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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ns]탈론을 위한 괴담2

2021. 3. 17. 18:22 | Posted by 호랑이!!!



"운동회!"

폭죽이 팡팡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말따마다 상인처럼 보이는 하티아 문파장은 대상들이나 쓸 법한 금장식에 녹색 비단을 두르고 악당의 손에 들려있을 법한 점화장치를 덜렁덜렁 들고 다녔다.
그 폭죽 소리에 잠을 깬 문파원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오거나 베개를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전자의 예시로는 꼬마와 청이가 있고.
의외로 후자의 예시는 새암이었다.

"졸려... 죽여...."
"암살자가 그런 농담 하면 못 써"

청이가 새암이에게 한마디를 하자 새암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를 쥐어뜯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 아침(혹은 새벽)부터 저녁까지라면 암살자인 그는 오후부터 새벽까지인 탓이다.

"다들 일어나. 모처럼 다른 문파와 연합해서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더니 잠만 자고! 우리 문파 사람이라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활동을 해야 할 거 아냐. 자꾸 그렇게 늦잠을 자면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되고 매일 피곤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이상하다. 왜 안 조용해지지.
새암이는 인상을 썼다.
이 문파에 암살자는 자신만 있는게 아닌데. 이미 진작에 잡아서 조용히 시켜야 할 사람이 대체 어디로 갔담.
당분간 조용해질 것 같지 않아 억지로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뭔가 했는지 거대한 공이 굴러다니고 준비성 좋게 마련된 응원 도구와 돗자리도 있었다.
팬더 옷을 입은 린족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마구 휘두르며 다녔고, 그 뒤를 따라 응원 도구를 하나 든 붉은 눈 곤족이 뛰어다녔다.
종목은 평범했고 각 문파에서 뽑힌 사람들은 산을 뛰어다니며 바통을 넘기거나 서로의 몸을 붙들고 씨름을 하거나 줄에 매달려 힘을 겨루었다.
마지막 주자로 뛰다가 온 새암이는 꼬마가 넘겨준 물을 벌컥 마시다가 졸린 눈을 비볐다.

"꼬마"
"뭡니까 낭자"
"탈론 사형 못 봤어?"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청이도 고개를 저었고.
아는 사람마다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몰라서 임무라도 나갔나보다 하는데 하티아가 다가왔다.

"새암!"
"네!"
"박 터뜨리기 하고 와!"
"네?"

하티아는 금종이를 붙인 부채를 촤악 펼치더니 비밀 얘기라도 하는 마냥 입 가까이에 대었다.
사실 이 운동회에는 상금(문파에서 각출한)이 걸려있고, 이번 박 터뜨리기에서 결과가 정해진다고.
새암이를 뽑은 것은 암살자가 쓰는 무기 중에서는 표창도 있으니 콩주머니 던지는 것도 잘 하리라는 하티아의 계산이었다.

"탈론 사형은 어디 갔어요? 사형한테 시켜도 될 텐데"
"자 자 어서 나가 어서"

곧 보게 될거라며 떠밀린 새암이는 콩이 들어간 하얀 주머니를 잔뜩 받았다.
오늘도 문파장이 영 수상쩍었다.
그리고 곧 와아아 요란한 함성 속에 박이 등장했고, 그 박을 본 새암이는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장대 위에 묶인 것은 커다란 종이 박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탈론이었다.


동양풍/황제공 도망수

2021. 3. 16. 00:31 | Posted by 호랑이!!!

“폐하!”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폐하!!!”

 

높고도 높은 황제의 집무실, 여느 때라면 이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못할 시종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왔다.

 

두려움으로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흙먼지가 묻고 찢어진 옷은 이 아름다운 건물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데다 채 빗지 못하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시종들의 짧은 앞날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질질 끌려들어오는 모습에 영영은 주먹을 꽉 쥐다 바닥에 털퍽 엎어져 불경하게도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다.

 

“폐하! 도망한 것은 이 다리이고 저들을 속인 것은 이 몸이오니 제발 저만 벌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영영이 검은 비단 자락을 쥐고 빌고 또 빌자 소름끼치도록 우아한 손가락이 영영의 턱을 들었다.

 

“내 어찌 너를 벌하겠느냐.”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금과 귀한 홍옥, 진주로 틀어올려 화려하지만 그 아래 눈은 빛 드는 일 없이 새까맣다.

 

사랑하는 영영의 울음을 감상하는 내도록 모양 변하는 일이 없던 그 눈.

 

그 눈은 이번에도, 다정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입과 달리 매캐하기만 했다.

 

차마 고개는 떨구지 못하고, 영영은 시선을 내렸다.

 

저에게서 달아나는 시선에 황제는 기분이 나빠진 듯 끌려 들어온 이들 중 하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금을 받아 자리를 비켜주었다지. 그 좋아하는 금을 펄펄 끓여줄 테니 마음껏 손에 쥐도록 하라.”

 

영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시선을 들었다.

 

“폐하, 초하 형은 무인입니다! 그 전대, 전전대부터 황실을 섬긴 가문의-!!!”

 

그리고 당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던!

 

“...너는 어쩌면 울음소리까지도 새 지저귐 같구나.”

 

웃는 황제는 커다란 무쇠솥과 열 관의 금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금편이 절그럭 절그럭 솥에 담기고 아래 장작을 때자 그 불길이 거세짐에 따라 모양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영영은 필사적으로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으나 황제는 냉정해서, 그가 볼 것이 못 되니 병사들에게 영영을 방 밖으로 내보낼 것을 명했다.

 

“폐하! 다시 생각을, 폐하, 폐-”

 

문이 닫혔다.

 

둔중하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문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제가 몸을 돌리자, 붉은 관에서 검은 신발까지를 장식한 온갖 옥 장식과 보석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의 빛을 퍼뜨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일을 시작해야지.”

 

검은 비단에 붉은 빛이 어른거려 핏빛으로 보인다.

 

빛 드는 일 없는 그 눈도 불빛이 일렁여서.

 

마치 저 황제가 어릴 적부터의 친우였던 충실한 신하를 고문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하늘의 자손은 열둘에 왕의 이름을 얻었고 열다섯에 빼어남을 보이고 태자가 되어 마침내는 황제가 되었지.

 

그저 명석하고 빼어난 자질을 지녔을 뿐, 한때는 저 눈에도 어린 자다운 순진한 기쁨과 희망으로 빛이 어리었건만, 이제 그 텅 빈 눈에는 잔인함만이 무저갱으로 남고 굳은 얼굴에는 위엄과 무자비함만이 어린다.

 

초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편 들어간 솥이 끓으며 기포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

 

이 손.

 

4세에 검을 잡고 6세에 말고삐를 잡았던 이 손은 이제 다시는 쓰지 못하겠구나.

 

황제는 손수 그의 완갑을 벗기고 양 금군에게 명하여 잡아 눌렀다.

 

“용금군대장 초하여. 네 죄를 네가 알고 있으렷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잡은 두 군인은 처참한 얼굴로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로 황제가 속삭였다.

 

“아주 크게, 비명을 질러라.”

 

“죄인 초하, 명을 받듭니다.”

 

초하는 부글부글 끓는 솥을 보았다.

 

좀 멀리 있었다.

 
언제 옮길까?

그 솥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을 지르래도.”

 

“...예에?”

 

“이 몸에게 세 번이나 말하게 할 참이냐.”

 

귀를 기울이면 문 밖에서는 아직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하!

 

곧 명령을 이해한 초하는 다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숨을 훅 들이쉬고.

 

전방을 향해 5초간 함성을 발사했다!

 

...이렇게요?

 

...라는 눈으로 돌아보자 황제는 울화통이 터졌다.

 

“비명을 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더 고통스러워해라, 더 아파해라! 더 크고! 괴롭게! 비명을 지르란 말이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문 너머에서 귀를 대고 듣고 있던 영영은 문에 기대 주르르 쓰러졌다.

 

“죽강 영영, 얼굴이 창백합니다!”

 

“죽강 마마, 궁으로 드시지요.”

 

“화, 황제가... 폐하께서...”

 

미치셨어.

 

차마 불경죄로 입에 못 올릴 생각을 하며 영영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에 입술을 덜덜 떨었다.

 

 

[크더건/율리안] 크리스마스

2020. 12. 25. 02:24 | Posted by 호랑이!!!

“...”

 

이 사람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낭비가 심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또 새롭군.

 

율리안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느낌의 무표정을 지었다.

 

둘밖에 없는 집에 커다란 햄 같은 거야 예상범위 내였다.

 

마시는 건 한 사람밖에 없는데도 샴페인이니 와인이니 하는 걸 들여놓는 것도.

 

...잠깐, 물병 가득하게 담긴 이건 수제 에그노그잖아? 이 사람은 자신을 중독자로 만들 생각인가?

 

술도 안 마시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거야.

 

여하간 노골적일 정도로 크리스마스 전용으로 만들어진 스웨터조차도 예상 범위 내였지만.

 

“이건 대체 왜 틀어둔 거지...?”

 

율리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스피커에서는 경쾌하게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어느 영화 회사 로고였나 N이 커다랗게 화면에 스치우길래 저 사람이 또 무슨 어울리지 않는 걸 틀었는가 기다리고 있었더니-

 

“앉아서 기다리지 그랬어.”

 

쟁반을 들고 크나트가 거실로 왔다.

 

“앉을 겁니다.”

 

커다란 전나무는 금색 공과 꼬마전구와 끈으로 장식되었다.

 

나뭇가지에는 또 이런저런 것들이 걸려있고, 아래에는 선물상자도 있어 제법 그럴싸하다.

 

작년에도... 그랬었지...

 

문득 떠오르는 종소리의 추억에 율리안은 크기가 들쭉날쭉한 선물상자를 노려보았다.

 

“빨리 선물부터 뜯어보고 싶어?”

 

“그런 게 아닙니다.”

 

이번에는 또 수상쩍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매시 포테이토와 두툼하게 자른 햄을 접시에 덜어놓을 뿐이다.

 

“잠깐, 립도 산 겁니까?”

 

“만들어두면 며칠 먹겠지 싶어서.”

 

다다익선 같은 소리나 하는 저 사람에게 검소의 미덕을 말하려다가 율리안은 오늘이 자애와 자비와 관대의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상기하고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

 

“역시 아깝습니다.”

 

뜯지도 않은 팩에 든 칠면조를 애써 무시하고, 율리안은 자기도 뭔가 준비했다며 부엌으로 가서 몇 시간이나 붙어 있었던 커다란 냄비를 가져왔다.

 

“뭔데?”

 

“이탈리아 전통 신년 음식입니다.”

 

이건 좀 잘난 체 하는 것 같았나? 율리안은 머뭇거리다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훅, 더운 김이 얼굴에 끼쳤다.

 

습하고 따뜻한 수증기에서는 비릿하고 달짝지근한 바다 냄새가 났다.

 

슬쩍 냄비 안을 들여다본 크나트는 아, 그랬었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이트 와인? 아니면 보드카?”

 

“괜찮습니다.”

 

이미 이 식탁 위에 나와있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역시 저 형제님은 나를 알코올 중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율리안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가위로 게를 썩둑 잘라 흰 살을 드러냈다.

 

“해산물 요리를 하는 건 처음 봤는데.”

 

“오랜만에 한 요리이기는 합니다.”

 

갑각류는 손이 많이 가지만 맛있지.

 

살을 들어내 접시에 담자 크나트는 즐겁게 게 접시를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손수 만든 절임 채소도 작은 그릇에 덜어 올려두자 제법 호사스러운 식탁이 되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오디오 스피커에서는 징글벨 노래가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하다.

 

깔끔하고 단정한 집 안이 초록과 빨강과 반짝이는 포장지로 발랄해진 것도, 조금 무리해서 좋은 게를 산 것도 기분을 명랑하게 만들어서 율리안은 얼른 게 다리를 뜯어냈다.

 

그야말로 가정적이고 완벽한 크리스-

 

“-마앗?!”

 

게를 입에 넣자마자 몸이 우뚝 굳었다.

 

“왜?”

 

팩,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인 율리안의 눈이 크나트의 접시를 향했다.

 

상대의 수상쩍음을 느낀 거의 동시에 의자를 쓰러뜨리며 율리안과 크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나트는 율리안을, 율리안은 크나트의 손에 들린 접시에 눈길을 두고.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라는 낭만적인 곡을 배경으로 둘 사이에 고요한 대치상황이 있었다.

 

“...”

 

“...”

 

잠시의 탐색전.

 

율리안은 눈을 굴려 싸움질로 다져진 팔과 근육으로 짜인 두툼한 가슴을 보았다.

 

“...그 접시를 이리로 주시기 바랍니다.”

 

신체적이고 경험적인 불리함을 인지한 율리안은 우선 대화를 청했다.

 

율리안은 건전한 현대인이었고,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며, 또한 훌륭한 청년이었기에.

 

“그런 것을 식탁에 올릴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며 접시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런 것이라니, 어째서?”

 

다행히 저 야만적인 남자도 대화를 해볼 모양이다.

 

약간의 희망을 느끼며 율리안은 접시를 이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접시를 먼저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나트는 눈을 굴려 율리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순순한 모습에 잠깐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율리안은 기대했던 단단한 접시가 아니라 무언가 말랑한 것이 닿자 펄쩍 뛰어올랐고, 그대로 크나트에게 잡혀 의자에 강제로 묶이고 말았다!

 

“이거 풀어주십시오!”

 

트리에 단 것과 같은 반짝이는 은색 금색 줄이 율리안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 남자가!!!

 

율리안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크나트에게 소리쳤고, 크나트는 그런 율리안을 보다가 콧노래나 부르며 그의 몸에다 주섬주섬 오너먼트를 달았다.

 

“사, 사람을 뭘로 아는 겁니까!”

 

심지어 파티용 종이 모자까지 머리에 씌워주자 정신을 차리십시오 형제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외의 말은 간신히 목 뒤로 넘기는데 크나트는 율리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아, 설마.

 

포크가 껍질 안의 살을 긁어냈다.

 

안돼, 설마...! 안돼...!!!!

 

포크는 길쭉한 살을 과도하게 우아한 몸짓으로 운반하였고 그 수령지는 아직도 율리안을 빤히 쳐다보는 크나트의 입이었다.

 

“흐음, 이것 보게. 찔 때 물을 너무 적게 넣고 찐 거 아냐?”

 

“소금을 좀 많이 넣었을지도?”

 

“이 부분은 살이 졸아들었는걸.”

 

한 마리를 끝내면 다음 한 마리를, 또 다음 한 마리를, 또 다음 한 마리를.

 

크나트는 한 마리에 한 마디씩 밉살스러운 말이나 하면서 냄비 안의 게를 전부 끝장냈다.

 

짜면 먹지 마십시오! 로 시작한 율리안의 말은 결국 의자째로 펄떡이는 육체적 반항이 되었고 율리안의 괴로움을 향신료삼아 크나트는 마지막 게까지 박박 긁어 먹었다.

 

그 즈음에는 율리안도 지쳐버려서 축 늘어졌는데 싱글싱글 웃는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날렸다.

 

“...그래도, 잘 먹었어 달링.”

 

기척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뺨에 입술이 닿았다.

 

율리안은 펄쩍 뛰어 몸을 일으켰지만 크나트는 게 껍데기를 들고 부엌으로 가 버린 후였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야.

 

율리안은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그 화면에는 타닥 타닥 타오르는 난로가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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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오수] 치트, 패치, 퍼블리와 다른 동료들

2020. 9. 30. 03:04 | Posted by 호랑이!!!

... 건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치트는 짐을 앞뒤로 주렁주렁 끌어안고 무게에 낑낑거리며 발을 옮겼다.

 

직급만 따지면 제가 제일 위라구요?”

 

그러자 앞에서 퍼블리가 돌아보았다.

 

짐 하나 없이 가뿐해서인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치트는 활짝 웃는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감당할 수 없어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패치랑 눈을 마주쳤지만 그 파란 눈은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히잉...”

 

빨리 걷게. 주인공님의 다음 전투가 곧이다.”

 

다음 장소에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던 거 같으니 앞으로 세 번의 전투 동안 아이템을 잘 배분해서 써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제가 살짝 도와드리면-”

 

치트가 말하자 앞서가던 두 사람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퍼블리씨 패치 선배님이랑 눈빛 똑같아진 거 알아요?!”

 

농담할 기운이 있다니 짐이 좀 늘어도 되겠군?”

 

예에? 여기서 더요?”

 

나빴어 나빴어! 심술쟁이!

 

퍼블리는 그 앙탈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서구가 힘들다고 하던데 돌아오면 위에 얹어 볼까요?”

 

!?”

 

패치가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길이 오르막이 되자,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다가 돌길로 변하기까지 하자 퍼블리가 치트에게 다가왔다.

 

.”

 

퍼블리님...!”

 

이번만이에요.”

 

역시 제 깜찍한 애교가 먹혔던-”

 

치트는 퍼블리의 눈빛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다, 원래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

 

선배님? 역시 선배님 때문인가?

 

주인공이 전투에 돌입하면서 그들의 전진에는 휴식이 생겼고 치트는 짐을 내려놓은 뒤 풀밭 위에 쭉 뻗었다.

 

퍼블리, 자네 저기 좀 보게.”

 

? 어떤 부분을요?”

 

주인공님이 한 패턴밖에 안 쓰시는데 이번 루트에서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는 걸 알려드렸나?”

 

, 알려드렸어요. 아마 원 패턴으로 깨는 주인공님 같아요.”

 

하긴 멀쩡한 총이랑 무기 다 두고 쇠파이프나 노루발로만 깨는 주인공님도 있지.

 

패치와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치트는 어마어마한 짐을 발로 툭 건드렸다가 주인공이고 나발이고... 싶어졌다.

 

하늘은 오늘도 파랗구나... 각져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데 무언가가 팔에 닿았다.

 

차가워서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병.

 

풀잎이 붙어 있는 수통.

 

병이 굴러온 방향은...

 

고개를 들었더니 패치가 가방 지퍼를 꽉 닫고 있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 말은 못 들은 것처럼 패치는 갑자기 퍼블리 쪽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전서구는 언제쯤 돌아온다고 했나? 지금쯤이면 연락이 와도 세 번은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때제때 연락을 했어야지!”

 

그리고 들개들도! 곤충들 오는 건 돌려보냈나? ? 일처리를 따박따박 해야 할 것 아니야!

 

대리님, 들키겠어요...”

 

이게 무슨 소란이지~?라며 주인공이 돌아보자 슉 몸을 낮추며 퍼블리가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렇게나 못난 후배이건만 선배님은 저를 걱정해주셨군요.”

 

그리고 뒤에서 저런 소리나 하는 치트 옆구리를 콱 찔렀다.

 

“...에잇, 이러니까 아직도 내가 현장을 못 벗어나는 거 아닌가. 이제 쉴만큼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게!”

 

아직 주인공님 전투 안 끝났는데-”

 

당신 승진해도 현장일 텐데 갑자기 남 때문에 못 가는 것처럼 말해봤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주인공은 전투를 끝냈으며 캠핑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 일 없겠지.

 

퍼블리가 땅을 고르고 패치는 모닥불을 피웠다.

 

치트는 이제 익숙하게 커다란 텐트를 쳤지만 오늘도 이 텐트에는 퍼블리만 들어가서 잠들겠지.

 

저 아래에서 흑기사 투구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자 치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잘들 있었나?! 어때, 오늘은 좀 할만했나!”

 

흑기사가 우렁우렁하게 커다란 목소리로 웃으며 치트 옆으로 다가오자 치트는 자연스럽게 잔을 꺼냈다.

 

, 그건 아직 꺼내지 않아도 된다네! 오늘은 술이 없거든!”

 

만세!

 

치트는 자연스럽게 주먹을 꽉 쥐려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손을 내렸다.

 

그것 참 아쉽군요, 매일매일 파티라니 저는 즐거웠는데요.”

 

아무래도 술 궤짝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말일세!”

 

너무 기쁘다.

 

이런 사소한 것을 기뻐하게 될 줄이야.

 

치트는 허물어지려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빈 잔을 흔들면서 여유를 부렸다.

 

그동안 버릇이 되어버렸는지 오늘 술이 없다고 하니 너무너무 아쉬워서~”

 

쿠웅.

 

땅이 진동했다.

 

동시에 목덜미부터 온 몸을 가로지르는 섬찟함에 치트는 말을 멈추었다.

 

돌아보면 안돼.

 

하지만 돌아보고 싶다.

 

...역시 돌아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돌아보지 않는다고 그 결과가 미뤄지진 않아...

 

와핫핫! 전서구 이 친구 타이밍 딱 좋게 왔어! 마침 여기 이 친구가 술이 없다고 아쉬워하지 뭔가!”

 

이보다 빨리 못 오니 그러려니 하쇼.”

 

전력으로 온 모양인데? 자네 매일 빼더니 역시 우리랑 술 마시는 게 좋았던 모양이지!”

 

치트는 돌아보았다.

 

천으로 덮은 커다란 상자.

 

자신이 예전에 퍼블리에게 술집에서 건넸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상자.

 

제발... 제발.....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살짝 천을 들추자.

 

상자 안 빼곡하게 찰랑이는 술병들이 달빛을 반사했다.

 

절망은... 기쁨만큼 쉽게 찾아오는군요...”

 

? 방금 뭐라고 했나?”

 

퍼블리의 접시에 안주 겸 먹을 것을 잔뜩 얹어주고 패치는 치트와 흑기사와 전서구의 잔을 채워주었다.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잔을 채우는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급기야는 각기 병을 하나씩 들고 마신다.

 

무어라고 속삭인 건지 치트는 전서구에게 다가와 낑낑거리면서 들어보려고 애쓰고 몇 걸음 걷다 못해 전서구 밑에 깔려버렸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나고 패치와 흑기사는 어깨동무를 하고 주정을 부리고 있었으며... 아니, 들개 대장도 거기 끼었잖아?

 

들개 한 마리가 치트 위의 전서구 위로 올라오고 다른 들개가 치트 위의 전서구 위의 들개 위로 기어올라왔다.

 

... 아악...”

 

어휴! 다들 뭐 하는 거예요. 내려오지 못 해요!”

 

들개 한 마리 한 마리씩이 내려오고 전서구가 일어났음에도 치트는 그대로 쭉 뻗은 상태였다.

 

다들 취했으니까 이 김에 얼른 들어가요.”

 

퍼블리가 텐트 쪽으로 손짓했다.

 

뺨에 강아지 발자국이 생긴 치트가 빌빌대며 퍼블리가 벌린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깨끗한 바닥과 베개를 껴안으면서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흐아아...”

 

하하, 오늘 힘드셨죠. 이런 때 잘 듣는 약이 있어요. 아니카가 혹시 모른다고 챙겨준 약인데 이런 때 쓰게 되네요.”

 

다리며 팔, 어깨, 허리에 고약을 치덕치덕 바르고 엎드리자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퍼블리도 그 옆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쭉 폈다.

 

으드득 소리가 났다.

 

예전에 술집에서요.”

 

, 술집에서요.”

 

상사가 있으면 산통을 깬다는 게 뭔지 말했잖아요.”

 

아 그랬었지.

 

치트는 그 때를 떠올리며 허허 웃었다.

 

술자리를 보다 보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패치의 웃음에서 더욱 힘이 없어졌다.

 

그 웃음소리를 듣다 퍼블리가 엎드렸다.

 

그래도, 대리님이 팀장님을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자기 직전이라 벗은 두건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들이 어깨며 팔 위로 흘러내렸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하겠지만, 싫어한다는 말과는 다른 거니까.”

 

어두운 텐트 안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치트씨.”

 

 

 

 

 

 

 

“...방금 뭐였지?”

 

치트는 머리에 쓴 헬멧을 벗었다.

 

내장된 스피커에서 뭐라고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치트는 충격으로 다시 쓰지 못하고 있었다.

 

텐트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

 

하지만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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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2020. 9. 10. 01:43 | Posted by 호랑이!!!

 

 

이것 봐요!”

 

보송보송한 노란 머리카락에 사탕 같은 눈을 한 미코테가 손톱을 세워 페드의 옷소매를 긁었다.

 

가죽옷인데 괜찮은지 손을 잡아 이리저리 살피자 손은 그대로 맡겨놓고 라레타는 반지르르 예쁜 꼬리를 페드의 눈 앞에 흔들었다.

 

손톱이 어느 한 군데 까지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페드는 눈동자를 가운데로 움직여 제 코 앞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다가-

 

.

 

라레타의 손바닥에 이마를 막혔다.

 

동그랗게 뜬 눈에서는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보글거렸고 라레타는 페드를 막아냈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져서 어깨를 쭈욱 폈다.

 

이거 봐! 또 물려고 했어!”

 

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눈동자가 라레타의 모아진 눈썹으로 향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봐요, 여기! 매일 무니까 여기 털이 납작해졌어!”

 

“...그렇씁, 니까?”

 

페드는 라레타의 꼬리를 받았다.

 

미세하게, 꼬리털이 납작 누워 있었다.

 

자주 입에 물기는 하지만!

 

털이 조금 납작해진 것도 알지만!

 

그렇지만 그러니까 매일매일 빗질해줬는데? 털결에 좋다는 것도 발라 주고?

 

페드는 급하게 빗을 꺼내다가 털을 빗질했다.

 

털이 보소송 일어났다.

 

하지만 그 털은 라레타가 훅! 불자 다시 챡! 누워버린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페드는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라레타의 심기를 알려주듯 꼬리는 비늘 돋힌 손 안에서 바스락 바스락 꾸물거렸지만 아까 페드의 움직임을 막아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덕분에 그렇게 움직임이 크지 않았고.

 

그것은 달리 말해.

 

캬아앙!!!”

 

페드가 꼬리를 물 틈을 주었다는 말이 된다.

 

가만 안 둬!”

 

, 그러다 다칩니다.”

 

가만 안 둬!!!”

 

말랑말랑한 몸이 페드의 어깨 위로 훅 뛰어올랐다.

 

페드는 몸을 숙이며 보들보들한 피부가 비늘에 긁히거나 바닥에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껴안았고 라레타는 그것을 방해로 여겼는지 바둥거리면서 페드의 등에 거꾸로 엎어져서 조금이라도 더 내려가기 위해 등을 긁었다.

 

장식 겸으로 붙인 가죽 조각이 바닥을 뒹굴고 등비늘에 손톱이 긁히자 페드는 냉큼 몸을 놓아주었다.

 

이때다! 하며 라레타는 그 특유의 유연함으로 거의 물구나무서다시피 다리로만 매달린 채 앞으로 손을 뻗었고, 비늘로 덮인 꼬리를 손에 넣었다!

 

페드는 라레타가 주저없이 그 꼬리를 입에 물자 화들짝 놀랐다.

 

라레타는 페드가 당황하자 더 신이 나서 꼬리를 물고 뜯고 온 몸으로 붙들었고 페드는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최대한 꼬리의 가시를 눕혀두려고 애쓰면서 고뇌했다.

 

꼬리.

 

전혀 아프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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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요란하게도 소리가 울렸다.

 

이만하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A는 항상 자리에서 일어나 이 맑은 날 어디에서 비가 오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날은 맑고, 바람이 불면 사철 푸른 활엽수가 솨- 소리를 내고.

 

다시 A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기는, 요즘 애들이 어디에서 이런 소리를 듣겠어?

 

A는 닳아 부드러워진 마룻바닥에 벌렁 누웠다.

 

어디에선가 스르륵 천 스치는 소리가 났다.

 

곧 시야에 하얀 사람이 들어온다.

 

긴 머리, 새하얗고.

 

눈은 노랑, 동공은 악보에 그려지는 무언가처럼 생겼음.

 

자나?”

 

일어났어.”

 

이 자는 B라고 한다.

 

이천년 가까이 묵은 이무기다.

 

천 년 도를 닦고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 A의 조상이 뱀이라고 소리쳐 다시 천 년 도를 닦아서 조상의 업을 씻으라며 A를 끌고 왔다.

 

압도적인 무언가에 무서울 만도 하건만.

 

A가 이 집에 온 날 장장 30시간을 잤는데 오후에 눈을 떴더니 자기 때문에 놀라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봤더니 도무지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있잖아.”

 

A가 손을 내밀자 B는 그 손을 잡고 일으켜 앉혀주었다.

 

아무리 봐도 술잔처럼 보이는 도자기에 향긋한 차가 따라지고 종지처럼 생긴 작은 접시에 색색이 화려한 과자가 올랐다.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그치만 맛있다.

 

내가 용이다!’하면 어쩔 거야?”

 

집에 데려다주고 네 앞날에 행복을 빌어 주마.”

 

만약 뱀이다!’하면?”

 

내쫓을거다.”

 

A는 향만 달짝지근한 차를 마셨다가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나 사이다 마시고 싶어.”

 

B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인간의 천한 음식!이라고 말할 것만 같은 표정!

 

비늘도 안 보여주는 B의 인간 외적인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거렸더니 B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몸에도 나쁜 것이 뭐가 좋다고!”

 

“...어어?”

 

그거 다 설탕 덩어리다. 마셔서 몸에 하등 좋을 것 없는- 단 것이 마시고 싶으면 이따가 오미자차 타 주마.”

 

말에서 낯익은 사람이 느껴진다.

 

그게, 그러니까...

 

할머니...?”

 

“...아니다.”

 

이래놓고 나중에 마시고 싶으면 마셔야지하면서 한 캔 꺼내 줄 거야?”

 

B의 몸이 움찔했다.

 

그럴거야?”

 

결국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시선을 피하여서, A는 그와 시선을 맞출 거라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B는 휙 고개를 젖혀 뒤를 보았는데 A가 점점 더 가까이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었더니 점점점점점 뒤로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내는 균형을 잃은 A 아래 요란하게 깔려버렸다.

 

으아아!”

 

“...아이고... 이 망아지야.”

 

바람이 빗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옷자락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A는 조심조심 B의 머리카락을 걷어낸 다음 그 옆에 다시 드러누웠다.

 

난 네 할머니가 아니다.”

 

, 조상님.”

 

“...조상님도 아니다, 이놈.”

 

이 쬐끄만 녀석이 참.

 

B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반짝이는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쳐버렸다.

 

 

트친이 주는 한 문장으로 글쓰기

2020. 8. 1. 01:50 | Posted by 호랑이!!!

아주 먼 곳에서 A는 사람들을 보았다.

 

눈밭에, 흰 배경으로 선 것은 새까만 침엽수림.

 

하늘마저 흐린 무채색 사이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다채로웠다.

 

분홍색 옷에 녹색 허리띠, 진주 귀걸이, 금으로 만든 팔찌, 은으로 만든 목걸이.

 

풀쩍 뛰어오르는 사이에 드러난 맨 발목에는 파란 깃털이 붉은 끈에 매어 있고 장밋빛 발은 양말도 신발도 없이 눈을 밟는다.

 

화관이 흐트러지고 꽃잎이 휘날리는 사이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A는 그들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사박, 눈이 발 아래 으스러지고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를 잔가지는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나무 위 눈을 A의 머리 위로 조금씩 떨구었다.

 

문득, A는 긴 갈색 머리를 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 여자?

 

그는 새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고, 그 태양같은 웃음에 A는 미묘한 훈기를 느꼈다.

 

이리 와요!’

 

빙글 돌면서 또 누군가가 A와 눈이 마주쳤다.

 

밀짚같은 머리카락을 꽃과 함께 틀어올린 사람이 즐겁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A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다.

 

열 명이나 될까 싶었던 그들은 어느샌가 A의 존재를 알았고, 그들의 비밀스러운 연회를 방해받았음에도 오히려 깔깔거리면서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A는 코까지 덮은 목도리를 내렸다.

 

머리에 눌러쓴 모자를 벗어 머리를 공기중에 헝클어뜨리자 누군가의 손이 머리 위에 커다란 화관을 씌워 주었다.

 

한겨울의 시린 공기처럼, 햇볕이 A의 몸에 내리쬐었다.

 

그 따뜻함이 폐를 채우고 서서히 서서히 피부에 스며들었다.

 

눈밭에 오래 있다 보면 추위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A는 어느 순간엔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어느 날.

 

나무를 베러 온 벌목꾼은 보았다.

 

눈밭 사이에서.

 

목도리가, 모자가, 장갑이, 외투가, 양말, 스웨터, 눈 신발까지 하나씩 떨어져 있는 것을.

 

 

[라반차 오라틸로] 친구가 집에 놀러왔어요

2020. 7. 24. 10:45 | Posted by 호랑이!!!

잘 있었어?”

 

빽빽한 침엽수림의 초입에서 흰 머리의 청년이 검은 늑대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늑대는 코를 씰룩, 움직이더니 알타이르의 주위를 빙빙 돌며 냄새를 맡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철썩.

 

으악!”

 

사람이 견디기에는 다소 세차게.

 

꼬리로 얻어맞은 알타이르는 반바지 아래의 다리를 쓱쓱 문지르다가 커다란 박스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이거 다 갖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허리가 끊어질 거 같다고. 그런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걸 휘둘러서-”

 

아닌 게 아니라 허리가 정말 아팠다.

 

내 귀엽고 폭신폭신한 꼬리가 뭐? 어린이 늑대한테는 좀 거칠었던 모양이지?”

 

그런 걸 폭신폭신하다고 말하는 거야, 가슴?”

 

아니 이 어린이 늑대가?!”

 

라반차는 술과 음료수로 가득한 종이 박스를 들어 올리다가 알타이르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아 아파! 가슴! 가슴 늑대!”

 

아니 이 녀석이 아직도!?”

 

다른 쪽 귀도 쭈욱 잡아당겨졌다.

 

으어아아 아파! 아파! 이 가슴! 가슴! 가슴!”

 

심지어는 꼬리도 잡아당기고 있다!

 

! 못된!

 

알타이르는 분노를 담아 하울링을 했다.

 

가슴!!!!!!!!!!!!!!!!!!!!!!!!”

 

벌떡.

 

알타이르가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서 조그만 털뭉치가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워우우우.... 끼엥?”

 

정신을 차려보자 머리에서 굴러 떨어졌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강아지들이 분홍색 입을 뻐끔거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머리만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제 앞에는 방금 꿈속에 나왔던 검은 늑대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자고 있고 그 옆으로는 부숭부숭한 털감자들이 발을 허우적거리거나 입에 닿는 것들을 물면서 잠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제 머리에서 굴러 떨어진 감자... 아니, 아기 늑대 한 마리의 입가에 물린 흰 털을 조심스럽게 빼 주며 알타이르는 어쩐지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뛰고, 엎치락 뒤치락 구르고, 오후에는 덥길래 다같이 호수에 뛰어들었다가 간식 먹었고, 그러다 누가 누구의 고기를 뺏어 먹어서 싸우는 게 일이 커져서 한 마리씩 다 떼어 놓아야 했었지.

 

그리고 아이들이 들이받아서 넘어진 책장도 정리하고 낮잠 잘 이불도 털어주고 청소도 해야했고 또...

 

유달리 바빴던 일과를 떠올리자 멀미가 날 것 같다.

 

알타이르는 하얀 털 달린 귀를 퍼득였다.

 

눈을 반짝이면서 짤막한 다리로 뒤뚱뒤뚱 뛰는 것만 봤더니 그 행복한 표정이 마치 악몽 같았는데 이렇게 몽글몽글하게 모여 자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다.

 

솜털이 복슬복슬한 꼬마들이 제 몸에 몸이며 엉덩이를 붙이거나 주둥이 쪽 털이 빠진 청소년 꼬마들이 다리를 턱 얹고 자는 모습이 참.

 

푹신한 베개를 끌어다 턱 아래 괴고, 알타이르는 아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장난질을 부추겨댔던 늑대 한 마리를 보았다.

 

편안하신지 배도 까고 이따끔 뒷발질을 하며 자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하긴 실제로도 짝이 없구나.

 

라반차가 들었다면 이건 자발적인 독신생활이라고 펄펄 뛰었을 법한 말을 생각하며 알타이르는 뒷발로 그 새까만 등허리를 걷어찼다.

 

워어어엉!? ! !”

 

벌떡 일어난 라반차가 주위를 홱홱 둘러보았지만 이미 알타이르는 눈을 감은 뒤였다.

 

옆에서는 까만 늑대가 월월 짖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주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탈렌 O. 드라크와 후작

2020. 7. 22. 01:35 | Posted by 호랑이!!!

낮게 쉿쉿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메운다.

 

그 자만 없어지면 그 아가씨의 마음에 걸리는 게 없을 거야.

 

쉬이잇 쉿.

 

당장은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아가씨는 너와 영원히 함께하며 기뻐하겠지.

 

다 꺼져가는 장작불을 조명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이 열려있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꽉 눌러 닫았다.

 

다시 낮은 쉿 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그 사람은 서성거렸다.

 

다시 서성거리고, 또 서성거리고.

 

그러다 창문을 벌컥 열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든 채 뛰쳐나갔다.

 

마지막 남은 불씨는 서서히 재 속으로 잠겨 사라지고 흘러나온 연기 사이로 얼핏 눈동자가 빛나는가 하더니 벽난로 뒤의 그림자에서 길쭉한 인영이 나타났다.

 

얼굴이며 목에는 꽃이 밝은 색으로 그려져 있고 손에는 뼈 모양이.

 

붉은 색이 섞인 복숭앗빛 눈동자는 가늘고 길게 열려서 즐거운 듯이 휘어졌다가 다시 스르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꼬리가 부드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드라크와 후작의 성에서는.

 

후작니이이이이임!!!!!!!!!!”

 

아이고오.”

 

탈렌은 손을 들어 귀를 꽉 막았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욧!? 또 일 하셨지요!!! 인간 유혹하는 거!!! 그런 일은 저희 같은 부하들에게 맡겨달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수수한 검은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쬐끄만 악마가 저 멀리서부터 두다다닥 달려왔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하자 탈렌은 그 악마의 겨드랑이에 손을 들어 한 바퀴 비잉 돌려주었다.

 

으아아아-”

 

그래 그래.”

 

거대한 도마뱀 모습에 셔츠, 검은 조끼를 걸친 탈렌은 목에 감았던 검은 끈을 풀어 한 쪽 끝을 손에 쥐었다.

 

끈은 구불구불 뻗고 얽히더니 단단하게 늘어져 바닥을 딱 소리 나게 짚었다.

 

디쿤과 사비는?”

 

탈렌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자 기둥 뒤 그림자에서 스르륵 작은 주둥이가 나와 대답했다.

 

아직 남아있습니다.”

 

얼마나?”

 

디쿤님의 몸통, 사비님의 다리와 꼬리가 남아있습니다만 조만간 상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식사는 그걸로 하지. 남은 것은 고용인들 식사로도 만들어서 나눠줘.”

 

그러자 앞치마를 두른 악마는 가감 없이 활짝 웃었다.

 

야호! 후작님 만세! 만만세!”

 

많이 먹고 키 크렴, 데일라.”

 

후작님보다 더 커질 거예요!”

 

탈렌은 가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걸쳤다.

 

“...”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에도 이 키였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겠다.

 

어쩌면 이렇게 안 클까.

 

탈렌은 다시 안경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라는 자신이 청소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탈렌의 손을 꼭 잡고 집무실로 이끌었다.

 

 

 

 

전편: blog.naver.com/yesjawoon/220832152636

 

 

[스카이림]트친이 주는 한문장으로 글쓰기 해시

2020. 7. 20. 08:42 | Posted by 호랑이!!!

떠난 이들을 위해 건배!

 

음유시인의 북이 울렸다.

 

화이트런 여관의 주인 이솔다는 카운터에서 불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새로 보이는 얼굴은 없어진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고, 마치 어제 보았고 그제 보았던 사람들처럼 누구는 노래하고 누구는 술을 마시고 누구들은 주먹다짐을-

 

잠깐, 가게 안에서 싸우지 말아요!”

 

여기저기에서 마을이며 성곽을 수리하느라 물자가 팽팽 돌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돌고 돈다.

 

제국은 떨어졌고 스톰클락이 일어서며 온 스카이림에 만연했던 차별도 한풀 꺾였다.

 

그러니 그동안 성곽 안으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던 카짓 상인들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물건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댔고 화이트런에 이르러서는 그간 친분을 쌓았던 이솔다의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을 예약해두고 다녔다.

 

이솔다.”

 

고양이를 닮은 인간, 카짓 상인인 사아드가 카운터 앞에 앉았다.

 

뭘 드릴까요, 사아드?”

 

우선 벌꿀주를 한 병 부탁합니다, 그리고 쇠고기 구이도.”

 

사아드는 희끗한 털을 가지고 있어서 이솔다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노인인 줄 알았었다.

 

그 말을 했더니 리사아드는 아주 크게 웃었었지.

 

술 마실 나이는 되었나요?”

 

이솔다.”

 

특유의 발음이 타박하는 듯 한 소리를 내놓고 이솔다는 깔깔 웃으면서 벌꿀주와 구운 쇠고기, 훈제한 물고기를 접시 위에 담았다.

 

물고기는 제가 사는 걸로 하죠.”

 

당신의 제안에서 따뜻한 모래 냄새가 납니다.”

 

사아드는 손짓하여 이솔다의 귀를 가까이 했다.

 

팔크리스에서는 마을의 피해가 적으니 목재를 좀 싸게 내놓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와 우호적인 친분을 나누어준 그대가 여관을 수리하겠다고 한다면 이 카짓은 기꺼이 목재를 날라오리라.”

 

이솔다는 여관을 둘러보았다.

 

루시아는 그의 재산을 가로챈 삼촌네가 전쟁통에 죽어서 농장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였다.

 

여관에서 일감을 찾던 용병들도 당분간은 트롤이나 늑대, 거인 토벌로 떠났다가 더 많은 돈을 들고 돌아오겠지.

 

일손을 좀 고용하면...”

 

은 파는 할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왔다고 기뻐했다.

 

당분간은 병사들을 요역에 동원했다가 점차 수를 줄인다고 하였으니 돌아올 사람은 더 많아지겠지.

 

윈드헬름의 여관처럼 요리사를 따로 두고, 청소할 사람도 하나 두고.

 

이솔다는 더 넓은 여관을 떠올렸다.

 

커다란 벽난로가 공기를 덥히고 말끔하게 빛나는 바닥과 벽.

 

기둥에는 돋을새김, 문고리에는 오목새김.

 

해머펠에서 들여온 향긋한 술과 맛있는 음식.

 

지나간 날들이여.

 

음유시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람들은 잔을 들어올렸다.

 

다가올 날들을 위하여!”

 

이솔다는 맥주병을 들어 리사아드의 벌꿀주 병과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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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1년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지만 유독 겨울에는 뱃사람들조차도 나오는 것을 꺼려해서 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면 오직 바람 소리만 들렸다.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바위를 깎아내며 세차게 내는 휘파람 소리.

 

파도 소리.

 

저들끼리 부딪치고 들이박아 나는 기괴한 소리.

 

그리고 금속 같은 소리가 난다.

 

바다에서 얼음이 솟아오르고 바람의 군단이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칼날이 막힌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이 땅의 인간을 사랑한 얼음의 신이 있었다.

 

그가 파도를 밟고 팔을 휘두르면 얼어버린 바닷물이 날카로운 바람을 쳐 낸다.

 

군단은 땅에게로, 신에게로 바람을 쏘고.

 

신은 바다를 얼려 막고 또 막는다.

 

겨울 내내 그 싸움은 그치지 않아서 혹여 그 바다로 가게 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어버린 파도가 암초에 부딪혀 바스라지는 것을.

 

 

꼬마친구 냐쨩

2020. 7. 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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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트랑 율리안이랑

2020. 5. 25. 01:17 | Posted by 호랑이!!!

아침 6.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푹신한 침대 안에서 퀸타페드가 눈을 떴다.

 

이불 안쪽에는 언약자가 저에게 등을 붙인 채 동그랗게 말려 새근새근 자고 있고 이불 위며 발치, 머리맡에는 언약자를 닮은 꼬마친구들이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파묻혀있다.

 

진한 감동을 받은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퀸타페드는 몸을 부르르 떨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가벼운 운동을 한 후 더운 울다하임을 감안해서 찬물로 몸을 씻었다.

 

7.

 

목욕물은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로 데워둔다. 아침을 준비하다보면 식을 테니까.

 

과일은 씻어 자르고 계란은 반숙으로, 베이컨을 굽고 잘게 자르다보면 시간이 훅 사라졌다.

 

신선한 우유까지 준비하면 맛있는 냄새에 침대 쪽이 부스럭부스럭 잠 깨는 소리가 들렸다.

 

깼습니까?”

 

으으으응.”

 

, .”

 

-.”

 

입에 조그만 별사탕을 물려주자 눈은 여전히 감겨 있지만 입은 오물오물 움직여서 까작까작 씹는 소리가 난다.

 

목욕하면서 아침 먹을까요?”

 

으응...”

 

잠투정을 하는지 끼잉 소리를 내는 라레타를 안아들자 조그만 인형들도 꼬물락꼬물락 움직이더니 한데 모여 다시 잔다.

 

귀여워.

 

이 심장 멎는 귀여움을 계속 보고도 싶었으나 퀸타페드의 품 안에는 먹이고 씻기고 입혀야 할 라레타가 있었기에 비정한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김이 오르는 따끈따끈한 물에 옷을 벗겨 라레타를 내려놓자 라레타는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

 

-.”

 

수란을 자르자 노른자가 흘러내렸다.

 

베이컨과 함께 입에 넣어주자 다시 다물려고 하지 않길래 볼을 콕 찔렀더니 귀가 파득파득 움직이고 입이 다물어져 우물거린다.

 

만지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지 않고 살짝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입을 벌리라고 알아들은 것인지 아-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녹색 포도알을 물려 주었고 차갑게 식혀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이 삐죽 찡그려졌지만 아작아작 잘 깨문다.

 

그렇게 계란, 채소, 베이컨, 과일을 먹이다 이제 되었겠지 싶은 마음에 마실 것을 권했다.

 

우유 마시겠습니까?”

 

.”

 

이것만큼은 누워서 마실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졸린 기색이었지만 따뜻한 물로 얼굴을 씻으며 일어나 앉는다.

 

나만큼 라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응에 퀸타페드는 꿀을 섞은 우유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달걀? 아니면 베이컨?”

 

둘 다 먹을래.”

 

- 하고 입을 벌리면 다시 달걀과 베이컨이 들어간다.

 

또 샐러드, 그리고 과일 순서로 입에 넣어주자 얼만큼 먹고 질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몇 시예요?”

 

이제... 9시군요.”

 

어쩐지 졸리더라... 하암.”

 

오늘은 외출하기로 했잖습니까. 기억나지요?”

 

안 나요.”

 

이제 몸 닦을까요?”

 

쪼끔만 더 있다가.”

 

그러면서 다시 눈을 감는다.

 

 

 

 

 

 

 

 

아침 6.

 

크나트는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전날 꽤 오래 뭘 했더니 몸이 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래저래 체위를 바꿔가면서 했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는 부족하구만.

 

바닥에 떨어뜨린 속옷을 주워 입고 하우스 메이트 비슷한 사람의 정신건강을 위해 추리닝 바지도 입어준 채 운동기구가 가득한 지하실로 갔다.

 

창고를 얼른 하나 지어야 할 텐데.

 

크나트에게는 이 지하실을 어메이징한 플레이룸으로 바꾸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으나 율리안이 쓰는 손님방에 운동기구를 놓기에는 그 방이 너무 작기 때문에 현재 무기한 연기 중이었다.

 

널찍하게 운동기구를 놓으려면 일단 땅부터 다지고, 그 위에 시멘트를 붓고, 벽을 쌓고... 저 쪽 마당에 뭘 묻어둔 게 있었던가? 없었겠지?

 

그나마 마당 넓은 집이라서 다행이다.

 

어릴 때는 방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집에 무슨 마당이 쓸데없이 넓으냐고 불만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조금은 쓸모가 있군.

 

잠깐 러닝머신을 뛰고 땀을 닦아낸 뒤 첫 번째 근육운동기구에 앉았더니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당연하다지만 율리안이다.

 

몇 모금 정도가 빈 페트병을 들고 달랑달랑 걸어내려온 율리안은 우선 스트레칭부터 했고 몸이 쑤시지도 않는지 쭉쭉 뻗는 것에 크나트는 말을 걸었다.

 

굿 모닝. 도와줄까?”

 

“...됐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뻐근해 보이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고 율리안의 표정이 말했다.

 

당신 손이 닿는 건 밤이면 충분합니다.”

 

“...호오.”

 

율리안은 자신의 말이 또 저 인간에게 뭔가 상상할 거리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피하며 재빨리 러닝 머신에 올랐다.

 

별달리 말을 걸지는 않고, 크나트는 자기 운동이나 하다가 이제 뭉친 근육이 다 풀렸다 싶어지자 운동기구에서 내려와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 좀 떠다 줄까, 달링?”

 

저는... .. 달링이... ...”

 

어쩐지 저 가 한숨처럼 들린다.

 

개의치 않고 크나트는 대답을 기다렸다.

 

“...부탁드립니다.”

 

크나트는 계단을 올라가 일단 물병에 물을 가득 따라놓았다.

 

털썩, 하고 마당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얼른 나갔더니 옆집 사람도 신문을 가지러 나온 것인지 신문을 줍다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그렇군요, 이제 봄이 오려는가 봅니다.”

 

이탈리아는 대개 따뜻하니 특별히 봄이 온다고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렇게 맑게 개인 하늘을 보면 다시 일년이 시작하는구나 싶어져요. 이제 좀 있으면 아이들도 다시 방학을 맞아 돌아올 거고, 또 새로 학기 시작하는 데에 필요하다면서 연필이며 옷이며를 실어 나르겠지요. 우리 애는 지금 영국에 있는데 저번에 왔을 때는...”

 

크나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만 가보고 싶다는 무언의 표시를 했음에도 이웃의 수다는 멈출 줄 몰랐고 크나트는 시계 대신 옆집 사람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그리고 그 때 가게에 갔더니 점원이 애 옷을 보고 그러는 거예요, ‘아주 스코틀랜드 인이 다 됐네!’ 그러더니...”

 

내가 신문을 왜 가지러 나왔지.

 

10분이 지나고 인내심에 한계가 온 크나트는 옆집 사람의 말을 끊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 애 물을 줘야 해서요.”

 

다음에는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나오지 말아야겠다.

 

다시 고양이를 들였나요? 옛날에는 있었다고 어머님이 그러던데, 아주 예쁜 황갈색 고양이랑 까맣고 하얀 고양이랑 회색 고양이 말이에요. 아침마다 우유나 버터 조각을 주면 아주 행복하게 핥다 가더라고 얼마나 그러는지! 제가 말이에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데 항상 저만 보면 아주-”

 

아니지, 아예 신문 구독을 취소해버리자.

 

좋은 하루 되십시오.”

 

신문사를 태워버리자.

 

집 안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크나트는 거칠게 신문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아니 물론 사람과 교류하는 건 좋아하지만 지금은 바쁘다니까!

 

우리 애 물 줘야 한다고! ..., !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려던 크나트는 일어나 물병으로 달려갔다.

 

미지근한 물이 찰랑찰랑한 물병을 쥐고 내려갔더니 율리안이 아까 그대로의 상태로 러닝머신을 달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놔두고 갔던 물병 안 물의 수위 정도일까.

 

여기 물.”

 

감사- 하아, 합니다.”

 

거의 빈 물병을 들고 다시 올라가서 씻어놓고 크나트는 자기 몸도 씻어두러 갔다.

 

 

 

 

 

 

 

 

 

 

아침 11.

 

오늘은 뭘 입힌다.

 

퀸타페드는 라레타의 몸을 말려주고 머리도 말려주고 빗질도 꼬리 끝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속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한바탕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잘 넘어갔고(비록 라레타의 몸을 한 번 더 씻겨야 했지만) 이제 난제는 라레타에게 어떤 옷을 입히느냐다.

 

우선은 부드럽고 편한 재질의 옷을 안에 입혀야겠지, 울다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따뜻한 동네라고 하였으니까 얇아야 할 거고... 그렇지만 비공정을 탄다면 서늘할 테니 톡톡한 옷이 좋겠다.

 

가장자리에 하얀 털도 대고... 그러면 몽글몽글하니 미코테가 더 귀엽게 보일 터.

 

아니면 아예 안은 얇은 옷을 입혀서- ...하지만 비공정을 타고 가는 동안 의자에 눕기라도 하면 옷이 다 구겨질 텐데.

 

옷을 벗겨놓고 맨 위에 코트만 두르게 할까.

 

아니면 역시 초승달 옷?

 

안에 입을 옷을... 저번에 멜빵바지도 참 귀여웠었지.

 

이것도 귀엽고 저것도 귀엽고.

 

뭐든 다 잘 입으니 뭐가 편한지 알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입히기에는 퀸타페드의 장인정신이 용납지 않았으니.

 

삼십분을 더 고민하던 것은 등 뒤로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닿으면서 사라졌다.

 

뭐야, 뭐 해요?”

 

등에 냉큼 매달리는 미코테가 다치지 않도록 팔을 잡아 목 쪽으로 가까이 당기면서 일어서자 달랑달랑 흔들리는 발이 제 종아리나 허벅지를 건드렸다.

 

옷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동을 해야 하니 이 트렌치 코트와 아오자이...”

 

나 가운 입을래요.”

 

라레타가 옷 사이에서 상앗빛으로 보드라운 알라미고 가운을 꺼냈다.

 

“...중에서 역시 그 가운이 제일 라랑 잘 어울립니다. 역시 고르는 건 라한테 맡겨야겠어요. 제일 좋은 선택입니다.”

 

보지 않아도 보송보송하게 빗질을 끝낸 꼬리가 신나서 치켜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요? 역시 내가 고르는 게 제일이지?”

 

이래봬도 좋은 물건은 많이 봤으니까요! 뭐가 좋고 나쁜지는 한눈에도 알아본다구!

 

우쭐우쭐 즐거워하는 모습에 페드는 여름용 색안경이라도 구해서 쓰고 다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가면이라던가, 뭐든지 가릴 수 있는 걸로.

 

보석이라던가 좋은 비단을 쓰면 좀 좋은 사람으로 보일까?

 

 

 

 

 

 

 

 

 

 

아침 10.

 

크나트는 씻고, 머리를 말린 채 뒤집개로 프라이팬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발랄한 멜로디의 민요나 흥얼거리면서 넓적한 접시 위에 말랑말랑하게 익힌 프렌치 토스트와 통통한 소시지와 반숙으로 익힌 달걀을 얹고 껍질을 벗긴 토마토를 한데 놓았다.

 

치즈를 좀 넣을까 말까.

 

미간을 찡그리면서까지 고민하며 크나트는 한 접시의 프렌치 토스트에만 설탕을 한 숟갈 얹었다.

 

이봐 달링! 예쁜 신부님? 섹시한 신부님-!”

 

지금쯤이면 씻고 있으려나? 아니면 옷을 입고 있나.

 

어느 쪽이든 잘 안 들릴 테니 세레나데를 부르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외의 곳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크나트는 펄쩍 뛰어올랐다.

 

‘-렇게 부르지- -십시오-’

 

허니? 아직 운동하고 있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하려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오자 아직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게 보인다.

 

조금만 더.... 하아, 하고 가겠습니다.”

 

조금만이 얼마나 조금만일까.

 

지하실 벽에 못을 박기 싫어서 시계 거는 것도 미뤄뒀는데 아무래도 조만간에 하나 걸어놔야 할 것 같다.

 

런던 시계탑에 걸린 것만큼 큰 걸 러닝머신 바로 앞에다 걸어두면 저번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몇 시간이나...

 

잠시 크나트는 음란한 상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겉모양만은 멀쩡해서 율리안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크나트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손목시계를 가져왔습니다. 정말 조금만 더 하다가 올라가겠습니다.”

 

그렇다면야.

 

크나트는 다시 계단을 올라와 한 사람 몫의 음식에 덮개를 씌워두고 먼저 사용한 접시를 씻고 양치질을 하고 옷장 문을 열어 옷을 골랐다.

 

짙은 회색 수트에 반짝이는 금속 단추를 달고 넥타이는 남색... 아니면 초록색? 이 노란색은 사 놓고 한 번도 안 썼군.

 

모처럼 격식을 내려놔도 좋을 자리이니 무늬가 들어간 것도 좋겠지.

 

하얀 줄무늬가 하나, 둘 들어간 것은 무난하게 잘 어울리고.

 

체크 무늬는 대체 어쩌다가 이 옷장에 들어온 거람?

 

이 가로 줄무늬는 누구 선물을 주려고 샀던 것 같은데 결국 주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했군.

 

조만간에 대대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넥타이를 죄 꺼내자 생각보다 많았고, 왜 골고루 안 썼는지 고민하기에는 바리에이션이 지나쳤다.

 

은색 줄이 들어간 것과 치즈 무늬가 들어간 것 중 어느 것으로 할 지 고민하다 잠시 정지한 크나트는 회중시계부터 단추에 달았다.

 

...그러고 보니 선인장도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고양이 무늬는 나중에 율리안에게 주자.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넥타이 몇 개를 골라들고 시계를 보니 깜짝 놀랄 만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 후다닥 율리안의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씻고 있나? 하지만 화장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 문을 두드렸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벌써 나간 거야!?

 

내가 너무 늦어서!?

 

! 차 열쇠!

 

차 열쇠 어디있지!?

 

카운터에 올려둔 바구니를 뒤적였지만 열쇠 대신 동전이나 명함, 클립이나 쿠폰 같은 것들이 손가락에 달그락거렸다.

 

옷장 서랍 위? 없고!

 

침대 옆에!? 없어!

 

어제 입었던 재킷... ! 여기! 이거!

 

주머니를 뜯어내다시피 벌리고 열쇠를 끄집어내 집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찰나 크나트의 귀에 기계소리가 걸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크나트는 고르던 넥타이를 그대로 움켜쥐고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달링 슈거?”

 

“..., 하아... 그것도... 접니까.....?”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12.

 

퀸타페드는 비공정에 올랐다.

 

다리 아프지 않습니까? 목이 마르지는 않아요? 별사탕을 좀... 아니, 안 가져왔구나.”

 

별사탕은 나오는 길에 꼬마친구 라레타들에게 전부 주어버렸다.

 

조르르륵 붙어 서서 어디가? 데려가? 언제 와? 빨리 와? 하면서 종알거리는 것에 발이 묶여서 늦어지자 가면서 먹이려고 했던 별사탕 봉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많아! 반짝반짝해! 올록볼록해! 데굴데굴해! 하는 것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미간에 힘이 꽉 들어간다.

 

그리고 그 새 자리를 찾아낸 라레타는 으쓱거리며 퀸타페드를 당겨 자리에 앉혔다.

 

역시 형이 있어야겠지? 라는 것을 잔뜩 뽐내면서.

 

멋지다 내가 정신을 딴 데 팔아도 형이 다 챙겨준다!고 했더니 꼬리털이 한껏 보들보들해졌다.

 

멋진 미코테 꼬리털을 빗어줘도 됩니까?”

 

어쩔 수 없지! 퀴니니까 허락해주는 거예요!”

 

빗을 착 꺼내들고 그새 헝클어진 털을 빗어주자 반질반질해진다.

 

너무 좋아.

 

퀸타페드는 이왕 빗을 꺼낸 김에 머리털까지 빗어주기로 결심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부드러운 털이 사르르 벌어졌다가 가지런하게 내려앉는다.

 

머리에 쓴 모자부터 목의 리본, 반지, 가운, 반지르르한 머리털과 꼬리털.

 

집에 놔둔 꽃향기가 배어서 은은하게 향이 난다.

 

너무 예뻐 내 미코테.

 

여기서 무릎 꿇으면 안 되겠지.

 

그러면 눈에 띌 텐데 누가 봤다가 반해버리면 안 되잖아.

 

왜 비공정에는 개인실이 없는 거야.

 

빛의 전사의 이름으로 개인 비공정을 만들고 싶다.

 

마법 종류만도 네 가지나 되면서 왜 투명해지는 망토는 안 만드는 건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 필요할 거란 말이야.

 

퀸타페드는 알 수 없는 원망을 하며 라레타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뭐야? 추워요? 하는 게 너무너무 귀엽다.

 

꽉 끌어안아 버리고 싶다.

 

라레타는 왜 작고 가녀리고 연약한 사람이라서...

 

퀸타페드는 슬펐다.

 

그리고 비늘 달린 꼬리가 라레타의 허리에 감기자 라레타는 퀴니가 추운가!? 라며 장갑을 꼬리 끝에 씌워 주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약속이고 뭐고 같이 커르다스 서부고지의 오로라나 보러 갈까.

 

-”

 

하고 입을 떼는 순간, 우렁차게 방송이 흘러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두고 가시는 물건이 없는지 잘 확인을-”

 

도착했대요!”

 

라레타는 퀸타페드의 소매를 당겼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할 걸.

 

퀸타페드는 겉옷이며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공정에서 내려 걷고, 작은 기차를 타자 라레타는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퀴니 이것봐요, 금속으로 만든 뱀 같아! 이거, 이거 뭐라고 불러요? 기차? 타 본 적 있어요?”

 

한 번 있습니다. 이것은 좀 작군요.”

 

그리고 유령도 없고, 뚜껑도 있군.

 

저번에는 어디에 이동하기 위해 기차에 탔다기보다는 다른 일 때문에 탔었기 때문에 퀸타페드도 창문에 딱 달라붙었다.

 

평화로운 들판과 산이 보이고 강과 꽃이 지나가고 양떼도 있다.

 

내린 역도 자그마해서 역무원이 한 명, 매점에 한 명 있을 뿐.

 

그리다니아예요?”

 

그런가 봅니다.”

 

라레타에게 젤리를 한 봉지 들려주고 퀸타페드는 노란 튤립과 프리지아를 샀다.

 

이건 못 본 꽃인데 씨앗을 얻을 수 있을까.

 

얻어 간다면 아마 푸푸차님이 기특해하시겠지.

 

역에서 나와 걷다가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을 발견했다.

 

둘은 안으로 들어갔고, 방으로 안내받아 가자 두 사람이 있었다.

 

잘 찾아오네? 여기야 여기.”

 

잘 계셨습니까.”

 

두 분은 잘 지냈습니까 리비오 씨, 스호르 씨.”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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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만년필이다

2020. 4. 23. 00:18 | Posted by 호랑이!!!

수현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는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우는 것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거나 아버지의 친척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지.

 

사실 수현은 처음부터 장례식에 반대했었다.

 

장례를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랬을 때도 가장 짧고 초라한 것을 은근히 내밀었지만 사흘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이기지는 못했다.

 

하기는 일생 내내 그랬지.

 

“누나.”

 

현수의 양말에 있는 노란 곰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상주 나한테 주라.”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현수의 입에서는 열릴 때마다 소주 냄새가 났다.

 

“어른들이 그래도 상주는 남자가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큰아버지가 그 소리 하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랑, 고모랑 큰엄마도.”

 

그리고 또, 하면서 누가 거기 있었는지 떠올려보는 현수를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학교 가야 하잖아. 낮에도 있어야지, 상주 하려면.”

 

“어, 그런가?”

 

“어른들이 준다고 다 받아 마시지 말고 가서 자라.”

 

“으응.”

 

현수가 자러 가는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현이 이름을 좀 기다렸다 주는 건데.”

 

수현이와 현수의 사이에는 자그마치 팔 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억지로 공을 차게 하는 것 외에 첫 팔 년은 수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 팔 년은 갑작스럽게 길어진 양갈래 머리와 꽃무늬 치마가 생겼고, 그때부터 이름에 대한 불만어린 한숨소리가 늘어났다.

 

머리를 털고 수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잤어? 밥은 먹었고?’

 

‘오늘 피자 먹으려고 했는데 참고 너 오면 맛있는 거 먹기로 함’

 

아영이었다.

 

수현의 머릿속에서 한숨소리가 날아갔다.

 

 

 

 

 

 

 

 

다음날은 발인이었다.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까지 한 다음 친척들이 밥을 한 끼 하자는 것을 거절한 다음에야 수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자고 싶었지만 입출금 내역을 정리해야 했기에 책상 앞에 앉아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아버지는 핸드폰이 있는데도 굳이 종이와 펜을 쓰는 수현을 보고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는 이름자도 인색하던 아버지가 보여준 모처럼의 관심에 퍽 기뻤었지.

 

장례를 치렀기 때문인지 기묘하게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잡은 펜이 아버지가 선뜻 건네준 얼마 안 되는 물건이라 더 그런지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 펜대에 금색 테가 들어간 것은 짙푸른 잉크를 컨버터로 채워 쓰는 만년필로, 대학에 들어가 기말고사에서 1등을 하자 받은 것이다.

 

그 때는 이 펜이 아주 고급품처럼, 아주 보물처럼 느껴졌다.

 

수현의 눈이 펜꽂이로 향했다.

 

검은 만년필을 받고 난 이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펜들은 가격도 색도 가지각색으로 투명한 유리몸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푸른색 얼음같은 몸체를 가졌거나 청록색 장식이 반짝였다.

 

“수현이 왔어?”

 

방문이 열리고 아영이가 다가왔다.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

 

아영이가 팔을 벌려 수현을 안았다.

 

한때는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고는 했던 이 자세는 이제 꽤 편안해서 아영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몸을 기대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려지고는 했다.

 

지금처럼.

 

“이거 너 줄게.”

 

팔을 풀고, 수현은 펜꽂이에서 검푸른 만년필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남색 잉크, 회색 잉크, 펄이 들어간 잉크들, 밝고 파란 잉크, 금속 느낌이 나는 잉크를 한아름 안겨주자 아영이는 잉크와 수현을 번갈아보았다.

 

“갑자기? 이걸 다?!”

 

“당분간 만년필은 쳐다도 안 보려고.”

 

수현은 서랍을 열고 펜꽂이에서 만년필 한 움큼을 꺼내 그 안에다 처박았다.

 

“하지만 잉크는 아까우니까. 상하면 안 되고.”

 

“잘 쓸게!”

 

아영이는 수현의 펜과 잉크를 받아들었다.

 

정리부터 하겠다며 가지만, 아영이는 그걸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기만 할 것이다.

 

그걸 두고 정리를 한 거라며 우길 것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부터 칠이 벗겨진 낡은 펜이 생기 없이 빛을 반사했다.

 

“이거 줄 테니까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무슨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수현은 펜을 부숴 버리는 대신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일도, 아직 자신에게 상처를 남겨 숨 쉬고 볼 때마다 피를 흘리게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자신이 울고 화를 내던 모든 일이 이제 자신의 마음에 작은 스크래치조차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극복하면 좋았겠지만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언젠가는 흉터가 되고 잊혀졌다가 돌아보면 또 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나중에도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만년필을 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까지 그러지는 않겠지.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망설이다가 서랍을 열고, 넣고, 닫았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나 면 먹고싶어!”

 

“어 나 며칠동안 국이랑 밥만 먹었더니 그건 좀.”

 

“국물이 싫은 거지? 내가 만들 테니까 비빔면은 어때?”

 

“계란 삶아서 넣자,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만년필을 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물 좀 올려줘, 얼음도 넣을까?”

 

만년필은 만년필일 뿐이니까.

 

 

[드레+해리] 클리셰 범벅

2020. 2. 29. 00:26 | Posted by 호랑이!!!

해리는 눈을 떴다.

 

콧잔등에 익숙하게 얹히는 무게는 자신이 아직 안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무언가 어색한 감각이 들지만 어두운 것은 익숙한 일이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머리를 박아서 터무니없이 작은 곳에 갇혔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손을 휘저어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좁은 공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좁고, 어두운 공간.

 

체념한 듯 눈을 감은 해리는 갑자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

 

버논 이모부일까? 해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모부가 할 만한 짓이라고 해 봐야 자신의 벽장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두들리가 계단 위에서 펄쩍펄쩍 뛰게 두는 정도일 거니까.

 

무언가 둔탁하고 큰 소리가 났다.

 

해리는 손에 걸리는 작은 막대를 달각달각 흔들었다.

 

할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

 

봄바르다!”

 

알 수 없는 고함과 함께 쾅,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와 갑작스레 흩날리는 먼지에, 해리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깨끗하게 깎인 잔디밭.

 

새하얀 대리석 파편이 날리고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에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스카치테이프로 고정시킨 안경을 옷자락으로 문질러 닦자 너무나도 놀란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고 단정한 모습은 마치 버논 이모부를 떠올리게 했지만 무언가가 다르단 말이지.

 

그 사람은 구덩이 위에서 해리를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눈과 떨리는 눈.

 

저 사람도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군.

 

아마도 자신이 뭔가를 또 잘못했겠지.

 

이상한 마법을 썼다던가,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던가.

 

그렇기에 애써 일어설 생각도 안 했는데 그 사람은 손수 이 구덩이 안까지 내려와서 해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뒤돌아 살펴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듯... 그러니까 자신이 본 것 중에서는 드물게 긍정적인 의도처럼 살펴보더니 떨리는 손으로 들어올렸다.

 

포터.”

 

, 선생님(sir).”

 

해리 포터?”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버논 이모부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에 허연 먼지가 묻었다.

 

어색하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든 해리는 이 사람의 얼굴이 원래 이렇게 창백한지 아니면 놀라서 이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꽉 잡으렴.”

 

해리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사람은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널찍하게 잘 깎인 잔디밭.

 

꽃향기.

 

새하얗게 조각된 대리석.

 

그 모든 것이 있는 공동묘지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크나트는 젤라토를 들고 교정을 어슬렁거렸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퍽 낯설고 그 사람들이 죄다 제 또래라는 것은 더더욱 낯이 설다.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에 안경을 낀 사람이 제 앞으로 지나가자 크나트는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인상을 콱 찌푸렸다.

 

염병.”

 

그 늙-만 아니면!

 

그리고 크나트는 무심코 생각한 늙다리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자기 취향은 자기 또래 사람이거나 한두 살 어린 쪽인데.

 

아니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야하다고 생각한 거야? ?

 

절대로 내 취향이 아닌데!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젤라토가 담긴 과자 콘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영감탱? 영감? 아저씨? 아무튼 늙 어쩌구 저쩌구는 빼고.

 

이름을 듣기는 한 거 같은데 뭐였지.

 

“-스호르 교수님.”

 

움찔.

 

크나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후다닥 대리석 기둥 뒤에 숨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교수님, 이걸 해석해봤는데요 문법이-”

 

이 부분은-”

 

질문 같은 거 하지 마라.

 

빨리 꺼져.

 

크나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을 진지하게 노려보았다.

 

빨리 꺼져라 빨리 꺼져, 꺼져꺼져꺼져꺼져.

 

그 진지한 사념에 손에 들린 젤라토가(어린아이에게 빼앗은 것이다)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크나트는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을 째려보았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잠시 고개를 들었고, 크나트랑 눈이 따악 마주쳤다.

 

그 사람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왜 나를 노려보지?’

 

그다지 필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 사람은 라틴어 수업은 물론 대다수 수업에서 1등을 차지하는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 똑똑한 학생은 교수님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녹음하면서도 저 노려보는 사람과 자신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날 노려볼 이유가 없지

 

와작.

 

크나트의 손에서 젤라토가 찌그러지며 바짓단을 더럽혔다.

 

, 차가!”

 

상처 있는 손을 거칠게 탁 털자 핑크색 깜찍한 덩어리들은 풀숲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내렸다.

 

그리고 똑똑한 학생은 문득 떠오르는 그럴싸한 가설에 교수님의 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스호르 교수님, 저 사람과는 아는 사이인가요?”

 

율리안은 돌아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질척질척하게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외에는.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겨우 외운 학생들 몇 명 외에도.

 

누구랑 말입니까?”

 

어라? 어디 갔지?”

 

학생은 별 일 아닌가보다 하고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한편, 저 먼 곳의 기둥 뒤에서는 운동량에 비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크나트가 있었다.

 

가뜩이나 불량스럽게 차려입은 정장이라 매었다기보다는 걸쳤다는 말이 올바를 넥타이임에도 잡아당기자 손 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다.

 

달짝한 냄새가 나는 손을 재질에 비해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 옷에다 마구 문지르자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비쌌을 옷의 품격이 한 단계는 더 내려갔다.

 

에잇, !”

 

애당초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라고 시작하는 불평을 하려는 찰나 크나트는 몸이 굳었다.

 

짙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녹색빛이 자신을 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

 

멈춰버린 것 같은 사람들을 두고 시간이 또 흐르고.

 

마침내 크나트가 움직였다.

 

안 따라왔어!”

 

율리안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달짝지근한 딸기 냄새가 풍겼다.

 

안 물어봤습니다.”

 

덩치 크고, 목소리 크고, 성격도 나빠 보이고.

 

게다가 힘도 세어서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무서워해 본 적 없을 것 같이 생긴 젊은이인데.

 

자신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때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따라온 것 같군요.”

 

, 아니라니까!”

 

율리안은 일부러 힘을 주어 한 발짝 탁, 소리 나게 발을 디뎠다.

 

움찔, 하고 큰 덩치가 놀란다.

 

미끄러진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어 올리면서 다시 발을 세게 콱, 디디려고 하는데 발 아래 단단한 구두가 밟혔다.

 

"...이봐 스호르 교수님."

 

실수인 척 뒤로 발을 빼려던 율리안은 흉흉한 녹색 눈을 보고서 직감했다.

 

잡아먹힌다고.

 

 

 

어느 화장품 요정의 엔딩

2020. 1. 10. 23:08 | Posted by 호랑이!!!

거짓말이지...?”

 

나는 멍하니 팩트의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난생 처음 사 본 팩트에서 나타난 내 작은 요정은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와 접점이 생기도록 도와주었고 화장으로 내가 더 예뻐지게 도와주었으며, 더 날씬해지는 방법과 더 또렷한 눈매와 더 나은 몸매를 얻게 도와주었다.

 

공부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피부가 나빠진다며 일찍 자라고도 알려주었고 시험지 풀이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면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가 피자와 치킨, 친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흔들릴 때마다 샐러드를 한 번 더 내밀며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비록 성적은 떨어지고 정말 친한 친구들은 멀어졌지만 같이 밥 먹고 과제할 친구는 많았고, 더 이상 단거리 달리기에 11초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옷을 골라도 내 몸에 맞았고 심지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선배와 사귀게 되었었고.

 

작은 성과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내 요정.

 

요정은 지금까지 무엇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별을 정복할 수 있어.”

 

요정은 기괴하게 깔깔 웃어젖히더니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고개를 홱 숙였다.

 

“100. 그 이전부터 하던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거든.”

 

? 어떻게?

 

전쟁? ? 환경오염?”

 

바보 아냐? 내가 지금까지 네 옆에서 뭘 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원반이 보였다.

 

하얗고 푸른 구름 사이에서 그것은 종말을 알리는 무언가처럼 땅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널찍한 화장대에 가득한 립스틱, 틴트, 립쿠션, 립글로즈,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프라이머...

 

겨우 저런 걸로?”

 

겨우?”

 

요정은 작은 창을 만들었다.

 

그 창 위에는 여러 뉴스 기사와 잡지, 신문 같은 것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천연+기능화장품으로 1030 女心 잡을 것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욕심이 없다

 

정규직 진입 비율은 9:1”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 17%에 불과...”

 

댓글도 드문드문 보였다.

 

요정은 그 옆에 작은 창을 하나 더 만들었다.

 

너도 곧 활용 될 테니까 보여줄게. 이 수치는 우리의 힘이야.”

 

한 쪽에서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잠시 흔들리더니 20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다.

 

우리는 작지. 지능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걸 전부 활용할 생각을 하거든. 우리 모두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

 

작은 창이 하나 더 생겼다.

 

180 정복할 수 없음

150 주의 요망

130 안전

 

이건 너희 수치야.”

 

우선 점수가 50 올라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크기 점수라고 했다.

 

그 점수는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80... 100... 117... 125... 128.... 130...

 

느려지는 속도에 애가 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속도라면 180은 안 되겠지만, 제발...

 

그러나 숫자는 135에서 그쳤다.

 

“...이것밖에 안 돼?”

 

허망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내 요정이 깔깔 웃었다.

 

이만하면 많은 거지!”

 

한 쪽은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 그 쪽을 깎아내리고 괴롭히는 데 열정을 쏟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꾸미는 데에 불필요하게 신경쓰잖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수술하면 마치 고장난 물건을 대하듯이 고쳤다고 하고!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진 거 알겠어?

 

고등학생 때까지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했다며? 지금 네 성적은 어때? 만족스러워?

 

네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느껴져?

 

아니겠지.”

 

요정이 웃었다.

 

눈가에 그은 선이 짝짝이인지 아닌지, 나시를 나같은 몸에 입어도 되는지, 화장품을 잘 안 쓰게 되면 괜히 돈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네가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지.

 

A는 거울을 보았다.

 

요정은 멋대로 떠들었다.

 

거울 위에는 수많은 플라스틱들이 반짝거렸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빛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얼마 전까지라면 예쁘다고 했을 그러한 장면이다.

 

사실은 지금도 예쁘다고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그 감동은.

 

내가 잘만 하면 얼굴과 미래, 주위까지 바꾸어줄 거라고 믿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는 예전만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기이함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의외로 외계인의 말이었다.

 

“...네가 그대로였다면, 저 수치에 1이 더해졌을 텐데 말이야!”

 

“1? 10도 아니고 1?”

 

“70억 중에서 한 사람이 1이라는 숫자를 더 올릴 수 있다면 대단한 거지.”

 

나는 숫자를 돌아보았다.

 

135

 

70억 명이 모여서 만든 135라는 숫자에 내가 1을 더하는 인간일 수 있었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너도, 사람들도 다 다시 활용될-”

 

찌익.

 

내 칼이 외계인의 날개를 찢었다.

 

눈썹을 다듬을 때 썼던 칼이 날개를 뚫고 벽에 박혔다.

 

이 절망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상하게 내 의식이 또렷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멀어졌던 친구 중 하나였다.

 

여보세요?”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너 괜찮아? 너 자취방이 나랑 가깝지, 내가 갈까?]

 

아냐, 아냐, 내가 찾아갈게.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다 가방을 찾았다.

 

핸드폰과 작은 지갑 하나만 넣어도 꽉 차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방이라 이걸 멜 때면 쿠션과 립스틱과 또 무슨 자질구레한 물건들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야 했다.

 

가방을 뒤집어 안을 비우고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외계인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제대로 주머니가 달린 운동복 바지에 핸드폰을 밀어 넣고 A는 집을 나섰다.

 

이 세상의 어디에선가 띵, 소리가 나며 1351이 더해졌다.

 

.

.

 

.

.

.

 

.

.

.

.

 

그리고 그 소리는 몇 번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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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휴가

2019. 12. 23. 14:33 | Posted by 호랑이!!!

율리안은 팔을 더욱 길게 뻗었다.

 

손 끝이 잠긴 바닷물은 따뜻해서 나른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하얀 눈도 내리고 길도 얼고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의 목 깃을 세우고도 한없이 웅크려 다닐 텐데.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보내는 12월이라니.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뻗자 쟁반 위의 푹 익은 과일과 치즈가 닿았고 샴페인이 담긴 글라스의 단단한 다리가 만져진다.

 

파도가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타원형으로 둥그스름한 포도알은 이리로 데굴데굴 굴러갔다가 또 저리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저 음흉한 남자까지도 느긋한 기분인지, 평소라면 몇 번쯤 손을 댔을 법도 한데 오늘은 겨우 태닝 오일만 제 몸에 문지르고 갔다.

 

율리안은 포도알을 입에 물었다.

 

자신의 입에는 지나치게 달고 무른 것이 향긋하게 터지며 태양빛에 데워진 열기를 퍼뜨린다.

 

배 위에서 나른하게 엎드려 있자, 크나트는 챙 넓은 여름용 모자를 얼굴에 덮어주고 갔다.

 

끊임없이 나직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향긋한 과일 향을 맡으며 있자니 이 곳이 지상낙원일까 싶어진다.

 

이미 이대로 몇 시간이나 지나버렸는데... 일어나서 뭐든 해야 하는데... 책이라도 읽거나...

 

하지만 머릿속이 평온하게 잠들어버려서 도무지... 도무지 일어날수가... 아아아..... 이것도 다 저 흉악한 자의 농간임이 분명...

 

물고기가 툭툭 건드리고 가는지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살살 저어서 쫓았지만 잠시 사라질 뿐 이내 다시 다가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다.

 

손가락을 물고기들한테 잠시 맡겼다가 잠을 애매하게 쫓는 것처럼 느껴지자 아예 물 밖으로 뺐다.

 

바닷물에 젖은 손가락은 약하게 당기는 느낌을 주며 말랐다.

 

아마 소금기 때문일 테지, 아니면 물 때문이거나.

 

율리안은 무심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느껴지는 짠맛에 몸을 일으키고 샴페인을 마셨다.

 

샴페인에서는 약하게 단맛이 났는데 입안의 소금기와 합쳐지니 얼마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손끝을 물에 참방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가면 입가를 타고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다시 샴페인.

 

소금물.

 

샴페인.

 

달링, 이상한 거 먹지 마.”

 

지지야 지지.

 

크나트는 어린 아이에게 하듯 얼렀다.

 

그 목소리조차 반쯤 잠든 채 하는 것 같아서 율리안은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 의미가 알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지 알지 못한 채.

 

크나트의 손이 율리안의 안주 접시를 더듬다가 치즈와 포도 한 움큼을 가져갔다.

 

팽팽하게 부푼 포도 껍질이 툭 툭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처럼 따뜻한 바람이 잎 넓은 나무를 흔들었다.

 

크나트는 눈을 떴다가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자 몸을 일으켰다.

 

한 상자 가져왔던 술은 벌써 한 켠이 다 비어 있었고, 그래서 크나트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두 상자는 더 보내달라고 했다.

 

샴페인-은 이미 충분히 마셨으니 부드러운 맛의 와인으로.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맛을 모르니까 적당히 추천을 받거나-

 

이런 때 할아버지가 그랬었지.

 

여차하면 제일 비싼 것으로 사면 된다고.

 

먼저 일어난다? 달링은?”

 

조금만 더 있다가...”

 

먼저 갈테니 이따 부르면 와야 해.”

 

다시 율리안의 손이 흔들렸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크나트는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섬으로 발을 딛자 푹신하고 깨끗한 모래에 발이 푹 들어갔다.

 

잘 말린 나무 토막이 안으로 굴러들어간다.

 

둥글둥글하고 커다란 덩어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쌓이고 크나트는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3

 

2

 

1

 

Fire!

 

자그마한 성냥개비가 안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불이 후루루 일어나며 그릴을 벌겋게 데우고 크나트는 미리 준비한 고깃 덩어리를 불 위에 척 척 얹었다.

 

큼지막한 것이 익으며 육즙을 뚝 뚝 떨어뜨렸고 그 때마다 아래에서는 치이익 소리가 났지만 이내 물기는 증발하여 소리 역시 사라진다.

 

고기 외에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무엇이든 얹고 잘 손질한 흰 살 생선 한 토막도 위에 얹혔다.

 

껍질이 파삭하게 오그라들며 생선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아스파라거스, 피망, 양파 썬 것도 얹고 마늘도 후두둑 올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인가 어두워진 하늘에 연기가 어른어른 올라간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공기 속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지고.

 

크나트는 율리안을 불렀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2세즈] 뜻밖의 수출품

2019. 12. 13. 19:26 | Posted by 호랑이!!!

빵도리 안녕!”

 

안녕! 놀러왔어!”

 

아르카디아는 누가 감히 그런 이름으로!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시종도 없이 에샤드카와 일레하 쌍둥이가 양 손에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오더니 방 가운데 앉았다.

 

여간한 아이라면-혹은 어른이라도- 들 수 없는 무게의 상자는 땅에 내려놓자 묵직하게 흔들려서 아르카디아는 기대어린 눈으로 냅다 바닥에 쪼르르 뛰어갔다.

 

쌍둥이는 고작 몇 년 새에 또 훌쩍 커버린 아르카디아의 손을 잡고 바닥에 앉혔다.

 

이거 내 거야?”

 

, 이건 네 거야.”

 

아빠랑 아빠랑 일레하가 만들었어! 그래서 가져오는 건 내가 했다?”

 

상자를 열면 에셀리온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커다란 나뭇잎의 잎맥만이 엷게 남아서 눈가에 대어도 건너편이 훤히 비쳐 보인다.

 

그리고 과일을 듬뿍 사용한 과자, 향이 나는 나무와 비단천을 사용하여 만든 장난감, 무엇이 자라는지 모를 커다란 화분은 도자기였고 빵돌이는 모르는 무슨무슨 기법을 사용하여 새겨진 그림은 거대한 용과 과일 나무다.

 

거기에 깃털이랑 가죽이랑 육식동물의 이빨 같은 것이 나왔고 에샤드카는 내가 찾은 거야! 라며 활짝 웃었다.

 

호기심어린 손이 상자를 휘젓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금방이라, 아르카디아는 일레하가 에샤드카를 쓰다듬는 것과도 같이 손에 묻은 흙을 벨벳 바지에다 문질러 닦았다.

 

세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그러시면 안된다며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에는 셋뿐이었고 또 혈기왕성하였기에 엎치락뒤치락 장난질까지 쳐서 우아하게 지어진 반바지는 회생 불가로 보일 정도로 온갖 이물질이 묻고 구겨졌다.

 

으아아아!”

 

좀 더 괴로워해.”

 

이 정도는 괜찮지?”

 

그리고 쌍둥이 둘에게 깔려버린 빵돌이는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위에서 일레하는 히죽히죽 웃으며 빵돌이를 내려다보았고 에샤드카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주어 무게를 분산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다 돌연 빵돌이의 발이 웬 상자를 걷어차 균형을 잃은 에샤드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야야야...”

 

나 방금 뭐 찼는데? 걷어찼는데?”

 

빵돌이가 벌떡 일어나자 일레하는 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에샤의 옆으로 구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걷어찬 물건은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일레하의 능력으로 눈에 띄지 않게 들여온 상자는 빵돌이도 들 수 있었고 흔들었더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도 내 거야?”

 

아빠 방에서 몰래 갖고 왔어.”

 

상자는 귀한 것, 좋은 것을 다 보고 자란 세 황자의 눈에도 귀해 보였다.

 

백단목을 말리고 잘라 만든 모양은 얼핏 수수해 보였으나 장인의 손길로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잠금쇠의 모양은 잘 보았더니 긴 꼬리를 가진 용인데다 엷게 신성한 문양이 새겨져서 아이들 손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 종류로.

 

어른의 물건이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일레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 아이는 선물상자를 열어볼 때보다 가까이 둘러앉아서 몸을 기울였다.

 

외국으로 수출도 잘 안 하고, 성인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줄 수 없게 금지된 과자가 있어.”

 

그런 게 있어?”

 

거기에 에샤드카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정말 달콤한 맛이 나는데 딸기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과일의 맛도 안 나. 심지어는 꿀도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말이야. 폐하 아빠한테 올라온 보고를 몰래 봤어. 이걸 먹으면 잠을 안 자도 힘이 나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몸이 따끈따끈해지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한 번 본 글도 줄줄 외울 수 있대.”

 

약 아니야? 정말 과자야?”

 

나 그거 본 적 있어. 새까맣고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무지무지 좋은 냄새가 났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은 물건이니까 우리한테는 안 주는 것 같아. 폐하 아빠랑 아빠는 매일 밤 새니까 매일 먹는 게 아닐까?”

 

세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범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으로 일레하는 상자에 손을 대었다.

 

“...연다.”

 

아이들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용의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상자의 뚜껑은 가볍게 들렸고 천천히 일레하가 여는 것을 견디지 못한 빵돌이가 홱 열어젖혔다.

 

뚜껑이 넘어가며, 안의 조그만 상자들이 빛에 요란하게 반짝였다.

 

검은 바탕에 금색 띠를 두른 것, 은으로 무늬를 양각으로 음각으로 새긴 것들, 자개 장식이 달린 것, 진주나 산호가 박힌 것, 금과 은을 녹여 그림을 그린 것까지 호사스러운 작은 상자들이 정갈한 위에는 몇 겹으로 접힌 서신이 있다.

 

북쪽의 자비로운 빛, 생명의 지배자, 모든 풍요로움을 누리시는 분(...중략) 에셀리온 폐하께.

 

남의 편지는 보면 안 돼. 나중에 갖다드리자.”

 

우리는 지금 남의 상자를 가지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일 없이 다시 상자로 눈을 돌린다.

 

으리으리하다-”

 

얼른 열어보자.”

 

아이들은 제각기 하나씩 들고 상자를 열었다.

 

 

 

 

 

 

 

 

 

 

 

 

 

 

 

 

 

 

 

 

 

 

 

신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인간을 모두어 기르니 그 자는 대륙의 황제가 되었다.

 

그 신화는 사실이고 황제의 자부심이었기에 집무실이며 너른 복도의 벽에는 황제에 대한 이야기와 신에 대한 그림과 조각이 있었다.

 

웅장함은 그 사람을 닮아서,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가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깨진 접시와 사과를 건너뛰고 다가온 아르데스는 팔을 높게 든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이상한 가죽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즙액 같은 것.

 

인공적인 손길이 틀림없이 들어갔을 거대한 진주 다발.

 

길쭉하고 매끈한 몸체가 투명하여 유리나 보석인가 싶었으나 흔들었더니 고무처럼 탄력 있게 움직이는 것.

 

아르데스는 심호흡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썼느냐.”

 

그 안에는 여간해서 듣지 못했던 아르데스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우리 엄청 나쁜 일 했나봐.

 

엄청 큰일 났나 봐.

 

아이들은 움츠러들었다.

 

썼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말 하라 재촉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비죽비죽 비어지는 입술에 울먹이기까지 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끅, , ! !”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레하가 사으쟈를-”

“-아빠 방에으흑!”

잘못택.... 으흐어엉!”

 

잠깐, 울지 마라.”

 

사으, , 아아아아!”

으앙-”

무서어!!!”

 

괜찮아, 괜찮다니까!”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아르데스는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겠다 혼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야 했다.

 

간신히 달래고 황제의 몸으로 손수 마실 것을 가져오니 아이들은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면서 울음을 그쳤다.

 

다시 물어보겠다. 썼느냐.”

 

시무룩해진 에샤드카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

 

네라고?!”

 

에샤드카가 덜그럭 움직임을 멈추자 아르데스는 급히 목소리를 낮춰 아니다, 혼내는 거 아니다, 갑자기 목에 삑사리가 난 것 뿐이다 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이를 달래는 아르데스의 눈에, 일레하의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울면서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저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기에는...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끈적끈적한 액이 흘러나온 가죽 주머니가.

 

아르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 그 액을 손가락에 비볐다.

 

“......이건 다 무엇이더냐.”

 

과자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게 들어있었어요.”

 

아빠 방에 있길래 가져와봤어요.”

 

먹어봤는데 안 달아요. 이상한 맛 나요.”

 

빵돌이가 상자를 밀어주었다.

 

너희들, 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남의 물건을 막-”

 

찬란한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달그락.

 

딸깍, 찰그락, 딸깍딸깍.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사라락.

 

출렁출렁 끈적끈적 미끈미끈.

 

“...?”

 

“..., 막 들어가고 하면 안 되지. 막 가져가거나 열어보거나 그러는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빵돌이 너도 삼촌 물건을 가지고 놀면-”

 

딸깍.

 

위이이이-

 

딸깍!!!!!

 

덜그럭덜그럭덜그럭덜그럭!

 

놀면-?”

 

“...무슨 물건인지 먼저 물어보고 허락을 구한 다음에 했어야지. !”

 

상자는 아쉬운 듯한 손길로 닫혔다.

 

아이들은 상자 뚜껑에 가려져 아르데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래 보였다.

 

나중에 삼촌이 편지 한 장 써 줄테니까 가져가라.”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에샤드카가 아르데스의 팔에 꽉 매달렸다.

 

아빠랑 아빠한테 말하지 말아주세요!”

 

일레하는 머뭇거리다가 어깨에 매달렸다.

 

아르카디아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아르데스의 다리를 잡았다.

 

세 명 정도야 매달려도 꿈쩍 않았지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혼내라고 쓰는 편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서야 아르데스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

 

삼촌-”

 

땅에 내려서면서 아이들이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상하게도 호기심 같은 것이 아이들의 눈에 담겨 있었다.

 

여기서 뭔가 더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나? 하는 의아함에 아르데스는 왜 그러느냐 하는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저 상자에 있는 거 뭐예요?”

 

금방 후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이어 도망갈 길을 찾다가.

 

아이들이 그 흉한 것들을 쥐고 사람들한테 물어볼 상상을 했더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르데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 그거 곰방대다.”

 

곰방대?”

 

아르카디아가 물었다.

 

담뱃대?”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샤드카는 무어라고 묻는 대신에, 상자 중 하나를 꺼내 탱글탱글 신기한 감촉인 것을 찾아 아르데스에게 내밀었다.

 

한번 써 봐요-”

 

눈을 질끈 감고 아르데스는 손을 뻗어 대충 밀어냈다.

 

나는...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

 

아빠도 흡연자 아닌데, 하는 어린 조카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르데스는 나라 어딘가의 화산을 폭발시켰다.

 

물건 간수 잘 하란 말이다, 에셀리온!!!

 

 

 

물론, 물건은 사마낙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아르데스가 이를 알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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