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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가르드 드레이크] 사마낙 일상로그

2022. 3. 15. 00:04 | Posted by 호랑이!!!

털이 길고 근육이 단단해서 날렵하다기보다는 육중하다는 수식이 어울리는 말.

 

고삐를 당기면 사납게 발을 치켜들고 투레질을 하다 분에 못 이기는 것처럼 발을 내려찍는다.

 

그 사나운 울림에 나뭇가지마다 맺힌 고드름이 후두둑 떨어지고 땅에서 자라난 서리는 짓이겨진다.

 

그 말 위에서 두껍고 커다란 망토를 두른 기사는.

 

사마낙은.

 

그 사나움이 못내 흡족한 듯 더운 기가 물씬 오르는 목덜미를 두드려주었다.

 

말을 멈춘 아슬아슬한 절벽 끝에서 시선을 아래로 두면 새카만 바다가 아우성친다.

 

무거운 망토조차 들썩일 정도로 날카롭게 부는 바람에 검은 파도는 검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조각나 부서졌다.

 

하늘조차도 희끄무레하게 구름이 낀 곳.

 

비현실적으로 흑과 백 뿐인 경치.

 

녹색과 노란색과 붉은 빛들로 따사롭고 풍요로운 환경에 잠겨 있는 것도 좋았으나 때로 사마낙은 박할 정도로 인간에게 냉혹한 이런 곳이 그리웠다.

 

마치 숨겨두었던 본성을 풀어놓듯이 부러 거칠게 고삐를 당기자 아직 야생성을 잃지 못한 이 말은 등 위의 포식자를 위협하듯 앞발을 들었다가 뒷발질을 하며 날뛰었으나 결국 식식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분풀이를 하듯이 땅을 내달렸다.

 

거칠고 각박한 땅에 자갈돌과 나뭇가지가 우두둑 우두둑 부러지고 육중한 몸이 아무렇게나 던진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뛰었다.

 

그 날뛰는 위에서 겨우 다리 힘만으로 버티며 사마낙은 온 몸에 갈 데 없는 열이 솟는 것을 느꼈다.

 

열이 심장을 돌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고 등자를 당긴다.

 

마술처럼 가볍게 활을 잡고 낡은 과녁에다 화살을 쏘았다.

 

파공음을 내는 창은 한때 그가 가장 서툴게 다루던 것이었으나 이제 손 안에서 묘기에 가까울 정도로 능숙하게 돌아간다.

 

이제는 활이나 도끼 따위보다 석궁과 화승총을 쓰는 세상임에도 때로 사마낙은, 쇠 부딪치는 소리가 그리웠다.

 

때로 그와 합을 맞출 기사들이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로 나가서 자신이 어릴 적 살던 곳을 살펴보면, 아이들은 추위에 떨지 않는다.

 

배를 곯지도 않고, 숨지도 않고, 제가 어릴 적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기름진 음식을 입에 넣는다.

 

그런 평화와 사치스러움을 떠올려보자면.

 

이 정도 그리움은 자신이 치를 것 중에서도 아주 소박한 댓가일 것이다.

 

 

크나트 리비오 율리케

2022. 3. 11. 10:05 | Posted by 호랑이!!!



[크나트 리비오 율리케/마피아/TM]


2017. 7. 10. 2:21 ・




" 이해해, 그렇지만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어서 어쩔 수 없구나 "






인장
  

(@qkfnqkfn95님 커미션입니다)

이름 : 크나트 리비오 율리케 (Knaut Livio Ulrike)
나이 : 47
키 / 체중 : 185cm/과체중



외관
피부는 여름의 이탈리아에 어울리게 잘 태운 연한 갈색이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짙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보이도록 깎아 왁스 등으로 정리한다. 눈썹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고 짙은 편이라 정기적으로 보기 좋게 다듬는다. 속눈썹은 긴 편이고 속눈썹 아래 눈은 초록색과 파란색 사이의 밝은 색이며 다소 바랜 듯한 색의 녹색에 가깝다. 눈 자체는 큰 편이나 꼬리가 처져 있고 날이 밝을 동안은 반쯤 감고 있어서 졸려 보일 것이다. 턱은 다소 각져있고 왼편에 흉이 한 가닥 있는 입술은 얇은 편인데 웃는 상이다. 수염은 입 주위에서 귀 아래까지 연하게 나 있다. 몸은 얼핏 보았을 때는 그렇게까지 중량이 나갈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혹은 몸을 만져보면, 제법 단단한 근육이 보일 것이다. 보기 좋은 역삼각형 몸매는 하얀색 셔츠, 연한 녹색(간혹 파란색) 손수건을 포함한 검은 쓰리피스 정장으로 감싸고 있고 옷은 전부 주문품이다. 어깨나 다른 부분에 맞춰 일반 셔츠를 입으면 가슴쪽 단추가 벌어지거나, 끼기 때문에. 구두 역시 검은색이고 양말은 회색, 벨트는 가죽 제품이라 비를 맞는 것을 싫어한다. 그 외 시계나 반지 같은 악세서리는 하지 않는다. 손은 제법 큰 편이고 화상 자국이 부분부분 남아있다.



성격
키워드1 : 다정
되도록 남에게 다정하게 해주려고 한다. 소설 대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 중에 하나라 어린 여자아이가 꽃을 팔면 한 다발은 반드시 사주고 노인이 길을 걷고 있다면 반드시 함께 길을 건너 준다.

키워드2 : 깐깐함
그런 다정함도 만난 사람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을 때만이다. 어떤 관계로든 깊게 얽히게 되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을 것인지 하나하나 다 재어본다. 비단 이런 것은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은 아니라 융통성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적어도 조직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기준을 가지고 움직인다. 결벽증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같은 기준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뿐.

키워드3 : 자부심과 충성심의 혼합물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다면 끝까지 해낸다. 어쩌면 깐깐함이나 완벽주의 같은 단어가 더 어울릴 수 있으나 크나트에게 조직에 관한 것은, 조직에서 맡겨지는 일은 자부심을 준다. 덕분에 자신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도,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조직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싫어한다.

키워드4 : 냉정함
가장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칼같이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다. 현재 가장 원하는 것이 조직의 안녕일 뿐. 길 잃은 아이를 만나 한참이나 예뻐하다가도 조직에 관련되어 일이 생기거나, 그 아이가 조직 쪽으로 나쁘게 관련된 아이라면 그 자리에서 총을 꺼내 쏠 수 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소속
마피아



기타
한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식사 전, 취침 전에도 꼬박꼬박 기도를 올리고 십계와 말씀에 따라 선량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그러나 물건의 유통경로 중간에 성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곧바로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착실하게 조직에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마피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자경단 소속이었다. 할아버지 아래에서 총을 쏘는 법이라던가 암묵적인 규칙 등을 배웠으며 할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현재 조직에 몸담게 되었다.
술도 담배도 좋아하지 않는다. 약도 좋아하지 않는다. 총은 잘 쏘지만 사격도 안 좋아하고 좋아하는 거라고는 운동 뿐이라 주머니에는 여차할 때 사용할 주문제작한 너클이 있다. 너클에는 꽃 없이 잎사귀만 자란 가지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맞으면 많이 아프다. 너클로 때리면 뼈 정도는 부러뜨리지만 너클 없이 맞아도 아프다. 되도록 총을 사용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너클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자라난 마을은 포도밭이 있는 바닷가 작은 마을. 어릴 때는 매일같이 수영했다.
가끔 놀라면 욕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주머니 안에 희석한 플레이용 미약이 있다.


선관: X



선관 동시 합격 여부
O / X



성향
TM


캐릭터 선호 / 기피 플레이
선호 : 약물, 착의 상태의 애무
기피 : 스캇 골든 더티플 고어 피어싱 롤플레이 스팽킹

오너 선호 / 기피 플레이
선호 : 약물 도구 본디지 요도플 산란
기피 : 스캇, 골든, 더티플, 고어, 피어싱, 스팽킹, 강간시키기 전에 합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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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꿈

2022. 3. 4. 01:19 | Posted by 호랑이!!!

손톱 꿈은 목표에 관한 꿈이래.

 

그렇게 말하며 AB의 손을 잡았다.

 

나중에 뗄 때 깔끔하라며 베이스를 바르고 색이 예쁘게 나오라며 흰 색도 한 겹 발랐다.

 

뭐야, 이게.”

 

으레 그 손톱은 지나치리만큼 과하고 화려했기 때문에 B는 완성한 것을 보고는 투덜거리곤 했으나 A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잘 보고 기억해둬. 길한 꿈을 꾸게 될 거야.”

 

그 위에는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색을 얹는다.

 

어른스럽게 누드톤, 열정을 나타내는 거라며 다홍색, 살짝 처지는 기분이라더니 펄이 잔뜩 들어간 남색.

 

이거 내 옷이랑 안 어울리지 않아?”

 

편안함과 기능성뿐인 옷차림에 화장기는커녕 장신구조차 없는 얼굴로 B가 항의했으나-

 

하지만 오늘은 민트색 기분이니까!”

 

이번에도 역시 먹히지 않았다.

 

“...내 손톱 아냐?”

 

그리고 오늘은 연한 청록색을 칠했다.

 

그 위에 가짜 진주를 얹고.

 

또 위에 파스텔 꽃들을 올리고.

 

거기에다 반짝이는 큐빅들을 뿌리고.

 

마지막으로 플라스틱 나비날개를 붙여놓았다.

 

과해!”

 

그렇지만 예쁜 것만 올렸거든? 진짜거든?”

 

B가 펄쩍 뛰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A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쁜 거랑 예쁜 걸 더하면 완전 예쁜 거!”

 

...라나.

 

손톱이 나오면 목표에 관한 꿈이라며? 과욕을 조심하라는 메시지 아니야?”

 

아니얏!”

 

반쯤 괴성으로 대꾸하던 A는 잠시 완성한 손톱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

 

“...어차피 과욕은 조심해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합리화 하지 말고.”

 

손을 말리느라 쫙 편 채로 내려놓자 A가 초콜릿을 하나 까 물려주었다.

 

네모난 것을 깨물자 말린 딸기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씹혔다.

 

맛있으신가요?”

 

예에.”

 

손을 움직여도 매니큐어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다린 다음, 재료를 정리하려는 A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나도 해 줄게.”

 

.”

 

B는 아까 A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베이스를 발랐다.

 

색이 잘 나오라고 하얀색을 한 번 발랐다가 제 손톱에 바른 것과 같은 연한 청록색을 들었다.

 

몇 겹이나 매니큐어를 바를 때는 한 겹씩 마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구나.

 

그 긴 시간 동안 잘라둔 스티커들을 주르르 훑어보다가 금박이 들어간 것을 골라 조심스럽게 얹었다.

 

반짝이는 입자들을 조금 뿌리기도 하고.

 

큐빅도 하나 얹을까? 그것까지 하면 너무 과한가?

 

내 손톱이 이것저것 많이 있으니까 A 손톱은 심플하게 하트만 하나 더...

 

핀셋으로 커다란 하트를 집어들던 B는 문득 손 안이 미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한참 자기 손톱에 이것저것 얹고 있는데도 아래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A가 보였다.

 

오히려, 필사적이라고 할 수준으로.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진짜 바보 아냐.

 

덩달아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정말 어이가 없어...!

 

더워지는 기분이었지만 차마 손부채질조차 할 수 없었다.

 

B는 괜히 손에 집중한다며 빨간 하트 모양의 작은 반짝이를 하나하나 핀셋으로 집더니 결국 청록색은 보이지도 않게, A의 손톱에다 빨간 비늘을 잔뜩 돋워놓았다.

 

이런데 내가 어떻게 손톱 꿈을 꿔?

 

네 꿈이나 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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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아...”

 

프시케는 자리에 드러누워 끙끙거렸다.

 

영국이니 약이며 처치에는 돈이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낫는 것에 시일이 달라지지는 않잖아.

 

비록 골절은 아니었으나 염좌며 상처 등등이 제법 있다.

 

이렇게 다친 이유?

 

최근 학생들끼리 팀을 짜 뱀파이어를 잡을 일이 있었다.

 

일부는 건물을 수색하고 일부는 문 앞에서 대기, 그리고 아주 일부는 멀리서 저격을 하기로 한 그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뒷문으로 도망쳐 나와 마라차에게 달려들어야 했던 그 뱀파이어는 창문으로 도망쳐 나와 하필 프시케에게 달려들었다는 점이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프시케는 거실로 옮겨진 침대에서 상체를 세웠다.

 

누워 있어.”

 

마라차의 양 손에는 물건이 주렁주렁 들려 있었다.

 

우선은 손부터 씻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은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시리얼과 빵은 찬장에, 환기를 시키며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밀대로 바닥을 밀고... 그릇을 설거지도 하고...

 

배고프지? 저녁 뭐 먹을래?”

 

마리, 아까 점심 먹고 사과주스 먹였잖아.”

 

한 개밖에 안 먹었잖아?”

 

누가 들으면 한 조각인 줄 알겠네! 사과 하나를 다 깎아 체리랑 파인애플까지 넣어 갈아 먹였으면서!

 

이 아니라 한 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녁은 채소 위주로 먹을 거야.”

 

과일이라던가, 익힌 아스파라거스, 오리나 생선 조금을 곁들이는 정도는 괜찮겠지.

 

아예 점심 먹고 간식으로 해 준 그 음료만 조금도 되지 않을까?

 

채소오?”

 

누가 봐도 떨떠름하다는 게 노골적인 표정으로, 마라차는 프시케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쟀다.

 

아파서 이러는 거 아니야. 하지만 마리,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 그렇게까지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나도 입맛도 없고...”

 

“...그래, 입맛이 없구나.”

 

알아듣는 건가? 프시케는 쾌적한 방 안에서 희망에 찬 눈으로 마라차를 올려다보았다.

 

, 그러니까 많이 차리지 말고...”

 

이것저것 만들어 볼 테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

 

...못 알아들은 거 같은데? 못 알아들었는데?

 

저 문장에서 건진 게 고작 입맛이 없어뿐인 거야!?

 

, 잠깐...!”

 

금방 올게! 라며 마라차는 주방으로 갔다.

 

뭘 만들어도 조금만 먹어야지! 라고 결심했건만.

 

샐러드 파스타, 붉은 살을 가진 생선 카르파초, 갓 발아한 새싹이 들어간 샐러드, 납작하게 튀겨 시즈닝을 뿌린 건두부, 체리향이 나는 셔벗...

 

마지막으로는 향신료를 조금 뿌린 커다란 미트파이까지, 요리과정을 잘 모르는 프시케가 봐도 전부 기합이 팍팍 들어간 음식 뿐이다.

 

... 이 유능한 바보 같으니...

 

근 사흘 동안 프시케는 깨끗하고 향긋한 집안에서, 몸을 씻을 때를 제외하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한 채였다.

 

아니 걸음이 다 뭐야.

 

밥조차도.

 

, 프시케, -”

 

“........”

 

물 마시게? 머리 받쳐줄게.”

 

나 그렇게까지 중환자는 아닌-”

 

말하면 사레들릴거야, 자 조금씩 마셔봐. 빨대 줄까?”

 

숟가락은커녕 손가락까지도.

 

채널 바꾸게? 이제 다큐멘터리 시작할 때니까 그걸로 할게.”

 

페이지 넘길게. 다음 책은 뭘로 할까?”

 

프시케는 위기감을 느꼈다.

 

빨리 나아야 한다.

 

빨리 낫지 않으면, 자신은 옷을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는 것까지 까먹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사람 보살피는데 천부적인 멍청이...!

 

이게 다 그 뱀파이어 때문이다.

 

아니, 그 뱀파이어가 뒷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나올 것을 계산하지 못한 팀 탓이다.

 

...그 뱀파이어는 그러니까 왜 뒷문으로 나오지 않은 거야!

 

그 뱀파이어의 지능을 너무 높게 평가한 팀 탓이야.

 

아무튼 뭐든 그거 때문이야!

[re:심장에 피는 꽃/마라차&프쉬케] 연료 공급

2021. 12. 25. 03:32 | Posted by 호랑이!!!

솜사탕.

 

핫 초콜릿.

 

바나나 스플릿.

 

와플에 사과잼과 시럽.

 

더블 마요네즈 타코야끼.

 

사과와 바나나를 간 과일 주스.

 

여러가지 채소와 쇠고기를 넣은 타코.

 

두툼한 빵에 머스터드, 케첩을 듬뿍 친 핫도그.

 

한국식으로 튀긴 어포와 매콤한 소스를 친 감자튀김.

 

생크림 바나나 크레페에 초콜릿 시럽과 아이스크림, 웨이퍼 과자 추가.

 

어딘가의 메뉴판 같은 이 목록은 한 손에 쇼핑백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든 어느 헌터의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들이다.

 

식도락 여행이라도 갔느냐고 의문이 들 법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손에 들린 쇼핑백에는 과자나 특산물 대신 하나도 빠짐없이 여성용 옷이 들어 있었다.

 

-, 이거 어때?”

 

우이엥...”

 

몇 번 웅얼거리다 마라차는 박수를 보내며 그 박수가 끝나기 전에 입 안의 초콜릿시럽과 바나나를 맹렬하게 삼키려고 노력했다.

 

옷 파는 가게에서 음식이라니 점원들이 말릴 법도 한데 이 거대한 쇼핑백과 또 쌓일 쇼핑백 더미가 그들의 눈이라도 가린 모양이다.

 

혹은 입은 사람이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손을 저을 때마다.

 

경쾌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걷고 움직이고 숨을 쉬는 그 모든 때마다 이 평범한 진열장 앞이 잘 꾸며진 화보집의 한 페이지가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느 장신구보다 빛나는 그 머리카락은 청회색 겨울 코트 위에서 구름같이 흐트러졌고 빨간 머플러 위에서는 잘 만들어진 목걸이처럼 흘러내렸으며 눈동자는 폭신한 모자 아래에서 은으로 주조한 종처럼 반짝였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트리며 녹색과 빨간색의 향연 사이에서 마치 눈의 정령처럼 도드라지는 그 모습이라니.

 

웃을 때면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 복숭앗빛으로 시선을 끄는 입술, 햇살이 내리쬐는 낮이면 잘 다듬어진 보석처럼 빛을 퍼뜨리는 미소.

 

검은 털을 댄 장갑 안의 손까지.

 

일반적인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눈을 떼지 못할 것이고.

 

프쉬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고.

 

저 손이 다정한 걸 알고 있다면 놓지 못하겠지.

 

그리고 저 손을 알고 있는 자로서, 마라차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프쉬케한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가가서 어깨에 머리라도 올려놓고 허리에 팔을 감아 몸을 붙이고, 손바닥에 뺨을 비비고 싶다.

 

하지만 아직 한창 쇼핑하는 중이고... 밖이니까...

 

직원이 내민 팔 위에 파카 한 벌을 올리고 이번에는 이거라며 프쉬케는 치마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보이네.

 

시무룩하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얇은 과자 껍질을 덥썩 물어뜯자 그 안을 채운 아이스크림이 채 녹지도 못하고 고깃점처럼 와일드하게 뜯겨 나왔다.

 

 

 

 

 

 

그리하여 장장 한 시간이나 더 지나고서야 둘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배고프지? 가는 길에 뭔가 먹고 갈까?”

 

샐러드, 파스타, 샌드위치 같은 것을 나열하며 프쉬케는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 좋아? 안 고르면 내 멋대로...어머, 마리?”

 

어째 조용하다 싶더라니 마라차가 없다.

 

그 가방을 싣는 것도 일일 텐데, 얘가 그새 어딜 갔지?

 

프쉬케는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기울였고, 갑작스레 뻗은 팔이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려들어가다시피했다.

 

, 래라!”

 

어깨를 찰싹 때렸는데도 이 도베르만 같은 헌터는.

 

다시 말해 개 같은 남자친구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더 꽉 끌어안는다.

 

마리, 피곤했어? 너무 끌고 다녔나?”

 

뒷좌석을 힐끗 넘어다보자 많은 양의 쇼핑백들이 엉망으로 들어차서, 자칫하면 쏟아질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헌터는, 이마를 프쉬케의 쇄골에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헌터면서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야~ 라며 프쉬케는 마라차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니까, 충전해줘.”

 

충전?”

 

이렇게 끌어안고? 이런 거 말하는 거지?

 

그 충전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프쉬케는 깔깔 웃었다.

 

때마침 밖에서는 새로 캐롤이 흘러나오려는지 종소리가 들렸으며.

 

그 웃음을 기점으로, ‘기다려가 끝난 개처럼.

 

마라차가 달려들었다.

 

 

아이고 내 뼈 다 삭네.

 

크나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옆자리에 누운 사람이 놀라 잠에서 깰 만큼 섬세하지 못한 동작이었으나 옆자리의 사람이 내일까지 잠에서 깰 일은 없을 것이다.

 

그야.

 

씻기고 닦아 침대로 옮기고 잠든 몸으로 한 발 더 뺀 다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는걸.

 

얇은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없었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율리안의 윤곽 정도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기절하다시피 늘어진 몸통, 테이블을 짚고 버티던 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

 

쉬었을 것이 분명한 목, 불그스름하게 물러진 눈가, 벌어진 입술.

 

손이 저도 모르게 그 목으로 간다.

 

아직 한 번도 둘러 본 적은 없지만 이 창백하리만치 하얀 목에는 붉은 색이 잘 어울릴 텐데.

 

말이나 한 번 꺼내 볼까.

 

제 말이라면 전부 농담인 줄 아는 저 신부님은 펄쩍 뛰면서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말라고 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한 크나트는 기분좋게 웃었다.

 

아 정말이지 이 신부님은 자신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마음같아서야 경제력도 취미생활도 다 빼앗아 저에게만 기대게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풀이 죽어 버릴테고.

 

크나트는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곳이 필요하다는 걸 알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은 무서운 줄 알면서도 덤비려드는 신부님임도 알고 있고.

 

그러니 그 낮 내내 바깥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일거리도 이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아닌가.

 

손끝이 목을 따라 살갗을 간질이자 희미하게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못 자게하고 싶다.

 

잠시라도 다른 일은 못 하게 하고 싶다.

 

항시 살갗을 닿게 하고 말에 반응하게 하고 곤란하게 만들고 나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하고 싶어.

 

...아이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손에 힘이 들어간다.

 

청년처럼 회복이 빠르지도 않는데 나이도 들만큼 들어서 이 무슨 체력 낭비하는 생각들이냔 말이다.

 

크나트는 율리안의 베개를 뺏을까 하다 잠에서 깰 것 같자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대신 팔을 두르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옆의 이불을 꽉 쥐었다.

 

손톱이 이불에 긁히며 드드득 소리가 났지만.

 

이번에는 율리안도 깨는 기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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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커튼 너머로 어느 뱀파이어는 밖을 내다보았다.

 

자야 할 시간이었으나 때로 그는 이렇게, 창가에 앉았다.

 

그가 앉기에는 조금 작고 지나치게 발랄한 의자 위에서.

 

가장자리에까지 조각이 더해진 화사한 빛깔의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제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이런 두꺼운 커튼 너머로는 제대로 밖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는 따라놓은 차가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같은 자세로 있었다.

 

밤과는 달리 밖은 시끄럽다.

 

해를 받아 피어난 꽃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잘랑거리고, 새들은 그 사이를 누비며 지저귀고, 커다란 등교 버스가 도로 위에 나타나면 다시 보자는 인사가 재잘재잘 흘러간다.

 

한 차례 그렇게 소란스럽고 나면 그보다 조금 작은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인도를 지나갔다.

 

벤치 몇 개가 놓인 작은 공원이 코앞에 있는 덕분에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던지지 못해 굴리다시피 하는 공이 이제 푸릇해지는 잔디 위에 이리저리 오가고 양동이로 만드는 모래성은 높아진다.

 

누군가는 싸워서 울음을 터뜨리고, 손에는 모래와 풀물이 들고, 고함 지르는 소리도 들리고.

 

작은 아이들이 가고 나면 이제 학교가 파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 아이들도 가고 나면 상급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십 대의 중반을 보내는 아이들은 때로 미끄럼틀이나 그네에 걸터앉아 나름대로의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공 하나를 가지고 차며 놀거나 튀기며 놀았다.

 

그러면 이제 해가 졌다.

 

마지막 아이 하나까지 돌아가자 메로스 오르바토스는 그 고요 속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달빛에 방 안이 비쳤다.

 

이 방에는 자기 전에 장난감을 정리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아이가 있었다.

 

분홍빛과 노란색을 구분하기 어려워진 나무 블록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 의자는 누군가 갓 일어난 것처럼 빠져나와 있었다.

 

먼지막이 천이 그 아이의 재에서처럼 이젤을 덮고 있었다.

 

어느 아이가 좋아했던 커다란 거울은 흐려졌고.

 

어떤 아이들이 손에서 떼놓지 않았던 장난감 칼은 이미 썩어 없어졌다.

 

금방 낡아버려서 표지를 몇 번이나 갈아야 했던 책은 이제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뱀파이어는.

 

때로 잠들지 못하고 아이들의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소란스러웠다.

 

두꺼운 커튼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할 아이들의 실루엣이 즐겁게 뛰어놀 때면.

 

때로 그들이 탄성을 지르면, 그것이 비명으로 들릴 때면.

 

메로스는 창문을 열고 싶었다.

 

제 가슴이라도 쥐어뜯으며 소리지르고 싶었다.

 

해 아래는 위험해.

 

인간 가까이는 위험해.

 

집 안으로 돌아와.

 

돌아와.

 

내게로.

 

 

[장르: 영문법] to 부정사를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

2021. 11. 11. 01:15 | Posted by 호랑이!!!

A가 좋아(like).

 

A랑 집에 같이 가고 싶다(want).

 

A랑 바다에 놀러간다면...(hope)

 

A랑 대학생 되어서도 오래오래 얼굴 보고 지냈으면... 아니 아예 사귀게 되면...(wish)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늘에서는 벚꽃잎이 쏟아져 머리카락이며 어깨에 봄이 묻는다.

 

아 기분 좋아.

 

생각밖에 안 했는데도, 순간순간마다 다시 사랑에 빠져.

 

그래, 이러고만 있지 말고 친해지자!

 

결심했어, 집에 같이 갈 만한 사이가! 되자!(decide)

 

그럼 계획을 짜볼까! 아씨 벌써부터 기대가 돼!(plan, expect)

 

집 가면서 같이 떡볶이 먹자고 해야지.

 

마라탕? 마라탕 먹자고 할까?

 

아니면 타코야끼 같은 거.

 

...할 수 있을까? 그런 거 싫어하면 어떡하지...?(afford)

 

아니아니지. 아니아니야.

 

A, 우리, 꼭 하자! 약속이야! (promise)

 

너도 동의하지! 그치! , 나도 알고 있어. 남자애들도 마라탕 좋아하는 거!!! (agree)

 

“...어디 산다고?”

 

, 나 그 동네에... , 잘 모르겠구나? 학교 나가서 문구사랑 카페 있는 길에서 카페 쪽으로 쭉 가면 돼.”

 

B는 문구사 쪽이었다.

 

완전히 실패였다.(fail)

 

A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평범하게 미소를 지었다.(pretend)

 

물론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10월 과제 - 낙원

2021. 11. 3. 00:00 | Posted by 호랑이!!!

오늘도 끝내주는 하루였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에는 발을 밟혔고, 비싸게 주고 산 새 우산은 도둑맞았으며, 그래서 우산 없이 걷고 있는데 소나기가 쏟아졌고, 비를 맞은 핸드폰은 방전되고, 축축한 머리로 발표할 때 스피커는 갑자기 먹통이 되기까지 했지.

 

6시가 되어 가방을 싸서 나왔다. 그게 딱 하나 좋은 일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질척거렸고 삐걱거리는 보도블록을 밟았더니 밑에서 물이 왈칵 솟아 양말을 적셨다.

 

어이, A.”

 

욕설이나 퍼부으려는 순간 단골 음식집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신메뉴 나왔는데 어때?”

 

비가 내린 뒤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에 따뜻한 열이 느껴졌다.

 

겨우 냄새나 맡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육즙이 흐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한 튀김 냄새가 났다.

 

“...좋아요!”

 

미리 준비하기라도 하신 건지 갓 튀긴 것이 바로 상자에 담긴다.

 

음식을 계산하는데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가을 날씨가 왜 이렇단 말인가.

 

가을 비는 그 뭐냐, 빗자루로도 막아진다며? 가뜩이나 짧아지는 가을이건만 그 아이덴티티까지 짧아지다니 애도를 금할 길이 없다.

 

지하철에서 내리고도 몇 분은 걸어야 하니 음식을 받고서는 편의점으로 가 우산을 샀다.

 

그리고 과자랑, 그리고 사탕도.

 

그러면 목막히니까 음료수랑- , 이 아이스크림 할인하네.

 

한뭉텅이를 안고 생각해보니 집 근처에도 같은 편의점이 있다.

 

언제 해도 늦었다는 후회나 하며 지하철에 올라탔더니 금요일 퇴근길이라 사람으로 붐볐다.

 

내가 정말 저기 끼어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지하철에 탔다기보다는 인간 사이에 끼어있었다고 할 만한 곳에서 내리자 공기의 차가움마저도 산뜻하다.

 

계단을 올라가며 보니.

 

저 먼 지상에서 안으로 노을과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호박색 하늘은 몸을 데우고 같은 색의 나뭇잎들을 더욱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냈다.

 

화사한 금빛이 나부낀다.

 

하늘이, 낙엽이, 나무가, 따박따박 걷는 이 길이 온통 금빛이다.

 

흩날리는 나뭇잎이 빗소리처럼 상쾌하게 흘러간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집 안이 온통 붉은 빛.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드라이어 대신 선풍기를 틀어 머리와 몸을 말리며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따뜻한 닭튀김.

 

얼음을 넣은 유리잔 가득하게는 콜라.

 

하얀 종이상자를 열어보았더니 저도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대애박, 치즈 웨지감자 넣어주셨네.”

 

오늘도 끝내주는 하루였다.

 

 

 

 

 

 

 

 

그리고 그 지상과는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서.

 

머리 위에 빛나는 고리가 떠 있는 누군가는 단골집 사장이 너머에 있는 문을 확인했다.

 

그 사장은 단골 손님이 행복한 얼굴로 음식을 사가는 것을 보았다.

 

“B의 천국, 이상 없습니다.”

 

누군가는 안락의자에 앉아 잡지를 보는 사람이 너머에 있는 문을 닫으며 무전기에 속삭였다.

 

“C의 천국,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빈 통을 밀어두고 침대로 몸을 던지는 A를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A의 천국, 이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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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으레기

 

킴은 생기없이 흐린 눈으로 교단에 선 메로스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베이지색 포근한 니트에 남은 연핑크색 립스틱 자국을.

 

도오둑노옴의 새끼...’

 

분명 그 애, 교복을 입고 있었지.

 

끽해야 삼십 후반인 놈이 잘도 고등학생 딸이 있으시겠다.

 

게다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까지 요일마다 자식이 바뀌지 뭔가.

 

‘x xx xx’

 

차마 활자로 옮길 수 없는 감탄사를 떠올리며 킴은 볼펜 끝을 물어뜯었고, 교단의 메로스 K. 오르바토스 교수는 자신과 필기를 열렬하게 바라보는 킴을 기특하게 여겼다.

 

방금 이야기한 분자 구조에 대해 할 말이 있나, 학생?”

 

왜 그렇게 붙는지 궁금한데요.”

 

좋은 질문이야!”

 

거기서부터 불이 붙은 메로스는 갑자기 ppt로 대체했던 칠판 앞으로 가 서더니 듣도 보도 못한 식을 쫘아아악 적기 시작했다.

 

여기 이 식은 다음 학기에 나오는 거긴 한데 증명은 우리가 배웠던 걸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재 218p에 있는... 다들 책 폈습니까? 그래요, 거기 두 번째 상자 안에...”

 

왜 다음 학기에 배우는 식을 지금 배운 걸로 증명할 수 있는데요?”

 

그건 이 식이-”

 

왜 증명을 해야 하는데요?”

 

그건 재미있는 질문인데, 그 당시의 학자들이...”

 

왜요?”

 

왜요?”

 

왜요?”

 

110분이 지났다.

 

쉬는시간도 없이 진행했는데도 아직 메로스 교수는 할 말이 남았다고 딱 한 시간만 더 하자고 했다가 학생들의 다음 수업이 있습니다!’ 세례를 맞았다.

 

... 이 설명이 참 중요한데...”

 

메로스는 정말 아쉽다는 듯 칠판을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열정적인 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킴은 가방을 다 싸둔 채였다.

 

아이고, 오늘 이 단원까지는 다 나갔어야 했는데... 오늘 수업은 이대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자네.”

 

제가 벌써 2학년인데 어떻게 제 이름을 모르실 수가 있으십니까? 저는 킴입니다.”

 

그래, 킴블리 플로리안 학생.”

 

이리 오라는 손짓에 킴은 종이에 뭐라고 작살나게 쓰고 있는 메로스한테 갔다.

 

무슨 일인데요?”

 

학생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적어두었네.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내 사무실로 오고... 그 아래쪽은 그 주제에 관한 자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적어두었으니 나중에 해 보게.”

 

, 딱 봐도 복잡하고 골아파 보인다.

 

거절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까지는...”

 

“‘너무 어려우면안 해도 되네.”

 

뭐씨?

 

99퍼센트의 확률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 말은 킴블리의 귀에 ?’이라고 번역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교수가 음흉하고 수상쩍고 비열하게 웃는 표정을 배경으로.

 

“‘븐드시흐 으긋슴느드...”

 

몬스터와 박카스의 힘으로 킴은 일주일 뒤 수업시간까지 과제를 해 갔다.

 

며칠간의 밤샘으로 독이 오른 킴은 그 시간에도 질문을 퍼부었고, 메로스는 기뻐하며 새 과제를 주었다.

 

물론 그 과제도 성공했다.

 

그래서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그러는 동안 킴은 조교와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언가가 수상쩍게 부글부글 끓는 소리.

 

불쾌한 냄새, 유독한 물질들.

 

사람들은 초췌한 얼굴로 조그마한 유리판을 들여다보았고, 무언가를 쉴새없이 써내려간다.

 

아아, 그 무시무시한 곳은.

 

메로스의 대학원 랩실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A- 2

2021. 10. 30. 01:33 | Posted by 호랑이!!!

(샤악님의 1편: https://posty.pe/rq4cmm )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인간을 믿느냐.

 

재현은 새로 산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일단 종교쟁이는 안돼, 그만하면 많이 당했어.

 

교수들, 박사들, 의학 하는 사람들...

 

...의사도 빼자.

 

틀림없이 금연을 권할텐데 아무리 그래도 담배를 끊을 수는 없지.

 

고기도 못 끊어서 절도 뛰쳐나왔는데 담배를 끊는다?

 

니코틴으로 풀가동된 뇌가 탭댄스를 추며 고개를 저었다.

 

, 안되고말고.

 

저기요!”

 

동글동글한 인상의 사람이 후다닥 뛰어오더니 재현을 앞에 두고 헥헥거리며 숨을 골랐다.

 

“...?”

 

!”

 

주근깨가 박혀 수수한 인상인 사람은 편의점 로고가 박힌 앞치마 차림이었다.

 

아까 이거, 두고 가셨... ... 두고 가셔... 흐어억...”

 

두고 갔다면서 물건을 안 건넨다.

 

연기가 날리지 않게 고개를 돌려 후 내뱉고 기다려주니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선이어폰 한 쪽을 내밀었다.

 

, 기요. 아까! 계산하신다고 카운터에 놓고 그대로 가셔서요.”

 

.

 

귀를 더듬어 보았더니 한쪽이 빠져있었다.

 

도쟁이들한테 안 잡힌다고 껴놓기는 하지만 뭘 틀어놓는 게 아니다보니 그대로 까먹었나보다.

 

그으리고 이거는 제가 드리는... 아니 그게 별 건 아니구요, 날씨가 더워서 사장님이 마시라고 두 개 주셨거든요! , 하지만 그게 문제가 있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건 아니에요. 멀쩡한 제품인데! 그냥... 오늘 날씨가... 날씨가 더워서... 드리는 거예요!”

 

어쩐지 미지근한 사이다를 받았다.

 

담배를 피운 직후였지만 성의가 성의인지라 달짝지근한 음료 캔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자.

 

읍푸.”

 

! 허어억!? 죄송해요! 죄송해요!? 괘 괜찮으신가요!?”

 

담배를 다 피운 후여서 다행이다.

 

갓 불붙인 게 꺼질뻔 했네, 그것도 설탕물을 맞아서.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십쇼.”

 

, 으어으어... ... 저 세탁비... , 지갑이 없어. 폰을 그럼... 어어어?”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담.

 

그러면서도 다음 날, 재현은 담배를 사기 위해 그 편의점을 찾아갔다.

 

그 다음 날, 그 사람은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재현과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또 그 다음 날에는 비가 왔다.

 

재현은 우산을 가져다주었다가 그 다음 날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다음 날에는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얼빠진 사람은 예상대로 술 몇 잔에 취해서 곯아떨어졌다.

 

모텔에다 눕혀놓고 괜한 오해 사기가 싫어 집으로 갔다.

 

그러자 다음 날에 해장용으로 국밥을 먹자는 문자가 왔다.

 

밥 먹고, 이번에는 흔들지 않은 사이다를 마시고.

 

누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밖을 좀 걷자는 소리를 했다.

 

아직 해가 떴을 때에는 제법 온기가 있어 둘은 기분 좋게 강변을 걸었다.

 

따뜻한 햇볕이 등을 쪼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마다 강변의 갈대가 흔들린다.

 

? 아이스크림을 파네요? 휴우, 이렇게 만나버리다니 이게 바로 인연인가... 어쩔 수 없군요... 먹어야겠어요.”

 

아까 국밥집 나오면서 하나 먹었잖습니까.”

 

아 그건 그거구요.”

 

달짝지근한 덩어리를 얹은 콘을 들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강에는 오리가 오종쫑한 새끼들을 데리고 헤엄치고 있었다.

 

새끼들은 열심히 헤엄을 쳤지만 바람이 불어대자 이리저리 휘청여서 바람이 좀 잠잠해질 때에야 파다닥 날개를 치며 쫓아가고는 했다.

 

자전거가 등 뒤로 지나가는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씨.”

 

주근깨가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곤란한 말이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빛나는 눈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그 사람은 입을 몇 번 뻐끔거렸는데 점점 목소리가 작아져서 재현은 몸을 숙여야 했다.

 

... 잠깐 귀 좀 빌려주세요.”

 

이미 이 강변에는 그들밖에 없었지만 재현의 행동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재현씨, 있잖아요...”

 

설탕이 쌓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런 사람을 믿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재현은 이어지는 목소리에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분께서 영혼을 바쳐 자신을 숭배하라 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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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따로 없었다 (B-1)

2021. 10. 27. 23:44 | Posted by 호랑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으아아앙- 아빠아아아아-”

 

바보야, 이건 더 멀리 던져야지!”

 

와장창! 쨍그랑!

 

이 멍청이가! 파편이 튀잖아!”

 

누구보고 멍청이라고 하는거야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라고 하는 사람이 멍청이 바보래요!”

 

우당탕!

 

쳤냐? 쳤냐!”

 

쳤다 어쩔래! 꼬우면 덤비던가!”

 

! 우두둑 털썩.

 

꺄하하하!”

 

션샌니 쨰가 깨로핀대!”

 

아니거든! 괴롭히는거 아니거든! 에베베 에베베베!”

 

부우우웅, 찌이익.

 

여기 모여모여! 야아아아!!!”

 

이야아아!!!”

 

진짜로 그거 휘두르면 안대!”

 

와지끈 소리와 함께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가 나고.

 

제각기 하얀 깃털 날개나 검은 가죽 날개를 달고 구르는 아이들을 보다가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갓 삼백 된 악마는 떨리는 손가락을 들었다.

 

저걸요? 저 혼자? 정말로?”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악마, 에이노어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수줍은 학부모들, 책임감 가득하던 책임자들, 회사 보육원을 신설하자는 프로젝트를 냈다는 팀원들까지 아주 이 복도가 빼곡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아이들은 모두 열하고도 둘이었다.

 

악마 측 세 명, 천사 측 아홉 명.

 

전부 잡아서 앉혀놓고 인사부터 하자니 벌써부터 진이 쫙 빠져서 에이노어는 선악과부터 하나 씹어먹고 머리 끝까지 오르는 선악의 에너지로 힘을 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할-”

 

얘 방구꼈대요!”

 

방구!”

 

아니거든! 이거 너 발냄새거든!”

 

안 씻는대요~ 안씻는대요~”

 

선생님 쟤들 시끄러워요.”

 

으아아앙 누가 날개 잡아당겼어어어어!”

 

자 친구들 여길 보세요~!”

 

어찌저찌 간식을 먹이고 놀이활동까지 하자 아이들은 보다 얌전히 한데 모여 앉았다.

 

우리 같이 노래 부를까요? 화창한 봄날에~ 리바이어던 아저씨가~”

 

리바이어던 아저씨가~”

 

아저씨가~”

 

선샌니 저 이 노래 몰라요!”

 

선생님 저 저기 가서 책 읽어도 돼요?”

 

잠 와요! 배고파!”

 

선생니이이으으흐어어엉!”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울음소리에 에이노어가 노래를 멈추자 또다시 교실이 폭발할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우는 것은 작은 천사 아이였는데 간신히 달래고 또 얼러서 말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누가 제 고리 가져갔어요!”

 

듣고 보니 아이 머리 위에 반짝여야 할 노란 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천사 아이가 아프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다시 찾기까지 제한 시간은 앞으로 2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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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왕자를 위해

2021. 10. 4. 01:13 | Posted by 호랑이!!!

 

사랑은 장미처럼 피어나고 우리의 운명은-”

 

아름답게 꾸민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시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노랫소리에, 청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에 한 번은 고개를 돌릴만했다.

 

그러나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사람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혹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인사도 없이 맨손으로 잡도록 손질한 새고기를 집었다.

 

이 나라, 이름을 말하자면 바르너는 수렵을 주로 하는 국가이고 고기요리도 그렇게나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궁에 오고서부터는 한 번도 나이프를 쥐어본 적이 없다.

 

무딘 나이프 한 자루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옆에서 몸소 본 덕분이겠지.

 

자신이 왕자 시절일 때도 가져보지 못한 자신만의 궁전은 마구간과 커다란 욕조와 그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넣어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침실이 있었고 만찬을 위한 곳은 그 방만큼이나 커다랬다.

 

커다란 궁전에 커다란 방에, 저녁식사를 위한 테이블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길고 넓은데 거기 앉은 것은 라이단 전 왕자를 제외하면 차르 하나뿐.

 

특별히 데려온 가수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어줄 시종조차 없어 그 넓은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기대어린 표정으로 라이단을 지켜보던 차르는 결국 몸이 달아 입을 열었다.

 

몇 번 들어본 노래지?”

 

라이단은 입을 열어 으깬 감자를 넣었다.

 

감자를 으깨고 양념하고 치즈와 생선알을 얹어 호사스러운 것이나 음식을 가르고 덜어 입까지 가져가는 동작은 감탄도 만족도 없이 기계적일 뿐.

 

기껏 가장 유명하다는 가수를 데리고 와서 노래까지 가르쳐 놨건만, 라이단은 차르는커녕 가수에게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라이언 왕자.”

 

낯간지러워하던 별명이 불리었음에도 라이단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차르는 가수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했다.

 

그것을 감지하면서 라이단은 지친 손짓으로 식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놀랍지도 않게 쨍그랑, 소리가 났다.

 

차르 앞에만 놓였던 고기용 나이프는 어느새 가수의 목에 그 날을 빛냈다.

 

저 나이프는 음식용이니 그렇게까지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은 그걸로도 치명상을 입힐 만큼 힘이 셌다.

 

톱날같은 나이프의 날이 살갗을 누르자 황제가 직접 불러 주었다는 자부심에 기뻐하던 가수는 덜덜 떨었다.

 

떨림에 나이프는 날이 조금씩 파고들었고, 차르는 그것을 보았지만 날을 떼지는 않았다.

 

라이단은 그 가수를 보았다.

 

공포에 입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이 라이단에게 닿았다.

 

눈동자가 그 마음을 대변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때는 저런 눈에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의무감에 가까울 정도의 목소리로.

 

라이단은 입을 열며 방치된 지 오래였던 경첩에서 나는 것 같은 삐걱거림을 느꼈다.

 

“...많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차르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여전히 제 쪽으로는 고개도 들지 않는 라이단이었지만 그래도 입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움직인다!

 

“...바뀌었군요.”

 

아무래도 궁전에서 불러도 될 만한 노래로 바꾸다보니까, 일부 가사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 김에 가사가 바뀌었고-”

 

내팽개쳐진 가수는 비틀비틀 물러나서 혹여나 다시 잡히기라도 할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후로 라이단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식탁에서는 이야깃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 옷이 커졌네.

 

라이단은 왕자 시절일 때부터 애용하던 바지를 쭉 잡아당기더니 허리끈을 꽉 졸라매었다.

 

딱 맞았던 바지는 점점 늘어나서.

 

...아니지.

 

라이단은 금과 염료로 칠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호사스러운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때 말을 타고 뛰고 구르던 몸은 고작 한 달 사이에 많이 상해서 근육도 살집도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이 새로 지어진 바지를 꺼내들었다.

 

얇고 부드러운 털가죽과 좋은 천을 쓴 편하고 따뜻한 바지였으나 라이단은 그를 못 본 척 끈을 잘 매듭지어 묶었다.

 

이 곳은 해가 빨리 진다.

 

하인은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새까만 하늘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두터운 천에 가로막히고 보온을 위해 벽난로에 잘 말린 장작이 들어간다.

 

침대 위에는 새의 부드러운 속깃만을 써서 만든 이불과 베개.

 

그 속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물주머니.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보온을 위해서는 방이 낮고 좁아야 할 텐데 새로 단장했다는 이 방은 다른 방의 세 배는 넓고 절반은 더 높다.

 

그 높은 천장에서 바닥에 닿기까지 벽에는 금실과 비단실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정교하여 그 위에 새겨진 많은 동물과 영웅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바닥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두터운 털가죽이 빈틈없이 깔렸고 가구 하나하나에 장식을 새겨 호사스러움을 드러냈다.

 

손이 직접 닿지 않게 만든 화로가 놓이고 불 위에는 물이 든 주전자가 부드러운 김을 내뿜었다.

 

왕이 끼고 도는 애첩이나 갓 태어난 왕자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어느 쪽이든 라이단에게 기꺼운 설명이 아니었다.

 

분명 호사스럽고, 유지하는데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 거고, 그 말인즉 말도 안되는 구조에 말도 안되는 편함이 있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 편하다는 것은, 또 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 위에 무언가가 얹히는 기분이다.

 

침대를 정리하고 하인 하나는 방 안에, 하인 하나는 테라스로, 하인 하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하인은 촛불 몇 개를 더 켜고는 양초를 조금 더 꺼내놓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촛대를 놓고 라이단은 습관처럼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밝고 따뜻한 곳이건만 머릿속은 갉아먹히는 것처럼 시끄럽다.

 

문 밖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차 트레이와 책이 몇 권 들어왔으나 라이단은 오늘도 차를 마시지 못할 것이고,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손에 책을 쥐어도 책은 넘어가지 않는다.

 

머릿속을 갉아먹는 것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게, 들어도 듣지 못하게 날뛰고 있다.

 

글자가 읽히지 않는다.

 

첫 장, 고작 몇 줄.

 

초점을 잃은 눈에 글자가 흐릿하게 번진다.

 

하인이 잡는 손에 정신을 차려보면 날카로운 책 옆면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벌겋다.

 

낫지 못하는 상처는 터지고, 또 덧씌워지고, 그럼에도 충분히 아프지가 않아.

 

하인은 상처를 싸매고 축 늘어진 손 위에 큼지막하게 만든 장갑을 씌웠다.

 

이 손으로도 책장을 넘길 수 있을까?

 

한 글자도 읽지 않은 페이지지만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책을 넘기려 해도 손이 미끄러질 뿐 책장이 잡히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걱거리는 소리만 이어서 이어서 나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하인이 자신을 위험한 것 보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자 마른 눈동자 위로 덮이는 피부까지 느껴진다.

 

하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밤에 사용하는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은 해가 늦게 뜨는 곳인데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하품을 하던 하인이 시간을 확인하였다.

 

아침식사를 내올까요.”

 

벌써 이틀을 꼬박 새웠으니 몸에 잠이 부족해서 뻣뻣한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속에 넣으면 잠이 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하인은 커튼을 걷고 손도 대지 않은 차를 트레이에 싣고 나갔다.

 

곧 해가 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하늘은 밀도가 높다.

 

테라스로 나가자 화로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던 하인은 얼른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더 자도록 하게.”

 

아닙니다. 모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테라스 밖으로 몸이라도 던질까 걱정하는 것인지 하인은 이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들어가기에 보기라도 쉬우라고 화로 곁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얼려버릴 것처럼 옷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들고 마른 장작을 몇 개비 더한 화로는 밝게 타오르며 이기려고 애를 쓴다.

 

불티가 검은 어둠 속으로 날아올라 사라지고 불은 일렁이며 기세를 키운다.

 

얼마나 불을 보며 멍하게 있었을까, 어깨에 두툼한 모피가 얹혔다.

 

다소 차가운 감은 있었지만 체온으로 데워지겠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차가운 하늘 위로 하얗게 빛이 밝아진다.

 

해는 하늘로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어쩌면 이 곳은 해 하나 떠오르는 것조차 마이언스와 같지 않냐는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같은 것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 타오르는 불 뿐이란 말이야.

 

충동적으로 하인이 가져다둔 나무를 한 묶음이나 들어 화로에 쏟아부었다.

 

마른 장작이라 한들 한꺼번에 처넣어서야 불이 붙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서서히 죽어가는 통에 하인이 급히 지푸라기를 쑤시고 부싯돌을 당겼다.

 

천천히 불이 붙느라 연기가 오르고 급히 대롱을 들어 후 불자 이내 활활 불이 타올랐다.

 

다시 의자에 앉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테라스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니 외려 불에 시선이 잠겨 한없이 보게 되었다.

 

많은 나무에 옮겨붙은 불은 거세게 타오르고 천장에 자란 고드름이 녹으며 아래로 뚝뚝 떨어졌는데 녹은 물이 흐르는 것에 걸레를 가져오던 하인은 라이단이 저도 모르게 화로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대경실색하여 그를 방 안으로 돌려보냈다.

 

불에 달아오른 금속이 참으로 따뜻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밝아지는 바깥을 보는데 목소리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티크타 전하께서 듭십니다.”

 

창가에서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단은 몸을 일으켰다.

 

명분이야 어쨌거나 포로의 입장이니 허락 같은 것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어주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에 밝은 녹색 눈의 사람이 들어왔다.

 

라이단은 난롯가에 걸린 주전자를 내렸고 아침식사를 가져온 하인은 그것을 차리는 대신 차르가 멋대로 두고 간 물건들 중에서 과자상자를 찾아왔다.

 

티크타는 권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찻잔에 입술을 대고 하인처럼 묵묵히 테이블을 차리는 라이단을 지그시 보았다.

 

고집불통.

 

전 마이언스 왕이 가장 사랑한 아들을 위해 가장 공들여 만든 물건.

 

‘...그 기분이 어떤지 알지

 

라이단은 다시 창 밖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날씨가 추운 바르너는 창문이 전부 작았지만 라이단에게는 마이언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만든 커다란 유리벽이 주어졌다.

 

하필이면 왕궁에 있던 것과 같아 어디선가 레지가 아장아장 기어와서 쌓기놀이라도 하다가 또 무언가 발견하고 걸음마로 지나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창이.

 

, 아니, 차르의 누나인 티크타가 앞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에도 무심코 빠져들게 되어 버린다.

 

라이단.”

 

.”

 

마악 빠져들 수 있는 참이었는데 티크타가 부르는 소리에 라이단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티크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마시던 차가 있는데, 그건 아마 네가 끓이는 쪽이 맛있을 거야. 내 방에 있는데 그것 좀 가져올래?”

 

“...제가 말입니까?”

 

리우나, 라는 이름을 부르자 문 밖에 있던 시종이 사뿐사뿐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둘이 같이. 나는 찻잔을 새로 가져올 테니까.”

 

.”

 

리우나와 라이단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티크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다른 시종에게 새 찻잔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하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차르가 보내준 온갖 화려한 장식물이 방 구석구석에 있고 귀한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도 몇 권이나 있다.

 

보석이 박힌 촛대도 있고 이 찻잔도 유리와 금을 사용한 귀한 것.

 

침대의 베개나 이불 같은 것에도 부드럽기 그지없는 털가죽을 썼다.

 

손 닿는 곳에는 간식거리가, 빈 공간마다 비싼 포장지를 사용한 선물상자들, 돌을 깎아 만든 체스 테이블에 침대 위에 놓은 쿠션에까지도 금사와 은사가 들어갔다.

 

자신이 사용하는 방보다 화려하고 황제의 방보다도 장식과 사치품이 많다.

 

그런데도.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물건들은 이렇게나 반짝이고 있는데도,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흙과 먼지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을까.

 

티크타는 옷장을 뒤지고, 서랍장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 사전이 다섯 번째 서랍에 있고.

 

티크타는 우아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다른 곳을 찾아보려다가 다섯 번째 서랍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미묘하게 빛깔이 다른 부분이다.

 

그 부분을 살짝 눌렀더니 서랍 바닥이 밀린다.

 

아래에서 나온 것은 귀금속이나 넣었을까 싶은 작은 상자.

 

“...이게 뭐지?”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패.

 

투박한 육각형, 납작하고.

 

뭔가 새겨져 있기라도 하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칼로 긁어내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아래에서 수첩을 발견한 순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티크타는 급히 서랍을 닫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차를 새로 끓이고 자리에 앉아 티크타를 마주하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라이단은 불쑥 입을 열었다.

 

차르 황제에게 저를 고문하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제 행동에 따라 마이언스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티크타의 손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의 끝을 쥐고 손가락에 감는다.

 

유감스럽게도 저 동작은 라이단에게 익숙하다.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샤르 역시 고민을 할 때면 온 머리카락이 새둥지가 되도록 꼬고 꼬고 또 꼬아댔다.

 

계속 티크타의 손을 보면 샤르를 떠올리고 말 것 같아서 라이단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널 알고 싶어서 왔어....라고 할까?”

 

“.....”

 

인간관계는 편협하지만 눈치만큼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티크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뭘 알고 싶다는 거지?

 

마이언스? 마이언스의 백성들? 마을? 공작에 대해서? 그도 아니라면 마이언스의 왕에 대해?

 

황녀님을 즐겁게 해 드릴 정도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며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이리저리 꼬이던 머리카락은 손가락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구불구불하다.

 

샌드위치 재료는 뭘 좋아하지?”

 

대뜸 티크타가 물었다.

 

뭐든 좋습니다.”

 

바르너는 마이언스에 비해 추운데 견디기 힘들지는 않고?”

 

티크타님과 폐하의 덕분으로 견딜만합니다.”

 

여기 와서는 쉬는 시간에 주로 뭘 하지?”

 

이렇다 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마이언스의 왕궁에서는 뭘 했나?”

 

왕궁에서 제가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는 라이단이 세우는 이 벽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티크타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가져가다가 단단하게 꼬인 것이 손가락에 닿자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내렸다.

 

라이단은 그 모습을 전부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티크타의 손가락이 라이단의 시선을 낚아채듯 고정시켰다.

 

마이언스의 무엇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했잖니. 무엇이든 좋아, 어떤 사소한 것이든.”

 

저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물론 녹색 기사 라이언이라면 20권 전부 다 있지만.”

 

라이단의 차가운 표정에 금이 갔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르너에는 20권밖에 안 나왔군요.”

 

이번에는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있던 티크타의 표정이 깨졌다.

 

뭐어? 마이언스에는 몇 권이나 나왔는데!?”

 

작년에 24권이 배포되었습니다. 계속 쓰고 있었다면 지금쯤 26권이 나왔을 겁니다.”

 

전쟁만 없었다면, 이라는 가시가 뾰족했다.

 

그리고 티크타는 라이단의 눈빛 사이에서 스쳐지나간 죄책감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하며 티크타는 과자를 깨물었다.

 

“...어어.”

 

맛이 이상한가요?”

 

“...아니...”

 

티크타는 다른 나라에서나 나는 과일로 만든 잼을 채우고 겉을 설탕으로 덮어 태운 과자를 와작와작 거칠게 깨물었다.

 

이 자식, 내가 이거 달라고 할 때는 겨우 몇 개 줬으면서!

 

동생놈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만.

 

라이단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과자가 든 상자를 통째로 가져다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천진난만 천사같은 화려한 미인은 그 녀석한테는 말하면 안돼, 라며 과자를 반토막냈다.

 

아 그 녀석은 정말이지!”

 

과자를 몇 개 더 먹다가 울컥한 티크타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니, , 라이단. 들어봐, 글쎄! 그 녀석이 말이야, 내가 이거 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 없다고 겨우 한 접시 주고 말더니!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우리가 말이야, 삼십 남매 중에서 서열로 따지면 한 십위쯤 됐거든? 위로 황후님 계셨겠다 집안 좋은 황비님들 있었겠다. 그나마 어머니가 평민이나 노예가 아니라 그 정도는 되었는데 그래도 그게 별로 높은 건 아니거든? 우리보다 낮은 신분인 애들은 슬슬 눈치보다가 적당히 백작위나 받거나 누구네 집안에 하사되거나 했는데 말이야... 어휴, 우리가 어쨌든 얼굴은 보기 좋잖아? 안 팔려가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휴.”

 

한참이나 투덜거리던 티크타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라이단은 어쩌다가 그 녀석을 만났어?”

 

라이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찻잔의 가장자리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재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

 

친애하는 나의 동생 레지날드 R. 마이언스에게

 

. 인적이 드물어 길 중간에마저 풀이 돋은 곳.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청년이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탄 말은 보기 좋은 장미색이고 갈기는 구름 같은 연회색이라 여느 집 도련님들이나 타고 다닐 법 했지만 로브를 눌러 쓴 청년이 입은 것만은 다 낡고 너덜거렸다.

 

나는 지금 야생동물로 유명한 래스퍼 백작령의 옆에 있는 산을 걷고 있단다

 

흔들리는 말 위인데도 마치 책상에서 글을 쓰듯 그 청년은, 가끔씩 자신의 말에게 한두마디 하며 식물의 속껍질을 모아 만든 수첩에 글을 써나갔다.

 

이맘때는 비가 적고 날씨가 선선해 노숙하기 좋아 마음은 한가롭고 몸은 여유롭구나. 지금 걷는 길은 붉고 누른 낙엽이 가득 깔려있단다. 궁에는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상록수만 심겨져 있으니 너는 아직 이 장관을 보지 못했겠구나. 언젠가 그림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보여주마. 그리고

 

여기까지 썼을 때, 저만치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청년은 수첩에 급히 몇 자 더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나중에 다시 쓰겠다

 

무늬가 새겨진 뿔로 만든 고급 활에 질 좋은 옷, 보석으로 장식된 비싸기 짝이 없는 신발을 보아하니...

 

여행자를 꿈꾸는 어딘가의 도련님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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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라이4/페이건 민x아제이] 단빙님 리퀘

2021. 9. 23. 00:53 | Posted by 호랑이!!!

아제이는 밀주 한 병을 들고 언덕에 앉았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DJ 라비의 방송이 유쾌하고 발 아래로는 양귀비밭이라 바람이 불 때면 짙은 색 꽃송이들이 차르르 흔들리며 짙은 향기가 코와 입을 막았다.

 

낮 동안 데워진 땅은 선선한 바람에 식어가고 목조 울타리로 구분된 길은 하얗게 정돈된 데다 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에 지상의 것은 실루엣만이 보인다.

 

이 곳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해치우는 중임에도 일견 머릿속이 빌 정도로... 비워도 좋을 정도로, 안전하게 느껴졌다.

 

혹자는 이것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하겠지.

 

저 아래에서는 불침번을 서는 아미타의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다시 말해 페이건 민보다 세이벌을 더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주사위 하나와 총알 몇 알 가지고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어떤 과학 실험 같은 것에 빠져서 불침번용 오두막 근처로 가면 불쾌할만큼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모한의 아들!”

 

듣자하니 누군가 야크 육포를 가져온 모양이다.

 

육류라면 제일 싼 통조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냥을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건 꽤 드문 일인데다 아제이는 물건을 소비하기보다는 날라 주는 쪽이었기에(그리고 술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근래 아미타의 일을 몇 가지 처리해주었더니 그들은 아제이가 그들과 함께 한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들 게임에 끼워줄 생각은 없는지 그 중 하나가 일어나더니 꽉 찬 술 한 병, 육포 몇 조각, 동글동글한 뭔가를 몇 개 건네주고 돌아갔다.

 

종이에 그린 낡은 게임판이 보였지만- , 누가 그들을 나무라겠는가.

 

이 밭까지 오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몇 개인데.

 

그러니 아제이도 모처럼 술이니 경치니 하면서 여유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술 한 병에 크기가 들쭉날쭉한 육포를 깨물다가 건네받은 물건 중 둥글둥글한 것에 시선이 갔다.

 

본의로 약물을 이것저것 접하다보니 이게 뭔지 직감적으로 알 것 같다.

 

파이프에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아래에서 쨍그랑,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연기를 깊이 들이쉬었다가 악기를 연주하듯 훅 불었다.

 

검게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재가 부유하고 아제이는 이런 순간이라면 멈춰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아제이.”

 

할 뻔 했는데요 이...

 

너도 이제 성인이니 잔소리는 많이 하진 않겠지만, 몸을 망치고 싶다면 이것보다 더 건전한 방법이 많이 있단다. 정 궁금하면 나랑 한 번 알아보지 않겠니?”

 

눈을 뜨자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파이프는 이미 땅을 구르고 있었고 이 몸뚱어리도 땅에 뒹굴고 있군.

 

시선을 위로 돌리자 이 척박한 키라트에서는 보기 드문 깨끗한 옷과 잘 정돈된 머리가 보였다.

 

팔이 들렸다.

 

힘을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인데 마치 나무토막의 아래를 밀어올린 것처럼 올라가서 페이건의 멱살을 잡았다.

 

“...이건 촉감도 느껴지는군...”

 

세상에, 아제이! 얼마나 한 거야?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약 효과 죽여주네.

 

아제이는 페이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왁스를 발라 빗어넘긴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쿡 찔러 망가뜨리고 얼굴도 쭈욱 잡아당기자 뒤에서 당황하는 것 같은 발소리가 났다.

 

앉은 것이 무색하게 뒤로 몸을 기울여 고개를 꺾자 군화를 신은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군인?”

 

페이건은 아제이를 내려다보다 이쉬와리의 눈 위에 손을 덮었다.

 

속옷 한 장까지 빠짐없이 벗고 망이나 보러 꺼져

 

달빛이 대낮처럼 환했다.

 

페이건은 군인이 옷을 벗는 것을 기다리다 짜증을 내며 그 머리에다 속옷을 내던졌다.

 

손바닥 아래에서는 아제이가 눈을 떠 보려고 하는 것인지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방금 군인이 총을 들고...”

 

군인? 무슨 군인?”

 

손이 치워지자 아제이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페이건 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옆을 더듬어 파이프를 찾았다.

 

그런 건 하등 좋을 바 없어.”

 

그럼-”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너무 높거나 낮게 들렸다.

 

“...알려 줘, 건전하게 몸을 망치는 방법...”

 

말이야, 하고 더 잇기도 전에 아직도 잡힌 멱살이 가까이로 당겨졌다.

 

성급하게 당긴 손인데도 페이건은 거기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더보기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페이건이 키스도 안 하고 살았냐며 핀잔 주는 말로 미루어 보아서는 이가 닿았을수도 있겠다.

 

감각이 이렇게나 둔해졌나, 하는데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서늘한 바람에 식은 체온하며.

 

지문의 요철까지 간질간질하게 입술을 긁었다.

 

그것을 자극하자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페이건은 커다랗게 뜨인 눈을 보고는 짧고도 기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대해 묻기도 전에 손이 아제이의 옷 위를 긁어내렸다.

 

보지 않아도 촉감이 느껴지나? 어떻게?

 

아제이의 눈이 필사적으로 아래를 향해, 손을 감지하려고 했다.

 

페이건은 손톱을 세웠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이 튀어나갔다.

 

어느 순간에인가 아제이는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음을 알았다.

 

옷이 끌려내려가자, 아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골 깨지겠네.

 

아제이는 찌르는 것처럼 강한 햇살에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덮고는 커튼을 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이 곳이 양귀비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새빨갛게 피어난 양귀비.

 

하늘은 새파랗고.

 

굴러다니는 갈색 병을 제외하면 짙은 녹색 풀과, 길은 하얀색...?

 

아제이는 제 밑에 깔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 군복은 대체 뭐야?”

 

 

글숨봇(매짧글): 상상의 동물

2021. 7. 20. 00:55 | Posted by 호랑이!!!

 

아가, 또 왔어?”

 

너도 벌레면서 왜 나보고 아가래?”

 

그랬더니 가게 카운터에 난 버섯 위, 새파란 몸을 한 애벌레는 껄껄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껐다.

 

뭐야, 또 담배 피웠어? 내가 가게에서 피우지 말랬지.”

 

등에 커다란 날개가 돋은 백마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있는 힘껏 날갯짓해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날려보냈다.

 

같이 날아갈뻔 한 애벌레는 길쭉한 담뱃대를 카운터에 딱딱 내리치며 화를 냈다.

 

, 애기 왔네.”

 

손바닥만 한 작은 요정은 쟁반에 음식을 쌓고 종종걸음치다 인사를 건넸고 연못에서 상체만 내민 인어들은 과일을 넣고 만든 차가운 샹그리아를 홀짝였다.

 

지상의 여름은 진짜 너무 덥다니까.”

 

맞아맞아, 이런 걸 먹는 건 좋아하지만... ..., 거기 인간 아기. 우리랑 같이 바다 갈래? 거기 엄청 시원하다?”

 

인어들이 바위에 몸을 기대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거기 인어들, 뒤 좀 보지?”

 

길고 푹신한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는 대리석 매트 위에서 등을 대고 누워 있다가 앞발로 홱 가리켰고, 인어들은 뒤를 보았다가 그들을 엄하게 내려다보는 한 쌍의 새를 보고 깜짝 놀라 팔을 저었다.

 

아니, 저희가 뭘 하려고 한 건 아니구요...!”

 

날이 더우니까요! !”

 

쟤만 그랬어요! 저는 그럴 생각 없었어요!”

 

배신자!”

 

금방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고 물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 중에서 도포 소매를 적신 백호랑이가 있었는데 그는 혀를 끌끌 차며 흰까치가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시럽 좀 타오래도.”

 

어르신 나이를 생각하세요. 단 거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좀 먹게 두어라. 요즈음은 담배도 안 피우지 않나.”

 

호랑이님 담배를 피웠어요?”

 

, 인간 아기가 왔구나. 요즘 아기들은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라는 말을 모르나?”

 

알고 있어요.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아하, 요즘은 담배 먹는다는 말을 안 쓰는구나.”

 

백호랑이는 도톰하고 보송보송한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까치님은 왜 하얀색이에요?”

 

새 비단옷에 벼루 엎은 것은 내 손주놈이거든.”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방정맞기 짝이 없었지...

 

흰까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깃털로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푸르르 저었다.

 

아무튼 인간 아기야, 너 아주 잘 되었구나. 내가 이래봬도 길조란다.”

 

까치가 깍깍 울었다.

 

그리고 이 분이야 말해 무엇하랴, 존재만으로도 삿된 것들을 물리치는 길함의 상징! 모든 길짐승의 왕! 온 산의 산군!”

 

엣헴, 하며 백호랑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니 문 밖의 저것도 못 들어온 게지.”

 

그리하여 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니 백호랑이 앞발이 눈을 가렸다.

 

어허, 아기한테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얘야, 저런 것 보지 말고 이만 가 보아라.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구.”

 

사람들이 기다려요? 라고 묻는데 흰까치가 날개를 얼굴 앞에서 펼치는 바람에 차가운 연못 위로 넘어졌다.

 

인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에선 봉황새가 놀라 깃털을 퍼덕였다.

 

첨벙, 소리가 들리고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더니.

 

“-선생님, ㅇㅇ환자 눈을 떴습니다!”

 

방 안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문 밖으로 시선이 갔다.

 

열린 문 틈으로 검은 옷자락이 스르르 사라졌다.

 

코 끝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걸려 있었는데 그조차 점차로 희미해져 병원의 소독약 냄새만이 그 대신으로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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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2021. 6. 23. 17:17 | Posted by 호랑이!!!

핸드폰의 LED가 조용히 반짝였다.

 

놀랄 만큼 빠르게 손에서 너클이 벗겨지더니, 크나트는 얼른 물에 손을 씻었다.

 

아니, 꼭 지금 그래야겠어요?! 정말로?!”

 

뭐 묻은 손으로 액정을 만질 수는 없잖아.”

 

그런 말은 과자 구울 때나 하세요!”

 

녀석 참.

 

크나트는 상자 뒤로 몸을 웅크린 어린... 젊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무스가 손에 묻어 질겁하고 다시 씻었다.

 

그런거 쓰지 말랬지. 오존에 구멍이 뚫린단 말이야.”

 

잰체하며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자 조직원은 크악, 소리질렀다.

 

나이든 티 나요!”

 

뭐 임마. 아저씨 손에 죽어 볼래? 엄호나 잘 해봐. 얼른 보내고 다시 할 테니까.”

 

근무 태만!!!”

 

놀랍게도, 크나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언제 옵니까?

 

나도 빨리 보고 싶어. 달링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문자가 돌아왔다.

 

저녁을 만들어야 하니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달링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크나트는 얼른 너클을 끼고 근접한 사람의 머리를 세차게 가격했다.

 

퍽 퍽 치면서도 한 손으로 열심히 타자를 치는 도중, 갑자기, 피가 액정에 튀었다.

 

아 이것도 쇠라고 피가 튀네...”

 

크나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에 물을 적셔 액정을 닦아냈다.

 

그럼 달링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얘기야?

 

이제야 다시 잘 쳐진다.

 

보지도 않고 발로 총을 든 손을 힘주어 밟으며 연달아 문자를 보냈다.

 

내 사랑스러운 작은 딸기라고 부르는 건 괜찮다는 소리군

 

 

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답장이 돌아왔다.

 

좋아,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딸기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크나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밟고 있던 팔을 콱 내리찍었다.

 

대체. 설마 싸우면서 인스타라도 보고 있어요?”

 

신부님이 느낌표를 보냈어.”

 

젊은 마피아는 그래서요? 라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다른 설명이 더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신이 나서 손을 씻었다가 핸드폰을 만졌다가 닦았다가 하는 율리케 씨를 보았다.

 

대체 신부가 느낌표를 쓴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율리안이 고통받는 세계관

2021. 5. 22. 01:17 | Posted by 호랑이!!!

어이, 거기 까만 아기고양이.”

 

이 사람이 정말.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길, 율리안은 두꺼운 서류철에 가방을 꽉 쥐고 눈을 있는 힘껏 사납게 떴다.

 

이제 하다하다!!!?”

 

후후, 제법 앙칼진걸?”

 

율리안은 자신의 길을 막은 청년을 보고, 서류철을 더 꽉 쥐었다.

 

이탈리안은 다 이런가?’

 

나는, 인상이 제법 나쁘지 않은가?

 

..., 혹시 이것은 기선제압? 돈을 뜯는 행위 이전에 일부러 내 기를 죽이려고 그러는 거구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율리안은 안심해서 가방을 뒤적였다.

 

원만하게 넘어가려면 차라리 돈을 줘 버리는 게 좋으니.

 

저도 시간강사라 그렇게 돈이 있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봐주십시오.”

 

커피 한 잔으로 까만 아기고양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

 

????

 

??????????????????

 

“...케이크? 쿠키? ?”

 

율리안은 스스로는 놀란 상태지만 타인에게는 더 무시무시해 보일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 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

 

지금 작업 거는 겁니까?”

 

!”

 

이 치안 좋은 동네에 이런 게 돌아다니다니.

 

마피아가 산다는 시점에서 질 나쁜 농담 같은 생각을 하며 율리안은 자기 학생 또래의 청년 앞에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저는 동거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고양이의 기사는 지금 없잖아? 즐겁게 놀고, 안전하게 잘 바래다줄게. 내가 아는 좋은 가게가 있는데~”

 

율리안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동거인의 신상정보를 말해주었고, 그 사람은 예의바르게 도망쳤다.

 

하다하다 별 일이 다 있어.

 

하지만 커피는 좋은 생각이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 하면서 학생들 숙제나 채점해 볼까.

 

동거인에게는 카페에서 한 잔 하고 들어간다는 문자를 남긴 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키고 해 안 드는 자리에서 빨간 색연필을 들었다.

 

이 부분 해석은 다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학생은 아주 이해를 완전히 잘못했군.

 

이건 심지어 교재 예문 그대로인데? 이걸?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두통이 생길 즈음 때마침 커피가 나왔다.

 

시선은 학생들 시험지에 두고 컵을 들어 한 모금, 홀짝-

 

으윽!?”

 

웬일로 그렇게 단 걸 먹어?”

 

연분홍 음료 위에 듬뿍 올라간 휘핑 크림과 색색으로 반짝이는 설탕 조각과 깜찍하기 짝이 없는 별 모양 쿠키에 당연하다는 듯 올라간 아이싱까지...

 

사랑스러운 모양의 유리컵을 내려놓으며 율리안은 차마 뱉지 못한 것을 삼키고 학생들의 숙제를 정리해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걸 시키진 않았습니다만 가게 측에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여기, 묻었어.”

 

입술이 닿았지만 퍼득거릴 기력이 없다.

 

생기없는 눈으로 율리안은 크나트의 손에서 거칠게 도기 잔을 뺏었다.

 

하얀 잔 안에 진한 갈색 액체가 뜨끈뜨끈한 하얀 김을 내뿜는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 잠깐, 그건-”

 

달아!!!!!!!!!!

 

율리안은 눈을 질끈 감고 잔을 내려놓았다.

 

여기 메뉴 잘못 나왔습니다.”

 

율리안이 손을 들자 머릿수건을 한 종업원이 깜짝 놀랐다.

 

에스프레소 두 잔 주십시오.”

 

“...달링, 나는 코코아 맞는...”

 

에스프레소 두 잔 주십시오.”

 

크나트에게 자기 앞으로 나온 기가 막힌 음료를 밀어주고 기다리고 있으니 새로 음료가 나왔다.

 

주문하신 멜론 소다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애플 사이다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카라멜 더블 라떼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스트로베리 초콜릿 프라푸치노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바닐라 라떼 엑스트라 휘핑크림&시럽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인어공주와 바닷속 친구들 버블티 파르페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러블리큐티바니바니 달걀 초콜릿 아이스크림나왔습니다... 어라?”

 

우리 가게에 이런 메뉴가 있었나?

 

초콜릿 토끼와 당근 모양 과자가 듬뿍 올라간 기기묘묘한 것을 보다 율리안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애플 사이다를 찔끔 마시고 크나트가 나머지를 해치우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각설탕 놀이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4. 00:30 | Posted by 호랑이!!!

다그락.

 

다그락.

 

각설탕이 비틀비틀 쌓였다.

 

비틀비틀, 비뚤비뚤 쌓인 각설탕은 기둥도 없고 주춧돌도 없이 성이 되고 산이 되었다.

 

이걸 좀 보라고 부르는 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며 두꺼비를 부르는 노래.

 

꼬마들이 하는 놀이.

 

빈 각설탕 상자는 바람에 굴러 날아가고 부스러진 설탕은 입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부스러지지 않은 것도.

 

마지막 아침으로, 세 개를 한 번에 입에 털어넣고 지레 찔려 웃었다.

 

각설탕 몇 개가 밥 한 그릇이라고 했더라?”

 

마치, 이 녹슨 버스 환승 정류장에, 내가 혼자이지 않은 것처럼.

 

마치 이 세상에, 나 외에 누군가 살아있는 것처럼.

 

 

Alien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2. 00:52 | Posted by 호랑이!!!

(※핸드폰이 읽어주는 문장은 실제로 번역기를 돌린 후 옮긴 것입니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쩌렁쩌렁하게 스피커가 울렸다.

 

그리고 손가락이 다시 세모 버튼을 톡 눌렀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금색, 오렌지색, 갈색, 반짝이는 머릿결의 청년들은 둥글고 삐죽삐죽한 구조물 앞에서 핸드폰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은 어느 모로 보나 한국인은 아닌 사람들이 내민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

 

, 누군가의 발걸음이 멈췄-

 

으르르르르르

 

어허, 안돼 보리야! !”

 

. .

 

우리가 외계인 있...”

 

형제님들 교회 다니세요?”

 

톡톡톡톡...

 

우리가 외계인... 배터리가 5퍼센트 미만입니다!”

 

핸드폰은 똑같은 문장만 수백 번 반복하다가 주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5! 퍼센트! 미만이라고!

 

그리고 픽, 화면이 꺼지자 핸드폰 하나에 옹기종기 붙었던 세 명의 청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 충전기 가지고 있는 사람]”

 

“[전 없음다]”

 

“[시간도 늦었고. 그냥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제 앞에 네이티브 노인이 멈추자 드디어 반응이 왔다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외계인...”

 

그건 실컷 들었어, 이눔아!!!”

 

따악!

 

금발이 찬란한 청년은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어어?”

 

“‘?’는 뭐가 ! 어어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외국 나오면서 외국어 한 마디 안 익혀서 나와!”

 

이 건방진 놈! 이 자문화중심주의 놈!

 

으아악 교수님! 미안해 학새... 어어, 아임 쏘리? 이 분이 나쁜 분은 아니셔!”

 

, 이 조교! 한국에서 이 좋은 한국어를 놔두고 양놈 말을 쓰다니! 너도 한패냐!”

 

교수님 진정하세요!”

 

저런 놈들을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맨날천날 존잘님의 연성에 ‘eng plz :)’같은 게 붙는 거야!”

 

아이고 교수님 트위터 그만 하세요!!!

 

이 조교의 손에 교수님은 질질 끌려갔고 지팡이로 위협당한 세 명의 청년만 폭풍이 지나간 뒤에서 심신이 낡고 지쳤다.

 

집에 가고 싶다.

 

해가 지고 어두컴컴하니 별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 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자신들의 우주선을 돌아보았다.

 

고향별 최고 기술로 만들어진 화력 무기가 실려 있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우리... 외계인이라고...]"

 

"[항복... 했으면 좋겠다...]"

 

 

[이쿼프레] 아기수박

2021. 5. 5. 00:39 | Posted by 호랑이!!!

“.....”

 

프레이는 이쿼녹스의 꼬리를... 정확히는 꼬리에 달린... 덩어리... 열매... 아기...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구르는 모습에 수박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기 아우라는 이쿼녹스의 꼬리 끝에 야무지게 매달려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움직여도 떨어질 기색이 없었다.

 

“당신...”

 

“프레이, 왔어?”

 

...무엇이 문제인가.

 

1. 삐졌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저 아기 아우라

2. 어린이가 꼬리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려있는데도 떼어내지 않는 어른 아우라

3. 떼어내기는커녕 뭐가 문제냐는 듯한 저 태평한 표정의 어른 아우라

 

 

4. 저 아우라.

 

“...이라는 사람은!”

 

찰싹!

 

손바닥이 등에 작렬했다.

 

“아기가 꼬리에 달려 있잖아요! 비늘이랑 가시도 있는데! 찔리거나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그치만-”

 

그치만이고 저치만이고!

 

프레이는 수박이를 덥석 잡아 들어올렸다.

 

그러나 수박이는 팔다리를 놓지 않아 꼬리까지 덜렁 들렸다.

 

수박이를 이렇게 위로 들어 보고.

 

“...꼬리 당겨, 프레이...”

 

수박이를 이렇게 옆으로 들어 보고.

 

“프레이이, 나 꼬리-”

 

수박이를 이렇게 탈탈탈탈탈.

 

“으아아아아아!!!”

 

“...힘이 좋은걸...”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힘이 좋았던가? 프레이는 아기 수박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이잉!”

 

그제야 수박이가 꼬리에서 고개를 뗐다.

 

베인 곳도 긁힌 곳도 없군, 좋아.

 

이쿼녹스는 무심결에 꼬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꾸욱 비늘을 눕히며 등 뒤에서 일어나는 대화에 뿔을 기울였다.

 

“그래요 그래요.”

 

“저 사람이.”

 

“꼬리를 줬는데.”

 

“잡고 걸어서...”

 

꼬리를 잡고 걸었는데 저 사람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날았다고.

 

불길한 기운에 이쿼녹스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흉흉하게 번뜩이는 붉은 안광이 있었다.

 

 

 

 

 

약간의 마찰음과 약간의 소음과 약간의 대화 후, 프레이는 다시 아기 수박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아마도.”

 

자아 다시 잡아 보세요.

 

프레이의 손길에 아기 수박은 다시 땅을 디디고 서서 이쿼녹스의 꼬리 끝을 잡았다.

 

시험삼아 이쿼녹스가 텁 텁 텁 걸음을 옮기자, 아기 수박은 톡토톡톡톡 뒤를 따랐다.

 

그 흐뭇한 광경을 지켜보다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기 수박이는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네에, 이리 와서... 잡으라구요?”

 

끄덕끄덕.

 

프레이는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랑말랑한 꼬리를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텁 텁 텁.

 

톡톡톡톡톡.

 

그 뒤를 무릎걸음으로 슬슬 따라가는데 아기 수박이 이쿼녹스의 꼬리를 톡 톡 잡아당겼다.

 

“이제 부-웅 안 해?”

 

“안 할 겁니다.”

 

그렇죠? 라고, 이쿼녹스를 올려다본 프레이가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쿼녹스는 말하지 못했다.

 

또! 를 외치는 아기 수박을 놀아주고 놀아주고 또 놀아주다가 그만두는 바람에 삐지게 만들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