져서 햇살이 들이치고 식물이 자랐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이모들은 건물이 과거에 ‘ktx’를 타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A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은 흰색 계단과 검은 색 계단이 있었는데 이모는 꼭 하얀 계단만 밟고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모는 아는 것도 많고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단 말이야.

 

ktx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탈것인데 바닥에 있는 을 따라 간다고 했다.

 

길이라... 저 아래 있는 거지?

 

움푹 파인 곳은 풀이 웃자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려다보던 A는 그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풀과 꽃으로 뒤덮인 사이에서 때묻은 이 보였다.

 

, 너무 작지 않나?

 

A는 몰래 길을 만져보았다.

 

이모가 보았다면 파상풍에 걸리니까 안돼!라고 하겠지만 A는 파상풍이 뭔지 몰랐다.

 

이모는 죽는 병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병은 어차피 죽는 병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이모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해 아래 나갈 때는 피부암!’이라며 모자라도 쓰게 했고 모르는 개가 다가오면 광견병!’을 외쳤다.

 

크든 작든 구분없이.

 

언젠가 한 번은 하얗고 작은 강아지가 다가오길래 잡으려 했더니 그건 다 큰 개라며 못 잡게 했다.

 

그렇게 작은 개가 어딨어!

 

이모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A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간.

 

A는 턱에 손을 대고 너비를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앉기도 힘들어 보이는걸.

 

그리고 왜 이렇게 깊은 곳에 을 만든 걸까?

 

이 곳에 물 같은 걸 채우고 배를 띄운 걸까?

 

A는 부서진 테이블 판을 그 레일 위에 올렸다.

 

이번 역은~ -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이모들은 이 근처를 지날 때면 합창하고는 그게 무슨 농담인 것처럼 키득거렸다.

 

A도 따라하곤 했지만 이모들은 늘 그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뭐 어때, 난 이렇게 할거야.

 

이번 역은 신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위 윌 어라이빙-

 

몸을 들썩일 때마다 단단한 합판 테이블이 덜그럭거렸다.

 

A는 이모가 만들어 준 가방을 아래 깔았다.

 

이모는 쇠로 만든 바늘이 든 낡은 가방을 갖고 다니는데 밤이면 늘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은 가방일 때도 있고 몸에 두르는 긴 천일 때도 있었고 함정에 쓸 재료일 때도 있었고 A가 어릴 때에는 안고 잘 수 있는 인형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더 커다란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 든 실을 하나씩 쓰다보니 점점 작아졌고 몇 번이나 다시 풀고 뜨고 하더니 이제는 겨우 바늘만 들어가는 종류가 되었다.

 

마지막 실로 A의 모자를 떠주던 날, 이모는 이제 식물 줄기에서 실을 뽑을 거라며 쾌활하게 웃었지만 그 날 밤 몰래 물을 마시러 나온 A는 이모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싼 실 말고 더 예쁘고 양 많은 실을 사둘 걸 그랬다며 우는 것을 들었다.

 

뭐 그렇겠지.

 

한참을 그렇게 들썩거리는데 저만치나 떨어진 곳에서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슴이나 토끼면 좋겠다.

 

다람쥐나 청설모까지도 괜찮아.

 

고양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아냐 역시 토끼가 좋겠어.

 

칼을 쥐고 조심조심 돌아보는데 다시금 육중한 발소리가 다른 곳에서도 났다.

 

높은 해자 위로 살점이 흘러내린 뼈와 피부가 녹색처럼 보일 정도로 곪아 흐르는 진물과 이지를 잃어버린 채 원시적인 위협음을 내는 유사 인간들.

 

A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불규칙하게 살점 붙은 몸이 해자 안으로 툭 툭 떨어지면서 철퍽 소리가 났다.

 

녹색으로 반짝이던 이파리며 노랗게 흔들리는 꽃에 질척한 살점이 달라붙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모들이랑 언니한테 토끼는 못 갖다주겠네.

 

칼이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다가오던 첫 번째 놈의 머리를 걷어차 날렸다.

 

딱딱하고 두꺼운 밑창 아래로 골반뼈를 으스러뜨리며 다음 놈의 배를 밀어내듯이 차자 살점이 떨어져 가벼워진 몸이 뒤로 밀려나다 벽에 부딪히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뼈가 드러난 손 네 개가 A의 움직임을 봉인하려 다가왔다.

 

잘 갈아둔 칼을 휘두르자 첫 번째에는 손가락이, 두 번째에는 손목까지 잘려 땅에 떨어진다.

 

세 번의 칼질로 마침내 목 두 개를 취하면 이번에는 뒤쪽에서 가까워진 소리가 났다.

 

보지 않고 주먹을 뻗는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머리통을 비껴나고 반쯤 드러난 턱뼈가 벌어지며 그 팔을 노린다.

 

그러나 A는 몸을 숙이며 그 품 안으로 더 빠르게 돌아 들어갔고 주먹보다 단단한 팔꿈치가 반쯤 삭은 갈비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팔이 밀리지 않게 주먹을 받치면 그 안쪽의 물어뜯긴 폐와 허상 같은 척추까지 허물어졌다.

 

이걸로 다섯.

 

이어서 여섯, 일곱, 여덟.

 

마지막으로 아호-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것의 목을 부수고 떨어뜨리는 순간 아래에서 몸이 솟구쳤다.

 

목을 끊지는 않았던 것이 스르륵 일어나 덤벼들었다!

 

A는 반사적으로 두껍게 뜬 가방 끈을 잡고 벌린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가 벌어졌다 다시 닫혔지만 끈을 재갈처럼 물기나 할 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거 폭신폭신 하는 기능만이 있나 했었는데 의외로 이 끈, 꽤 튼튼한 모양이야.

 

하지만 아끼는 물건이 더럽혀지는 것은 달갑지 않아-비록 아끼는 물건을 아까까지 깔고 앉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A는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다.

 

“..., 이거 제복이다.”

 

열쇠 같은 게 나오면 좋댔는데.

 

비록 좀비사태가 터지기 직전에는 전자식 도어락을 달곤 했다지만 자판기라던가 특정 문, 특히 일하는 사람들이 쉬는 곳은 열쇠를 쓰는 곳이 많았다.

 

옷을 뒤집어 털자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앗싸 신난다.

 

A는 열쇠가 몇 개나 붙은 열쇠고리를 신나게 들어올렸다.

 

금속 장식이 반짝거리는 것은 예쁘니까 가방에 넣고 해자에서 뛰어올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자판기, 아니고.

 

화장실, 아니고.

 

창고? , 돌아간다.

 

그렇지만 창고는 물건이 많을 테니까 내일 다른 사람들이랑 와야지.

 

A는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 마지막 열쇠에 딱 맞는 곳을 찾았다.

 

검은 색 네모판이 한 벽을 메우는 곳에 책상 몇 개와 의자와 캐비넷이 있다.

 

캐비넷도 볼 거지만, 책상 서랍을 뒤지는 것은 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라.

 

대다수는 필기구 같은 게 나오지만-이것도 잘 쓰기는 한다- 의외의 물건이 나오면 여기저기 자랑하기도 좋았다.

 

하나, 수첩.

 

, 사탕과 과자가 든 작은 통.

 

이건 이대로 가져가야지!

 

이것만으로 충분한 소득이었기에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가 A는 마지막 책상을 열었다.

 

세 번째 책상 서랍 맨 아래칸에는 보라색이며 초록색이며 사람 머리통만한 실이 가득했다.

 

둘러진 종이 띠를 살짝 만지면 버석했지만 실은 보드라웠다.

 

꽃잎보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자 머릿속까지 찌릿찌릿했다.

 

이게 오늘 얻은 최고의 보물인지도 몰라!

 

A는 과자통을 놓을 수 없었기에 몇 번이나 책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통은 가방에 쑤셔넣고 실 뭉치를 한아름 품에 안았다.

 

이걸 보면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풍요로웠고 기술의 극치를 달렸다는 과거의 산물답게 한아름이나 안은 실은 부드럽고 가볍기까지 했다.

 

이모는 이걸 보면 무슨무슨 얀이니 울이니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할거고 다른 이모들한테 이걸 만져보라고 하겠지.

 

그럼 다른 이모들은 이모가 첫 뜨개질로 만들었다는 그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또 웃을 거다.

 

고양이가 낚아채길래 목에다 매 줬더니 그대로 고장났다는 그거.

 

그럼 그 시대를 모르는 나와 B는 과자나 까먹으며 잡담을 하다 웃을 거고, 뜨개질을 배우는 B는 내일부터 이걸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모자를 만들든 판초를 만들든 가방 끈을 만들든 첫 번째 것은 무조건 나 달라고 해야지.

 

신이 디디는 바닥에서는 투박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지만 A의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오늘은 수확이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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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장마와 너

2023. 4. 19. 23:13 | Posted by 호랑이!!!

비가 쏟아졌다.

 

이례적인 장마라고, 근 십 년 내에는 비할 게 없는 장마라고 뉴스에서는 떠들어 댔다.

 

동시에 비가 그치면 작년보다 더 더운 날이 된다는 얘기도 나왔으므로 저 뉴스는 아무런 정보가 되지 못하고 빗소리에 맞서 어떻게든 공간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 불쌍한 소리를 눌러 죽일 생각으로 창문을 열자 소리가 한층 강하게 쏟아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후덥지근함 속에 유일하게 시원스러운 것이었다.

 

멀쩡한 침대에 멀쩡한 책상을 두고 찬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들척지근한 담배향이 가루처럼 입 안으로 새어들어와 타액에 녹았다.

 

혀 끝에서부터 입 안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필터에서 나오는 희미하게 역한 맛이며 입술 너머로 느껴지는 작고 동그란 구슬이며.

 

이것을 깨물면 상쾌하게 박하 향을 툭 터뜨리겠지.

 

그 깨지는 감각이 꽤 중독적이고, 향도 좋았으므로 잠시간 이것을 깰까 충동이 들었으나 내킬 때 나가서 이것을 피울 생각이었으므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

 

A는 손 끝을 조그만 진주알에 올렸다.

 

이렇게 물소리가 나는 날에는.

 

그래서 물에 잠긴 것 같은 날에는.

 

내가 호흡하는 것이 유달리 신경쓰이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 아이가 생각났다.

 

같은 동그라미라도 저 물방울처럼 흔하디 흔한 보통 사람인 나와 달리, 이 진주처럼 보통 사람이 아닌 그 애가.

 

입에 문 필터가 타액으로 젖어갔다.

 

축축한 것이 거슬렸으나 굳이 빼내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물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갑작스레 사라진 만큼 또 갑자기 나타날 것만 같았다.

 

뻐끔

 

그래, 이렇게.

 

A는 식어버린 채 며칠이나 방치되었던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뻐끔거리는 거 안 하잖아.”

 

너 보라구 하는 거지~”

 

시선이 마주치자 저 어두운 바닷속에서 보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놀러 갈게!”

 

사 놓을게. 언제 올 건데?”

 

“5분 뒤에 도착할거야!”

 

미리 말을 하고 오란 말이야!”

 

A는 허둥지둥 일어나 담배를 뱉다가 습관적으로 재떨이에 으깨버리고는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울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우산과 지갑을 챙겼고 신발 뒤축을 구겨신으며 뛰쳐나갔다.

 

그 서슬에 텔레비전이 꺼졌다.

 

무의미한 소음이 사라진 공간으로 폭포처럼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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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2023. 4. 11. 02:36 | Posted by 호랑이!!!

애오오옹-’

 

율리안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올렸다가 검은 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로군.

 

고양이는 꽤 유익한 동물이다.

 

쥐도 잡고 벌레도 잡고 병도 막아준다.

 

개인적으로 따로 알고 지내는 고양이는 없지만 과거 성당의 어느 형제님은 따로 밥을 챙겨준다던가 대화를 나눈다던가 한다는 소문이 있었지.

 

동물의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왜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들어올리고 흐물텅하게 있는 걸까?

 

율리안은 읽던 책을 덮어 테이블에 얹고 담벼락 위의 고양이를 빤히 보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

 

노천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은 으레 손님이 주문한 음료에 대해서는 주문이 나왔다고 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

 

그러나 종만 다를 뿐 닮은 둘이 눈싸움을 하는 것을 알아차린 주위의 손님들이 입 앞에 손가락을 대었고 결국 아르바이트생은 테이블 위에 조용히 잔만 내려놓았다.

 

달그락.’

 

한편 율리안은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도 그 녹색 눈으로 율리안을 보았다.

 

율리안은 고양이를 보며 의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자세라는 평을 내렸다.

 

어쩌면 고양이도 율리안을 보며 인간 치고는 희한하게 고양이 같은 부동세로 자신을 보고 있다고 평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만 발바닥에 분홍색 부분이 다 드러나도록 발가락을 쫙 편 채 저렇게나 오래 있었는데 쥐가 나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여기는 다시 말하지만, 인간 천지다.

 

고양이보다 스무 배는 커다란 생물들이 득시글한 곳인데 왜 저렇게 무방비한 태도로 이 곳을 돌아다니는지.

 

그렇다고 저 고양이가 굳이 여기까지 올 정도로 배가 고파 보인다던가 졸려 보인다던가 하지는 않는다.

 

행동을 보고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동물이 없기도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

 

그리고 저렇게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계속 이 쪽을 쳐다보니 희미한 어색함이... .

 

율리안은 깨달았다.

 

이렇게나 쳐다보다니 사람이 상대였다면 무례한 일이다.

 

동물도 눈을 오래 쳐다보면 적대적이라 생각한다고 했지.

 

모르는 고양이를 이렇게 무례하게 쳐다보다니.

 

율리안은 급히 시선을 내렸다.

 

언제 왔던 것일까 마악 커피를 가져다준 알바생이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나 인상이 나쁘지.

 

율리안은 급히 쥐고 있던 책의 아무 데나 펴서 얼굴을 가리도록 들어올렸다.

 

‘져버렸네

 

고양이들 눈싸움을...’

 

‘졌어!

 

사람들은 그제야 각기 핸드폰이나 서류,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황태자와 마법사

2023. 4. 4. 03:05 | Posted by 호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 네 공이 컸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메디아.”

 

해 아래 금발이 반짝였다.

 

미소가 또 다른 해처럼 눈부셨다.

 

메디아, 너도 가자.”

 

청년은 손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녀님. 제가 저런 자리에 갈 수는 없어요.”

 

네가 없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오늘의 영광도 네 것이지.”

 

그러나 붉은 머리의 그는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더 숨길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제가 원한 것은 명예도 부도 아니고...”

 

내가 다음 황태자가 되는 것. 알고 있어.”

 

틸렌은 메디아가 미는 손에, 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틸렌 황녀님이시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와 박수가 요란해졌다.

 

“...가세요.”

 

어휴, 황녀는 짧게 한숨 쉬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꽃잎과 쌀알을 뿌렸다.

 

미리 준비한 것인지 꽃 자수가 놓인 노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길 가운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갹출하여 마련했을 옷은 한 눈에 보아도 품이 들어간 멋진 옷이라 입은 아이도 가슴을 펴고 한 뼘이라도 더 커 보이려 했다.

 

안녕! 하세요! 황녀님! 저는! ... 트리엔! 마을 출신이에요! 황녀님의 덕분에! 낭냥 왕국에 팔려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어요!”

 

뒤에서 마우양 왕국!이라고 급히 정정해주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준비해 온 인삿말을 또랑또랑하게 말했지만 점점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은지 어...를 잇다가 결국 감사합니다!며 허리를 숙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와르륵 터져 나왔다.

 

틸렌 황녀는 아이가 내민 하얀 풀꽃을 단춧구멍에 꽂고는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아이의 짧은 생 내도록 이어진 고난이 아이의 팔에 흉터를 남겼고 괴로움이 아이의 몸을 말렸지만 황녀가 놀아주는 지금만큼은 웃음이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황자님, 저도요!”

 

아니, , 나가면 안돼!”

 

마르타, 돌아와!”

 

줄 서면 안돼!”

 

되었으니 두거라.”

 

황녀는 어느샌가 생겨난 작은 줄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두 바퀴씩 돌려주었다.

 

서른 명쯤 아이들과 놀아주자 여기저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틸렌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 아이보고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으나 아이가 질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짙은 꽃내음이 풍기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이 틸렌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해상 제독의 일과 순시, 행정 감독, 모든 일을 자신이 검토하고 행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 있어.

 

시작은 메디아가 권한 일이었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다 맡았지.

 

어쩌면 그것도 메디아가 계산한 그대로려나.

 

틸렌은 백성들이 꽃을 뿌려 만들어준 붉은 길 위를 걸어 황제가 기다리는 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는 사교계의 모든 춤을 섭렵했고 한때는 최전방에서 일만 군대를 호령했던 그는 이제 세월이 내려준 흰 서리와 눈을 이고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였다.

 

틸렌, 나의 딸아.”

 

황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의 자랑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네 인기가 그래도 내 절반은 되는 것 같구나.”

 

황제가 던지는 농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가볍게 웃음이 일었다.

 

황녀 역시 재기 넘치는 웃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는 맹약의 검을 들어올렸다.

 

틸렌, 메즈노어의 백작, 와이트워크의 후작, 아즐란 해의 제독, 셴차의 학살자, 헤르파노의 감시자, 기르파 용의 후손이자 적법한 황녀여.”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가 황녀의 호칭을 꺼내어들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대는 스스로의 막중한 책임을 마주하고 만백성을 위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계로서 무던히 노력할 각오가 되었는가.”

 

모든 강과 바다에 맹세코 그러하겠습니다.”

 

황제가 쥔 술잔이 불길하리만치 붉게 빛났다.

 

그는 한 손에는 빛나는 술잔을, 한 손에는 빛나는 검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대는 신성한 술로 그 맹세를 몸속에 새기거나, 스스로의 말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검에 몸을 던져 그 목숨을 끊으라.”

 

틸렌 황녀가 일어섰다.

 

잘생긴 얼굴은 의기가 충만하여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미소 위로 긴장감어린 떨림이 스쳐지나가자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금잔을 높이 들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틸렌 황녀는.

 

틸렌 황태자는 빛나는 맹세를 받아들였다.

 

흐뭇한 눈으로 후계를 바라보던 황제는 반짝이는 푸른 눈이 메마르는 것을 보았다.

 

금잔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황태자의 몸이 흙에 닿지 않도록 제각기 손을 내뻗었다.

 

비명소리가 났다.

 

모두가 지지하던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제 슬하의 두 사람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수도 근처의 큰 영지까지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 같았던 신뢰가 무너졌다.

 

평탄하게 일하고 풍요로이 식사하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던 일상에는 금이 갔다.

 

수없이 흐르는 그 피, , .

 

결국 외척의 손에 황제의 목이 떨어진 날.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황태자의 가장 신뢰하던 마법사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돌벽에 온통 메아리쳐 울렸다.

 

황제가 서거한 날이건만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온통 기쁨 뿐이라니.

 

웃음이 광물이라면 그것은 유황.

 

웃음이 꽃이라면 그것은 흰독말풀.

 

광기까지 그 지독함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그렇게 비명 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가 곱게 틀을 다지고 반석을 쌓은 나라였다.

 

모든 하중이 황태자라는 돌에 가해지도록 만들어진 그 아름답고 단단한 나라는 그 돌 하나만 빼내었을 뿐인데 형태도 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제국이 흔들리니 주변의 나라도 흔들린다.

 

어떤 나라는 사라졌고, 어떤 나라는 몸을 사리고, 어떤 나라는 이것이 기회라는 듯 호시탐탐 주위를 노려보았다.

 

문명, 신뢰, 애정, 상생이라는 그 아름다운 단어들은 피와 탐욕에 밀려나고 온 세상이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친다.

 

아아,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 가슴 벅찬 감정이야말로 사랑이겠지.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다시 쌓는 것조차 마다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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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ns] 탈론을 위한 괴담 3

2023. 3. 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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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피꽃+감자즈]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2023. 3. 24. 03:57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메로스는 눈물을 머금고 아끼는 바지를 조심스럽게 튿었다.

 

집에서면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나마 자신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

 

메로스씨!”

 

메로스는 급히 바지를 입었다.

 

어서들 오게.”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과자 사왔어요!”

 

급히 모자를 쓴 메로스는 웨이스트 코트의 뒷자락을 꾹 눌러 내리고 아이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 셋이 합심해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온 모양인데, 아이들은 그 상자를 들고 쪼르르 이동해서 안쪽 홀에다 내려놓았다.

 

“...잠깐, 저걸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걸어서?”

 

중간에 버스 탔어요!”

 

지하철도요!”

 

애들끼리 잘도 탄다.

 

메로스는 고생했다며 따뜻하게 끓인 코코아를 가져왔다.

 

그런데 뭘 가져온 거니?”

 

, 그게요.”

 

아이들은 상자를 힐끗힐끗 보았다.

 

심지어 연우는 상자를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무어라 속삭이기도 했다.

 

안에 생물이 든 모양이군.

 

강아지? 고양이? 여우일지도 모르고...

 

저만한 크기라면 의외로 커다란 새라던가.

 

얼마 전에는 사바나 캣이나 악어나 원숭이 같은 데에 목줄을 매고 데리고 다니는 게 유행했었는데 그 유행이 다시 돌아왔으려나?

 

그런데 웬일로 집에서 모자를 쓰고 계세요?”

 

“...어쩌다보니...?”

 

메로스는 헛기침을 하고 상자를 가리켰다.

 

사이즈로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인가?”

 

아이들은 급히 상자를 뜯었다.

 

“...아니지, 크리스마스는 지났는데 뭘까?”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이들은 급히 가위를 가져온다 뭘 한다며 뛰어다녔다.

 

메로스는 테이프를 끊는 용도의 가위를 가져다주겠노라며 집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눈에 띄었다.

 

내친 김에 살짝 열어보면 안쪽으로는 이미 먼지가 앉은 작고 화려한 의자가 보였다.

 

나중에 먼지를 털어내고 이 의자와 이 티테이블에도 먼지막이 천을 덮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로스는 가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손으로 테이프를 끊고 뚜껑을 열고 있었다.

 

“...”

 

이제서야 열면 어떡해!”

 

죄송해요, 블랑 언니!”

 

...이젠 놀랍지도 않군.

 

 

 

 

 

 

 

 

 

 

자네는 어쩌다 납치당했나.”

 

납치 아니에요!”

 

블랑 언니가 먼저 얘기했어요!”

 

데려와달라고 했는데 자루에 넣을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 자루에 넣을 수는 없지.

 

하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방법이 많았을텐데...

 

혹이 나지는 않았나? 긁히거나 멍들거나?”

 

“...지금은 괜찮아.”

 

그야, 뱀파이어니까.

 

메로스는 블랑이 머리에 쓴 모자에 시선을 주었다.

 

느슨하게 머리에 걸칠 수 있는 알록달록한 니트 모자였는데 커다랗고 하얀 방울이 블랑의 머리처럼 복슬복슬한...아니 정신차리자.

 

자네 혹시?”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메로스도...”

 

블랑의 손이 메로스의 실크 해트를 덥썩 잡았다.

 

잠깐, 그러면 안되지!”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왜! 벗어, 벗어!”

 

이러면 안되네...!”

 

메로스가 꺄아악 소리를 질렀으나 결국 그는 블랑의 손에 모자를 빼앗겨버렸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귀가 축 늘어졌다.

 

토끼 귀!”

 

뱀파이어는 박쥐 귀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져 볼래요!”

 

가까이 오지 말게.”

 

블랑은 아이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흉흉하게 호기심어린 눈을 한 것을 보았다.

 

저 뱀파이어가 곤경에도 다 처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귀라도 만져 보라고 부추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귀 엄청 보송보송하다?”

 

, 정말요?”

 

토끼 귀...”

 

만져도 되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은 일제히 블랑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블랑은 불길함에 모자를 끌어내려 푸욱 눌러 썼다.

 

뭐야, !”

 

“...혹시, 언니도...?”

 

뭐야? 뭐야? 기다려!”

 

기다려! 안돼! 앉아!를 외쳤지만 메로스는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Go! Fetch!”

 

안돼애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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