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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6

2019. 6. 22. 00:28 | Posted by 호랑이!!!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누나 뭐 하나 궁금해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달려들어 머리에서 목덜미, , 몸 할 것 없이 냄새를 맡았다.

 

“...낙트?”

 

그러자 마르틴의 품에서 작게 삐익, 소리가 났다.

 

살짝 열린 가방 안에서 날개달린 작은 이 나와 가죽 날개를 퍼덕이면서 슈체른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을 감싸고 팔을 잡고 삑 삐익 우는 소리를 내서 자칫했다면 뱀이 슈체른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슈체른은 기쁜 듯이 뱀을 안았고 뱀은 슈체른이 검은 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몸에 감겼다.

 

아아 우리 아가, 이다지도 우리를 가슴 졸이게 하다니 혼을 내야겠습니다.”

 

삐가 낙트예요?”

 

?”

 

그제야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름은 낙트입니다. 이 산에 사는 용족 중 막내이고 불과 얼마 전에 성체가 된 어린 용의 첫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이 애도 용이니 날러 가야지!’라며 바실리와 함께 날아가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사라져서 그만.”

 

슈체른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깊은 한숨이었다.

 

삐익

 

바실리스크가 아니었구나, 하며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듣자하니 마르틴 당신이 우리 아가를 돌보아주었다고 하는군요. 이 일에 대하여서는 부디 보답하게 해 주십시오.”

 

별말씀을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슈체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이가 마르틴은 라고 불러주어도 좋다고 합니다.”

 

삐익, 하고 삐가 울었다.

 

아라벨라는 잘 모르겠지만, 슈체른과 마르틴은 삐가 엄청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면서 잠시 난리가 났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삐는 슈체른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가 어느 쪽을 쳐다보더니 푸드덕 아래로 내려섰다.

 

낙트가 이쪽이라고 합니다.”

 

조그만 뱀은... 아니, 낙트는 조그마한 발로 직접 땅에 내려가더니 토끼들이나 지나다닐 정도로 낮은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낙트, 그런 데 들어가면 안 보이니까 이리 오십시오.”

 

저어, 당신은 삐... 아니아니, 낙트와 어떤 관계 되시나요?”

 

애기 이모 됩니다.”

 

슈체른은 한 손에 소풍바구니를 들고 있었으므로 아라벨라는 낙트를 어깨 위에 올렸다.

 

낮은 수풀을 헤치고 슈체른이 제일 먼저, 그 다음이 아라벨라, 마지막으로 마르틴이 밟힌 풀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잠시만요, 이모라고요? 삐의?”

 

이 모습은 여러분과 활동하기 편하니까 임시로 변한 모습이고.”

 

무슨 당연한 것을 물어보고 있냐는 듯, 어린아이에게 빨간색과 노란색을 더하면 주황색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듯 슈체른이 마르틴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 모습은 크기나 모습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 쪽? 정말로?”

 

삐는 잎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굴 앞에 서더니 날개를 바쁘게 퍼덕였다.

 

태어난 지 두 달이라고 했던가, 제대로 날지는 못하지만 대신 빠르게 달릴 수 있어서 아차한 사이에 굴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풀을 치우자 드러난 굴은 사냥개라도 지나갈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랬지만 아무래도 사람이라면 체구가 작아도 드나들기 힘들 것 같았다.

 

저는 지나갈 수 있어요.”

 

눈치를 보다 마르틴이 손을 들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마르틴이라면 어떻게든 지나갈 것 같기는 했지만 아라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안돼.”

 

저도 갈 수 있습니다.”

 

슈체른이 말하더니 다음 순간 슈체른이 있던 자리에는 윤기나는 검은 뱀 한 마리가 혀를 내민다.

 

그렇지만 아라벨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젓더니 슈체른이 용 모습일 때 몸에 감는 길다란 검은 끈을 쥐었다.

 

무슨 일 있으면 두 번 잡아당길 테니까 당겨줘.”

 

아라벨라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는 굴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조그마한 마도구로 앞을 밝히며 기어가다보니 삐가 퍼덕 퍼덕 날갯짓을 했다.

 

얼만큼을 더 기어갔더니 갑자기 땅이 아래로 훅 꺼져서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며 앞으로 굴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라고 셀 수 없을 만큼 구르고 또 구르더니 마침내 푹신한 흙더미에 몸이 떨어졌다.

 

“...부러질 뻔 했네.”

 

아라벨라는 목을 주무르며 손에 꽉 쥔 마도구를 켰고 창백한 불빛이 굴 안을 비추며 빛에 약한 벌레들을 내쫓는다.

 

이리저리 손전등을 휘두르자 벽에서 사사삭 기어가는 것들에 약한 현기증이 느껴져서 아라벨라는 꾹 참고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에 집중했지만 머리카락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머리를 빗는 손가락에 착 달라붙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 무언가는 벽에 맞고도 툭 떨어져 바사삭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아라벨라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냈다.

 

!!! 이 망할! 기어가는 버러지만도 못한!”

 

못 참았다.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만큼은 꽉 누르면서 아라벨라는 젖은 개처럼 머리를 푸르르르륵 털었다.

 

 

재촉하듯 삐 소리가 나서 빛을 아래로 향했더니 삐가 아라벨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더 가야해?”

 

삐익.

 

고개를 젓는다.

 

삐는 바위 위로 기어오르더니 조그만 앞발로 삭삭 긁는 시늉을 했다.

 

바위?

 

아라벨라는 조금 더 가까이로 다가갔다.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러운 천 뭉치였다.

 

손에 잡히는 부분을 당겼더니 풀어지더니 아라벨라 앞으로 굴러떨어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시체를 한여름에 일주일 묵혔다면 이런 냄새가 났을까 싶은 지독함에 아라벨라는 헛구역질을 하고 손수건을 코와 입 앞에 대었다.

 

정말 싫다

 

손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손이 움직인다니 아라벨라는 더더욱 기절할 것 같았다.

 

벌레나 두더지 같은 것이 시체를 건드리면 죽은 줄 알았던 시체의 몸이 들썩거리면서 움직인다는 글을 예전에 읽은 적 있었기에, 저 손을 건드렸다가 피부 아래까지 파먹은 벌레들이 얇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상상이 저절로 되었다.

 

“..., 그으...”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는 제발, 이라는 표정으로 삐를 보았지만 삐가 낸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 나가서 슈체른보고 여기 굴을 넓혀 달라고 할 수 있어?”

 

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안 있어 검은 용 모양 슈체른이 굴을 넓히며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기어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걸어서 나올 수 있었고, 아직 해는 쨍쨍했다.

 

몸을 감싼 천뭉치는 누군가의 망토였다.

 

마르틴은 도시락 가방에서 바닥에 까는 용도로 쓰던 하얀 천을 꺼내고 아라벨라는 그 사람을 감싼 망토를 벗겼다.

 

펄럭펄럭 요란하게 천이 흩날렸다가 떨어지고.

 

아라벨라는 흰 천을 두르려다 그 사람의 얼굴로 잡아당겨진 듯 시선을 향했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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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5

2019. 6. 18. 20:18 | Posted by 호랑이!!!

 

물 위로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라벨라가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기를 바란 것 같았다.

 

사실은 꽤 효과적이어서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상체를 홱 기울였더니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예리한 날이 가죽옷 위를 긁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목숨이 위험하다.

 

저 사람은 적의에 가득차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칼은 길고 날카롭고, 조그만 봉투 따는 칼도 베이면 아프지만.

 

이상하게도 아라벨라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손을 씻느라고 벗어두었던 장갑을 억지로 끼자 젖은 손은 가죽 안에 낑겨 힘겹게 들어갔다.

 

아라벨라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의외로 침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뒤로 물러서서 아라벨라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칼은커녕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 때는 아라벨라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날이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것이 똑똑히 들렸고 아라벨라는 장갑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칼의 옆면을 쳐냈다.

 

가죽이 굉장히 튼튼한걸.

 

칼날을 그대로 맞아도 별로 다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라벨라는 다시 날아드는 칼날을 쳐냈다.

 

.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당장이라도 달음박질을 하고 싶지만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처음으로 말을 타고 넓은 벌판을 달렸을 때.

 

그 때와 닮은 감각.

 

카앙.

 

세 번이나 칼날을 쳐내고 그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그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물어뜯을 차례.

 

손을 쓰는 게 훨씬 쉽지만, 아라벨라의 팔 힘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칼을 휘두르느라 그가 벌린 거리만큼 앞으로 나서고.

 

아라벨라는 다리를 들어올렸고 무릎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다리 사이를 세차게 가격했다.

 

달걀이라도 있었다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을만한 힘으로.

 

검은 형체가 아라벨라의 앞에 풀썩 무너지고 옆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아라벨라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은 겨우 한 대를 때리려고 이렇게 뛰지 않을 테지.

 

유효하게 들어간 공격은 아라벨라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렐리악의 해츨링.”

 

흥분한 머리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아라벨라가 손을 든 순간 들린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 대는 때렸을 것이다.

 

“...나 그렇게 어리지 않은데.”

 

종류를 불문하고 그렇게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해츨링 뿐입니다.”

 

슈체른이 손을 들자 반짝반짝하게 닦인 거울이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뺨은 장밋빛으로 상기되었고 눈은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반짝이는데다 운동량에 비해 숨이 거칠다.

 

무엇보다도.

 

아라벨라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해츨링 시절을 벗어나려면 앞으로 이백년은 더 지나야 할테니 멀기도 했고.”

 

이백년은 너무 멀어.”

 

괜찮습니다, 눈 깜짝하면 금방이니까.”

 

슈체른의 손짓에 거울이 사라지고 대신 아라벨라가 때려눕힌 검은 옷의 사람이 들어올려졌다.

 

살아있네?”

 

검은 혀가 슈체른의 입가를 핥았다.

 

인간 안 먹은지 오래 됐지...”

 

안돼.”

 

농담입니다.”

 

시원스럽게 잘생겼던 슈체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이런 걸 잔뜩 주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뚝 뚝 떨어져 쌓였다.

 

하나, , , .

 

아라벨라가 잡은 사람까지 다섯.

 

죽었어?”

 

아직. 죽으려고 하고는 있지만요.”

 

보시겠습니까? 라면서 슈체른이 손을 움직이자 불길하게 뿌드득 소리가 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사람의 입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나왔다.

 

점심 먹고 시작할까요, 먹기 전에 시작할까요?”

 

, 고문을?”

 

아니 무슨 험악한 소리를, 이라며 슈체른이 손사래를 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정 싫지는 않아 보였지만.

 

기억을 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몸수색도. 고문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고.”

 

그 전에, 잠깐 이야기 해봐도 돼?”

 

물론입니다.”

 

사람의 몸을 감싸던 마력이 내려가자 그 사람은 오래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라벨라는 그 사람 앞에 섰다.

 

“...그렇다.”

 

나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다. 렐리악 백작의 적자.”

 

그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안다.”

 

날 죽일 이유가 없잖아. 렐리악은 어떤 귀족 가문과도 척지지 않았고 특별히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지도 않은걸.”

 

인간에게는 그렇겠지.”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정말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터라 아라벨라는 의아해졌다.

 

그럼 정령이나 엘프나 노움이나 드워프한테는?”

 

“...”

 

농담은 아닌데.”

 

그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노려보았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날 죽이러 온 거 맞아? ? 시킨 건 누구지?”

 

그런 것에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사람은 혀를 내밀었다.

 

깨문다!라고 생각한 순간 슈체른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입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가 났지만 슈체른은 아파보이기는커녕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까요?”

 

대화로 끝나면 좋을 텐데. 내가 정말 평화롭고 안온하게 살아와서 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검은 옷의 사람이 외칠 뻔 했다.

 

무슨 가문 아가씨가 발길질을 하냔 말야?!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때렸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조금만 더 일찍 빠졌어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하지만 슈체른은 시간을 들여 망설이다 손가락을 빼었고 아라벨라를 잠시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포섭을 해 보겠습니다. 거기 당신, 금은보화를 주고 외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 말하겠습니까?”

 

슈체른은 품에 손을 넣고 뒤적이더니 아이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박힌 목걸이를 꺼냈다. 색 옅은 푸른 보석이 주르르 박힌 것이 세 줄이나 되고 갈래갈래 떨어져서 술처럼 보이는 줄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 있다.

 

눈이 목걸이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흔들리고 있군요.”

 

, 그런 것 따위! 우리 용묘간부들은 쉽게 가질 수...!”

 

“...용묘?”

 

그러자 그 사람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별로 흔한 이름은 아닌걸. 정보 길드는 정통 보라매 사냥꾼 연합이잖아. 암살자 길드는 제일 큰 데가 암석 어쩌고였으니 저런 이름이면 더 눈에 띌 텐데.”

 

그 사람은 다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슈체른이 저지했다.

 

젠장,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한 건지 알아!?”

 

그 사람이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슈체른도 아라벨라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알 게 뭡니까.”

 

알 게 뭐람.”

 

아라벨라는 슈체른이 그 사람을 잡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두른 로브를 확 펼쳐서 살펴보았다.

 

조그마한 암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아라벨라의 얼굴이 그려진 종잇조각도 하나 나오고 돈주머니도 나오고 아예 로브를 찢어버리자 안에 입은 옷이 드러난다.

 

튼튼한 천옷에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고 그 천 옷의 등에 용이 그려진 것은 인상적이다.

 

렐리악의 용이 날개를 펼친 비룡이라면 이 사람의 옷은 날개는 없는 용이었는데 머리가 아래로 가고 몸통이 위로 향해서 잘못 붙이기라도 한 건가 했다.

 

이거 떼 줘.”

 

분부대로.”

 

슈체른은 손톱을 세우더니 다른 준비도 없이 문양을 옷에서 뜯어냈다.

 

그 사람은 파르르 떨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날 이렇게 모욕하다니!”

 

아까까지 죽으려고 했으면서 뭘 이 정도로 모욕이라는지.

 

“...귀족이지? 당신.”

 

사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아라벨라이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잘 안다.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다, 문장에다, 그 형식에 얼마나 멋을 부려놓았는지 자기네들 모임 이름을 용묘라고 해 놓았다.

 

왜 귀족이 암살자 흉내를 내고 있어?”

 

, , 흉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 같으니!”

 

뻐억, 소리가 나고 그 사람은 끄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죄 없는 자의 목숨을 그대 욕심으로 노린 죄, 자기 방어를 쉽게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노린 것하며 신체 말단부터 조각내 고통 속에 죽게 해도 그 입은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어야 한다. 뻔뻔하게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죄를 통감하게 해주마.”

 

슈체른의 눈은 동자가 뾰족하게 갈라져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라벨라는 차마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라벨라 뿐인지, 그 사람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 렐리악의 여자는 이미 인간의 성인식을 치렀다, 그리고 죄가 많아! 뻔뻔한 것은 그대들이며 겨우 고통 따위는 나를 꺾을 수 없다!”

 

그래?”

 

슈체른은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피가 튈지도 모르니 조금만 뒤로 가 계십시오. 시장하신다면 먼저 도시락이라도.”

 

아라벨라는 뒤로 물러나 연못가에 앉았다.

 

주먹과 발톱이 아주 잠시동안 난무하고 그 사람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겨우 고통 따위로는 꺾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치고는 포기가 빠른걸.”

 

, 수만... 아가브....”

 

뼈는 안 부러진 거 같은데 이는 부러졌나보다.

 

누가 죽이라고 보냈어?”

 

나뉴... 그거.... 여기에...”

 

그 사람은 자기 품 속을 손짓발짓으로 가리켰고, 아까는 별 거 발견 못했는데 이상하다며 슈체른이 목을 죄는 마력을 풀어주자 스스로 품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면서 윽, 소리를 냈다.

 

사아... 으어어...! 사려...! 아파...! 흐어어 아퍼!”

 

급하게 옷을 들춰 보니 조그만 칼로 가슴을 찔렀다.

 

그야 칼로 찌르면 아프겠지.

 

자기 스스로 찔러 놓고도 살려달라고 웅얼거리던 그 사람은 일 분도 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 또다시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몸을 홱 틀었더니, 거기에서 나온 것은.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항복이라는 시늉을 하는 마르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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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4

2019. 6. 14. 00:38 | Posted by 호랑이!!!

 

이제 물러가라.”

 

사피야 다르데니아는 한때 눈처럼 하얀 카펫 위에 가을 하늘같이 옅은 푸른색 침대를 두고 겨울가지처럼 꾸민 화장대와 책상, 사피야만을 위한 책꽂이에 가장 좋아하는 책과 장인들이 만든 인형, 장식품을 늘어놓았다.

 

각 벽마다 새가 앉은 모양의 가지를 꽂아 거기에 등불을 걸었던 네모난 방의 천장은 안쪽을 둥글게 깎고 금을 발라 테를 둘렀으며 가운데에는 진한 푸른색을 칠해 붉은색으로 물고기와 꽃을 그렸다.

 

창틀에 걸어둔 레이스 커튼이 풍성하게 흩날리면 파도치는 것처럼 보였던 천장의 연못은 사피야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방에서 사피야는 천사였으며, 그 천사는 하늘이나 구름에 연못을 내려다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때로 그 자리에 사람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도 함께했었다.

 

자신만을 위한 방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때는 몰랐지.

 

같은 백작이라고는 하나 다르데니아 저택은 렐리악의 세 배는 되었다.

 

사피야 렐리악은 개인 방이 없었고, 낮이면 시녀들과 지내는데다 밤이면 셰필라가 찾아왔기에 개인 시간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님, 천이 이제야 배달왔는데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종들은 사피야가 한때 평민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데니아 백작가라는 것을 알아 별 말 없이 지시를 따랐고, 일부 사피야를 좋게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지만 사피야는 어렵지 않게 복종시켰다.

 

어련히 잘 하였겠니. 무슨 일 있으면 돌려보낼 테니 잠깐 거기 두어라.”

 

결혼식을 올린 후 바쁘게 감사 편지를 쓰고 신전과 왕실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전부 사피야의 몫이었다.

 

그 후로는 저택의 재산에 관해 외워야 했고 그 다음에는 바꾸는 커튼, 이불, 불을 밝힐 기름이나 식재료나 장작에 관한 것들이 사피야에게 몰려왔다.

 

결혼하자마자 마르틴을 떼 놓은 것에 대하여 원망도 있었으나 이렇게 일이 몰리니 지금은 마르틴이 옆에 없는 게 다행이다.

 

그렇게 일하여 두 주만에 일 전반을 끝내고 사피야는 의자에 늘어졌다.

 

이 곳은 저택의 도서실.

 

다른 방하고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은데다 장서 수도 적다.

 

책꽂이로 가려지는 소파는 그나마 사피야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옷에 화장이 눌리지 않게 조심한 사피야는 책을 훑어보았다.

 

청소는 주기적으로 하지만 몇 번 펼쳐보지 않은 티가 난다.

 

“.....?”

 

역사서 한 질.

 

언어 책이 다섯 권.

 

종교에 관한 책 세 권.

 

음악에 관한 책이 세 권.

 

예의범절에 관한 책이 세 권.

 

마법과 마나에 관한 책이 두 권.

 

금전을 다루는 일에 관한 책 한 권.

 

왕국의 다양한 법에 관한 책이 한 권.

 

대륙의 다양한 일을 기록한 책이 또 한 권.

 

다 합해서 쉰 권이나 될까 하는 책은 너무나도 적다.

 

아무리 책이 사치품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지나치잖아.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귀족의 품격에 관한 일이다.

 

렐리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죽이나 비단천에 글을 쓴 것도 몇 개는 있음직하건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 연습을 할 만한 책이나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용도로 쓰는 얇은 책은커녕 성인의 흥미를 위한 잡기 책이나 소설책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피야, 뭐 하고 있소.”

 

들리는 소리에 사피야는 책꽂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을 때는 그가 정말 천사같았지.

 

사피야가 웃자 셰필라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책이 있나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옛날에 셰필라 당신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하고.”

 

그건 이 저택에 없어.”

 

어머나, 정말요?”

 

손이 잡혔다.

 

셰필라의 팔이 사피야의 허리에 감겼다.

 

이 저택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온 거라서. 게다가 서재를 한 번 정리했거든.”

 

그럼 아라벨라는요?”

 

그 애는 여기서 컸지만. 사피야, 계속 말 할건가?”

 

짙은 색 드레스 자락이 손짓에 올라갔다.

 

결혼한 날의 밤 셰필라는 그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평민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잊지 않고 구해 온 것이라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직도 그 더럽고 좁은 집에서 흙탕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사피야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사피야가 처음으로 마음과 몸을 허락한 상대였다.

 

게다가 잊지 않았고, 아직 미워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바실리 아비에스 렐리악을 찾으러 다닌지 일곱 날이 되었다.

 

“...이 넓은 데를 다 돌아다녔네...”

 

산 위를 날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땅 위를 달리면서 아라벨라와 슈체른은 꽤 친해졌다.

 

첫날에는 금방 지쳐하던 당신이 갈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기, 일반적인 인간들은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지친다고.”

 

당신 참 인간처럼 자랐나 봅니다.”

 

그야 인간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 참.

 

아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용이랬지.

 

아라벨라는 입 밖으로 말하는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해가 지면 데려다주고 해가 뜨면 데려갔으니 해 있는 동안, 적게 잡아도 12시간은 계속 걸은 셈이다.

 

그나마 저 용이 거추장스러운 짐에서부터 덥다고 벗은 겉옷까지 다 들어주니 망정이지 이러저러한 장비까지 아라벨라가 들어야 했다면 진작 포기하고 기사단이나 꾸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 나 배고팠어.”

 

연못에 손을 담그다 말고 아라벨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슈체른은 씨익 웃더니 점심 먹기 좋은 곳을 알아보겠다며 인간 모습에서 날개만 꺼내 날아올랐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정화해준다는 무슨 가루를 조금 넣고 마력을 불어넣자 물병이 손 안에서 흔들렸다.

 

가죽 물병인데도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있어 멈추었고 아라벨라는 물병을 허리에 찬 뒤 연못 위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며칠의 외출 때문에 그을려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얼음처럼 색소가 옅었고 훨씬 반짝였다.

 

게다가 근육이 붙어서인지 더 단단해 보였고, 아라벨라는 가죽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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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평화로운 오후

2019. 6. 11. 21:34 | Posted by 호랑이!!!

에잇.”

 

!”

 

크나트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율리안이 제 앞을 지나갈 때를 노려 팔을 뻗어 낚아챘다.

 

남의 무릎 위에 주저앉게 된 율리안은 움찔하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뭡니까? 대낮부터!”

 

뭐긴, 모처럼 주말인데 좀 친해져볼까 해서지.”

 

율리안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대부분 저 인간이 호감을 표현하는 끝은 몸으로였고, 절반 정도는 침대에서였으니까.

 

나머지 절반의 절반 정도는 소파에서나 차에서이고.

 

어제 그렇게 해 놓고 말입니까? 당신 정말-”

 

친해지자는 데에서 섹스부터 떠올리다니 역시 내 몸만 보는 거지? 흑흑.

 

거구의 남자가 애처로운 척 우는 시늉을 하니 눈에 힘이 들어간다.

 

저 남자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영화라도 볼까?”

 

됐습니다.”

 

그럼 음악을 틀까?”

 

됐습니다.”

 

뭘 했으면 좋겠어?”

 

지금은 당신이 절 놔주는 겁니다.”

 

그러나 몸에 두른 팔은 풀리지 않는다.

 

그럼 이대로 있을까? 수다도 좋지.”

 

율리안은 체념의 한숨을 쉬었고 몸에 두른 팔에는 힘이 조금 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년과도 같은 5분이 지났다.

 

율리안은 저쪽 방에 둔 운동기구나 책상 위의 책을 떠올렸다.

 

뭔가 집중할 것이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자신이 깔고 앉은 것이 남의 허벅지라는 것이고, 운동복과 면바지 너머로 무언가가 하나 더 느껴지기 때문인(것이 더 컸다) 일이다.

 

보고 느끼고 맛본-율리안은 그런 천박한 표현을 떠올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것이 한참이니 크기나 촉감에 있어서는 잘 기억하고 있었고 비록 off상태더라도 자신의 몸 아래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율리안은 크나트를 흘끔 보았다가 은근슬쩍 몸을 빼려 했지만 감긴 팔이 막았다.

 

놔주십시오.”

 

-잃어.”

 

이 젊은 신부님은 참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크나트가 생각했다.

 

분명 지금은 긴장을 했는데, 겁을 먹었나 싶다가도 그의 평소 행실을 떠올리면 그건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내 내가 뭘 어쨌다고.

 

평소에 얼마나 젠틀하게 대했는데 이렇게나 긴장을 한담.

 

목덜미에 입김을 훅 불자 파드득 몸이 떤다.

 

무어라고 하기 전에 이마를 그의 등에 기댔더니 얼굴 아래에서 근육이 긴장해 서는 것이 느껴졌다.

 

뭘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까 처음에는 말이다, 적어도.

 

하지만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나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그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마 이것은 자신이 다분히 사회적인 사람이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크나트는 이마를 기댄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벌리고.

 

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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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3

2019. 6. 7. 23:47 | Posted by 호랑이!!!

 

솟아오를 때는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며 잎사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데일라를 타면서 익숙해졌지만 몸을 아래가 아닌 뒤로 당기는 중력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눈을 떠, 렐리악의 어린 용]

 

웃음기어린 목소리에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산이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도 보였다.

 

바람에 깎인 거대한 절벽과 하늘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래 보이고 그 사이로 사슴이 뛰어가거나 하늘에 새가 날아간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그저 흙 쌓인 언덕일 뿐 렐리악 백작주택이 있는 곳의 평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높이 올라와서 보니 높낮이가 있고 정말 산의 모양이 등뼈 같았다.

 

흐르는 녹색 바람은 기분 좋게 아라벨라를 감싸고 머리 위로는 태양만 있을 뿐이라.

 

이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아라벨라는 감동적이기까지 한 경관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어때?]

 

다시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다.

 

바람에 눈이 말랐기 때문인지 눈가가 젖었고 눈물이 고였다가 눈꺼풀을 깜박이자 툭 떨어졌다.

 

손 아래에서 슈체른이 웃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몸 아래에서도.

 

으악!? 아니, 꺄악!? 탔어?!”

 

[그래, 탔단다. 렐리악의 어린 용아]

 

슈체른은 깔깔 웃으면서 날개를 쭉 폈다.

 

[떨어지기 싫으면 꽉 잡는 게 좋을 거야]

 

아까보다 더요?

 

아라벨라는 질린 얼굴로 끈을 꽉 쥐었고 슈체른이 날개를 세우자 속도가 정말로 빨라져서 얼굴에 바람이 마구 부딪혔다.

 

으아아아아아아...!”

 

 

 

 

 

 

 

 

마르틴은 어두운 방을 싫어한다.

 

사피야와 살았을 적의 집은 초 하나를 사기가 어려워서 해가 지기 무섭게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야 했다.

 

이삭을 줍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물을 떠 오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사피야는 단 한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기에, 마르틴은 겨울에 천으로 틀어막아야 하는 창문 앞에서 나무껍질 책을 읽었다.

 

사피야는 마르틴이 태어나고 나서 집 밖으로 거의 외출하지 않았기에, 마르틴도 자연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자랄 기회가 없는 눈치로도 사피야가 자신을 내보내지 않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신전에 가서 신관들에게 고대어를 물어보거나 더 가끔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짧은 외국어로 관심을 끌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을 빼면, 마르틴은 바깥에서 놀 수도 없었다.

 

마르틴은 사피야를 사랑하니까.

 

비록 마르틴이 아는 가족은 사피야와 자신 뿐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 보았던 가족들의 행동과 사피야의 태도는 달랐기에.

 

마르틴은 사랑받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벽 틈이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으면서도.

 

빛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머나먼 곳의 사막이나 끝없는 바다, 구름 위에 있다는 신들의 나라를 탐험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도.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의 웃음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막대를 들고 칼싸움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비치는 해가 얼마나 찬란한지, 달이 얼마나 우아한지, 그 아래에서 뛰놀고 흙을 밟고 풀을 뜯고 나무에 기어오르고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고 띄워보내면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하면서도.

 

사피야가 자신을 싫어할까봐 그런 상상을 하는 모든 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다렸다.

 

사피야가 말해준 아버지는 먼 곳의 높은 사람인데 아버지가 자신들을 데려가면 봄날의 딸기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고 몸도 아프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신이 행복할 거라고 했었으니까.

 

신전의 유리창에 그려진 천사처럼 잘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던 셰필라를 보았을 때에는 기대만큼 실망했었지만, 대신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만났다.

 

어머니가 말해주지 않았던 가족은 첫날에 어머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왕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늠름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화를 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에 마르틴은 감탄했다.

 

너무 넓어서 식당이 아니라 마을 광장처럼 느껴지는 곳에 나와있는 자신을 보고서도 화내지 않았고.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난을!

 

이후로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동생이 되었다.

 

가방 속의 뱀에 대한 것을 공유하고 침대 위에서 뛰었고, 아라벨라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예절을 배우고 자세를 고치고 억지로 지식을 우겨넣었다.

 

그랬는데.

 

“...또 혼자 남겨졌어.”

 

작은 창문이 있을 뿐 다른 광원이 없는 복도는 검게 보일 만큼 어둡다.

 

순간 예전의 그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털다시피 내젓는다.

 

생각하지 마.

 

다른 생각을 해.

 

복도는 검게 보이는 그대로이고, 자신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덮어야 해.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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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2019. 6. 6. 19:10 | Posted by 호랑이!!!

에췻!”

 

따뜻한 울다하에 집이 있기는 하지만 페드와 라레타는 종종 커르다스에 방문하고는 했고, 급격한 온도차를 겪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페드 역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 기침을 하고 열이 올라 있던 라레타를 간호한 것 때문에 옮은 모양.

 

라레타가 아프다고 했을 때는 어렵잖게 했던 각종 죽이나 수프에서부터 사탕, 초콜릿, 약을 만드는 것은 물론 청소를 하거나 환기를 하거나 하는 일조차도 다 귀찮다.

 

하지만 페드는 몸을 일으켰다.

 

아픈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자신의 재채기에 귀가 쫑긋한 라레타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주고 저녁으로 먹을 양배추말이 소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기침 한 거야?”

 

재채기입니다.”

 

이 작은 미코테가 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얼굴 빨간데.”

 

사막의 독뿔 도마뱀도, 바다의 해적도, 숲의 멧돼지도, 사람도 위험한데.

 

“...요리 불이 세서.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데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데, 아닌 거 같은데, 라고 하면서도 라레타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서 페드를 지켜보았는데 꼬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보아하니 영 수상쩍게 여기는 모양이다.

 

얼굴을 씻고 온다는 핑계로 화장실로 빠져 거울을 보니 정말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원래 피부색이 진하니까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다보니 알 수 있는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라레타에게 먹이고 남았던 약병을 꺼냈다.

 

쓴 약을 마시고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약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치질을 한 번 더.

 

찬물로 몸을 식히고 나갔더니 요리는 마악 완성되었다.

 

“...역시 얼굴이 빨간데.”

 

, 접시 좀 꺼내주겠습니까? 예쁜 걸로. 수저도 좀 놓아 주고. 꽃도 꽂을까요? 무슨 꽃이 좋습니까?”

 

! ...숟가락 먼저? 접시...”

 

어느 걸 먼저 하느냐 안절부절 하다가 라레타는 접시부터 꺼내러 우다다 달려갔다.

 

휴우.

 

식사 도중에 또 기침을 하기는 했지만 사레 들린 것 뿐이라며 훌륭하게 넘긴 페드는 뿌듯한 마음으로 디저트를 듬뿍 꺼냈다.

 

타닥타닥 백색 소음처럼 타오르는 벽난로는 따뜻한 온기를 집 안에 퍼뜨렸고 장작과 함께 넣은 라벤더 줄기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향기를 뿜어냈다.

 

다녀왔습니다-”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라면 조심히 다니라고 벌컥 성을 냈겠지만, 자칫했으면 잠에 빠졌을 뻔 한 페드로서는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

 

거대한 집사 바리톤은 페드와 눈이 마주치자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는 시늉을 했지만 그렇다고 그 덩치가 작아지거나, 정말로 조용해지지는 않을 거 아닌가.

 

“...되었으니 문만 좀 열어놓으십시오. 환기를 하게.”

 

저 주인이 웬일로 유하게 굴지?

 

어리둥절해진 바리톤은 보송보송 건강한 모습으로 과자를 입에 문 라레타를 보자 오늘은 기분이 좀 좋은가보다- 정도로 납득하며 페드 앞에 오늘의 획득물을 꺼냈다.

 

이거는 바다초롱이고-”

 

그렇군.”

 

이거는 알라그 금화고-”

 

그렇군.”

 

주인님은 아프고-”

 

그렇지. ...?”

 

감기 걸린 거 아닙니까? 얼굴도 빨갛고 숨소리도 다르고-”

 

페드는 집사 급료로 바리톤을 걷어차 쫓아냈다.

 

역시 아픈 거지!”

 

“...아닙니다.”

 

축 늘어진 눈가로 라레타를 올려다보자 라레타는 페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걱정 마, 내가 끝내주게 보살펴 줄테니까!”

 

“...라가요...?”

 

라레타는 페드를 침대에 밀쳐 눕혔다.

 

아니, 잠깐. 아프지 않습-”

 

그리고 요란하게 재채기 한 번.

 

마실 거 가지고 올게! 약은? 밥은? 맞아, 밥은 먹었지?”

 

그러니까 수프 끓여 올게! 이거 먼저 먹어!

 

라며 입에 꽂아 준 것은 감기약이었다.

 

뭣도 모르고 삼켜버린 덕분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런 것은 괜찮으니까, 신경을...”

 

옮기면 안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급격하게 잠이 온다.

 

밀어내는 것인지 이리 오라는 것인지, 허우적거리던 손에 옷깃이 잡혔다.

 

정신을 차려야...

 

...차려야 하는데...

 

라가 나가지 않게 하려면.

 

“...정신을...”

 

차려야, 까지 생각하자 불이 꺼지듯 의식이 사라졌다.

 

 

 

 

 

 

 

꿈을 꾸었다면 악몽이었겠지만, 페드는 눈을 떴다.

 

희미한 의식이 잡히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자 방금 전까지 잠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의식이 또렷했다.

 

몸을 침대 밖으로 꺼내자 고용했던 상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익은 금발은 보이지 않았기에 페드는 자신의 차림도, 표정도 가다듬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넘어 한 번에 두세칸씩 훌쩍 뛰어넘으면서.

 

그리고 위층은 아주 조용했다.

 

넓은 옷자락에 걸린 촛대가 쓰러지거나 꼬리가 바닥을 건드리거나, 나무나 천에 걸린 귀가 퍼득퍼득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리톤이 열어둔 그대로 문이 열려있어서.

 

....!”

 

페드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나갈 뻔 했다.

 

등 뒤에서 아주 작게 바스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뛰쳐나갈 뻔 했지만.

 

부스럭 소리에 발이 멈추었고 페드의 몸이 마법서만 뒤적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홱 돌았다.

 

몇 권인가 고른 책 더미 옆에 하얗고 동그란 천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는 눈에 익은 금색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천에 붙어 흔들거렸다.

 

“...”

 

손을 내리자 다시 얇은 이불이 라레타를 덮었다.

 

페드는 자신의 손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던 걸까.

 

얇은 가운이 구겨질 정도로 손에 꽉 쥐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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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2

2019. 6. 3. 21:17 | Posted by 호랑이!!!

 

산 어귀에 다다르면 언제 올지 알았다는 듯 슈체른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올라가지 않을 높은 바위 위에서 새까만 머리를 나부끼는 차림은 여전히 백 년 전쯤의 것이다.

 

슈체른은 휙 뛰어내려서 질색하는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풍 바구니를 앗았다.

 

보자 보자... , 이 계절에 야채까지 들었군요? 그리고 과일이랑, 햄도 좋습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고... 프루던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런담?”

 

그 사람은 도시락의 호화스러움에 한참이나 찬사를 보내다가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탐욕이 뚝뚝 떨어진다.

 

그 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비록 당신이 더 어리지만 주인의 가족이니 그 아이가 실수를 하더라도 후한 마음으로 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것은 탐욕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산으로 갈까요?”

 

좋습니다.”

 

산에 오르자 전날은 달밤이 되어야 보였던 푸른 바람이 벌써부터 보였다.

 

부드러운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고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거나 빨리 밀어내다가 문득 슈체른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손을 내렸다.

 

뭘 하는지 알아차렸을까? 하며 옆으로 돌아보니 슈체른은 흐뭇하다는 듯한... 아니,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꽤나 호의적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아라벨라가 산 바람을 처음 맞았는데 좋아한다던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거겠지.

 

바실리는 원래부터 잘 돌아다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산의 모든 곳곳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지, 어디에 바실리가 좋아하는 딸기가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등... 그런데 이번에는 바실리가 기척을 없애주는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어서-”

 

저는 할머니에 대해 잘 몰라요.”

 

아라벨라는 툭 내뱉었다.

 

할머니를 왜 바실리라고 부르는 건가요?”

 

바실리를 바실리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할머니는 왜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었지요?”

 

이 산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답해줄 건가요?”

 

모른다고 대답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슈체른은 아라벨라가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예요?”

 

앞서 걸어가던 슈체른은 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아보자 아라벨라는 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든 것은 단도인 듯 했다.

 

“...좀 얌전한 줄 알았더니.”

 

렐리악 치고는, 하고 덧붙이는 슈체른은 말투와는 다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 뒤로 물러서십시오 렐리악의 어린 용.”

 

바실리가 아직 알려주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모르고 살게 두지는 않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며 슈체른은 아라벨라에게 도시락 바구니를 떠넘겼다.

 

아라벨라는 무거운 바구니를 옆의 바위 위에 얹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라는 말은 지금까지 더러운 것이 묻으니 조심하십시오라던가 꼴도 보기 싫으니 저리 꺼져라라는 말과 동일했다.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뒤로 돌아 도망치는 것이었으나 이번만은 말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경계와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슈체른은 빙글빙글 웃는다.

 

눈을 감아주십시오. 이제부터 심오하고 우아한 마법의 증거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이 세상의 모든 지고지순한 정수!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자의 증거! 자아 여러분께-비록 아가씨 한 분 뿐이지만- 소개하노니!”

 

얌전히 눈을 감기는 했지만 말이 현란해질수록 아라벨라는 품 속의 단도를 꽉 쥐었다.

 

살짝 실눈을 떠 볼까, 하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눈을 더 질끈 감았고, 슈체른이 부디 눈을 떠 주십시오, 라고 과장된 어투로 이야기했을 때에는 바람이 가라앉았다.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마차 몇 대 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용이 비늘을 반짝이며 아라벨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비늘과 검은 눈동자의 용은 몸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발을 가졌지만 그 발은 누군가를 해치기보다는 땅과 풀숲을 헤치는데 쓸 법한 모양이다.

 

모양을 보고는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슴, 때로 곰, 인간, , 고양이, 쥐 같은 동물과는 달라. 겨우 마차 몇 대 만큼의 크기였으나 그가 고개를 들면 거대하고 오래 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나 상냥하고,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마치 거대한 바위, 깎아지른 벼랑들, 고대의 언어가 새겨진 거대한 돌 앞에 선 것 같았다.

 

푸른 빛을 띤 바람이 용의 몸을 타고 흐르고 갑주 같은 비늘이 덮인 코가 아라벨라를 건드리자 아라벨라는 정신을 차렸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

 

슈체른이 웃었다.

 

땅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은 소리에 아라벨라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보는 것은 처음입니까? 정말로?]

 

그러다 아라벨라는 그 형태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3.. 그림에 있던... 호숫가의 그...?”

 

그림에는 거대한 바위처럼 나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것에서는 틀려 본 적이 없었기에.

 

그리고 슈체른은 긍정하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바트와 그린 그 그림을 본 모양입니다]

 

당신과 많이 닮았지, 돌개바람 같은 아이였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검은 눈은 얼핏 깊어졌지만 아라벨라가 무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림에 있던 사람들은 그럼... 용의 친구였나요?”

 

[우리는 동지에 더 가깝습니다]

 

동지?”

 

[그런 것은 나중에. 이제는 출발하지 않으면 곧 밤이 될 것입니다]

 

아라벨라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시나요?”

 

길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크기로는 몇 걸음 걸으면 산이 다 무너질 것 같다.

 

꼬리까지 흔들리면 주위의 나무고 바위고 다 무너지겠지.

 

의아한 목소리로 올려다보니 다시 심연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걸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요?]

 

뛸 건가요?”

 

그리고 우렁차게 터져나온 웃음소리는 거대한 바람처럼 쏟아졌고 거기에 직격으로 맞은 아라벨라는 쓰러질 것 같았다.

 

슈체른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바구니에 거대한 발톱을 둘 넣더니 익숙하게 뒤적였고 그 안에서는 바구니에 다는 끈이라고 생각했던 길다랗고 검은 끈이 나왔다.

 

슈체른은 그 끈을 몸에 둘렀고 잘 맞게 조인 다음 아라벨라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검고 탁하게 빛을 반사하는 비늘이 움직임에 따라 흘러가듯 움직이고 몸에 비하면 작다고는 하지만 아라벨라보다는 커다란 가죽 날개가 접혔다가 펴졌다.

 

책에서나 읽었던 거대하고 위대한, 신의 의지라고도 불리우는 몸.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선 이 산도 신성한 용의 몸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라벨라는 발을 디디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거대한 검은 용은 입을 열었다.

 

[야 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꼬리가 등을 툭 밀자 아라벨라는 앞으로 휘청이다 검은 끈을 잡았다.

 

슈체른의 몸이 낮아졌고.

 

튕겨 오르듯이 구부린 발을 펴자 쏘아 올린 듯 빠르게 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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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1

2019. 5. 29. 14:2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등에서 잠들었고, 깨었더니 아침이었다.

 

뱃속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와 배에 손을 얹었더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하루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차가운 시냇물 몇 모금뿐이라는 것도.

 

아침식사 시간이었기에 1층으로 내려가자 이스트를 넣어 동그랗게 부풀린 빵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에 곁들일 꿀과 갓 만든 버터도.

 

그리고 베이컨이나 소시지.

 

과일도 달게 조린 것과 신선한 것 두 가지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손질한 과일은 이 계절이면 푹 익어서 달고 부드럽겠지.

 

자르는 것에는 이도 필요없다.

 

혀로 꾹 누르기만 해도 그 연약한 것은 으깨져 달콤한 물이 되리라.

 

변하지 않는 메뉴이건만 기대에 가득차서 아라벨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무릎에 핸드백을 얹은 마르틴이 화들짝 놀랐다가 휴우 한숨을 쉬며 다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조그맣고 반들거리는 머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아라벨라를 알아보았는지 머리를 쏙 내밀고 삐이, 울었다.

 

마르틴은 소시지 조각을 뱀(같은 것)에게 먹이고 있었다.

 

소금기 있는 걸 먹여도 되나?”

 

잘 먹고 있어. 물도. 있지, 삐가 물 마실 때 있잖아, 막 볼이 이렇게-”

 

? 삐라고?”

 

아라벨라는 마틴의 건너편에 앉으려다 귀를 의심했다.

 

삐 하고 우니까 삐.”

 

“...마틴, 너 말 한 마리 있지?”

 

.”

 

3살짜리, 까만색과 하얀색이 들어간 순한 암말.

 

이름을 뭐라고 지었어?”

 

까맣고 하야니까 체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아라벨라는 자리에 앉아 동그란 빵을 비틀어 찢었다.

 

손안에서 껍질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고체라기보다는 액체처럼 보이는 버터는 나이프 위에서부터 가장자리가 흐물흐물 녹아 진득하게 빵 위에 듬뿍 얹힌다.

 

거기에 절인 베리류를 시럽째로 푹 떠서 얹고 한입 가득 깨물자 버터가 바깥으로 밀려나와 뺨에 묻었지만 맛이 환상적이었다.

 

접시에 소시지와 베이컨, 스크램블드 에그를 한 무더기나 가져와서 마르틴의 뱀은 접시 위의 마지막 소시지를 아라벨라가 자르는 순간 자그맣게 삐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육즙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기름진 소시지가 아라벨라의 포크에 꿰뚫려 입 안으로 사라질.... 뻔 했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뽑아 내밀자 마르틴의 뱀은 잽싸게 목을 뻗어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시지를 낚아챘다.

 

쳐든 입 사이로 머리만큼이나 굵은 소시지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라벨라는 물을 한 잔 가득 들이켰다.

 

그런 아라벨라의 기세에 마르틴은 겨우 설탕에 절인 나무딸기를 조금씩 먹을 뿐, 조금 덜어준 고기는 다 뱀 입으로 간다.

 

자기 배가 차고 나니 그런 게 보여 아라벨라는 부끄러워하며 계란을 듬뿍 떠서 마르틴의 접시에다 올려주었다.

 

“...나 혼자 다 먹다니 부끄럽네.”

 

누나는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얼마나 배고팠겠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문이 열렸고 마르틴의 뱀은 후다닥 가방 속으로, 마르틴은 몸으로 가방을 가렸다가 조심스럽게 찰칵, 걸쇠를 닫아 테이블보 아래로 숨긴다.

 

들어온 사람은 프루던스였다.

 

아가씨, 언제쯤 나가려 하십니까?”

 

아침 먹었으니까 이제 곧.”

 

튼튼한 신발을 가져왔으니 발에 맞으신지 신겨드리겠습니다.”

 

프루던스가 가져온 것은 아라벨라가 3층에서 본 적 있는 가죽신이다.

 

3층에서 보았을 때는 철편이 붙어 있었지만 아라벨라가 걸을 것을 생각하여 떼놓은 모양으로 아라벨라의 발에 딱 맞았다.

 

잘 맞으시는군요. 이 사이즈로 갖바치에게 주문을 넣어두겠습니다. 장식이나 재질, 모양에 있어 주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가벼운 걸로.”

 

알겠습니다.”

 

프루던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렸다.

 

,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무게가 좀 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을 조금 쌌습니다. 만약 늦어질 것 같으시면 안에 조그만 폭죽을 넣어두었으니 둥근 구멍을 위로 하고 마력을 조금 불어넣어 사용해주십시오.”

 

그런 게 여기에 있어?”

 

국경이나 변방에서 위급 시에나 사용한다는 물건은 듣기만 했지 보는 건 또 처음인데 집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종종 주인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발을 뻗자 익숙하게 신발이 신겨진다.

 

누군가 신었다는 신발은 부드러워서 발목 부근을 끈으로 다시 조정해주자 아주 편했다.

 

누나, 어디 가?”

 

산에.”

 

아까까지는 뱃속이 조이도록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터질 것 같다.

 

포만의 행복감에 우선하여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과 먹어 불러진 배가 신경쓰여 아라벨라는 집사가 가져다준 바구니를 당겨 안았다.

 

묵직했다.

 

살짝 덮개를 열어보니 그 안은 절인 과일과 야채가 병째로 몇 개나 들어있고 둥근 치즈가 자르지도 않은 것이 통째로 하나, 빵도 몇 덩어리나 있다.

 

베이컨도 햄도 소시지도 줄줄이 들어서 나들이용 도시락이 아니라 사냥 나간 병사 한 부대를 먹이는 용도인 것 같다.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남은 것은 슈체른에게 주고 오십시오.”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마르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슈체른은 누구야?”

 

어제 만난 사람.”

 

이것은 답이 되지 못했나 보다.

 

이것밖에 모르는데도.

 

그러나 마르틴은 포기하지 않고, 지나쳐 가려는 아라벨라의 소매를 잡았다.

 

나도 갈래. 아니, 나도, 가면 안돼? ?”

 

아라벨라는 신성한 용의 몸을 떠올렸다.

 

평지와는 전혀 달랐지.

 

게다가 그 이세계 같이 어찔한 풍경은 자신도 겨우 적응할 정도였다.

 

다음에 가자.”

 

마르틴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언제?”

 

글쎄? 그건 보고.”

 

?”

 

그러니까 이 집안에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좀 오래 안계신 것 같은데, 걱정은 안 되지만 일단 한 번 찾아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있잖아. 우리가 귀족이기는 하지만 이 집안 주인도 아니고, 이걸 얘기하면 고용인들이 다 떠나버릴까? 그리고 아버지가 일단은 렐리악 백작이라고는 하지만 전대에 비해서는 힘도 약하고. 위엄도 책임감도 우아함도 아무것도 없는데 할머니까지 없어지면 백작이 아니라 남작이나 자작까지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걸 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바뀐 신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에게, 배울 게 많아서, 대우가 달라져서, 행복보다는 책임을 느끼고 나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피야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될까? 이미 이 어깨에는 짐이 이만큼이나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해서 짐이 더 늘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하지?

 

“...다음에 말해 줄게.”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떼어냈다.

 

몸에 걸칠 것이라고는 셰필라가 보내준 레이스 무더기밖에 없었기에 아라벨라는 3층으로 갔고, 이번에는 프루던스도 말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리지는 않았지만 말리고 싶은 것인지 무슨 더 할 말이 있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을 뒤로하고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경갑 상의를 고르자 프루던스는 손수 내려주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할 게 뻔하니 원.

 

프루던스.”

 

, 아가씨.”

 

할머니는 왜 날 싫어해?”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이 뒤로 왜 싫어하지 않는지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이 무겁나.

 

마르틴은?”

 

주인님께서는 아직 마르틴 도련님을 만나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싫어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벨라가 잠옷을 휙 벗어던졌지만 프루던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중드는 것이 익숙하다고 한들 조금은 놀랐으면 했는데.

 

그래야 자기도 모를 말실수도 좀 할 테고.

 

아라벨라는 옷을 벗어던졌고 장식물 중 하나를 떨어뜨려 깨기도 했고 몰래 돌아선 집사 뒤에서 큰 소리를 내어 놀래키는 것은 생각만 해 보았으나 여전히 익숙하고 침착한 손길이 가죽 갑옷을 입혀줄 뿐이다.

 

있지, 프루던스.”

 

, 아가씨.”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자 잘 갖추어진 옷 덕분에 몸이 가볍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왜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물어보면서도 또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 돌아온 답은 조금 달랐다.

 

셰필라님은 모르니까요.”

 

왜 몰라? 렐리악 백작인데?”

 

그야 셰필라님은... .”

 

프루던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 것 같다.

 

지금 백작이고 가주인데 어째서 모르지? 할머니만 알고 아빠는 몰라? ?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가 말하면 안된대? 아빠에 대해서?”

 

덥썩 어깨가 잡히고 프루던스는 난감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가감없이 나름대로의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라벨라는 신이 나서 잡은 어깨를 흔들었으나 프루던스는 어지러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주인님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했는데 조금 더 말해줘도 좋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프루던스! 나 싫어하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 좋아해?”

 

우아하고 당차고 모든 귀족의 귀감 같은 아가씨를 존경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한 점도 없다.

 

당황했을 때나 목소리에 조금 고저가 있었을 뿐이지 평이하고 지루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에 아라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더 캐보려고 했지만 집사는 다시 완전한 철가면을 되찾았고 어렵지 않게 아라벨라를 저택에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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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9

2019. 5. 22. 10:03 | Posted by 호랑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티엔은 일주일 치의 방값을 더 지불했다.

 

재단에 연락했더니 당장 달려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마틴이 애써서 진정시켰고 하랑은 약에 적응했는지 약 전에 죽이라도 먼저 먹었다.

 

티엔과 마틴은 우편으로 받은 서류를 처리하거나 전화기에 매달렸고.

 

그렇게 첫 히트가 일어난 후 사흘이 지나고 하랑의 열이 가라앉았다.

 

하랑의 뱀, , , 호랑이는 며칠 아픈 하랑의 곁에 있는가 싶더니 몸이 나아진 것 같자 새로운 환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티엔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방바닥에서 작은 동물의 뒷덜미를 집어 치우는 것 같은 행동을 간혹 했다.

 

하루이틀은 그러려니 했지만 그게 사흘이 되자 티엔은 하랑의 방문을 열어젖혔고 잘만 자던 하랑은 난데없는 방문에 억지로 눈을 비벼 떴다.

 

뭐요?”

 

나가라.”

 

남의 방에 와서 갑자기 축객령이라니?

 

뭘 잘못 들었나?

 

하랑은 다시 물었다.

 

뭐요?”

 

나가라고 했다.”

 

이 양반이 미쳤나, 뜬금없이 왜 와서 이런담.

 

자신이 마틴 형도 아니고, 아니, 마틴 형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이렇게 다짜고짜인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말도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뭐요.”

 

시비같은 어투에 티엔도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나가-”

 

정티엔, 그렇게 말하면 남이 어떻게 알아요?”

 

동년배라고 종종 홀든네 첫째를 만나더니 말투까지 옮았나, 하고 마틴이 운을 떼었다.

 

요즘 티엔이 허공에 손질을 해서...”

 

“...네 개나 쥐나 뱀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 때문이다. 바다 바다 했으니 나갔다 와라.”

 

... 혼자?”

 

그래.” “저랑?”

 

티엔과 마틴이 동시에 말하더니 힐끗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랑.” “혼자-”

 

또 동시에 말한다.

 

뭐냐.” “뭐예요.”

 

또 동시에.

 

이건 또 무슨 코미디인지 생각하다가 하랑은 작은 가방에 주섬주섬 노란 부적을 넣었다.

 

우리 애들이랑 갔다 올게.”

 

나도 같이 간다.”

 

, 저도!”

 

저 양반들 일이 급한 거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야 저 사람들이 감당할 일이고.

 

좀 있자니 둘이 뭔가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하랑으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호텔 밖에 발을 디디자 쨍한 햇볕이 피부에 닿았고 방 안에서보다 강렬하게 바다 냄새가 난다.

 

이미 붉은 개들은 자기들끼리 뒤엉키고 장난치며 바다로 달려갔고 거대한 호랑이는 머리에 쥐를 얹고 발을 옮겼다.

 

은근슬쩍 다리에 감기는 청사도 모른척하며 하랑이 발을 옮기자 넓은 바다가 눈에 담겼다.

 

겨우 이런 것에 더는 설레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랑은 달려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하랑, 안된다!”

 

하랑 군, 준비운동! 준비운동!”

 

[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8

2019. 5. 17. 12:45 | Posted by 호랑이!!!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보호자들에게는 다행히도, 침대에 누워나 볼까 했던 하랑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저녁시간을 지나고 아침도 거르고 토스트와 주스를 가져다 준 마틴이 아침에 놓고 간 음식이 그대로인 것에 비명을 지를 때까지나 말이다.

 

다시 잠들려고 했던 하랑을 마틴이 깨워 앉히고 티엔은 주방을 빌려 죽을 끓였다.

 

입에 넣다가도 잠들어 버려 마틴이 능력을 이용해 깨워야만 했지만 결국 한 그릇을 비운 하랑은 식사하느라 잠이 깼다며 눈을 비볐다.

 

네가 체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졸린 거다.”

 

마틴은 티엔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잠이 조금 남아있던 눈꼬리는 홱 올라가고 하랑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뭐냐.”

 

이 잔소리꾼.”

 

입가에 흐른 죽이나 닦아라.”

 

마틴은 냅킨을 들어 하랑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정티엔 바보멍청이.”

 

사부라고 불러야지.”

 

마틴은 투덜거리는 하랑을 내려다보았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악 뭐야 형, 나 애 같다고 생각한 거지!”

 

. 가서 약 먹고 사탕 하나 먹고 양치질 하세요.”

 

약 먹으면 졸립단 말야!”

 

그럼 좀 자요. 재단에는 형이 말해둘게요.”

 

싫다고 칭얼거리는 하랑을 어르고 달래 마틴은 약과 물을 손에 쥐여주었다.

 

하랑은 약을 꿀꺽 삼키고 마틴이 가져다준 초콜릿을 하나 물고는 꿍얼거리면서 마틴의 가슴에 머리를 툭 기댔고 동시에 티엔의 눈썹 한 쪽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

 

이하랑, 나랑 마틴은 먼저 재단으로 갈테니까 너는 몸을 좀 추스르고-”

 

뭐어? 정티엔 지금 제정신입니까?”

 

!? !?”

 

성인 알파가 둘이나 붙어 수발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베타가 직원인 호텔에 와 있으니 여기 맡겨두고 우리는 돌아가야지.”

 

당신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하랑의 보호자 아닙니까, 책임지고 괜찮아질 때까지 돌볼 의무가 있어요.”

 

티엔의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가까이 갔다가 한순간의 충동으로 어그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 있는 것 같나.”

 

하랑은 휙 티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티엔은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틴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랑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분노하고 있다.

 

“...우웩....”

 

정티엔 냄새나요.”

 

마틴은 입을 뻐끔거려서 하랑에게는 들리지 않게 무어라고 말했고 티엔은 푹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랑의 붉은 개가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고 환기가 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티엔에게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하랑은 입에 문 초콜릿을 마저 씹어 삼켰다.

 

이전이라고 알파의 냄새를 안 맡아본 것은 아니었고, 재단 내에서도 알파 냄새 같은 건 벽에 배길 정도로 많이 나지만 티엔이 감정상의 실수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페로몬(이라고 부르는)을 내보낸 적이 없었기에 낯설다.

 

냄새 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하지만 저 티엔이 저런 반응이라.

 

충동으로 뭘 어그러뜨리는데?”

 

티엔이 딱 잘라 말했다.

 

넌 알 거 없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하랑은 마틴을 돌아보았지만 마틴도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몰라요.”

 

알았으면?”

 

말했겠죠.”

 

티엔이 돌아보았지만 마틴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랑이 무서워하잖아요. 뭐든 말했을 걸요.”

 

“...”

 

뭐 든, 하고 마틴이 입을 벙긋거렸다.

 

 

아라벨라 10

2019. 5. 10. 21:33 | Posted by 호랑이!!!

 

그 풀숲에서 튀어나온 것은 기묘한 사람이었다.

 

저렇게 천 몇 장으로 몸을 느슨하게 감싸는 옷은 유행이 백 년은 지났을 터.

 

신발도 옛날 양식이다.

 

그러나 머리도 피부도 잘 손질되어서 비록 구불거리며 물결치는 그 머리도 피부도 검은 빛이라고 하나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띈다.

 

이질적이라고 할 만큼 어딘가 다르고, 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다.

 

가치관도, 나이도, 성별도, 어떤 사람인지도.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낙트, 우리 아가, 나의 낙트, 작은 아가, 어디에 갔던 겁니까. 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이 숲이 술렁이고 나의 분노와 나의 슬픔에 우리의 일족이-.”

 

저기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에게서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아름답고 위압감이 있고 어디에서일지 모를 미지에 대한 공포가 일어나는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낙트?”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주위에서 푸른 바람이 우르르 휘몰아쳤다가 일순간에 훅 가라앉는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이 강풍 속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아라벨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벨라는 반사적으로 양 손을 올렸지만 그 사람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손에 얼굴을 가져갔는데 아라벨라는 물어 뜯긴다는 생각에 손을 움츠렸지만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았다.

 

손에서 손목으로, 팔로, 품에 고개를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목덜미로 코를 가져가자 목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질을 쳐도 팔로 밀어내도 고개를 뒤로 빼어도 그 사람은 따라붙었는데 금방이라도 물어뜯길 것처럼 상대는 위협적이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몇 시간처럼 느껴졌던 그 이상한 과정은 끝나고 그 사람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새까만 눈이 마수처럼 번뜩였다.

 

너는 누구지.”

 

저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렐리악 백작 가문의 적자이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렐리악의 아이였군. 그래, 그러니까 이해가 되는군요. 방금의 행위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에 아이 중 막내가 사라져서 찾으러 다니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작은 렐리악 당신에게서 아이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대하기가 편해져서 아라벨라 역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렐리악 가문을 아십니까?”

 

이 질문은 이상하다.

 

렐리악은 백작이며 역사만은 어느 공작가나 왕가에도 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렐리악의 본가가 다스리는 이 곳이라면 부모님 이름만큼이나 렐리악이라는 이름이 친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대는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에 아라벨라는 더 당황했다.

 

이 산에 사는 이들은 모두 렐리악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맹이고, 친구이고, 가족이니까. 아바트가... 아니지, 최근에 본 그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루하트? 아냐... ,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실례지만 당신의 나이는? 성년은 넘겼습니까?”

 

, 성년을 넘겼습니다.”

 

그럼 어째서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 알비노라서?”

 

뒷말은 아주 작게 들렸다.

 

할머니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 쪽을 둘러보고 온다고-”

 

죄송하지만 어느 쪽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저 쪽인데 혼자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잠시 망설였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 곳은 초행이고 길을 잘 모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놀랐다.

 

과연...”

 

그렇게 놀라면서 뭐가 과연이라는 걸까.

 

그 때 반대쪽 풀숲이 부스럭거리더니 붉은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프루던스!?”

 

이런 곳에 계셨군요.”

 

붉은 머리의 집사는 검은 사람을 보더니 평소의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움찔했다.

 

“...슈체른...?”

 

프루던스.”

 

슈체른은 프루던스를 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렐리악의 어린 용이여, 내일은 단단히 준비를 해서 산으로 오십시오. 그 말은 두고. ...참 맛있어 보이거든.”

 

그 사람, 슈체른은 몸을 돌렸다.

 

검은 인영이 걸음에 따라 일렁이다가 스르륵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위에 올라타 고삐를 프루던스에게 넘겼다.

 

어떻게 산을 뚫고 왔는지 모를 집사는 옷이 찢어지기는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아서 눈길이 갔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저 사람은 누구인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당신은 내 어머니나 할머니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프루던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

 

주인님께서 아직 아가씨께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길에 비해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택이 보인다.

 

정원에도 지붕에도 환하게 불을 켜 둔 저택이.

 

저택의 지붕에 걸린 커다란 깃발이 보인다.

 

날개를 활짝 편 용의 실루엣을 그린 깃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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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9

2019. 5. 3. 23:32 | Posted by 호랑이!!!

 

날이 밝자마자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었다.

 

벗겨지지 않게 끈으로 질끈 묶고 잠옷 차림으로 마구간으로 달려가자 근육질의 백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일찌감치 말에게 여물을 주러 나온 마구간지기는 아라벨라가 사납기 그지없는 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쳤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가 든 칸의 문을 활짝 열었고 아라벨라의 백마는 훌쩍 뛰어나왔다.

 

오랫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인지 애교스럽게 부비는 머리에는 힘이 실려서 때로 아라벨라의 몸이 들썩 들리기까지 한다.

 

승마용 옷도 입지 않았고, 말은 사납고, 제 손으로 말이나 몰아보았을까 싶은 귀족 아가씨.

 

그러나 아라벨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날렵하게 말 위에 올랐다.

 

데일라는 한동안이나 달리지 못한 반동인지 처음 달리는 길인데도 거칠게 달려갔고 마악 저택에 채소를 가져다준 마을의 농부는 얼어붙었다가 아라벨라가 달려오자 문을 열어 그 뒤로 후다닥 숨었다.

 

백마와 아라벨라의 뒷모습은 며칠 동안 아라벨라를 지켜보았던 이들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씨가... 말을 타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목을 두드렸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뛰다보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아라벨라는 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렐리악 영지에는 평야와 숲밖에 없었으므로 산을 보는 것은 처음.

 

세상의 초기에 신성한 용이 이 거대한 대륙에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용이 발로 판 곳에는 물이 고여 연못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고 흙을 밀어낸 곳은 낮은 지대, 흙이 밀린 곳은 언덕이 되고.

 

먼 훗날 그 용이 대륙에 몸을 뉘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 등뼈를 따라 산맥이 생기고 뼈는 보석이, 마지막 숨결은 이 세상의 마나가, 몸은 거대한 산이 되었다.

 

아라벨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신성한 용의 몸

 

장소에 깃든 마력은 청량하고 공기는 시원하다.

 

얼핏 아라벨라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어진 듯 보였다.

 

데일라가 불안한 듯 투레질을 하자 아라벨라는 손을 내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하게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를 찾게 도와주세요

 

가자, 데일라.”

 

데일라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금방 산에도 적응하여 길을 올랐다.

 

처음 얼마간은 가팔랐던 길은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완만한 길로 변했고 데일라의 발도 느려졌다.

 

아라벨라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물이 솟는 작은 샘이 있어서 백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끌고 갔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물은 깨끗했기에 데일라에게도 먹이고 아라벨라도 좀 떠 마셨다.

 

할머니가 이 길로 갔겠지.

 

할머니하고는 도통 좋은 기억이 없지만 저 저택에 주인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도 저택에도 렐리악 가문에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태까지 외길이었다는 것과 산을 아무리 둘러봐도 늑대나 곰, 위험한 마수의 흔적이 없다는 것.

 

이 산보다 사람 발이 많이 닿는 아라벨라의 집 근처 평지에도 오소리나 늑대, 마수 같은 게 한 무더기는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꽤 안전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왜 할머니는 못 돌아오는 걸까.

 

아라벨라는 해가 지도록 말을 달렸다.

 

데일라는 힘차게 달렸고, 빠른 걸음으로 구릉을 지나 언덕을 넘고 장애물을 뛰어넘었고, 해가 질 즈음에는 연못가에 뻗어버렸다.

 

“...데일라.”

 

푸르르.

 

해가 지고 있어.”

 

푸르르르.

 

집에 안 가?”

 

푸힝.

 

사과 줄게. 빵도.”

 

푸힝 푸르르르륵.

 

투레질을 거칠게 하는 모습에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몸에 기대 다리를 쭉 뻗었다.

 

너무 달렸나.

 

해도 지고 배도 고프고, 이제 어떻게 돌아간다.

 

이렇게 오래 달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가지고 나오는 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 뜰 때 나와서 해 질 때에야 멈췄다.

 

돈도 없고 옷은 다 더러워지고 해어지고야 말이다.

 

길이 어렵지는 않았으니 가려 한다면 혼자서도 잘 가겠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를 여기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데일라아.”

 

그러나 데일라는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나무에 기댔다.

 

할머니의 저택으로 올 적에야 노숙을 했지만 그건 마차 안이었지.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면 스파크와 몇몇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끼어들 수도 없었으니 몰래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오늘 길은 어땠고, 오는 길의 호수가 예쁘고, 아까 보았던 나무가 어떻고 저떻고, 내일은 마을에서 쉴 수 있겠다던가, 저기 흘러가는 구름이 생긴 게 동물 같다던가, 바람이 좋다던가, 무슨 향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매일 반복되기도 했고, 같은 주제인데도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별이 있었지

 

별이랑 달이랑.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어두워진 하늘에 하나둘씩 떠오르는 하얀 별과 노란 달이 보였다.

 

멀리서 바람이 불자 숲과 나무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나무껍질과 이끼와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냄새가 나고 아라벨라는 아직은 날이 춥다는 생각을 했다.

 

데일라.”

 

푸르륵.

 

할머니는 대체 어디에 가신 걸까.”

 

푸르륵.

 

적어도 마르틴과 아라벨라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계시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아라벨라는 잠옷 자락을 끌어내려 발을 가렸다.

 

숄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잠옷이 이미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것은 둘째 치고, 바람에 날리던 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것도 다음으로 미루고... , 엉망이군.

 

하늘을 보면 여전히 달이 비친다.

 

별이 반짝이고, 나뭇잎이 팔랑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잠깐, 저거 바람?

 

아라벨라가 벌떡 일어서자 데일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굴려 쳐다보았지만 데일라가 어떤 반응을 하던 아라벨라는 홀린 듯 한 곳에 눈을 두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푸른 바람.

 

바람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아라벨라는 나뭇가지를 타고 올랐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어렵지 않게 올라서 흔들리는 나뭇잎에 손을 내밀자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무슨 가루 같은 것인지, 아라벨라는 손을 눈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으나 어떤 염료 같은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높은 나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하얗게 달빛이 내리쬐는 아래 온 숲이 검게 술렁이고, 그 안을 잘 보면 나뭇잎이 은빛으로 빛을 반사하는 사이로, 사이사이로, 녹색에 가까운 푸른 바람이 온 산을 감싸고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어느 곳은 빠르게 내리꽂히고 어떤 곳은 나지막하고 연하게 흘러가고, 어떤 곳에서는 휘몰아치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이라니.

 

그 장관에 넋을 놓았던 아라벨라를 현실로 끌고 온 것은 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이다.

 

땅으로 내려와 발에 묶었던 끈을 풀고 슬리퍼를 벗자 그렇잖아도 낡았던 슬리퍼는 꽤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발도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몰랐을 때는 신경조차 안 쓰였는데! 신발을 벗고 엉망진창인 발을 봤더니 갑자기 오만 상처가 다 아프다... 아야야...

 

꼼짝도 못하겠다며 신발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데 갑자기 옆의 풀숲이 부스럭부스럭 흔들렸고 방금 전까지 꼼짝 못 한다던 아라벨라와 데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낙트!”

 

누군가가 외쳤다.

 

 

 

========================================

전 편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어 조금 수정했습니다.

 

집사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한 문장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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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론을 위한 괴담

2019. 4. 29. 23:24 | Posted by 호랑이!!!

‘또 왔군.’

 

탈론은 나뭇잎 밟는 소리에 인상을 썼다.

 

후배 중 뛰어나 후기지수에 몸 담은 길은 암살이니 경공이야 미약하더라도 원한다면 기척 정도는 지울 만한 인물임에도 굳이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를 낸다.

 

저것이 예의인지 놀림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정을 생각해보면 후자가 가까우리라.

 

같은 문파가 아니면 어느 밤 조용히 명줄을 끊었어도 진작 끊었을 것인데.

 

어지간한 일로는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저 어린 후생이 자신에게 들러붙는 이유가 첫 만남 때 닿는 손길을 피해 뒤로 굴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좀 참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문파장인 주제에 무인보다는 상인이라고 했으면 더 믿음이 갔을 이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을 때를 떠올리면....

 

녹색 비단도포에 빨간 머리통으로 반질반질 웃는 낯을 생각했더니 머리에 열이 오른다.

 

“대협! 여기서 뭐 해요? 일 해요? 왜 기척을 숨기고 있어요?”

 

“저리 가.”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점을 짚으라면 처음에는 오라버니! 했다가 대협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꼬박꼬박 부른다는 점이다.

 

그나마 한 가지 꼽으라면 말이다.

 

“헉, 정말 일하고 있어요? 왜? 탈론 대협 일 중독이예요?”

 

“저리 가.”

 

“문파장 오라버니가 준 일이에요? 아니면 개인적인 일? 왜 항상 볼 때마다 일하고 있어요? 새암이가 도와줄까요?”

 

“저리 가.”

 

심지어 노란빛에 꽃빛에 화려한 옷이다.

 

어느 제정신 아닌 암살자가 저런 걸 입나.

 

심지어 머리에는 꽃까지 꽂았군.

 

쟤네 문파는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쫓아 보내려고 해도 소용 없어요! 다른 분들은 다 바빠서 탈론 대협을 쫓아다니기로 했거든요.”

 

기세가 자못 당당하다.

 

저게 문파에 오고 몇 명이랑 인사를 나눴더라? 흑막이랑 인사를 했더라고 문파장이 그랬지.

 

빨간 머리 린족이랑은 인사를 했나? 비슷한 연배이니 말도 통하련만 혹시 둘이 친구가 되면 날 그만 쫓아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탈론은 바삐 발을 움직였다.

 

노골적인 기척을 내며 끈덕지게 쫓아오는 것에 걸음은 점점 더 빨라진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는 경공이 달리지.

 

탈론은 뿌듯한 마음으로 여간해서는 오르기 힘들 나무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 흐뭇함은 어린 암살자가 쫓아오기 전까지 탈론의 마음을 만족으로 채웠으나 커다란 나무기둥을 착착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지였다.

 

“대협은 높이까지도 잘 올라가네요!”

 

그리고 들리는 높은 목소리에 탈론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납게 말했다.

 

“저리 가!”

 

그리고.

 

탈론은 또 후회했다.

 

자신이 뒤로 몸을 날렸을 때처럼 반짝 빛이 나는 새빨간 눈이.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라벨라 8

2019. 4. 28. 22:31 | Posted by 호랑이!!!

 

 

방에 도착하여 아라벨라의 천가방을 열면 반들거리는 비늘이 불빛에 드러난다.

 

한 번도 깬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데 어째 이 비늘은 갈수록 반짝이고 상처도 쌩쌩하게 낫는다.

 

“...자고 있나아.”

 

마르틴, 너무 가까이 가면 위험-”

 

파드득.

 

꼬리가 떨리자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긴장한 두 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꼬리를 보았다.

 

꼬리는 퍼득퍼득 움직이고, 또 가만히 있기도 하고, 또 파다닥 움직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 사이에서 빼꼼, 조그만 머리가 튀어나왔다.

 

?”

 

머리는 이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듯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등 뒤에 둔 채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만져볼래.”

 

안돼, 마르틴!”

 

그러나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팔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앞으로 뛰쳐나갔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겨우 손 끝만 스쳤다.

 

몸이 따뜻하네!라며 감탄하는 마르틴의 손 앞에 납작하고 길쭉한 뱀 같은 주둥이가 입을 벌렸다.

 

두 줄 촘촘하게 돋아난 이빨들은 하얗고 뾰족했고, 이 뱀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또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자 그 안에 길쭉한 송곳니가 드러났는데 동물 대백과를 읽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송곳니는 독액을 먹잇감 안에 삽입할 때 쓴다는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

 

급박하게 손을 뻗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당연히 마르틴의 손을 깨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뱀은 오히려 비늘 돋힌 뺨을 마르틴의 손등에 기댔다.

 

마르틴이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뱀의 턱 아래를 간질이자 뱀은 웃는 것처럼 주둥이를 짝 벌리더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네, 뱀한테도 눈꺼풀이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 아라벨라는 그 뱀이 날개를 퍼득이면서까지 마르틴의 몸에 찰싹 달라붙자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튼 다행히도 저 뱀이 마르틴을 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후로 아라벨라는 마르틴과 함께 날고기를 뱀한테 먹여 보고 씻기기도 하고 (마르틴의 고집으로)핸드백 안에 쿠션과 솜, 천 조각 같은 것을 담아 뱀의 침대도 만들었다.

 

둥지가 생기는 것이 기쁜 뱀은 삐 삐 울다가 아라벨라의 침대에서 마르틴과 함께 놀다 지쳐 잠들었다.

 

처음에는 저 뱀 같은 것이 언제 돌변해서 마르틴을 물거나 감아서 죽일지 몰라 아라벨라는 뜬눈으로 둘을 지켜보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나흘이 지나는 동안 둘이 사이좋은 모습을 보았더니 이제는 둘만 놔두어도 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방에서 잠들었고 아라벨라는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집사 프루던스는 밤중에 집안에서 움직일 때는 사람을 붙여서 다니라고 했었지만 이 시간에 사람을 깨우기에는 미안하다.

 

푹신한 슬리퍼가 발소리를 가라앉혀 주자 새삼스러운 신기함에 조심조심 발을 옮기니 발 소리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리지 않는다.

 

아라벨라는 촛대를 들고 발을 위로 옮겼다.

 

이전에 집사와 마주쳐 쫓겨난 3.

 

지금이라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계단에서는 조금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온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다만.

 

1, 2층과는 공기부터 달랐는데 더 차갑고, 더 공허한 느낌이 났다.

 

복도조차 다른 층보다 넓어서 아라벨라는 계단을 올라와서는 한 바퀴 빙글 돌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밟힌 티가 덜 나는 창백한 푸른빛의 카펫은 아라벨라의 발 아래 고개를 숙이고 벽에 걸린 그림은 아라벨라의 촛불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라벨라는 그림에 촛대를 가져갔다.

 

그림 안에서는 갑주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기 호수나 숲을 배경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기법에 따라 묘사되었다.

 

3층 방은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하나씩 열어볼 수 있었다.

 

작은 방 하나는 커다란 책상과 커다란 의자가 있는 개인 서재였고, 벽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책보다 종이나 얇은 천이 더 많다.

 

방 하나는 갑옷이나 무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전시처럼 늘어서 있다.

 

말 등에 얹는 것 치고는 납작하게 생긴 안장을 건드렸더니 보기보다 더 단단했다.

 

언제든 쓸 수 있게 손질해두는 것인지 가죽끈을 꼬아 만드는 줄도 몇 개나 옆에 놓여 있고 둥근 링 같은 것도 있는데 아라벨라는 말이나 소 같은, 흔한 짐승의 것이 아닌 다른 냄새를 맡고는 가죽끈을 들어올렸다가, 바깥에서 갑자기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끈을 내려놓고,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소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서 들려왔다.

 

후 불어 촛불을 끄고 살금살금 다가가니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의 젊은 집사가 무릎을 꿇고 무어라고 말한다.

 

바실리, 바실리... 제발, 바실리. 빨리... 왜 산에 가서-”

 

바실리라면 할머니 이름인데.

 

아라벨라는 문에 가까이 다가왔다.

 

차갑고, 빤히 쳐다보고, 조용하고, 뻔뻔한 구석도 있는, 파충류 같은 그 집사가.

 

울고 있다.

 

우는 남자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돌아서려다 아라벨라는 다음 들리는 말에 몸을 홱 틀었다.

 

에멜라도 죽고...”

 

어머니가 왜?

 

비록 아라벨라의 집에서는 셰필라가 고른 사람이 집사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프루던스의 집은 대대로 렐리악 가문의 집사라고 했다.

 

삼류 로맨스 같은 소리지만, 후계자의 약혼녀인 어머니와 본 적 있다고 해도.

 

그래서 셰필라가 프루던스 대신 새 집사를 데려왔다고 해도.

 

할머니는 왜?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 아라벨라의 슬리퍼 한 쪽이 벗겨졌다.

 

동시에 프루던스의 고개가 문 쪽으로 확 틀어졌고 놀랄만한 속도로 문에 다가섰다.

 

프루던스의 눈에 도는 기묘한 빛이며,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쳐다보았기에 아라벨라는 숨이 막혔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프루던스.”

 

밤에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는 고용인과 함께해 달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문을 금방이라도 닫아 버리려는 낌새에 아라벨라가 문을 잡았다.

 

할머님은 이 집에 계시지 않는 거야?”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거칠게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문이 쾅 닫혔다.

 

아라벨라는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가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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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7

2019. 4. 15. 23:52 | Posted by 호랑이!!!

 

우아하게 넓은 챙에 초록색 이국의 새에게서 얻은 길고 넓은 깃털을 꽂고 진한 녹색 리본이며 레이스, 프릴을 달아 화려한 그 모자는 진짜 꽃까지 얹은 것도 모자라 옆과 뒤에 커다란 꽃다발을 수놓은 주름천을 층층히 달았는데.

 

둘둘 말아 천으로 된 몽둥이마냥 들었더니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레이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라벨라는 손을 들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그 자작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악!”

 

비욘 자작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두 대.

 

, , 다섯, 여섯 번 휘두를 때마다 모자에 달아둔 꽃이 조각나 하늘에 흩어졌다.

 

주름을 잡아 단 천은 뜯어져 펄럭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구슬은 끈이 끊어지고 달아두었던 깃털은 주인을 찾아가겠다는 듯 떠올랐다가 불어온 미풍에 힘없이 날려갔다.

 

모자가 작살이 난 것에 비하면 비욘 자작은 타격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 한 쪽에 멍이라도 들었다면 좀 좋으련만 머리나 좀 흐트러지고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것이 전부.

 

정신계 공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우그러진 모자를 우아하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가기 꺼려진다는 말을 그렇게나 알아듣지 못하시다니 저야말로 곤란합니다."

 

"......."

 

비욘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나에게 창피를 주다니!"

 

"제정신입니까? 지금까지 싫다고 한 건 뭐라고 알아듣고?"

 

그러다 비욘 자작은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런다고 당신이 가시 달린 장미처럼 보일 것 같습니까?"

 

"꽃 같은 건 되었습니다."

 

아라벨라는 궁금했다며 말을 꺼냈다.

 

"얼굴도 그냥 그렇고, 고매한 정신 같은 것도 없고, 당신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지도 않고, 방금의 행동으로 어떤 사람인지 바닥도 본 것 같은데.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꽃으로 보이고 싶겠습니까?"

 

"아니, 그럼 여자 취급 말고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말입니까?"

 

그 말에는 어이가 없어진다.

 

"왜 당신은 여자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레이디 퍼스트니 하면서 남자가 문 열어 주는 건 그렇게나 좋아할 거면서...!"

 

지금까지 아라벨라를 빤히 보던 집사 프루던스가 비욘 자작과 아라벨라 사이에 섰다.

 

"흥분하셨습니다."

 

"비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자 아라벨라의 교육을 맡은 부인들은 아라벨라를 자신들의 가장 뒤로 밀고 눈을 가려 주었다.

 

프루던스는 어떻게든 그 자작을 조용히 시켜서 데리고 나갔고, 다른 고용인들이 다가와 어질러진 티 테이블을 치우고 새 차와 과자를 꺼냈다.

 

"레이디 아라벨라는..."

 

부인이 입을 열자 아라벨라는 마음이 찔려 레몬을 띄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통찰력이 있군요."

 

"거절을 했다손 쳐도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예요."

 

아라벨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자세를 교정해주는 부인은 부채를 접어 아라벨라의 고개를 살짝 내려주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아라벨라가 입을 열었다.

 

모자를 망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먼저 말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평소라면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라고 했을 부인도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라벨라가 내려다보자 마르틴은 시무룩하기가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못해서 미안해, 누나.”

 

네가 뭐가 미안해.”

 

아라벨라는 깜짝 놀랐다.

 

백작님이 나보고 누나를 잘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잠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마.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아! 지켜도 내가 지켜줘야지.”

 

그러나 마르틴은 그 말을 듣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더니 싫다는 말을 더듬더듬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라벨라는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부인들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며 마르틴을 안아들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비욘 자작은 더 이상 이 저택에 오지 못할 겁니다.”

 

집사 프루던스는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접시에 잘 구운 사슴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넓은 테이블에 아라벨라와 마르틴 뿐인데도 접시 위에는 꽤 많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라벨라 아가씨의 예의범절과 자세를 가르쳐주시던 남작 부인께서도 앞으로는 오지 않으실 겁니다.”

 

이 말에 아라벨라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를 나이프로 푹 찔렀다.

 

, 두 분께 마을의 의상실에서 주문한 슬리퍼가 도착하였습니다.”

 

프루던스의 말에 고용인이 황금색 리본으로 묶은 납작한 상자를 두 개 가져다주었고 아라벨라는 끈 한 쪽을 잡아당겨 상자를 열었다.

 

눈이 퉁퉁 부은 마르틴에게도 상자가 두어 개 배달되었다.

 

마르틴 도련님의 승마 교사를 어서 구하겠습니다.”

 

마르틴이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눈만 굴려서 집사를 쳐다보았고 붉은 머리의 집사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둘의 접시에 푹 쪄서 소스를 얹은 채소들을 덜었다.

 

왜 그래, 마르틴?”

 

어어? 아니, 아아니.... 아무것도....”

 

아가씨께도 새 선생님을 구해드려야겠군요. 당분간은 일정이 없으니 편히 쉬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말 타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마르틴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집사를 불렀다.

 

저어기, 할머니는... 한 번도 못 뵈었는데요.... 저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바쁘십니다.”

 

프루던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두 조각 더 올렸다.

 

도련님께서는 조금 더 영양을 섭취하셔야겠습니다.”

 

시무룩하게 마르틴은 칼로 고기를 잘랐다.

 

이제는 귀족이 된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사람을 부르거나 부리는 일에는 영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자세만은 손댈 데 없었으니, 저건 사피야의 작품이겠지.

 

사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마르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르틴. 이따 내 방에 잠깐 와.”

 

어브...”

 

마르틴은 뭔가 말하려다가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련님, 입에 음식을 물고 말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미안해요...”

 

프루던스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세지도 않고 덥썩덥썩 집어 올렸다.

 

저에게 사과하시면 아니됩니다. 저는 한낱 집사이고 도련님께서는 백작 집안의 분이십니다. 도련님께서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렐리악 가의 이름이... 겨우 이런 걸로는 더럽혀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못된 사람들이 도련님을 우습게 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집사 인상이 나빠서 그래.”

 

제가요?”

 

프루던스는 아라벨라 쪽을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낯뜨겁습니다만, 이래봬도 목재도령 대회의 3연 우승을 할 만큼은-”

 

목재도령은 또 뭔데?”

 

이 근처의 특산품은 튼튼한 목재라 홍보차 미남미녀 대회를 여는데 미남은 도령, 미녀는 아가씨라고 합니다.”

 

그런 소릴 자기 입으로 하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잘생긴 건 별개로 인상이 나빠.”

 

삐쭉 올라간 노란 눈이며 굳이 웃지 않으면 아래로 처진 채인 입꼬리는 일주일 내내 웃지도 않았다.

 

웃어 봐.”

 

그러자 방긋 웃기는 하지만 올라간 눈꼬리는 별로 완화되지 않는다.

 

별로네.”

 

, 지만 미남인걸...”

 

미남이랑은 별개로 인상이 사나워. 너도 덜덜 떨고 있잖아.”

 

아안, 떨었어! 아니거든!”

 

바실리스크인지 뭔지 모를 물건이 든 가방은 잘도 옮겼으면서.

 

마르틴은 비쭉 입을 내밀었다.

 

요리사가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에 아라벨라와 마르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자리를 치우는 모습을 힐끗 보고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아라벨라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렇게 신경쓰여?”

 

쪼오끔...”

 

왜일까? 마르틴이 평민으로 자라서? 하지만 셰필라 렐리악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데.

 

게다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자꾸만 집사가 있는 쪽을 힐끗힐끗 본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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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6

2019. 4. 12. 11:22 | Posted by 호랑이!!!

 

몸을 씻겨 주겠다고 하면 곤란하므로, 아라벨라는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거기에 카트까지 세워두었다.

 

박을 말려 칠을 한 그릇에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미지근해지자 핸드백을 열었다.

 

닫아두었던 곳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겼고 조심스럽게 비늘 달린 몸체를 들어 그릇에 담그자 까맣던 몸에서 조금씩 마른 피가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담가 두고 기다렸더니 비늘 사이에 엉긴 피나 이파리 같은 것들이 조금씩 불어서 당기거나 손톱으로 살짝 긁는 것만으로도 씻긴다.

 

바실리스크가 아닌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의 특징인 깃털이 없고, 날개의 모양이나 크기도 책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흔한 동물인 뱀이나 박쥐도 아닌 것 같으니.

 

잘 씻겨놓고 수건으로 감싸놓자 다시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라벨라는 뱀을 돌돌 말아 다시 핸드백에 담아두고 자신도 씻기로 했다.

 

보송보송하고 따끈해져서 욕실에서 나오자 맨발에 따뜻하게 카펫이 느껴졌다.

 

그나마 마차 안에 있을 때는 힐도 벗어두었는데 발바닥으로 카펫을 밟고 마룻바닥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으로 느껴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침대 옆에 무언가가 비친다.

 

노란색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조그만 슬리퍼였다.

 

작은 등불로도 그 슬리퍼가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무어라고 하는 대신 핸드백을 침대 위에 올리고 자신도 그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라벨라의 일과는 눈에 띄게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으로 과일이나 좀 집어먹고 나면 외출복에 가까운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졌고 초청한 가정교사에게 역사나 음악이나 작문에 자수 같은 것을 쉴 새 없이 교육받은 다음에는 자세를 교정하는 기괴한 철통을 몸에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서 있거나 지시하는 움직임을 해야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던가, 이미 배운 내용을 또 배워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항상 해 왔던 일이니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만.

 

언제고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붉은 머리의 집사가 서 있었다.

 

게다가 할머님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언제 한 번은 3층으로 몰래 올라갔지만 집사에게 들켜 2층으로 쫓겨났다.

 

프루덴스.”

 

아라벨라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머리의 젊은 남자는 아라벨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3층의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할머니께서는. 마르틴은 만나셨나?”

 

아닙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지금 그저 일이 있으셔서 짬을 내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라벨라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지 내의 승마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친 자부심을 느끼는 어느 남작이 마르틴에게 마구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우리 수업도 할머니께서 짜신 건가?”

 

선생님을 초청한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수업이 시작하고 거의 매일, 둘은 바빴고, 수업시간 사이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아라벨라가 마르틴의 방을 찾아갔더니 한참 이른 시간인데도 지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지.

 

사피야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마르틴은 그 어머니의 유전자를 아낌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귀여운 동생이 누나누나 하면서 오니까, 새삼 자신이 연장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연장자로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잘 크게 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는데 말이다.

 

챙겨주고 조언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는 일단 만날 시간이 나야 할 거 아닌가.

 

식사시간 외에 티타임이 있기는 했지만 티타임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의 일환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꽃을 넣은 차를 마시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남자들이 우르르 보였다.

 

저건 일단 마르틴이고, 시중 들어주는 고용인이 두어 명 있고, 옆에서 외국어로 된 시를 읽어주는 교사가 한 명,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승마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은 차를 마시려다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으악 눈 마주쳤어.

 

왜 저렇게 웃는거지?

 

기분 나빠라.

 

어머나 비욘 자작에게 관심이 있나요?”

 

아니오.”

 

왜 이 상황을 보고 제가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이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웃은 건 제가 아니라 저 준우승남이고 제 무표정과 저 기분 나쁜 웃음 사이에서 뭘 보시고 관심이라는 많은 의미를 포함한 단어를 떠올리셨는지.

 

라는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쑤셔넣으며 아라벨라가 뻣뻣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단지 마르틴이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비욘 자작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작위를 손에 넣었고 바이언드 백작의 조카이니 백작이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호기심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이 사람, 이미 내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전제로 말하고 있구나.

 

아라벨라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다는 것을 말하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자수 교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싱숭생숭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 사랑이 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 시집을 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해댔다.

 

교사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아까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쳤던 비욘 자작이라는 사람이 여성들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남성 테이블의 사람들이 이 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

 

무슨 내기에 넘어가는지 넘어가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 아라벨라는 찻잔을 꽉 쥐었다.

 

평소라면 레이디의 교양과 몸가짐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가 한 마디쯤 할 법했으나 그 사람도 아라벨라가 남자 앞이라 긴장한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레이디 아라벨라, 마르틴 도련님과 산책을 하려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지.

 

아라벨라는 당신이 빠져 준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말할 뻔했으나 일말의 선량한 마음이 입을 다물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다음에 수업이 있습니다.”

 

아무리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저 사람은 한낱 자작이고 아라벨라는 백작의 딸이다.

 

마르틴만 아니라면 다음 백작위는 아라벨라의 것이었고 지금도 백작의 후계자이니 준백작이나 다름없는데도 다가오다니.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사람이라고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날씨가 더워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양산을 들어 드리지요. 정원 안쪽으로 산책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걸어 보았는데 잘 꾸며진 연못이 있더군요."

 

이 집은 제 할머니 댁인데 산속에서 연못을 발견했다~ 투로 이야기해봤자...

 

"이 이후에 수업이 있기에 곤란합니다."

 

"잠깐이라면 봐 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그 사람은 기어이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라 이르더니 남작 부인이 내민 모자를 들어다 아라벨라의 머리 위에 푹 눌러 씌웠다.

 

마르틴은 무슨 일인지 몰라하다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여기서 아라벨라나 마르틴을 도와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자를 쓰셨고 이제 양산을 가져오니 이제 가로막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자꾸 내빼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아라벨라는 머리에 쓴 모자를 고쳐 쓰다가 그 말에 벗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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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5

2019. 4. 1. 22:4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아가씨! 도련님!”

 

스파크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외국의 단장 아래에서 스파크라고 불리면서 구르기가 벌써 몇 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행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도적떼가 아니라 나뭇가지더라도 아가씨 몸에 생채기라도 내면 용서할 수 없다!

 

스파크.”

 

꺾인 나무는 마차 천장을 뚫고 바닥까지 잔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스파크의 눈은 아라벨라에게로 곧장 향했다가 아라벨라의 품에 안긴 마르틴에게로 이동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마차 안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난 괜찮아. 마르틴은?”

 

저도 괜찮아요.”

 

마르틴은 아라벨라가 끌어안은 팔을 두어 번 두드려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나무 더미를 치워야 하니 잠시 멈추어야겠습니다.”

 

렐리악 전 백작의 집사가 다가오더니 아라벨라의 허락을 기다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고 때마침 저택도 근처이니 큰 나무만 빼고 나머지는 내일 하도록.”

 

가시는 동안 불편할 수 있으니 조금 지체되더라도 여기서 치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라벨라는 바닥에 늘어진 치마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편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더 고생시킬 수는 없지.”

 

그렇습니까.”

 

집사는 스파크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실례한다며 나무를 당겼다.

 

스파크와 집사 두 사람만으로 나무는 뽑혀 나왔고 구멍이 뚫린 자리로 희미하게 별이 뜨는 하늘이 보인다.

 

이제는 걸음을 서두르겠다며 집사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라벨라는 나무 잔해를 덮은 치마를 확 걷어 올렸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숨을 내쉬는 가느다란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두운 달빛 아래 뱀같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형상이었으나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어둡네. 마나 등은 고장났고, 안 보이는데...”

 

나 그거 있어.”

 

마르틴은 가지고 탄 가방을 뒤적였다.

 

얼마간 뒤지다가 손에 잡혔는지 작게 위잉 소리가 나며 희미한 푸른 빛 불이 켜졌다.

 

푸른색 빛 아래에서 꺼멓게 보이는 끈적끈적한 것은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뱀처럼 생긴 그것은 눈을 감은 채라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마르틴, 가방에 자리 있어?”

 

.”

 

아라벨라는 자신이 가지고 탄 핸드백을 열어 뒤집었다.

 

구취제와 물감과 거울을 마르틴의 가방에 쑤셔 넣자 마르틴은 손수건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아라벨라는 손을 저었다.

 

상처가 있어? 거기에 감을 거야?”

 

아니. ...불 잘 들고 있어.”

 

마르틴이 손을 높이 들었다.

 

아라벨라의 어머니, 에멜라가 살아 있을 때 아라벨라는 자주 사냥에 참가할 수 있었다.

 

사냥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좋아했었지.

 

뱀은 아닌 것 같았고, 오히려 처치 곤란한 마물에 가까워 보이지만....

 

마르틴은 뱀 같은 것의 등에 붙어있는 날개를 슬쩍 건드렸다.

 

이거 무슨 바실리스크나 그런 걸까?”

 

마르틴이 소곤거리고는 아라벨라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릴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한참이나 안절부절 못하다가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재빠르게 아라벨라에게 속삭였다.

 

내가 들어도 돼? 누나? 아라벨라 누나? 쪼끔만 가방 열어주면 안돼? 꼬리나 날개 만져볼래.”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상태를 보고.”

 

그럼 내가 가지고 갈래, ? ? 안 흔들고 얌전히 가져다줄게.”

 

너 이거 진짜 바실리스크면 위험하다는 거 알지?”

 

하지만 가방 안에 있으니까 괜찮잖아. 그치?”

 

바실리스크에게 제일 위험한 건 눈이긴 한데, 그래도 이빨이...

 

하고 망설이던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문을 열어주자 가방을 마르틴에게 넘겨주었다.

 

손잡이만 잡고, 흔들지 말고.”

 

걱정 마.”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스파크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라벨라는 시침을 뚝 떼고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장갑은 남성용인지 스파크에게는 조금 커서 장갑이 내려가자 스파크는 손을 더 올려 아라벨라에게 맞춰주었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지만 정원의 가로등과 저택 안의 불빛은 아주 환해서 걸음을 옮기거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까맣게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선 저택은 렐리악 백작들이 후계자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고 조용히 은퇴하여 사는 곳이라고 들었건만, 이 저택은 은퇴한 귀족 부부가 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심지어는 도시나 왕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마력 등불도 있었는데 온 마당을 낮처럼 환하게 밝혀주어서 마당에 뭐가 있는지, 발에 뭐가 밟히는지 까지도 보인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두 분은 이만 쉬십시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저택에 당도하자 문이 끼익 열린다.

 

색색의 돌을 다듬어서 무늬를 낸 호화로운 바닥은 장미 같은 진분홍이 메인 컬러이고, 무거운 빛의 녹색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거나 화병 받침대 같은 것들이 쭉 늘어서서 작은 조각품, 화분, 뚜껑이 덮인 과일 그릇이 장식되었다.

 

몇 명의 고용인들은 아라벨라의 짐을 내린다 마르틴의 물건을 옮긴다며 분주했고 마르틴은 그 모습에 자신도 도와야 하는 것인지 머뭇거렸지만 아라벨라가 손을 잡아주자 집사를 따라갔다.

 

두 분께서 머무르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3층은 주인님께서 조용히 있고 싶으시다고 하셨으니 당분간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집사는 창문 하나 없는 긴 복도를 따라 그들을 데려갔다.

 

가장 끝이 아라벨라의 방.

 

그 옆은 청소 용구를 넣어두는 작은 방이고 그 다음이 마르틴이 받은 방.

 

방음 하나는 잘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걷다 아라벨라는 발을 삐끗했다.

 

익숙해지지 못한 하이힐이 투두둑 뭔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카펫을 긁었고 스파크가 급히 아라벨라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가죽 장갑 너머의 든든한 팔을 힘을 주어 잡고 몸을 일으키자 붉은 머리의 이 집사는 방 문을 열었다.

 

이 집에서는 실내에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습니다. 짐에 굽 있는 구두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지 않으신다면...”

 

아니, 신어! 그냥 짐 쌀 때 힐을 빼놓고 와서 그래.”

 

슬리퍼를 신게 해준다고? 아버지의 연락을 받지 못 했나?

 

다시는 슬리퍼를 신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신게 되다니 아라벨라의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커졌다가 숙녀답지 못한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작아졌다.

 

집사의 노란 눈이 아라벨라를 향했다가 다시 방 안으로 향했다.

 

욕실은 방마다 딸려 있습니다. 목욕물을 받아두었으니 두 분이 먼저 여독을 푸시면 그 사이에 시종들이 방에 두 분의 물건을 놓아드릴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침대 곁의 종을 울려 주십시오.”

 

마르틴은 집사와 스파크의 눈치를 살피다가 살금살금 다가와 아라벨라의 손에 핸드백 손잡이를 쥐어 주었다.

 

아라벨라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꿈틀거리는 핸드백을 꼭 쥐고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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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4

2019. 3. 16. 01:34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가씨.”

 

아라벨라는 높이가 한 뼘이나 되는 힐 위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시녀들이 급하게 마르틴의 짐을 쌌지만 작은 가방 하나는 꼭 자기가 들겠다고 우겨 아주 작은 가방을 손에 쥔 모습에 겨우 인상이 펴질 뻔 했지만 집사가 내민 보석 박힌 손가방에 다시 우그러졌다.

 

뭐야. 됐어.”

 

숙녀라면 마땅히 드셔야 합니다.”

 

됐어, 저기 짐마차에 같이 넣어둬.”

 

이것은 들고 가셔야 합니다. 안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말에 아라벨라는 가방을 받았다.

 

씹기만 하면 입안 청소를 해준다는 무슨 구취제가 한 병 들어 있고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과 자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 있고, 입술 위에 덧바를 수 있는 분홍색 물감이랑 은칠한 장미 장식 거울이 또 하나.

 

“...이게 무슨 꼭 필요한 물건인데?”

 

무릇 숙녀라면 부끄러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 때를 대비해서 드리는 물건입니다.”

 

양파나 마늘을 먹고 나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입술 위에 칠한 물감이 옅어질 때가 있다고 말을 시작한 집사는 이후로 아가씨가 사용하는 손수건에 관한 이야기와 사용법을 서른 가지나 말하려고 했다.

 

날 십 년이 넘게 보았으면 알 텐데, 그거 안 쓸 거라는 걸.”

 

아가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우아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가씨의 의무이며, 물감을 칠하고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아가씨의 권리라는 것을요.”

 

짜증나.”

 

숙녀는 그런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마차에 타라며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이 손을 내밀었다.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라벨라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을 쥐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깥에서는 셰필라 백작의 말이 들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차할 때는 네가 누나를 지켜 줘야 한다. 알겠지? 네가 누나 보호자가 되는 거야.”

 

풀 사박이는 소리가 나더니 사피야가 가벼운 남색 드레스에 은회색 천을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은장식이 달린 신발이 이슬이 맺힌 풀 위를 밟자 향긋한 향기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준비는 다 되었니?”

 

아라벨라는 코 끝을 찡그렸다.

 

마르틴이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나고 마차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잘 다녀오렴, 아라벨라.”

 

다녀올게요 엄마!”

 

마르틴이 고개를 반짝 내밀었다.

 

난생 처음으로 아들과 떨어지는 사피야 렐리악은 의연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그 뺨을 쓸어 주었다.

 

누나 말 잘 듣고,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잘 다녀오렴.”

 

!”

 

마차는 최소한의 사람에게서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사람들이 밟아 단단해진 길 위에서 마차는 부드럽게 달그락거렸지만 쿠션을 잔뜩 댄 마차 안은 약간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자 대장장이 일을 하는 크룰탄과 눈이 마주쳐 웃는 낯으로 손은 흔들었지만, 아라벨라의 머릿속은 할머니에 대한 일로 가득차 있었다.

 

아라벨라는 할머니를 네 살 때 딱 한 번 만났다.

 

할머니는 녹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틀어 올려서 얇고 번들거리는 하얀 가죽 같은 것으로 고정했고, 시선을 받은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 비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아라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새까만 말 위로 날아올랐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장면을 떠올렸더니 왠지 몸이 근질거려서 창밖으로 몸을 빼었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얼룩무늬 말을 탄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젠장.”

 

저는 스파크입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깥으로 몸을 내밀면 위험하니 부디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데일라도 혹시 여기 있어?”

 

데일라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야 말, 하얀색이고 갈기는 짧아. 마구를 구름 무늬로 장식했어.”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내민 손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파크는 잠시 앞뒤로 다녀오더니 데일라가 앞에서 마차를 끌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아라벨라는 다시금 말을 타고 싶어져서 끙끙거렸다.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곳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로, 왕국과 왕국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의 끝에 자리하는데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닷새나 걸렸고 그나마도 아가씨를 노숙하게 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에 며칠은 밤을 새서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아라벨라를 잠시 밖에 나오게 해줄 리가 만무했고,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구경할 시간 역시 주지 않았다.

 

한 번은 창문으로 몰래 나갈까 했지만 금세 스파크에게 들켰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이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라벨라는 엿새째의 저녁에 마차 안에 쿠션을 깔고 그 위를 구르는 것으로 힘을 발산했다.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 아가씨.”

 

노크 소리가 났다.

 

이번 여행에서 총 책임을 맡은 기사와 렐리악 가문의 상징인 용 문양이 새겨진 장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는 스파크만 남겨두고 렐리악 전 백작님의 집사에게 이 마차를 인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아래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기사는 마르틴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일렀습니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는 동안 식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둑한 해에 역광으로 새까만 잎사귀를 바람이 흔들었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몰면 마을은 점점 더 작아지고 멀어졌고 장난치다 지쳐 잠든 마르틴의 발이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달랑거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고 벌써 이틀이나 신은 힐은 걷지도 않았는데 발을 아프게 했다.

 

지나치게 평화롭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는데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뭇잎과 가지가 요란하게 부딪히고 꺾이면서 나는 소리가.

 

마차 천장을 쳐다보는데 불쑥 무언가가 나무 천장을 뚫었다.

 

나무가 거꾸로 자라나듯 천장에서 솟아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도련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지는 해에 안이 더 똑똑히 보였다.

 

부러지고 꺾어진 나무.

 

진액을 뚝뚝 흘리고 풋내가 진동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피 냄새 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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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시장

2019. 3. 7. 23:49 | Posted by 호랑이!!!

차도 있는데 굳이 기차라니.

 

꽃무늬 장바구니를 든 크나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객실은 나름의 운치가 있기는 하겠으나 여행도 아니고 이동수단으로서는 그다지 선호할만한 물건이 되지 못 했다.

 

그 와중에 율리안은 종이와 펜을 꺼내 리스트를 확인하려해서 크나트는 그의 눈을 가렸다.

 

이런 곳에서 글 읽으면 눈 나빠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넣을 겁니다.”

 

아까 두 번이나 확인했잖아 자기야.”

 

누가 당신 자기입니까, 눈 가리지 말고 치우십시오.

 

누가 우리 자기긴 정원의 밤에 핀-.

 

장미라고 했다가는 화낼 겁니다.

 

등의 말을 하다 보니 두 정거정이 지나 내릴 곳이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음에도 타기 전에는 말끔한 거리이던 장소가 내리고 나서는 포장된 도로에조차 풀이 건강하게 자랐다.

 

천 바구니에 손가락을 끼워 달랑거리며 내리자 율리안은 우선 리스트부터 확인했다.

 

우선 버터 파는 곳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집 것은 인기가 많아 금방 떨어질 거라고 하니 좀 뛰어야 할 겁니다.”

 

꽤 커다란 장이지만 시골이었기에 잘생기고 낯선 젊은이는 시선이 가는 모양이다.

 

종이로 싼 버터만 겨우 한 덩이 고른 율리안은 마셔보라며 받은 신선한 우유에 양젖까지 들고 찡그린 듯 난감한 표정으로 크나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 키스해줄까?”

 

그거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말!

 

크나트는 율리안이 짐을 건넬 때마다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노려보는 율리안과 눈이 마주칠 때면 윙크를 날렸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율리안은 손에 든 우유를 벌컥 마셨다.

 

“...”

 

맛있나보군

 

생각보다 맛있었기에 할 말을 잃다니 황당한 일이다.

 

율리안이 빈 종이컵만 쳐다보자 크나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달링?”

 

이건...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하고 율리안은 양젖이 담긴 컵에도 입술을 대었다.

 

그다지 익숙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맛이 있다.

 

풍미가 진하고 고소하고 단맛도 나는데다 가공하지 않아서 젓기 전의 크림처럼 무게감까지 있다.

 

양젖, 우유는 원래 이런 맛인가.

 

리스트에는 없었지만 때마침 집에 있는 우유도 다 마셔가니 한 병 정도는... 하고 돌아 본 순간 율리안은 커다란 병으로 두 개나 산 크나트를 보고야 말았다.

 

그만큼이나?!”

 

제정신이냐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표정을 짓는데도 이 뻔뻔한 남자는 기어이 우유 꾸러미와 돈을 교환하고야 만다.

 

자기가 이거 맛있다며.”

 

그렇, 아니, 자기라고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밖에서!

 

파르륵 떨자 크나트는 우리 자기랑 작은 다툼이 있었어요같은 표정으로 상인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우유와 버터를 판 그 사람은 저쪽에 꽃을 길러 파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크나트는 율리안의 말은 듣지도 않고 휭하니 꽃을 사러 갔다.

 

황급히 말리러 가기 전에 애써 잘 마셨다고 인사를 건네니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뭘 숨기려 들고 그랴. 둘이 여행 왔어?”

 

말리러 가야 하는데.

 

뿌리치고 가기에는 상인의 눈이 반짝인다.

 

율리안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가... 여행은 아닙니다. 이제 여기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는데 여기 장터가 선다고 추천을 받아서...”

 

전 직장에서 만난거라 만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오래 만나서 떠날 때도 놓쳐버렸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율리안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자신이 또 떠날 때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대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 만한 말을 하고 떠나려고 했건만 마음과는 달리 입을 열수록 질문과 청중이 늘어나서 벌써 다섯 명, 이제 여섯명, 일곱... 의자까지 끌고 귀를 기울이는 저 영감님까지 세면 여덟 명...

 

율리안은 도망이 가고 싶어졌다.

 

 

 

 

 

 

 

이후 크나트가 튤립과 프리지아 다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번 보는 것으로 율리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차린 그는 율리안을 구하는 것보다는 청중 사이에 들어가서 듣는 것을 택했고 얼마 안 가 율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율리안이 기가 막혀하자 크나트는 숙련된 솜씨로, 납치라고밖에 못 할 짓으로 율리안을 빼내더니 먹이고 시장을 구경시켜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탄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집에 가자마자 뭐든 해먹어야겠어.”

 

계란하며 우유는 상하기도 쉬운데 그러게 이 남자는 왜 이 시간까지 자길 끌고 다녔냔 말이다.

 

빨갛고 노란 꽃다발을 안은 자신은 또 얼마나 시선을 끌었는지.

 

덜컹거리는 기차에 타니 몸은 둘째치고 마음이 편해졌다.

 

저녁때라 그런가 사람도 없어서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크나트는 율리안을 빤히 보다가 따라 다리를 쭉 뻗더니 마주보는 건너편 의자에 발을 올렸다.

 

그러면 안됩니다.”

 

잔소리는.”

 

“”공중도덕이라는 게 있습니다.

 

크나트는 납득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누구한테 그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어?”

 

당신 아닙니까.”

 

가끔은 어겨도 될 텐데 말이야.”

 

그런 게 어디있습니까, 그런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딱딱거리던 율리안은 30분 뒤 좁은 기차안 화장실에서 크나트와 함께 나왔다.

 

“...공중 도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