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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님께

2017. 7. 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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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a Pet?] 케니스에게 주는 통장

2017. 7. 1. 16:53 | Posted by 호랑이!!!

렉터는 통장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겼다.

 

매달 꼬박꼬박, 5년 동안, 보너스와 명절 상여금 등등을 합하여 꽤나 높은 금액이 적혀있는 통장은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자신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명의 자리에 적힌 이름은 케니스(드라보프).

 

케니스, 케니스, 케니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에 확 띄던 작은 강아지.

 

스스로 낸 상처투성이에 불안을 끌어안은 주제에 남을 더 챙기려고 했던.

 

케니스는 첫 번째 행사가 끝나고 죽으려고 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다른 실험체들을 네가 케어해주라고 특별히 직책을 주고, 실험체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고, 더 오래 살려두고.

 

자신의 독단으로 케니스가 할 수 없는 일을 주었거나, 혹은 저 아이가 도망치지나 않을지 오래 지켜봐왔지만 자신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작은 강아지는 자신의 기대 이상으로 아이들을 안정시켰고 도망을 치기는커녕 제법 헌신적인 태도로 일했으니까.

 

렉터는 통장을 다시 비닐 케이스에 밀어 넣었다.

 

본디 머리가 좋고 성격이 상냥한데다 연구원들과도 두루 좋은 관계를 쌓았고, 일을 잘 한다고 보고서에 적기도 하였고, 거기에 이만한 금액이라면 아무리 돈의 가치가 전쟁 전보다 떨어진 요즈음이라도 불편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만약의 한 가지에 미리 대비하는 것뿐이지만.

 

굳이 이래라 저래라 케니스에게 자신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리한 아이라니까? 자신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아마 모든 일이 끝나고 실험체 중에서는 가장 번듯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통장 하나는 렉터의 마음에 제법 안정감을 주었다.

 

나의 일이 아니고, 심지어 에디의 일도 아닌데.

 

겨우 이 얄팍한 통장 하나가 골든 티켓이라도 된 마냥 기뻐하게 되다니.

 

렉터는 웃었다.

 

 

[다무바레] 서재

2017. 6. 29. 02:29 | Posted by 호랑이!!!

히카르도는 다이무스의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재라기보다는 사무실의 역할을 더 충실하게 수행함에도 값에 상관없이 책이 가득했기에 히카르도의 눈에는 이 곳이 도서관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다이무스는 서류를 붙들고 있고,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어서 서류작업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책을 대강대강 훑어보다가 적당히 얇은 책을 골랐다.

 

바닥에 주저앉고 책장에 기대 책을 펼치면 페이지 너머로 다이무스가 보인다.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나는 육중한 책상과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른 곳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펜으로는 바쁘게 무언가를 쓰는 모습은, 정말...

 

‘-를 갑니다, 사과, 오렌지-’

 

바깥에서 갑자기 메가폰 소리가 났다.

 

책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들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니 다이무스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완전히 서류 속에 빠진 것 같지만.

 

히카르도는 입을 열었다.

 

“everlasting”

 

"영원한, 변함없는."

 

“grave”

 

무덤.”

 

언제든 영어가 아직 어설프다는 구실로 말을 걸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듣고 답을 한다.

 

다음 장을 넘기다가 히카르도는 알아차렸다.

 

이 책은 이 서재의 여느 책과는 다르게 그림이 많고, 거기 더해 새 책이다.

 

책은 아이들의 나라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지만 히카르도는 더 이상 책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홀든.”

 

펜촉이 종이를 스치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love.”

 

"사랑."

 

사각사각, 부드러운 손길만이 낼 수 있는 소리지.

 

“love.”

 

사랑.”

 

다시 한 번 더.

 

“love.”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 쪽을 보며 웃고 있는 히카르도와 눈이 마주쳤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

 

다시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히카르도도 다시 책으로 눈길을 내렸다.

 

 

알지 못하는 것

2017. 6. 24. 22:59 | Posted by 호랑이!!!

AB가 만난 것은 도서실에서였다.

 

AB를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사람이니까. B가 지나갈 적이면 모두가 돌아보았다. 돌아본 자리에는 수군거림과 손가락질, 웃음소리를 남기고.

 

AB가 마주친 도서실, B는 구석진 자리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A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AB는 남들 입에는 친구 관계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자주 했으나 A의 우려와는 달리 B는 언어를 이해했고 제법 대화다운 대화도 나눌 줄 알았다.

 

오히려 가끔은 B가 자신들을 답답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도 받았고.

 

“B, 뭐 봐?”

 

-.”

 

A도 창틀에 턱을 괴었다.

 

등굣길을 따라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구경하기에는 좋은 나날이지.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아름답지?”

 

. 나중에 치우느라 고생은 하겠지만.”

 

꽃 말고.”

 

꽃 말고?

 

A는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B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시선을 따라갔지만 그 시선의 끝은 꽃나무에 박혀 있었다.

 

꽃이 아름답지 않아?”

 

아니, 전혀.”

 

사람이 예쁜가?”

 

사람?”

 

B는 그 말에 A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아름답냐고, 기가 막혀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뭘 보고 있었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수업종이 울렸다.

 

B는 창가에서 일어나더니 교실 뒷문으로 나갔다.

 

나중에 들어온 선생님이 B를 찾을 때 바깥을 내다보던 AB를 발견했다.

 

마치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한껏 옷자락을 휘날리며.

 

B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비록 BA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날엔가 A는 알게 되었다.

 

AB를 보았을 뿐, B는 단 한번도 A를 본 적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껏 한 가지만은 알지 못했다.

 

달을 좋아하는 시인은 달에 뛰어들었다는데 B는 무엇에 뛰어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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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4화

2017. 6. 23. 23:06 | Posted by 호랑이!!!

 

하늘도 땅도 기숙사에 돌아오는 학생들로 빼곡했다. 날개 없는 학생들은 걸어서 짐을 옮겼고 날개가 있는 학생들은 날아서 옮겼으며 어떤 학생들은 날개가 있음에도 날개 없는 친구와 함께 가기 위해 걷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는 유밀(세인트 외의 수인을 총칭)이 둘.

 

이봐요 왕자님, 알고 계시죠?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어제 학생이 보여주셨던 태도는 부적절했다는 거! 들어가자마자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하면서 사과하지 않으면 자칫 교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 거라구요? 아니면 영 교수님한테나.”

 

나도 알고 있다!”

 

녹스는 소리를 질렀다가 아차하며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페드는 후욱 부풀었던 깃털을 부풀 때만큼이나 빠르게 가라앉혔다.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조교님.”

 

알면 됐어요, 녹스 학생.”

 

페드는 시무룩하게 꼬리를 늘어뜨린 녹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분의 차는 꽤나 있지만, 어쨌든 돌봐주어야 하는 후배 중 하나니까.

 

갑자기 배가 아팠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주전자를 불에 올려두고 나왔다던가...”

 

둘은 나란히 날개를 펼쳤다. 학교 안에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날개를 맡기고 몇 번 날갯짓하면 몇 층 위에 있는 베란다에 발이 닿는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에 둥글고 반질반질해진 대리석을 넘어서 계단을 총총 올라가다보니 어쩐지 발걸음이 급해졌다. 어제 그 일은 역시 넥투르 인이 짜증나서 그랬다. 그 약냄새 날 것 같은 새파란 머리며,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그 기분 나쁜 말투라던가... 교수님한테 꼭 사과하고, 수업 준비를 도와 드리겠다고 말해야지. 페드를 뒤에 남겨두고 녹스가 뛰었다.

 

계단이 앞으로 여덟 칸.

 

앞으로 여섯 칸.

 

다섯, , .

 

마지막 세 칸은 날개를 퍼득여 단번에 올라가고.

 

녹스는 문을 열었다.

 

교수님! 어제는 제가 배를 주전자에...!”

 

녹스는 말을 멈추었다. 뒤에서 페드가 건물 안에서 날개를 펴는 건 교칙 위반이예요!’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페드가 간신히 계단 위로 뛰어올라오자 보인 것은, 낯익은 녹색이 있었다.

 

어서 와아, 페드~”

 

교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째서긴~”

 

페드는 문을 잡고 있는 녹스의 팔을 들어 치웠다.

 

어제 저 왕자님이 가고~ 너도 연구자료 본다고 가고~ 교수님이 할 일이 많으시다고 하시길래 말이야아~”

 

도와드리겠다고 했지 뭐어! 라면서 방긋 웃는다.

 

오 저런.

 

페드는 옆을 힐끗 보았다. 녹스는 놀랄 만큼이나 새하얗게 굳은 얼굴로 간신히 동공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영 교수와 교의 손에 들린 서류를 오가고 있었다.

 

교수님.”

 

?”

 

가여운 왕자님을 나라도 도와야지 어쩌겠어. 저 교 놈은 자기가 알아서 잘 살아남을 놈이니까 내버려두고. 아니 애초에 교 저 놈은 왜 온 거야? 이런 일 절대 안 하는 놈인데. , 성적이 위태하기라도 한가?

 

녹스 학생도 도와드린대요.”

 

, 그래요? 그러면 고맙긴-”

 

야호!

 

죽어있던 녹스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덩달아 페드의 귀도 쫑긋하게 섰다.

 

“-한데-”

 

더더욱 녹스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어라라, 어딘가 불안해서 페드의 귀가 더더욱 뾰족하게 일어섰다.

 

“-지금 교 학생이 너무 잘 도와주고 있어서-”

 

교수님!”

 

페드가 녹스를 떠밀었다. 녹스는 균형을 잃을 뻔 해서 날개를 퍼덕였다. 가까스로 날개를 접고 서자 페드가 방긋 웃었다.

 

일손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거야 그렇지만요.”

 

저 갑자기 고대 석판 해석이 갑자기! 잘 되어서요, 저 대신 여기 왕자님이 도와주신대요! 갑자기 바빠진 저 대신!”

 

그 갑자기는 대체 왜 세 번이나 튀어나오는 걸까. 영 교수는 날개까지 부풀리는 페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 별개로 실내에서 날개를 폈다는 이유로 벌점은 주었지만.

 

 

 

 

 

 

 

그런 나날 속에 첫 수업이 다가왔다. 여러 곳에서 온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하기 몇 분 전에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교실에 미리 와 앉아있다가 교실의 문이 열리자 일제히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렸다. 먼저 들어온 것은 영 교수였는데 영 교수는 나름대로 좋은 옷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입고 들어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유행이 3년쯤 전에 지난 옷이었다. 학생들은 천을 달아 늘어뜨린 모자를 쓴 영 교수를 보고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뒤로 자료와 책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는 페드를 보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드는 왜 신입생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펴다보다가 신입생들이 허리를 숙이려고 하자 그제야 알았다는 듯 평소보다 힘차게 인사했다.

 

영 필로이픈 교수님! 여기! 책 가져왔습니다!”

 

교수라는 단어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웅성임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페드와 영 교수가 미덥지 못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앉았다. 페드는 깃털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휘둘러 영 교수의 책상에 약차를 내려놓으며 흘긋 시선을 돌렸다. 영 교수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줄마다 앉은 학생의 수를 헤아려 인쇄물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병이랑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차라리 웅성이는 학생들의 태도 평가에 낙제점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까만 날개, , 까만 머리. 녹스 왕자님인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네 말은 틀렸다! 하이어스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된 지 벌써 30년은 되었어!”

 

그렇지, 이어진 전쟁과 업무의 전문화로 인해 법적으로 폐지되었지. 잘 기억하고 있군요... 라고, 영 교수는 때에 맞지 않는 감탄을 했다가 이어 보이는 모습에 경악해야 했다.

 

영 교수에 대해 노예 운운하던 학생을 붙들은 녹스 라이비는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찌르는 건가, 증거를 어떻게 인멸해야 하는지, 로 페드가 고민하는데 그 단검은 (페드, 혹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학생의 가슴이 아니라 녹스의 머리로 향했고, 윤기나고 아름답던 머리카락은 한순간에 헝클어진 실더미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영 교수의 모자를 두고 그랬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웅성임과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 선두에 선 것은 페드의 외침이었다.

 

이 망할 왕자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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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2017. 6. 21.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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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둘이 다 있어? 아니, 셋이네.”


샘은 모텔 룸으로 들어왔다가 카스티엘, 딘, 크라울리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기함했다.


“...”


“...딘, 나한테 ‘또’ 뭐 숨긴 거 있지?”


“별 건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운을 떼는 동시에 크라울리가 그 말을 가로챘다.


"오, 어찌나 별 일 아닌지 현기증이 나고, 혈관 속에서 뭐가 기어다니는 것 같고, 거울을 볼 때 가끔 눈이 까맣고?"


그러자 이어 카스티엘이 진지한 눈으로 샘을 돌아보았다.


"단지 한 때 미카엘의 성배였던 그 몸이 잠시 악마로 변했던 것 때문이다.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래, 괜찮게 하려고 저 크라울리와 이 카스티엘이 한 자리에 모였겠지.


인간 한 사람을 통한 천국과 지옥의 일시 화합이라니 기분 참 이상하다.


"그래, 어떻게 괜찮아지게 할 건데?"


"마침 이야기 중이었다. 나와 저... 지옥의 왕이 딘의 몸에 손을 대어서 미세하게 세부 조정을 하는 거다."


샘은 그 말에 꽤 그럴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마디씩 할 때마다 팔을 들어올리며 벌렸다.


"필요한 조건은 뭔데? 장소는?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날? 아니면 천사와 악마가 손을 잡는 날?"


"무스가 제법 다람쥐처럼 말하게 되었군."


카스티엘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조건은 없다. 다만, 내 은총이 잠시 몸을 떠나 있었던 것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빌려 힘을 주어야 한다."


"인간의 육체?"


"쉽게 말하자면, 섹스하는거야."


그 말에 딘은 듣고싶지 않았던 것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감쌌고 카스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위에 천사들이 더 있으면 세부조정이 더 수월할테니 몇 명 더 부를까 하고 있었다."


"...섹스라며?"


내가 아는 섹스는 보통 두 명이서... 아니면 가끔 셋이서 하는 그런 건데.


"인간의 성인용 비디오를 참고삼아 본 적 있다. 사람 여럿이서 나오는..."


"그래, 이런 애들 때문에 폭력적인 게임을 하면 아이가 폭력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고들 하지."


버진을 난교로 떼겠다니 와우 굉장해라.


크라울리가 고개를 저었다.


"캐스, 그 사람 여럿이서 어쩌구 저쩌구 한다는 그런 건 다 픽션이야. 사실이 아니라고."


"전에 피자 배달부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엉덩이를 때리는 영상을 보았다고 했더니 크라울리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너네 천사한테 야동 보여줬다며?"


히죽 웃는 그 얼굴이 얄밉기도 얄밉다.


천사가 마냥 순수하지 않고 예전에 대천사 한 명이 야동에 출연하는것도 봤다고 쏘아주고 싶었으나 그 천사랑 카스티엘은 너무 다르니까 차마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 아니, 못했다.


샘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까, 집중에 방해되면 안되니까 자리라도 비켜줄까? 아니면... 나도 참가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난 있는데, 주위에 이상한 게 꼬이면 안되니까 방호벽이라도 쳐 줘. 그 뒤에야 네 마음대로지. 저기 소파에서 보면서 자위라도 하던가."


심술궂은 크라울리의 말이 끝나자 딘이 손을 내저었다.


한쪽 손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다른 손을 흔들면서.


"...아냐, 새미. 그냥... 나가줘, 나가서 당구라도 한 판 치던가 술집에서 예쁜 아가씨랑 놀던가... 하다못해 어디 도서관에서 시간이라도 보내라고."


"왜, 또 무슨 일 있으면 숨기게?"


불쑥, 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현기증이 나고, 혈관 안에서 뭐가 기어다니는 것 같고, 눈이 가끔 검은색으로 변하는 걸 숨기는 것처럼?"


"...난 그게 별 일..."


"가족이잖아! 형이 그랬어, 가족이라고! 가족인데 그런 걱정도 하면 안 돼? 세번째 거야 잘못 봤겠거니, 혹은 뭐 부작용이려니 한다고 해도... 아니, 세 번째 것도 숨기면 안돼!"


형은 늘 이런 식이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겠다 싶으면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내가 죽을까봐 세 번째 시험을 받지 못하게 막고! 그러면서도 막상 자기는 이것도 비밀, 저것도 비밀, 자기가 뭐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즐거운 대화 중에 미안한데, 얘들아?"


크라울리는 딘의 뒤에 앉아서, 셔츠 자락을 들었다.


오늘은 어두운 남색 셔츠였는데 아래 보이는 하얀 허리가 모텔의 싸구려 불빛 아래에서 연한 주황색으로 드러났다.


"슬슬 그 짓 해야 하지 않겠어?"


샘은 거기 한 마디 더하려고 했지만 카스티엘이 입을 열자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하다."


샘은 딘을 노려보다가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성수와 성유, 소금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빅터와 헬레나의 한때 (알티이벤: 아드님)

2017. 6. 17. 21:36 | Posted by 호랑이!!!

마을 한가운데의 커다란 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간 늦을 것 같은데.

 

빅터는 조금 더 바람을 재촉했다. 그렇다고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각까지 앞으로 3.

 

얼마 안 있어 넓은 공터가 눈에 보였다.

 

공터에는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빅터의 파란 점퍼를 보고 아래에서 손을 흔들었다.

 

- -”

 

한 번 바람을 걷어차고 쾅, 내려가자 바로 앞에 헬레나가 서 있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웃음을 머금고.

 

어휴, 이 말썽꾸러기.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엄마 놀라잖니.”

 

나도 벌써... 아니, 저도, 벌써 열 넷이예요.”

 

다 컸다구요, 라면서 가슴을 내미는 빅터를 웃으면서 내려다보던 헬레나는 가볍게 그의 볼을 꼬집었다.

 

그래, 벌써 열 넷이네.”

 

벌써 이만큼이나 컸어.

 

헬레나는 빅터의 머리를 넘겨주고는 이제 가자며 앞장서 걸었다.

 

향한 곳은 유원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은 분홍색, 레몬 같은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유원지 안에서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유쾌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오늘 말이야, 빅터랑 만날 거라고 했더니 그 검은 머리 아가씨가 티켓을 주더라. 좋은 친구를 사귀었나 보구나.”

 

빅터는 티켓을 흔들며 앞장서는 헬레나를 좇아 가볍게 발을 공중에 띄웠다.

 

티켓을 내고 들어가자 마스코트 인형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친구야! 사진 한 장 찍지 않을래?”

 

나는 됐...”

 

빅터, 여기, 찍자!”

 

헬레나가 눈을 반짝였다.

 

빅터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마스코트와 헬레나 사이에 섰다.

 

자아 찍습니다~”

 

직원이 장난감같이 생긴 카메라를 들고 요란스럽게 손가락을 폈다.

 

하나~ ~”

 

빅터는 헬레나의 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위로 손을 올리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쪽으로 손을 올렸다가.

 

~”

 

내렸다.

 

헬레나는 그 자리에서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받고는 이리 오라며 빅터에게 손짓했다.

 

이것 봐~ 사진이 정말 잘 나왔단다. 나중에 한 장 더 찍어 달라고 해서 한 장씩 나눠가지자.”

 

웃지도 않는 얼굴이 뭐가 좋다고.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원지 지도를 들었다.

 

놀이기구를 타고, 점심도 먹고, 언제부터인가 빅터와 헬레나는 색색깔이 화려한 풍선을 들고 이상한 머리띠와 선글라스를 했다.

 

빅터가 이런 것은 낭비라고 말리려고 했지만 헬레나는 그 까만 머리 친구가 유원지 쿠폰을 주었다고 했다.

 

마를렌 그 녀석, 괜히 오지랖은.

 

마지막으로는 저 끝의 놀이기구로 날아가려고 했다가 안전요원에게 잡혀서 설교를 들어야 했다.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놀이기구가 여럿 있으니 날아다니다가 부딪히면 위험하다나.

 

그러고 다른 놀이기구로 도망쳤다가 타고 내려올 즈음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돌아가고 있었고 마지막이라며 관람차를 타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돌아가느냐, 아니면 관람차를 타러 가느냐,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다가.

 

빅터는 입구 쪽을 가리켰다.

 

노을을 등지고 마스코트 인형이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둘은 마스코트 옆에 나란히 섰다.

 

자아 찍습니다~”

 

마스코트는 양 팔을 뻗어 포즈를 취했다.

 

하나~”

 

빅터는 손을 올렸다.

 

아까처럼, 조금만 손을 올리면 잡을 수 있는 그 위치에 있는 헬레나의 손을...

 

~”

 

조심스럽게, 빅터의 손이 헬레나의 손에 닿았다.

 

!”

 

그리고 빼려는 찰나, 헬레나가 빅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번째로 찍은 사진은 빅터가 놀라 움직인 바람에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두 번째 사진을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3화

2017. 6. 6. 22:40 | Posted by 호랑이!!!

 

두 분 다 제정신이세요?”

 

학교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페드였다. 흉흉하게 노란 눈을 번뜩이는 페드의 뒤로는 갈색 날개가 위협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어쩐지 야단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페드의 책상 앞에 얌전히 가서 섰다.

 

학생이! 교수님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교수님이! 안된다고 하셨어야죠! 누구랑 세게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교수님은 다쳐요! 박살난다고!”

 

교수님은 지금 툭 치면 파스스 날아가는 상태!라는 주제의 잔소리를 한참이나 퍼붓는 페드에게 조심스럽게 녹스가 손을 들었다.

 

“...저기, 제가 싫어하는 분을 납치한...”

 

그래도 왕자님인데 제가 왕자님한테 잔소리를 하겠어요!? 왕자님은 거기에서 듣고 계세요!”

 

아니, 그렇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있어욧!”

 

왕자에게 소리를 빽 지른 페드는 이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장 선생님이 교수님한테 가끔은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 은 학교 뜰이나 도서관이라구요. 그나마도 안 나가던 분이 어쩌자고! 어쩌다가!”

 

“...잘못했어요.”

 

똑똑,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교실의 주인은 영 교수임에도, 페드의 머리가 180도 돌아갔다.

 

들어오세요!”

 

페드의 외침에 영은 모자를 손으로 더듬어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소위 엘프라고 부르는 넥투르 인이었는데 흔히 넥투르인이 그렇듯 큰 키에 몸은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게 유연하고 금색 귀걸이가 여러개나 귀는 뾰족하다. 피부는 어린 나무 같은 연초록에 길게 길러 땋은 머리카락은. 염색으로 새파랗다.

 

아안녕하세요-?”

 

늘어지는 목소리에는 짧은 휘파람 같은 넥투르인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 그는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와서는 페드와 영, 녹스를 번갈아가며 재미있다는 눈길로 보더니 천을 파는 상인처럼 손가락 끝으로만 가지고 온 목록을 집어 영에게 살랑살랑 흔들며 내밀었다.

 

! 루 란 교! 이 미친 녀석, 머리를 물들였어!”

 

안녕 페드, 오늘도 예쁘네.”

 

너네 어머니한테 다 이를거야! 머리를 온통 시퍼렇게 물들였다고!”

 

예쁘지?”

 

검은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려면 탈색도 했어야 했을 텐데, 너 머리카락 다 상했겠다!”

 

페드의 친구인가보다. 영은 교에게서 목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록에는 다음 학기 수업을 들을 학생들의 이름과 국적이 적혀 있었다. 하이어스, 라이비, 넥투르, 세인트... 역시나 비율은 하이어스가 제일 높다. 그럼 커리큘럼은 기존에 하던 것과 같이 하면 되고... 그러는데 손이 잡혔다. 녹스 쪽을 돌아보았지만 녹스는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영 교수님 안녕하세요오! 듣던 만큼 예쁘시네-.”

 

고개를 돌렸다가 영은 새까맣게 반짝이는 교의 눈과 마주쳤다. 교는 영의 손을 꼬옥 잡고 입술을 꾹 눌렀다.

 

하이어스에서는 이렇게 인사한다면서요?”

 

교수님, 교 말 듣지 마세요, 쟤 엄청 유명하니까요.”

 

페드는 얘가 바로 기숙사에 넥투르 식 주사위놀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라니, 밤중에 학생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교 연못에 마수를 풀어놓은 일도 말해야지.”

 

뭐어? 네가 했었냐!?”

 

영은 둘이 티격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안경을 고쳐 썼다.

 

둘이 친구는 맞죠?”

 

아뇨!”

 

맞는 것 같다. 씩씩거리던 페드는 잠시 후 진정하고는 소개를 해 주었다.

 

, 이 분은 영 필로이픈 교수님. 그리고 저 분은 녹스 라이비 왕자님. 교수님, 왕자님, 얘는 아까 들으셨다시피, 온갖 말썽과 사고를 다 일으키고 다니는 루 부족의 아들 교입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반가워- 요오,”

 

인사를 마치고 교는 영이 든 목록을 가리켰다.

 

교장 선생님이 3일 후에 개교인데 준비는 다 되었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3일 후라니.”

 

세월 참 빠르죠?”

 

당장 3일 후가 개교면 어떻게 해! 지금 수업준비가 아무리 커리큘럼을 그대로 쓴다고 해도 자료라던가 얼마나 해야 할 게 많은데! 영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체만체하고 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수업 말이예요, 아 교수님 손이 참 고우시네, 저는 장갑에 싸인 손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래의 미를 읽어낼 수... 수업 내용 중에 석판이 필요하다면 가져다 주시겠다고 교장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어쩌면, 눈도 참 맑은 색이시네... 최근에 영역을 다니시다가 우연히 몇 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 동굴을 하나 찾으셨대요. ...안경 때문인가 부드럽고 가냘파서 교수님이 마치 아기새의 솜털 같네요, 머리카락 색을 보고 싶은데 혹시.

 

녹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녹스는 누가 무어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남은 세 사람은 쾅 닫힌 문을 보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만 으쓱했다.

 

우리 엘리야, 키만 컸지 저렇게 가늘고, 말랐고, 바람만 불면 휘청휘청할 것 같은데...’

 

나단은 소파에 엎드려서 턱을 괴었다.

 

앞에서 엘리야는 비술서를 읽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요정이 장난스럽게 엘리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책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요정이 방해하는 것에도 꾸준히 비술서를 읽는 모습에 나단도 왠지 장난기가 돌아 살금살금 엘리야의 등 뒤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톡톡 잡아당기고, 밑으로 늘어진 옷자락도 들추고...

 

역시나일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단은 바닥에 엎드리는 척 하며 엘리야의 발목을 잡아 보았다.

 

, 한 손에 쏙 들어오네, 가늘어! 뼈하고 가죽밖에 없는 거 아냐?

 

어디어디, 다른 곳은 어떨까... 하며 나단은 엘리야의 어깨를 잡았다.

 

역시나 가녀린데다가 입은 옷도 겨우 얇은 천이라 더 가냘프게 느껴진다.

 

거의 매일같이 가죽이나 금속재로 된 옷을 입는 자신하고도 달라.

 

어깨를 만지작거리는데 손 위에 요정이 와 섰다.

 

뭐야 너, 저리 가.

 

입모양으로 벙긋거리는데 요정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나단의 손 위에 발을 탕탕 굴렀다.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이 어깨는 내 거야, 하고 손을 휘저었지만 요정은 다시 화르르 날아와서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깨물려고 덤빈다.

 

한참이나 파닥거리려는 때, 엘리야가 몸을 확 돌렸다.

 

너희 둘.”

 

우당탕,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넘어진 나단, 그리고 그 위에 나단과 똑같은 자세로 넘어진 요정.

 

이 작고 귀여운 두 명을 어쩌면 좋을까.

 

엘리야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둘 다.”

 

 

용사랑 연금술사가 나오는 이야기

2017. 6. 3. 00:36 | Posted by 호랑이!!!

A는 작은 판매대 뒤에서 감기약이 든 병을 찾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동전 몇 개만 내려놓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가 나가고도 문이 닫히지 않는다 싶더라니, B가 서 있었다.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안쪽을 흘긋거리다가 A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시선을 피한다.

 

오셨어요.”

 

“...안녕... 세요...”

 

B는 흔히들 용사라고 부른다. 마을을 괴롭히는 악덕 영주를 물리치고 괴물 멧돼지를 잡고 나쁜 용 따위를 토벌하며 음유시인들은 그의 무용담을 노래하는, 이 시대에서 용사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 사용하는 용사. B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A가 본 B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은 동네 청년 같았다. 검보다는 마른 풀과 갈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워낙 말수가 적고 목소리가 작다보니 들었다기에는 좀 그렇고 이해했다에 가까운 것을 따져보면 B는 그냥 동네에서 검을 잘 쓰기로 이름난 정도의 청년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용사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것 같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라고 말하기에는 벌인 일의 스케일이 크기는 하지만.

 

A는 장부에 감기약을 기입하며 선반 뒤의 B를 넘겨다보았다. 20분 전에는 상처약을 보고 있었고 15분 전에는 자잘한 마물을 쫓는 약을 보고 있더니 지금은 그저 라벤더 향이 나는 화장수를 보고 있다. 그것도 10분 째. 병에 붙은 설명은 물론이고 성분까지 외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A는 작게 키득 웃었다.

 

마법사분 드릴 선물을 고르시나요?”

 

“........”

 

아마도 긍정 같다.

 

AB와 함께 다니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머리가 길고, 안경을 낀 성격 좋은 사람. 머리카락이 기니까 관리를 도와주는 용품은 어떨까, 주문을 외워야 하니까 목에 좋은 약도 나쁘지 않겠지. A는 프리지아 한 송이를 장식한 비누를 꺼냈다.

 

이건 어때요?”

 

“..괜찮아......”

 

박하가 든 차는?”

 

.. .것도...”

 

B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데 정신을 더 팔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B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덥석 꺼내 내밀었다.

 

“...! ... 포크스 마을... 바실리스크 잡았을 때...!”

 

B가 내민 것은 커다란 송곳니였다.

 

“...구하기 어려운... 약재라고 들어서...”

 

저 주는 거예요?”

 

A는 송곳니를 받았다. 동시에 B의 얼굴이, 여전히 무표정이기는 했지만, 화악 밝아졌다.

 

귀엽다니까. 이 이를 갈아서 약이라도 만들어 주어야겠다.

 

그 때, 손 위에 무언가가 턱, 턱 얹혔다.

 

, 는 길에 꽃이 예쁘게 피었길래...!”

 

무슨 갑옷을 때렸더니 마석이...”

 

과일가게에서 하나 더 받았는데....”

 

이건 사탕가게에서... 신작...!”

 

...등등등.

 

A의 손이 무거워졌다. 물건이 너무 많았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B가 무언가를 또, 라며 내려놓자 와르르 물건이 쏟아졌다. AB는 허둥지둥 주저앉아 물건을 주웠다.

 

이것은 꽃, 이것은 장난감, 저것은 사탕, 보석.

 

마침내 두 명의 손이 뱀의 송곳니에 닿자 B는 화들짝 놀랐다.

 

어울리지 않게 단단하게 굳은살이 배긴 손을 빼지 못하게 잡고, A는 새빨개진 B의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 아니, B.”

 

약초를 말려둔 창가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좋은 차가 있는데, 한 잔 하고 가시겠어요?”

 

 

이거 2편 




“안녕, 예쁜 아가씨.”

 

가루다는 칼라인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검은 장막 숲이라 하더라도 이크살족의 마을과 이 그리다니아 시가지는 몹시 달랐기에 한껏 인간을 즐기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 아니, 에테르가 느껴졌다. 그 사람은 검은 머리를 맵시 있게 틀어올리고 옷은 건강미를 뽐내는 몸을 드러내며... 그제야 가루다는 깨달았다. 그 루가딘의 성별이 바뀌었구나. 비록 여전한 것은 그녀의 등에 매달린 커다란 도끼뿐이었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가루다는 그녀가 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자리 있어~?”

 

가루다가 앉은 테이블은 휴런과 미코테의 키에 맞춘 것으로 1인분 롤란베리 빙수와 한 잔의 오렌지주스가 놓여있을 뿐이었지만 가루다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거긴 치라다의 자리다.”

 

“여기는~?”

 

“거기는 수파르나.”

 

검은 머리의 루가딘은 그런 말에도 아랑곳않고 옆 테이블의 의자를 당겨 걸터앉았다.

 

가루다는 루가딘이 앉는 것에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으나 자리를 뜨거나 막지는 않았다.

 

“여기! 영양 스테이크!”

 

루가딘이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가 앞에 놓였다.

 

“다음번에는 림사 로민사에도 가지 않을래?”

 

“다음번은 없다.”

 

“내가 세 도시 중에서 제일 먼저 간 곳인데, 거기에는 레스토랑 비스마르크라는 곳이 있거든? 거기 자리에 앉으면 말이야, 옆으로는 새파란 바다가 보이고...”

 

새파란 바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건물. 항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돛단배.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 도끼나 쌍검, 비술서를 옆에 낀 모험가들과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는 색색의 카벙클, 빰빰 울음소리.

 

가루다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 도시에는 어떤 식물이 자라지?”

 

“거기?”

 

일단 여기보다는 적은데... 루가딘은 습관적으로 턱을 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아냐, 일단 도시에는 식물이 없어.”

 

“없단 말이냐?”

 

“적어도 도끼술사 길드에는, 응.”

 

그렇지만 말이야, 내 친구 중에 생선을 낚아서 구워오는 미코테가 있는데. 그 애 말로는 림사 로민사 도시 바깥에서 포도를 딸 수 있대. 포도가 뭐냐면 말이야, 어두운 보랏빛을 띄는 커다란 머루 같은 것인데... 루가딘이 말을 이을수록 가루다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기도 하고 눈을 굴리거나 감아서 떠올리려고도 했으며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생각했는지 찡그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문 바깥을 보니 해가 져 있었다. 다 녹은 빙수 그릇을 밀어내고, 가루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울다하 얘기 해 줄까? 내가 거기서 검을 배웠는데 말이야-.”

 

그렇게나 이야기에 빠져버릴 줄이야.

 

가루다는 고개를 팩 돌렸다.

 

“다음 같은 것은 없다.”

 

 

[고어 소재 있음] 사람 먹는 괴물

2017. 5. 7. 03:08 | Posted by 호랑이!!!


[모험가X가루다]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모 분에게

2017. 4. 23. 05:55 | Posted by 호랑이!!!

이크살 족이 불러낸 야만신 가루다는 거대한 태풍의 눈 속에서 반대편 끝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언제나 아이들에게 소환당해 이 자리에 불려오면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저 맞은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여럿 데려와서 나타나고는 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올 테니까 나타나고는 한다라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감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인간의 배 앞머리가 태풍을 뚫고 나타났다. 나는 또 저 인간들을 죽여야겠구나. 나는 신이라지만 결국 내 아이들의 소원에 매어 있는 존재이니까.

 

가루다의 눈은 자리를 잡는 그 인간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크살 족과 달리 인간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생김이 조금씩 구분되었다. 이것은 큰 것, 저것은 작은 것, 이것은 물고기도 아닌데 비늘이 달린 것, 저것은 짐승처럼 털이 달린 귀와 꼬리를 가진 것. 그리고 저것은...

 

가루다!!!!!!”

 

그것이다.

 

---하자!!!!!!!”

 

등에 거대한 도끼를 맨 거대한 루가딘 족 인간은 못잖게 커다란 목소리로 이 폭풍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 외에 찾아온 인간 중에 몇 명인가는 낯익은 얼굴이었고, 이제는 표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가루다가 인식하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질린 표정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두 번 다시는 올 엄두가 나지 않도록 갈기갈기 찢어 주마!

 

폭풍 안에 있던 돌탑이 날아가고, 두 명의 분신이 나타나고, 날카로운 깃털이 사람을 베고 찌르고 몸에 박히고. 처음에 찾아온 것은 인간 여덟이었지만 이제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게 된 인간이 반수가 넘었다. 몇 명을 더 죽이면 되는지 헤아려보던 가루다의 시선이 도끼를 든 루가딘에게 향했다. 그 루가딘은 피가 나고, 베이고, 바람 때문에 살이 갈라진 지금에도 처음처럼 눈을 번뜩이며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루다아아아!!!! 나를 봐라!!!!!!”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적었고, 가냘펐다. 저 루가딘이 얼마나 사납게 도끼를 휘두르던 그렇게까지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가루다는 땅으로 내려왔다. 발굽이 땅을 딛어 따각 소리를 내었다. 땅으로 내려와 무릎까지 꿇어앉았는데도 자신에 비하면 이 루가딘은 아직 작았다.

 

모험가여, 어째서 매번 찾아오느냐

 

네가 날 죽이면 나의 아이들이 염원을 담아 다시 나를 불러온다

 

죽여 나를 없애더라도 그것은 잠시 뿐, 더 강한 내가 돌아오는데도

 

말하라, 어째서 매번 찾아오는 것이냐

 

잠시 무기를 내려놓았던 루가딘은 가루다의 뒤를 보더니 다시 도끼를 들어올렸다. 가루다는 불러 두었던 분신과 깃털을 돌아보았다. 없다.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인간

 

하늘에 날아오르는 네 모습은 아름다우니까.”

 

가루다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는 숨이 미약했던 검은 털꼬리를 가진 인간 하나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일어서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이제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루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여느 때보다 활짝 펴고 발은 땅에서 떨어져 더 높은 곳에 둔다.

 

버러지 주제에!

 

죽어도 죽어도, 혹은 죽여도 끝없이 찾아오는 성가신 버러지 같으니. 지긋지긋하고 귀찮고 짜증나는 인간.

 

마지막 순간 가루다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에테르로 변해 흩어지는 감각은 이제 퍽이나 자연스럽다. 거대한 에테르의 순환 속으로 삼켜지기 전에, 가루다는 루가딘을 노려보았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너희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이다

 

아무에게나 언약을 외치는 엉덩이 가벼운 인간아. 그렇게 가루다가 노려보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은 그 루가딘은 사라지는 바람의 벽 너머로 보이는 비공정으로 향하다 멈췄다. 너한테 맞설 더 커다란 힘을 가지고.

 

또 올거야!”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이제는 인간 사이에서 집어낼 수 있는, 눈에 익은 인간.

 

가루다는 눈을 감았다. 무어라 할 말이 있었던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다음에도 볼 테니까.

 

 

[식칼님 용솬] 설정날조 판타지임

2017. 4. 22. 19:22 | Posted by 호랑이!!!

미코테족은 뚱냥이와의 관계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에오르제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뚱냥이나 고양이와 미코테족의 습성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때로 사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쉬운대로 고양이에 대한 책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미코테족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고양이의 습성이 적힌 책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며 놀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미코테와 가까우면서도 고양이의 습성이 적힌 책을 통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

 

고양이들이 몸을 부비는 것은 영역표시에 가깝습니다. 만약 당신이 목욕하고 나왔는데 고양이가 몸을 부빈다면...”

 

모세는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마물을 잡고 돌아와 샤워를 마친 요나가 보였다. 물에 젖은 것 때문인지 꼬리가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듯 양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이제 다 씻었는데. 모세는 슬금슬금 다가가서 요나의 옆에 앉았다.

 

요나.”

 

?”

 

혹시 요나는 샤워를 한 사람한테 가서... ... 머리를 기대거나 한 적 있어요?”

 

그러자 요나는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는 표정이 되었다. , 저런 표정까지 귀여워. 모세는 고양이의 습성에 대해 적힌 책을 꽉 쥐었다.

 

그런 건 고양이나 하는 짓이잖냥?”

 

... 그런가요, 역시?”

 

모세는 은근슬쩍 책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딘가 아쉬운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불 빨래한거냥?”

 

, , 오늘 날씨가 좋은 김에 해치웠어요.”

 

요나의 꼬리가 불만스러운 홱홱에서 흥미로운 살랑살랑으로 변했다. 그런가보다 하며 책을 꽂으러 가다가, 모세는 보았다.

 

한껏 가르랑거리며 요나가 두터운 이불 위에 엎어져 바르작거리다가 일어나는 것을.

 

머리를 기대는 것조차도 아니라고 하더니. 요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모세는 팔짱을 끼고 소파를 노려보다가 요나가 완전히 자리를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서는 아예 머리를 박았다.

 

"왜 너만...!”

 

그리고 마침 모세를 부르러 왔던 미리암은 그 꼴을 보고 말았다.

 

“...미리암... 요나가...”

 

모세는 여전히 소파에 머리를 박은 채로 웅얼웅얼 입을 열었고 미리암은 그 말을 칼같이 잘랐다.

 

적당히 좀 해라.”

 

 

엘리야는 침실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 깨끗한 방이다. 이불, 베개, 모두 하얀 색으로 맞추고 침대와 커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니까.

 

지나칠 정도로.

 

아까 연락이 온 것을 듣자하니 오늘 저녁에는 드디어 집에 나단이 온다. 2주 만에. 아무리 자신이 무덤덤하게 군다고 해도 2주 만에 집에 돌아오는 연인한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할 것 같단 말이지.

 

엘리야는 예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던 소설을 떠올렸다. 그 책에 따르자면 이런저런 것들은 분위기를 많이 띄워준다고 했지. 예를 들자면 술이라던가, 꽃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예쁜 옷 같은 거... 종종 마시곤 하는 얼린 칵테일을 꺼내 보자니, 엘리야는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요정을 불러 깽판을 치고 싶어진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꽃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올드 로즈를 사서 색색으로 물들이는 게 유행이라고 매점 주인이 보증해주었다. 장미를 적당하게 잘라 꽃병에다가 꽂아 놓고, 꽃병을 방에 두기 위해 협탁 위에 두었던 비술서도 간만에 치워 버렸다. 다음은 옷인가. 옷이 뭐가 있지.

 

옷장에는 옷이 몇 벌 있었다. 외출복, 잠옷, 평상복, 이건 던전 갈 때, 이건 늑대우리 갈 때 입는... 그 옷들을 다 젖혀 보니 그 아래에서 그래도 괜찮은 옷이 몇 벌 보였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서 잘 보면 비칠 것 같은 옷과 아예 적은 천과 끈으로 만든 것. 둘 중에 어느 것을 입느냐가 문제인데.

 

천이 적은 쪽? 천이 얇은 쪽?

 

아 이거 진짜 고민되네!

 

톤베리 스승님이 봤다가는 별 쓸데없는 걸로 고민 하는구나라고 말하겠지만 엘리야는 진지했다. 어떻게 하면 활력 수치가 높은 애인을 침대로 꼬드기면서도 지나치게 흥분시키지 않아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지 않게 할까. 한참 고민하던 학자는 끈을 집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아니, 한낮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오후.

 

나단은 이미 일어나 있었는지 엘리야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좋은 아침, 학자!”

 

“...넌 이게 아침으로...”

 

, , 학자는 목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쇳소리가 났다. 팩 하고 노려보자 나단은 무슨 일 있냐는 듯 활짝 웃는다. 내가 못 살아.

 

일어나서 나 놀랐지 뭐야! 방안에 꽃이 있었어! 이거 그거지? 요즘 유행하는 올드 로즈?”

 

학자가 일어나 앉자 몸에서 얇은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깜짝 놀란 전사는 양 뺨을 잡고 있었다.

 

... 옷이...!”

 

“..., 옷이.”

 

야해....!”

 

뭐야, 못 봤나.

 

입은 보람이 없구만.

 

학자, 엘리야는 짧게 한숨을 쉬고 차를 마시려고 했다.

 

전사가 달려든 덕분에 다 쏟아버렸지만.

 

 

[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2화

2017. 4. 15. 02:12 | Posted by 호랑이!!!

 

씻고, 안경도 닦고, 모자에 외출복까지 입고, 영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늦어요, 교수님.”

 

미안해요. 백년만에 외출한다고 생각했더니 좀 힘이 들어가서.”

 

백년이요?”

 

“‘은 많다는 뜻이예요. 오랜만에 외출한다는 의미죠.”

 

앞으로 제 수업을 듣는다면 문서에서 자주 보게 될 표현이니까 미리 외워두는 게 좋아요, 라고 영이 말했다. 확대경을 끼고 고문서를 보는 페드를 조용히 지나치고 복도와 계단을 내려가서 3층 반. ‘교수님이 저를 보는데도 씻지 않다니 충격적이예요라고 투덜거리는 학생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복도와 계단을 걸어 내려가서 3. 또 쉬었다가 내려가서... 녹스는 화려한 창문을 확 열어젖히더니 영을 덥석 잡았다.

 

갑니다, 교수님!”

 

으아아아아아!!!”

 

 

 

 

 

 

 

 

영은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거리를 걸었다. 발 아래에 닿는 돌로 만든 거리,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가고 여기저기에서 구운 빵이나 설탕 향기가 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아이들이 지팡이에 달아 장난하는 용도의 빛나는 작은 고리나 비눗방울이 뿜어져 나오는 기계, 던지면 일정 거리를 날아서 되돌아오는 새 인형에... 화려한 천막 아래의 가판대에서는 최근 유행한다는 찻잎과 과자와 음료수와...

 

저 과일 얼음 주스 하나 주세요.”

 

교수님?”

 

, 하나 더요. , 녹스 학생. 한 잔 받아요.”

 

녹스는 영이 건네는 음료수를 받았다. 아까 과자가 한 봉지, 어포가 한 봉지, 납작하게 구운 빵이 또 한 봉지에 아까는 설탕을 넣은-비록 꿀을 넣었다고 홍보하고 있었지만- 우유 음료수, 방금은 과일을 여럿 넣었다는 주스와 꽃을 이용한... 여하간 보이는 족족 다 사고 있으니. 마치 어린애에게 돈을 쥐어준다면 이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녹스는 영이 또 사탕을 두 봉지 사려는 것을 말렸다.

 

교수님, 저는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길에 이런 거 있으면 먹고 싶잖아요? 괜찮아, 이 교수님은 돈 많... 앗 저것 봐요! 저 사탕은 물고기 모양이예요.”

 

안 돼요, 교수님.”

 

색과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 사탕 가판대로 달려가려는 교수를, 라이비의 왕자인 녹스가 잡았다.

 

녹스 학생도 저거 신기하지 않아요? 굳이 먹지 않더라도 갖고 싶죠? 그렇죠?”

 

사탕 장인을 불러서 용 모양도 만들게 할 수 있는 녹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교수님. 사 올 목록에 있는 물건부터, 다른 물건은 그 다음에! 소비는 계획적으로!”

 

소비는 계획적으로! 녹스는 쌓여있는 메모지에서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집었다.

 

보세요, 여기 스콘도 사러 간다고 적혀 있잖아요? 이제 과자도 장난감도 그만입니다.”

 

저거 하나만 더...!”

 

지금 손에 들린 사탕이랑 과자 많지 않습니까? 그거 다 먹기 전에는 안됩니다.”

 

그럼 저 구슬 다발이라도! 저거 방 창문에 걸어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끌려가다시피 해서 영은 거리를 다시 걸었다. 바작바작 납작한 빵을 깨물면서 기억을 더듬고 거리를 걸어 모퉁이를 돌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꽃집 앞에서.

 

“...이상하다...?”

 

여기가 아르시호 입니까? 스콘을 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게, 내가 알던 아르시호는 차 향기가 은은하게 나오는... , 실례합니다! 혹시 아르시호가 여기 있지 않았나요?”

 

아르시호? 그 가게 주인이 3년 전에 고향으로 간다고 하던데?”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은 영의 모자를 흘끔 보았다. 녹스는 3년이라는 말에 그 꽃집과 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얼마 만에 나오신 거예요?”

 

“...3... 하고 반...?”

 

지팡이를 들어 아르시호/스콘이라고 적힌 쪽지를 톡톡 두드리자 쪽지는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타 사라졌다. 비슷한 일이 찻잎을 파는 가게, 일용품점에서도 있었고 결국 영 교수가 들고 있던 종이 다발은 전부 불타 없어졌다. 녹스는 수첩과 지팡이를 들었다.

 

“...아까 필요한 게 뭐 뭐 있었죠?”

 

끝났어.... 틀렸어요... 아무것도 없이 갈 거야... 장난감이랑 사탕이랑 음료수만 들고...”

 

찻잎 있었죠? 라투스 찻잎.”

 

...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애용하던 고급 찻집은 없어졌어요...”

 

“3년 반 동안 오지 않은 곳은 애용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찻잎, 다기 세트, 새 옷, 깔개, 접시 등을 메모한 녹스는 이 쪽이라며 앞장섰다.

 

어디로 가는 거죠?”

 

왕실 납품점에 갑니다.”

 

3시간이나 거리를 걸어다닌 영과 녹스는 길거리 과자와 장난감을 들고 왕실 납품점으로 들어갔고, 30분 만에 나올 때는 필요했던 물품 외에도 푸딩을 한 상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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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프롤+1화

2017. 4. 8. 11:15 | Posted by 호랑이!!!

대부분의 유행은 권력에서 나온다. 현재 인간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하이어스 왕국이 만든 유행은 긴 머리가 고귀하다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긴 머리를 결 좋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아무리 낮은 계급이더라도 머리를 기르는 것이 당연, 머리로 보일 수 있는 가장 반항적인 모습은 열을 가해 굽슬거리게 만들거나 약품을 써서 염색을 하는 일이다.

하이어스 왕국이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이유는 첫 번째로 모든 왕국이 가담한 대전 때 평화 조약을 맺게 하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모든 나라의 학생들을 받는 평화의 탑이라는 학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 교수가 사는 곳은 교실과 연결된 작은 탑이다. 생활하는 공간은 그 탑에서 교실 앞 연단까지. 낡은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바깥을 내다보면 학교에서 봄을 맞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다니고 있다. 어쨌거나 봄과 가을은 농번기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돌려보내고는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이나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학을 맞고는 했는데, 영 교수가 바깥을 내다보면 키가 큰 수렵민족인 소위 엘프나 등에 날개가 달린 세인트 사람 등이 활짝 핀 꽃나무 가지 위에서 놀고 있었다.

좋을 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틀을 툭 툭 치자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그 학생들과 몇 살 차이나지 않으면서도 영 교수는 마치 한참이나 젊은 사람들을 대하듯 생각했다. 그를 상념에서 끌어낸 것은 밝은 목소리였다.

 

교수님! 저 왔어요!”

 

어서와요 페드.”

 

라이비 출신 유밀(세인트 외의 수인을 총칭)인 페드는 영 교수 아래에서 연구하는 학생으로, 노란 눈에 갈색 털과 부엉이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다량의 연구자료와 간식인 사탕을 한 병... 영 교수의 눈이 페드를 이어 들어오는 검은 머리 유밀에게 멎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학생인데 이제 2학년인가요?”

 

자료와 간식을 다 정리한 페드가 폴짝 앞으로 뛰어나왔다.

 

소개합니다! 녹스 학생, 이 쪽은 역사학의 권위자인 영 필로이픈 교수님. 교수님, 이 쪽은 라이비의 왕자인 녹스 라이비님이예요. 중간성은 생략! 오는 길에 자료 들어줬어요.”

 

유밀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악마 이미지에 들어맞는 사람은 또 처음 보았다. 머리는 검고 눈은 노랗고, 머리에는 염소의 뿔, 등에는 검은 박쥐 날개에... 혹시 저 뒤에 있는 건 꼬리인가? 영 교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녹스 역시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인사했지만, 그의 시선은 영 교수의 머리에 있었다.

 

손이, 참 크네.

 

갑작스레 다가오는 손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의 손이 모자에 닿자 영 교수는 뒤로 확 물러났다. 손가락에 걸린 것인지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석영 조각이 우수수 흩어졌다, 영 교수는 선뜻해진 목덜미에 잠시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무슨 짓이예요.”

 

죄송합니다. 모자에 벌이 붙어 있어서.”

 

영 교수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서는 석영 조각을 털지도 않고 머리에 푹 눌러 썼다. 손가락을 들어 원래는 짙은 밀 색이었지만 어느샌가 끄트머리가 투명해진 머리카락에 대롱거리는 석영 조각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을 하세요. 벌 정도는 제가 떼어낼 수 있으니까.”

 

영 교수는 펜을 들어 양피지에 작은 진을 그렸고 진에서 튀어나온 마법이 바닥에 흩어진 석영을 한데 쓸어모아서 난로 속에 던졌다. 녹스는 다 쓴 진을 지우는 교수를 내려다보다가 그가 사용하는 책상에 한쪽 팔을 얹었다.

 

요정 같았어요. 교수님이.”

 

요정이요?”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지고, 머리도 반짝이고, 피부도 반짝여서 날개만 달아주면 날 것 같았어요.”

 

그의 말에 교수는 아, 하더니 웃었다. 얇은 장갑을 벗자 손이 드러났는데, 손가락 끝부터 한 마디 반, 혹은 두 마디 정도가 투명한 수정으로 변해 있었다.

 

저는 결정병을 앓고 있거든요.”

 

몸의 끝부터 천천히 광물로 변하는 희귀병. 머리카락이나 작은 피부 조각 등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스러져 떨어진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서야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교수는 목에 천으로 만든 보호대를 차고 있었구나. 목이 결정화되면 떨어질 테니까.

 

요정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요. 머리가 짧아서 안됐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려요. 교수님은.”

 

 

 

=====

 

 

 

참 별스런 아이라곤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녹스는 페드와 함께 교수실을 찾았다.

 

또 왔네요.”

 

방학이라 할 게 없거든요.”

 

예습이라도 할래요?”

 

아뇨, 그건 됐고...”

 

뒤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페드가 있었지. 영 교수는 목을 가다듬었다.

 

페드, 잘 되어 가나요?”

 

네 교수님! 무지무지 잘 되고 있습니다!”

 

방해하면 안 되겠네, 영 교수가 웃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녹스에게 속삭였다.

 

차 한 잔 마실래요? 내 방에 맛있는 차가 있는데.”

 

영 교수의 작은 방에는 정말로 작은 난로와 1인용 테이블, 의자 하나, 또 흔들의자가 하나 있었다. 녹스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영 교수는 찬장에서 색이 다른 잔 두 개와 찻주전자를 꺼냈다. 찻잎 병을 꺼내고 영은 고개를 젓더니 옆에 놓인 종이에 찻잎, 을 썼다.

 

찻잎이 다 떨어졌네요. 코코아도 괜찮나요?”

 

녹스는 일어나 찬장 옆에 붙어있는 메모지를 보았다. 잉크가 바랜 것, 종이가 바래고 납작해진 더미 맨 위에 찻잎, 이라고 적혀있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이건 다 뭐예요? 새 깔개, 찻잔 세트, 설탕, 소금, 새 옷, 카페 아르시호의 스콘, 면 요리...”

 

물건이 떨어지거나 할 때마다 적어 놓는 거예요. 시간이 좀 나면 나가서 사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전부 미뤄지고 있네요. 매번 페드에게 시킬 수도 없으니까요.”

 

교수님 한가하잖아요.”

 

한가하지는 않아요.”

 

매일 책도 읽고, 커리큘럼도 짜고, 페드 연구도 봐 주고, 논문도 쓰고, 해석이랑 연구도 하고... 녹스는 하나씩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는 것을 잘랐다.

 

제가 올 때마다 창 밖 구경만 하고, 저한테 시간도 매일 내 주시잖아요.”

 

하루에 다섯, 여섯 시간 정도. 회중시계로 시간을 가늠해보는 모습에 영의 시선이 변명할 거리가 어디 방 안에 쓰여 있기라도 한 듯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 건 그렇지만.”

 

그럼.”

 

결론은 났다는 듯 녹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러 갈까요!”

 

사다 주겠다고요?”

 

아뇨, 학생이 돈이 어디있어요?”

 

너 왕자라며!

 

녹스는 영의 모자를 고쳐 씌워주더니 은으로 도금한 지팡이를 까딱해서 탑의 문을 열었다.

 

, 나갈까요.”

 

아니, 무리야.

 

영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마치 2년 내에 죽을 것 같은 기분이예요.”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까 그렇죠. 걷는 게 힘드시다면 업어드릴 테니까 나갑시다 교수님.”

 

, 나가려면...!”

 

이것만은 정말 말하기 싫었는데, 라는 표정으로 영이 입을 열었다.

 

씻어야 한다구요!”

 

전혀 예상외의 말이라, 충격 받은 표정으로 녹스는 입을 닫았다.

 

“...교수님.”

 

!”

 

사람을 만날 때도 씻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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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딘] 단편

2017. 4. 5. 17:30 | Posted by 호랑이!!!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군.

 

딘이 생각했다.

 

더러운 커튼, 묘한 냄새가 배긴 이불, 어젯밤 먹다 남긴 팝콘 조각에 김빠진 맥주.

 

보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진 텔레비전.

 

지루해 죽을 만큼 똑같다니까.

 

그리고 눈을 뜬 딘은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저절로 벌어졌다.

 

“...지루해서 죽었나?”

 

아무리 인간이 약하다지만, 너는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

 

딘은 옆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깨끗한 커튼이 바람에 날리고 이불에서는 햇빛을 담뿍 먹인 냄새가 났다.

 

어젯밤 먹다 남은 흔적 대신으로는 식욕을 돋우는 베이컨과 달걀.

 

심지어 식탁에는 장미까지 물컵에 꽂혀 있다.

 

“...아니, 난 역시 죽은 거야.”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런 때 천국이라고 감탄할거라고 생각했다.”

 

옆을 내려다보았더니 낯익은 천사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손깍지를 낀 채 누워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말을 전하러 왔는데 네가 아직 자고 있기에 조금 방에 손을 대었다.”

 

천사의 신성한 손을 모텔 한 칸을 청소하는 데 썼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한 천사는 여전히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참 신기하고, 또 멋진 일이다.”

 

딘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너를 볼 수 있다.”

 

딘은 거울 속의 자신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참으로 멋진 일이라며 감탄하는 카스티엘에게, 절대로 천장에 달린 거울의 용도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