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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총] 모티브 : 쩨로 그림

2015. 7. 19. 02:19 | Posted by 호랑이!!!

[우리는 이 행성을 점거했다. 이 행성을 파괴하기 전에 기회를 주겠다]

 

주어진 것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무기였다.

 

[너희는 선택받았다. 이것은 이 행성의 신식 무기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네 옆의 사람을 죽여라]

 

한 사람과 행성을 저울에 올렸다.

 

신식이라더니, 웨슬리는 얼핏 낡아 보이는 총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카인을 쏘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의 목숨 하나와 수십억, 혹은 그 이상의 목숨.

 

단순한 숫자로 계산한다면 더없이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는데.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앞에 카인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마도, 죽을 각오를 하고서.

 

그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총의 안전장치를 걸어 품에 넣었다.

 

못 하네.”

 

슬로언, 이건 답이 정해진 일이네!”

 

아니지, 아니야.

 

일순 망설인 내가 부끄러워졌네, 나는 아직 장군이라는 직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나봐.”

 

목숨 하나와 목숨 여럿을 비교하는 일은 전쟁 중으로 충분했는데.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겠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을테니, 빨리...”

 

카인은 웨슬리의 품에서 총을 꺼내 손수 잠금장치를 풀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다.

 

웨슬리는 그 총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꼭 그래야겠나?”

 

총구는 카인의 머리를 향했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 폭발음이 들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본 그 곳에는 총을 전해주러 왔던 로봇이 박살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로 세계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원을 채취한다며 땅을 파고들었고 사람 몸에 든 성분을 조사한다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가거나, 공기가 너무 맑다며 알 수 없는 이물질 같은 연기를 뿌렸다.

 

다행히도 능력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공성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51조로 파괴 임무가 떨어지곤 했다.

 

능력자들은.

 

공성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카인과 웨슬리 역시 전장에 투입되었다.

 

단단하게 보강된 상자나 건물은 부서졌고, 그들은 상처를 입었다.

 

웨슬리의 구급함은 이미 다 써버린 상태인데다 카인도 웨슬리도 무시 못 할 상처를 입었다.

 

보급품은 얼마 후에 오지?

 

카인은 잔해의 그늘에 숨어서 센트리 레이더를 설치했다.

 

붉은 빛이 깜박거리면서 시야를 흐릿하게 밝혔고, 카인은 웨슬리를 돌아보았다.

 

대전차지뢰는?”

 

묻어두었네.”

 

우선적으로 총기며 사용하는 장비를 점검하고, 탄창을 채우고, 아군에게 연락을 하거나 물을 마셔두는 등,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수통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인은 웨슬리에게 말을 꺼냈다.

 

슬로언, 내 생각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는데.”

 

그러나 슬로언은 묵묵히 건량을 씹을 뿐이었다.

 

레이더의 붉은 빛에 그림자가 졌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 광택나는 쇳덩이에 우지를 갈겨 대었다.

 

이내 탄창은 비었지만 그 기계는 여전히 움직였고, 눈 역할을 하는 렌즈를 그들 쪽으로 돌렸다.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카인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류탄을 꺼내 던졌다.

 

왜 그 기계는 너희라고 했을까?”

 

다음은 잡아서 내리누르고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에 한 발.

 

“‘선택받았다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

 

카인이 드라그노프를 꺼내려는 순간, 웨슬리는 그 손에 자신의 품에서 꺼낸 낡은 총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카인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는 순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내 웨슬리의 몸은 무너졌고, 기계의 렌즈는 그 모습을 똑똑히 담았다.

 

미친-”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슬로언, 웨슬리! 응급 키트는...! 눈 감지 말게, 나 보고 있어!”

 

“...비가 오는구먼...”

 

자네가 세계를 구할 만큼 대단한 자라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자 아닌가.

 

기뻐하게, 이 세계는 지금 자네가 구했지 않나.

 

웨슬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손은 올라가, 카인의 눈가를,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비가 오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