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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드렉] 기분을 알아차리는 것

2015. 3. 1. 03:34 | Posted by 호랑이!!!

런던 거리, 잘 닦인 도로 가장자리로는 가스등이 죽 늘어서있고 녹지 않은 눈은 도로 사이사이로 눌려 얼어붙어 있다.

 

메마른 눈이 광장 가득 떨어지고 있지만 눈을 뭉쳐 노는 어린아이들이나 뛰어다니는 귀여운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거나 서로 지나칠 뿐.

 

얘깃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웃음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윌라드와 드렉슬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기차역에서 내려 마차에 올랐고 내리는 눈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로 윌라드가 목적지를 말한 이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마차에 앉았다.

 

뚜껑이 없는 마차라 어깨며 모자 위로 눈이 떨어졌다.

 

우중충하고 칙칙한 런던.

 

눈조차도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심지어 어느 곳에선가는 조금 녹은 눈이 질척한 웅덩이를 만들어 거리의 미관을 더욱 해쳤다.

 

드렉슬러는 힐끗 옆을 보았다.

 

원래도 잡담을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말이 없다.

 

아까 기차 안에 나오던 히터 온도가 좀 높긴 했지, 겉옷을 벗었는데도 더워서 차장을 불러다 물어보니 고장났다고 했었고.

 

가다가 배가 고파져서 식당칸에서 식사를 주문했는데 시킨 샌드위치에선 벌레도 나왔고, 주문했던 음식이 전부 맛이 없어서 반도 안 먹고 나왔다.

 

결국 홍차와 커피를 마시고 고픈 배를 안고 자리로 돌아와 더운 바람이나 맞으며 왔는데... 원래가 금세 기분이 나빠지는 양반이니 뭐.

 

윌라드가 들었다면 남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할 만한 생각을 하며 드렉슬러는 묵묵히 앞만 보았다.

 

마차는 도착했습니다, 라는 말도 없이 목적지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삯을 지불하고 둘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드렉슬러는 품에서 물건의 이름을 적어둔 종이를 꺼내 점원에게 읽어주었다.

 

오늘 받기로 예약해둔 크루그먼입니다.”

 

하지만 크루그먼이라는 이름은 다음 주로 적혀 있는데요, 뭔가 실수가...”

 

드렉슬러는 뒤에서 윌라드 크루그먼 이사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대신에 이 술은 어떨까요? 예약하신 물건 못지않게 좋은 건데-”

 

드렉슬러는 되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윌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라도 주십시오.”

 

점원은 활짝 핀 얼굴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면서 설명을 늘어놓았으나 윌라드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나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딴 생각 하고 있구만, 저거저거.

 

드렉슬러는 또 저걸 어떻게 기분을 풀어주나, 했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내가 왜 기분을 풀어줘야 해?

 

생각해보니 이거 또 화가 나네.

 

윌라드 저건 내 기분 따위 하나도 관심이 없을 텐데 난 뭐하러 삐지면 달래주고 비위 맞춰주고 있는 거지? 내가 언제부터 남의 기분을 신경썼다고!

 

드렉슬러는 뒤에 가만히 서 있다가 윌라드가 내미는 술 상자를 받아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타고 협력 관계에 있는 회사로 가 안으로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런던에 오는 것은 또 오랜만이군요, 오는 길에 생각이 나 술을 한 병 샀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드렉슬러는 술 상자를 넘겼다.

 

나무 상자가 열리고 두터우며 고급스러운 보라색 천이 벗겨지자 안에서 호박색 빛을 내는 술이 든 병이 나왔다.

 

유리잔에 얼음이 딸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호박색 액체가 부어졌다.

 

건배.

 

드렉슬러는 한 모금 마시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는 이 술이 마음에 든 모양이지만 제 입맛에 맞는 술은 아니었다.

 

딸그락.

 

평소보다 센 소리로 유리잔이 내려지길래 옆을 힐끗 보았더니 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밖에 못 알아보는 것 같긴 하지만.

 

드렉슬러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잔을 기울여 마저 비워냈다.

 

일을 끝내고 머물기로 한 호텔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는데 윌라드는 문득 적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한 잔 하시죠.”

 

됐어, 너나 마셔.”

 

“...안 마실 겁니까?”

 

드렉슬러는 잠깐 윌라드를 쳐다보았다가 빼앗듯이 잔을 낚아챘다.

 

일부러 취할 때까지 마시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우니 그 위로 체중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오.”

 

술 때문에 기분 좋은 열이 났고 차가운 시트가 닿는 것도, 스치면서 간질거리는 것도 전부 기분이 좋았다.

 

지그시 눈을 감는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차피 자는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서인지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더군요.”

 

“...내가?”

 

그러자 익숙한 손이 닿아 왔다.

 

어차피 저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드렉슬러는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