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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가르드 드레이크/에셀리온]

2019. 9. 25. 02:40 | Posted by 호랑이!!!

폐에하아 한 가정에서도 안주인이 없다면 그 가정은 엉망이 되기 마련인데 어이하여 이 황실에 내궁의 주인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무릇 안이 실하지 못하면 겉이 번듯하더라도 이내 병이 들기 마련이오니-”

 

저에게 나이 서른 된 조카가 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의 집이란-”

 

에셀리온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명절의 친척 같은 놈들.

 

꽃 만난 벌떼마냥 모여들어 붕붕붕 시끄럽기도 하다.

 

애가 있으니까 후사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결혼을 물고 늘어지냐.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해?”

 

신하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쟁쟁거리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붉은 천옷에 가죽으로 만든 갑주.

 

언젠가 잡았다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

 

전시가 아님에도 언제나 등에 지고 다니는 거대한 도끼.

 

붉은 색 화장은 대개 그 같은 사람이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언제나 눈가에 칠해 놓았다.

 

지금 폐하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직언을 올리는 중입니다.”

 

결혼하라고.”

 

사마낙은 그들이 올려놓은 듯한 길쭉한 두루마리 종이를 들어올렸다.

 

그러합니다. 사마낙님께서도 폐하를 위하신다면... 아니 무슨 짓입니까!”

 

참방.

 

횃대를 끌 때 사용하는 물동이에 두루마리가 처넣어졌다.

 

두루마리를 젓기까지하자 잉크의 검정인지 재의 검정인지 모를 것으로 물이 새까매졌다.

 

너네 조카 나이 서른 처먹고 끼니 못 챙기고 청소 못 하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결혼하면 다 나아진다니 결혼이 무슨 만병통치약이야? 그럼 결혼한 자네는 왜 안 고쳐졌나? 그 지-”

 

그만 그만.”

 

에셀리온이 다급히 손을 젓자 뒷말은 사라졌다.

 

자기 병명을 듣지 못한 신하는 희끗희끗하게 센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다가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말을 하고 홱 뒤돌았다.

 

아이고 어찌 그리 급히 가십니까 소리를 하며 그 무리도 새끼오리처럼 조르르 나가고 방이 비자 사마낙은 나머지 두루마리도 다 물동이에 집어넣었다.

 

백 세가 다 되어가건만 아직 머리가 새까만 사마낙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간 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서른일 때는 혼자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사람도 잡고 동물도 잡고 옷도 만들었는데 요오즘 젊은 것들은 배때지가 불러서...”

 

그 때는 그럴 때이긴 했지.

 

그건 됐고, 같이 저녁 먹어도 될까?”

 

그렇잖아도 네 사람 분 차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데리러 온 거라며 사마낙이 말했다.

 

여간한 거리였지만 둘은 걷는 것을 택했고 용기사를 위해 지어진 궁전 정원에 들어갔을 때 이 계절에 피었을 리 없는 꽃을 발견했다.

 

심지어는 사마낙이 나섰던 아침에도 없었던 꽃이다.

 

거긴 독이 있어.”

 

에셀리온이 꽃에 손을 뻗는 사마낙을 말렸다.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사마낙은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쉿- 소리를 냈다.

 

손바닥을 펴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자 에셀리온은 더 걸으려다 멈췄다.

 

망토자락을 걷어 어깨에 걸치자 풀숲을 걷는데도 놀라울 만큼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몇 걸음을 가던 사마낙은 두껍게 자란 나무 뒤로 홱 손을 뻗어 아이 두 명을 찾아냈다.

 

“...에샤드카.”

 

평소라면 냉큼 손을 뻗어 안기거나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할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다니.

 

일레하?”

 

아픈가? 다쳤나? 왜 이러지?

 

“...이제 움직여도 될까?”

 

이리 오십시오.”

 

애들이 자라면서 좌절이나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건 영 신경이 쓰이는구나.

 

에셀리온이 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왜 울었어?”

 

울었어?

 

사마낙이 무릎을 굽히자 망토가 떨어지며 털썩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따개비처럼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까지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방으로 가버리고 시종 하나가 가벼운 먹을 것과 술을 한 병 가지고 왔는데 사마낙은 시종이 상차림을 하는 동안 질문을 건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아까 재무와 교육 기관의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일레하님과 에샤드카님과 만나셨습니다.”

 

그랬겠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사마낙은 도끼를 잡았다.

 

그 놈들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머리를 갈라 알아봐야-”

 

안돼. 아직은.”

 

에셀리온이 말하자 사마낙의 인상이 팍 구겨졌지만 도끼는 다시 얌전히 제 자리에 놓였다.

 

두 분의 혈통에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누구 씨냐 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에셀리온이 짐작했다.

 

내가 누구나 지나치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모양이지.

 

조만간에 한 번 관료 체제를 확 바꿔야 정신을 차리려나.

 

황제 폐하.”

 

내 새끼로는 부족하다 그거지.

 

사마낙은 희번득하게 뜬 눈으로 에셀리온을 불렀다.

 

저희, 서로를 위해 작은 협정을 맺는 것은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