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으레기’
킴은 생기없이 흐린 눈으로 교단에 선 메로스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베이지색 포근한 니트에 남은 연핑크색 립스틱 자국을.
‘도오둑노옴의 새끼...’
분명 그 애, 교복을 입고 있었지.
끽해야 삼십 후반인 놈이 잘도 고등학생 딸이 있으시겠다.
게다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까지 요일마다 자식이 바뀌지 뭔가.
‘x xx xx’
차마 활자로 옮길 수 없는 감탄사를 떠올리며 킴은 볼펜 끝을 물어뜯었고, 교단의 메로스 K. 오르바토스 교수는 자신과 필기를 열렬하게 바라보는 킴을 기특하게 여겼다.
“방금 이야기한 분자 구조에 대해 할 말이 있나, 학생?”
“왜 그렇게 붙는지 궁금한데요.”
“좋은 질문이야!”
거기서부터 불이 붙은 메로스는 갑자기 ppt로 대체했던 칠판 앞으로 가 서더니 듣도 보도 못한 식을 쫘아아악 적기 시작했다.
“여기 이 식은 다음 학기에 나오는 거긴 한데 증명은 우리가 배웠던 걸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재 218p에 있는... 다들 책 폈습니까? 그래요, 거기 두 번째 상자 안에...”
“왜 다음 학기에 배우는 식을 지금 배운 걸로 증명할 수 있는데요?”
“그건 이 식이-”
“왜 증명을 해야 하는데요?”
“그건 재미있는 질문인데, 그 당시의 학자들이...”
“왜요?”
“왜요?”
“왜요?”
110분이 지났다.
쉬는시간도 없이 진행했는데도 아직 메로스 교수는 할 말이 남았다고 딱 한 시간만 더 하자고 했다가 학생들의 ‘다음 수업이 있습니다!’ 세례를 맞았다.
“하... 이 설명이 참 중요한데...”
메로스는 정말 아쉽다는 듯 칠판을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열정적인 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킴은 가방을 다 싸둔 채였다.
“아이고, 오늘 이 단원까지는 다 나갔어야 했는데... 오늘 수업은 이대로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자네.”
“제가 벌써 2학년인데 어떻게 제 이름을 모르실 수가 있으십니까? 저는 킴입니다.”
“그래, 킴블리 플로리안 학생.”
이리 오라는 손짓에 킴은 종이에 뭐라고 작살나게 쓰고 있는 메로스한테 갔다.
“무슨 일인데요?”
“학생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적어두었네.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내 사무실로 오고... 그 아래쪽은 그 주제에 관한 자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적어두었으니 나중에 해 보게.”
오, 딱 봐도 복잡하고 골아파 보인다.
거절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까지는...”
“‘너무 어려우면’ 안 해도 되네.”
뭐씨?
약 99퍼센트의 확률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 말은 킴블리의 귀에 ‘쫄?’이라고 번역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교수가 음흉하고 수상쩍고 비열하게 웃는 표정을 배경으로.
“‘븐드시’ 흐 으긋슴느드...”
몬스터와 박카스의 힘으로 킴은 일주일 뒤 수업시간까지 과제를 해 갔다.
며칠간의 밤샘으로 독이 오른 킴은 그 시간에도 질문을 퍼부었고, 메로스는 기뻐하며 새 과제를 주었다.
물론 그 과제도 성공했다.
그래서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또 과제를 받고.
또 해내고.
그러는 동안 킴은 조교와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언가가 수상쩍게 부글부글 끓는 소리.
불쾌한 냄새, 유독한 물질들.
사람들은 초췌한 얼굴로 조그마한 유리판을 들여다보았고, 무언가를 쉴새없이 써내려간다.
아아, 그 무시무시한 곳은.
메로스의 대학원 랩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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