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이는 밀주 한 병을 들고 언덕에 앉았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DJ 라비의 방송이 유쾌하고 발 아래로는 양귀비밭이라 바람이 불 때면 짙은 색 꽃송이들이 차르르 흔들리며 짙은 향기가 코와 입을 막았다.
낮 동안 데워진 땅은 선선한 바람에 식어가고 목조 울타리로 구분된 길은 하얗게 정돈된 데다 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에 지상의 것은 실루엣만이 보인다.
이 곳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해치우는 중임에도 일견 머릿속이 빌 정도로... 비워도 좋을 정도로, 안전하게 느껴졌다.
혹자는 이것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하겠지.
저 아래에서는 불침번을 서는 아미타의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다시 말해 페이건 민보다 세이벌을 더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주사위 하나와 총알 몇 알 가지고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어떤 과학 실험 같은 것에 빠져서 불침번용 오두막 근처로 가면 불쾌할만큼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모한의 아들!”
듣자하니 누군가 야크 육포를 가져온 모양이다.
육류라면 제일 싼 통조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냥을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건 꽤 드문 일인데다 아제이는 물건을 소비하기보다는 날라 주는 쪽이었기에(그리고 술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근래 아미타의 일을 몇 가지 처리해주었더니 그들은 아제이가 그들과 함께 한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들 게임에 끼워줄 생각은 없는지 그 중 하나가 일어나더니 꽉 찬 술 한 병, 육포 몇 조각, 동글동글한 뭔가를 몇 개 건네주고 돌아갔다.
종이에 그린 낡은 게임판이 보였지만- 뭐, 누가 그들을 나무라겠는가.
이 밭까지 오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몇 개인데.
그러니 아제이도 모처럼 술이니 경치니 하면서 여유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술 한 병에 크기가 들쭉날쭉한 육포를 깨물다가 건네받은 물건 중 둥글둥글한 것에 시선이 갔다.
본의로 약물을 이것저것 접하다보니 이게 뭔지 직감적으로 알 것 같다.
파이프에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아래에서 쨍그랑,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연기를 깊이 들이쉬었다가 악기를 연주하듯 훅 불었다.
검게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재가 부유하고 아제이는 이런 순간이라면 멈춰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아제이.”
할 뻔 했는데요 이...
“너도 이제 성인이니 잔소리는 많이 하진 않겠지만, 몸을 망치고 싶다면 이것보다 더 건전한 방법이 많이 있단다. 정 궁금하면 나랑 한 번 알아보지 않겠니?”
눈을 뜨자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파이프는 이미 땅을 구르고 있었고 이 몸뚱어리도 땅에 뒹굴고 있군.
시선을 위로 돌리자 이 척박한 키라트에서는 보기 드문 깨끗한 옷과 잘 정돈된 머리가 보였다.
팔이 들렸다.
힘을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인데 마치 나무토막의 아래를 밀어올린 것처럼 올라가서 페이건의 멱살을 잡았다.
“...이건 촉감도 느껴지는군...”
“세상에, 아제이! 얼마나 한 거야?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약 효과 죽여주네.
아제이는 페이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왁스를 발라 빗어넘긴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쿡 찔러 망가뜨리고 얼굴도 쭈욱 잡아당기자 뒤에서 당황하는 것 같은 발소리가 났다.
앉은 것이 무색하게 뒤로 몸을 기울여 고개를 꺾자 군화를 신은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군인?”
페이건은 아제이를 내려다보다 이쉬와리의 눈 위에 손을 덮었다.
‘속옷 한 장까지 빠짐없이 벗고 망이나 보러 꺼져’
달빛이 대낮처럼 환했다.
페이건은 군인이 옷을 벗는 것을 기다리다 짜증을 내며 그 머리에다 속옷을 내던졌다.
손바닥 아래에서는 아제이가 눈을 떠 보려고 하는 것인지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방금 군인이 총을 들고...”
“군인? 무슨 군인?”
손이 치워지자 아제이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페이건 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옆을 더듬어 파이프를 찾았다.
“그런 건 하등 좋을 바 없어.”
“그럼-”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너무 높거나 낮게 들렸다.
“...알려 줘, 건전하게 몸을 망치는 방법...”
말이야, 하고 더 잇기도 전에 아직도 잡힌 멱살이 가까이로 당겨졌다.
성급하게 당긴 손인데도 페이건은 거기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페이건이 키스도 안 하고 살았냐며 핀잔 주는 말로 미루어 보아서는 이가 닿았을수도 있겠다.
감각이 이렇게나 둔해졌나, 하는데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서늘한 바람에 식은 체온하며.
지문의 요철까지 간질간질하게 입술을 긁었다.
그것을 자극하자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페이건은 커다랗게 뜨인 눈을 보고는 짧고도 기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대해 묻기도 전에 손이 아제이의 옷 위를 긁어내렸다.
보지 않아도 촉감이 느껴지나? 어떻게?
아제이의 눈이 필사적으로 아래를 향해, 손을 감지하려고 했다.
페이건은 손톱을 세웠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이 튀어나갔다.
어느 순간에인가 아제이는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음을 알았다.
옷이 끌려내려가자, 아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골 깨지겠네.
아제이는 찌르는 것처럼 강한 햇살에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덮고는 커튼을 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이 곳이 양귀비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새빨갛게 피어난 양귀비.
하늘은 새파랗고.
굴러다니는 갈색 병을 제외하면 짙은 녹색 풀과, 길은 하얀색...?
아제이는 제 밑에 깔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 군복은 대체 뭐야?”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롷] 고대au (0) | 2022.03.29 |
---|---|
[장르: 영문법] to 부정사를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 (0) | 2021.11.11 |
[이쿼프레] 아기수박 (0) | 2021.05.05 |
[bns]탈론을 위한 괴담2 (0) | 2021.03.17 |
[전오수] 치트, 패치, 퍼블리와 다른 동료들 (0) | 2020.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