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도리 안녕!”
“안녕! 놀러왔어!”
아르카디아는 누가 감히 그런 이름으로!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시종도 없이 에샤드카와 일레하 쌍둥이가 양 손에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오더니 방 가운데 앉았다.
여간한 아이라면-혹은 어른이라도- 들 수 없는 무게의 상자는 땅에 내려놓자 묵직하게 흔들려서 아르카디아는 기대어린 눈으로 냅다 바닥에 쪼르르 뛰어갔다.
쌍둥이는 고작 몇 년 새에 또 훌쩍 커버린 아르카디아의 손을 잡고 바닥에 앉혔다.
“이거 내 거야?”
“응, 이건 네 거야.”
“아빠랑 아빠랑 일레하가 만들었어! 그래서 가져오는 건 내가 했다?”
상자를 열면 에셀리온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커다란 나뭇잎의 잎맥만이 엷게 남아서 눈가에 대어도 건너편이 훤히 비쳐 보인다.
그리고 과일을 듬뿍 사용한 과자, 향이 나는 나무와 비단천을 사용하여 만든 장난감, 무엇이 자라는지 모를 커다란 화분은 도자기였고 빵돌이는 모르는 무슨무슨 기법을 사용하여 새겨진 그림은 거대한 용과 과일 나무다.
거기에 깃털이랑 가죽이랑 육식동물의 이빨 같은 것이 나왔고 에샤드카는 내가 찾은 거야! 라며 활짝 웃었다.
호기심어린 손이 상자를 휘젓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금방이라, 아르카디아는 일레하가 에샤드카를 쓰다듬는 것과도 같이 손에 묻은 흙을 벨벳 바지에다 문질러 닦았다.
세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그러시면 안된다며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에는 셋뿐이었고 또 혈기왕성하였기에 엎치락뒤치락 장난질까지 쳐서 우아하게 지어진 반바지는 회생 불가로 보일 정도로 온갖 이물질이 묻고 구겨졌다.
“으아아아!”
“좀 더 괴로워해.”
“이 정도는 괜찮지?”
그리고 쌍둥이 둘에게 깔려버린 빵돌이는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위에서 일레하는 히죽히죽 웃으며 빵돌이를 내려다보았고 에샤드카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주어 무게를 분산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다 돌연 빵돌이의 발이 웬 상자를 걷어차 균형을 잃은 에샤드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야야야...”
“나 방금 뭐 찼는데? 걷어찼는데?”
빵돌이가 벌떡 일어나자 일레하는 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에샤의 옆으로 구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걷어찬 물건은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일레하의 능력으로 눈에 띄지 않게 들여온 상자는 빵돌이도 들 수 있었고 흔들었더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도 내 거야?”
“아빠 방에서 몰래 갖고 왔어.”
상자는 귀한 것, 좋은 것을 다 보고 자란 세 황자의 눈에도 귀해 보였다.
백단목을 말리고 잘라 만든 모양은 얼핏 수수해 보였으나 장인의 손길로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잠금쇠의 모양은 잘 보았더니 긴 꼬리를 가진 용인데다 엷게 신성한 문양이 새겨져서 아이들 손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 종류로.
어른의 물건이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일레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 아이는 선물상자를 열어볼 때보다 가까이 둘러앉아서 몸을 기울였다.
“외국으로 수출도 잘 안 하고, 성인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줄 수 없게 금지된 과자가 있어.”
“그런 게 있어?”
거기에 에샤드카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정말 달콤한 맛이 나는데 딸기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과일의 맛도 안 나. 심지어는 꿀도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말이야. 폐하 아빠한테 올라온 보고를 몰래 봤어. 이걸 먹으면 잠을 안 자도 힘이 나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몸이 따끈따끈해지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한 번 본 글도 줄줄 외울 수 있대.”
“약 아니야? 정말 과자야?”
“나 그거 본 적 있어. 새까맣고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무지무지 좋은 냄새가 났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은 물건이니까 우리한테는 안 주는 것 같아. 폐하 아빠랑 아빠는 매일 밤 새니까 매일 먹는 게 아닐까?”
세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범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으로 일레하는 상자에 손을 대었다.
“...연다.”
아이들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용의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상자의 뚜껑은 가볍게 들렸고 천천히 일레하가 여는 것을 견디지 못한 빵돌이가 홱 열어젖혔다.
뚜껑이 넘어가며, 안의 조그만 상자들이 빛에 요란하게 반짝였다.
검은 바탕에 금색 띠를 두른 것, 은으로 무늬를 양각으로 음각으로 새긴 것들, 자개 장식이 달린 것, 진주나 산호가 박힌 것, 금과 은을 녹여 그림을 그린 것까지 호사스러운 작은 상자들이 정갈한 위에는 몇 겹으로 접힌 서신이 있다.
북쪽의 자비로운 빛, 생명의 지배자, 모든 풍요로움을 누리시는 분(...중략) 에셀리온 폐하께.
“남의 편지는 보면 안 돼. 나중에 갖다드리자.”
우리는 지금 남의 상자를 가지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일 없이 다시 상자로 눈을 돌린다.
“으리으리하다-”
“얼른 열어보자.”
아이들은 제각기 하나씩 들고 상자를 열었다.
신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인간을 모두어 기르니 그 자는 대륙의 황제가 되었다.
그 신화는 사실이고 황제의 자부심이었기에 집무실이며 너른 복도의 벽에는 황제에 대한 이야기와 신에 대한 그림과 조각이 있었다.
웅장함은 그 사람을 닮아서,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가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깨진 접시와 사과를 건너뛰고 다가온 아르데스는 팔을 높게 든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이상한 가죽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즙액 같은 것.
인공적인 손길이 틀림없이 들어갔을 거대한 진주 다발.
길쭉하고 매끈한 몸체가 투명하여 유리나 보석인가 싶었으나 흔들었더니 고무처럼 탄력 있게 움직이는 것.
아르데스는 심호흡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썼느냐.”
그 안에는 여간해서 듣지 못했던 아르데스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우리 엄청 나쁜 일 했나봐.
엄청 큰일 났나 봐.
아이들은 움츠러들었다.
“썼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말 하라 재촉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비죽비죽 비어지는 입술에 울먹이기까지 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끅, 그, 끅! 끕!”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레하가 사으쟈를-”
“-아빠 방에으흑!”
“잘못택.... 으흐어엉!”
“잠깐, 울지 마라.”
“사으, 샤, 아아아아!”
“으앙-”
“무서어!!!”
“괜찮아, 괜찮다니까!”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아르데스는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겠다 혼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야 했다.
간신히 달래고 황제의 몸으로 손수 마실 것을 가져오니 아이들은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면서 울음을 그쳤다.
“다시 물어보겠다. 썼느냐.”
시무룩해진 에샤드카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네...”
“네라고?!”
에샤드카가 덜그럭 움직임을 멈추자 아르데스는 급히 목소리를 낮춰 아니다, 혼내는 거 아니다, 갑자기 목에 삑사리가 난 것 뿐이다 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이를 달래는 아르데스의 눈에, 일레하의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울면서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저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기에는...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끈적끈적한 액이 흘러나온 가죽 주머니가.
아르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 그 액을 손가락에 비볐다.
“......이건 다 무엇이더냐.”
“과자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게 들어있었어요.”
“아빠 방에 있길래 가져와봤어요.”
“먹어봤는데 안 달아요. 이상한 맛 나요.”
빵돌이가 상자를 밀어주었다.
“너희들, 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남의 물건을 막-”
찬란한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달그락.
딸깍, 찰그락, 딸깍딸깍.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사라락.
출렁출렁 끈적끈적 미끈미끈.
“...막?”
“...아, 막 들어가고 하면 안 되지. 막 가져가거나 열어보거나 그러는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빵돌이 너도 삼촌 물건을 가지고 놀면-”
딸깍.
위이이이-
딸깍!!!!!
덜그럭덜그럭덜그럭덜그럭!
“놀면-?”
“...무슨 물건인지 먼저 물어보고 허락을 구한 다음에 했어야지. 큼!”
상자는 아쉬운 듯한 손길로 닫혔다.
아이들은 상자 뚜껑에 가려져 아르데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래 보였다.
“나중에 삼촌이 편지 한 장 써 줄테니까 가져가라.”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에샤드카가 아르데스의 팔에 꽉 매달렸다.
“아빠랑 아빠한테 말하지 말아주세요!”
일레하는 머뭇거리다가 어깨에 매달렸다.
아르카디아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아르데스의 다리를 잡았다.
세 명 정도야 매달려도 꿈쩍 않았지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혼내라고 쓰는 편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서야 아르데스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
“삼촌-”
땅에 내려서면서 아이들이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상하게도 호기심 같은 것이 아이들의 눈에 담겨 있었다.
여기서 뭔가 더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나? 하는 의아함에 아르데스는 왜 그러느냐 하는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저 상자에 있는 거 뭐예요?”
금방 후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이어 도망갈 길을 찾다가.
아이들이 그 흉한 것들을 쥐고 사람들한테 물어볼 상상을 했더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르데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 그거 곰방대다.”
“곰방대?”
아르카디아가 물었다.
“담뱃대?”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샤드카는 무어라고 묻는 대신에, 상자 중 하나를 꺼내 탱글탱글 신기한 감촉인 것을 찾아 아르데스에게 내밀었다.
“한번 써 봐요-”
눈을 질끈 감고 아르데스는 손을 뻗어 대충 밀어냈다.
“나는...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
아빠도 흡연자 아닌데, 하는 어린 조카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르데스는 나라 어딘가의 화산을 폭발시켰다.
물건 간수 잘 하란 말이다, 에셀리온!!!
물론, 물건은 사마낙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아르데스가 이를 알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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