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만년필은 만년필이다

2020. 4. 23. 00:18 | Posted by 호랑이!!!

수현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는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우는 것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거나 아버지의 친척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지.

 

사실 수현은 처음부터 장례식에 반대했었다.

 

장례를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랬을 때도 가장 짧고 초라한 것을 은근히 내밀었지만 사흘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이기지는 못했다.

 

하기는 일생 내내 그랬지.

 

“누나.”

 

현수의 양말에 있는 노란 곰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상주 나한테 주라.”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현수의 입에서는 열릴 때마다 소주 냄새가 났다.

 

“어른들이 그래도 상주는 남자가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큰아버지가 그 소리 하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랑, 고모랑 큰엄마도.”

 

그리고 또, 하면서 누가 거기 있었는지 떠올려보는 현수를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학교 가야 하잖아. 낮에도 있어야지, 상주 하려면.”

 

“어, 그런가?”

 

“어른들이 준다고 다 받아 마시지 말고 가서 자라.”

 

“으응.”

 

현수가 자러 가는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현이 이름을 좀 기다렸다 주는 건데.”

 

수현이와 현수의 사이에는 자그마치 팔 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억지로 공을 차게 하는 것 외에 첫 팔 년은 수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 팔 년은 갑작스럽게 길어진 양갈래 머리와 꽃무늬 치마가 생겼고, 그때부터 이름에 대한 불만어린 한숨소리가 늘어났다.

 

머리를 털고 수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잤어? 밥은 먹었고?’

 

‘오늘 피자 먹으려고 했는데 참고 너 오면 맛있는 거 먹기로 함’

 

아영이었다.

 

수현의 머릿속에서 한숨소리가 날아갔다.

 

 

 

 

 

 

 

 

다음날은 발인이었다.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까지 한 다음 친척들이 밥을 한 끼 하자는 것을 거절한 다음에야 수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자고 싶었지만 입출금 내역을 정리해야 했기에 책상 앞에 앉아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아버지는 핸드폰이 있는데도 굳이 종이와 펜을 쓰는 수현을 보고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는 이름자도 인색하던 아버지가 보여준 모처럼의 관심에 퍽 기뻤었지.

 

장례를 치렀기 때문인지 기묘하게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잡은 펜이 아버지가 선뜻 건네준 얼마 안 되는 물건이라 더 그런지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 펜대에 금색 테가 들어간 것은 짙푸른 잉크를 컨버터로 채워 쓰는 만년필로, 대학에 들어가 기말고사에서 1등을 하자 받은 것이다.

 

그 때는 이 펜이 아주 고급품처럼, 아주 보물처럼 느껴졌다.

 

수현의 눈이 펜꽂이로 향했다.

 

검은 만년필을 받고 난 이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펜들은 가격도 색도 가지각색으로 투명한 유리몸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푸른색 얼음같은 몸체를 가졌거나 청록색 장식이 반짝였다.

 

“수현이 왔어?”

 

방문이 열리고 아영이가 다가왔다.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

 

아영이가 팔을 벌려 수현을 안았다.

 

한때는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고는 했던 이 자세는 이제 꽤 편안해서 아영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몸을 기대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려지고는 했다.

 

지금처럼.

 

“이거 너 줄게.”

 

팔을 풀고, 수현은 펜꽂이에서 검푸른 만년필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남색 잉크, 회색 잉크, 펄이 들어간 잉크들, 밝고 파란 잉크, 금속 느낌이 나는 잉크를 한아름 안겨주자 아영이는 잉크와 수현을 번갈아보았다.

 

“갑자기? 이걸 다?!”

 

“당분간 만년필은 쳐다도 안 보려고.”

 

수현은 서랍을 열고 펜꽂이에서 만년필 한 움큼을 꺼내 그 안에다 처박았다.

 

“하지만 잉크는 아까우니까. 상하면 안 되고.”

 

“잘 쓸게!”

 

아영이는 수현의 펜과 잉크를 받아들었다.

 

정리부터 하겠다며 가지만, 아영이는 그걸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기만 할 것이다.

 

그걸 두고 정리를 한 거라며 우길 것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부터 칠이 벗겨진 낡은 펜이 생기 없이 빛을 반사했다.

 

“이거 줄 테니까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무슨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수현은 펜을 부숴 버리는 대신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일도, 아직 자신에게 상처를 남겨 숨 쉬고 볼 때마다 피를 흘리게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자신이 울고 화를 내던 모든 일이 이제 자신의 마음에 작은 스크래치조차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극복하면 좋았겠지만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언젠가는 흉터가 되고 잊혀졌다가 돌아보면 또 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나중에도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만년필을 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까지 그러지는 않겠지.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망설이다가 서랍을 열고, 넣고, 닫았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나 면 먹고싶어!”

 

“어 나 며칠동안 국이랑 밥만 먹었더니 그건 좀.”

 

“국물이 싫은 거지? 내가 만들 테니까 비빔면은 어때?”

 

“계란 삶아서 넣자,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만년필을 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물 좀 올려줘, 얼음도 넣을까?”

 

만년필은 만년필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