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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용기사의 두 아들이 1.

 

황실의 기니피그님이 2.

 

황제 폐하는 3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 최근 시장의 대세적인 의견이다.

 

미드가르드로 내려온 지 벌써 수 달이 지나고 이레네오는 인간도 부러워할 삶을 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쳐지는 과일과 채소.

 

부드러운 톱밥과 찢어진 서류로 만들어진 멋진 집.

 

원목을 깎아 만든 집과 장난감과 심지어는 기니피그용 수영장까지.

 

작은 강아지만하게 커진 이레네오가 궁이나 정원 안을 걸을 때면 곱게 옷을 차려입은 시종들이 기니피그님~ 기니피그님~ 하면서 웃는 낯을 보인다.

 

어쩌다 작은 손이라도 내밀어주면 기니피그님의 손! 손톱! 귀여워!를 외치기도 하니 마흔줄에 접어든 기사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아이 같아 귀여운데다 외출을 허락받아서 궁 앞의 작은 시장에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황실의 기니피그님이라고 부르며 야채를 잔뜩 내미는 덕분에 요즘 밥값이 안 든다며 이야기 하는 것도 들었다.

 

우연히 예민한 후각으로 속이 곪은 과일 같은 것을 몇 개 집어냈을 뿐인데 기니피그님은 영험하시다 소리까지 들으니 인간 삶 따위 부질이 없지 않으냐.

 

기묘한 깨달음을 얻을락말락한 그 때.

 

문을 나선 이레네오의 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 즈음이면 사람으로 와글거릴 시간이건만 길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야채 가게는 한 곳에 모였으며 심지어 가게 앞마다 깨끗한 면보에 작은 접시를 올리고 그 위에 채소 조각을 올려두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뒷발로 일어섰더니 황실의 기니피그님을 위해 붙여준 고운 시종이 흐트러지는 비단옷을 고쳐 입혀주었다.

 

기니피그님이 어느 채소를 고를지가 요즘 시장의 최대 얘깃거리라 상인들끼리 자기네 것을 제일 많이 드셨다 하였습니다만... 그 이야기가 좀 과열되어 이렇게 자리를 만든 모양입니다. 상품은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벌 수 있는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하지요.”

 

?

 

다섯 배?

 

이레네오는 두 발로 선 채 생각하다가 천천히 네 발을 땅에 디뎠다.

 

그렇잖아도 자기가 당근을 잔뜩 먹은 탓에 당근값만 몇 배로 뛰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자리 싸움에까지 끼게 되었다.

 

사람이었다면 분명 원망 들을 일인데 기니피그라서 원망 들을 일은 없겠구나.

 

기니피그라서 참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좀 전까지 시종이 배를 만져주자 발라당 드러누워 짧고 통통한 네 다리를 허우적거린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이레네오는 근엄하게.

 

우선은 가장 가까운 가게로 발을 옮겼다.

 

후일 시종이 이 날을 두고 이야기하기를, 뒤뚱뒤뚱 토도돗 달려가는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팔 할이 쓰러졌다나.

 

여하간 기니피그님이 가까이 오자 가게 주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쥐어짰다.

 

이레네오는 눈인사를 건네고는 접시 위에 작게 잘린 당근 조각을 냉큼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

 

허어 이것은 달구나, 신선하고 단단하고 좋은 당근이로다.

 

작은 머리를 끄덕이고 다음 가게로 달려가니 이것 역시 나쁘지 않도다.

 

아니? 이것은 기름에 볶았구나! 그래 당근은 살짝 익혀 먹는 것이 몸에 좋다지, 훌륭한 향이야.

 

그렇게 하나하나 먹다보니 마지막 가게가 남았다.

 

슬슬 배가 부르니 이것은 어이해야할꼬.

 

심지어 마지막의 저 상인은 평소 행실이 나쁘다 소문이 나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배까지 불러버렸으니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가여운 일이 벌어진다.

 

지금도 보아라, 긴장을 해서는 개를 옆에 두고 자기 양배추를 쓰다듬고 있지 않느냐.

 

어허 심지어 떨기까지 하는구나.

 

이레네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까이 다가가 발등 위에 앞발을 척 얹었다.

 

그러자 상인은 화들짝 놀라 저 뒤로 도망가버렸다.

 

가여운 자로다.

 

이레네오는 총총 접시로 돌아갔다.

 

마지막 당근은 어째 주황색이 강하고 냄새도 좀 이상했으나 상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디어디, 앞발- 아니, 손에 들고.

 

그렇게 한 입 깨문 이레네오는 머릿속을 울리는 충격적인 맛에 당근을 툭 떨어드렸다.

 

아니, 이 맛은...!

 

왜 저러시지?”

 

저기 당근이 특출나게 맛있나?”

 

저 집은 싼 맛에 자주 갔었는데 맛도 다른데보다 나았던 모양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이레네오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자 시종이 조르르 따라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이 제일 맛있습니까?”

 

이레네오는 접시를 들었다.

 

가장자리를 야무지게 잡고 뒤로 돌자 사람들은 오오, 저것을 선택하셨나보다, 하고 감탄사를 여기저기서 내뱉었다.

 

그리고.

 

이레네오는.

 

틀었던 몸을 다시 돌리며 거대한 원반같은 접시를 상인의 머리에 던졌다.

 

"이놈! 먹는 걸로 장난질을 하다니 못된 놈이로다!"라는 말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겠지만.

 

 

 

 

 

 

당근에서 났던 것은 마약의 씁쓸한 맛이었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 책임에 대하여

2019. 9. 20. 16:03 | Posted by 호랑이!!!

(*아이들이 말할 때 아이들은 머릿속에 이미 완전한 말을 생각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발음을 다시 해보라던가 틀렸다고 말하면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본 소설에서는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귀여움을 강조하기 위해 포함시켰으나 사마낙처럼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배경은 스키르헤임입니다)

 

아빠 책임이 모예요?”

 

이제 글자를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이 물었다.

 

, 해야지.”

 

.” “.”

 

.”

 

.” “.”

 

, .”

 

모모모모!” “머머멈머!”

 

. . .”

 

모예요?” “머예요?”

 

사마낙은 읽던 책에서 눈을 뗐다.

 

아이들이 동글동글한 눈으로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책임은 행동을 하고 거기 일어나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 같은 거란다.”

 

행동을 하고?”

 

결과?”

 

그래, 예를 들면 감히 반역을-”

 

했다가 전부 참수 당한다던가, 라고 이야기하던 사마낙은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할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저기 보면 아빠 보이지?”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 “.”

 

법적으로는 너희 아버지가 아니란다.”

 

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지, 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마친 사마낙은 다시 책을 들 뻔 했다.

 

했다.

 

아이들이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정리를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

 

“...그거 지금 말해줘야 해?”

 

.”

 

똘망똘망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며 사마낙은 신음했다.

 

날씨도 좋겠다 공기도 따뜻하고 평화로운데 마음에 평지풍파가 일고 있고나.

 

결국 대답한 것은 이런 것이다.

 

생각 좀 하고 말해도 될까?”

 

이잉.”

 

왜애?”

 

사마낙이 대답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두 아이의 표정이 표독하게 변했다.

 

저 표정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지?

 

아빠 생각할 동안 저기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리고 말랑말랑한 뺨을 톡톡 건드려주었더니 알았다며 쪼르르 달려나간다.

 

사마낙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뛰어나가고 가장 처음 마주친 것은 아르카디아네 부모님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 잘 있었어?”

 

우리 빵- 아르카디아는 저기 밖에 있단다.”

 

같이 곰굴에도 들어갔던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들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바깥을 향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뛰어나가는 것만큼은 멈출 수 있었다.

 

있자나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요?”

 

그리고 그들 역시 당황했다.

 

? 사람?”

 

왜 그런 질문을...?”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몰라요?”

 

그러자 아르데스가 냉큼 안다며 입을 열었다.

 

-”

 

아르데스.”

 

프레드릭이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노련한 기사 답게 상황을 모범적이고 바르게 수습하기로 했다.

 

얘들아,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면... 그래, 여기 있군.”

 

프레드릭은 마련된 책꽂이에서 적당히 책을 집어들었다.

 

수정에 대한 게... 그래, 120페이지부터 170페이지까지-”

 

이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집어들자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반사적으로 끼악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다다닥 뛰어갔다.

 

공부 시러!”

 

시러!”

 

아이들이 다음으로 뛰어가다 마주친 것은 기니피그였다.

 

기니어피그다.”

 

쪼끄매.”

 

살살 쓰다듬어주고 다시 뛰어가려고 하는데 기니피그가 두 발로 일어서더니 사마낙만큼이나 커다란 기사로 변했다.

 

놀랐지?”

 

놀랐어! !”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면서 손을 뻗자 갈색 머리의 기사는 으쓱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래,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어? 그러다 넘어진다?”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요.”

 

뭘 물어보려고?”

 

아이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다가 기니피그의 요정에게도 묻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요?”

 

잠시 침묵.

 

그리고 이레네오는 무릎을 굽힌 모습 그대로 기니피그로 변했다.

 

황새가 물어다준단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이라며 사라지는 모습은 재빨랐다.

 

황새?”

 

큰 새?”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아까보다는 느려진 걸음으로 다시 자박자박 복도를 걸었다.

 

새가 물어다준다고?”

 

하지만 새 사냥 하잖아.”

 

그럼 출생률에 문제가 생길 텐데.”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자며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많이 있는 방이었다.

 

다행히도 한 번씩은 인사를 해서 아는 얼굴들이었다.

 

아이들은 문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로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마치 잘 지냈느냐고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묻는 말에 로엘은 잠시 당황했다.

 

아이들에게는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손을 내려 골반을 잡았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에 내가 사람을 좀 죽였는데~ 라고 아이들 앞에서 망한 농담을 했던 사마낙과도 같았다.

 

아래를 써서 만드는-”

 

그리고 동시에.

 

이 쪽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덮쳤다.

 

잡아!”

 

묶어, 묶어!”

 

“거기 잡아, 입 막아!”

 

애들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아아악!”

 

그 난장판을 은근슬쩍 몸으로 가리며 로브나프가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부터 미래에 관심이 많다니 장하구나. 너희의 미래가 기대되노라.”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머리를 빼 그 뒤를 기웃거렸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은 신성함으로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그게 왜 저희 미래예요?”

 

언젠가는 너희도 하게 되느니.”

 

동생이 태어나나? 하고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그 이상 답을 얻을 것 같지 않자 뒤를 가리던 신성이 사라지면 로브나프를 지나쳐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검은 머리가 물결치며 떨어지는 이 사람은 로안 경이라고 사마낙 아버지가 그랬지.

 

머리가 길다는 점이나 수염이라던가가 익숙해서 아이들은 냉큼 경의 양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질문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던 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뜸을 들인 다음 말했다.

 

“...사랑의 신으로서 로브나프님이 만들어 준단다.”

 

하지만 방금 할아버지는 우리가 한다고 했는데-”

 

정말이란다. 결국은 다 신의 손끝에 달린 일이지.”

 

그렇게 대답하고 웃는 얼굴은 선량해 보였다.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다가 방을 살금살금 나가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루카스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해줄 거예요?”

 

“...하하,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은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루카스에게 흉흉한 기세로 한 걸음씩 타박, 타박 걸어갔다.

 

우리가 애라고 그러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삐죽, 뾰족하게 변했다.

 

어디 가요?”

 

왜 그렇게 나가요?”

 

그것도...”

 

루카스는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눈은 그 뒤를 따라 나가려는 사람에게 향했다.

 

몸에 덩굴 문신이 있는 삼촌(중 하나)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칸 삼촌.”

 

“...도망가려는 거 아니지요?”

 

그리고 칸수스는 그 말을 듣자 아예 눈을 접고 웃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아이들은 표정이 더 뾰족해졌다.

 

“...아핫.”

 

그렇게 또 하나가 도망갔다.

 

이제 남은 것은 둘이다.

 

폐하 아빠.”

 

드미르 삼촌.”

 

각오했다는 표정으로, 에셀리온은 목을 가다듬고 드미르치카샤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얘들아, 그렇게 도망가면 안 되지.”

 

프레드릭이었다.

 

아이들은 그 기사의 옆구리에 끼어 온 것이 아르카디아라는 것을 보고 놀람에 시선이 흔들렸다.

 

아르...?”

 

빵돌아...?”

 

프레드릭은 방 안에 생겨난 거대한 황금 새장을 지나치며 한 손에는 커다란 책을 가지고 왔다.

 

순식간에 방 안에 책상과 의자가 셋 생겨났다.

 

공부 싫어! 라고 외치고 싶었던 에샤드카와 일레하는 손을 꼭 잡았지만 결국은 아르카디아까지 세 명의 학생이 되어 책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들이 뭘 하고 있나 확인하러 온 사마낙은 세 명의 아이들이 설명을 듣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황금 새장 속 로엘과 눈이 마주쳤다.

 

“...”

 

“...”

 

“..........”

 

“..........”

 

“....이거라도 받게....”

 

로엘은 사마낙이 내민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어째서인지 짠맛이 났다.

 

 

제기랄, 죽겠네 정말!”

 

라는 용기사의 외침이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 이름은 사마낙.

 

신의 부름을 받고 스키르헤임에서의 생활 후 용의 기사로서 미드가르드에 강림한 자다.

 

혼란과 질병,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용과 함께 도끼날로 정복하여 제국을 세우고 나라를 정비하여 인간의 생활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린 공신으로서 최대 천 년의 수명을 약속받은 자.

 

그는 성격에 걸맞지 않게도 고민을 삼십 분이나 하고 있었다.

 

장군님, 역시 저희가 하는 것이...”

 

안 한다니까, 저리 나가!”

 

말 한마디면 안고 안길 미인이 네다섯이나 되고 곤란한 일이라도 떠맡길 시종은 십수명이나 되며 착하고 성실하게 자란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다 일 년에 몇 번이고 내려오는 각종 비단, 귀한 물건들이 있고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이 사는 그는.

 

현재 금욕 중이다.

 

 

 

 

 

 

 

 

바야흐로 일의 시작은 아이들이 슬슬 저희끼리 놀러다니고 사마낙은 슬슬 황제의 서류까지 본격적으로 손을 대던 일주일 전.

 

오늘은 누굴 불러서 무슨 짓을 할까 하던 나른한 오후다.

 

서류를 서른 장 째 결재를 내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던 상소문들은 물항아리에 잘 담가 깨끗하게 씻고 나니 참 그에게 보람찬 하루였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서류를 삼백 장 째 결재를 내린 에셀리온, 다시 말해 사마낙이 없는 충심으로 모시는 황제가 이걸 좀 보라며 사마낙에게 건넸다.

 

그 쪽을 보지도 않고 건방지게 한 손으로 받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손은 서류를 건네는데 성공하였지만.

 

사마낙은 서류를 받은 다음에야 화들짝 놀라 에셀리온을 쳐다보았다.

 

떨어뜨렸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하지만 사마낙은 서류를 펼치고 나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스쳤는지도 모를 만큼 아주 잠깐이었고,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는데.

 

그 별 것 아닌 것이 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계속 생각이 나 손목 안쪽을 손톱으로 긁어 보다가 문득 희안한 것을 보는 듯한 에셀리온과 눈이 마주쳐서 일은 여기까지 하겠다며 뒤도 안 보고 화장실로 도망을 쳤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며칠 있었으니.

 

하루에 다섯 명과도 몸을 섞는 사람이 겨우 손목이 스치거나 목덜미를 간지럽히거나 귓가를 건드리는 정도로 수음을 하면 아무래도 이상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 제국의 노련한 용기사로서 사마낙은 며칠이나 깊은 고민을 하다 훌륭히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너무 자신이 방탕하게 산 결과라고.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도 이어진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술, 나체의 미인들을 일시에 끊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러기에 겨우 일주일 된 오늘 이렇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너무 많이 해서 죽으면 복상사랬는데 너무 안해서 죽으면 뭐라고 부를까, 까지도.

 

지금 딱 한 번이라도 하고 싶어 입 안이 바짝 말랐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자고로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은 다 미래의 자신을 위한 것이니!

 

으아아!”

 

문을 거칠게 닫고 나무로 깎은 각좆을 상자 안으로 던지면 잘 깎여서 진주까지 우둘투둘하게 박힌 것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날은 아직 밝았으나 잠이나 든다면 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좋을 터.

 

사마낙은 머리를 틀어올린 비녀와 묶은 천을 뽑아 아무렇게나 탁자에 내려놓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그림자는 기척도 없이 가만히 침대 곁으로 다가왔고, 흉터 가득한 손을 쥐어 손목 안쪽을 간질이듯이 쓰다듬었다.

 

창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온 빛이 그 얼굴을 밝혔다.

 

녹색 머리카락에 노란 눈.

 

에셀리온이었다.

 

 

 

아라벨라 29

2019. 9. 1. 15:32 | Posted by 호랑이!!!

 

용모 준수, 성격 양호, 미래도 창창하고 승마 경기에서 2등을 할 만큼 운동도 잘 하고 젊음의 패기, 순수하고 솔직한!

 

!

 

비욘 자작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요즘 수도의 젊은이들은 수염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지만 영 익숙하질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괜찮군.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매력없다고 하니 자신 정도면 오히려 매력적이고 좋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분도 자신을 제일 아끼는 거겠지.

 

그래서 자신한테 중책도 주셨다.

 

렐리악 영애와 결혼하라고!

 

사실 렐리악 영애같이 사납고 안 웃는 여자는 별로 자기 취향이 아니지만 연애 때나 언제 자줄까 하고 여자 목줄에 매여 다니지, 결혼하면 어차피 남편 말을 들어야 할 테니 계속 웃고 있으라고 하면 된다.

 

아니면 여자를 더 만나거나.

 

시골에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기 힘들지만 수도까지 왔으니 어리고 예쁜 애들이야 넘쳐나지.

 

나 같은 사람을 세상이 가만두질 않으니 뭐 어쩌겠어.

 

백작위까지 달면 끝내주겠지?

 

..., 그러고 보니 마굿간에서 공주님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백작 달고 공주님 애인해도 괜찮을 거 같고...

 

자나미님 하시는 말씀이 사나기 공주는 외국으로 시집보내거나 변방 귀족에게 준다고 했는데 결혼 전까지 노는거면 나쁘지 않지, 돈도 잘 쓸거 같고.

 

아라벨라는 생긴 건 그럭저럭 괜찮은데 너무 딱딱해.

 

그런 애들이 침대에서는 좋다고들 하지만 침대까지 가다가 도망칠 거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뭐 그래도 한 번 해버리면 이후는 쉽겠지.

 

비욘 자작은 편지지와 향수를 들었다.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에게 제 방 하나 아래층의 방을 주었다.

 

마르틴은 아라벨라와 함께 있고 싶어 했으나 자나미 왕자가 데려갔다.

 

누가 애 옆에 있어 줘.”

 

아라벨라는 자나미 왕자를 힐끗 보고는 인상을 썼다.

 

저 왕자의 영역에 자신의 순진무구한 동생이 간다고 생각하니 얼음 언 강가에 어린애를 놓아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갈까?”

 

아니, 저기...”

 

마르틴이 우물거리다가 프루던스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저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같이 갈래?”

 

그래도 될까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을 잘 부탁해.”

 

뭐야, 여기 아가씨가 안 가고?”

 

자나미 왕자는 아쉬운 듯 슈체른을 훑어보았다.

 

야성적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타이즈를 입은 다리에 시선이 멈추었지만 사나기가 헛기침을 하자 자나미는 마르틴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데리고 나갔다.

 

미친 거 아냐

 

저런 것도 왕족이라고.”

 

사나기가 툭 내뱉었다.

 

“...하하...”

 

웃기 싫으면 웃지 말게. 그런 걸로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사나기 공주님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분입니다.”

 

아라벨라의 말에 사나기는 짧게 코웃음쳤다.

 

그러니 다음 시대는 내 손으로 열어야지.”

 

그렇습니까.”

 

, 영애도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여자 왕이 그렇게 보편적인 이미지는 아니지요.”

 

누가 들었다면 당장 지하감옥에 갇힐 말을 하며 사나기 공주가 슈체른을 가리켰다.

 

그럼 저 자는. 영애의 시녀인가?”

 

호위입니다.”

 

여자인데?”

 

여자입니다.”

 

호신술을 익힌 시녀가 아니고?”

 

호위입니다.”

 

여자가 무슨 호위를 해?”

 

아라벨라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고개를 숙였다.

 

영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듣던 슈체른은 두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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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11

2019. 8. 31. 10:27 | Posted by 호랑이!!!

 

얼마 안 있어 셋은 재단으로 돌아왔다.

 

마틴과 티엔은 각기 예정보다 길어진 출장에 대한 보고를 하러 갔다.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하는 사이지만 짐을 내려놓을 새도 없다보니 복도 안에는 무거운 두 발걸음만 울려 퍼졌고 세 명분의 짐을 떠안은 하랑은 계단을 올랐다.

 

마틴의 방 앞에 하나, 티엔의 방 앞에 하나.

 

마지막 하나는 하랑의 침대 위에 쏟아졌다.

 

사탕 캔, 못생긴 모형, 단어장, 그 사이에서 하얀 곰인형을 집어든 하랑은 후다닥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인형을 품에 꽈악 안았다.

 

며칠만에 냄새가 배었는지 호텔에서 나던 것과 비슷한 마른 종이와 꽃 향이 잔뜩 뿜어져 나왔다.

 

하랑은 거기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손에는 누런 부적 종이가 한 주먹 쥐여 있었다.

 

 

 

 

 

 

항구에는 사람들이 많다.

 

떠나는 사람, 떠나보내는 사람, 도착한 사람들과 맞아주는 사람들까지.

 

얼마 전에는 하랑도 저 중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떠나거나 마중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에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하랑은 부적 하나를 빼들었고 그것은 손 안에서 화르륵 불타 사라졌다.

 

찾아라.”

 

우우우우 소리를 내며 붉은 개들이 뒤엉키고 움틀대며 골목 골목으로 사라졌다.

 

서생원은 잽싸게 인간이 다니지 못하는 길로 사라지고 하랑은 그들이 모든 골목과 모든 사람들을 훑고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섰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붉은 빛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흘러넘쳐 하랑의 옷가지며 머리카락을 밀어올리고 들추어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눈동자도 붉게 빛을 냈다.

 

바람이 불었다.

 

바다, 파도에 밀려나온 해초와 무엇인지 모를 비린내가 훅 끼쳤다.

 

항구의 여기에서 저기까지 기운이 술렁이고 하랑의 개들이 사람을 엮어왔다.

 

전부 익숙한 낯짝들이다.

 

그들이 사이퍼일지는 몰라도 귀신에는 면역이 없는지 가여울만큼 떨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

 

하랑은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일꾼들은 눈치를 보다 귓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

 

하랑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너넨 뭐냐?”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든다.

 

우리, 아니, 저희는. 그냥 여기서 일하는-.”

 

하랑은 그 사람 앞에 다가갔다.

 

시선이 마주칠 듯 가까워지자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하랑은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 나 알지?”

 

, , , 무슨 소리이신지 저는 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일렁이는 머리카락은 다분히 이질적이다.

 

그저 머리카락이 흩날릴 뿐인데 그 움직임은 마치 악마가 지내는 번제의 절과도 같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랑은 기겁하는 그의 고개를 잡아 저를 보도록 강제로 돌렸다.

 

상대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알파인지는 히트 당시가 아니면 알 수 없다고 마틴 형이 보증해 주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저를 보자마자 오메가라고 달려들었지.

 

누가 시켰어?”

 

아라벨라 28

2019. 8. 30. 00:40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괜찮니?”

 

왕자가 아라벨라를 넘어뜨린 뒤 그대로 돌아 나가자 일시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공작 부부가 무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첫 춤을 추고 인사를 나눈 뒤 떠나버렸다.

 

섣불리 누군가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저 뒤에서 다가오는 사나기 공주와 아라벨라의 눈이 마주쳤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기억 속의 짙푸른 눈이 보인다.

 

아라벨라는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굳이 나타낼 필요가 없겠지.

 

“...어머니?”

 

그래, 아라벨라.”

 

하지만 아라벨라는 혼자 일어났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고 마르틴이 아라벨라에게 달려왔다.

 

마르틴, 잘 있었니?”

 

-”

 

마르틴이 걸음을 멈췄다.

 

눈이 등잔만큼이나 커져서 굳었다.

 

어머니의 재혼 이후 오년 만의 재회이니 달려가 안길만도 하건만.

 

마르틴은 머뭇거리더니 배운 대로 사피야의 앞에 섰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마르틴. 나도 보고 싶었단다.”

 

사피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르틴의 손을 꼭 쥐었다.

 

장장 5년 만의 만남이니 끌어안을 만도 하건만 이 만남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서-”

 

아무리 그래도 어미가 되었으면-”

 

“-빨리 시집이나 보내고 싶겠지-”

 

들은 것일까 사피야의 손이 떨리더니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니 가족끼리 담소라도 나누지 않겠니. 네 아버지도 저기에 계신단다.”

 

아라벨라는 사피야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셰필라, 그의 아버지 주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라벨라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안달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다음.”

 

바실리는 마련된 침대에 누워 업무를 보았다.

 

마악 서명이 끝난 서류는 날아가 다른 쪽에 쌓이고 새 서류가 날아와 바실리의 손에 잡혔다.

 

옆에는 찻잔과 식물 줄기로 만든 대롱이 있고 손에 묻어나지 않게 마법으로 처리한 다과가 수북하게 쌓여 바실리만을 기다린다.

 

찻주전자는 저절로 움직여 찻잔이 비기가 무섭게 채워주었고 언제 마셔도 좋을 따뜻한 온도로 유지되었다.

 

조명도 적절한 각도로 맞추어져 눈이 부시지도 어둡지도 않게 유지되고 공기도 적절히 서늘한 정도로 맞추어져 바실리는 편안하게 서류에 명령을 적었다.

 

꽤나 쾌적한 환경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재잘거림만 아니라면.

 

어쩜, 이 침대 자그마한 것 봐. 너무 귀엽다.”

 

오필리어는 이런 걸 잘 하니까 말일세. 이걸 발톱으로 깎았다고 하네만 알고들 있었나?”

 

여기 침대보도 베개도 내가 만든 것이야. 베개 안에는 향초를 잘 씻고 말려서 가득 채웠지. 향이 좋지 않은가, 아가?”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그들의 아가 바실리는 손으로 그렇다는 신호를 보냈다.

 

에멜라 주려고 또 만들었는데 좀 가져다주지 않겠나?”

 

바스락, 소리를 내며 서류가 접혔다.

 

“...슈체른이 이야기하지 않던가?”

 

? 무슨 일 있었어?”

 

바실리는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가 부스스하게 흘러내렸다.

 

에멜라가 죽었어.”

 

? ?”

 

편지에는 사고라고 적혀 있었다.”

 

오필리어라고 불린 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하얀 눈동자에 분노를 담고.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나는 에멜라가 행복하도록, 후회 없이 살도록 어떤 독도 에멜라를 삼킬 수 없게 축복했다. 어떤 불운한 자연재해도 에멜라를 덮칠 수 없도록 마법을 걸었어! 어떤 우연도 에멜라를 다치게 할 수 없게... 에멜라가, 에멜라...!”

 

그러더니 오필리어는 바깥으로, 발을 구르며 나갔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문 안의 용들은 눈을 감았다.

 

일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실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엎드리거나 누운 용들을 보다 서류를 뒤집었다.

 

에멜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을 것인데. 가던 중에 습격을 당했어.”

 

이런 것을 보았다며 바실리는 그림을 그렸다.

 

날개 없는 용.

 

머리는 아래를 향하고 몸이 위를 향하는 그림.

 

추락하는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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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10

2019. 8. 28. 14:28 | Posted by 호랑이!!!

 

바다. 바다. 바다!

 

하랑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따뜻한 바다는 하얗게 부서지며 하랑을 맞았고 손을 힘차게 뻗거나 발장구를 치면 또 첨벙첨벙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물을 좋아하는 붉은 개는 하랑이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뛰어들었고 이어 청사가 물 속으로 스르르 헤엄쳐 사라진다.

 

파도가 거친지 서생원은 밀려온 바다 거품에 조그만 발을 담가보고는 만족했고 덩치 큰 신호는 답지 않게 앞발을 파도 속에 첨벙 넣었다가 뒤로 물러서더니 두두두 달려와 힘차게 뛰어들었는데 옆에 있던 마틴은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았다.

 

조용히 해욧!”

 

나 아직 암말도- 어풉...!”

 

그래, 챌피. 아직 하랑은 아무- ...”

 

! 하라악...! 능려.. 푸푸푸....!”

 

두고보자며 마틴은 회중시계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수영복 차림이었고 무방비하게 하랑이 뿌리는 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틴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었다며 웃다 서생원과 눈이 마주쳐 어색한 시간을 보낼 뻔 한 하랑은 그걸 수습해 보겠답시고 티엔에게 물을 쏟았다가 티엔이 이끌어낸 쌍룡에 의해 정말로 물에 빠져버렸다.

 

진짜로 기술을 쓰는 게 어디있어!”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 것 뿐이다.”

 

거러온 싸우물 피하쥐 안눈 거 뿌뉘다.”

 

하랑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틴은 허허 웃으며 수건을 가져다주었는데 하랑은 익숙하게 마틴 앞에 앉아서 머리를 툭 기댔다.

 

그리고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음습한 마음의 소리에 마틴이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에는 티엔이 이 쪽을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예요.”

 

이 하랑. 지금 뭐 하는 거냐.”

 

아무것도...? 안 하는데...?”

 

마틴은 수건으로 하랑의 머리를 탈탈 털어주다가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았다.

 

남자의 질투는 보기 흉해요.”

 

누가 질투한다는 거냐.”

 

방금 제가 마음을 들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 씨가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틴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예의가 뭔지 아는 영국 남자다.

 

비록 저 인간은 예의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하랑의 마음도 없지만!

 

하랑의 마음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마틴은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었고 티엔은 이를 꽉 다물었다.

 

하랑이 옷을 가지러 가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티엔은 일부러 앉아있는 마틴의 앞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라니 듣기 섭섭하군요. 제가 자주 하랑의 머리를 말려주는 걸 몰랐나요?”

 

자주?”

 

누군가가 힘들 때마다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겨우 옆에 있는 것 말인가...?”

 

물론 혼자서완벽하려고 노력한 당신은 모르겠지.

 

더운 날에 주스를 준다던가, 불안할 첫날에 사탕과 함께 힘내라는 말을 해준다던가.”

 

마틴은 손가락을 꼽았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은 모르니까.”

 

누가 모른다고 그러나.”

 

티엔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하랑이 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하랑.”

 

얼마간 걷자 하랑이 겉옷을 들고 오는 것과 마주쳤다.

 

“...뭐요?”

 

, 조가비... 그걸로는 안 되나?”

 

뭔 조가비? 저번에 준 그 흉... 모형?”

 

그래.”

 

그게 뭔데? 그거 무슨 주술 도구였나? 하랑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 흉물한테 무슨 기운이 느껴졌던가? 자신은 잘 모르겠는데, 더군다나 받은 후로는 계속 잠만 자서 어디 쓸 수 있나 시도도 안 했었다.

 

“..., 또 뭐라고 하게?”

 

공손하게 말해라, 하랑.”

 

아파서 잠만 잤다고 하면 또 수련이 부족하다 하려고 그러시옵니까? -.”

 

티엔의 인상이 구겨졌다.

[크더건/율리안] 주말

2019. 8. 18. 00:02 | Posted by 호랑이!!!

“-하는 일이 있었어. 거기 바다가 꽤 괜찮던데 휴가나 갈까?”

 

이제 슬슬 휴가철이잖아, 라고 하는 것에 율리안은 마악 입에 밀어 넣었던 피자를 꼭꼭 씹어 삼켰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아서 안 됩니다.”

 

그럼 주말은?”

 

율리안이 잔을 들자 크나트가 병을 기울였다.

 

이 남자는 술도 안 하는 주제에 꽤 괜찮은 술을 골라온단 말이야.

 

언제든 저장고에서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자신이 고르지 않아도 그 날의 식사에는 제법 어울리는 술이 따라오고는 했다.

 

한 모금 마셔 입 안을 가신 다음에야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

 

이 안에 베리류를 담그면 맛이 더 좋아지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는데 문득 거슬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와인병에 뚜껑을 닫는다.

 

누구랑?”

 

저 사람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유달리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가 귀에 거슬렸다.

 

학생이 잠시 만나자고 해서요. 토요일 오후 즈음 나가서 과제랑 수업 이야기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올 예정입니다.”

 

교수가 수업시간 외에 학생을 만나도 되나?”

 

남자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교수도 아니고.”

 

불만스러운 시선이 율리안에게 닿았으나 율리안이 고개를 드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주말이 되기까지 크나트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어쩌면 혼란인지도 몰랐지만 크나트도 율리안도 표정에 그렇게 세심한 편이 아니었다.

 

좀 알아차릴 것 같은 사람들은 일부 조직에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도 크나트의 너클에 실린 힘으로 가늠이나 할 정도일까.

 

“...아 찜찜하네.”

 

한바탕 육체노동을 마치고 크나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뭐가 말입니까?”

 

어제 저녁에 머리를 비울 거라며 잔뜩 구웠던 쿠키 바구니를 내밀면서도 크나트는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겠어.”

 

뭐 이런 게 다 있담, 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크나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고 한참이나 지나서 다시 입이 열렸다.

 

“...저녁 먹으러 갈래?”

 

사주는 겁니까?”

 

“...아냐 안 갈래.”

 

“...”

 

!니지 갈까!”

 

“...제가 살까요.”

 

아아아냐 안 가. 안 가.”

 

미친 영감.

 

어느 조직원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크나트는 저녁때가 될 때까지 사무실 소파에서 엎어져 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배달시킨 중국 음식을 깨작거리면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일이 더 없을 거 같은데 먼저 집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무슨 일 있어도 연락 안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몸을 일으키는 것에서 그래, 내일 보자!며 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린 조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용하는 검은 차를 타고 크나트는 어느 식당 앞까지 갔다.

 

식당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으므로 한참 빙글빙글 돌다가 문간에 보이는 사람에 차는 갓길에 멈추었다.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은 익숙하지 않은 흰 셔츠 차림을 하고 멀끔한 얼굴로 종이를 보며 이야기한다.

 

자연히 시선은 맞은편에 닿았다.

 

반짝이는 금발은 멋을 부려 넘기고 저런 식당에 가는 것 치고는 옷도 제법 번쩍거린다.

 

맘에 안 들어.

 

크나트의 손에 들린 쿠키가 우득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마악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둘은 자전거를 묶어놓은 곳으로 향했고 크나트는 창문을 내렸다.

 

- 아니, 스호르.”

 

또 보는군요.”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거든. 타겠어?”

 

금발은 검게 선팅된 검은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학생이지? 학생도 태워줄까?”

 

...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교수님!”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뒷모습에 크나트는 자그마치 닷새 만에 흥,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율리안은 크나트의 차 시트며 옷에 과자 부스러기가 쏟아진 것을 보고 경악했고 청소를 돕겠노라며 크나트를 쫓아냈다.

 

시키는 대로 청소기를 가지고 나온 크나트는 운전석에 고개를 숙인 율리안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 소리는 죽이고, 인기척도 없애고.

 

바로 뒤까지 와서도 조용히 등을 내려다보다가.

 

그러다 손이 다가갔다.

 

목을 조를 듯 벌어진 손에 눈은 깜박임도 없이 멈췄다.

 

이대로.

 

쥐기만 해도.

 

이제야 만들어진 안온한 이 관계는 깨어지겠지.

 

하지만 그것이 미워하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나 머릿속을 차지하는 첫 번째가 나라면.

 

생각하는 것이 나라면-.

 

쿠키를 부스러뜨릴 때처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목을 잡아챌 것 같았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주먹을 간신히 움직여 유리에 닿으면 노크처럼 그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나 왔어.”

 

깔개는 털어 두었습니다. 여기에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서-”

 

.”

 

뭡니까?”

 

크나트는 웃었다.

 

내가 좋아, 아까 그 학생이 좋아?”

 

율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청소기나 주십시오.”

 

내가 더 좋다고 하면 주지.”

 

또 이런다.

 

당신이 더 좋습니다. 됐습니까? 빨리 청소기나 내놓으십시오.”

 

율리안은 킬킬거리고 웃는 크나트의 손에서 청소기를 잡아채듯 빼앗고는 바로 스위치를 켰다.

 

하여간 이 사람은, 진지해지는 때가 없다고 율리안이 생각했다.

 

 

아라벨라 27

2019. 8. 17. 11:59 | Posted by 호랑이!!!

 

그리고 공부도 못 하고, 뭐 하나 뛰어난 것도 없고, 하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중에 아라벨라는 사나기 공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몇 사람 사이에 꼭 들 인물에게로.

 

사나기 공주는 화려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옷을 입고, 춤을 추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나 떠들면서 자나미가 웃었다.

 

원래 사나기에게는 제 어미 이름과 외가의 이름, 그리고 여러 세력의 이름이 있었으나 고친다고 하기에 내 이름하고 비슷한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다 성별이 바뀐 이름들이니, 사실상 사나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일로냐 공작은 있지만 일로리오라는 여자 공작은 없으니 말이야.

 

자나미 왕자님은.”

 

아라벨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의 자나미의 손이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잡히며 자나미 왕자는 끄으윽, 소리를 냈다.

 

잔인한 사람이군요.”

 

왕의 자리를 약속받은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면도 필요하지. 그렇잖은가.”

 

꼴에 혓바닥은 잘 놀리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아라벨라는 자신이 불경한 생각을 하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 아래서 자라다보니 이렇게 된 건가? 아니면 용 때문에?

 

아니오. 자나미 왕자님께서 하신 일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고 기준 이상의 일이었습니다.”

 

아라벨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멍청한 소리를. 지금 이 나라의 왕자인 나에게 하는 것인가?”

 

자나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아라벨라는 진한 금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 낮아진 목소리는 그러는 것이 위협이 될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나온 목소리다.

 

그런 것에 아라벨라는 겁먹지 않았다.

 

그리고 짐작했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구나.

 

사람에 맞는 말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나미가 몸을 홱 틀자 그 리드에 몸을 맡겼던 아라벨라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넘어졌다.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나미의 표정이 더욱 거만해졌다.

 

멍청하기가 그지없구나 렐리악의 영애.”

 

 

 

 

 

 

 

자나미 블랙스캣 비 아메론!”

 

쿠트 왕비의 목소리가 쨍하게 높았다.

 

자나미는 성의없는 태도로 힐끗 쿠트 왕비를 쳐다보았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못난 놈. 렐리악의 영식 또한 제 누이를 의지하고 따르던데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아라벨라 렐리악을 넘어뜨려!”

 

이 못난, 못난 놈!

 

자나미 왕자는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도 말해주었구요. 영식이 영애를 우습게 알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집니다. 게다가 내일 친구들을 만나니 거기에 데려갈까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듯, 자나미 왕자의 친구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집안에서 경쟁할 형제가 없는 자들은 오냐오냐 떠받들어져 거만하게 자랐고, 형제가 있는 자들은 그 형제에게 이상한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쥐톨만한 권력이라도 얻어먹겠다고 몰려들어 아부하고 아첨하며 소란을 피우니 저잣거리에서는 이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가게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니 왕비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인맥으로 어르고 달래며 협박하여 없는 일로 만들려 노력하였으나 왕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소란스럽고 천박하게 굴었다.

 

술과 사람을 파는 가게에 출입을 하며 행실이 어떠하다 라는 것을 알았을 때 왕비는 현기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였으니 왕비는 왕자의 친구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사실, 싫어했지만- 이런 때 왕자의 왈패 친구들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아직 렐리악 영식은 미성년자이니 술은 안 돼.”

 

네에, 네에.”

 

렐리악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자나미 네 앞으로 들어가는 예산을 없앨 것이다.”

 

네에 네.”

 

쿠트 왕비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울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갔고, 쿠트 왕비는 문이 닫히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 코르셋이라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왕자까지 낳아서 왜 이런 고민들을 해야 하는지.

 

쿠트 왕비가 손짓하자 하녀가 다가와 왕비의 코르셋을 더 강하게 조였다.

 

왕비는 이를 악물었다.

 

렐리악만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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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6

2019. 8. 13. 17:38 | Posted by 호랑이!!!

 

해가 지고 진행된 결혼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새까만 정장에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페데사 공작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 전부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과 마르틴 뿐인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극의 결말을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기울였다.

 

식의 맨 마지막에 귀족들이 다같이 나비는 잠들면 어쩌구저쩌구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 놀라웠지만 그뿐이었고...

 

면사포를 쓴 미티우 페데사 공작부인은 분명 아름답기는 했지만 부러질 듯 졸라맨 허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라벨라만의 생각인지 수도 가까이에 산다는 미혼 여성 귀족과 기혼 여성 귀족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허리를 졸라매고 있었다.

 

심지어는 졸라맨 코르셋을 밖으로 드러내 장식을 단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한 마디씩 정숙하다느니, 조신해 보인다느니 하는 칭찬을 한다.

 

좀 의무적으로.

 

누군가 다가와 벽에 기대기에 보았더니 사나기 공주였다.

 

끔찍하지 않나.”

 

오셨습니까 공주님.”

 

불과 50년 전에 건강을 이유로 폐지당한 옷이건만 다시 유행한다는 것이.”

 

“50년 전이요?”

 

나도 그 때 일을 보지는 못했으나 듣기로는 아주 훌륭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하기는 공주의 나이가 아라벨라보다도 세 살이 어렸다.

 

그래, 그대가 물어보는 것은 어떠한가, 라고 다시 사나기 공주가 입을 열었다.

 

당시 코르셋을 폐지했던 데에는 자네 할머니가 공이 컸다고 하네.”

 

할머니가? 궁궐에 출입하던 사람이라고?

 

아라벨라의 의아한 표정에 사나기 공주가 무어라 덧붙이려는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그 이상한 움직임에 고개를 틀자 자나미 왕자와 왕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디-”

 

자나미가 손을 들자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연회를 알리기 위해 왕실 가족이 춤을 추어야 하지만 자나미 왕자에게는 약혼자도 연인도 없었다.

 

심지어 누구와 춤을 출 지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진다.

 

자나미의 손이 아라벨라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아라벨라. 나와 춤을 출 것을 명한다.”

 

꺄악, 하고 환호와 비명이 들렸다.

 

어쩜 귀엽기도 하시지.”

 

아직 서투신 거야.”

 

명령이라고 했어.”

 

재잘거리는 소리는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터다.

 

저 멍청한 명을 받은 게 자신만 아니라면!

 

쿠트 왕비가 자나미의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렐리악의 영애, 미안하기도 하지. 아직 왕자가 여자에게는 서툰 터라 무례하게 행동했구나. 아직 영애가 서툰 남자에게 귀여움을 느낄만한 나이는 아니니, 부디 저 명령이라는 말을 부탁으로 바꿔 들어주지 않겠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마마.”

 

아라벨라는 드레스 대신 입은 긴 기장의 겉옷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쿠트 왕비가 부채로 건드리자 자나미 왕자는 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아라벨라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쿠트 왕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며 자나미 왕자의 등을 부채로 세게 찔렀다.

 

영애에게 잘 하는 것이 좋을 거다, 왕자.”

 

, 어머니.”

 

아라벨라와 자나미 왕자는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쿠트 왕비는 왕에게 몸을 기울였다.

 

전하. 이번 대의 렐리악은 왕가에 호감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그렇게 보이는군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사들은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자나미는 아라벨라의 손을 홱 잡아당겨 기대게 했다.

 

왜 저한테 춤을 신청하신 거지요?”

 

그러자 자나미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서.”

 

꽤 그럴싸하게 낮춘 목소리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부족한 눈치로도 자나미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떠 보기로 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사나기 공주님께 신청하려던 것은 아닙니까?”

 

사나기? , 그런 멍청이 따위.”

 

이 왕자는 생각을 대장으로 하나?

 

공주님은 고귀한 피에 걸맞는 분처럼 보입니다만. 사나기 공주님께 그런 말을-”

 

자나미의 눈이 아라벨라에게 멈췄다.

 

금빛 눈은 짐승의 것마냥 이질적이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소문에 무지하지.”

 

어쩔 수 없으니 말해주마고 자나미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사나기의 어미는 사나기가 눈을 뜨기도 전에 죽었는데, 나의 어마마마를 보고 어마마마, 하고 쫓아다닌다. 밀어내고 부정해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네에?”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사나기는 자나미보다 어렸고 사나기 공주의 어머니는 왕비였다.

 

전 왕비며, 적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주를 후궁 소생 왕자가 저렇게 부르다니.

 

아라벨라는 당황스러움에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이름을 시키는대로 바꾸면 우리 가족에 넣어준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바꾸셨나요?”

 

자나미가 웃었다.

 

! 바꿨다, 그 멍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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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9

2019. 8. 8. 16:04 | Posted by 호랑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티엔은 일주일 치의 방값을 더 지불했다.

 

재단에 연락했더니 당장 달려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마틴이 애써서 진정시켰고 하랑은 약에 적응했는지 약 전에 죽이라도 먼저 먹었다.

 

티엔과 마틴은 우편으로 받은 서류를 처리하거나 전화기에 매달렸고.

 

그렇게 첫 히트가 일어난 후 사흘이 지나고 하랑의 열이 가라앉았다.

 

하랑의 뱀, , , 호랑이는 며칠 아픈 하랑의 곁에 있는가 싶더니 몸이 나아진 것 같자 새로운 환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티엔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방바닥에서 작은 동물의 뒷덜미를 집어 치우는 것 같은 행동을 간혹 했다.

 

하루이틀은 그러려니 했지만 그게 사흘이 되자 티엔은 하랑의 방문을 열어젖혔고 잘만 자던 하랑은 난데없는 방문에 억지로 눈을 비벼 떴다.

 

뭐요?”

 

나가라.”

 

남의 방에 와서 갑자기 축객령이라니?

 

뭘 잘못 들었나?

 

하랑은 다시 물었다.

 

뭐요?”

 

나가라고 했다.”

 

이 양반이 미쳤나, 뜬금없이 왜 와서 이런담.

 

자신이 마틴 형도 아니고, 아니, 마틴 형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이렇게 다짜고짜인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말도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뭐요.”

 

시비같은 어투에 티엔도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나가-”

 

정티엔, 그렇게 말하면 남이 어떻게 알아요?”

 

동년배라고 종종 홀든네 첫째를 만나더니 말투까지 옮았나, 하고 마틴이 운을 떼었다.

 

요즘 티엔이 허공에 손질을 해서...”

 

“...네 개나 쥐나 뱀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 때문이다. 바다 바다 했으니 나갔다 와라.”

 

... 혼자?”

 

그래.” “저랑?”

 

티엔과 마틴이 동시에 말하더니 힐끗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랑.” “혼자-”

 

또 동시에 말한다.

 

뭐냐.” “뭐예요.”

 

또 동시에.

 

이건 또 무슨 코미디인지 생각하다가 하랑은 작은 가방에 주섬주섬 노란 부적을 넣었다.

 

우리 애들이랑 갔다 올게.”

 

나도 같이 간다.”

 

, 저도!”

 

저 양반들 일이 급한 거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야 저 사람들이 감당할 일이고.

 

좀 있자니 둘이 뭔가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하랑으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호텔 밖에 발을 디디자 쨍한 햇볕이 피부에 닿았고 방 안에서보다 강렬하게 바다 냄새가 난다.

 

이미 붉은 개들은 자기들끼리 뒤엉키고 장난치며 바다로 달려갔고 거대한 호랑이는 머리에 쥐를 얹고 발을 옮겼다.

 

은근슬쩍 다리에 감기는 청사도 모른척하며 하랑이 발을 옮기자 넓은 바다가 눈에 담겼다.

 

겨우 이런 것에 더는 설레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랑은 달려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하랑, 안된다!”

 

하랑 군, 준비운동! 준비운동!”

 

아라벨라 25

2019. 8. 7. 03:46 | Posted by 호랑이!!!

 

비욘 자작이 아라벨라의 가슴팍을 힐끗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여자들은 말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요. 원래 백마가 더 까다롭습니다.”

 

아라벨라가 그 손을 보지도 않고 일어나자 비욘 자작은 이를 꽉 다물었다가 다시 히죽 웃으며 아라벨라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제가 털어드리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차마 때릴 수 없었다.

 

바이언드 백작이 이 쪽을 빤히 보고 있었기에.

 

그러자 신이 난 비욘 자작은 아라벨라의 허리를 잡고 엉덩이로 손을 가져가 밀어올리려고 했다.

 

그만.”

 

저는 아라벨라 아가씨를 도와주려는 것뿐입니다.”

 

미티우 영애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나?”

 

, 저 백마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까다로운 말 보다는 성질 순한 밤색 말이 좋지 않겠습니까. 말 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백마가 갈색보다 성질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아가씨가 지금 넘어지기도 했겠다, 백마 고삐를 이리 주십시오.”

 

저 아가씨라고?

 

아라벨라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자신의 신발 자국이 비욘 자작의 발등에 찍힌 것을 보았다.

 

말 정도는 탈 줄 압니다.”

 

지금 궁 안에 사람도 많은데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허리로 손이 갔지만 오늘 아라벨라는 검도 총도 무엇도 가져오지 않았기에 다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백마가 성질이 좋지 못하다는 건 처음 알았군요.”

 

아 뭐 말 안 타는 사람들이야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자들은 책에 나오는 기사들이 하얀 말을 타고 있으니까 다 하얀 말을 보는 모양이지만 자고로 가장 순한 말은 대개 밤색이고 눈을 보면 눈도 둥글둥글 순한데 조용하고 사람을 보면...”

 

기르는 사람이 잘못 길러 놓고 말을 탓하다니.”

 

렐리악 영애. 모르면 잘 들어야 할 거 아닙니까.”

 

아라벨라는 비욘 자작을 힐끗 보다가 백마의 등에 손을 얹고 훌쩍 가볍게 올라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배를 차며 고삐를 들자 좁은 곳에서 백마는 번쩍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말발굽이 올라갔고.

 

비욘 자작은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 아아악!!!!”

 

“...푸핫.”

 

사나기 공주는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비욘 자작은 악악 비명을 지르다 바이언드 백작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머리보다 높은 곳에 말발굽이 있자 움찔 움츠렸다.

 

이리로, 뒷걸음질로 나오거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라벨라는 하얀 말이 두 발로 서 있게 하다가 폴짝 뛰어 방향을 틀게 했고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사나기 공주님, 시간이 지체되어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아 즐거웠네. 어서 갈까.”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비욘 자작이 귀까지 빨개졌다.

 

“...너는 페데사 공작님의 소풍에 오지 말거라.”

 

바이언드 백작은 혀를 찼다.

 

왜요!”

 

사납게 돌아보는 조카는 나이가 저만큼이나 먹었는데도 아직 멍청했다.

 

그리고 아라벨라한테 잘 하고.”

 

내가 뭘. 여자란 자고로 웃는 얼굴로 예, , 하면 되지요.”

 

그분이 너한테 그 아가씨 마음을 얻어 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칵 퉤.

 

비욘 자작은 땅에 대고 침을 뱉었다.

 

말 걸어주지, 처음 봤을 때 산책도 가자고 해 줬지, 자기한테 맞고 나서 때리지도 않았지.

 

이만하면 상냥하고 다정하고 착한데.

 

게다가 잘생겼고, 허벅지도 탄탄하지.

 

비욘 자작은 제 허벅지를 툭 쳤다.

 

비싼 척 하는 거예요.”

 

바이언드 백작은 조카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중에 돈이랑 공연 티켓을 줄테니 노력 좀 해라. 여자란 자고로 오냐오냐 떠받들어주면 다 넘어오게 돼 있어. 칭찬도 좀 해 주고.”

 

, 비욘 자작이 다시 침을 뱉었다.

 

그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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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4

2019. 7. 29. 21:09 | Posted by 호랑이!!!

 

사나기는 마굿간으로 갔다.

 

마구간지기가 의자 위에서 하품을 하다 벌떡 일어났다.

 

이를 어쩌지요, 지금 두 분께서 타실 말이 없습니다.”

 

없다고?”

 

델라 미티우 영애와 기드온 공작과 그 시중인들이 말을 먼저 빌려서요.”

 

그럼 저 말은?”

 

아라벨라가 갈기를 땋은 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말은 안 돼. 얼마 전에 그림자 숲에서 사로잡아 온 야생마인데 사납기 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겠구나.”

 

그나마 나의 말은 있건만, 하고 사나기 공주가 손을 뻗자 연한 금색을 띠는 말이 다가와 코를 비빈다.

 

저 말이 다섯 마리는 되건만 미티우 영애나 기드온 공작이 오면 한 마리만 양보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아라벨라는 공주를 돌아보았다.

 

공주 정도 되면 신분을 내세워 말을 가져가도 될 텐데.

 

어쩌면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나미 왕자를 보았을 때는 이 나라의 미래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서 발광해파리라도 한 마리 본 기분이다.

 

희미한 녀석이지만.

 

그 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둘 들어왔다.

 

하나는 아라벨라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라벨라를 보자 눈가를 씰룩이더니 우스꽝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준우승남.

 

사나기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아라벨라는 기억을 살렸다.

 

비욘 자작에게는 바이 뭐뭐라는 숙부가 있다고 들은 거 같기도 하고.

 

나이차도 있어 보이는데다 미묘하게 닮았으니 아마 그 사람 같다.

 

바이언드 백작이군.”

 

바이언드였구나.

 

렐리악 영애도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아라벨라가 대꾸하자 비욘 자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스운 표정을 지었다.

 

만남의 회포는 길게 풀고 싶지만 지금 좀 바빠서요. 기드온 임펄 루 페데사 공작님이 말을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이언드 백작은 비욘 자작을 돌아보았지만 비욘 자작은 여전히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

 

지금 공주님 앞에서 공작을 높여 부른 것입니까?”

 

아 뭐, 그렇게 되었네요. 마음 상하셨습니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나기 공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다가 쯔쯔 혀를 찼다.

 

이 나라 왕권이 바람 앞 촛불과도 같구나. 한낱 촌의 자작이 왕의 딸을 우습게 보다니.”

 

네에? 저는 그럴 의도가 아니옵고..!”

 

자네 의도는 상관없어. 자네는 지금 나의 아바마마를 모욕하였네.”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게 곡해해서 듣습니까?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인가?”

 

아니 저는! 하고 자작이 입을 다물었다.

 

바이언드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제 조카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벽지에서 말이나 타다 보니 예의에 무지합니다.”

 

그럼 왕궁에는 뭐하러 데리고 온 건가? 일곱 살 정도 되었나?”

 

“...사실은, 올해로 서른 셋이 된답니다.”

 

바이언드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아라벨라는 백작의 구두가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작의 발등을 밟는 것을 보았다.

 

용서를 내려 주지. 대신 이 말은 한 필 가져가겠다.”

 

사나기 공주는 금빛 말 위에 올라타고 새하얗게 반짝이는 백마의 고삐를 아라벨라에게 넘겼다.

 

아라벨라가 올라타려는 순간.

 

으악!”

 

아이구 저런, 괜찮습니까.”

 

분명 뭐가 걸렸는데!?

 

아라벨라는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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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3

2019. 7. 23. 18:19 | Posted by 호랑이!!!

 

어마마마를 뵙습니다.”

 

마마를 뵙습니다.”

 

방금 인상 쓴 거 같은데

 

아라벨라는 사나기 공주를 힐긋 눈짓하면서 왕비에게 무릎을 굽혔다.

 

올해로 마흔 되는 왕비는 살짝 희끗해진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 틀어 올리고 허리를 졸라맨 디자인의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가냘프고 우아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허리가 얇지?

 

옆은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사랑하는 공주.”

 

보이진 않았지만 공주가 인상을 더 깊게 썼다.

 

그러나 고개를 들 때 공주는 가면처럼 완벽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셰필라 렐리악의 딸, 아라벨라 렐리악입니다, 어머니.”

 

혼자 왕궁으로 온 것이더냐?”

 

아라벨라도 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동생과 함께 왔습니다.”

 

이 몸은 쿠트 카 아메론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서로 어울릴 생각은 않고 여자 따로 남자 따로 행동을 한다지. 그런 행실은 결국 화합을 이루지 못해.”

 

그러하옵니다 마마, 하고 둘이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자 왕비가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렐리악 영애는 언제까지 수도에 있을 생각이지? 괜찮다면 내일이나 모레 나의 초대를 받아주겠나?”

 

어마마마, 렐리악 영애는 저와 내일 영애들의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있는 건 아니잖니.”

 

하루 종일 있을 것입니다.”

 

쿠트 왕비의 손에서 부채가 촤악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그럼 모레를 내가 약속해야겠구나. 모레 점심 즈음 나에게 오거라. 그리고, 지낼 곳이 지금 좁다고 들었는데 황궁의 손님방이라도 좋다면 내어주겠다.”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하지만 저희의 분수에 맞지 않으니 부디-”

 

오게. 사나기, 방을 안내해주도록 하거라. 자나미 녀석을 시키고 싶다만 이 애는 또 어디선가 놀고만 있겠지.”

 

삼일 내내 불편한 옷을 입고 다니라고? 게다가 가져온 옷이 두 세 벌 밖에 없는데?

 

하지만 아라벨라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만족한 표정으로 왕비가 떠나자 사나기 공주가 혀를 찼다.

 

“...아무튼 내일 영애끼리 모임이 있으니 참가하게.”

 

, 공주마마.”

 

그놈의 마마 소리는 되었어. 사나기 공주님이 좋겠노라.”

 

사나기 공주는 왕궁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너른 정원이나 도서실이 있고 집무실이 있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쨍그랑쨍그랑 소리와 무언가 부서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방도 몇 개 있었다.

 

어린 왕족을 위한 놀이방이나 갑옷 따위를 전시해둔 방도 있고 어디를 가나 하늘과 천국을 테마로 꾸며진 방은 보석이나 금, 은으로 장식되었다.

 

사나기 공주는 자신의 별채로 데려가겠다며 마차를 불렀다가 지금은 결혼식 준비로 마차와 말을 꺼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민들에게도 공개되는 결혼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설치된 마도구 때문이라나.

 

많이 멀다면 말을 타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사나기가 홱 돌아보았다.

 

말을... 좋아, 그러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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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2

2019. 7. 19. 01:53 | Posted by 호랑이!!!

 

이어진 티타임은 서로를 살펴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비록 자나미 왕자는 마르틴에게만 관심을 가졌지만.

 

왕자가 아라벨라에게 보이는 예의와 관심은 왕자가 먼 영지의 아가씨에게 보이는 무난한 것일 뿐.

 

얼굴은 잘생겼지만, 저 정도 잘생긴 건 렐리악 백작령에도 하나 있었다.

 

아라벨라는 고개를 돌리다 사나기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이 쪽은 너무 과해

 

이 사람에게 발광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본다.

 

사람이 6초간 눈을 깜박이지 않고 보면 뭐랬는데.

 

아라벨라는 원래 다른 것을 보려고 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왕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공주는 자신에게 관심이 너무한가.

 

중간이 없다, 살려주세요 할머니.

 

아라벨라는 마음속으로 바실리를 찾고는 공주에게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돌렸다.

 

, 공주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지금 묻히는 중이라네.”

 

? 뭘요?”

 

내 사랑.”

 

그리고 윙크.

 

아라벨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 감사합니다...”를 입에 올릴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의 는 질문처럼 끝이 한없이 올랐지만.

 

그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절도 있었으나 꽤나 다급했고 요란해서 허락이 떨어지니 문이 홱 열렸다.

 

시종장이다.

 

자나미 왕자님, 사나기 공주님. 지금 결혼식장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왕족들은 편히 있으라며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잔에 음료를 채워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방안에는 마르틴과 아라벨라만 남겨졌고 마르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동그란 이마에 손을 붙이고 이리저리 멀리를 살펴보더니 쪼르륵, 마르틴은 자리로 돌아왔다.

 

마르틴이 알았다면 나 이제 애 아니거든!’이라고 했을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며 아라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여긴 참 예쁘지? 뭔가 마음에 들어?”

 

마르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해.”

 

뭐가?”

 

그동안 역사서나 왕실 건물에 대한 용도를 읽어 보았는데,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다음 대 후계자나 왕밖에 없어. 후계자가 아닌 왕족도 예외는 아니잖아.”

 

아라벨라는 마르틴이 본제를 꺼낼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이상하고, 그걸 왕자랑 공주가 손수 처리하는 게 더 이상해. 여태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무리 델라? 그 사람과 공작의 결혼이라고 해도.”

 

공작의 전적이 좀 많잖아. 왕이 아끼는 게 아닐까?”

 

벨라 누나. 우리 나라에 공작은 둘 뿐이야. 하나는 현재 임금님의 동생이고 다른 하나는 남작가 출신임에도 한 일이 많아 공작위에 올려준 페데사 공작이지.”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나미 왕자는 이렇다 할 업적이 없어. 페데사 공작을 이런 때 왕궁에서 결혼시키면 다음 후계자로 페데사 공작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려.”

 

마르틴은 머리가 좋다.

 

아라벨라는 별 생각 없이 굴었던 것을 반성하며 마르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데 자나미 왕자가 한 게 없어?”

 

방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사나기 공주와 자나미 왕자가 들어왔고 마르틴과 아라벨라는 뒤에서 이야기하다 찔린 사람들처럼 과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급한 일이 생겨 둘을 놔두어 버렸군.”

 

저희는 괜찮습니다. 덕분에 왕궁을 볼 수도 있었지요.”

 

아라벨라가 말하자 사나기가 손을 내밀었다.

 

왕궁이 비싼 돌들로 만들어지기는 했지. 좀 더 자세하게 구경하겠나?”

 

아라벨라가 거절할 틈도 없이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마르틴은 저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클 자나미를 올려다보았다.

 

자나미는 폭풍처럼 뛰쳐나가 채 닫히지도 않은 문을 보며 웃었다.

 

마르틴의 눈에 그것은 비웃음이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반짝이는 것엔 사족을 못 써.”

 

그리고 마르틴은 굳었다.

 

할머니가 돌아온 후 그 백작저에서는 누구든 누구에게든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저 말에 악의가 있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자나미가 아라벨라를 낮잡아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기에 마르틴은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옷을 꽉 잡았다.

 

누나는.. 아라벨라 누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지만 자나미 왕자는 마르틴의 침묵을 다른 것으로 해석했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등을 툭 쳤다.

 

누나가 어릴 적에 겁을 많이 준 모양이지? 너무 무서워하지 말게. 어차피 이제 힘도 자네가 더 세졌을 거고, 여차하면 한미한 집에 시집보낸다고 하면 덜덜 떨면서 자네 말을 들을 거야.”

 

한미한 집에... 시집이요...?”

 

그래. 지참금도 없이 보낸다고 하면 더 효과가 있겠지. 아직 자넨 어리니 여자 다루는 걸 모르겠어? 내가 나이도 좀 있으니 알려줘야겠는걸?”

 

자나미가 마르틴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아직 마르틴은 잘 몰랐지만, 느낀 것은 혐오였고.

 

당장 팔을 털어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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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1

2019. 7. 14. 12:41 | Posted by 호랑이!!!

 

금과 은을 녹여 테두리를 만들고 은은한 푸른빛과 섞인 구름과 천사들이 천장에 그려져 있다.

 

붉은 색으로 칠한 벽지에 뜬 것은 금색 해이고, 푸른 색으로 칠한 벽지에 뜬 것은 은색 달이고.

 

창문에는 다채로운 색유리를 짜맞추고 등은 요정이나 해, 천사 모양이다.

 

마르틴은 벽에 박힌 금과 보석가루를 살짝 쓸어보다가 아라벨라가 툭 치자 손을 멈추었다.

 

렐리악의 두 분이 오셨습니다.”

 

안내하던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며 방문을 알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듭시랍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두 명의 사람이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붉은 색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아래의 진한 금색 눈과 더불어 빛났고 머리며 몸에 감은 보석들은 사람을 돋보이게 했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의 장녀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의 장남 마르틴 셰필라 렐리악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묘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와 망토를 입은 쪽이 먼저였다.

 

자나미 블랙스캣 일로냐 알퀼레오 말리우 비 아메론.”

 

사나기 라즈켓 일로리오 알퀼레나 멜리테 수 아메론.”

 

일로리오 대공작이며 말리우 후계이며...”

 

다들 날 사나기 공주라고 부르네.”

 

그러자 자나미가 사나기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네 얘기는 재미 없어. 어디어디 대공작이고 후계자고 무슨 무슨 직위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의 주인이고 하는 얘기만 한참이잖아. 어차피 잔이라고 불러달라고 할 거면서.”

 

맞아! 하지만 말을 끊다니 사나기는 바보야.”

 

자나미는 멍청이야.”

 

마르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라벨라보다 한두어살 많아 보이는 공주와 왕자는 마르틴과 아라벨라 사이에서도 안 하는 격의 없는(최대한 예의바르게 표현했을 때) 말과 행동을 보였다.

 

이 일에 익숙한지 시종장은 아라벨라와 마르틴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마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 , .....”

 

.”

 

시종장이 당겨주는 의자에 앉고 널찍한 방 안에 넷만 남자 공주와 왕자의 고개가 다시 이 쪽으로 돌아왔다.

 

아라벨라가 봤을 때는 공주가 이긴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사나기, 저 쪽은 잔. 공주나 왕자를 뒤에 붙여도 되네.”

 

아라벨라는 손가락을 살짝 들어 아직도 벌어진 마르틴의 턱을 닫아 주었다.

 

마르틴 셰필라 렐리악...입니다...”

 

들었네.”

 

음료와 과자가 나왔다.

 

레몬은 좋아하는가? 이번에 들어온 것이 향이 너무나 좋기에 주방장이 말리고 절여 놓았지.”

 

향신료 향이 나는 유리 저그는 얼음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아래를 보니 보글거리는 탄산이 바닥에서 표면까지 연이어 상승한다.

 

송글송글 맺히는 물방울은 주르르 떨어져서 하얀 레이스를 적셨다.

 

네에, 좋아합니다.”

 

아라벨라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자나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영애 건 내가 따라주지. 파티에서도 차 모임에서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니 궁금해 죽겠어.”

 

변방의 영지에서 지내느라 수도의 분들과는 연이 없었는데 이렇게 두 분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은테를 두른 잔에 레모네이드가 찼다.

 

일어선 김에 자나미가 레모네이드를 나머지 잔에도 채웠다.

 

놀랍군요. 저는 왕자님이 따라주실 줄은 몰랐네요.”

 

영애한테 내가 다정하다는 것을 좀 어필하고 싶었어.”

 

자나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둘은 지금 바실리 전 렐리악 백작령에 있었다고 들었네. 거기 산이 아주 멋지다지.”

 

사나기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온갖 식물이 자라며 푸른 바람이 불지요.”

 

그러자 자나미 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른 바람이라니! 아주 시적이야. 렐리악 부인이 말하기를 영애는 활달하다고 하더니 역시 남의 말만으로는 알 수 없어.”

 

렐리악 부인이라면 사피야를 말함인가.

 

마르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활달하다는 말은 보통 여성 앞에는 안 붙이니까...

 

그러니까 어머니가 저 요란한 왕자한테 누나 뒷담을 했다는 이야기야?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힐끗 올려다본 아라벨라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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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0

2019. 7. 12. 00:15 | Posted by 호랑이!!!

 

말 다섯 마리가 수도를 향해 떠났다.

 

이전에도 호위 임무를 맡은 적 있던 스파크는 이번에도 밤색과 하얀색의 얼룩말을 타고 맨 뒤에서 달렸고 맨 앞에는 새까만 흑마를 탄 슈체른, 그 다음은 구름처럼 하얀 데일라와 아라벨라가, 그 뒤에 마르틴과 프루던스가 달렸다.

 

황실에서 온 편지는 우선 렐리악 백작 저택으로 갔다가 렐리악 전 백작 저택으로 왔기에 거기에 씌인 날짜는 마차로 가기에는 지나치게 빠듯했다.

 

슈체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수도 근처의 적당한 곳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며칠이나 우직하게 말을 타게 되었다.

 

그 중에 신난 것은 삐(혹은 낙트) 뿐으로.

 

마르틴의 가방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삑삑 즐거워했다.

 

그나마 야숙은 하지 않았지만 마차 여행에서 걸리는 시간의 절반으로 시간을 단축한 다섯은 마침내 수도로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장 왕실에서 지방의 귀족들에게 제공하는 저택에 들어섰다.

 

저택은 거대한 담장 안에 총 다섯 개 건물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개는 한 가족이 한 건물을 사용하지만 신년회나 망년회, 그 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건물에 비해 사람이 많아 한 건물에도 네다섯 가족은 들어간다고 한다.

 

아라벨라도 어릴 때에는 한두 번 와 보았지만 신년회에 왔다가 감기를 심하게 앓은 뒤에는 셰필라(아버지)가 수도행을 금지시켰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은 것은 못 보았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아라벨라와 마르틴 일행에게 겨우 문 하나로 작은 방과 이어진 방만 하나 제공되었다.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제공하는 식사 표에서 과일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며 마르틴이 묻자 저택의 고용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세기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델라 아드무엘 미티우 아가씨와 기드온 임펄 루 페데사 공작님의 결혼식이 모레 황궁에서 이루어진답니다.”

 

미티우?”

 

아가씨와 도련님은 못 들으셨을 겁니다. 조그만 동네의 자작 집안이거든요. 수도에도 거의 못 왔고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페데사라면 알고 있다.

 

특유의 수완과 비상한 머리, 천재적인 검술 실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시국을 읽는 눈까지 있다고 하는 유명한 사람.

 

남작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한 것이 여섯 살, 남작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 일곱 살, 자기만의 사업을 벌였는데 대성공 한 것이 열 살,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일들을 해냈으며 왕이 위험했을 때 구해냈고 이루어낸 업적들을 바탕으로 페데사를 공작 지위로 올린 것이 겨우 그의 나이 스물의 일이다.

 

델라 아가씨와 기드온 공작님의 사랑 이야기와 각자의 이야기는 지금 수도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델라 아가씨는 노래도 잘 부르고 만들어낸 노래도 몇 가지나 되는데 그 노래도 어디서든 들을 수 있지요. 오르골로도 팔고 있으니 구입하시면 되겠습니다.”

 

미티우 영애에 대해서 아는 거 있나?”

 

그러자 그 고용인은 눈을 반짝이며 델라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무언가)을 늘어놓았다.

 

귀족이지만 아래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늘 베풀고 힘들었던 때를 잊지 않으며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두 딸을 데려온 계모가 델라를 못살게 굴었고 괴롭히고 노예처럼 대했는데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꿋꿋하게 노력했고 어떻고, 그러다 기드온 공작을 만났는데 둘이 첫눈에 반했으나 델라는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워 도망을 쳤고, 기드온 공작은 델라 영애가 신고 있던 마법의 금 신발을 주워... 지금은 예비 공작부인이라 기드온의 성에서 있었는데 못된 시녀들이 괴롭히고 지체 높은 영애들이 박대하고 산적을 만나고 하는 어마무시한 일들이 있었으나 정조를 지키며 현명하게 행동하여 기드온 공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일들이다.

 

많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꾸미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상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요즈음 수도의 아가씨들은 다 델라 아가씨를 본받으려고 한답니다.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그러다 하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헛기침을 했다.

 

내일이 결혼식 날이라 지금 수도는 시끌벅적합니다. 다른 영지에서도 결혼식을 구경하러 많이들 왔거든요. 여기 묵으시는 다른 분들도 저녁에는 수도를 구경하러 가거나 외식을 즐긴다고 하시는데 혹 두 분도 그럴 계획이십니까?”

 

어쩔래?”

 

마르틴은 눈을 반짝였다.

 

갈래!”

 

그렇다는군. 우리 식사는 괜찮아.”

 

스파크와 슈체른, 프루던스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그들은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씻고 휴식을 취한 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적당한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하인들이 마차를 꺼내주어서 그들은 적당한 것을 타고 거리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악기 소리는 꽤 다양했는데 바이올린이나 아코디언 같은 소리도 있었고 하프나 피아노 같은 무거운 악기까지도 들렸다.

 

마르틴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까지 수백은 될 악기는 어느 순간부터 한 가지 소리로 노래했고 다채로운 가락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술에 취한 남자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마차 옆을 지나갔다.

 

나비는! 잠들면! 꽃이 되고오오옥!!!”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동전 한 닢으로 팁을 주자 마부는 모자를 들어 인사했고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개선 장군을 위한 것처럼 집집마다 색종이나 색색 천을 이은 깃발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줄, 빨랫줄, 어디든 작은 방울이나 장식 같은 게 매달렸다.

 

마력으로 불을 켠 장식용 전구는 조그맣고 흐릿한 것인데도 다양한 것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온 도시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다.

 

횃불을 켜 묘기부리는 사람이 있고 장사꾼들은 노란색을 칠한 구두며 책이며 오르골, 장난감, 모형까지 늘어놓고 소리를 질렀고 악기 연주하는 사람들은 춤추는 사람들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은 또 춤을 춘다.

 

기묘하게도 여자는 여자끼리.

 

왜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춤을 추는 거지?”

 

몸을 밀어내는 것 같은 거대한 악기 소리 옆에서 거의 악쓰다시피 묻자 지나가는 사람이 대답했다.

 

이제 여자들은 정조를 위해 자기들끼리 춤을 춘다!”

 

얼마나 아름다워! 멋진 일이야!”

 

저 아가씨들은 훌륭한 부인이 될 거야!”

 

이 수도에 온 이후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아라벨라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르틴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스파크는 질린 표정이고 슈체른과 프루던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슈체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부인 말고는 뭐가 되는데!?”

 

하지만 그 말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

이거 10편 내외로 끝내고 싶었는데 어느새 20이 되었습니다

왜 끝이 안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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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9

2019. 7. 7. 16:20 | Posted by 호랑이!!!

 

첫 번째로 바실리는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힐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 아라벨라는 말을 타고는 했기에 또래의 아가씨들보다는 근육이 있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성격에 맞았다.

 

창술, 검술, 사격.

 

바실리는 거기에 활까지 추가하고 싶어 했지만 아라벨라가 유리창을 다섯 개쯤 깨자 활은 되었다며 빼 주었다.

 

사격은 마탄을 이용한 총으로 하는 것인데 이 총이라는 물건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왕의 허가 없이는 한 영지에 셋 이상 얻을 수도 없었다.

 

하나는 내 거고, 다른 하나는 네 거다. 원래 에멜라에게 주려고 했지만 네게 주게 되는구나.”

 

아라벨라는 바실리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고는 손을 쭉 뻗고 방아쇠를 당겼다.

 

길쭉한 몸체의 것은 시위를 세게 당기지도 않았는데 작은 방아쇠를 누르는 것만으로 멀리 있는 허수아비를 맞혔다.

 

이건 그래도 활보단 낫군.”

 

바실리는 며칠간 계속 갈아댔던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저쪽으로 조준을 했는데 어떻게 위로 갔는지 원...”

 

이건 못 들은 척 하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마르틴은 자신이 배우고 싶어하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수업이 적어졌고 아라벨라는 몇 가지 늘어났다.

 

듣기로는 셰필라가 마르틴도 경제나 경영 등의 수업을 듣게 해 달라고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지만 바실리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많은 수업이 필요 없다며 딱 잘랐다나.

 

그 대신 마르틴은 사피야에게 편지를 받았다.

 

오가는데 며칠씩 걸리는 편지에는 며칠 전의 날씨와 중요한 일이 적혀 있었고 가끔은 지친 채 적은 것인지 꽤 사무적이었으나 일주일에 한 통이 꼬박꼬박 인편으로 전달되었고 아라벨라도 마르틴과 함께 편지를 받았다.

 

셰필라가 아니라 사피야의 편지였으나 언제나 맨 끝에는 네 아버지도 너를 많이 보고싶어 하신다는 문장이 있었다.

 

아라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피야는 내가 아버지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편지를 물에 담가 씻는 아라벨라에게 프루던스가 종이를 가져왔다.

 

말린 꽃을 붙이시겠습니까?”

 

아니.”

 

향수는 어떻습니까?”

 

가는 동안 다 날아가겠지. 됐어.”

 

리본이나 인장은 어떤 것으로 할까요?”

 

“...리본은 됐어. 인장은 적당한 걸로.”

 

, 이건 도련님 것입니다.”

 

프루던스는 아직 작은 마르틴을 위해 허리를 숙여 종이를 내밀었다.

 

도련님께서는 어떤 것을 하시겠습니까? 리본이나 향수를 가져올까요?”

 

저는, 아니... 나는, 그거 다 할래요. ...할래!”

 

말린 꽃이 여럿 있는데 어떤 것으로 가져올까요?”

 

파란 거 있어?”

 

가서 좀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프루던스가 허리를 펴자 마르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갈래.”

 

그 때 현관에서 종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꽃을 말려둔 곳에는 이 아이가 안내해줄 것입니다.”

 

빨간머리 집사는 지나가던 고용인을 불러 지시를 내렸고 마르틴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하얀 에이프런 뒤를 따라갔다.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낯선 모습에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가 깃펜을 잉크에 푹 담갔다.

 

사피야님에게

 

거기까지 쓰고 더 무슨 말을 쓸지 잠시 생각하는데 옆에서 종이 뭉치가 펄럭였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종이는 꽤 귀한데 아무렇게나 두다니.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종이 뭉치를 들어올렸다.

 

그 뭉치에는 마르틴이 배우는 지식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맨 윗장은 역사 이야기다.

 

정권이 뒤바뀌면서 케이가 가문의 마크시툰 백작은(마크시툰 케이가가가) 루일라 공작과 손을 잡았고 둘은 화폐를 나라에서 제조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냈다

 

예전에 배웠었지.

 

눈으로 죽 읽다보면 마르틴의 메모도 군데군데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제조를 누가 하느냐를 두고 마크시툰 케이가 백작과 루일라 공작은(이름은?) 내분이 일어나게 되는데

 

갑자기 손이 공책을 덮었다.

 

보지 마아!”

 

왜애, 보면 안돼? ?”

 

안돼!”

 

마르틴이 공책을 홱 뺏어가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도련님, 편지가 왔습니다.”

 

마르틴과 아라벨라는 불과 어제 받은 사피야의 편지를 돌아보았다.

 

누구한테서 왔는데?”

 

금색 봉인이 찍힌 두루마리 한 장이 내밀어졌다.

 

왕실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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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8

2019. 7. 3. 16:41 | Posted by 호랑이!!!

 

바실리를 데려온 후 사흘째 되는 날 오후, 프루던스가 아라벨라를 찾아왔다.

 

아라벨라 아가씨, 바실리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라벨라는 품이 넉넉한 옷에 굽이 없는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프루던스의 말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갔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 가운만 하나 걸치시고 와주십시오.”

 

프루던스는 금색 술이 달린 짙은 녹색 가운을 아라벨라의 어깨에 걸치고는 앞장섰다.

 

계단을 오르고, 프루던스는 언젠가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던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도록 해.”

 

놀랄 만큼 명확한 발음에 깨끗한 목소리는 어릴 적 아라벨라가 들은 그대로였다.

 

딱 한번이었지만.’

 

아라벨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환자를 위한 방이 되어서인지 방 안은 빈틈없이 하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책상 가장자리에는 푹신한 천을 대 놓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촛대가 있었고 사용하기 위해 꺼내놓은 초가 몇 개 나와서 책 옆을 뒹굴었다.

 

아라벨라는 한쪽 발을 뒤로 빼어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어릴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네가 나를 구했다지.”

 

고압적인 말투와 눈빛이 쏟아졌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할머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일찍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실리는 아라벨라 옆에 선 프루던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라벨라에게 의자를. 그리고 마실 것도.”

 

하얀 천을 댄 나무 의자를 밀어 주고 프루던스는 방에서 나갔다.

 

바실리는 베개를 등 뒤에 하나 더 넣어 꼿꼿한 자세로 아라벨라를 마주했다.

 

아라벨라, 영지는 어떻게 하고 온 것이냐.”

 

영지는 아버지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셰필라를 말하는 모양이군. 그 녀석은 영 변변찮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에멜라가 죽었다지.”

 

아라벨라는 고개를 들어 바실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그렇더군. 듣기로는 셰필라가 새 부인을 들였다고 하더구나.”

 

그렇습니다.”

 

둘 사이에서 난 것이 그 까만머리 꼬마고. 내가 십 년쯤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농담도.

 

아라벨라는 재미있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농담에 뚱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언장은 있었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제 너는 서른 즈음 되었고?”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뭐라고.”

 

바실리의 입 끝이 아래를 향한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허락이 떨어지면 프루던스가 차와 과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프루던스. 내가 사라진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 한 달이라니, 그럼 저 밖에 커다란 애는 누구 애냔 말이야!”

 

셰필라님과 새 부인 사피야님의 자식입니다.”

 

그 한 달 새 저만큼 커지지는 않았을 거고!”

 

아라벨라는 찻잔을 받았다.

 

오래 되었습니다. 장부에 빈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적으로 후원한 것 같습니다.”

 

누가!”

 

“...아버지가요.”

 

망할 창부 같으니! 감언이설로 살살 꼬드겨서...!”

 

프루던스가 헛기침을 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보고 계십니다.”

 

“......후우...”

 

바실리는 약차를 벌컥 마셨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에 이어 과자까지 입에 툭 던져 넣었다.

 

아라벨라.”

 

, 할머님.”

 

그동안 많이 배웠나?”

 

, 할머님. 그간 프루던스가 가정교사를 붙여 주어서 예법도 배웠고 자수도 놓고 외국어도...”

 

“....그럼 에멜라는 뭘 가르쳤지?”

 

승마술과 경제에 관한 것, 정치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꽃꽂이나...”

 

리본 고르는 일 따위를 배웠다는 거군. 네게 필요한 건 하나도 안 가르쳤어.”

 

아라벨라의 시선에 힘이 실렸다.

 

바실리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고개를 들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에멜라가 네 출생에 대해 특별히 한 이야기는 없더냐.”

 

렐리악은 오래 이어져 온 백작가였고 특별한 일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더 낮아지거나 더 높아지는 일 없이 이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지는 들었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 가지를 약속하면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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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7

2019. 6. 27. 17:35 | Posted by 호랑이!!!

 

그렇게 수색은 종료되었다.

 

슈체른이 마르틴과 아라벨라를 데려다 주었고 삐는 마르틴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렐리악 저택으로 돌아왔다.

 

옥상에 내려서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집사, 프루던스가 달려와서 아라벨라나 마르틴, 심지어 슈체른까지 본체만체하고 바실리를 안고 뛰어갔다.

 

저 녀석 하여간 침착하지 못하고.”

 

슈체른이 뒷머리를 벅벅 긁는데 마르틴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씀을.”

 

어린 인간이 예의바르게 군다고 어색해하는 것이 여실하다.

 

아라벨라는 항상 느긋하게 굴던 슈체른이 말을 주저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체른.”

 

뭡니까.”

 

할머니 찾는데 도움도 주셨고 삐도 걱정될 텐데 며칠 여기 묵는 건 어때?”

 

무사한 거 봤으니까 됐...”

 

마르틴이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주 기대어린 눈으로.

 

그러니까...”

 

머리에는 삐를 얹고.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르틴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더니 슈체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여기 아래쪽에 손님방이 있어요. 저택이 작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방이 네 개나 있더라구요.”

 

네 개나?”

 

슈체른이 손을 잡고 내려왔다.

 

잠깐, 저런 옷 괜찮은가?

 

현재 주로 입는 옷들은 풍성하거나 살갗을 최대한 많이 가리는 종류의 옷들이다.

 

그러나 슈체른의 옷은 팔다리가 거의 그대로 드러났고 색도 하얀색 한 가지 뿐인데다 헐렁하고 현재 기준으로는 수수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슈체른을 마당에서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널찍한 옥상에서 데려가는 건데 누구라고 말하지? 사용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 손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툭툭 쳤다.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 으으음... 그냥... 할머니 찾는데 도움을 준 손님이라고 하면...”

 

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귀한 몸이기는 하니까 귀족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 그런데 마차도 없고 어떻게 왔다고 하지? 순간이동? 시종도 없이?

 

복잡해지는 머리에 아라벨라는 이마를 짚고 슈체른에게도 지혜를 좀 빌려달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마르틴이 벌컥 문을 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 잠까-”

 

옥상 아래는 3층이고, 바실리의 방과 가까웠는데 평소라면 아무도 없었던 그 복도에 지금은 사람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뜨거운 물을 들고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깨끗한 수건을 몇 개나 쌓아서 전달하고 말을 전하러 뛰어내려가는 사람이나 약, , 꽃 같은 것들이 쉴새없이 날라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 이 쪽을 한 번씩 보고 지나갔다.

 

아라벨라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다녀오셨어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 도련님!”

 

지금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주인님께 약과 여러 처치를 한 후-”

 

오랜만입니다 슈체른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죄송한데 급해서요-”

 

차와 과자를-”

 

“-준비해 드릴까요?”

 

사람들이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들어갔다 줄줄이 나오면서 한 마디씩을 한다.

 

마르틴은 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복도 가장자리로 걸어서 2층으로 빠져나갔다.

 

그 다음은 슈체른과 삐, 다음은 아라벨라.

 

겨우 한 층 차이인데 2층은 퍽 조용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의 방으로 슈체른을 질질 끌고 갔다.

 

이 집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였어?!”

 

가끔 바실리를 데려다줄 때 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할대로 취해 걸음을 걷지 못한다던가.”

 

할머니가?”

 

5-60년 쯤 전에? 이후로도 자주 왔고...”

 

얼마 전 일처럼 이야기하더니 오륙십년 전이란다.

 

저 자주는 얼마나 자주일까,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자주는 아닐 것이다.

 

얼마나요?”

 

슈체른의 어깨에서 마르틴의 머리 위로 삐가 퍼덕퍼덕 내려앉았다.

 

열흘에 한 번?”

 

자주 왔네.”

 

셋은 아라벨라의 방 옆의 빈 방 문을 열었다.

 

이 방을 쓰면 되겠네. 빈 거니까.”

 

비었군요.”

 

슈체른은 방 문을 열더니 무언가 귀한 것을 본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나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래, 이젠 비었군요...”

 

슈체른은 마르틴의 손을 잡더니 방 안으로 이끌었다.

 

춤은 출 줄 압니까?”

 

, 니요!?”

 

잠깐 번쩍하는가 싶더니 슈체른은 마르틴과 비슷한 나잇대의 아이로 변했다.

 

마르틴의 발을 제 발 위에 얹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것은 자세가 완벽한 왈츠다.

 

그 귀에 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아라벨라는 문에 등을 기댔다.

 

예전에, 바실리가 마르틴과 비슷한 키였을 때 자주 추고는 했었습니다. 아바트는 언제나 춤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고 그게 나는 아니었으니... 대신 아바트의 아이나 손주들과는 자주 추었습니다.”

 

한 명이 지치면 다음 아이가 오고, 그 아이가 지치면 다시 다음 아이가 오고.

 

끝없이 춤을 추다 보면 마침내 아바트가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리고 슈체른의 입이 다물렸다.

 

천천히 춤이 멈추자 마르틴이 뒷걸음질로 슈체른의 발 위에서 내려왔다.

 

“...역시 머물지는 못하겠습니다. 바실리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지요.”

 

슈체른은 몇 번이나 방 안을 돌아보면서도 결국 밖으로 발을 옮겼다.

 

마르틴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차 드실래요? 삐는 뭘 먹이면 돼요? 그동안은 있지요, 소시지나 햄이나 달걀 같은 거 먹였는데 그러면 돼요?”

 

슈체른은 마르틴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걷어낸 듯 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고요? 낙트가 그런 걸 먹었다고? 그런 걸 먹이다니, 이제 큰일이 났습니다!”

 

네에!? 큰일?!”

 

슈체른의 행동이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마르틴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채소도 먹이고 과일도 가끔 먹였어요! 그리고... 그리고 사탕도 조금-”

 

뭐어어? 그거 정말 큰일입니다. 더 큰일이 났어요!”

 

어린 용들은 대개 신선한 날고기와 우유를 먹고 자란다.

 

요리가 아닌 그런 식재료를 먹이는 것은 어린 용들의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서도 아니다.

 

용들이 탐내는 유일한 사치품인(물론 금과 보석류나 기타 귀한 것들은 제외하고) 음식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달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 농담같은 일의 선례를 계속 들어왔던 터라 아라벨라는 그들의 뒤에서 슈체른이 마르틴에게 겁을 주는 모습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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