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 홀든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긴 머리카락 때문인지 머리가 무거워 일어나기도 힘들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하고 돌이켜 보면.
모처럼 좋은 일이 있어서 진탕 술을 마시고, 다들 제 갈 길 가고 토마스랑 단둘이 남아 다시 술을 퍼마시고.
그래, 토마스랑... 그리고... 여관에 가서... 가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고.. 샤워실 문이 열렸고...
하얀색 수건 하나만을 두른 토마스가 나왔었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그 하얗던 몸에 온통 홍조를 띄우고.
주저하던 것이 보였는지 안경을 손가락으로 끌어 벗으며 ‘무서우신가요? 도련님’...이라고 했었지.
...어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토마스가 하얀 시트를 몸에 친친 감고 자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미치겠네.
내가 이런 꼬마랑 하다니.
이글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토마스는 말이 스물 하나지 영웅타령 하는 것이나 평소의 행실을 보고 있자면 사춘기도 오지 않은 새나라의 어린이 같으니 원.
이글로서는 토마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어린애랑 섹스한 기분이라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봐라 봐라, 저 눈감고 입 우물우물 하는 거.
웃고 있네, 무슨 좋은 꿈을 꾸면.
인상을 찌푸리는데 토마스가 반짝 눈을 떴다.
“...잘 잤냐?”
“네, 좋은 아침이예요 이글 형.”
쯔쯔, 이글은 혀를 찼다.
얜 지금 아직도 술이 덜 깨서 자기가 무슨 짓 했는지도 모르는 거야, 기억도 못할 걸.
아무리 취했다지만 한 살이라도 많은 내가 어른스럽게 밀어냈어야 했는데.
그러는데 토마스는 몸을 일으켜 이글의 뺨, 입술 가까이에 자신의 입술을 댄 것이다!
“덕분에 좋은 밤 보냈어요, 먼저 씻고 나와도 괜찮죠?”
부끄러움도 없이 슥 일어나니 몸에서 이불이 스륵 흘러내린다.
술이든 열기이든 그것에서 벗어나니 이제 토마스의 몸은 다시 새하얘져서 이글이 멋모르고 하나 남겼던 빨간 자국은 그림의 인장 마냥 붉게 남았다.
“야, 뭐라도 걸쳐. 거기 샤워 가운 같은 거라도.”
“이런 곳에는 그런 거 없어요, 이글 형.”
제정신이구나.
도련님이 아니라 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제의 일은 하룻밤의 꿈처럼, 마치 찬물을 맞아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미쳤지 미쳤지- 머리를 감싸고 앉아 오랫동안 자책하고 있으려니 수건 하나만 아랫도리에 두른 토마스가 밖으로 나왔다.
“형도 씻어요, 찝찝하지 않아요?”
“아, 아아, 씻어야지.”
따뜻한 물을 맞고 있자니 욕조에서 졸 것 같아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확 틀었다.
으하아악 차가워~!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몸을 떨고 가운이 없길래 수건 세 장으로 몸을 닦으며 나오는데 물기 때문인지 몸이 휘청한다.
잠도 술도 덜 깨서 넘어지겠구나! 했는데 토마스의 팔이 허리에 감겼다.
“괜찮아요?”
“어, 어어, 괜찮아.”
허리가 아플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으켜주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옷을 입는다.
...하아?
순간적으로 꽤나 두근거렸는데 말이지.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런데 두근거려야 해?
새침해져서 수건을 집어 토마스 쪽으로 휙 던졌다.
“난 이런거 해본 적 없으니까 네가 정리해.”
“네- 네.”
수건 치워줘, 눕고 싶으니까 이불 정리해줘, 겉옷 입혀줘, 목걸이 걸어줘.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도 싫은 내색 없이 네 네 한다.
화도 안 내냐.
이글은 드라이어를 다소 거칠게 내밀었다.
“머리 길어서 말리기 힘드니까 네가 말려줘!”
이번만큼은 토마스가 드라이어를 받는 손이 한 박자 늦었다.
혹시 화난건가 해서 슬쩍 눈치를 살폈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변해 얌전히 드라이어를 받아 주었다.
“알았어요, 말려 줄게요. 형 머리 말리면 형이 제 머리 말려 주시기예요?”
“엉~”
화나지 않았구나, 이글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머리에 와 닿는 손이 생각보다 섬세하고 편해서 자연스럽게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토마스의 머리를 말려주려는데 언제 자기가 남의 머리를 말려 봤겠냐고.
겉만 살살 말려놓고는 드라이어 바람으로 데워진 머리를 만져보는데 따끈따끈하고 폭신폭신해서 뭔가 다른 동물이라도 만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해서 헤집으면서 놀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토마스가 이쪽을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보인다.
...고놈, 머리 내리니 꽤 어른스럽고 잘 생겼네.
이글은 마주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팩 돌려 다시 머리를 말리는 일에 집중했다.
닭이 땅 헤집듯 헤집어놓은 데다 신기하다고 이래저래 만져놨더니 왁스로 머리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잔뜩 서 있었다.
“으아, 이게 뭐예요, 새집?”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며 웃지만 이글은 거울 너머로라도 토마스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차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토마스가 고백해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토마스가 연합 앞에서 고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토마스가 연합 문 앞에서 키스할지도 모르고.
아침 삼으려고 토마스더러는 기다리라고 한 후 빵과 마실 것을 샀다.
생각보다 계산이며 흥정이 빨리 끝나 토마스 쪽으로 가는데, 토마스가 꽃 파는 소녀에게서 꽃 한 다발을 사는 것을 보았다.
하, 귀여운 녀석, 꽃이라니.
어린애 같으니라고, 꽃은 너무 티나지 않아?
장미나 백합이나 튤립도 아니고 저렇게 작은 꽃 따위 누가 받아준다고.
하하 속으로 웃었다.
토마스는 주머니에 꽃을 집어넣었고 이글한테서 주스와 빵을 받아들었다.
“와, 안에 햄이 들어있네요. 맛있다~”
“그렇지? 이거 저기에서 제일 맛있는 거야.”
하하 웃는데 실수로 주스를 떨어뜨렸다.
컵은 바닥에 떨어져 구겨졌고 내용물은 바닥으로 퍼져 버렸다.
“...”
신경질적으로 빵을 덥썩 베어물었더니 옆에서 컵이 내밀어졌다.
“...뭐야.”
“형 마셔요, 전 빵만 먹어도 되거든요.”
라면서 제 손에 억지로 주스컵을 쥐어준다.
“아, 그래도 가끔 한모금씩은 주셔야 해요!”
...뭐, 작은 꽃도 예쁘지.
아까 보니 하얀색이던데 하얀 들꽃 예쁘잖아.
연합이 보였다.
“토마스.”
“네, 이글 형?”
“아까 그 꽃 산 거 있잖아-”
그 때 문이 요란스레 열리고 엘리가 화다닥 튀어나와 토마스에게 안겼다.
“토마쯔 오빠!”
“안녕 엘리!”
토마스의 손이 조끼 앞주머니로 향하더니, 작은 들꽃 다발을 꺼냈다.
“자, 선물.”
엘리는 꽃다발을 받고 꺅 꺅 소리지르면서 폴짝폴짝 뛰어들어갔다.
“...아, 뭐라고 하셨어요 이글 형?”
이글은 몇 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러기를 수 차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활짝, 활짝- 웃으며 엘리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졸리니까 가서 잘게!”
억지로 웃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휘어진 눈가가 감길 듯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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