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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님... ...”

 

“...형제님...”

 

어딘가 곤란한 듯, 망설이는 듯이 부르는 소리에 크나트는 길게 하품했다.

 

“...으응... 달링...?”

 

“...이 새벽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으으음...”

 

크나트는 제대로 눈뜨지도 않고 얇은 허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넓적한 손이 닿자 조금 움찔했을 뿐, 피하지도 야단치지도 않아서 크나트는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문지르다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야한 상황인가?”

 

“...아닙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곤란해보이는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이런데 왜 야한 상황이 아니지? 크나트는 반쯤 몸을 일으킨 율리안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였더니 새벽 네 시.

 

네 시에 율리안이 자신을 깨울 일이 있나?

 

역시 야한 상황 아니야?

 

섰어?”

 

“...아닙니다. 그게... 이 시간에 정말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갑자기 폰 프라이모에서 파는 칠리 프라이즈가 너무 먹고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안 될까요?”

 

칠리 프라이즈 맛있지.

 

감자튀김에 새콤달콤한 칠리 소스를 듬뿍 뿌리고 두 가지 치즈를 쌓아서 오븐에 녹여 준다고.

 

율리안은 거기에 다진 고기를 추가하는 걸 좋아하지.

 

몇 유로 더 내면 나초도 먹을 수 있고.

 

세트로 된 것을 시키면 맥주나 탄산음료도 마실 수 있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먹고 싶어서 눈을 뜨다니, 건강하기도 하지.

 

그보다 율리안이 뭔가 먹고 싶다고 자신을 깨우다니 기특도 하고,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 율리안이 이 시간에 심지어 자신을 깨워서 말을 하겠어.

 

크나트는 대충 바지를 꿰어 입고는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폰 프라이모가 24시간 영업이라 다행이다.

 

차로 30분만 가면 되니 전화로 주문만이라도 먼저 해 둘까.

 

이전번에도 잘 먹는다 싶더라니 역시 마음에 든 모양이지.

 

슬쩍 돌아보았더니 율리안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안은 큰 손이 덥썩, 제 뺨을 잡고 이마에 입맞추는 것을 가만 두었다.

 

잘 관리된 자동차는 이 새벽에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 볼륨으로 시동이 걸리더니 스르르 떠났다.

 

이 새벽에 갑자기 그런 게 너무 먹고 싶어지다니.

 

면목이 없는 걸.

 

율리안은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채 헝클어진 침대를 정리했다.

 

다녀오는 데에는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지금은 일어나서 방 정리도 조금 하고 식탁도 미리 차려 놔야-

 

하암, 율리안은 하품을 했다.

 

테이블 매트만 미리 깔아 두고...

 

삼십분만 자고 일어나자 역시.

 

율리안은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다시 푹신한 베개 위로 쓰러졌다.

 

 

 

 

 

한 손에는 폰 프라이모의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든 채, 크나트는 불 꺼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율리안이 자신을 내보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혹시 필요한 것이 음식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일 그 자체였나?

 

크나트의 손이 품 속의 너클로 향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게 칠리 프라이즈를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크나트는 안방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 하나 없이 열린 문 안은 자신이 나가기 전과 거의 같았다.

 

잘 닫힌 커튼.

 

천장에 잘 매달린 커다란 텔레비전, 마찬가지로 잘 닫힌 욕실 문.

 

조금 더 문을 열면 멀쩡한 침대가 보이고, 그 위에 엎어진 율리안이-

 

달링?”

 

급히 다가가면 숨을 쉬고 있다.

 

덧붙여서 그저 잠든 것 뿐인 것 같고.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크나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냉큼 율리안을 바르게 눕혔다.

 

그 서슬에 깬 율리안은 길게 하품을 하다가 자신이 사람을 새벽에 내보내놓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는 것에 화다닥 일어나 앉았다.

 

, 죄송합니다. 얼른 식탁이라도 차리겠습-”

 

누워있도록 해. 당장.”

 

아닙니다. 혼자 잠들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율리안은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뜨뜻한 손이 자신을 눕히자 반쯤 뜬 눈으로 진지해 보이는 크나트를 올려다보았다.

 

프라이모는 데워 줄테니 내일... 자고 일어나서 먹도록 해.”

 

“...그렇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수면을... 하아암. 저도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임신 초기에는 잠도 많이 오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걱정 말고 자.”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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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2024. 4. 1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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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데임] 오지 마!

2024. 2. 17. 20:22 | Posted by 호랑이!!!

 

아니, 우린 왜 여기로 갑니까? , 목적지는 저 쪽이라면서요? 그런데, , 굳이 둘러서 갈 이유우와아아악!”

 

비명과 함께 청년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낙엽도 눈도 없는 흙바닥에 경갑까지 착용한 몸은 우당탕 소리까지 요란해서 숲 안쪽의 무수한 생물들까지 다 깨울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는 눈이 녹아 개울이 졸졸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싹이 터 녹색이 점점이 찍힌 땅의 평화로운 한때를 깨뜨리며 식식거리는 청년 곁으로 회색 털에 쫑긋한 귀를 가진 청년 둘이 와 섰다.

 

넘어지더라도 조용히 넘어져야 한다니까-?”

 

입을 막고 넘어져, 입을~”

 

갑옷 소리도 안 나게 말이야!”

 

, 그런... , 허어... 가능, 하겠! 습니까!”

 

넘어진 청년, 웨일런의 주위를 맴돌던 두 마리 청년은 그의 항의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둘은 어딘가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렸는지 동시에 귀를 까딱 움직이더니 그를 놀리던 것을 멈추고 물을 뜨러 간다, 나뭇가지를 줍는다더니 분주한 꿀벌처럼 윙윙거리며 떠나갔다.

 

, 드디어 혼자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위에 웨일런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불을 피울 자리를 잘 고르고 낙엽이며 이것저것을 긁어모아 쌓았다.

 

고요하다.

 

명예로운 일인데다 변방에서의 생활을 동경해 스콜드로 지원을 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지만... 창문조차 작은 좁은 건물 안에서 복닥복닥하게 여럿이서 생활하는 일은 영 좋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정말로 좋은 거였구나.

 

부싯돌을 딱 딱 맞부딪치면 자그마한 불꽃이 튀고 그게 지푸라기에 옮겨붙기를 기다리는 작업은 단순해서 금세 빠져든다.

 

불꽃이 쏟아지는 것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적인가?

 

아니면 식인을 하는 동물?

 

제길, 비스와 틸은 어디까지 간 거지?

 

불을 피우느라 숙인 시선 가로 다시금 흰 것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였다.

 

뻣뻣한 털로 뒤덮인 흰 꼬리다.

 

비스나 틸, 부대 사람들은 회색 털인데.

 

녹색이끼나 검은 흙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띌 법한 색이었다.

 

웨일런은 나뭇가지와 반쯤 썩은 잎을 그러모아 불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큰 육식동물이 제 주위를 맴돌 때는 갑작스럽게 움직이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 다시금 시야 끝에 흰 털이 스르륵 움직여 사라진다.

 

이 마물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피를 빨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인가.

 

틀림없어!

 

그러나 이 몸은 스콜드라고!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땅에 내려놓았던 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고,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한다.

 

조금씩, 조금씩.

 

제기랄,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나를 보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끝이 창대에 닿은 순간 그는 이대로 손이 붙어버려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창을 바투 쥐고 등 뒤의 적을 향해 홱 돌아선다.

 

으이야아아악!”

 

그 순간, 손이 창대를 쳐서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닌데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가 창대를 가볍게 밀어내고 떨어뜨릴 때에서야 웨일런은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희어서 겨울이라면 그가 제 앞으로 똑바로 걸어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녹지 못한 눈처럼 생긴 중년의 이는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친근함을 표시하듯 웨일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꾸욱 눌렀다.

 

아저씨!” “삼촌!”

 

때마침 비스와 틸이 쏘아지듯 날아와 그의 품에 안겼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기분 좋은 바람을 만들었다.

 

그는 방금 웨일런에게 한 것처럼 이마를 두 젊은이에게 번갈아 기대고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어린 새끼들처럼 그 곁에서 장난을 치고 폴짝거렸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전에 부대에 합류하게 된 웨일런입니다.”

 

남부 억양인데. 거기 출신?”

 

, . 항구 쪽이요.”

 

흉터가 남은 얼굴이 제법 매끈한 것과는 달리 목소리는 대화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거칠었다.

 

그의 목이 쇠로 줄을 한 현악기였다면, 한 번 켤 때마다 쇳가루가 부슬거리겠지.

 

삼촌, 그게 아니지-.”

 

아니지~!”

 

그러자 그는 비스와 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의도인지 짚어낸 둘은 스스로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이름!” “이름-.”

 

“....”

 

이해해줘, 삼촌이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일이 없거든.”

 

“...‘별로없는 거지.”

 

옛날에 황궁에 간 적이 있다는데 그 때 너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난 부작용일 거야.”

 

맨날 이런 데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 거야, .”

 

그는 신나서 까불어대는 두 청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꼬리로 그들의 종아리를 철썩 쳤다.

 

이히히히.”

 

아야야야-”

 

두 마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무 둥치에 걸터앉자 그는 웨일런이 넘어지며 부딪친 다리를 잡아들었다.

 

부츠를 벗기고, 발과 다리를 살피는 중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아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혼자 따로 나와 산다? 그래서 이 쪽으로 온 거야.”

 

여기 혼자 산다구요?”

 

응 응, 마수도 혼자 잡고-”

 

마수우? 이제는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들었는데!?”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 쪽으로 보았지만 그는 귀만 한 번 까딱할 뿐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답은 두 명에게서 나왔다.

 

요즘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본 적 있거든- 그냥 덩치 큰 동물 같은 걸 생각하면 안돼.”

 

물론 덩치도 크지만!”

 

이만한 거- 이만큼- 하면서 팔을 벌려보이는 둘에 웨일런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봄임에도 여전히 낡고 부드러운 가죽옷을 입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요?”

 

그는 웨일런과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나도 가능하지.”

 

나도라니?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가까이에서 고개를 돌리자 웨일런은 또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스콜드 부대원은 이제 봄이라며 머리를 잘랐고, 여름에는 깎는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웨일런의 다리가 괜찮으니 이제 다시 이동하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아직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배가 고픈데다 삼촌 집에 가고 싶은데다 부상자가(아닙니다!) 있다며 조르는 두 청년에게 격침당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의 겉에는 이끼가 앉고 작은 새가 둥지를 튼 흔적도 보인다.

 

문을 열자 향긋하게 마른 풀 냄새가 훅 끼쳐왔고, 아담하고 정갈한 첫인상과는 달리 약초며 건조식량이며 털가죽 같은 것이 잡다한 물건과 뒤섞여 영 엉망진창이었다.

 

웨일런은 손으로 깎은 듯한 장식적인 창틀을 구경하려다 천장에 덩굴같이 매달린 돌멩이에 이마를 부딪쳤다.

 

으악!”

 

조심해! 여긴 완전-”

 

전쟁터 같다니까?”

 

그의 손가락이 벽을 툭툭 두드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종의 신호인 듯했으나 두 청년은 못 본 체, 못 들은 체를 하며 이 어지러운 방안에 대해 곰팡이가 핀다니, 딱정벌레도 도망간다니 찧고 까불다가 그가 팔을 들어올리고 덤비자 엉망인 방 안에서 도망을 다니며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깔깔거리며 웃고 털이 흩날리는 한 켠에서 웨일런은 다시 방안을 찬찬히 구경했다.

 

잘 말린 나무로 창틀을 만들고, 탁자와 침상을 만들고, 선반을 깎은 것들은 오래 손을 탔는지 반질반질했고 오래 공을 들였는지 곰, 늑대, , 왕관, 전설 속의 거인 같은 문양이 다채롭게 아로새겨져서 실내의 불에 음영을 드리운다.

 

비스의 꼬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고, 틸의 다리를 걸지 않게 조심하면서-그는 발을 걸라고 소리쳤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움직이다 무언가가 웨일런의 시선을 끌었다.

 

이 집안에서도 화려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상자.

 

비스듬하게 열린 안에서는 가장 낡은 천으로 감싼 것이.

 

웨일런은 머뭇거리다가 녹은 촛대와 깃펜 덩어리를 살짝 밀어내고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들어올렸다.

 

내용물은 병 몇 개... 정도였다.

 

안에 든 것은 금 같았지만 상자가 움직이자 마치 액체처럼 기이하게 흔들렸는데-

 

달칵.

 

장갑을 낀 손이 뚜껑을 눌렀다.

 

주인의 물건을 허가도 없이 들여다본 셈이므로 웨일런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튜 그릇을 받아 들 때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연금술사인가요?”

 

, 연금술사?” “그게 뭐야?”

 

제가 스콜드에 합류하기 전에 연금술이 유행했었거든요. 돌을 무슨 금으로 바꾸는 거라던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두 젊은이들이 그릇이나 솥을 씻는다, 자리를 정돈한다며 돌아다니자 그럴 필요 없으니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했다.

 

아무튼 그런 것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날 때부터 스콜드였으니까. 조만간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술하게 둔 것이 아닌가.

 

솥에는 물을 담아 불 위에 걸고 벽난로 안에는 장작 몇 개비를 더해 잘 준비를 마치면 그가 나눠주는 모포와 가죽을 덮고 그들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웅크렸다.

 

웨일런은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올 듯 반짝이는 무수한 별과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한 흰 달빛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 병에 담긴 것들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미 주위 사람들은 잠이 든 뒤였다.

 

장작이 거의 다 타고 불빛이 사그라들던 어느 때에, 웨일런도 잠들었다.

 

 

 

 

 

 

 

잘 자네.”

 

이봐, 일어나. 이제.”

 

흐으어...?”

 

웨일런은 눈을 떴다.

 

어제의 지저분한 집안은 비스와 틸이 청소를 해 놓은 것인지 제법 정돈되고 비질되어 깨끗해져 있었다.

 

내 책상 건드리지 말라니까!”

 

아저씨 그 상자는 안 건드렸어!”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한두 번 온 줄 알구.”

 

이 망나니 녀석들!”

 

나 배고픈데. 밥 주세요!”

 

고맙다고? 별 말씀을~”

 

그는 두 젊은이를 향해 으르릉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부엌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이 나이가 되니 온몸이 삐걱거린다며 팔다리를 쭉쭉 뻗고, 신선한 새 알과 비스킷과 과일 같은 것을 잔뜩 내 왔다.

 

이거 먹고 가고, 다음부터는 오지 마. 와도 내가 없을 거야.”

 

? 어디서 지원 요청 들어왔어?” “?”

 

너흰 몰라도 돼. 어른들하고는 얘기 다 해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런 게 어딨어!”

 

우리도 인젠 어른인데!”

 

그는 코웃음으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좀 살만하다지만 스콜드에 자원하다니 특이한 녀석이야.”

 

꼬리가 등을 툭 치는 바람에 웨일런은 마악 입에 넣으려던 딸기 비슷한 과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스콜드, 멋지잖아요.”

 

“...우리 때는 그런 취급이 아니었는데.”

 

그는 비스가 마악 베어물려던 과일을 빼앗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와사삭 하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나고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중에 혹시 오거든, 기억해. 저 쪽에 약이 있고 저 쪽에는 건조 식량, 뒤편으로 나가면 샘이 있어.”

 

아저씨 보물은 더 없어?”

 

“...마쟈, 부대, 에 있는 그 엄청 화려한 공... 같은 거.”

 

어이구, 하고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음에 가면 가구 장식 좀 뜯어 올게.”

 

에이!” “에이이-”

 

짜식들이, 라며 그는 틸이 집던 비스킷을 낚아챘다.

 

그 투닥거림은 그들이 뒷정리를 하고 짐을 싸서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 갈게!”

 

오지 마, 이젠!”

 

우리 보고 싶을 텐데!”

 

안 보고 싶어-?”

 

그 말에 그는 그 둘을 쳐다보다가, 양 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빨리 가기나 해!”

 

에이이-” “-”

 

웨일런은 묵직한 짐을 어깨에 고쳐 지고는 끈으로 한 번 더 고정했다.

 

저 녀석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생각 없고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고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다 들려!” “코앞에서 뒷말하다니!”

 

“.........아마도, 착한 애들이니까...”

 

아마도라니! 하고 항의가 이어진다.

 

웨일런은 웃었다.

 

잘 지내십시오. ....”

 

데임.”

 

잘 지내세요, 데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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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느낌으로 어쩌구

2023. 10. 16. 01:45 | Posted by 호랑이!!!

 

웬일이야.”

 

바질 실버루트는 전서구가 물어다 준 쪽지를 다시 눈높이까지 들어 읽었다.

 

오늘 수업은 빠질게. 좀 쉬려고 디디-

 

바질은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빛에 비추어도 보았지만 디에고 드라질리 특유의 날림체 외에 다른 문장이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픈가?”

 

디에고 드라질리가 아플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세상은 넓고 수많은 일은 일어나니까.

 

오늘의 방과 후에는 승마회가 하나, 저녁에는 독서클럽, 밤에는 마력학 복습을 하고 갈릭의 정령생태학 이론을 봐 주기로 했지만 얼마 전에 자신이 아플 때 디에고가 이것저것 해 주었던 일이 있으니까.

 

바질은 쪽지를 잘 접어 아카데미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10월이었다.

 

이번 주에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게 인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지망에서 3지망까지 황궁 마법부, 황궁 행정부, 황궁 소속 마탑으로 전부 황궁 지망이었고, 때문에 디에고와 한 내기도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정확하게는 엿새.

 

자의식 과잉에 공부만 잘하지 멍청하고 제멋대로고 나태한 녀석과 지낸 것치고는 꽤 즐거웠지만 역시 얼굴만으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구나.

 

상가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바질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와이셔츠를 정리한 뒤 낑낑거리며 커다란 냄비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퍽석.

 

들고 있던 도자기 그릇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감기에 좋다는 남부식 스튜가 피처럼 붉게 복도를 물들였다.

 

차라리 사 오길 잘 했어.

 

이걸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 비참했으리라.

 

바질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은 채 방 안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얽혀 있던 실루엣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떨어지자, 그제야 바질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도 디에고는 무어라고 소리쳤겠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디에고 옆에 있던 건 페퍼였어.

 

페퍼가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비웃을 게 뻔했다.

 

몸을 돌리고 바질은 달렸다.

 

멍청한 짓이야.

 

바질이 내심으로 속삭였다.

 

자신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발이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뭐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 그렇지?

 

비록 우리가 오십하고 오 일이나 연인처럼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내기잖아.

 

내기였잖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뒤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바질은 그 옆의 비상계단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계단은 불이 어둑했다.

 

담배 금지 마법이 걸린 후로는 누구도 오지 않았는지 딱딱한 구두굽이 디디는 소리만 공허한 공간에 울린다.

 

달칵.

 

뛰어내려갈 때마다 앞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앞은 어둡고, 계단 아래는 더욱 어두워서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소매가 잡혔다.

 

잠깐만! ...... 오해야.”

 

바질은 여전히 돌아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소매를 꽉 쥐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후우, ... ...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했어.”

 

목이 메었다.

 

소매를 당겨 보았지만, 조금도 멀어지게 둘 수 없다는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약간이라도 돌린다면.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자리를 옮겨서, 내 얼굴이, 표정이, 이 모든 감정이 드러나 버린다면.

 

바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겠구나, 드라질리.”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표정조차도 바꿀 수 없었다.

 

간신히 목이 삐걱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내는 게 한계였다.

 

때리고 싶었다.

 

욕설을 퍼붓고, 소리치고, 있는 힘껏 비난하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네가 말하는 그 오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황궁에서 볼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억지로 몸이 돌아갔다.

 

불빛이 어두웠다.

 

고개를 숙였으니 표정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소매를 잡은 힘이 빠지는 것을 보니 디에고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기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 거야.

 

입술을 꽉 깨무는데 디에고가 다시 어깨로 손을 뻗으려 했다.

 

바질-”

 

부르지 마!”

 

짝 소리가 나도록 손이 떨어졌다.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당장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머니 속의 망할 쪽지 뿐이다.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 타악-

 

아무렇게나 구겨진 쪽지가 잘 생긴 얼굴을 때렸다.

 

두 번이나 얼굴을 때렸지만 가벼운 것은 아프지조차 않았다.

 

닿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디에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바질이 서 있었던 계단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발자국은 희미해져서 그 앞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그 곁으로는 구겨진 쪽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서.

 

디에고는 그 두 장을 집어 들었다.

 

한 장은 아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봐. 기대된다

 

낡은 종이였다.

 

주머니에 넣고 오래 만지작거려 낡아진 종이였다.

 

그 날이구나

 

그리고 계단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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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린에게

2023. 8. 23. 12:42 | Posted by 호랑이!!!

 

디안, 왜 안된다는 거예요!”

 

마리, 마릴린, 마릴린 오슬리테아. 여기에 그런물건을 두면 안되지. 여기는 그저 휴식을 위한 조용한 정원이라고.”

 

이젠 아니에요.”

 

게다가, 이 정도는 그 작자들이 하는 데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며 마릴린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약하게 미혹하는 마법이 걸린 향낭을 차고, 같은 물건을 액체로 만들어 술이며 분수대에 뿌리면 마릴린을 찬양하는 향이 은근하게 흘러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속삭인다.

 

유일한 적자인 황녀에게 웃어 보이라고.

 

마릴린 오슬리테아는 목에 건 로켓을 꽉 쥐었다.

 

10년 전 리안 오슬리테아가 암살당한 후 그의 차림은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위압적이고 완벽하게 변해 갔지만 그 낡은 로켓만은 항상 그대로, 화려한 모슬린과 레이스 아래에서 그의 심장을 눌렀다.

 

금색과 적색으로 짙게 화장한 눈초리가 카디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카디안은 분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어렵잖게 읽어내며 손짓만으로 분수에 섞인 향수 방울을 분리했다.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마리.”

 

“...‘이에요.”

 

“...마리. 나의 황녀님.”

 

“...”

 

“...네 정책은 훌륭해. 백성들이 여가 시간을 갖거나 행복을 느끼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아는 머저리들도 솔깃할만한 이득이 있어. 너도 그걸 설득할만한 능력이 되고.”

 

그러니 이런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속삭이며 주먹을 꽉 쥐자 향수 방울은 그대로 사라졌다.

 

“...디안...”

 

마릴린은 정원 한쪽에 의자 대신 놓은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카디안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포켓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냈으나 마릴린의 손은 손수건 대신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목깃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로 금속 같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닥쳐. 카디안 웨르제.”

 

마릴린 님.”

 

오빠 친구라서 좋게좋게 대해주니 진짜로 네가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아?”

 

부드러운 실크 장갑 아래에서 물어뜯은 손톱이 천을 긁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빌어먹을 잡놈이 내 오빠의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봐. 오빠의 정책이 사장되는 꼴도 못 봐.”

 

오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개판이 되도록 놔둘 수 없어.

 

카디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마릴린은 품에서 그 향수를 꺼내더니 몇 방울 남지 않은 것을 병째로 분수에 내던졌다.

 

반짝이는 병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며 그 안에 든 분홍색 액체를 서서히 퍼뜨리고 분수에서도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뭐든 할 거야. 온 나라의 귀족을 세뇌하고 유혹해서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한다면 전부 내 손아귀에 쥐고 흔들 거야.”

 

카디안은 분수대에 빠진 유리병을 건져 왔다.

 

손수건으로 닦아 양 손으로 바치면 마릴린은 그 병을 한 손으로 받아 가방에 처박았다.

 

하지만 마릴린 님-”

 

황녀 폐하! 먼저 와 계셨군요. 오늘도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그 사이로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릴린은 언제 화를 내었냐는 양, 어느샌가 고귀하고 우아한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첫 손님을 맞았다.

 

후후, 고맙소. 이 정원은 오라버니가 내게 준 것이니 늘 신경써 가꾸고 있지.”

 

사람이 늘어난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향에 감싸여 마릴린의 정책에 고개 끄덕이며 집중하고 찬성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카디안은 젊은 귀족층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마릴린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이 정원이 잘 가꾸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리안이 살아 있을 적, 그러니 10년 전에는 리안과 카디안이 늘어져 시며 연극을 토론하고, 때로는 종이 검으로 유치한 칼싸움도 하고, 아직 어린 마릴린이 어린이용 차와 과자를 가져오면 인형이 쓰는 헤드드레스나 턱받이를 맨 채 자그마한 컵을 들고 오호호 웃었지.

 

그들만의 장소였기에 바깥에서는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번듯하던 리안도 제멋대로 늘어져 눕고 마릴린도 오빠를 따라한다며 드러누웠다가 풀물이 다 들었었고.

 

이제는 리안의 마지막 모습만큼 자란 마릴린이 뒷배도 없이 혼자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린 황녀님!”

 

아름다운 린 님!”

 

천사같은 린 황녀님!”

 

오빠의 장소에서, 오빠의 자리를 위해, 오빠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카디안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빠져나왔다.

 

“......”

 

네가 없으니 육체가 나이 들지 않는다.

 

너를 보고 하나씩 몸을 수선하면 그 바위에 옆으로 누워서는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라고 신기해했지.

 

나는 이제 한동안 이 모습으로 지내게 되겠구나.

 

“..., .”

 

카디안은 정원을 떠나려다 구석에 숨겨진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소리와 모습을 녹화하는 마법 도구다.

 

손 사이에 놓고 지그시 누르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서히 형체를 잃고 납작하게 변해 부서졌다.

 

너는 멍청이야.”

 

저만치에서 이 파티를 훼방 놓기 위해 다가오는 황자 무리가 보였다.

 

육중한 군마 위에 올라타서 난폭하게 몰아대니 잘 가꿔진 잔디는 엉망으로 패이고 낮은 관목은 부러지거나 꼴사납게 가지를 떨어뜨린다.

 

저런 것이 작은 정원을 지나가면... 뻔하지.

 

와하하하! 달려라 달려!”

 

휘이이익! 다 비켜라! 다친다 다쳐!”

 

거기! 비켜! 비키라고!!!”

 

카디안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저만치 놓인 정원 수레바퀴 아래의 쐐기를 없애버렸다.

 

흙과 태울 것들이 가득 실린 수레가 비탈을 따라 굴러오면 그 망나니들은 길을 막아서는 수레를 피하거나 걸려 날아가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 발걸음을 돌리며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나더러 마릴린을 돌보라고 했어야지.

 

사람 없는 곳에 다다르자 손짓이 어둡게 빛나는 포털을 열었다.

 

인간의 목을 꺾어버리는 것따위 어렵지 않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마릴린에게 축복을 내려 황제로 삼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린은, 리안은.

 

마릴린더러 카디안을 돌보라는 말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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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

2023. 8. 18.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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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덩] 위그님 리퀘

2023. 8. 9. 02:21 | Posted by 호랑이!!!

@: 저는 그냥.. 슬덩/호열이 나오는 걸로../알바처에서 알바하는데 농구부애들와서 매상 올려주고 일찍 칼퇴하면서 같이 퇴근하는 그런 연성이 보고싶어요.. 캐해석은.. 양키가 성실하네.. 이런 느낌으로..

 

 

 

 

 

 

 

여기 라면 하나~ 계란 추가해서!”

 

카레하고 가라아게 정식! 햄까스도!”

 

! 돈까스 덮밥! 이 몸은 곱빼기로! 그리고 만두!”

 

이야아,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데? 나도 라면!”

 

사람 적은 가게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퇴근 후 한 잔을 즐기던 사람들마저 돌아간 늦은 시간, 닭꼬치며 우동에 맥주 같은 것을 앞에 놓고 빈둥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밀도가 높아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백호 군단이다!”

 

강백호랑... 기타 등등!”

 

작은 소리였는데도 기타 등등으로 칭해진 세 사람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이어이-”

 

-기타 등등이라고?”

 

손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팰 거면 나가서 하라니까-”

 

말리는 것을 포기한 양호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한편으로 백호가 예의바르게 사장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쇼.”

 

어서 오렴, 돈까스 덮밥이라고 했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앞치마를 맨 사장님은 1인분이라기엔 너무 커다란 돈까스를 기름에 넣었다.

 

촤아아 소리가 나고 저만치에서 폭력이 끝났는지 주섬주섬 사람들이 일어나자 사장님은 면을 끓는 물에 담갔다.

 

호열 군, 계산~”

 

-”

 

순식간에 사람이 적어졌다.

 

계산하고, 백호 군단이 앉을 테이블을 닦고, 물수건과 물컵을 가져온 양호열은 망나니들이 싸우느라 엉망이 되었던 안쪽 테이블과 의자가 반듯하게 놓여진 것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걸 치우는 건 결국 양호열 자신이니 이왕이면 가게 밖에서 싸워 줬으면 했지만, 사장님이 백호 군단의 난장판을 두고...

 

덕분에 요즘은 가게를 일찍 닫을 수 있어 좋더구나.”

 

...라고 한 뒤로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게 되었다.

 

반찬 한 가지에 술 한 잔 놓고 몇 시간씩 있다가 패악질이나 부리던 사람들이 백호 군단이 푸닥거리를 한 판 하면 스르륵 사라지니 사장님도 오히려 반기는 느낌이랄까(다만, 저녁시간 그릇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곧 음식이 나왔다.

 

묵직하게 담긴 라면, 바삭바삭하게 튀긴 돈까스에 밥이 정량보다 확연히 많은 덮밥, 그릇에 넘치도록 담긴 카레, 산처럼 쌓은 가라아게와 두 배는 될 법한 햄까스, 철판에 구워낸 만두도 접시 가득히.

 

, 나왔다!”

 

각자 가져가면 안 되나?”

 

괜찮으니 앉아 있어.”

 

이 천재의 계산으로는 한 사람이 하나씩 쟁반을 가져가면 훨씬 빨리-”

 

깰 것 같으니까 앉아. 있어.”

 

양호열도 힘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몇 번이나 카운터와 테이블을 왕복하며 그릇을 날라야 했다.

 

사장님, 요리 하나가 더 나왔어요.”

 

그건 호열 군 거야. 친구들이 온 김에 같이 먹도록 해.”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의젓하게 대답한 양호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순간 그 나잇대 아이들처럼 와하하 웃었다.

 

만두랑 햄까스 하나랑 바꾸자.”

 

만두 몇 개 줄 건데?”

 

하나! 인심 썼다!”

 

뭐어? 두개 더 줘!”

 

라면 위에 고기랑 만두랑 바꾸자.”

 

왁자지껄하게 나눠 먹는 모습에 입가에 점이 있는 사장님은 후후 웃으며 카운터 안쪽 정리를 했다.

 

많은 양이었는데도 음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열 군, 다 먹었니?"

 

"넵-!"

 

"미안하지만 저기 포대 좀 내려줄래?"

 

양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의 묵직한 쌀포대를 꺼내어 어깨에 턱 메면 사장님이 호열 군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며 기뻐했다.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라던가 별 것 아닌걸요, 라던가 무어라고 했을 법도 하지만 어째 가게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가 신경을 거슬렸다.

 

또 무슨 수상쩍은 짓을 하는 걸까, 하는 눈초리로 가게로 돌아오면, 앞서 걸어가던 사장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이게 뭐야?!"

 

"짜잔!"

 

"라면카레덮밥 봇이다!"

 

"이건 만두까쓰정식 봇!"

 

남은 그릇과 젓가락으로 멋지게 로봇을 만들어낸 네 사람은 방해하지 않겠다며 가게 밖으로 우르르 나갔다.

 

“...설거지랑 청소는 제가 마저 할게요.”

 

그래줄래?”

 

사장님이 매출을 계산하고 물건의 재고를 확인하는 동안 양호열은 그릇 로봇들을 조심조심 개수대로 옮겨 닦고 화구 아래까지 구석구석 말끔하게 청소했다.

 

“..., 사장님.”

 

?”

 

잔머리가 나오지 않도록 가지런하게 묶은 머리에서 머리수건을 벗으며 사장님은 땀까지 흘리는 아르바이트생을 흘긋 보았다.

 

잘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렇게 많이 주셔도 괜찮나요?”

 

후후.”

 

들리는 소문이며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걱정했지만, 일해 보니 성실하고 친구들도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지.

 

사장님은 어쩐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작게 웃었다.

 

호열 군 친구들인데 뭘. 운동하는 애들은 많이 먹어야지.”

 

“...감사합니다.”

 

이제 청소도 다 되었고, 매출도 맞네, 이제 퇴근할까? 가방 가지고 나오렴.”

 

가게 밖으로 나오니 압도적인 포스를 흘리는 덩치 넷이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최근에는 사장님도 익숙해진 장면이다.

 

가게 문을 잠그면 양호열이 손을 뻗어 셔터를 내렸다.

 

한때 셔터를 내릴 때 썼던 막대는 먼지가 앉아 쓸쓸하게 놓인 것이 눈에 밟혔다.

 

저것도 나중에 치워 놔야지.

 

그럼 잘 가, 호열 군. 친구들도.”

 

내일 뵙겠습니다!”

 

양호열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주위 친구들도 나름나름 성실함을 가미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누님!”

 

안녕히 가세요~”

 

바이바이!”

 

방향은 반대인데도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문득 돌아보았을 때.

 

의젓하고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은, 어느샌가 평범하고 놀기 좋아하는 학생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빨간 머리 학생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이좋은 아이들이라니까.

 

사장님은 웃었다.

아포칼립스와 뜨개 가방

2023. 6. 12. 01:20 | Posted by 호랑이!!!

A는 오래된 건물에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물은 부분부분이 깨져서 햇살이 들이치고 식물이 자랐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이모들은 건물이 과거에 ‘ktx’를 타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A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은 흰색 계단과 검은 색 계단이 있었는데 이모는 꼭 하얀 계단만 밟고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모는 아는 것도 많고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단 말이야.

 

ktx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탈것인데 바닥에 있는 을 따라 간다고 했다.

 

길이라... 저 아래 있는 거지?

 

움푹 파인 곳은 풀이 웃자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려다보던 A는 그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풀과 꽃으로 뒤덮인 사이에서 때묻은 이 보였다.

 

, 너무 작지 않나?

 

A는 몰래 길을 만져보았다.

 

이모가 보았다면 파상풍에 걸리니까 안돼!라고 하겠지만 A는 파상풍이 뭔지 몰랐다.

 

이모는 죽는 병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병은 어차피 죽는 병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이모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해 아래 나갈 때는 피부암!’이라며 모자라도 쓰게 했고 모르는 개가 다가오면 광견병!’을 외쳤다.

 

크든 작든 구분없이.

 

언젠가 한 번은 하얗고 작은 강아지가 다가오길래 잡으려 했더니 그건 다 큰 개라며 못 잡게 했다.

 

그렇게 작은 개가 어딨어!

 

이모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A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간.

 

A는 턱에 손을 대고 너비를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앉기도 힘들어 보이는걸.

 

그리고 왜 이렇게 깊은 곳에 을 만든 걸까?

 

이 곳에 물 같은 걸 채우고 배를 띄운 걸까?

 

A는 부서진 테이블 판을 그 레일 위에 올렸다.

 

이번 역은~ -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이모들은 이 근처를 지날 때면 합창하고는 그게 무슨 농담인 것처럼 키득거렸다.

 

A도 따라하곤 했지만 이모들은 늘 그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뭐 어때, 난 이렇게 할거야.

 

이번 역은 신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위 윌 어라이빙-

 

몸을 들썩일 때마다 단단한 합판 테이블이 덜그럭거렸다.

 

A는 이모가 만들어 준 가방을 아래 깔았다.

 

이모는 쇠로 만든 바늘이 든 낡은 가방을 갖고 다니는데 밤이면 늘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은 가방일 때도 있고 몸에 두르는 긴 천일 때도 있었고 함정에 쓸 재료일 때도 있었고 A가 어릴 때에는 안고 잘 수 있는 인형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더 커다란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 든 실을 하나씩 쓰다보니 점점 작아졌고 몇 번이나 다시 풀고 뜨고 하더니 이제는 겨우 바늘만 들어가는 종류가 되었다.

 

마지막 실로 A의 모자를 떠주던 날, 이모는 이제 식물 줄기에서 실을 뽑을 거라며 쾌활하게 웃었지만 그 날 밤 몰래 물을 마시러 나온 A는 이모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싼 실 말고 더 예쁘고 양 많은 실을 사둘 걸 그랬다며 우는 것을 들었다.

 

뭐 그렇겠지.

 

한참을 그렇게 들썩거리는데 저만치나 떨어진 곳에서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슴이나 토끼면 좋겠다.

 

다람쥐나 청설모까지도 괜찮아.

 

고양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아냐 역시 토끼가 좋겠어.

 

칼을 쥐고 조심조심 돌아보는데 다시금 육중한 발소리가 다른 곳에서도 났다.

 

높은 해자 위로 살점이 흘러내린 뼈와 피부가 녹색처럼 보일 정도로 곪아 흐르는 진물과 이지를 잃어버린 채 원시적인 위협음을 내는 유사 인간들.

 

A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불규칙하게 살점 붙은 몸이 해자 안으로 툭 툭 떨어지면서 철퍽 소리가 났다.

 

녹색으로 반짝이던 이파리며 노랗게 흔들리는 꽃에 질척한 살점이 달라붙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모들이랑 언니한테 토끼는 못 갖다주겠네.

 

칼이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다가오던 첫 번째 놈의 머리를 걷어차 날렸다.

 

딱딱하고 두꺼운 밑창 아래로 골반뼈를 으스러뜨리며 다음 놈의 배를 밀어내듯이 차자 살점이 떨어져 가벼워진 몸이 뒤로 밀려나다 벽에 부딪히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뼈가 드러난 손 네 개가 A의 움직임을 봉인하려 다가왔다.

 

잘 갈아둔 칼을 휘두르자 첫 번째에는 손가락이, 두 번째에는 손목까지 잘려 땅에 떨어진다.

 

세 번의 칼질로 마침내 목 두 개를 취하면 이번에는 뒤쪽에서 가까워진 소리가 났다.

 

보지 않고 주먹을 뻗는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머리통을 비껴나고 반쯤 드러난 턱뼈가 벌어지며 그 팔을 노린다.

 

그러나 A는 몸을 숙이며 그 품 안으로 더 빠르게 돌아 들어갔고 주먹보다 단단한 팔꿈치가 반쯤 삭은 갈비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팔이 밀리지 않게 주먹을 받치면 그 안쪽의 물어뜯긴 폐와 허상 같은 척추까지 허물어졌다.

 

이걸로 다섯.

 

이어서 여섯, 일곱, 여덟.

 

마지막으로 아호-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것의 목을 부수고 떨어뜨리는 순간 아래에서 몸이 솟구쳤다.

 

목을 끊지는 않았던 것이 스르륵 일어나 덤벼들었다!

 

A는 반사적으로 두껍게 뜬 가방 끈을 잡고 벌린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가 벌어졌다 다시 닫혔지만 끈을 재갈처럼 물기나 할 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거 폭신폭신 하는 기능만이 있나 했었는데 의외로 이 끈, 꽤 튼튼한 모양이야.

 

하지만 아끼는 물건이 더럽혀지는 것은 달갑지 않아-비록 아끼는 물건을 아까까지 깔고 앉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A는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다.

 

“..., 이거 제복이다.”

 

열쇠 같은 게 나오면 좋댔는데.

 

비록 좀비사태가 터지기 직전에는 전자식 도어락을 달곤 했다지만 자판기라던가 특정 문, 특히 일하는 사람들이 쉬는 곳은 열쇠를 쓰는 곳이 많았다.

 

옷을 뒤집어 털자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앗싸 신난다.

 

A는 열쇠가 몇 개나 붙은 열쇠고리를 신나게 들어올렸다.

 

금속 장식이 반짝거리는 것은 예쁘니까 가방에 넣고 해자에서 뛰어올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자판기, 아니고.

 

화장실, 아니고.

 

창고? , 돌아간다.

 

그렇지만 창고는 물건이 많을 테니까 내일 다른 사람들이랑 와야지.

 

A는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 마지막 열쇠에 딱 맞는 곳을 찾았다.

 

검은 색 네모판이 한 벽을 메우는 곳에 책상 몇 개와 의자와 캐비넷이 있다.

 

캐비넷도 볼 거지만, 책상 서랍을 뒤지는 것은 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라.

 

대다수는 필기구 같은 게 나오지만-이것도 잘 쓰기는 한다- 의외의 물건이 나오면 여기저기 자랑하기도 좋았다.

 

하나, 수첩.

 

, 사탕과 과자가 든 작은 통.

 

이건 이대로 가져가야지!

 

이것만으로 충분한 소득이었기에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가 A는 마지막 책상을 열었다.

 

세 번째 책상 서랍 맨 아래칸에는 보라색이며 초록색이며 사람 머리통만한 실이 가득했다.

 

둘러진 종이 띠를 살짝 만지면 버석했지만 실은 보드라웠다.

 

꽃잎보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자 머릿속까지 찌릿찌릿했다.

 

이게 오늘 얻은 최고의 보물인지도 몰라!

 

A는 과자통을 놓을 수 없었기에 몇 번이나 책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통은 가방에 쑤셔넣고 실 뭉치를 한아름 품에 안았다.

 

이걸 보면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풍요로웠고 기술의 극치를 달렸다는 과거의 산물답게 한아름이나 안은 실은 부드럽고 가볍기까지 했다.

 

이모는 이걸 보면 무슨무슨 얀이니 울이니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할거고 다른 이모들한테 이걸 만져보라고 하겠지.

 

그럼 다른 이모들은 이모가 첫 뜨개질로 만들었다는 그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또 웃을 거다.

 

고양이가 낚아채길래 목에다 매 줬더니 그대로 고장났다는 그거.

 

그럼 그 시대를 모르는 나와 B는 과자나 까먹으며 잡담을 하다 웃을 거고, 뜨개질을 배우는 B는 내일부터 이걸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모자를 만들든 판초를 만들든 가방 끈을 만들든 첫 번째 것은 무조건 나 달라고 해야지.

 

신이 디디는 바닥에서는 투박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지만 A의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오늘은 수확이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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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장마와 너

2023. 4. 19. 23:13 | Posted by 호랑이!!!

비가 쏟아졌다.

 

이례적인 장마라고, 근 십 년 내에는 비할 게 없는 장마라고 뉴스에서는 떠들어 댔다.

 

동시에 비가 그치면 작년보다 더 더운 날이 된다는 얘기도 나왔으므로 저 뉴스는 아무런 정보가 되지 못하고 빗소리에 맞서 어떻게든 공간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 불쌍한 소리를 눌러 죽일 생각으로 창문을 열자 소리가 한층 강하게 쏟아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후덥지근함 속에 유일하게 시원스러운 것이었다.

 

멀쩡한 침대에 멀쩡한 책상을 두고 찬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들척지근한 담배향이 가루처럼 입 안으로 새어들어와 타액에 녹았다.

 

혀 끝에서부터 입 안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필터에서 나오는 희미하게 역한 맛이며 입술 너머로 느껴지는 작고 동그란 구슬이며.

 

이것을 깨물면 상쾌하게 박하 향을 툭 터뜨리겠지.

 

그 깨지는 감각이 꽤 중독적이고, 향도 좋았으므로 잠시간 이것을 깰까 충동이 들었으나 내킬 때 나가서 이것을 피울 생각이었으므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

 

A는 손 끝을 조그만 진주알에 올렸다.

 

이렇게 물소리가 나는 날에는.

 

그래서 물에 잠긴 것 같은 날에는.

 

내가 호흡하는 것이 유달리 신경쓰이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 아이가 생각났다.

 

같은 동그라미라도 저 물방울처럼 흔하디 흔한 보통 사람인 나와 달리, 이 진주처럼 보통 사람이 아닌 그 애가.

 

입에 문 필터가 타액으로 젖어갔다.

 

축축한 것이 거슬렸으나 굳이 빼내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물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갑작스레 사라진 만큼 또 갑자기 나타날 것만 같았다.

 

뻐끔

 

그래, 이렇게.

 

A는 식어버린 채 며칠이나 방치되었던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뻐끔거리는 거 안 하잖아.”

 

너 보라구 하는 거지~”

 

시선이 마주치자 저 어두운 바닷속에서 보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놀러 갈게!”

 

사 놓을게. 언제 올 건데?”

 

“5분 뒤에 도착할거야!”

 

미리 말을 하고 오란 말이야!”

 

A는 허둥지둥 일어나 담배를 뱉다가 습관적으로 재떨이에 으깨버리고는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울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우산과 지갑을 챙겼고 신발 뒤축을 구겨신으며 뛰쳐나갔다.

 

그 서슬에 텔레비전이 꺼졌다.

 

무의미한 소음이 사라진 공간으로 폭포처럼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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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2023. 4. 11. 02:36 | Posted by 호랑이!!!

애오오옹-’

 

율리안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올렸다가 검은 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로군.

 

고양이는 꽤 유익한 동물이다.

 

쥐도 잡고 벌레도 잡고 병도 막아준다.

 

개인적으로 따로 알고 지내는 고양이는 없지만 과거 성당의 어느 형제님은 따로 밥을 챙겨준다던가 대화를 나눈다던가 한다는 소문이 있었지.

 

동물의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왜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들어올리고 흐물텅하게 있는 걸까?

 

율리안은 읽던 책을 덮어 테이블에 얹고 담벼락 위의 고양이를 빤히 보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

 

노천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은 으레 손님이 주문한 음료에 대해서는 주문이 나왔다고 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

 

그러나 종만 다를 뿐 닮은 둘이 눈싸움을 하는 것을 알아차린 주위의 손님들이 입 앞에 손가락을 대었고 결국 아르바이트생은 테이블 위에 조용히 잔만 내려놓았다.

 

달그락.’

 

한편 율리안은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도 그 녹색 눈으로 율리안을 보았다.

 

율리안은 고양이를 보며 의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자세라는 평을 내렸다.

 

어쩌면 고양이도 율리안을 보며 인간 치고는 희한하게 고양이 같은 부동세로 자신을 보고 있다고 평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만 발바닥에 분홍색 부분이 다 드러나도록 발가락을 쫙 편 채 저렇게나 오래 있었는데 쥐가 나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여기는 다시 말하지만, 인간 천지다.

 

고양이보다 스무 배는 커다란 생물들이 득시글한 곳인데 왜 저렇게 무방비한 태도로 이 곳을 돌아다니는지.

 

그렇다고 저 고양이가 굳이 여기까지 올 정도로 배가 고파 보인다던가 졸려 보인다던가 하지는 않는다.

 

행동을 보고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동물이 없기도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

 

그리고 저렇게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계속 이 쪽을 쳐다보니 희미한 어색함이... .

 

율리안은 깨달았다.

 

이렇게나 쳐다보다니 사람이 상대였다면 무례한 일이다.

 

동물도 눈을 오래 쳐다보면 적대적이라 생각한다고 했지.

 

모르는 고양이를 이렇게 무례하게 쳐다보다니.

 

율리안은 급히 시선을 내렸다.

 

언제 왔던 것일까 마악 커피를 가져다준 알바생이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나 인상이 나쁘지.

 

율리안은 급히 쥐고 있던 책의 아무 데나 펴서 얼굴을 가리도록 들어올렸다.

 

‘져버렸네

 

고양이들 눈싸움을...’

 

‘졌어!

 

사람들은 그제야 각기 핸드폰이나 서류,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황태자와 마법사

2023. 4. 4. 03:05 | Posted by 호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 네 공이 컸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메디아.”

 

해 아래 금발이 반짝였다.

 

미소가 또 다른 해처럼 눈부셨다.

 

메디아, 너도 가자.”

 

청년은 손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녀님. 제가 저런 자리에 갈 수는 없어요.”

 

네가 없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오늘의 영광도 네 것이지.”

 

그러나 붉은 머리의 그는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더 숨길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제가 원한 것은 명예도 부도 아니고...”

 

내가 다음 황태자가 되는 것. 알고 있어.”

 

틸렌은 메디아가 미는 손에, 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틸렌 황녀님이시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와 박수가 요란해졌다.

 

“...가세요.”

 

어휴, 황녀는 짧게 한숨 쉬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꽃잎과 쌀알을 뿌렸다.

 

미리 준비한 것인지 꽃 자수가 놓인 노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길 가운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갹출하여 마련했을 옷은 한 눈에 보아도 품이 들어간 멋진 옷이라 입은 아이도 가슴을 펴고 한 뼘이라도 더 커 보이려 했다.

 

안녕! 하세요! 황녀님! 저는! ... 트리엔! 마을 출신이에요! 황녀님의 덕분에! 낭냥 왕국에 팔려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어요!”

 

뒤에서 마우양 왕국!이라고 급히 정정해주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준비해 온 인삿말을 또랑또랑하게 말했지만 점점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은지 어...를 잇다가 결국 감사합니다!며 허리를 숙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와르륵 터져 나왔다.

 

틸렌 황녀는 아이가 내민 하얀 풀꽃을 단춧구멍에 꽂고는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아이의 짧은 생 내도록 이어진 고난이 아이의 팔에 흉터를 남겼고 괴로움이 아이의 몸을 말렸지만 황녀가 놀아주는 지금만큼은 웃음이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황자님, 저도요!”

 

아니, , 나가면 안돼!”

 

마르타, 돌아와!”

 

줄 서면 안돼!”

 

되었으니 두거라.”

 

황녀는 어느샌가 생겨난 작은 줄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두 바퀴씩 돌려주었다.

 

서른 명쯤 아이들과 놀아주자 여기저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틸렌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 아이보고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으나 아이가 질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짙은 꽃내음이 풍기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이 틸렌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해상 제독의 일과 순시, 행정 감독, 모든 일을 자신이 검토하고 행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 있어.

 

시작은 메디아가 권한 일이었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다 맡았지.

 

어쩌면 그것도 메디아가 계산한 그대로려나.

 

틸렌은 백성들이 꽃을 뿌려 만들어준 붉은 길 위를 걸어 황제가 기다리는 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는 사교계의 모든 춤을 섭렵했고 한때는 최전방에서 일만 군대를 호령했던 그는 이제 세월이 내려준 흰 서리와 눈을 이고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였다.

 

틸렌, 나의 딸아.”

 

황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의 자랑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네 인기가 그래도 내 절반은 되는 것 같구나.”

 

황제가 던지는 농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가볍게 웃음이 일었다.

 

황녀 역시 재기 넘치는 웃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는 맹약의 검을 들어올렸다.

 

틸렌, 메즈노어의 백작, 와이트워크의 후작, 아즐란 해의 제독, 셴차의 학살자, 헤르파노의 감시자, 기르파 용의 후손이자 적법한 황녀여.”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가 황녀의 호칭을 꺼내어들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대는 스스로의 막중한 책임을 마주하고 만백성을 위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계로서 무던히 노력할 각오가 되었는가.”

 

모든 강과 바다에 맹세코 그러하겠습니다.”

 

황제가 쥔 술잔이 불길하리만치 붉게 빛났다.

 

그는 한 손에는 빛나는 술잔을, 한 손에는 빛나는 검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대는 신성한 술로 그 맹세를 몸속에 새기거나, 스스로의 말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검에 몸을 던져 그 목숨을 끊으라.”

 

틸렌 황녀가 일어섰다.

 

잘생긴 얼굴은 의기가 충만하여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미소 위로 긴장감어린 떨림이 스쳐지나가자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금잔을 높이 들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틸렌 황녀는.

 

틸렌 황태자는 빛나는 맹세를 받아들였다.

 

흐뭇한 눈으로 후계를 바라보던 황제는 반짝이는 푸른 눈이 메마르는 것을 보았다.

 

금잔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황태자의 몸이 흙에 닿지 않도록 제각기 손을 내뻗었다.

 

비명소리가 났다.

 

모두가 지지하던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제 슬하의 두 사람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수도 근처의 큰 영지까지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 같았던 신뢰가 무너졌다.

 

평탄하게 일하고 풍요로이 식사하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던 일상에는 금이 갔다.

 

수없이 흐르는 그 피, , .

 

결국 외척의 손에 황제의 목이 떨어진 날.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황태자의 가장 신뢰하던 마법사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돌벽에 온통 메아리쳐 울렸다.

 

황제가 서거한 날이건만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온통 기쁨 뿐이라니.

 

웃음이 광물이라면 그것은 유황.

 

웃음이 꽃이라면 그것은 흰독말풀.

 

광기까지 그 지독함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그렇게 비명 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가 곱게 틀을 다지고 반석을 쌓은 나라였다.

 

모든 하중이 황태자라는 돌에 가해지도록 만들어진 그 아름답고 단단한 나라는 그 돌 하나만 빼내었을 뿐인데 형태도 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제국이 흔들리니 주변의 나라도 흔들린다.

 

어떤 나라는 사라졌고, 어떤 나라는 몸을 사리고, 어떤 나라는 이것이 기회라는 듯 호시탐탐 주위를 노려보았다.

 

문명, 신뢰, 애정, 상생이라는 그 아름다운 단어들은 피와 탐욕에 밀려나고 온 세상이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친다.

 

아아,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 가슴 벅찬 감정이야말로 사랑이겠지.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다시 쌓는 것조차 마다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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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ns] 탈론을 위한 괴담 3

2023. 3. 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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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피꽃+감자즈]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2023. 3. 24. 03:57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날 꼬리가 자랐다.

 

메로스는 눈물을 머금고 아끼는 바지를 조심스럽게 튿었다.

 

집에서면 이걸로 충분하겠지.

 

그나마 자신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

 

메로스씨!”

 

메로스는 급히 바지를 입었다.

 

어서들 오게.”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과자 사왔어요!”

 

급히 모자를 쓴 메로스는 웨이스트 코트의 뒷자락을 꾹 눌러 내리고 아이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 셋이 합심해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온 모양인데, 아이들은 그 상자를 들고 쪼르르 이동해서 안쪽 홀에다 내려놓았다.

 

“...잠깐, 저걸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걸어서?”

 

중간에 버스 탔어요!”

 

지하철도요!”

 

애들끼리 잘도 탄다.

 

메로스는 고생했다며 따뜻하게 끓인 코코아를 가져왔다.

 

그런데 뭘 가져온 거니?”

 

, 그게요.”

 

아이들은 상자를 힐끗힐끗 보았다.

 

심지어 연우는 상자를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무어라 속삭이기도 했다.

 

안에 생물이 든 모양이군.

 

강아지? 고양이? 여우일지도 모르고...

 

저만한 크기라면 의외로 커다란 새라던가.

 

얼마 전에는 사바나 캣이나 악어나 원숭이 같은 데에 목줄을 매고 데리고 다니는 게 유행했었는데 그 유행이 다시 돌아왔으려나?

 

그런데 웬일로 집에서 모자를 쓰고 계세요?”

 

“...어쩌다보니...?”

 

메로스는 헛기침을 하고 상자를 가리켰다.

 

사이즈로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인가?”

 

아이들은 급히 상자를 뜯었다.

 

“...아니지, 크리스마스는 지났는데 뭘까?”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이들은 급히 가위를 가져온다 뭘 한다며 뛰어다녔다.

 

메로스는 테이프를 끊는 용도의 가위를 가져다주겠노라며 집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눈에 띄었다.

 

내친 김에 살짝 열어보면 안쪽으로는 이미 먼지가 앉은 작고 화려한 의자가 보였다.

 

나중에 먼지를 털어내고 이 의자와 이 티테이블에도 먼지막이 천을 덮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로스는 가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손으로 테이프를 끊고 뚜껑을 열고 있었다.

 

“...”

 

이제서야 열면 어떡해!”

 

죄송해요, 블랑 언니!”

 

...이젠 놀랍지도 않군.

 

 

 

 

 

 

 

 

 

 

자네는 어쩌다 납치당했나.”

 

납치 아니에요!”

 

블랑 언니가 먼저 얘기했어요!”

 

데려와달라고 했는데 자루에 넣을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 자루에 넣을 수는 없지.

 

하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방법이 많았을텐데...

 

혹이 나지는 않았나? 긁히거나 멍들거나?”

 

“...지금은 괜찮아.”

 

그야, 뱀파이어니까.

 

메로스는 블랑이 머리에 쓴 모자에 시선을 주었다.

 

느슨하게 머리에 걸칠 수 있는 알록달록한 니트 모자였는데 커다랗고 하얀 방울이 블랑의 머리처럼 복슬복슬한...아니 정신차리자.

 

자네 혹시?”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메로스도...”

 

블랑의 손이 메로스의 실크 해트를 덥썩 잡았다.

 

잠깐, 그러면 안되지!”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왜! 벗어, 벗어!”

 

이러면 안되네...!”

 

메로스가 꺄아악 소리를 질렀으나 결국 그는 블랑의 손에 모자를 빼앗겨버렸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귀가 축 늘어졌다.

 

토끼 귀!”

 

뱀파이어는 박쥐 귀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져 볼래요!”

 

가까이 오지 말게.”

 

블랑은 아이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흉흉하게 호기심어린 눈을 한 것을 보았다.

 

저 뱀파이어가 곤경에도 다 처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귀라도 만져 보라고 부추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귀 엄청 보송보송하다?”

 

, 정말요?”

 

토끼 귀...”

 

만져도 되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은 일제히 블랑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블랑은 불길함에 모자를 끌어내려 푸욱 눌러 썼다.

 

뭐야, !”

 

“...혹시, 언니도...?”

 

뭐야? 뭐야? 기다려!”

 

기다려! 안돼! 앉아!를 외쳤지만 메로스는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Go! Fetch!”

 

안돼애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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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 안에는 꽃이 가득했으면 좋겠어

2023. 2. 27. 17:15 | Posted by 호랑이!!!

 

 

뭘 봐? 저리 가서 너 같은 녀석들이랑 놀지 그래!”

 

날카로운 소리가 안온한 분위기를 찢었다.

 

괴물이라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세리나의 주위를 감싼 우아한 레이디들이 세리나의 손을 잡고 이네스에게서 떨어지도록 이끌었다.

 

마치 한 무리의 새가 어린 새를 돌보듯이,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한 데가 있었다.

 

그들은 세리나를 위해 긴 의자를 내오도록 하인들을 닦달했으며 가장 푹신하고 편안한 자리에 그를 앉혀 시원한 마실 거리를 손수 가져온다, 단 것을 가져온다며 종종거렸다.

 

다들... 정말 좋은 분이세요. 어쩜 이렇게 다정하신지...”

 

그들 사이에서 세리나가 자수정 같은 그 보랏빛 눈동자를 난처한 듯 찡그리며 앉아 수줍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면 그들은 마치 이 일이 그들의 천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내젓는다.

 

그들 사이에서 녹색 줄기가 달린 흰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세리나는 그 하얀 드레스까지 가냘파서 마치 물에 젖은 꽃잎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이봐요 영애, 너무한 것 아닙니까? 당신 때문에 다들 힘들어해요! 거기에, 레이디 세리나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겁니까?”

 

어머나, 저 남작 영식이 나서고 있네요.”

 

레이디에게 얼마 전부터 관심을 열렬하게 보냈었죠.”

 

그러자 얼굴이 붉어진 세리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소란스러운 쪽을 보았다.

 

뭐라는 거야? 웃기는군. 책을 드는 것도 아니고 검을 드는 것도 아닌 주제에 기사 흉내라도 내는 건가? 어줍잖게 가슴이나 부풀려 봤자 그 이쑤시개 같은 팔다리로는 우스꽝스러울 뿐인데!”

 

그러자 남작 영식은 급히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계까지 뒤로 젖혔던 어깨를 내려놓았다.

 

세리나- 세리나, 그 핑계나 대면서 이번 연회에 이름이나 알려 보겠다는 수작질이군. 정말로 걱정이 된다면 저기 달라붙어서 시중이나 들지 그래. 한두 세대만 지나도 평민 유지로나 남을 자가 정말로 남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연회장의 대리석 위를 굴렀다.

 

레이디 이네스는 오늘도 여전하네요.”

 

세리나 곁의 사람들이 부채를 들었다.

 

그들은 조금 더 세리나 곁에 붙어 앉으며 잔에 차를 채우고 아가씨를 돌보는 시녀처럼 단 과자를 집어 먹여 주었다.

 

연회장이 다 울리는 것 봐요. 상식이 없다니까.”

 

다들 싫어하는데도 꼭 참석하는 것 봐요. 뻔뻔하기도 하지.”

 

와 봤자 싸움밖에 하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그들 중 가장 어린 아가씨가 흥, 소리를 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런 사람이 세리나 님이랑 비슷한 색 눈을 가진 것도 별로예요. 그래봤자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게 빛나는 건 세리나 님의 눈인데도요.”

 

어머나 어머나,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썩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그렇게 수다를 떠는데 짝 소리가 났다.

 

리본을 장식한 화려한 금발이 출렁였다.

 

아닌 척 그 소란을 즐거워하던 사람들 사이로 작게 숨 들이키는 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흰 얼굴 위로 새빨간 손자국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시선이, 흥미가, 속삭임이 그들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기사 흉내는 끝냈나? 하긴, 미리 평민 시늉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굽이 가차없이 상대를 짓밟았다.

 

꿇어라, 이 볼품없는 것! 귀족 나으리들이 있는 곳에서 머리가 높다!”

 

결국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남작 영식은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러다 세리나와 이네스의 눈이 마주쳤다.

 

이네스가 눈을 한 번 찡그리자, 사람들은 이네스의 눈길에라도 닿지 않게 할 것처럼 세리나의 곁을 둘러쌌다.

 

심지어는 세리나의 곁에 있던 레이디들 외의 신사들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까지도 곁에 붙어 서려 했다.

 

이네스는 그것을 보란 듯이 비웃고는 술을 한 잔 들어올린 뒤 적당한 의자를 찾아 걸터앉았다.

 

세리나 님께 불경한 눈빛이에요, 겨우 백작가 여식인 주제에!”

 

그래봐야 제깟 게 세리나 님께 뭘 어쩌겠어요.”

 

레이디, 언제든 제가 힘이 되어드릴 테니...”

 

이 다음에 작은 규모의 사람들 끼리 뱃놀이라도...”

 

레이디 세리나.”

 

우아한 세리나.”

 

연약한 세리나.

 

세리나가 몰려든 사람 때문에 덥다는 시늉을 하자 사람들은 조금 거리를 벌려 주었다.

 

기침이라도 한다면 다들 한마음으로 걱정하며 따뜻한 차와 겉옷을 건네고 찬바람을 막도록 테라스를 닫고 두꺼운 커튼을 쳐 줄 것이다.

 

그야.

 

대공가의 금지옥엽에게는 불치병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며칠일지, 몇 주일지, 달일지, 해일지는 모르지만 많은 의사며 신관들이 성인을 넘기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리나는 잘 웃었고, 많은 것에 놀라워했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여렸다.

 

모든 이들에게 세리나는 녹아 사라질 첫눈이었고 깨어나지 못할 알이었으며 피지 못할 꽃봉오리였다.

 

모두가 그를 아까워했고, 드러내는 재능이 만개하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거칠은 천에 손가락을 대는 것조차 아쉬워했다.

 

연회가 파했다.

 

세리나는 사람들의 무수한 인사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조용히 한 바퀴 돌아줘.”

 

, 아가씨.”

 

마부가 세리나의 말에 조용히 대꾸한 후 왕성 밖으로 나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대부분의 마차가 빠져나가고, 한쪽 얼굴에 불그스름한 상처를 단 채 이네스가 나오자 세리나의 마차가 그 앞에 섰다.

 

어쩜좋아, 얼굴에 상처가 났어.”

 

괜찮아, 이런 거.”

 

이네스가 들어오고 문이 닫히자 세리나는 이네스의 뺨에 손을 대려다 차마 얹지 못하고 내렸다.

 

이제 이런 거 하지 말자, ? 나 정말 괜찮을 것 같아.”

 

장미가 수놓인 검은 드레스 위로 하얀 드레스 자락이 덮였다.

 

제발.”

 

세리나의 손이 이네스는 검은 레이스 장갑을 감쌌다.

 

너 죽을 때까지만 하기로 한 거니까.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잖아.”

 

이네스가 쾌활하게 웃었다.

 

세리나의 눈꼬리가 처졌다.

 

하지만 봐, 이렇게 빨갛게 되어서... 이거 멍들지도 몰라...”

 

그렇지만, 들었잖아. 네가 그런 소리를 계속 들으면 정말로 건강이 나빠질 거라고.”

 

세리나의 마부가 이네스의 집 앞에 왔음을 알렸다.

 

이네스는 검은 리본으로 맨 머리를 잘 정돈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래도 이렇게 네가 수모를 겪으면 안 돼.”

 

세리나. 있지, 다른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 거 알아?”

 

나 이거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이네스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세리나는 잠깐 열린 문으로 들어온 찬공기에 몇 번 기침을 했다.

 

불치병이 있는 대공가의 금지옥엽.

 

세리나도 이네스도 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였던 날을 기억했다.

 

세리나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처럼 조롱하던 말들.

 

세리나의 외모며 말투며 목소리까지 깎아내리던 이들.

 

하필 같은 날 데뷔한 같은 색 눈을 가진 이네스와 사사건건이 비교하며 좋은 신붓감으로서의 가치만 따지던 빌어먹을 작자들.

 

“...그렇지만... 사람들이, 내 앞에서 너를 욕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 때에도, 누군가는 세리나를 진정으로 염려했다.

 

누군가는 세리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교해야겠다면, 굳이 그들을 같은 저울에 올려두어야겠다면, 자신은 한없이 한없이 가라앉아야겠다고.

 

이네스는 단출하게 묶었을 뿐인 검은 리본을 끌러냈다.

 

그가 나빠질수록, 세리나를 박대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세리나에게 상냥해졌다.

 

어느샌가 세리나는 모든 이의 꽃이 되었다.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덧없는 소녀가 되었다.

 

오지 않을 미래의 여인은 나라도 기울일 절세미인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세리나의 손짓, 눈짓에 온 마음을 기울여 응했고 세상의 더러움도 거칠음도 느끼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보호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세리나의 죽음이 있어 이루어지는 일이다.

 

사람들은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세리나를 돌보았다.

 

그렇지만 저들 중 누가 정말로 그 죽음을 슬퍼할 것인가?

 

낮에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더라도 저녁이면 만찬을 위해 진홍색 비단을 두르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영원히 세리나를 애도할 준비를 했다.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검게 물들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세리나가 떠나도, 몇 년이 흐르더라도 자신이 검은 옷을 입는 것이 어색하지 않도록.

 

이네스는 새까만 드레스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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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나의 이름은 카나리아에서, 이네스의 이름은 장미와 나이팅게일에서 착안하여 나이팅게일에서 따왔습니다.

원 트윗: https://twitter.com/fifi_089/status/1598315793552674817?s=20

착안: https://twitter.com/yea_aay12/status/1598719755204042753?s=20

 

비슷한 사람의 후속편 2

2023. 2. 15. 00:28 | Posted by 호랑이!!!

도플갱어 크나트는 햇볕을 쬐었다. 오리지널이 말하기를, 그는 원래 피부가 희었다는데 야외활동을 오래 하다보니 그을렸다나. 도플갱어 크나트는(편의상, 크나트는) 날 때부터 태닝한 상태였던 손등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의 공기는 따뜻했다. 지는 낙엽과 마른 나무껍질 향이 햇볕 아래 퍼졌다. 저만치서 꼬리가 통통한 청설모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꼬리털이 폴짝거리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결쳤다. 청설모는 나무 위로 힘차게 올라갔고 시선이 따라 올라가며 크나트는 그 동그랗고 하얀 배를 구경했다. 이왕 누군가의 도플갱어로 태어날 거였다면 저런 청설모는 어땠을까. 연못 속의 물고기는, 나무 위의 흰 새는? 저기 바람에 흔들리는 잎 넓은 커다란 식물은? 저런 동물이나 식물이었다면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일 없이 마음이 평화로웠을까.

 

형제님-”

 

네에- 스호르씨.”

 

“...”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더니 저쪽이 눈을 질끈 감는다. 왜일까, 나는 이렇게나 무해하고 다정한 도플갱어인데.

 

일단 오늘 할 만한 일을 스케줄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까만 옷에 물에 젖은 잎을 연상시키는 사람은 쪽지를 들어올렸다.

 

이제부터는 베니스로 갑시다. 베니스로 가서 건축물을 구경하고 젤라토를 먹을 겁니다. 그 사람이 단 것을 좋아하니 당신도 좋아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 다음은 곤돌라를 타고 오 솔레미오를 들으며 한 바퀴 돌고, 가면극 구경도 하고, 여유가 되면 가죽 제품도 구경하고... 하는 식으로 읊는 것을 들어 주었다.

 

딱딱하고 비협조적으로 생겨서 자신에게 밖을 구경시켜 주라는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스케줄도 짜오고 바지런히 종종거린다니 참 귀엽지. 미간도 찡그리고 인상도 날카로워서 별로 내키는 얼굴도 아닌데. 크나트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잠시 매끈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손을 떼자 다시 깊게 골이 파인다.

 

“...”

 

어쩐지 표정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크나트는 몇 번 더 꾸준하게 문질렀고 미간이 빨갛게 되었는데도 골이 파이자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상하다, 이런 거 생길 나이는 아니라던데.”

 

당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캬악, 그가 소리질렀다. 그러다 앞에 놓인 것이 겉늙어 보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채 한 살도 안 된 갓난아기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마른세수를 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알아두십시오. 다른 사람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은 범죄입니다.”

 

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알겠어.”

 

율리안은 순순히 손을 떼는 것을 보고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마피아한테 범죄가 뭐 어떻냐느니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걸 이해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갑자기 그런 남자한테 던져지고 나서는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자기 맘대로여서 자신의 도덕성까지 고장날 것 같았는데! 정상적인 반응이다!

 

울어?”

 

내가 울린 거야? 라면서 손을 뻗다가 허락이 없으니 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손을 보니 진짜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율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저만치 먼 곳을 가리켰다.

 

갑시다.”

 

도착한 곳에서 크나트는 가면을 먼저 구해 썼다. 미색 바탕에 금색, 빨간색, 초록색 물감을 더한 평범한 카니발 용 가면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그에게 내려온 직업병... 아니지, 유전병인가? 율리안도 반강제로 고양이귀 가면을 썼다. 아마 이걸로는 모자라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크나트는 먼저 배에서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 위라고 들었는데도 물비린내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바다에서 으레 나고는 하는 소금 냄새 같은 것도 없어 이 안에 빠진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게 바다 위에 만든 인공 섬이구나.

 

율리안은 뒤따라 내리고 거리 노점에서 젤라토 두 컵을 샀다. 아이스크림보다 조금 더 쫀득한 질감이라 크나트는 이로 스푼 째 긁어먹었다. 그의 안내인은 성실한 성격인지 메모지까지 확인해가며 근처의 유명한 건물이나 장소에 대해 설명을 했다.

 

“...특히 이런 곳에서는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로비가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아마 대대적으로 보수하지 않는 한은 계속 그러할 겁니다.”

 

장마가 오면 어떻게 해?”

 

물이 오래 있으면 썩으니 모래주머니 같은 것을 두거나... 방수 대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따개비 같은 게 자랄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일부러 바닷물을 끌어들였다가 양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율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저것이 보이는대로 오래 묵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건 애다. 그러니 이런 대응은 그의 동심을 지켜주는 것일 테다.

 

이후로는 평탄했다. 날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곤돌라는 한 번 휘청이지도 않고 물 위를 미끄러졌다. 반쯤 녹은 젤라토를 떠먹었고 흔하지만 비싼 식당에 들어가서 별 것 아닌 음식도 먹었으며 사치스러운 정원과 오래된 건물을 구경하고 거리 악단이 공연하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율리안은 심란했다.

 

얼굴이며 행동이며 사소한 습관 같은 것이 닮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생물-생물은 맞겠지?-이니까. 하지만 모습이라던가 행동 외의 어딘가에서 동일인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무언가가 거듭 인지능력에 영향을 끼치려 해 자칫하면 헷갈려 버릴 것 같아.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보다 보니 크나트와 다른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발견해서, 자꾸만 본래의 크나트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양쪽에 실례일 테지.

 

나 잠시만 저기 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누가 따라가자고 해도 가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 말은 제가 당신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율리안은 미묘하게 눈가를 찡그리며 크나트를 보냈다. 관광객 대상으로 자질구레한 잡화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을 보다 율리안은 핸드폰을 꺼냈다. 또 다른 당신과 곤돌라를 타고 젤라토를 먹었습니다. 전송.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송을 누르려는 찰나 등 뒤에서 단단한 것이 찌르듯이 닿았다.

 

조용히 핸드폰 집어넣어. 네가 저 녀석 동행인이지?”

 

저 녀석이라면...?”

 

크나트 리비오 율리케.”

 

“...저 사람은 엄밀히 말하자면 크나트 당사자가 아닙니다.”

 

팔이 아프게 잡혔다.

 

숨기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우리가 한두 달 따라다닌 줄 알아? 닥치고 따라와.”

 

크나트는 잡화점에서 이것저것을 사서 나왔다. 이런저런 미니어쳐, 엽서, 스노우볼, 포장지에 곤돌라가 인쇄된 과자며 초콜릿 등. 그러나 멋없는 가게 상호가 찍힌 갈색 봉지를 안고 나왔을 때 가게 건너편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쪽인가?”

 

예민한 기감으로 걸리는 곳이 있다. 겨우 전화나 하러 갈 만한 곳은 아니고. 저 블록의 가게들은 낮에나 장사가 될 만한 것들이니까 이제 슬슬 문 닫을 때지. 가정집들과도 거리가 떨어졌으니 이제 저 근처로는 일부러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기척이 잡힌다. 하나, , , 그리고 여기에는 없지만 저쪽에 한 패로 보이는 인간이 하나 더. 가까이 가자 점점 소리가 커졌다.

 

그 놈만 죽이면 돼. 계급이 올라갈 거야.”

 

얼마 전에 미카한테 한 짓 들었어? 미친 자식이야.”

 

아하, 이게 본체의 직업에 따르는 부산물이군. 크나트는 모퉁이를 돌았다.

 

날 찾은 거로군.”

 

제길, 어떻게 왔지? 안내인이 간지는 얼마 안 됐는데!”

 

그건 네놈들 알 바가 아니고.”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골목 안으로 파고들었다. 크나트가 손을 뻗자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근거리에서 쏜 것이 안 맞을 리 없었고, 몸은 총알이 관통할 때의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다가 쓰러졌다. 율리안이 기겁해서 일어나려고 했다가 강제로 앉혀졌다.

 

형제님!”

 

어휴 끝났다~”

 

이건 어떡하지?”

 

그 쪽에 얘기가 들어가면 성가셔져. 역시 죽여야겠지.”

 

다시금 장전하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죽는다고? 골목이 어두워졌다. 율리안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이 어두워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려줘.”

 

누워있던 몸이 일어났다. 스스로 땅을 짚고 몸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몸에 실을 달아 당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에 마피아들은 다시 총을 뽑아 그 몸에 갈겼다. 연달아 총성이 울려퍼지고 총알이 떨어진 것인지 찰칵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이게 총에 맞는 느낌이군. 새로운데...”

 

길쭉한 손톱이 살을 파고 들더니 구겨진 총알을 꺼냈다. 금속 조각이 땅에 떨어지자 캉 소리가 났다. 손바닥에 총알이 하나 둘 올라가더니 까드득 소리를 내며 뭉쳐졌다가 땅을 굴렀다.

 

눈을 감아, 스호르 씨.”

 

두 번째 크나트의 마음 속에는 본체가 가진 것보다 몇 배쯤 더 많은 비틀린 감정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어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며, 그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두 번째는 쭉 늘어난 팔로 첫 번째를 흉내내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율리안이 제대로 눈을 가렸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손톱을 휘둘렀다.

 

얼마 안 가 상황은 정리되었고 두 번째가 율리안을 불렀을 때 율리안은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골목에서 눈을 떴다. 해가 져서 붉었던 길이 이제는 완전히 어두웠기에. 가로등이 켜지기 전까지 율리안은 두 번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두 번째는 하얀 빛 아래에서 검은 역광을 드리운 채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갈까?”

 

피에 젖었던 손은 손수건으로 대강 닦여 있었다. 그러니 잡으면 틀림없이 끈적하게 손을 더럽힐 것이다. 그러나 율리안이 스스로 일어서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손을 잡으려는 찰나, 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달링, 나랑도 안 간 베니스를 그 녀석이랑 가서 그렇게 알콩달콩...?]

 

“...상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나 닮은 녀석이라면 이미 달링이랑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상상을...]

 

두 번째가 다음 배 시간을 가리키자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소 급한 발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하며 율리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 확인되셨습니다.”

 

둘은 배에 올랐다. 어느샌가 별이 떠오른 밤하늘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 웃는 소리가 났다. 율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배에서 제공하는 마실거리를 가져다주었다. 따뜻한 것을 한 모금씩 홀짝이다보면 배가 땅에 닿았다.

 

율리안은 멋대로 에스코트하려 내미는 손을 생각했지만 두 번째는 그 대신 엉망으로 구겨진 갈색 종이 봉투를 뒤적였고 그 안에서 금색 리본으로 띠를 두른 상자를 꺼냈다.

 

가져가.”

 

이게 뭡니까?”

 

다음에 또 봐.”

 

다음에? ? 율리안은 은근하게 찡그려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택시를 잡아야 하나. 율리안은 큰길가로 나왔고 낯익은 차 옆에서 손을 흔드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나 빼고 즐겁게 다녀왔어?”

 

당신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아냐. 없었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며 크나트는 그에게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율리안은 두 번째가 준 상자를 꺼냈다. 리본을 끌러내고, 뚜껑을 들어 올리면. 그 아래에는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초콜릿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 녀석이 줬어?”

 

그렇습니다.”

 

지금 안 먹을 거지? 집에 좋은 걸 가져다 놨거든?”

 

당신이 말하니 수상쩍기 짝이 없다고 율리안이 눈을 치떴다. 크나트는 껄껄 웃었고 율리안은 편안하게 의자에 기댔다. 오렌지색 가로등이 몇 개 지나고, 낯익은 집이 보이자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문이 열리면 과연 크나트의 말대로 초콜릿 케이크와 과일들이 보였고, 옆에는 퐁듀 냄비에 초콜릿이 그득하게 녹아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율리안이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내려놓자, 크나트는 그 안에 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딸기 조각에 초콜릿을 묻혀 입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율리안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조금씩 베어 물었고, 오렌지 조각을 초콜릿에 푸욱 담갔다가 꺼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는 남자에게 주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 겁니다만.”

 

응음?”

 

미카라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미카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