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이 있었어. 거기 바다가 꽤 괜찮던데 휴가나 갈까?”
이제 슬슬 휴가철이잖아, 라고 하는 것에 율리안은 마악 입에 밀어 넣었던 피자를 꼭꼭 씹어 삼켰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아서 안 됩니다.”
“그럼 주말은?”
율리안이 잔을 들자 크나트가 병을 기울였다.
이 남자는 술도 안 하는 주제에 꽤 괜찮은 술을 골라온단 말이야.
언제든 저장고에서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자신이 고르지 않아도 그 날의 식사에는 제법 어울리는 술이 따라오고는 했다.
한 모금 마셔 입 안을 가신 다음에야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
이 안에 베리류를 담그면 맛이 더 좋아지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는데 문득 거슬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와인병에 뚜껑을 닫는다.
“누구랑?”
저 사람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유달리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가 귀에 거슬렸다.
“학생이 잠시 만나자고 해서요. 토요일 오후 즈음 나가서 과제랑 수업 이야기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올 예정입니다.”
“교수가 수업시간 외에 학생을 만나도 되나?”
“남자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교수도 아니고.”
불만스러운 시선이 율리안에게 닿았으나 율리안이 고개를 드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주말이 되기까지 크나트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어쩌면 혼란인지도 몰랐지만 크나트도 율리안도 표정에 그렇게 세심한 편이 아니었다.
좀 알아차릴 것 같은 사람들은 일부 조직에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도 크나트의 너클에 실린 힘으로 가늠이나 할 정도일까.
“...아 찜찜하네.”
한바탕 육체노동을 마치고 크나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뭐가 말입니까?”
어제 저녁에 머리를 비울 거라며 잔뜩 구웠던 쿠키 바구니를 내밀면서도 크나트는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겠어.”
뭐 이런 게 다 있담, 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크나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고 한참이나 지나서 다시 입이 열렸다.
“...저녁 먹으러 갈래?”
“사주는 겁니까?”
“...아냐 안 갈래.”
“...”
“아!니지 갈까!”
“...제가 살까요.”
“아아아냐 안 가. 안 가.”
미친 영감.
어느 조직원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크나트는 저녁때가 될 때까지 사무실 소파에서 엎어져 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배달시킨 중국 음식을 깨작거리면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일이 더 없을 거 같은데 먼저 집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무슨 일 있어도 연락 안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몸을 일으키는 것에서 그래, 내일 보자!며 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린 조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용하는 검은 차를 타고 크나트는 어느 식당 앞까지 갔다.
식당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으므로 한참 빙글빙글 돌다가 문간에 보이는 사람에 차는 갓길에 멈추었다.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은 익숙하지 않은 흰 셔츠 차림을 하고 멀끔한 얼굴로 종이를 보며 이야기한다.
자연히 시선은 맞은편에 닿았다.
반짝이는 금발은 멋을 부려 넘기고 저런 식당에 가는 것 치고는 옷도 제법 번쩍거린다.
맘에 안 들어.
크나트의 손에 들린 쿠키가 우득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마악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둘은 자전거를 묶어놓은 곳으로 향했고 크나트는 창문을 내렸다.
“신- 아니, 스호르.”
“또 보는군요.”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거든. 타겠어?”
금발은 검게 선팅된 검은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학생이지? 학생도 태워줄까?”
“아...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교수님!”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뒷모습에 크나트는 자그마치 닷새 만에 흥,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율리안은 크나트의 차 시트며 옷에 과자 부스러기가 쏟아진 것을 보고 경악했고 청소를 돕겠노라며 크나트를 쫓아냈다.
시키는 대로 청소기를 가지고 나온 크나트는 운전석에 고개를 숙인 율리안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 소리는 죽이고, 인기척도 없애고.
바로 뒤까지 와서도 조용히 등을 내려다보다가.
그러다 손이 다가갔다.
목을 조를 듯 벌어진 손에 눈은 깜박임도 없이 멈췄다.
이대로.
쥐기만 해도.
이제야 만들어진 안온한 이 관계는 깨어지겠지.
하지만 그것이 미워하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나 머릿속을 차지하는 첫 번째가 나라면.
생각하는 것이 나라면-.
쿠키를 부스러뜨릴 때처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목을 잡아챌 것 같았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주먹을 간신히 움직여 유리에 닿으면 노크처럼 그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나 왔어.”
“깔개는 털어 두었습니다. 여기에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서-”
“율.”
“뭡니까?”
크나트는 웃었다.
“내가 좋아, 아까 그 학생이 좋아?”
율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청소기나 주십시오.”
“내가 더 좋다고 하면 주지.”
또 이런다.
“당신이 더 좋습니다. 됐습니까? 빨리 청소기나 내놓으십시오.”
율리안은 킬킬거리고 웃는 크나트의 손에서 청소기를 잡아채듯 빼앗고는 바로 스위치를 켰다.
하여간 이 사람은, 진지해지는 때가 없다고 율리안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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