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트는 젤라토를 들고 교정을 어슬렁거렸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퍽 낯설고 그 사람들이 죄다 제 또래라는 것은 더더욱 낯이 설다.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에 안경을 낀 사람이 제 앞으로 지나가자 크나트는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인상을 콱 찌푸렸다.
“염병.”
그 늙-만 아니면!
그리고 크나트는 무심코 생각한 늙다리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자기 취향은 자기 또래 사람이거나 한두 살 어린 쪽인데.
아니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야하다고 생각한 거야? 왜?
절대로 내 취향이 아닌데!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젤라토가 담긴 과자 콘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영감탱? 영감? 아저씨? 아무튼 늙 어쩌구 저쩌구는 빼고.
이름을 듣기는 한 거 같은데 뭐였지.
“-스호르 교수님.”
움찔.
크나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후다닥 대리석 기둥 뒤에 숨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교수님, 이걸 해석해봤는데요 문법이-”
“이 부분은-”
질문 같은 거 하지 마라.
빨리 꺼져.
크나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을 진지하게 노려보았다.
빨리 꺼져라 빨리 꺼져, 꺼져꺼져꺼져꺼져.
그 진지한 사념에 손에 들린 젤라토가(어린아이에게 빼앗은 것이다)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크나트는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을 째려보았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잠시 고개를 들었고, 크나트랑 눈이 따악 마주쳤다.
그 사람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왜 나를 노려보지?’
그다지 필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 사람은 라틴어 수업은 물론 대다수 수업에서 1등을 차지하는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 똑똑한 학생은 교수님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녹음하면서도 저 노려보는 사람과 자신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날 노려볼 이유가 없지’
와작.
크나트의 손에서 젤라토가 찌그러지며 바짓단을 더럽혔다.
“악, 차가!”
상처 있는 손을 거칠게 탁 털자 핑크색 깜찍한 덩어리들은 풀숲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내렸다.
그리고 똑똑한 학생은 문득 떠오르는 그럴싸한 가설에 교수님의 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스호르 교수님, 저 사람과는 아는 사이인가요?”
율리안은 돌아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질척질척하게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외에는.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겨우 외운 학생들 몇 명 외에도.
“누구랑 말입니까?”
“어라? 어디 갔지?”
학생은 별 일 아닌가보다 하고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한편, 저 먼 곳의 기둥 뒤에서는 운동량에 비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크나트가 있었다.
가뜩이나 불량스럽게 차려입은 정장이라 매었다기보다는 걸쳤다는 말이 올바를 넥타이임에도 잡아당기자 손 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다.
달짝한 냄새가 나는 손을 재질에 비해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 옷에다 마구 문지르자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비쌌을 옷의 품격이 한 단계는 더 내려갔다.
“에잇, 쳇!”
애당초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라고 시작하는 불평을 하려는 찰나 크나트는 몸이 굳었다.
짙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녹색빛이 자신을 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
멈춰버린 것 같은 사람들을 두고 시간이 또 흐르고.
마침내 크나트가 움직였다.
“안 따라왔어!”
율리안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달짝지근한 딸기 냄새가 풍겼다.
“안 물어봤습니다.”
덩치 크고, 목소리 크고, 성격도 나빠 보이고.
게다가 힘도 세어서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무서워해 본 적 없을 것 같이 생긴 젊은이인데.
자신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때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따라온 것 같군요.”
“아, 아니라니까!”
율리안은 일부러 힘을 주어 한 발짝 탁, 소리 나게 발을 디뎠다.
움찔, 하고 큰 덩치가 놀란다.
미끄러진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어 올리면서 다시 발을 세게 콱, 디디려고 하는데 발 아래 단단한 구두가 밟혔다.
"...이봐 스호르 교수님."
실수인 척 뒤로 발을 빼려던 율리안은 흉흉한 녹색 눈을 보고서 직감했다.
잡아먹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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