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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휴가

2019. 12. 23. 14:33 | Posted by 호랑이!!!

율리안은 팔을 더욱 길게 뻗었다.

 

손 끝이 잠긴 바닷물은 따뜻해서 나른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하얀 눈도 내리고 길도 얼고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의 목 깃을 세우고도 한없이 웅크려 다닐 텐데.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보내는 12월이라니.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뻗자 쟁반 위의 푹 익은 과일과 치즈가 닿았고 샴페인이 담긴 글라스의 단단한 다리가 만져진다.

 

파도가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타원형으로 둥그스름한 포도알은 이리로 데굴데굴 굴러갔다가 또 저리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저 음흉한 남자까지도 느긋한 기분인지, 평소라면 몇 번쯤 손을 댔을 법도 한데 오늘은 겨우 태닝 오일만 제 몸에 문지르고 갔다.

 

율리안은 포도알을 입에 물었다.

 

자신의 입에는 지나치게 달고 무른 것이 향긋하게 터지며 태양빛에 데워진 열기를 퍼뜨린다.

 

배 위에서 나른하게 엎드려 있자, 크나트는 챙 넓은 여름용 모자를 얼굴에 덮어주고 갔다.

 

끊임없이 나직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향긋한 과일 향을 맡으며 있자니 이 곳이 지상낙원일까 싶어진다.

 

이미 이대로 몇 시간이나 지나버렸는데... 일어나서 뭐든 해야 하는데... 책이라도 읽거나...

 

하지만 머릿속이 평온하게 잠들어버려서 도무지... 도무지 일어날수가... 아아아..... 이것도 다 저 흉악한 자의 농간임이 분명...

 

물고기가 툭툭 건드리고 가는지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살살 저어서 쫓았지만 잠시 사라질 뿐 이내 다시 다가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다.

 

손가락을 물고기들한테 잠시 맡겼다가 잠을 애매하게 쫓는 것처럼 느껴지자 아예 물 밖으로 뺐다.

 

바닷물에 젖은 손가락은 약하게 당기는 느낌을 주며 말랐다.

 

아마 소금기 때문일 테지, 아니면 물 때문이거나.

 

율리안은 무심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느껴지는 짠맛에 몸을 일으키고 샴페인을 마셨다.

 

샴페인에서는 약하게 단맛이 났는데 입안의 소금기와 합쳐지니 얼마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손끝을 물에 참방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가면 입가를 타고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다시 샴페인.

 

소금물.

 

샴페인.

 

달링, 이상한 거 먹지 마.”

 

지지야 지지.

 

크나트는 어린 아이에게 하듯 얼렀다.

 

그 목소리조차 반쯤 잠든 채 하는 것 같아서 율리안은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 의미가 알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지 알지 못한 채.

 

크나트의 손이 율리안의 안주 접시를 더듬다가 치즈와 포도 한 움큼을 가져갔다.

 

팽팽하게 부푼 포도 껍질이 툭 툭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처럼 따뜻한 바람이 잎 넓은 나무를 흔들었다.

 

크나트는 눈을 떴다가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자 몸을 일으켰다.

 

한 상자 가져왔던 술은 벌써 한 켠이 다 비어 있었고, 그래서 크나트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두 상자는 더 보내달라고 했다.

 

샴페인-은 이미 충분히 마셨으니 부드러운 맛의 와인으로.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맛을 모르니까 적당히 추천을 받거나-

 

이런 때 할아버지가 그랬었지.

 

여차하면 제일 비싼 것으로 사면 된다고.

 

먼저 일어난다? 달링은?”

 

조금만 더 있다가...”

 

먼저 갈테니 이따 부르면 와야 해.”

 

다시 율리안의 손이 흔들렸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크나트는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섬으로 발을 딛자 푹신하고 깨끗한 모래에 발이 푹 들어갔다.

 

잘 말린 나무 토막이 안으로 굴러들어간다.

 

둥글둥글하고 커다란 덩어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쌓이고 크나트는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3

 

2

 

1

 

Fire!

 

자그마한 성냥개비가 안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불이 후루루 일어나며 그릴을 벌겋게 데우고 크나트는 미리 준비한 고깃 덩어리를 불 위에 척 척 얹었다.

 

큼지막한 것이 익으며 육즙을 뚝 뚝 떨어뜨렸고 그 때마다 아래에서는 치이익 소리가 났지만 이내 물기는 증발하여 소리 역시 사라진다.

 

고기 외에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무엇이든 얹고 잘 손질한 흰 살 생선 한 토막도 위에 얹혔다.

 

껍질이 파삭하게 오그라들며 생선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아스파라거스, 피망, 양파 썬 것도 얹고 마늘도 후두둑 올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인가 어두워진 하늘에 연기가 어른어른 올라간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공기 속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지고.

 

크나트는 율리안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