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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장품 요정의 엔딩

2020. 1. 10. 23:08 | Posted by 호랑이!!!

거짓말이지...?”

 

나는 멍하니 팩트의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난생 처음 사 본 팩트에서 나타난 내 작은 요정은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와 접점이 생기도록 도와주었고 화장으로 내가 더 예뻐지게 도와주었으며, 더 날씬해지는 방법과 더 또렷한 눈매와 더 나은 몸매를 얻게 도와주었다.

 

공부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피부가 나빠진다며 일찍 자라고도 알려주었고 시험지 풀이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면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가 피자와 치킨, 친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흔들릴 때마다 샐러드를 한 번 더 내밀며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비록 성적은 떨어지고 정말 친한 친구들은 멀어졌지만 같이 밥 먹고 과제할 친구는 많았고, 더 이상 단거리 달리기에 11초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옷을 골라도 내 몸에 맞았고 심지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선배와 사귀게 되었었고.

 

작은 성과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내 요정.

 

요정은 지금까지 무엇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별을 정복할 수 있어.”

 

요정은 기괴하게 깔깔 웃어젖히더니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고개를 홱 숙였다.

 

“100. 그 이전부터 하던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거든.”

 

? 어떻게?

 

전쟁? ? 환경오염?”

 

바보 아냐? 내가 지금까지 네 옆에서 뭘 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원반이 보였다.

 

하얗고 푸른 구름 사이에서 그것은 종말을 알리는 무언가처럼 땅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널찍한 화장대에 가득한 립스틱, 틴트, 립쿠션, 립글로즈,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프라이머...

 

겨우 저런 걸로?”

 

겨우?”

 

요정은 작은 창을 만들었다.

 

그 창 위에는 여러 뉴스 기사와 잡지, 신문 같은 것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천연+기능화장품으로 1030 女心 잡을 것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욕심이 없다

 

정규직 진입 비율은 9:1”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 17%에 불과...”

 

댓글도 드문드문 보였다.

 

요정은 그 옆에 작은 창을 하나 더 만들었다.

 

너도 곧 활용 될 테니까 보여줄게. 이 수치는 우리의 힘이야.”

 

한 쪽에서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잠시 흔들리더니 20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다.

 

우리는 작지. 지능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걸 전부 활용할 생각을 하거든. 우리 모두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

 

작은 창이 하나 더 생겼다.

 

180 정복할 수 없음

150 주의 요망

130 안전

 

이건 너희 수치야.”

 

우선 점수가 50 올라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크기 점수라고 했다.

 

그 점수는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80... 100... 117... 125... 128.... 130...

 

느려지는 속도에 애가 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속도라면 180은 안 되겠지만, 제발...

 

그러나 숫자는 135에서 그쳤다.

 

“...이것밖에 안 돼?”

 

허망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내 요정이 깔깔 웃었다.

 

이만하면 많은 거지!”

 

한 쪽은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 그 쪽을 깎아내리고 괴롭히는 데 열정을 쏟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꾸미는 데에 불필요하게 신경쓰잖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수술하면 마치 고장난 물건을 대하듯이 고쳤다고 하고!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진 거 알겠어?

 

고등학생 때까지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했다며? 지금 네 성적은 어때? 만족스러워?

 

네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느껴져?

 

아니겠지.”

 

요정이 웃었다.

 

눈가에 그은 선이 짝짝이인지 아닌지, 나시를 나같은 몸에 입어도 되는지, 화장품을 잘 안 쓰게 되면 괜히 돈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네가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지.

 

A는 거울을 보았다.

 

요정은 멋대로 떠들었다.

 

거울 위에는 수많은 플라스틱들이 반짝거렸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빛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얼마 전까지라면 예쁘다고 했을 그러한 장면이다.

 

사실은 지금도 예쁘다고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그 감동은.

 

내가 잘만 하면 얼굴과 미래, 주위까지 바꾸어줄 거라고 믿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는 예전만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기이함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의외로 외계인의 말이었다.

 

“...네가 그대로였다면, 저 수치에 1이 더해졌을 텐데 말이야!”

 

“1? 10도 아니고 1?”

 

“70억 중에서 한 사람이 1이라는 숫자를 더 올릴 수 있다면 대단한 거지.”

 

나는 숫자를 돌아보았다.

 

135

 

70억 명이 모여서 만든 135라는 숫자에 내가 1을 더하는 인간일 수 있었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너도, 사람들도 다 다시 활용될-”

 

찌익.

 

내 칼이 외계인의 날개를 찢었다.

 

눈썹을 다듬을 때 썼던 칼이 날개를 뚫고 벽에 박혔다.

 

이 절망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상하게 내 의식이 또렷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멀어졌던 친구 중 하나였다.

 

여보세요?”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너 괜찮아? 너 자취방이 나랑 가깝지, 내가 갈까?]

 

아냐, 아냐, 내가 찾아갈게.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다 가방을 찾았다.

 

핸드폰과 작은 지갑 하나만 넣어도 꽉 차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방이라 이걸 멜 때면 쿠션과 립스틱과 또 무슨 자질구레한 물건들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야 했다.

 

가방을 뒤집어 안을 비우고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외계인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제대로 주머니가 달린 운동복 바지에 핸드폰을 밀어 넣고 A는 집을 나섰다.

 

이 세상의 어디에선가 띵, 소리가 나며 1351이 더해졌다.

 

.

.

 

.

.

.

 

.

.

.

.

 

그리고 그 소리는 몇 번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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