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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3

2018. 5. 29. 18:05 | Posted by 호랑이!!!

초록이는 눈을 떴다.

 

아침의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바깥임에도 오후나 된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서는 줄리아나와 만두가 자고 있었는데 만두의 뜨뜻함이 싫은지 저리가... 라는 잠꼬대를 하고 있음에도 만두는 더 줄리아나에게 파고들었다.

 

인났나.”

 

그리고 예란이는 오프라인으로 게임을 한다.

 

또 제대로 자지 않았는지 책상 위에는 탄산 캔이 나뒹굴고 있었고 가운데는 자주색 천을 펼쳐 카드를 늘어놓았다.

 

이 카드는 초록이도 자주 본 것으로 투박한 그림이 특징일 뿐인 평범한 카드였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은은한 빛이 나고 있어서 쳐다보고 있자니, 예란이가 말을 걸었다.

 

한 장 골라 볼래?”

 

아무거나?”

 

그래.”

 

초록이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예란이가 매일 하는 평범한 오늘의 운 점치기겠지.

 

그런데 손을 대는 순간 카드에서는 팍 불꽃이 튀더니, 따끔함에 놀라 손을 잡는 순간 은은한 빛이 꺼져 버렸다.

 

?”

 

아아?”

 

“....뭐야!!!! 이거!!!!!!”

 

무슨 일이옹!”

 

만두는 불빛이 사라진 카드를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냐아아앙!!!!”

 

초록이는 안절부절 못 하다가 옆에서 머리를 감싸쥔 예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뭔데... 미안해.”

 

아니... 이게 니 잘못은 아닌데...”

 

초록씨, 혹시 평소랑 다른 점은 없었옹?”

 

그러고 보니, 카드에서 약하게 빛이 반짝반짝 했는뎅.”

 

예란이는 카드를 모아 정리하다가 그 말을 듣고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큰 일이야?”

 

난 씻고 올 테니까 줄리 좀 깨워줘.”

 

응야.”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초록이는 줄리아나를 흔들었다.

 

줄리, 일어나.”

 

으엉..... 몇 시야....?”

 

“6. 그런데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란이 카드 때문에 그래.”

 

카드으...?”

 

줄리아나는 눈을 뜨더니 머리맡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다.

 

네모난 안경을 끼고 몸을 일으킨 줄리아나는 책상 위에 놓인 카드 뭉치를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아하...”

 

이거 귀찮게 됐네. 줄리아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옷장을 열어 불편해 보이는 외출복을 꺼냈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는 거야?”

 

우리 다 같이 마법계로 가는 거야아. ...가기 싫다, 정말.”

 

사실은 마법계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마법사들이 사는 도시지만 마법계라고 말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우려나아? 라며 줄리아나가 웃었다.

 

셋이 준비를 마치고 예란이 만두에게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높은 옷장 위로 올라갈 때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쭉 펴는 순간 만두는 사라졌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초록이의 눈이 빛났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카드 때문이야?”

 

그런 것도 있고.”

 

카드에서 나오던 그거 마력이거든, 내가 빙의시킨 마물에서 나오는 빛. 그런데 네가 그게 보였잖아.”

 

보이면 안 돼?”

 

그걸 볼 수 있는 건 마법사들 뿐이니까.”

 

정정.”

 

갑자기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초록이가 고개를 들자, 이 쪽을 엄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또래의 사람이 있었다.

 

!”

 

오랜만이야.”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향이라는 사람은 창문 너머에 있었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쟤는 마법사라고 할 수는 없지. 그냥 마력이 마법사 수준으로 생긴 것 뿐이니까.”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커다란 가마가 있었고, 향이 문을 열듯이 벽을 열어 예란이와 줄리아나, 초록이가 타도록 했다.

 

가마 안쪽은 푹신한 쿠션이 있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자 벽면에서 주스와 과자가 담긴 선반이 튀어나왔다.

 

이것 좀 먹어, 다들 아침 안 먹었지.”

 

고마워.”

 

주스를 컵에 따르는데 향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이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왠지 내가 얘 기억을 없앤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

 

이번에 가게 되면 너 회의에 부쳐져.”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저 사람을 좀 조사해야겠어.”

 

얼마 안 있어 가마 문이 열렸다.

 

그러니까 너희 둘은 집에 인사드리고 와.”

 

향은 예란이와 줄리아나를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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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8

2018. 5. 19. 00:20 | Posted by 호랑이!!!

 

헨리 제임스 헤일로, 통칭 얀은 서재로 돌아와 가장자리에 금박이 들어가 화려한 편지지를 찾았다. 옆에는 짙푸른 봉투를 하나 놓고 황금색 초와 용이 새겨진 도장을 꺼내놓고 펜을 들었는데 다니엘이 잠시 짐을 챙기러 간 잠깐 사이에 쓰려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래서 저희는 세이렌의 설득을 실패했습니다. 이 일은 여기서 그만...”

오빠!”

문이 쾅 열렸다. 그 너머에 있던 것은 로잘린 레이첼 헤일로, 자신이 만들어낸 듯한 켄타우로스의 등에 타고 있었다.

로즈, 집 안에서는...”

켄타우로스를 만들지 않는다, 알지만!”

그리고 숙녀는...”

오빠 또 나만 두고 가려고!”

얀은 방금까지 쓰던 편지를 손으로 덮었다. 켄타우로스는 로즈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고 로즈는 얀에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다니엘 오빠가 말해줘쪄! 플로라 공주님한테 갈 거라고!”

만약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귀찮음에서 해방되고, 로즈한테도 널 놓고 가려는 게 아니고 그냥 안 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 여행 안 가도 되고, 그 끔찍한 마차도 안 타도 되고. 그렇지만 나중에 또 여왕님이 어떻게든 가라고 보낼 수도 있고, 공주님도 점검차 한 번은 보러 가야 하기는 하고. ... 하면서 머리를 굴리는데 듀크 단이 돌아왔다.

준비 다 됐다.”

아니, 그게.”

!”

로즈의 손에 분필이 들려 있다.

“...다 같이 가자.”

켄타우로스는 희미한 유황 냄새를 내더니 익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판달루치아를 보던 얀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둘이 친해졌군.”

아니야!”

그렇지?”

헬렌은 갔나?”

그 인간은 몇 시간 전에 갔다.”

크게 한숨을 쉬더니 얀은 금박이 있는 편지지를 물에 담갔다. 책상 서랍을 열어 꺼내놓았던 짙푸른 편지봉투를 정리하고 새로 골라서 꺼내면 아까 꺼내두었던 것 못잖게 진한 청록색 봉투와 은박이 들어간 편지지가 책상 위에 오른다. 시험 삼아 펜을 몇 번 긋고 얀은 글을 써내려갔다.

플로라 폰 우드 공주님께. 헨리 제임스 헤일로 자작이 인사드립니다. 연락을 몇 주 전에 드리는 것이 예의임을 알고 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급박하게 서신을 보내오니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 몇 가지 인삿말을 더하고 잘 접어 봉투에 넣은 뒤 인장을 눌러 찍은 뒤 고개를 들자 얀은 방 안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야호! 플로라 공주님한테 간다!”

드디어 할 마음이 들었나보군!”

또 무언가 기뻐하려는 판달루치아를 툭툭 건드리고 얀은 편지를 내밀었다.

뭐야?”

이걸 플로라 공주님한테 배달. 위치는 그린 영지. 까만 눈에 녹색 머리카락인 사람이니 찾기는 쉬울 거다.”

귀찮은 녀석. 판달루치아는 입모양으로 투덜거리더니 편지를 쥐었다. 문을 열고, 나가서 닫았는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문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유황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다들 분주하게 짐을 싼다 어쩐다 해서 다음날 아침 로즈는 잠을 못 잔 티가 나는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마차 앞에 섰다. 그리고 또 날아다니는 마차를 타는 끔찍한 시간을 보냈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자그마한 궁의 앞에 내리게 되었다.

여기에 공주님이 계신다고?”

단이 궁을 보자마자 한 첫 번째 말이다. 벽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고 물감이며 은을 녹인 것으로 기둥에 무늬도 넣은 데다 둥그스름한 지붕에도 장식을 한 것인지 가장 높을 때의 태양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온 벽과 물건에 새며 나무, 사슴들이 우아하게 양각되어 있고 사용한 재료도 전부 내외국을 따지지 않은 고급품들. 이 정도의 건물은 과연 공주라는 사람이 가질 만한 물건이기는 한데. 너무 작지 않나.

잘 왔다, 오랜만이구나 모두들.”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얀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고 단도 후다닥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면 그 곳에 있는 사람은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듯 흘러내린 순한 인상의 사람이다. 놀랍게도 장식은커녕 레이스 한 자락도 달리지 않은 간소한 옷차림인데다 발은 맨발이었지만 가장 눈을 끄는 것은 플로라를 태운 커다란 사슴이다. 사슴이 무릎을 굽히자 플로라는 미끄러지듯 땅에 내려섰고 몇 번 박수를 치자 너구리가 바구니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원래라면 테이블에서 차를 마셔야겠으나 이 집에는 부릴 사람이 없으니 부디 이것으로 만족해다오.”

바구니 안에서 나온 것은 널찍한 천이었는데 새들이 귀퉁이를 물어 풀밭에 넓게 펼쳤고 깨끗해 보이는 접시와 찻잔이 그 위에 놓였다. 플로라는 손수 찻주전자를 잡았다가 파득 놀라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 뜨거워!”

괜찮아요?”

로즈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그 안에서는 녹색 동그라미가 있는 간호모를 쓴 간호사가 솟아났다. 간호사가 플로라의 손을 찬물로 식혀주는 동안 로즈의 메이드가 사람들에게 차를 따르고 간식을 꺼냈다. 얀은 플로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플로라의 곁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너구리며 저만치 떨어져서 지켜보는 대형 동물로 시선을 옮겼다가 생긋 웃었다.

좋아 보이는군요, 공주님.”

얀 오빠, 공주님은 지금 손가락을 다쳐, , 다구요!”

그 말에 플로라는 하얀 찻잔을 잡은 로즈를 내려다보았다.

로즈는 내 모습이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하다니, 어디가요?”

플로라가 얀에게로 시선을 보내자 얀은 미소띈 얼굴을 한 번 기울였다.

로즈는 어렸으니까요.”

로즈도 잘 컸군.”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성공을 축하하는 말과 격려를 건네려는 찰나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숨기려들지 않는 가죽 날개와 한 쌍의 뿔이 돋은 잘생긴 얼굴은 낯익은 것.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걸맞지 않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곤 하는 그 얼굴은, 로즈를 보자마자 활짝 밝아졌다. 아이답게.

어서와, 로즈!”

여긴 판의 집이 아니에요.”

로즈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플로라의 옆에 있던 너구리는 로즈가 내미는 비스킷을 찻물에 담가 씻고, 또 받아 씻고, 씻고 있었는데 플로라가 헛기침을 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즈, .”

?”

숲에 가면 꽃이랑 딸기가 많이 있으니까 가서 놀다가 오렴.”

플로라는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메이드가 가지고 온 작은 바구니에 과자와 차 한 병을 담은 것을 내밀자 로즈와 판은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갔다.

저 둘만 가기에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사라진 쪽을 보던 단이 묻자 마악 차 한 모금을 마신 플로라는 잔을 내렸다.

이 숲에 있는 한 괜찮아.”

나는 이 숲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있느니라, 하고 말하는데 얀이 손을 들었다.

그럼 이제 온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얀과 단은 설명했다. 세이렌의 부탁, 푸른 아이들, 여왕님의 명령이며 모든 것을. 그 이야기를 들은 플로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

플로라 공주님.”

가기 싫다.”

왕족의 반열에 오르셨는데 한 번은 가셔야지요.”

사람은 싫다, 귀족은 더더욱 싫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단은 그들의 주위에 기척이 늘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척은 호의적이지 않는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아서 습관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 하자 얀이 그 손을 눌렀다.

우드는 이미 나를 버렸다. 나는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만 사는 것이 소원일 뿐,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아니하다.”

우드의 사람들을 나쁘게 보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이렌과 여왕님을 생각해주십사 합니다.”

나는 우드를 공작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더는 할 말 없다.”

원하신다면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애당초 가족 때문에 괴로워본 적 없는 자가 가족 때문에 괴로워지는 마음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다니엘은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옆의 헨리는 케이크에 포크를 꽂아 넣을 뿐 조금도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기에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다니엘 자신뿐인 것 같다.

우드 공작, 공작의 남편, 그들의 아들과 딸을 모두 치우면 됩니까?”

헨리,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돼.”

나는 진지하다니까. 공주님의 문제가 그걸로 해결된다면 나쁘지 않잖은가?”

안돼와 돼 뿐인 말을 하는데 플로라가 손을 저었다.

조용히 좀 해 보아라. 누구 하나는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나.”

어째서 살려두려고 하시는 겁니까?”

공작의 다른 귀찮은 일을 떠맡아야 하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플로라는 오히려 안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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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냐.”

 

안녕, 우리 또 만났네?”

 

단단한 빙하는 어부 길드 앞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만났다.

 

봄처녀 드레스에 꽃이 달린 넓은 밀짚모자를 쓴 세 사람은 자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 있었으나 단단한 빙하의 앞을 가로막고 노려보는 것을 보자면 자매라기보다는 주종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언니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이 벌레!”

 

무엇 때문에 이리 오는 것이냐, 먹이를 구하러 가든 짝을 찾으러든 가란 말이다.”

 

심지어 둘이 팔을 벌리고 막아선 것을 보자니 꼭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키는 것 같으니 원.

 

예를 들면 멧돼지 같은 걸로부터.

 

우리 길드장님은 도끼로 마빡을 쪼개라고 했지만.

 

아무튼 이러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거기 아가씨.”

 

기껏해야 바람신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달려가서 포옹하고 윙크하고 손 키스하고 또 뭐더라, 아무튼 그런 것밖에 안 했는데 말이야.

 

날씨도 좋은데 나랑 차 한 잔 어때?”

 

그러자 치라다와 수파르나는 캬악 소리를 냈다.

 

무례하다, 이놈!”

 

언니, 이런 녀석의 말은 들을 것도 없습니다.”

 

아웅다웅 하려는 때 선장이 끼어들었다.

 

이 배는 코스타 델 솔로 가는 배다. 갈 거면 얼른 타라고!”

 

가루다와 둘, 그리고 단단한 빙하는 조그만 배에 올라탔다.

 

돛을 불룩 부풀게 할 정도의 순풍이 계속해서 불었고, 선장은 이맘때에는 이런 바람이 불지 않는데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라다는 투명하게 빛나는 바닷물 아래로 보이는 수십 가지 산호초와 물고기들, 커다란 상어에 금방 시선이 팔렸고 상어가 배 옆을 지나가자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선장에게 제지당했다.

 

순식간에 항구에 도착한 배는 멀미로 고생하는 모험가들을 한 무더기나 쏟아냈고 가루다는 치라다와 수파르나를 데리고 사뿐하게 판자 위로 올라섰다.

 

아가씨, 이제 어디로 가?”

 

코스타 델 솔에 오면 게게루주라는 벌레에게 가 보라고 그러더구나, 그리로 갈 예정이다.”

 

뭐어? 누가 그런 말을 해?”

 

안경을 쓴 털꼬리 달린 것이 그러했다.”

 

게게루주 옆에 있는 그 사람인가.

 

그런 사람에게는 가는 거 아니라며 단단한 빙하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어디로 가고 싶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좋으니라.”

 

그리고 아마 바다에서 놀 만한 곳이겠지.

 

남의 눈이 쉽게 닿지 않을 장소라면 숨겨진 폭포가 있겠지만 거기에는 항상 호젓한 산골자기가 폭포 물을 맞고 있고, 그 앞에 있는 정자에는 항상 미코테족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다.

 

커다란 에테라이트를 지나고 바위가 깎여나간 아래로 한참이나 걸어서 데려간 곳은 흰 갈매기 탑 아래쪽 해안가.

 

이 즈음이면 괜찮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야만신과 그 분신은 옷과 모자를 벗어던졌다.

 

이 텐트 같은 것 정말 귀찮았느니라!”

 

귀찮았습니다-”

 

치라다는 첨벙 물에 뛰어들었고 수파르나는 모래 위에 돗자리를 깔고 커다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에서는 영원한 소녀 주점이나 레스토랑 비스마르크에서 사온 것이 분명한 다과와 차가 나왔고 가루다가 손짓하자 수파르나는 단단한 빙하 쪽을 힐끔힐끔 보았지만 결국 치라다를 따라 물에 들어갔다.

 

날씨는 정말 좋아서 바닷물은 햇빛에 반짝이며 바닥의 모래알까지 투명하게 비추었고 부드러운 모래에 달구어진 바람이 이국적인 꽃향기를 품고 몸에 감기는데다 이따끔 웃음소리가 들릴 때면 커다란 파도가 두 분신을 덮치며 부서졌다.

 

물이 짜! 라던가 깃털이 다 젖었다던가 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루다는 비스마르크 샌드위치를 집어 포장 종이를 벗겼다.

 

포장 종이를 벗기고 호두가 박힌 빵을 들어 올리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삭 소리가 날 듯 신선한 라노시아 양상추와 쿡 찌르면 노른자가 흘러내릴 것 같은 아프칼루 알이 드러났고 단단한 빙하는 가루다가 양상추 냄새를 맡는 동안 바구니에서 마도사 모양 쿠키를 꺼냈다.

 

빼앗겼지만.

 

네놈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다!라고 가루다가 말한 것도 아니고.

 

수파르나가 빼앗은 것도 아니고.

 

치라다는 물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게 이미 한참이다.

 

고개를 돌린 단단한 빙하와 가루다는 한 떼의 노랗고 푸른 새와 마주쳤다.

 

납작하고 날렵한 날개에 뭉툭한 부리를 가진, 보통은 사람에게 먼저 덤비지 않는 새.

 

이 새들의 이름은 아프칼루라고 한다.

 

 

 

 

 

 

 

아프칼루들은 열심히 덤볐지만 한 명은 야만신이고 한 명은 그 야만신도 때려눕히는 전사였으니 결과는 안타까웠다.

 

그래도 비스마르크 샌드위치를 훔치는 데는 성공해서, 그 새떼들은 우르르 도망쳤고 단단한 빙하와 가루다는 뒤를 쫓아가려다 그 새들이 뱉어놓고 간 정어리를 밟고 미끄러졌다.

 

“...난폭한 새로다.”

 

가루다는 단단한 빙하의 갑옷에 얹힌 정어리를 집어 멀리멀리 던졌다.

 

- 갑옷에서 정어리 냄새 나겠네.”

 

무어 하느냐.”

 

가루다는 새 같은 발을 움직였다.

 

우리도 바다에 들어가도록 하지.”

 

 

 

 

 

오후 내도록 놀고, 어두워지면 산호에서 나오는 빛 위에서 또 놀고, 다시 림사 로민사로 돌아가는 배를 타러 갈 때는 한밤중이 된다.

 

벗어던진 봄 처녀 드레스를 다시 입고 밀짚모자를 쓰면 인간과 다른 부분은 가려지고 치라다와 수파르나는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돛대를 부풀렸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손길처럼 피부를 스친다.

 

달이 바다에 비치는 것을 보다가 단단한 빙하가 입을 열었다.

 

또 여행 갈 거야?”

 

인간의 관심이 이제 우리의 신도에게 있지 않으니 우리는 때로 불러와질 뿐 할 일이 없느니라.”

 

오고모로 화산구의 그 녀석처럼 아이들을 끌어안고 살지도 아니하고 잔라크의 그 녀석처럼 조용하게 수양할 생각도 없으니 나는 이렇게 다니는 것이다.

 

배는 어부 길드 앞에 닿았고 가루다는 두 분신을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한 번만 말하는 것이니 똑똑하게 듣거라.”

 

단단한 빙하는 절그럭거리는 갑옷을 메고 배에서 내렸다.

 

다음은 다날란이니라.”

 

 

아티산과 왕자님

2018. 5. 5. 04:41 | Posted by 호랑이!!!

A는 푸른 색 봉투에 찍힌 은색 삼각형을 노려보았다.

 

이 나라의 국기는 신, 귀족, 백성을 뜻하는 삼원으로 되어 있고 자신의 소속에 따라 삼원의 부분을 그리는 것이 정석이다.

 

농사와 목축이 주된 일인 백성과 친한 농사의 여신이나 짐승의 신은 백성을 포함한 구역과 신을 그리고 귀족과 관련된 부분은 제외하며 귀족 중에서도 신전과 연이 있는 사람은 그 부분까지 온전하게 원을 그리는 것이 일례.

 

그러나 그 삼원의 가운데에 있는 삼각형은.

 

, 귀족, 백성,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왕가의 상징.

 

“...가기 싫어....”

 

왕실 직속 배달부가 직접 우편을 가져다주고 큰 소리로 임명장을 외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쏠렸지, 거부권이라는 건 없고, 거기에 더해서 이사까지 해야 할 테니까.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A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이 탄 마차가 궁전을 빠져나갈 때 울면서 손을 뻗던 아주 작은 아이를.

 

그 때 스물이었던 자신이 벌써 마흔이 넘었으니 그 분도 이제 스물은 넘었겠군.

 

오빠.”

 

“B, 들어올 때는 노크 좀 해.”

 

뭐 어때, 오빠는 어차피 공부밖에 안 하잖아.”

 

올해 마흔 살이 되는 B는 어린 나이부터 백작 지위를 물려받아 훌륭하게 가문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B는 은색 삼각형이 찍힌 봉투를 마음대로 열더니 안에 든 임명장을 읽었다.

 

“...기술의 궁전에서 숙식하며 그 장으로서 일하고 공헌해주기를 바란다, 이거 나쁘지 않네.”

 

뭐가 나쁘지 않아? 정말 가기 싫어!”

 

아티산 직위잖아? 오빠는 그냥 자작이니까 백작 대우인 아티산은 파격적이도록 좋은 조건 아니야?”

 

사람 많은 곳은 싫어. 발표회는 어쩔 수 없다지만 무도회 같은 게 열리면 또 일해야 하고, 무슨 행사라도 생기면 거기서 일할 테고. 그러면 또....!”

 

안 갈 거야?”

 

가야지. 그 말을 하고 A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됐어. 필요한 것만 간소하게 가지고 올라가고 나머지는 거기서 사.”

 

깔끔하게 정리하고 BA를 마차로 올려 보냈다.

 

그것이 겨우 일주일 전.

 

왕궁 안에 있는 건물 중에 따로 떨어진 기술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별채는 여러 발표회와 왕손의 교육을 위해 호화롭게 지어져 있었다.

 

원래는 연금 부서, 마법 부서, 연마 등 각 부서의 고위직만도 스무명이 넘었고 아래 연구원이나 직원까지 합하면 백 명이 넘었지만.

 

A가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둘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만두어 연금 부서의 총 인원은 다섯 명, 대장장이 일을 하는 연마 부서는 열 명, 행정직 직원들도 반수 이상 그만둔데다 A 직속인 마법 부서는 겨우 세 명이다.

 

그런 주제에 잡무는 많고, 그래서 연구도 진척이 없고, 아티산인 자신은 이런저런 일에까지 불려나간다.

 

원래라면 60분으로 주어진 점심시간에서 30분을 서류에 쏟아 부은 오늘도 지쳐 A는 비척비척 바깥으로 나갔다.

 

왕실 정원사가 돌보아주는 정원은 보기 아름답고 쉬기에도 좋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

 

누군가는 시간에 늦지 않게 자신을 깨워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A는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몸을 뉘였고 따뜻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없는지, 왜 잡무까지 기술의 궁전까지 넘어왔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또 그만둘까보냐...”

 

웅얼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이십분이 지나 본 궁전에서 A에게 일을 맡기러 왔지만,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손짓에 곤란해 하면서도 돌아갔다.

 

누군가는 높았던 해가 가라앉고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뜰 때까지 옆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찾으러 오자 그제서야 어깨에서 망토를 풀어 A의 위에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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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칼님네 걔들]

2018. 4. 24. 10:27 | Posted by 호랑이!!!

적당히 따뜻하고 선선한 그리다니아에서 나와 천천히 걷다보면 조그마한 다람쥐나 무당벌레 같은 것들이 돌아다녔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깃털 달린 이크살족이 있다.

 

무당벌레가 있고, 청설모가 있고, 이크살족이랑, 그리고.

 

또 요엘과 에녹이 여기 있다.

 

이 쪽이지?”

 

우리 때랑 그렇게 많이 바뀌지는 않았네.”

 

요엘은 지도를 펼쳤다.

 

그거 알아? 우리 때랑 같은 지도를 쓰고 있더라고.”

 

그래?”

 

바보, 그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게 더 신기한 일이라고.”

 

심지어 청동호수 쪽 지도도 다르지 않단 말이지.

 

그렇지만 사람들이 커르다스에 대해 말한 것은 좀 다르다.

 

그리다니아보다 따뜻한 기후, 끝없이 펼쳐진 초원, 피어난 색색의 꽃과 나비가 기억하는 커르다스이건만 사람들에게 커르다스에 갈 거라고 이야기를 할 때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두꺼운 옷을 챙기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만큼 두꺼운 방한모에 장갑과 외투, 신발을 준비했는데 가을박 마을을 다 지나갈 때까지도 날씨가 바뀌려는 기색은 없다.

 

그냥 그리다니아 시가지보다 조금 더 서늘하고 메마른 기후로군.

 

사람들 말을 들어보자면 가을박 마을 옆으로 난 길로 쭉 가면 된다고 했는데 얼마쯤 걸어가도 기후가 바뀌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조사가 더 필요했어.

 

요엘은 지도를 접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얼마간 걷다보니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가워졌다.

 

에녹은 요엘에게 외투를 둘러주었고 더 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장갑, 모자를 짐에서 꺼내주었다.

 

가을처럼 높고 푸르렀던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끼고 풍요로워 보이던 황금빛 단풍들은 걸음을 뗄수록 칙칙한 색이 되어 요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춥고, 흐리고.

 

훅 내뿜은 입김이 안경에 하얗게 서려 잠깐 옷깃에 문질러 닦는데 무언가가 요엘의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얼굴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것.

 

에녹은 하늘을 보더니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눈이다!”

 

? 눈이라고! 커르다스에?

 

요엘이 어이없어하는데 에녹은 요엘의 가방까지 등에 지더니 커르다스의 한복판까지 전력질주로 뛰었다.

 

, 슈가! , 아저씨야!”

 

 

데바데 헌트리스

2018. 4. 17. 16:29 | Posted by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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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니까 꽃

2018. 4. 4. 14:36 | Posted by 호랑이!!!

하얗게 먼지 낀 유리창으로 해질녘의 빛이 들어와 다락 안을 메웠다.

 

황혼이라고 부르는 저 해는 방을 비출 뿐 아니라 A의 몸을 감싸고 흘러 손을 들면 황금빛을 떠올릴 수 있었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 해의 냄새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락방의 그림자진 구석구석에는 과거가 낡은 인형이나 쓰지 않는 흔들의자, 빛바랜 액자의 모습으로 둘러앉았고 이렇게 늘어진 햇빛이 간지럽혀 깨울 때면 쌓여가는 먼지조차도 추억의 길을 지나오느라 묻은 시간의 가루처럼 빛났다.

 

어디가 더라고 할 것 없이 다락방은 낡았는데 유독 한 군데만 말끔하고 마루판도 반질반질하다. 거기에 A는 빛바랜 깔개를 깔고 책을 펼쳤는데 아까보다 확연히 붉어진 빛이 종이에 퍼졌다.

 

그 빛은 더 탁한 붉은 빛이 되었다가 빛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만큼 약해졌다가 언제라고 말하지도 못할 찰나에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게 된 A가 창문을 열자 유리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빛 대신 바람이 A의 몸을 휘감았다. 옷깃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햇빛 조각도, 그 온기도 털어낸 대신 밤의 상쾌함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신 A는 책을 덮었다.

 

달을 찾으러 간 책 속의 사람은 숲으로 갔을 것이다.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밤바람이 그에게도 불었을 것이고 갓 돋은 싹이나 마악 깨어난 씨앗, 흐르기 시작한 샘물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설로 전해지는 샘에 도달하면 찾을 수 있겠지. 샘에 비친 달을.

 

그 순간 무언가가 A의 뺨을 간질이며 떨어졌다. 바닥에서 주워들면 어두운 밤하늘이라도 비칠 만큼 엷은 꽃잎이 달빛에 반짝였다. 창밖으로는 푸른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있었고 빛을 받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빛나 바람이 일 때마다 날아올랐다.

 

마치 달빛에 빛나는 커다란 샘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무들은 A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끝없는 저 멀리에서부터 바람이 불면 수없이 많은 꽃잎들이 떠올라 작은 창문으로 쏟아졌다.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A는 팔을 활짝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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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7

2018. 3. 29. 16:23 | Posted by 호랑이!!!

저보고 붉은 여왕님의 초대를 거절하라구요...? 제가요...?”

레이디 세이렌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까만색 나무와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칸막이 뒤에는 하얀 천을 씌운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흘긋 본 다른 칸막이 뒤에는 1인용 침대도 하나 있었다.

극장이 그녀의 대기실이 아니라 사는 집이라는 말은 정말인가, 세이렌은 다른 칸막이 뒤에서 차를 타오고 과자를 내 왔다.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아네.”

방금 전까지 얀에게 사랑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재잘거리던 세이렌은 단호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헨리, 추수제에 제가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삼백년이나 마물도 외적도 침입하지 않게 된 이 나라는 부유하고 풍요로워서 문화며 건축 등을 발달시켰다.

오로지 유흥을 위해서 극장이라는 건물을 짓고 난 후에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오페라며 연극, 무용 등이 본격적으로 꽃피었고 거기에 귀족이 참가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는 악기나 노래나 무용을 뽐내는 사람 중에 귀족이 적지 않게 되었다.

덧붙여 농민이 중심이어야 할 추수제의 무대에서도 귀족이 아니면 서지 않게 되었고.

처음에는 수도 근처의 농지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부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여러 문제가 있기도 해서 현대에는 완전히 귀족이 무대에 선다.

“...그 자리를 다시 평민 신분인 저에게 주신 거예요. 붉은 여왕님은 이번 추수제를 빌어 평민과 귀족 간의 거리를 다시 좁히려고 하고 계세요.”

내가 알바는 아니지.”

얀이 투덜거리듯 내뱉자 세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헨리, 당신에게 우리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일까지 양보할 수는 없답니다.”

여왕님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러자 세이렌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라고도, 부정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방은 조용해졌고 단의 과자 깨무는 소리만 들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이렌이었다.

당신은 나빠요.”

결국에는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 라고 하면 좀 위로가 될까?”

안돼요.”

세이렌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가 좋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맞대었다.

하지만 헨리가 제가 바라는 말을 해 준다면 위로가 안 될 것도 없어요.”

그건 안된다는 걸 알지 않나.”

다시 세이렌의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와서, 마치 갓 이슬을 맞은 꽃처럼 생기가 넘쳤다.

헨리, 우리 앞에는 지금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쉬운 길이고, 하나는 어려운 길이예요. 길을 선택하는 것은 헨리랍니다.”

어려운 길, 어려운 길로 할거네.”

이거 안 먹히네, 라고 투정부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세이렌은 웃었다.

그럼 그 어려운 길이 뭔데?”

플로라 공주님께 가 주세요.”

그 아가- ...플로라 공주님이 왜?”

습관적으로 아가씨, 라고 하려던 얀은 세이렌의 눈빛이 바뀌려고 하자 급히 말을 바꾸었다. 세이렌은 마치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공주님이 무서워하고 있으니까요.”

그 아가씨... 아니, 공주님은 항상 무엇이든 무서워하지 않나.”

헨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만약 공주님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저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요.”

세이렌은 찻주전자를 기울여 자신의 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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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6

2018. 3. 27. 05:01 | Posted by 호랑이!!!

헬렌 카투스는 여느 주말처럼 편지를 배달해왔다.

안녕 얀! 다니엘! 왜 둘 다 죽을 상이야?”

“...다니엘이 괴롭혔네.”

“...얀이 나빠.”

오늘의 간식은 연어알을 넣은 카나페였다.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뒤집어 털어낸 헬렌은 여느 날과 달리 다니엘 폰 카이트(듀크 단)와 헨리 제임스 헤일로()가 축 처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싸우기라도 했어?”

얀이 여왕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는데 지나치게 느긋합니다.”

... 헬렌은 단박에 이해했다.

저 뼛속까지 충성심 넘치는 미래의 기사 나리는 여왕님의 명령이 최우선이니 그것부터 하라고 했을 것이고 우리들의 관리자는 무슨 꿍꿍이에서든 이때껏 미뤘겠지.

뭐야, 무슨 일인데?”

“...무도회의 가수로 레이디 세이렌을 데려오라는데.”

뭐어?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질질 끌고 있어?”

하필이면 그 날이 추수제일세.”

그게 뭐 어때서?하는 친우를 보고 얀은 한숨을 쉬었다.

푸른 여왕님은 뭘 맡고 계시지?”

군권.”

추수제는 누가 주도하지?”

붉은 여왕님?”

끝이 왜 온점(.)이 아니라 물음표인데?

얀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행사나 축제는 붉은 여왕님이 주도하시는 일일세, 레이디 세이렌은 지금 최고의 가수이고.”

당연히 붉은 여왕님이 초대하셨겠지.

그런데 지금 푸른 여왕님이 자신의 손님으로 초대해 달라고 하는 것일세.

다니엘 자네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그 말에 단은 아, 하고 깨달았다.

붉은 여왕님이 하시는 일이면 붉은 여왕님이 하게 하면 되지, 왜 푸른 여왕님이 초대하시는 건가? 푸른 여왕님이 초대한다면 붉은 여왕님의 일을 뺏는 것처럼 보일 텐데.”

한 절반 정도.

자매끼리는 꽤나 다툴 거라 생각하네.”

그 말로 일축한 얀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하하, 그래도 여왕님의 명령인데 따라야지.”

헬렌은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그들의 관리자 주위를 맴돌았다.

“...정신 사납대도.”

신경쓰지 마.”

헬렌은 폴짝 뛰어 날아서 소파를 넘어가더니 바닥의 쟁반에 놓인 카나페를 가져다 입에 넣었다.

바작바작 톡톡 튀는 식감을 만끽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단이 찡그리는 것이 보인다.

“...있지, ?”

“...”

듀크 단의 표정이 그닥 좋지가 않은데~”

공중에 둥둥 떠서는 귓가에 머리만 내밀어 속닥거리고 있지만 다 들린다.

단은 읽던 책마저 옆에다 내려놓고 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헬렌, 자네까지 나한테 재촉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귀찮아서 원.”

방금 그 말은 그래도 헬렌한테 너무한 게 아닌가 하여 단이 한 마디 하려는데, 헬렌은 화내는 대신 방긋 웃었다.

그러나 헬렌은 소파에 늘어진 얀의 양 다리를 잡더니, 그대로 날아서 열린 테라스 밖으로 던져 버렸다!

헬렌!!! 카투스!!!”

난 로즈랑 놀거니까, 썩 가시지!”

단은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인 망토만 손에 들고 얀을 따라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 무사하냐!”

잘 다녀와~”

 

하여간 우리 애들은 너무 난폭해.”

얀은 다행스럽게도 푹신한 잔디 위에 떨어졌는데 그럼에도 아프다며 단이 뛰어내리는 그 때까지도 누워 있었다.

아주 깔끔한 자세로 잔디에 착지한 단은 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일으켜 주게.”

잡고 일어나.”

나는 청순가련하고 연약하네.”

헛소리, 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음에도 얀은 그대로였고 단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고맙네.”

두 번은 없어.”

단은 너무 나한테만 차가워.”

얀은 망토 자락을 들고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얀이 쫓아나가면 단은 마차를 잡고 문을 열어둔 채 기다리고 있다.

얀은 그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골든 공연장까지 부탁하네.”

마차 바퀴가 굴렀다.

문을 닫고, 얀은 쿠션에 몸을 기댔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거네만, 레이디 세이렌은 현재 최고의 가수라고 불리며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하지.”

나도 레이디 세이렌이 누구인지는 알아. 몇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공연을 본 적 있거든. 본 적은 그 때 한 번 뿐이지만 과연 아름답더라.”

얼굴이, 아니면 노래가?”

얀이 짓궂게 물었다.

가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목소리 외의 것을 평가할 만큼 속물적이지 않아.”

단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혹시 세이렌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가수?”

아니. 신화 속의 세이렌.”

모르는데.”

얀은 그럴 줄 알았다, 면서 설명했다.

세이렌은 용이 살아있을 때 멸종당한 유일한 마법 생물이네. 여자의 얼굴에 몸은 새고 바다의 돌섬에 사는데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해서 배가 바위에 부딪혀 난파되도록 만들지.”

상체가 여자, 하체가 새라는 하르퓌아랑 비슷하네. 뱃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세이렌을 전부 죽여버린 건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귀족들이 호사한 취미를 누리기 위해 세이렌을 잡았다고 하더군.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날개의 깃털은 뽑아다 장식에 쓰고, 특별히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새가 낳은 알은 비싼 값에 매매되기도 했네.”

이게 역사든, 아니면 무슨 생물 수업이든 단에게 특별히 흥미진진한 수업은 아니었다.

사람이 멸종시켰나?”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얀은 잠시 말을 멈추어 단의 시선을 끌었다.

기록된 문서에 따르자면 어느 날 세이렌들이 특별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군. 대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짝짓기를 하고 싶다, 식사를 하고 싶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등의 막연한 이미지를 담은 것이었는데 이 날은 전부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갔다고 하네.”

어떤 이미지?”

고향에 가고 싶다.”

서서히 단의 눈에 흥미로움이 차는 것이 보였다.

같이 지낸지가 거진 십 년이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면 궁금해 할 지 정도는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지.

얀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이렌을 기르는 사람들도, 사람들의 하인들도, 전부 고향으로 가버렸다네. 고향에 닿자마자 왜 여기 있는지 깨닫고 서둘러 세이렌에게 돌아갔지만 그 때는 이미 세이렌들이 굶어죽은 뒤였지. 낭만주의자들은 이 일에 대고 스스로 멸종한 생물이라고 부르고 있다네.”

알이 남아있을 거 아니야?”

당시 사람들은 세이렌에 대해 공부하기도 전에 무작정 잡아들였네. 알은 모종의 이유로 깨어나지 않았고 결국 남은 것은 알 껍데기 뿐이었지.”

재미있네...”

마차가 멈추어 서고 마부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얀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폼만은 좋았으나 착지에서 비틀거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왜 오면서 세이렌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나?”

가수 세이렌을 만나러 가니까.”

자네가 세이렌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네.”

얀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아가씨 역시 우리 중 하나거든.”

세이렌이 얀의... 뭐라고 할까, 얀의 관리인? 관리 받는? 관리당하는? 일컬어 푸른 아이들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 단은 로즈와 헬렌을 떠올렸다.

역시 그 실험인가 뭔가를 견뎌내고 계획적으로 길러진 아이들이라 그런지 어리건 여리건 당차고 강하고 그렇다.

그러면 세이렌도 그렇겠지?

세이렌은 멀리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몸에 주렁주렁 단 화려한 장신구며 그렇게 특색있는 오만한 목소리 하며.

개인적으로 만난 세이렌도 ‘~했냐?’같은 말투일지도 모른다.

바지를 입거나 푹신하다면 소파에라도 드러눕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단은 뭔가 빠뜨린 것 같다는 생각에 발을 멈추었다.

왜 그러나?”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

단은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서는 바로 옆의 꽃집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살폈다.

... 걸음이 빠른, 하아.. 빠르네, !”

헨리, 종종 하는 말이지만 너도 역시 운동을 좀 해야 해.”

칼 들고 뜀박질하고 그런 건 내 적성과 안 맞아. 후우... 그리고, 얀이라니까...”

얼마 안 되는 짧은 거리였음에도 얀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뭘 사가나? 웬 꽃? 설마 세이렌에게 주려고?”

그래야지.”

? 세이렌은 그냥 가수일 뿐인데. 자네한테는 평민이기도 하고.”

네가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레이디를 만나러 가는데 선물 없이 어떻게 만나?”

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단을 쳐다보았다.

단은 튤립과 장미가 섞인 꽃다발을 집어서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지위가 남작이라 하더라도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푸른 여왕이 직속으로 그를 부리기 위해 명목상 부여한 것에 불과하니 예의가 어떻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하는 것은 책을 통해 배운다고 그랬던가.

넌 세이렌이나 악마나 좀브 같은 건 잘 알면서 이런 걸 잘 모르더라.”

왜 모르는지 이젠 알지 않나. 그리고 그거 좀비네.”

얀은 단이 든 꽃다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꽃을 사서 들고 가는 것이라고 머릿속에 입력하는 중일 것이다.

극장 안, 붉은 벽지에 호화로운 그림이나 조각을 군데군데 두어 꾸민 복도를 따라 걸으니 이 앞이 대기실이라며 지키고 선 사람이 보였다.

얀이 손을 까딱하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고 단도 가볍게 인사를 보내고 서둘러 얀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따라 걷자 안에서부터 은은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 좋다.”

몇 걸음 더 걷자 노랫소리가 더 커졌다.

어린 공주의 책임과 소녀로서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 어딘가 찡하게 했다.

코 끝이 매워 오는 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데 얀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가시밭길의 소녀로군.”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는지,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할 뻔 했다.

고전소설 어느 왕자에 대하여를 각색한 여왕의 길이라는 극의 아리아지.”

멋진 노래야... 조금 들었을 뿐인데도 울 것 같네.”

멋진 노래지. 부른 사람은 더 멋지고 말이네.”

노랫소리는 가장 안쪽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얀과 단이 다가갈수록 노래는 조금씩 바뀌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다른 곡을 불렀다.

밝고... 신나는 노래군. 뛰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는 뱃사람들 노래군. 세이렌이 가장 즐겨 부르는 것일세.”

세이렌이 뱃노래를 안다고?”

아리아만 부를 것 같은 가수가 남자들이나 부르는 뱃노래를 부른다니, 하지만 마물 세이렌을 생각하면 알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며 단은 앞장서 노크를 두어 번 했다.

세이렌 양, 계십니까?”

어머?”

나온 사람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길게 길러 진주장식 끈으로 정리한 하얀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져 머리카락에 색을 입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러면 대개 머릿결이 상함에도 어지간히 공을 들였는지 윤기나게 찰랑거렸다. 키는 가장 보기 좋다는 키에 몸은 늘씬하고 가벼운 레이스가 달린 실내복 한 장으로 감쌌을 뿐인데도 사랑스럽게 어여뻤다. 그리고 온순하게 아래로 끝이 내려간 눈은 속눈썹이 풍성하고...

이런 묘사를 구구절절 왜 하고 있느냐면.

세이렌의 목소리가 달콤했기 때문이다.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책을 읽으며 모든 남자들이 상상했을 맑고 부드러운, 마치 꽃잎이 다가와 사뿐히 피부에 닿는 듯 가녀린 목소리가 목소리와 어울리는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헨리가 온 줄... 헨리! 어서와요! 아아, 날 만나러 올 줄 알았어!”

세이렌임이 분명한 그 아가씨는 단을 쳐다보았다가 얀으로 시선이 가 멎자 활짝 웃으며 얀의 품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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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5

2018. 3. 26. 15:49 | Posted by 호랑이!!!

밤을 샌 탓인지 다니엘은 여느 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로즈는 자신의 방에서 자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재에서 헨리는 아직도 가득하게 쌓인 편지를 읽고, 태우고, 버렸다.

어제 잠을 자지 못 했으니 평소보다 일찍 자도 괜찮겠지만 할 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어서.

이 지방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요정 이야기를 많이 해. 단순히 요정 이야기가 유행하는 걸까? 요정이 깨어났다면... 요정은 종에 따라서는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 생물이니까 나와도 괜찮겠지만. 만약 요정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가 만들어낸 것이라면?’

만들어내는 능력은 로즈 계통이지.

로즈를 필두로 한 서너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둘은 죽었고...

요정은 약한 생물이니 아직 용이 깨어나기까지는 여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테라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안녕, .”

얀과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지?”

얀은 그를 보자마자 읽던 편지를 불 속에 던져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군.”

멋진 집이네. 우리가 살던 곳이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야.”

그 사람은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와서는 우아하게 양각된 벽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난롯불이 있고, 누구나 좋아할 디저트도 있고, 차도 있고, 책도 가득하군.”

그는 벽을 메운 책꽂이에서 하드커버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덕분에 아주 푹 잤어. 지겨울 정도로.”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다가 탁, 덮으니 책은 검게 물들어갔다.

얀은 책을 잡은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서, 뭘 하려고?”

검게 물든 책이 손 안에서 흐늘거렸다.

내가 할 일이 있을 거 아냐. 전쟁... 파괴... 누군가를 없애는 일이라던가.”

그 사람의 시선이 얀에서 책상에 가득하게 쌓인 천과 종이조각으로 가 멎었다.

저건가.”

아니네.”

그 사람은 천천히 걸어 얀의 앞에 와 섰다.

얀은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서, 느긋해 보이는 그와는 대조적이었다.

정말 아니라면, 그렇게 긴장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 잽싸게 손을 뻗어 편지를 잡아챈 동시에 얀은 그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

얀은 아예 그를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쪽은 얀을 밀어내려는 듯 버둥거렸으나 서서히 움직임에서 힘이 빠졌고, 결국에는 얀에게 기대 정신을 잃었다.

철퍽 소리를 내며 검게 물든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얀은 그를 안은 팔에서 힘을 빼었다.

조금만 더 자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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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싸웠던 어느 날

2018. 3. 22. 03:47 | Posted by 호랑이!!!

 

“....”

 

“....”

 

“...”

 

“......”

 

집사 바리톤은 주인인 페드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놀다가 아무거나 주워가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무리하게 일을 맡기거나 장비도 그럭저럭 괜찮고 보기에도 좋은 것으로 맞춰주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잘 모르지만 흑와단의 나름 높으신 분이라고 하는데다 비술서만 들면 어디 가서 죽어 오지도 않았고 과묵하니 보기 멋있는 사람이었다.

 

었다라고 말하느냐면, 커르다스산 게 두 마리가 든 양동이를 들고 하늘잔마루의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페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불 뭉치에 말을 거는 페드가.

 

“...주인님?”

 

그러나 페드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대답은커녕 시선도 주지 않는다.

 

“..., 왜 화가 났습니까?”

 

너는 왜 이불에 말을 거는 건데?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낀다지만 이불까지 언약자분으로 보이는 정도의 콩깍지는 어디서 끼어 오는 걸까.

 

왜 이러는 걸까.

 

주인님.”

 

무례하지만 어깨를 잡았는데 페드는 그제야 저를 한 번 보더니 저리 가라는 듯 손을 젓는다.

 

아니, !?

 

바리톤은 이불에 대고 말을 거는 주인을 쳐다보다 양동이를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이 내가 은퇴하는 날인가보다.

 

바리톤은 두 사람 분 식사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차려진 식탁 위의 음식을 보았다.

 

전채로는 완두콩 수프에 파리풀 샐러드, 에메랄드 수프가 있고 메인으로는 피피라 피라 찜, 코카트리스 미트볼, 미코테식 꼬지도 몇 개나 있는데다 디저트로는 마도사 모양 쿠키, 초콜릿, 바바루아, 마롱글라세, 사과가 들어간 플로냐르드에 마실 것으로는 차가운 과실주와 얼린 칵테일에 요리사가 본직이라는 주인님이 만들기 귀찮다고 딱 한 번 만들어보았다는 코코아까지 있다.

 

차갑게 식은 것을 보아하니 만들어진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손을 댄 흔적조차 없잖아? ?

 

방 안을 둘러다보던 바리톤은 더 심상찮은 것을 보았다.

 

먼지 앉는다고 뚜껑도 못 열게 하던 피아노는 뚜껑이 열려 있고 악보도 펼쳐져 있다!

 

잘 보니까 라님이 좋아하던 물건이랑 음식이 온 방안에 있잖아!? 게다가 꽃병의 꽃들도 신선하고 갓 채집한 것들로 새로 싹 바뀌어있고!?

 

“...,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시오, ?”

 

바리톤은 대답 없는 이불뭉치에 대고 말을 거는 주인을 보다가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틀림없다.

 

저 몹쓸 주인이 즐거운 던전이니 뭐니 하면서 꾀어내어서 최소 네 명이서 가야 하는 곳에 또 두 명이서 갔거나 둘이서 공격적인 마물을 잡았을 거다.

 

비술서만 들면 무적이라는 저 주인이야 아무 문제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 겨우 갈론드제 옷을 모으기 시작하는 라님은... 라님은 아마.....

 

키 크고 험상궂게 생겼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아우라, 바리톤은 왈칵 치밀어오르는 눈가를 닦을 생각도 않고 주저앉아 바닥을 내리쳤다.

 

라님!!!!”

 

깜짝이야! 뭔데요?”

 

라님!?”

 

치지 마십시오, 아랫집에서 올라옵니다.”

 

아니,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왜긴요, 난 원래 여기 있었는걸?”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소리 지르면 옆집에서 항의가....”

 

난 계속 여기에...”

 

바리톤은 진정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페드는 옆집과 아랫집, 윗집 사람들이 몰려온 것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집사 소리였습니다, 집사가 전사냐고요? 아니오, 어부입니다, 그래요 놀랍지요, 타이탄 심핵을 뽑아올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마 그 쪽으로 재능이 있는가봅니다 등의 소리가 들리고 바리톤은 라가 건네는 차가운 과실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두 분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퀴니가, 내가 싫대.”

 

그리고 페드는 다시 방 안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대해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싫대.”

 

누가요?”

 

퀴니가.”

 

누구를?”

 

나를.”

 

바리톤은 일단 진정을 위해 접시를 찾아 식탁 위에 가득한 코카트리스 미트볼을 덜었다.

 

질긴 고기를 먹기 쉽도록 으깨서 한 입 크기로 동그랗고 솜씨 좋게 빚은 미트볼은 토마토소스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고 맛도 좋다.

 

차가운 과실주나 이제는 녹은 칵테일을 번갈아 마시며 배를 채운 바리톤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나 보이기도 하는 주인의 언약자를 바라보았다.

 

모험하러 나왔지만 위험도 고난도 싫어하는 미코테를 위해 방 안에 양 깔개와 털실바구니를 놔주고 벽난로를 설치해주었는데? 음악이나 연주라면 쥐뿔만큼도 몰라서 다른 거 다 하는 동안 음유시인에는 손도 안 댄 아우라가 방 안에 하프시코드와 악보대를 놨는데? 마물 잡으러 가자는 말도 던전에 가자는 말도 다 무시하고 미코테 옆에 붙어있기도 하고? 둘이 만난 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풀을 캐거나 캔 풀로 천을 대량생산하던 아우라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좋아라 하는데?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새벽에서 보내는 연락도 전부 차단해버리고 어디 간다 싶으면 쪼르르 따라가는 저 아우라가?

 

그게 싫어하는 거면 이 세상에 사랑은 없고 이 에오르제아의 발렌티온 이벤트도 분홍색 염료를 팔기 위한 상술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당사자가 아니지.

 

바리톤은 무슨 일이냐고 다시 라에게 물어보았다.

 

퀴니가.”

 

주인님이.

 

내가.”

 

라님이.

 

안 예쁘대.”

 

?”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장터게시판 앞에서 어느 옷을 입혀줄까 어느 염료가 예쁠까 하던 저 인간이?

 

설마 커플끼리 장난으로 못나니~하는 그걸 오해한 건 아니겠지.

 

페드가 들었다면 나는 장난으로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겠지만 아쉽게도 페드는 아직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뭐 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야-”

 

어젯밤이라면 어부 집사인 자신과 소환사 집사인 테너가 각기 먼 곳으로 집사수행을 떠났던 때다.

 

“....해서 퀴니가 라는 섹시하다기보단 귀엽죠라고 했어요!”

 

그게 왜...?”

 

내가 안 섹시하대! 안 예쁘대!”

 

아니 그게 그 얘기가 아닌데.

 

장난으로 커플끼리 아기멧돼지니 하는 별명을 붙이는 수준까지도 못 간다.

 

왠지 눈앞이 흐릿하다.

 

바리톤.”

 

, 주인님.”

 

이거 갖고 어디 수행이라도 다녀오십시오.”

 

페드는 집사 급료 두 닢을 내밀었고 바리톤은 마롱글라세 몇 개를 들고 후다닥 방에서 나갔다.

 

.”

 

“...”

 

라는 팩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에 떨어졌던 이불도 얼굴까지 돌돌 감아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쪽으로 쫑긋 세운 귀랑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정도.

 

저 보지 않을 겁니까?”

 

“...”

 

페드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이것까지는 되도록 안 꺼내려고 했는데.

 

“....”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귀는 더 쫑긋하게 서고 이불이 단박에 내려가서 반짝거리는 눈이 나타났다가 자신과 마주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안 돼, 안 돼, 못 올려요. 안 돼.”

 

싫어, 올릴래!”

 

안 돼와 돼만 반복되는 한차례의 다툼이 끝나고 라는 귀 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페드는 의자를 끌어당기고, 손톱과 비늘에 마구 긁혀 아까보다 후줄근해진 이불에 대고 말을 했다.

 

아까 집사랑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습니다.

 

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불이 조금 내려갔다.

 

제일 섹시하고.”

 

이불이 조금 더 내려갔다.

 

제일 실력 좋은 모험가! 제일가는 음유시인! 희망의 빛! 최고의 미코테!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라를 휘감은 이불이 조금씩 내려갔다.

 

조금씩 내려가던 이불이 마침내 바닥에 떨어졌을 때 페드는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는 저를 봐 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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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to B] 아란체 주변인물

2018. 3. 18. 05:21 | Posted by 호랑이!!!

산 중턱에 작은 절이 있었다.

 

겨울이면 산과 바위가 찬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이면 대숲이 바람을 식혀주는 절.

 

문간의 붉은 칠은 바람과 흙에 벗겨지고 나무로 만든 마루는 많았던 방문객이 밟아 반들반들해진 곳.

 

안개가 자욱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느 날의 아침에 그 고요함을 깨뜨린 것은 아이 울음소리였다.

 

처음에는 마당 쓸던 어린 스님 하나가, 그 다음에는 부엌에서 일하던 스님 하나가, 그 다음, 그 다음에는 다른 스님까지 우르르 문간으로 왔다.

 

마당에 있는 것은 예닐곱살 된 것 같은 어린아이 하나.

 

손에 든 것은 편지 한 통과 나무를 깎아 만든 팔찌 하나다.

 

무엇을 묻더라도 아이는 울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사람들은 아이 손에 들린 서신을 펼쳤다.

 

흥분한 듯 괴로운 듯 써갈긴 그 글씨는 읽기 힘들었지만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읽고 짜맞추어 내용을 알아냈다.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 아이는 마물의 아이로 태어난 지 고작 몇 달 만에 이만큼이나 자랐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없는 아이이니 부디 마음대로 처분해 주십시오.

 

 

 

 

 

 

 

 

 

먼 이국, 밀라비는 누이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부탁이야 밀라,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을 못 했어. 그 아이를 찾아서 자립할 때까지 보호해줘. 오십년만이라도 좋아, 아니면 삼십년. 십년이라도 좋으니 제발

-사랑하는 누나가

 

편지는 급하게 쓴 것인지 마구 휘갈겨져 있었고 주소도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상대가 인간인 것은 둘째 치고 외국인과 결혼까지 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못하고 어린 핏덩이를 남겨둬? 그걸 또 저한테 맡아달라고?

 

하여간 이 누나는 예전하고 달라진 게 없다.

 

경계심이 없어 아무한테나 가는 것도 그렇고, 대책 없이 인간하고 사랑에 빠졌나 싶더니, 겁조차 많아서 정체도 밝히지 못하고, 꼼꼼하지도 못해서 아무데나 흔적을 남겨버리고, 그렇게 헌터한테 잡히고, 결혼한 그 인간놈을 물어 변환시키던가, 도망을 했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거진 삼십년만에 한 편지가 겨우 이거야?”

 

헌터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면.

 

일이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딱 한 줄만 전했어도.

 

한 마디만 전보로 보냈어도.

 

그러기만 했다면.

 

밀라비는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누나가 전해준 주소는 비행기를 타고도 또 버스를 타고 차를 타고 걸어서 한참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밀라비가 아이를 찾아냈을 때, 아이는 이미 성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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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2

2018. 3. 17. 14:51 | Posted by 호랑이!!!

"...그래서, 이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 안 놀라?"

 

"... 나 마법사 나오는 이야기 좋아하고. X 포터 같은 거 좋아했고..."

 

"좋아하는거랑은 다르지!"

 

예란이가 책상을 탕 쳤다.

 

만두는 깜짝 놀라 꼬리를 펑 부풀렸다.

 

"나도 안데르센 좋아하지만 그 사람이 내 앞에 나오면 놀랄 거라고!"

 

"나도! 난 세종대왕!"

 

"그 양반들은 옛날 사람이잖아... 만난다면 좀비겠지."

 

그런 소리를 듣다가 만두는 테이블 위에 두 발로 서서는 인간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옹, 초록씨. 이 소묘의 성은 만, 이름은 두울이라 하옹. 겉으로는 예란 아가씨의 애완 고양이이나 실상은 대대로 아가씨 가문을 모셔온 가문의 36대손이옹.”

 

...”

 

초록이는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고양이용 간식을 내밀었다.

 

만두는 철퍼덕 앉아서 양 앞발로 야무지게 간식을 잡아 뜯었다.

 

홍 줄리.”

 

인간이 뜯어주지 않아도 된다니 어쩜 똑똑한 고양이로다.

 

으응.”

 

줄리도 예란이처럼 동물 있어?”

 

아니이, 나는 테이머 쪽이랑은 인연이 없어서.”

 

줄리아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초록이는 둘을 보다 질문을 던졌다.

 

마녀야?”

 

요즘에는 그냥 다 마법사라고 불러.”

 

아니이, 마녀는 이제 안 쓰는 말이야.”

 

그렇구나. 마법사구나.

 

초록이는 이제 시선을 다시 만두에게 옮겼다.

 

그런데 만두는 왜 도망친거야?”

 

그것은 예란 아씨 때문이옹!”

 

뭐가 예란이 때문인데?라고 물어보려다 초록이는 보아 버렸다.

 

만두를 죽어라고 노려보는 예란이를.

 

하지만 아가씨, 이제는 숨기기엔 너무 늦어버렸다옹.”

 

그렇다고 구구절절 다 말해주자고? 안돼!”

 

초록씨는 아가씨의 동무 아니옹? 이제는 포기하고 말할 때라옹!”

 

그 꼴을 보던 초록이는 줄리 쪽을 보았고, 줄리아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예란이 쪽으로.

 

쟤가 너 기억을 지웠어.”

 

!”

 

그런데 실수도 했어.”

 

뭐어!”

 

그래서 밖에 사람들이 없어졌어.”

 

뭐어어!”

 

창을 힘차게 열어 제낀 초록이도 예란이 쪽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네 짓이라고!”

 

만두는 흉흉한 초록이와 줄리아나를 번갈아보다가 앞발을 들었다.

 

예란이 쪽으로.

 

그렇다옹. 예란 아가씨가 초록씨 앞에서 마법을 써버렸고, 그래서 기억을 지우게 되었는데 실수로 이렇게 되었다옹! 그래서 이 만 두울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저 주인마님께 알려야 했는데 예란 아씨가 막으려고 했고, 그러다 바깥으로 내던져진 것이었옹!”

 

초록이는 예란이를 확 돌아보았다.

 

아니, 그게. 기억을, 지워야만, 했거든. 진짜로, 우리 쪽 법이 그렇거든.”

 

하지만 아가씨는 기억삭제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잖옹.”

 

그래도 공부는 했으니까 어떻게 하는지는 알잖아!”

 

만두는 사람은커녕 쥐 한마리도 없는 바깥을 가리켰다.

 

초록이는 미간을 콱 찌푸렸다.

 

만두를 바깥에 던지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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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의 인어

2018. 3. 1. 01:12 | Posted by 호랑이!!!

이 곳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나무의 향이 풍겼다.

 

A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바랜 녹색으로 뒤덮인 이 의자에는 두툼하고 넓은 팔걸이가 둘 있었는데, 한 쪽에는 과일이 얹힌 크림 케이크 조각이, 한 쪽에는 진한 색 차가 가득한 찻잔이 올라가 있다.

 

일렁이는 촛불은 책의 페이지를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였고 특별히 불그스름한 색이 페이지에 덧씌워질 때마다 책 속의 세계는 한 겹 더 감성적이고 온화하게 변했다.

 

한참이나 책에 빠져 있는데 벽난로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A는 읽던 책을 덮고 커다란 장작을 꺼져가는 불 위에 얹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다시 불은 환해졌고 배부른 불도마뱀은 비늘을 번들거리며 수북해진 재 속에 앞발을 담근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A는 화목한 가족이 커다란 푸딩을 먹는 대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포크를 들었다가, 케이크 위를 장식한 체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절인 체리를 받아든 요정은 신이 나서 화분 쪽으로 달려갔고 마침내 A의 독서가 끝났다.

 

따뜻하고 포근한 여운에 허우적거리다가 이제는 다 식었을 찻잔을 집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 마실 거니?”

 

밤바다와 같은 빛 비늘이 있는 인어가 찻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너는 언제 여기 들어왔어?”

 

바다로 가는 길이었는데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이 차가 마음에 드니까 마시지 않으면 좋겠어.”

 

A는 찻잔을 책상 한구석에 두고 커다란 컵에 물을 부었다.

 

마시지 않을게. 난 물을 마시면 되니까.”

 

물을 마시고, A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언제나 소란스러운 길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차들은 스치기만 해도 다치게 할 것처럼 지나쳐가고, 사람들은 웃음은커녕 말마디 하나도 건네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쳐간다.

 

A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붉은 색, 하얀 색 줄무늬 보도블럭이 지느러미처럼 나 있었고 걸음을 뗄 때마다 붉은 벽돌에서는 붉은 물고기가 튀어나와 하얀 모래 같은 보도블럭 위에서 퍼덕이다 다시 붉은 벽돌 속으로 되돌아갔다.

 

파닥, 파닥.

 

펄떡이는 소리.

 

그러다 붉은 빛에 고개를 들면 무채색으로 자란 고층 건물을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와아- 해가 진다.”

 

여기랑 저기랑 하늘 색이 달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A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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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트는 새하얀 카운터 앞에 섰다.
 
"자 그럼 오늘의 요리를 시작해 볼까!"
 
"..."
 
블랑쉐는 연갈색 튼튼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앞치마가 어색한지 연신 끈을 잡아 당기고 아랫자락을 매만졌다.
 
"누드 에이프런이 좋았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귀엽긴.
 
크나트는 손을 펴서 블랑쉐의 엉덩이를 팡 치고는 커다란 식칼을 들었다.
 
"칼 들고 있다고 해서 제가 복수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안 해."
 
크나트는 허허 웃으면서 블랑쉐의 쪽으로 채소를 밀어주었다. 
 
"그것 좀 깍둑썰기 해줘."
 
"그게 뭔데요?"
 
깍둑썰기 몰라? 이렇게, 이렇게. 
 
...라면서 당근 하나를 깍둑깍둑 썰어버린 크나트를 보다 블랑쉐는 다시 크나트에게 감자를 내밀었다. 
 
"제 것도 부탁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뭘 기대하는 겁니까? 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표정에서부터 알 것 같다. 
 
"...그럼 계속해볼까? 나는 야채를 썰 테니까 블랑 달링은 계란을 깨서 그릇에다 풀어줄래?"
 
"몇 개나요?"
 
"세 개. 아니, 네 개."
 
뒤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를 들으며 크나트는 마저 야채를 썰었다. 
 
예쁘고 고르게 썰린 것들을 한쪽에다 밀어놓고 돌아보자 블랑쉐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를 외친다. 
 
잠깐이고 뭐고 무슨 일이냐고 봤더니 그 앞에 놓인 그릇이 네 개. 
 
그리고 각기 들어있는 삶은 달걀들. 
 
"그걸 깼어?"
 
"달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내 간식인데. 
 
크나트는 여기저기가 움푹 패이거나 손톱자국이 남았거나 계란 껍데기가 아직 묻어있는 계란을 보다가 냉장고에서 다른 계란을 꺼내왔다.
 
"날계란을 까줘."
 
삶은 달걀이라니 예상 외다. 
 
심지어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눈치야. 
 
블랑쉐가 깐 달걀을 물에 씻어서 한입에 넣고 블랑쉐의 입에도 하나 물려주자 계속 물고 있었는지 몇 초 안 있어서 툭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와장창
 
쨍그랑
 
철벅
 
뒤를 돌아보니 예상대로의 광경이 펼쳐져 있다. 
 
"뭘 봅니까."
 
"...내가 치울게. 가만 둬."
 
"청소기랑 걸레 어딨습니까."
 
"아니 저기."
 
"손으로 치워야 하나..."
 
"내가 치울게. 치운다니까? 치우게 해주십시오."
 
결국 블랑쉐는 식탁을 닦고 숟가락과 포크를 놓는 일을 했다.
 
그동안 크나트는 커다란 접시에 야채와 쌀을 볶아 동그랗게 얹고 계란을 부쳐 얹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은 소스를 식혔다가 짤주머니에 부어 내밀자 블랑쉐는 흘리지 않게 조심조심 들어올렸다.
 
"초콜릿 정도는 만들어 봤지? 여기 끝을 잘라서 이렇게- 글을 쓰는 거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림그리기 정도는 할 수 있지. 
 
블랑쉐는 하트 모양을 몇 개나 그린 크나트의 접시를 보다가 짤주머니의 끝을 덜걱 잘라서 슥슥 그림을 그렸다.
 
멋지게 하트 모양과 이름을 쓴 블랑쉐는 뿌듯하게 짤주머니를 내려놓았고 크나트는 박수를 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 했으니 상을 줘야지요."
 
"방금 머리 쓰다듬어 줬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 상이라고 하는 겁니까."
 
크나트는 한 번 웃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가슴 만질래?"
 
"누드 에이프런 차림으로요."
 
 

 

마법사들

2018. 2. 12. 06:43 | Posted by 호랑이!!!

만약에 당신이 사는 곳에 좀비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주 해 보았다.

 

우선은 마트에 가서 생수와 통조림을 잔뜩 가져온다, 과자를 가져온다 등등.

 

촛불과 성냥을 준비한다, 뭘 가져온다, 밧줄로 간이 발판을 만들어서 밖에 매달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도록, 이 도시에 생긴 이변은 Tv 등에서 흔히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 춥다...”

 

이 도시에 사람이 없어진 지 오늘로 한 달째.

 

집으로 돌아오자 룸메이트인 예란이가 공책을 덮으며 맞아 주었다.

 

오늘은 어때?”

 

역시 없어.”

 

버스 정류장에 하루 종일 기다려 보았지만 오가는 버스는 한 대도 없다.

 

사람은커녕 동물이라면 길고양이 그림자도 보지 못 했고.

 

핸드폰이며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다.

 

영화 보고 싶어-”

 

컴퓨터에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새로 나온 거! ‘의사 뉘시게라던가 ‘LA의 악마라던가 초자연같은... 그리고 그리고.... SNS도 하고 인터넷으로 게임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초록이는 겉옷을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깔아둔 이부자리에 파고들었다.

 

흐어으어 뜨십다...”

 

초록이 왔어?”

 

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한 손에는 장미꽃을 든 홍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장미는 또 어디서 났어?”

 

꽃집에서 가져왔어.”

 

꽃집?”

 

그 왜, 학교 안에 있는 작은 거.”

 

꽃집!”

 

마악 이불에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던 초록이는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고 보니 꽃집이 있었지, ? 용케도 안 시들었네.”

 

부엌과 방을 나눠둔 문을 닫으며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줄리아나의 손에는 작은 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나갈 때는 고양이 사료가 있던 봉지가 텅 비어 있었다.

 

밥 먹었어?!”

 

, 그릇 안에 있던 거 없어졌어.”

 

그제야 초록이는 아차하더니 일어나 앉아서는 예란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만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릇이 비었잖아. 근처에 있는 거야.”

 

바깥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가 났다.

 

안 그래도 위태하게 보였던 나뭇가지에서 우둑우둑 소리가 나더니 이파리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초록이는 베란다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으아, 바깥에 엄청 바람이 부나보다. 일찍 들어오길 잘 했어.”

 

만두, 바깥에서 많이 춥겠지... 진짜, 누나 속이나 썩이고!”

 

걔는 똑똑하니까 어디 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줄리아나가 예란이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데 초록이가 패딩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 어디 가?”

 

나뭇가지 주우러!”

 

초록이가 홱 뛰어나가자 예란과 줄리아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가 문 쪽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춥다더니.”

 

나뭇가지 같은 건 왜 주우러 간 거지.”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있고, 배가 고팠지만 예란이와 줄리아나는 초록의 뒤를 따라갔다.

 

초록이는 나뭇가지와 상자를 줍고 있었다.

 

뭐 해?”

 

만두 잡게!”

 

밥그릇 근처에 상자를 세우고 이것저것을 세우더니 초록이는 예란이에게 손짓을 해서 만두의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만두가 잘 쓰던 푹신한 담요를 상자 안에 넣고 바깥에 놓은 간이 밥그릇에 만두가 좋아하는 간식을 놓고 초록이는 손을 털었다.

 

끝이야.”

 

바깥에 만두 집 만든 것 같아.”

 

차라리 그럴 걸 그랬나.”

 

다시 바람이 훅 불자 초록이는 부르르 떨었다.

 

이제 밥이라도 가지러 갈래?”

 

줄리아나가 편의점을 가리키는데 예란이가 손을 저었다.

 

내가 아까 갖다놨어.”

 

인스턴트 밥 몇 개랑 컵라면 한두개랑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미트볼 같은 거.

 

인스턴트 완전 만만세- 나 이제 슈퍼마켓 야채 코너는 보지도 않고 지나오잖아.”

 

넌 원래 야채 코너는 안 보잖아.”

 

야채 안 좋아하니까! 라고 줄리아나가 덧붙이자 초록이가 일부러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요즘은 아니거든!”

 

이렇다 저렇다 종알종알 떠들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까 놓은 덫 쪽에서 털썩 소리가 났다.

 

초록이는 냅다 복도를 달려 창문을 열어젖혔다.

 

담요를 덮고 돌을 쌓아 여간해서는 움직일 수 없게 한 커다란 상자가 덜그럭 덜그럭 움직이고 있다.

 

만두인가봐!”

 

미친, 효과 개 좋네.”

 

, 빨리 가 봐! 데려와야지!”

 

셋은 다시 온 곳과는 반대로 뛰었다.

 

뛸수록 상자는 덜그럭거리는 것이 커졌고, 안에서 들이받는지 퍽 소리도 났다.

 

뭐라고 예란이가 달래려는 찰나, 상자가 찢어졌다.

 

발톱에 걸려 찢어진 정도가 아니고.

 

터지다시피.

 

돌멩이는 바닥을 구르고 회색 담요 조각은 상자 조각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상자 조각을 밟고 선 것은 커다랗고 검은 형체였다.

 

땅거미가 내리는 어두운 길에 초록색 눈 두 개가 번뜩였다.

 

만두! !”

 

크르르르르르

 

만두라고?

 

자동차랑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그 검은 짐승이.

 

어제까지 사람 몸을 등반하려고 허우적거렸던 그 작은 아기고양이라고?

 

만두야, 초록이 앞에서 이렇게 변신하면 안 돼!”

 

줄리아나까지 외치고 있다.

 

초록이는 줄리아나, 예란이, 만두라고 불린 그 검은 짐승을 번갈아보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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