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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30

2019. 10. 13. 19:33 | Posted by 호랑이!!!

 

새벽.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오른편에는 사나기가 몸 선이 비치는 잠옷을 입은 채로 얇은 이불을 몸에 감고 누워 있고 왼편에는 슈체른이 마찬가지로 몸 선이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자기 직전까지 공주가 내려준 잠옷을 입고 엎치락 뒤치락 장난을 쳤으니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자신도 그렇게 장난을 치고 놀았건만 왜 이 시간에 일어난 거지?

 

아라벨라는 밖을 내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떠 있고,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

 

겉옷만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어째서인지 아라벨라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온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를 화나게 하고 잠재울 수 있는 무언가가.

 

높이 자란 나무가 뽑힐 것처럼 흔들리며 땅이 같이 움썩거리고 누군가 잡아당기고 미는 것처럼 구름이 움직인다.

 

그 구름에 가리우고 드러나며 촛불처럼 흔들리는 달빛에.

 

아라벨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마치 산에서 보았던 것처럼.

 

흐르고 멈추는 무언가가 아라벨라와 나무들과 구름과 모든 것들을 둘러싸고 빛났다.

 

손으로 막으면 막히고, 헤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것은 비처럼 창문과 모든 물건들을 타고 흘렀다.

 

몸에 쏟아지는 이 거친 바람을 맞으며 아라벨라는 눈가를 문질렀다.

 

바람이 거칠어지며 더 자세하게 느껴졌다.

 

떠나야 한다.

 

짝을 잃은 거대한 것이 온다.

 

하지만 어디로?

 

그것은 분명 아라벨라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커다란 침대의 한 쪽에는 편안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사나기 공주와 아무튼 튼튼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슈체른이 누워 있었다.

 

“...꿈인가?”

 

뭐가 말입니까?”

 

으악, 깜짝이야. 언제 깼어?”

 

깨신 것 같기에 같이 깼습니다.”

 

으으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세찬 바람은 간 데 없고 산들바람이 지나가는지 나무 이파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햇살은 따스하고 맑게 세상에 빛을 내리고 있었다.

 

진짜 꿈인가.

 

아라벨라는 기지개를 쭉 켜고는 다시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일어난 김에 씻으십시오. 옷도 입고.”

 

“...잠을 설친 것 같아.”

 

안 피곤한 거 다 아니까 일어나시지요.”

 

아라벨라는 쳇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어떻게 알아? 그런 걸.”

 

그야 어제는 바람이 충만했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람, 하고 뒤돌아보았지만 슈체른은 이미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나간 차였다.

 

아라벨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나기 공주도 일어났고 셋은 사나기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에는 이미 아라벨라 나이 또래에서부터 마르틴보다 한두살이나 많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

 

길쭉한 테이블에는 문양이 다른 은접시가 늘어섰고 접시마다는 샌드위치나 케이크, 귀한 과일이 담뿍 놓여있었다.

 

심지어는 주전자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도 모를 단지가 제각각으로 몇개나 놓여있었고 아라벨라는 그 중 하나를 살짝 열어보았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흑색 설탕을 보았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아가씨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기를 맞았다.

 

응접실 문이 닫히고 잠겼는지 딸깍 소리가 나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지 미동도 없었다.

 

불쾌할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은 경계심을 숨기지 않아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 앞에 섰다.

 

그럼 이 모임에 처음 온 이를 소개해주어야겠지. 다들. 이 쪽은 렐리악의 아라벨라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라벨라가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일부는 인사를 해 주었고 일부는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만 있어 사나기가 일일히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카샤 백작, 아폴리칸 자작 영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 말리우 백작 영애, 루일라 후작, 덱스터 공작 영애, 라크 백작.

 

사나기는 그들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았었기에.

 

그것도 악명이.

 

카샤 백작은 사치가 심하고 남자를 좋아하고, 아폴리칸 자작 영애는 입을 벌리면 커다란 뻐드렁니가 보였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는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고, 말리우 백작 영애는 뚱뚱하고, 루일라 후작은 유행에 뒤떨어진데다 다리를 절고, 덱스터 공작 영애는 이상한 취미가 있고 분위기를 못 읽고, 라크 백작은 어린애를 좋아하고 잔인하다고 했지.

 

공작 영애가 손을 들었다.

 

바실리님과는 무슨 사이이지?”

 

제 할머니 되십니다. 왕궁에 오기 직전까지 할머니 댁에 있었습니다.”

 

에일라, 그 사람이야. 옛날에 렐리악 백작의 결혼식 때 바지 입었던.”

 

말리우 영애가 속삭이자 덱스터 공작 영애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더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럼 아라벨라가 여기 있는 거,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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