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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크리스마스

2020. 12. 25. 02:24 | Posted by 호랑이!!!

“...”

 

이 사람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낭비가 심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또 새롭군.

 

율리안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느낌의 무표정을 지었다.

 

둘밖에 없는 집에 커다란 햄 같은 거야 예상범위 내였다.

 

마시는 건 한 사람밖에 없는데도 샴페인이니 와인이니 하는 걸 들여놓는 것도.

 

...잠깐, 물병 가득하게 담긴 이건 수제 에그노그잖아? 이 사람은 자신을 중독자로 만들 생각인가?

 

술도 안 마시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거야.

 

여하간 노골적일 정도로 크리스마스 전용으로 만들어진 스웨터조차도 예상 범위 내였지만.

 

“이건 대체 왜 틀어둔 거지...?”

 

율리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스피커에서는 경쾌하게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어느 영화 회사 로고였나 N이 커다랗게 화면에 스치우길래 저 사람이 또 무슨 어울리지 않는 걸 틀었는가 기다리고 있었더니-

 

“앉아서 기다리지 그랬어.”

 

쟁반을 들고 크나트가 거실로 왔다.

 

“앉을 겁니다.”

 

커다란 전나무는 금색 공과 꼬마전구와 끈으로 장식되었다.

 

나뭇가지에는 또 이런저런 것들이 걸려있고, 아래에는 선물상자도 있어 제법 그럴싸하다.

 

작년에도... 그랬었지...

 

문득 떠오르는 종소리의 추억에 율리안은 크기가 들쭉날쭉한 선물상자를 노려보았다.

 

“빨리 선물부터 뜯어보고 싶어?”

 

“그런 게 아닙니다.”

 

이번에는 또 수상쩍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매시 포테이토와 두툼하게 자른 햄을 접시에 덜어놓을 뿐이다.

 

“잠깐, 립도 산 겁니까?”

 

“만들어두면 며칠 먹겠지 싶어서.”

 

다다익선 같은 소리나 하는 저 사람에게 검소의 미덕을 말하려다가 율리안은 오늘이 자애와 자비와 관대의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상기하고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

 

“역시 아깝습니다.”

 

뜯지도 않은 팩에 든 칠면조를 애써 무시하고, 율리안은 자기도 뭔가 준비했다며 부엌으로 가서 몇 시간이나 붙어 있었던 커다란 냄비를 가져왔다.

 

“뭔데?”

 

“이탈리아 전통 신년 음식입니다.”

 

이건 좀 잘난 체 하는 것 같았나? 율리안은 머뭇거리다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훅, 더운 김이 얼굴에 끼쳤다.

 

습하고 따뜻한 수증기에서는 비릿하고 달짝지근한 바다 냄새가 났다.

 

슬쩍 냄비 안을 들여다본 크나트는 아, 그랬었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이트 와인? 아니면 보드카?”

 

“괜찮습니다.”

 

이미 이 식탁 위에 나와있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역시 저 형제님은 나를 알코올 중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율리안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가위로 게를 썩둑 잘라 흰 살을 드러냈다.

 

“해산물 요리를 하는 건 처음 봤는데.”

 

“오랜만에 한 요리이기는 합니다.”

 

갑각류는 손이 많이 가지만 맛있지.

 

살을 들어내 접시에 담자 크나트는 즐겁게 게 접시를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손수 만든 절임 채소도 작은 그릇에 덜어 올려두자 제법 호사스러운 식탁이 되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오디오 스피커에서는 징글벨 노래가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하다.

 

깔끔하고 단정한 집 안이 초록과 빨강과 반짝이는 포장지로 발랄해진 것도, 조금 무리해서 좋은 게를 산 것도 기분을 명랑하게 만들어서 율리안은 얼른 게 다리를 뜯어냈다.

 

그야말로 가정적이고 완벽한 크리스-

 

“-마앗?!”

 

게를 입에 넣자마자 몸이 우뚝 굳었다.

 

“왜?”

 

팩,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인 율리안의 눈이 크나트의 접시를 향했다.

 

상대의 수상쩍음을 느낀 거의 동시에 의자를 쓰러뜨리며 율리안과 크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나트는 율리안을, 율리안은 크나트의 손에 들린 접시에 눈길을 두고.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라는 낭만적인 곡을 배경으로 둘 사이에 고요한 대치상황이 있었다.

 

“...”

 

“...”

 

잠시의 탐색전.

 

율리안은 눈을 굴려 싸움질로 다져진 팔과 근육으로 짜인 두툼한 가슴을 보았다.

 

“...그 접시를 이리로 주시기 바랍니다.”

 

신체적이고 경험적인 불리함을 인지한 율리안은 우선 대화를 청했다.

 

율리안은 건전한 현대인이었고,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며, 또한 훌륭한 청년이었기에.

 

“그런 것을 식탁에 올릴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며 접시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런 것이라니, 어째서?”

 

다행히 저 야만적인 남자도 대화를 해볼 모양이다.

 

약간의 희망을 느끼며 율리안은 접시를 이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접시를 먼저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나트는 눈을 굴려 율리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순순한 모습에 잠깐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율리안은 기대했던 단단한 접시가 아니라 무언가 말랑한 것이 닿자 펄쩍 뛰어올랐고, 그대로 크나트에게 잡혀 의자에 강제로 묶이고 말았다!

 

“이거 풀어주십시오!”

 

트리에 단 것과 같은 반짝이는 은색 금색 줄이 율리안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 남자가!!!

 

율리안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크나트에게 소리쳤고, 크나트는 그런 율리안을 보다가 콧노래나 부르며 그의 몸에다 주섬주섬 오너먼트를 달았다.

 

“사, 사람을 뭘로 아는 겁니까!”

 

심지어 파티용 종이 모자까지 머리에 씌워주자 정신을 차리십시오 형제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외의 말은 간신히 목 뒤로 넘기는데 크나트는 율리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아, 설마.

 

포크가 껍질 안의 살을 긁어냈다.

 

안돼, 설마...! 안돼...!!!!

 

포크는 길쭉한 살을 과도하게 우아한 몸짓으로 운반하였고 그 수령지는 아직도 율리안을 빤히 쳐다보는 크나트의 입이었다.

 

“흐음, 이것 보게. 찔 때 물을 너무 적게 넣고 찐 거 아냐?”

 

“소금을 좀 많이 넣었을지도?”

 

“이 부분은 살이 졸아들었는걸.”

 

한 마리를 끝내면 다음 한 마리를, 또 다음 한 마리를, 또 다음 한 마리를.

 

크나트는 한 마리에 한 마디씩 밉살스러운 말이나 하면서 냄비 안의 게를 전부 끝장냈다.

 

짜면 먹지 마십시오! 로 시작한 율리안의 말은 결국 의자째로 펄떡이는 육체적 반항이 되었고 율리안의 괴로움을 향신료삼아 크나트는 마지막 게까지 박박 긁어 먹었다.

 

그 즈음에는 율리안도 지쳐버려서 축 늘어졌는데 싱글싱글 웃는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날렸다.

 

“...그래도, 잘 먹었어 달링.”

 

기척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뺨에 입술이 닿았다.

 

율리안은 펄쩍 뛰어 몸을 일으켰지만 크나트는 게 껍데기를 들고 부엌으로 가 버린 후였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야.

 

율리안은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그 화면에는 타닥 타닥 타오르는 난로가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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