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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이글] 선상에서

2017. 3. 29. 15:50 | Posted by 호랑이!!!

여기에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

 








다이무스는 배에 올랐다.

 

대개의 시간은 서류 작업이나 가상 전투를 위해 쓰다보니 출장을 다녀오는 것은 간만이다.

 

본디라면 우편으로 계약서만 보내 처리할 일인데 이렇게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역시 교통이 발달한 덕이지.

 

이 배를 타고는 3, 배에서 내려서는 자동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겨우 일주일 남짓한 기간 안에 오고갈 수 있다니.

 

다이무스는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헬리오스에서 오셨군요,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방이 있습니다.”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서두르는 듯 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짐작되는 대략적인 무게, 성격, 주로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렸다.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긴 은발이 흐트러진, 낯익은 사람이 배로 오를 때 쓰는 계단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 안녕!”

 

“...너냐,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귀여운 동생을 만났는데 그게 다야?”

 

네가 배를 탈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지.”

 

그는 티켓을 검표원에게 내밀었다.

 

연합의 이글 홀든, 확인하였습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시면 객실이 있습니다.”

 

나도 볼일 보고 돌아가는 길이거든? 형 방은 어디야아? 나 놀러가도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티켓을 확인했다.

 

“...내 방으로 와라. 특실은 아니지만 그 방보다는 나을 거다.”

 

형 최고야!”

 

특실은 아니라고 했지만 다이무스가 받은 방은 꽤 넓었다.

 

1인실이었지만 물건들은 나름대로 여유있게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이글은 무언가에 흠뻑 젖은 부츠를 벗어던지고 가방에서 편한 옷을 찾았다.

 

아직은 안 된다.”

 

, 왜애.”

 

저녁 시간이 곧이다. 파티는 아니지만 단정하지 못한 차림은 안 돼.”

 

다이무스는 이글의 짐 속에서 빗을 꺼냈다.

 

우선 그 머리부터 어떻게 하도록 하지. 머리끈은 있나?”

 

아니! 안 가져왔어!”

 

이글은 방긋 웃으며 거울 앞에 있는 의자에 털석 앉았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에 서서는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급한대로 땋아 주도록 하지. 나중에 내려서는 머리끈을 마련하던가, 아니면 아예 이 머리를 잘라라.”

 

목 위에 있는 거?”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두피에 돋아난 이 털 말이다.”

 

식사 예절은 제대로 알고 있겠지, 나이프가 어떻고, 사람과의 대화가 어떻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옷차림은...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서 귀를 닫아버린 이글은 거울을 보았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도료를 써서 비슷하게 만들어진 흉터에, 겉만은 본체와 같은 모습.

 

거울 너머로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투박한 손가락이 움직인다.

 

익숙하게.

 

이글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거냐.”

 

형이랑 있는 게 좋아서!”

 

[이글다이글] 클론 이글과 이글이 만났다

2017. 3. 27. 19:10 | Posted by 호랑이!!!

황혼의 도시에도 밤은 온다.

 

유달리 어둡고, 빛이라고는 겨우 달밖에 없는 그런 밤이.

 

이상한 일을 조사하느라 시간이 늦어진 탓에 이글은 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신을 사칭한 편지가 오질 않나, 갑자기 얼굴만 알던 사람이 아깐 왜 그랬어하고 말하지를 않나.

 

심지어는 엘리 꼬맹이가 아찌 머리 또 묶었네!’하고 알은체를 해 온다.

 

이 도시에서 수상쩍은 일을 한다면 역시 그 집단밖에 없지.

 

안타리우스, 뻔하다고.

 

그러나 목적이 뭘까? 하필 자신을 복제한 이유는?

 

걷다보니 문득 벽돌담에 엷은 빛줄기가 스쳤고 이글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검을 꺼내 뒤돌았다.

 

아슬아슬하게, 찔러오는 검이 막혔다.

 

안녕, 원본.”

 

낯익은 얼굴에는 익숙하지도 않은 칼질로 억지로 긁어내린 것 같은 흉터가 있다.

 

이 정도는 막는군, 그래, 그래야지.”

 

이글은 검을 넣고 손을 들었다가 과장스럽게 마구 팔을 문질렀다.

 

으햐아, 목소리는 난데 벨져 형 말투잖아? 으엑 징그러! 아 소름끼쳐, 끼친다구!”

 

다른 이글은 드럼통 위에 걸터앉았다.

 

원본은 그렇게 행동하는군. 좋아, 다음번에는 그렇게 굴어 보지. 좀 더 답게.”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볼일인데?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더니, 진짜의 자리를 놓고 죽고 죽이고 싶은 거야?”

 

아직은 아냐.”

 

아까 그건 인사, 인사.

 

차갑고 느릿한 목소리로, 그 이글은 다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난 겨우 4개월이란 말이야,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지.”

 

그래서, 나는 궁금해.

 

왜 너의 가장 큰 관계는 블레이드... ‘큰형인지.

 

무슨 소리야?”

 

인간에게 커다란 관계란 가족과 애인이 주라고 하던데, 어째서 너는 그 커다란 관계를 한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는 거야?”

 

계란은 한 바구니에 쌓지 말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상하다고.

 

어째서 둘 사이에는 그렇게 강한 믿음이 있고, 이해라는 것이 있고, 기타등등 많은 것이 있는 거지?

 

이게 사랑이야?”

보통 연인 간에는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나?”

그럼 는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이글은 그 이글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장식 술, 낯익은 크기와 모양,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알 것 같은.

 

공기의 긴장이 팽팽해진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예리해지고 시선이 따끔거리며 닿는 것이 느껴졌기에 다른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희미한 달빛에 비쳐, 이글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네가 형과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어?”

 

, 기분 좋은 반응.

 

다른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형이니까.”

 

이글의 검이 발사되듯 뻗어나갔다.

 

다른 이글은 재빠르게 드럼통을 걷어차고 자리를 피했다.

 

“...웃기지 마, 이 빌어먹을 호문클로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글은 한 단어씩 씹어 뱉었다.

 

난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야.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라니까.”

 

아기, 4개월짜리 아기라구.

 

그 이글은 낄낄 웃었다.

 

그러니까, 좀 빌려갈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고 싶다구.

 

어째서 그 사람은 내 편지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만이 단번에 나와 그를 알아보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에게 그렇게 짙은 관계를 느끼는지.

 

아아, 그 사람이 아니구나. -”

 

칼이 이글이 있던 곳의 뒤편 벽에 박혔다.

 

내 형이야. 이 살덩어리 자식이-”

 

뒤로 물러선 이글의 은발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이젠 내 거야

 

 

[1차 bl] 오빠랑 친구랑

2017. 3. 24. 14:48 | Posted by 호랑이!!!

※ 환상의 동물이 있습니다






오빠, 일어나.”

 

작은 손이 단잠을 자던 우진을 흔들었다.

 

우진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는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12, 아직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벌써 이 시간이라니.

 

집에 오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과제할 시간을 빼앗긴 탓에 잠이 들었던 시각이 6시다.

 

6시간이나 잤는데도 아직 졸리다니, 우진은 하품을 했다.

 

... ....?”

 

배고파. 그리고 친구 왔어.”

 

친구... 누구?”

 

우연은 다시금 잠에 빠져들려 하는 오빠를 흔들었다.

 

홍영이 왔어, 일어나아.”

 

일어났어, 일어났어.”

 

눈을 비비고, 우진은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동생의 어깨에 푹 기댔다.

 

“...뭐 먹고... , 흐아아암...”

 

쿠키하고, 전에 오빠가 만들어줬던 케이크하고, 점심으로 스파게티 해줘.”

 

-...”

 

우진은 다시 눈을 비비고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홍영이랑 아직도 친하구나.

 

홍영이는 그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여동생 우연이의... 흔히 말하는 소꿉 친구다.

 

사귄 기간은 유치원 부터니까... 얼추 십 년쯤 되었나.

 

마지막으로 본 건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있었던 동생 생일파티에서였다.

 

중학생이었던 녀석은 쪼끄매서, 아직도 아기 티가 났었지.

 

우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부엌으로 갔다.

 

카운터에서 식탁까지 재료를 늘어놓고 달그락 달그락 준비를 하고 있자니 동생 방 안에서 재잘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귀엽구먼.

 

저 나잇대의 나는 다 큰 것 같았는데, 애들 보면 아직도 아기 같다니까.

 

우진은 티라미수틀과 쿠키 반죽을 냉장고에 넣으며 내심 웃었다.

 

크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자 우진은 동생의 방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헤이, 나 들어간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와-”하는 웃음 섞인 소리가 난다.

 

문을 열자 상 위에 문제집을 펼쳐놓고 홍영이와 우연이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밥 다 됐어, 나와.”

 

-.” “-.”

 

나와서 수저 놓고.”

 

-.” “네에-.”

 

나란히 대답하는 모습이 병아리같다.

 

내 동생 귀여워, 둘 다 귀여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라, 뭔가 달라졌다.

 

문 쪽에 우진이 서 있었던 탓에 그 쪽으로 홍영이 다가왔는데.

 

세상에.

 

홍영이 키 엄-청 컸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1미터는 더 큰 거 아냐?”

 

그만큼은... 아니예요.”

 

오오, 목소리도 이제 낮아졌네. 세상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요만-해서 우연이하고 아장아장 걸어다녔는데, 세상에.”

 

나 아장아장 걸은 적 없거든.”

 

할아버지 같다며 우연이 웃었다.

 

몇 번 스쳐지나가며 보았을 뿐인데 그때마다 부쩍부쩍 자라더니, 아이들은 참 빨리 큰다.

 

우진은 우연이와 홍영이의 그릇에 스파게티를 듬뿍 덜어서 예쁘게 반숙한 계란 프라이까지 하나씩 얹어 주었다.

 

그릇에 수북하게 쌓인 스파게티는 많나?’싶을 정도였지만 한창 자랄때인 두 아이는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맛있어?”

 

! 잘먹었습니다.” “잘먹었습니다.”

 

만들어준 걸 이렇게나 잘 먹으면 역시 뿌듯해진다.

 

우진은 활짝 웃었다.

 

역시 자랄 때라 그런가 잘 먹네. 냉장고에 케이크 만들어놨는데 먹을래?”

 

, 난 조금만. 너도 먹을 거지?”

 

,, ... !”

 

!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기분 탓인가 삐약삐약 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 같다.

 

케이크 그릇과 포크를 가져다주고 주스를 조금씩 마시던 우진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다음번에 보면 나보다 커져 있는 거 아냐, 홍영이 너?”

 

그럴 겁니다.”

 

이야아, 기대되네. 요만하던 애가 나보다 커진다니.”

 

홍영이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잊어 주세요. 곧 민증도 나오고! 1년 쯤 있으면 성인이니까...!”

 

1년이 아니고 2년이겠지, 올해를 빼먹었잖아.

 

우진은 주스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조금만 더 잘래, 설거지 좀-.”

 

에엥 싫어, 요리하고 나면 설거지거리 많단 말이야.”

 

- 하고 대답한 것은 홍영이었다.

 

착하다 착해, 설거지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다 컸어.

 

우진은 홍영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듯이 두드려주고는 방으로 갔다.

 

[티엔하랑마틴] 그냥 차를 마실 뿐인 글

2017. 3. 18. 02:19 | Posted by 호랑이!!!

이하랑의 수련이 끝나고 마틴은 티타임이라며 하랑을 데리고 티타임 장소로 갔다.

 

자리에 모인 것은 브루스, 마틴, 하랑.

 

거기까지라면 그야말로 평화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데.

 

한사람이 더 있다.

 

티엔 정.

 

마틴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가 브루스가 돌아보자 활짝 웃었다.

 

가는 길에 티엔 정이 있기에 불러봤네.”

 

그렇...군요.”

 

웃고 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마틴이 내놓은 것은 디저트였다.

 

티타임이라더니 아이스크림을 꺼내왔군.”

 

하랑 입맛에 맞을만한 것 위주로 가져와 보았죠. 차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했으니까요.”

 

티엔 정은 몰랐겠지만.

 

마틴은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랑은 준비된 자리에 앉아 먼저 동글동글한 과자를 집어 들었다.

 

접시에는 색색깔 다양한 과자가 있었고 어딘가 단 향이 났다.

 

그거 맛있어요. 제대로 만드는 가게가 적어서 요 며칠 찾아다녔는데-”

 

과연, 그래서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곤 한 거군.”

 

하랑의 백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분 탓인가, 뱀의 한숨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마틴과 티엔이 다정한 대화를 할 적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는 했던 하랑의 붉은 강아지들은, 이제는 둘이 대화를 어떻게 하건 아랑곳 않고 자기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돌곤 한다.

 

그리고 개들만큼이나 저 둘에게 익숙해진 하랑은 저 다정한 둘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걸러내며 과자를 한 입 물었다.

 

딱딱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맨 위의 얇은 껍질 뿐.

 

조금 더 힘을 주면 쫀득한 과자가 늘어지는 것 같은 식감으로 떨어진다.

 

남은 부분을 한 입에 털어넣고 이번에는 다른 색 과자를 들어서 둘로 나누었는데 크림이 묻은 쪽과 묻지 않은 쪽으로 나뉘었다.

 

조심조심, 이로 크림을 긁어내는데 차가 한 잔 턱 내밀어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한잔이 더 내밀어진다.

 

차를 양 손에 들고 마시라는 건가? 마카롱이랑 같이 들고? 나 손 두 개밖에 없는데?

 

과자 한쪽에 이를 박은 채 고개를 들었더니 티엔과 마틴이 차 한 잔씩을 내밀고 있었다.

 

이하랑은 진한 맛 차를 좋아한다.”

 

과자 맛이 진하니까 굳이 차까지 맛이 진할 필요는 없다구요.”

 

그럼 우유라도 부으면 되지.”

 

어떻게 차에 우유를 부을 수가 있어요, 이 야만인!”

 

그럼 차에 우유를 붓지 어디에 우유를 부어?

 

양반이 요상한 소리를 하네, 라는 표정인 하랑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마틴은 새 찻잔을 꺼냈다.

 

하랑, 잘 봐요. 이렇게 마시면 더 맛있어진답니다.”

 

찻잔에 우유를 따르고 거기에 차를 붓자 연한 꽃빛으로 차 안이 물든다.

 

거기에 마틴은 각설탕을 두어 개 떨어뜨려 주었다.

 

달고 맛있어 보이는구만!

 

하랑은 덥썩! 마틴이 내민 잔을 받았다가 눈을 마주쳐 버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두운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 같은 눈.

 

그러니까,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보는 티엔의 눈 말이다.

 

“..., 맛을 비교해보고 싶으니까 이것도.”

 

그렇게 받아가자 눈에 파앗- 생기가 돈다.

 

하랑은 참 착하네요. 굳이 티엔을 배려해서 마셔주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 시비라도 거는 건가? 헛수고다.”

 

아까까지 시커먼 구렁텅이 같던 눈을 한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샌가 의기양양해져서는 마틴 쪽으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여유롭게!

 

그러고 어느샌가 다시 싸울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도무지 둘을 붙여 놓을 수가 없어, 정말이지.

 

어쨌거나 어른스러운 내가 중재를 해야지 어쩌겠어.

 

하랑은 브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은 어느 쪽이 좋수? 차에 우유를 탄 것, 우유에 차를 탄 것.”

 

브루스는 벌컥벌컥 마시고 있던 커다란 잔을 텅, 내려놓았다.

 

어지간한 어른 머리통만해서는 잘못 맞았다가는 골로 갈 것 같이 생겼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브루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에는 설탕이다.”

 

 

[커미션 13] 벨져

2017. 2. 1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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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그의 벙커에 있었다. 익숙한 안락의자는 몸을 틀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요란했고 중고품을 주워모은 모니터는 이따끔 꺼지거나 노이즈로 가득차고는 했다. 때로 델신이 새 걸로 갖다줄까?’하고 물어보고는 했으나 유진은 아직 고개를 저었다.

 

[유진, 지금 시간 있어?]

 

헤드셋에서 델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뒤로 젖혀 천국의 지옥불 플레이 영상을 보던 유진은 부리나케 바른 자세로 앉으며 헤드셋을 귀에 꾹 눌렀다.

 

, 있어.”

 

[--구역에 있는데 근처에 뭐 보여?]

 

달그락거리는 키보드를 눌러 게임 영상 대신 cctv 화면으로 전환하며 유진은 마우스를 돌렸다. 델신은 이 세계에서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명령을 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을 텐데, 언제나 정중하게(어쩌면 그렇게 정중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는) 이야기했다. 때문에 유진은 델신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 때가 좋았다.

 

그 앞골목, 왼쪽으로 틀면 두 명. 둘 다 능력자고 50m 반경 안에 지원 차량이 한 대 있어.”

 

[지원사격으로 한 번에 보내줄래?]

 

그 정도야.

 

그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에 모니터가... 있다. 커다란 모니터를 찾고, 상호를 찾아 건물을 해킹하고, 그 모니터에 천국의 지옥불 영상을 송신한 다음 악마를 소환하면...

 

델신.”

 

[? 뭐야?]

 

내가 갈까?”

 

슬슬 델신이 올 시기였으니까. 이번만은 이쪽에서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모니터 너머에서 델신의 입술이 움직였다.

 

[됐어, 이따 내가 갈게]

 

됐어, 이따 내가 갈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흉내를 내고 유진은 천사와 악마 친구들을 델신 쪽으로 보내는 데 집중했다. 이내 지원 차량은 폭발했고 두어 번 시간을 두고 터진 차량은 검은 연기를 쏟아내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차 문이 반동으로 떨어져 나갔고... 유진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하나, , ... 넷다섯...”

 

이상하다, 이런 차에는 보통 여섯 명이 타야 하는데. 나머지 한 명은 어디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니 다섯 명의 것 외에 팔다리가 후둑 굴러떨어졌다.

 

좋아, 다 있어.”

 

처음에는 타버린 손가락 하나도 보기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차도 박살내고 악당도 무찌르고 팔다리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스스로의 발전에 뿌듯해하며 다시 헤드셋을 귀에 꾹 눌렀다.

 

여보세요 델신?”

 

[차는 부쉈어?]

 

깔끔하게.”

 

시체도 길바닥에 나뒹굴지 않고 차는 움직일 수 없게 박살. 아주 깔끔하지. 유진은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내려 천국의 지옥불 BGM을 재생했다.

 

델신 있잖아, 오늘 올 때 말이야.”

 

아까 지원차량을 파괴할 때 BGM을 틀어놓을걸. 그러면 천국의 지옥불에 차가 생긴 것처럼 보였을 텐데.

 

다음번에는 BGM을 틀어두고 기타 소리에 맞춰서 사람을 하나씩 날려 볼까. 유진은 모니터로 델신이 콘크리트 능력자 둘을 메다꽂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니터 가져다줘. 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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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붉은 꽃 02

2017. 1. 24. 23:10 | Posted by 호랑이!!!

 

한스 델러웨이는 별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 매달린 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자비롭다.

 

태양은 너무나 눈이 아파 볼 수 없으며 달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은 별밖에 없다.

 

오늘은 유달리 별이 많이 뜬 밤이라 감사하며 창틀에 턱을 괴고 별을 보는데 옆에 슬금슬금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랑의 요정이니 뭐니 지껄였던 악마.

 

"...시온?"

 

"안녕하신가,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중인가?"

 

"그렇지. 너라는 악마는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러자 시온은 그 앞, 허공에 떠서 하늘을 천천히 가리켰다.

 

"별로 짠 그물을 밤하늘에 펼쳐 고귀한 영혼을 거둘 생각을 하지."

 

"뱀의 혀로군."

 

창에서 새어나오는 난로의 불빛, 배경으로는 수많은 별들과 달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그것들에 둘러싸인 시온을 보며, 한스는 문득 시온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채찍을 찾았다.

 

"...주여..."

 

잠시나마 사특한 혀에 마음을 빼앗길 뻔 했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스스로의 등을 내리치니 악마는 놀라 손에서 채찍을 앗는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Christo)!”

 

신의 이름에 몸을 움찔했지만 시온은 한스 델러웨이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가 몸부림칠수록 시온의 안은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자네 같은 악마와 이야기하면 내 영혼이 병들 것이야!”

 

“...그럼 이야기하지 말게나.”

 

뻔히 대화를 시켜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스 델려웨이는 악마의 손에 들린 채찍에 손을 뻗었다.

 

시온은 채찍을 더 뒤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네.”

 

정결하지 못한 악마 따위가 내 몸에 손대지 말아!”

 

어쩔 수 없지.

 

시온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채찍은 시온의 손에 들려 있었고 한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자네가 사라진다면 차분해질 수 있을 것 같네.”

 

짧은 한숨이 시온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은 금세 모양 좋게 올라붙었고 시온의 손 안에서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채찍은 한 바퀴 춤을 추다 이내 사라졌다.

 

마을에 내려가 본 적 없는데. 함께 구경을 가지 않겠나?”

 

그런 데 쓸 시간은 없다.”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악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쁜 짓을 할 테니까.”

 

만약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여전히 강직한 표정으로 시온을 노려보고 있다.

 

시온은 품에서 은으로 만든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 정도는 볼 수 있나?”

 

“...”

 

짧은 바늘이 I, 긴 바늘이 XII를 가리킬 때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유리판을 한스가 볼 수 있도록 그의 손 위에 얹고, 시온은 손가락으로 짧은 바늘과 긴 바늘과 숫자판을 가리켰다.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네.”

 

하얗고, 가느다랗고, 길쭉한 시온의 손이 회중시계의 뚜껑에 얹혀 느리게 한스의 손을 향해 내려갔다.

 

마치 손깍지를 낀 것처럼 가까워진 그 찰나, 시온은 어딘가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한스 델러웨이의 손바닥 위에 얹힌 은시계만을 남기고.




[청의 엑소시스트/린총수] 전에 쓰다가 말았던 거

2017. 1. 20. 17:25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날 유키오는 밥을 먹다말고 인상을 찌푸리는 린을 보았다.

, 왜 그래?”

못 먹겠어.”

린은 퉤퉤거리며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어느 날 유키오는 간식을 잔뜩 만들어놓고 자신은 손도 대지 않는 린을 보았다.

, 왜 그래?”

요즘 살이 쪄서.”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유키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배에.”

? 유키오는 한쪽 손을 린의 배에 얹었다.

그리고 손 아래에서 전해오는 떨림.

. 형이 복화술을 배웠나 보네!

아니, 배 근육운동을 많이 한 건가?

하하, 나도 참.

유키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무시했다. 하려 했다.

“...우엑!”

으아아아!!!!!!!!!!”

...그래, 린이 헛구역질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키오는 숨을 몰아쉬는 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었다.

누가 내 형수님이야!!!!!!!!”

, 정황상으로는 형수라기보다는 자형이지만.

 

 

 

메피스토 펠레스. 정십자 유일의 순수혈통 악마.

그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이사장실의 의자에 앉아 고급스러운 찻잔에 담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따뜻하게 내리쬐는 해, 게헤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하늘.

살짝 열어둔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바람과 달콤한 쿠키의 향기.

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말 안 듣는 동생, 아마이몬이 이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무슨일이냐 아마... 아니. 무슨 일이지요?”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의 막내동생 오쿠무라 린. 전혀 뜻밖의 사람에 치밀어오르던 짜증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왜 왔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린의 뒤에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유키오에 그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유키오 선...?”

범인을 색출해 주십시오.”

범인이라니?”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설마 이 성실하고 얌전, 순한 유키오 선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메피스토는 유키오의 손에 양 어깨를 잡혔다.

, 아야야...”

내 형과 교미한 잡놈을 잡아 달라고!!!”

 

 

==

 

 

뭐가 어쩌고 어째?

전혀 뜻밖의 단어 나열에 메피스토 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보다, 하필 입니까.”

“...분명히 상대는 남자입니다.”

린이 어깨를 두드리자 가까스로 진정한 유키오가 한 마디 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메피스토는 하, 짧게 숨을 내뱉고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것은 너희 인간 뿐입니다. 게헤나에서는 물론 정십자 안에서도 종종 동성애자인 여성 기사나 남성 기사가 나오곤 하지요. 일전에 보았던 모 엔젤 군도 미소년과 밀회한다는 소문이...”

형이 그 상대자를 깔았다면 모를까, 깔렸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그 유키오의 입에서 저속한 용어라니.

다소간의 신선함을 느끼며 그는 린에게 말을 걸었다.

유키오 선생님에게 섹스 장면이라도 들킨 겁니까? 꽤 이것저것 알고 있네요.”

“...그게 말이지... 충격 먹지 말고 들어봐.”

이번에는 드물게 린이 설명이라는 것을 하려 한다?!

이 이상의 충격이 있겠느냐고 안일하게 생각하던 메피스토는, 이어지는 말에. 격하게. 홍차를 오랄 분사했다.

나 임신했어.”

푸우우우!!!!!!!!!!!!!!!”

 

달밤의 붉은 꽃

2017. 1. 19. 15:59 | Posted by 호랑이!!!

붉은 머리는 길러 묶고 얇은 테 안경 너머의 눈은 요사스러운 보랏빛으로 빛난다.

 

속설에 붉은 머리 사람은 죽어 뱀파이어로 깨어난다던가.

 

하지만 난 이제 뱀파이어도 아닌 악마인걸.

 

시온은 이제 기억도 희미한 옛날일에 머리를 저었다.

 

시온, 나이는 미상.

 

모든 악마들이 그러하듯 재미난 일에 집착하여 살기로 맹세한 그가 꼽은 재미난 일은 남녀 상열지사였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 이루어지는 가장 뻔한 이야기로, 둥글게 굽은 염소뿔을 숨기고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가 "나는 사랑의 요정이야"라며 그들의 사랑을 돕기도 한다.

 

그 정념을 눈치채지 못하게 빨아먹으며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 중간에 변덕이 들거나 하면 그 짝사랑하는 가엾은 사람을 악마 특유의 화술로 살살 꼬드겨 사랑을 집착으로 바꿔 버리고 음침한 마음으로 포식한 뒤 내버려 둬 버린다.

 

그럼 조력자가 사라져 당황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에 눈 먼 이들은 사랑하던 이를 찾아가 법을 어기는 짓을 하기 일쑤였고 체포되면 옥살이를 하거나, 심한 경우 사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온은 숨겨두었던 염소뿔과 꼬리, 딱딱한 발굽을 꺼내어 손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발굽으로는 따가닥닥 소리를 내며 춤을 추곤 했다.

 

아무튼 시온에 관한 대체적인 설명은 여기서 끝.

 

그 시온은 최근 포식과 재미와 미식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발단은 안면을 익힌 다른 불순한 종족의 출신들과 얘기를 하며 일어난 일이다.

 

원래 각자 관심사가 다르다 보니 악마들은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는 이상 서로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우연히 미식에 관한 얘기가 나왔더란다.

 

최근 로맨스에도 시들해진 터라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제법 재미난 얘기가 나왔다.

 

'성직자가 악마에게 키스할 때 나오는 그것은 어떤 미식에도 뒤지지 않는다더라'

 

누군가에게선가 자신은 벌써 여덟이 넘는 성직자를 맛보았다는 자랑이 나왔고 하나둘 허세 섞인 자랑이 나오며 결국에는 싸움이 났다.

 

"나도 맛보고 싶어졌네, 성직자 말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 아직도 먹어보질 못했냐는 얘기가 나오고 근처의 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난 저기 검은 머리가 좋겠어."

 

"저는 저기 후드를 쓴 사람"

 

구미가 당기는 사람이 없어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딱딱하고 진지한 표정, 금발과 푸른 눈의 성직자.

 

근엄한 표정이 성기사래도 믿으련만.

 

"난 저게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너무 힘든 걸 고르는 거 아냐?”

 

힘든 게 맛도 있는 법이지.”

 

걱정은 입에 발릴 정도만, 그리고 다들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인사도 없이 흩어졌고 시온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그 방으로 찾아갔다.

 

"실례하오-"

 

"누구냐."

 

"내 이름은 시온, 사랑의 요정이지."

 

"요정? 사랑의 일은 천사의 소관이다."

 

예상했던 답이라 시온은 숨겨두었던 뿔과 발굽, 꼬리를 드러내었다.

 

그러자 대번에 성직자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악마!"

 

"반갑소 성직자 양반. , 뿔은 숨겨두도록 하지. 뿔이 있으면 모자를 쓸 수 없으니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새로 산 실크햇에 비단과 담비털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사람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왜 왔냐며 썩 꺼지라고 소리쳤다.

 

"사랑의 요정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한눈에 반했을지도 몰라."

 

시온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것도 신의 어린 양인 당신에게 말이야.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지 않소?"

 

"헛소리 마라. 너희같은 타락한 영혼에게 사랑 같은 고귀한 감정이 들 리 없다."

 

하지만 말이야, 하고 시온이 입을 떼었다.

 

"방금 유쾌한 친구들과 얘기를 하는데 내 눈이 성직자 무리에 가 멎더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성직자를 보는 순간 내 미간은 찌푸려졌으니."

 

라며 미간을 팍 찌푸려 보이고는.

 

과장된 몸동작으로 마치 무대 배우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찬양하듯 손을 성직자에게 뻗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는 순간 내 눈이 멈추었어.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 말을 붙여보고 싶고 어떤 사람인가 호기심이 일었지. 그리고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뿔도 꼬리도 숨겼지. , 나는 그대가 두려워할까 심지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잖아?"

 

그러니 말해보시오, 성직자 양반.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이오?"

 

성직자, 한스 델러웨이는 악마와 말을 섞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만 한 마디 붙여도 이단으로 사형당할 터인데 말마디도 아닌 이런 유혹이라니 절대로 안될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표정과 연기에 능숙한 사기꾼으로, 저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올해로 서른줄에 접어드는 한스 델러웨이는 당연하겠지만 악마를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그 간절한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대화를 이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저녁때에 말 한두마디 붙이는 것 정도라면."

 

그러자 겉모습만으로는 스물이 될까 말까, 얼굴에 솜털까지 난 이 악마는 활짝 웃으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약조하지. 일곱 일의 밤을 지내고 그대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오면 나는 떠날 것이오."

 

그러곤 잔뜩 들떠선 그를 밀어 침대에 앉히곤 자신은 의자를 빼어 거꾸로 앉곤 반짝반짝 빛나는 기묘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아? 미래와 과거의 비밀? 사람들 마음속에 숨은 정열을 깨우는 법? 사랑의 묘약을 제조하는 방법? 뭐든 내가 아는 것이라면 가르쳐줄 수 있소."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상스러운 내용이군."

 

"악마에게서 기품을 찾는 일이 이상한 것이지, 우리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럼 어떤 대화가 좋을까. 한때 유행했다던 토론은 어떨까? 바늘 한 개의 끝 위에는 몇 마리의 천사가 춤출 수 있게?"

 

"불경한 입으로 천사를 감히 동물처럼 칭하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내자 악마의 보랏빛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화나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느니 주섬주섬 변명을 집어삼키곤 뒷걸음질 친다.

 

"내가 흥미를 가질 주제네! 악마를 죽여버릴 방법을 가지고 오게! 물론 그 재료도 빼먹으면 안 되겠지!"

 

한 번 소리를 지르며 다가갈 때마다 그 보랏빛 눈동자는 덜덜 떨리고 급기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 열린 창문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애당초 악마 따위와 말을 섞는 게 아니었어.

 

한스 델러웨이는 성경을 집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울 것 같은 어린 젊은이의 보라색 눈동자가 남아 버렸다.

[마스터/재명장군] 펭귄 카피페

2017. 1. 16. 13:17 | Posted by 호랑이!!!

사무실.

 

언제나 들리던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없다 싶더니, 장군이와 경남이는 색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빨간색, 보라색, 노란색 등으로 인쇄된 색종이는 비닐에 담겨서, 혹은 빠져나와서 책상에 널부러져 있었다.

 

뒷정리 제대로 해야 해.”

 

아이한테 말하는 것처럼 재명이 한 마디 하자 장군이는 알았다는 듯 경례를 했다.

 

아 재명씨는 며칠만에 들어와서 하는 첫마디가 잔소리야.”

 

사소한 궁금함이라도 풀려야 직성이 풀리는 젬마는 경남이와 장군이가 종이를 접는 드문드문 쳐다보는 모니터를 쪼르르 가서 보았다.

 

따라해 봅시다 : 펭귄 접기!

 

오늘은 펭귄이네?”

 

오늘? 나 없는 동안에 종이접기나 하고 있었어?”

 

김팀 모르셨구나, 얘들 그동안 공룡이랑 나비 같은 거 접고 있었어요.”

 

장군이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우리한테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에잉, 무정한 사람~ 무심한 사아라암~”

 

이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알게 되면 그게 더 큰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낼름낼름 혀를 내미는 꼴이 얄밉다.

 

그 펭귄들, 여기 안 좋아할 건데.”

 

그건 또 무슨 말?”

 

추운 곳을 좋아하잖아. 펭귄은.”

 

커피가 든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재명이 웃었다.

 

누굴 어린애로 아시나.

 

그럼 갖다가-”

 

따뜻한 곳에서 사는 펭귄도 있, 거든요...!”

 

넌 또 뭘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그러냐.

 

장군이가 경남이를 콕콕 찌르는 것을 보며 재명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팀.”

 

.”

 

감정표현도 할 줄 알고, 좀 인간 같아졌네?”

 

젬마는 히죽 웃고는 자료를 준비한다며 저 쪽으로 갔다.

 

재명은 고개를 다시 저으려다가 미간을 짚는 것으로 참았다.

 

“...됐고, 일 할 준비는 다들 됐나?”

 

 

 

 

 

 

 

 

다음날 사무실을 찾은 재명이는 어제까지만 해도 색종이로 어지러웠던 책상이 말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그래도 뒷정리는 하는군.

 

그러고는 찬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연 김재명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박장군...!”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던 박장군의 빨간 펭귄들이, 냉장고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하이큐/네코마] 하산님 뱀파이어 au

2017. 1. 13. 00:35 | Posted by 호랑이!!!

일어났어, 켄마?”

 

“......”

 

켄마는 침대를 덮은 얇은 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었다.

 

아주 얇은 천이 흔들리는 소리는 얼마 전까지였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또렷하게 들린다.

 

그 외에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이 다물렸다 떨어지는 소리, 조그마한 곤충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도.

 

너무 시끄러워서 아직 적응이 안 돼.”

 

그러자 친구는 웃었다.

 

익숙해질 거야.”

 

붉은 백합 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열자 안으로 달빛이 환하게 비쳤다.

 

귀를 조금 더 기울이면 달빛이 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먼저 방 밖으로 나선 쿠로오를 따라나가며 켄마가 생각했다.

 

 

 

 

 

 

낡은 복도는 아무리 잘 보수한다고 해도 티가 났다.

 

예를 들자면 복도에는 켄마를 위해 푹신한 카페트가 새로 깔려 있었지만 발을 옮길 때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밟혀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고는 했다.

 

분명 같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도, 분명 같은 신발인데도 앞서가는 쿠로오의 발 아래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켄마가 쿠로오를 볼 때면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

 

켄마는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웬 정장이야?”

 

그제야 쿠로오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과 검은색을 기조로 하여 셔츠, 조끼, 구두에 망토까지.

 

평소에 입던 것이 가벼운 차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은 유별나다.

 

, 이거.”

 

쿠로오는 발을 들었다가 구두의 앞굽으로 바닥을 찍었다.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따다닥, , 가벼운 스텝을 밟고 쿠로오는 뽐내는 듯이 과장스레 인사를 했다.

 

내려가서 알려 줄게.”

 

저 미소만 아니었다면 우아하게 한 팔을 들어올렸다고 할 텐데.

 

저 미소가 우아하게라는 단어를 우아한 척으로 바꾸어버린다.

 

다소 악질적으로 본다면 비꼬듯이라는 단어까지 붙어서.

 

쿠로를 따라 내려간 가장 아래층은 홀이다.

 

넓기는 했지만 복도만큼이나 낡았고, 방을 밝히는 것이 겨우 촛불 하나라는 것 때문에 그 이상으로 어두운 홀.

 

가뜩이나 밤이라 어두운데 창문에는 두터운 커튼을 쳤고 작은 틈까지 막아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싸맨 것 같다.

 

꼭꼭 숨어버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모인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외출용 옷을 입고 있었지만.

 

“...뭐야?”

 

가끔 이러고 놀거든여.”

 

키가 큰 탓에 리에프의 망토는 배로 길고 넓었다.

 

탱고는 출 줄 알아?”

 

“...아니.”

 

괜찮아. 탱고를 추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

 

야쿠와 이야기하는데 어깨에 쿠로오의 손이 얹혔다.

 

한 번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자아 레디.

 

쿠로오는 은촛대를 들었다.

 

그 신호에 맞추어 사람들은 가느다란 검은 끈을 꺼내, 기대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가에 두르고 꽉 묶었다.

 

나도 눈가리개를 해야 해?라고 묻기 위해 켄마는 고개를 돌렸다.

 

묶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쿠로오는 이미 검은 끈을 눈가에 매어서 웃고 있었다.

 

-.”

 

 

[마스터/진회장군] 다른 엔딩 2

2017. 1. 4. 19:58 | Posted by 호랑이!!!

 

얇은, 제정신이 아닌 지금 상태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얇은 저 천 너머에 사람이 앉아있다.

 

오른편에 하나, , 그리고 이 편에도 하나, ... ?

 

최소한 네 명.

 

판판한 바닥이 흔들리고 배 바깥에서는 파도가 친다.

 

역시 여기에서 죽는건가.

 

몸이 이만큼 상했으니 장기도 못 판다는 사채업자 말이 생각났다.

 

이대로 수장될 거라면 정신이나 계속 잃고 있을 것이지 괜히 이 몸은 생존욕만 높아서.

 

장군이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회장니임, 나한테 이래도 돼?”

 

그 구체적인 씹새끼는 실패했나? 하긴 실패했으니까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지. 여차하면 돈 다 돌려주고 튀어야 하나?

 

이 모습을 그 형사가 봤으면 너 또 머리 굴리지?’...왜 뜬금없이 얼굴이 생각나고 있어.

 

나 아니면 그 돈 못 찾을 텐데?”

 

네가 내 브레인이기는 한데, 너만한 애는 한국에, 아니, 이 지구에 널렸어. 여기서 한 5퍼센트 떼 줄테니까 찾아달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

 

장군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찾아?”

 

날 뭐에 매달아서 빠뜨리려나~? 하고.”

 

내가 너한테 뭘 어쩐다던?”

 

물론 어쩌기는 하겠지만.

 

진현필이 웃었다.

 

우리 장군이가 아직 나를 잘 몰라. 이 회장님 막 섭섭할려구 그래.”

 

어디 보자, 라며 진현필은 손을 뻗었다.

 

독약 먹여놓고 할 소리야? 어유 나 막 무서워지려고 그러네, 이렇게 회장님이 싸이코패스였나 싶구.”

 

? 독약?”

 

무슨 독약?하고 물어보던 진현필은 이내 박장대소했다.

 

장군이는 귀가 먹먹하도록 울리는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감각이 제멋대로야.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알았는데 아프다던가, 나쁜 감각이 없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는 것 같은 중립적인 감각은, 심지어 저 요란한 소리까지도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기분 좋은 쪽으로.

 

아 젠장, 무슨 반짝이가 떨어지고 하늘이 무지갯빛인 요정 나라냐고.

 

돈도 돈인데 말이야, 나한테는 네가 차-암 중요하거든.”

 

웃음을 그친 진현필이 무언가를 들었다.

 

어두운 안에서도 차갑게 빛을 내는 것은 장군이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조각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도 내 옆에 있을 앤데, 이런 거 입고 다니면 내 가오가 안 살지. 나중에 배 내리면 우리 옷이나 사러 가자?”

 

그말인즉 살려놓고, 옷 입히고, 어딘가에 쓸 데가 있으니 살려놓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그 말에 기뻐하고 안심하기에는 몸이 여전히 이상하다.

 

겨우 바닷바람 한 줄기가 얇은 커튼 아래로 불어와서 몸에 부딪혔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이상하다고밖에 하지 못할 것 같이.

 

허벅지를 핥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스터/진회장군] 다른 엔딩 1

2016. 12. 29. 22:29 | Posted by 호랑이!!!

장군이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그래, 우습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정신을 차렸더라 정도가 맞는 것 같았다.

 

시야는 흐려졌다가 어둑해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대신 귓가로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들려왔고 다른 감각도 서서히 몸에 깨어났다.

 

이거 이놈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일부러 쬐끔만 썼는데.”

 

진회장 목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무언가가 닿았다.

 

? 손이구나.

 

손가락이 배에 난 흉터를 따라 몸을 내려갔다.

 

간이 반이 아작났다고 그랬나? 그러니까 얘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야 너, 적당히 찌르지 그랬어.라고 혀를 찬다.

 

이어 찰싹, 뺨에 손이 닿았다.

 

“...... .....”

 

일어났어?”

 

“..., , 씨이....”

 

일어났구나.”

 

내가 이것까지는 그래도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예쁘다고 오냐오냐했더니 말이야, 누구한테서 날아가려구.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아니, 들리는 소리만 이상한 것이 아니네?

 

감각이 이상하다.

 

어떤 느낌은 너무 강하게, 어떤 느낌은 너무 약하다.

 

이상하게도 몸이 묶여있거나 하지를 않아서 손을 들어올렸다가 바닥을 탕, 내리쳐 보았다.

 

어우, 왜 그러니. 깜짝 놀랐네.”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다.

 

장군이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손을 들어서 다시 바닥을 내리쳤다.

 

... 했어.”

 

목소리가 낯설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자신이 내는 것인데도.

 

.”

 

약이라고 해도 비타민제나 감기약 따위가 아니겠지.

 

억지로 눈을 떠서 쳐다보자 이 쪽을 보며 웃고 있다.

 

나밖에 못 구하는 거야.”

 

바다의 잔물결까지 느껴지는 작은 배.

 

칸을 나누는 것은 얇아서 너머가 들여다보이는 천 한 장.

 

그 너머에는 진회장의 보디가드 여러 명.

 

그리고 이 편에는.

 

나랑 진회장 뿐이군

 

자신과 진회장 뿐.

 

[하이큐/아사노야] 아사히가 알고 보니...의 au

2016. 12. 28. 16:12 | Posted by 호랑이!!!

, 아사히씨!”

 

니시노야는 낯익은 사람이 보여 그가 있는 쪽으로 총총 달려갔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세요?”

 

노야구나.”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라고 말하는 아사히는 니시노야가 우연히 알게 된 나이 많은 친구였다.

 

겉은 얼핏 보면 무섭다지만 속은 성실하고 착하다 못해 소심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니시노야는 그와 종종 놀러가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집 안에서는 운동복 차림으로 자주 보았지만 오늘은- 정장 차림이네.

 

깎지 않은 수염에 긴 머리에 단정하지 않은 사람이 잘 다린 양복을 입고 있으니까 어딘가 우습다.

 

아사히는 이 근처 마트의 로고가 인쇄된 비닐봉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치약도 다 썼고, 반찬 재료도 좀 사러 왔거든.”

 

아 맞다, 치약. 말해주셨으면 제가 사갈 텐데!”

 

아냐, 노야한테 사오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데, 아사히씨는 날 애 취급한단 말이야.

 

니시노야는 아사히가 자연스럽게 차도 쪽으로 가서 서는 것을 보았다.

 

언제 한 번은 억지를 부려 자신이 차도로 걸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오는 차를 피하는 척 하며 자신을 인도 안쪽으로 끌어당겼지.

 

아마 애 취급하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없으리라고 짐작하고, 노야는 그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날이 추워진 요즈음은 해가 짧아서인지 거리는 벌써 어둑해져 있었고 가게들은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화악 불이 켜진 가게에 눈이 부시다는 듯 니시노야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데 아사히가 그 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아사히씨?”

 

손이 왜 이래?”

 

“....”

 

벌써 아사히가 사는 집 앞이었기에 니시노야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왔네요, 뛸까요!”

 

아사히의 집 앞으로 모르는 척 빠르게 걷다가 노야는 어느 생각이 떠올라 아차했다.

 

집 안은 아까 거리에서보다 밝겠지.

 

그럼! 데려다 드렸으니 저는 이만-.”

 

어딜.”

 

니시노야는 팔이 잡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탁한 색 현관등이 켜지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환한 빛이 밝혀졌고 동시에 아사히의 기가 막히다는 비명 역시 터졌다.

 

노야!”

 

질질 끌려서 니시노야는 소파에 앉혀졌다.

 

팽팽한 가죽 재질, 몸을 숙이거나 자세를 바꾸면 소리가 나는 익숙한 소파 표면을 새삼스럽다는 듯 만지작거리자 아사히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었다.

 

“...노야.”

 

“...”

 

니시노야가 가장 좋아하는 차이나칼라 교복은 부분부분 먼지가 묻어 있었다.

 

겉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다음은 구겨진 와이셔츠.

 

와이셔츠에는 물로 씻어낸 것 같은 작은 얼룩이 몇 개나 있었고, 그 아래 티셔츠까지 벗기자 니시노야의 상처가 드러났다.

 

몇 개는 이제 아물어가는 것, 몇 개는 아물다가 터진 것, 새로 생긴 것까지 해서 니시노야의 몸은 엉망이었다.

 

“...”

 

“...별 건 아니고...”

 

척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일은 아니었지만 아사히는 그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상처를 살필 뿐, 반박하지 않았고 조용해지는 것이 싫어서였는지 니시노야는 주절주절 변명을 한 마디씩 꺼냈다.

 

“...그 왜, 그런 규칙 있잖아요. 운동부 애들은 싸우면 출장정지.”

 

어떻게 싸우겠어요.

 

니시노야는 배시시 웃었다.

 

저는 카라스노의 수호신인데.”

 

, 소독약이 상처에 닿자 니시노야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따가워!!”

 

소독약과 연고와 붕대까지.

 

묵묵히 상처 처치만 하다가 마지막 반창고를 붙이고 아사히가 일어섰다.

 

잠깐 나갔다올게.”

 

여전히 정장 차림으로.

 

? 어디를요?”

 

니시노야는 벌떡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갈래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다시 소파에 앉혀졌다.

 

삐걱삐걱 소파가 소리를 냈고 어깨에는 아사히의 손이 얹혀 있다.

 

.

 

가끔 잡아 보았던.

 

크기를 대 보겠다고 손바닥을 대 보았던.

 

따뜻한.

 

그러나 커다란.

 

겨우 손 하나일 뿐인데 니시노야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래봬도 운동부인 자신인데 힘에서... 아냐, 힘에서 눌린 것이 아니다.

 

앞서 자신이 성실하고 착하고 소심하다고까지 이야기한 아사히인데...

 

기다려.”

 

손이 떨어졌는데도 니시노야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아사히는 노야의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는 어깨를 다시 톡톡 두드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딱 딱 칼로 잰 것 같은 발소리가 멀어졌다.

 

 

[제키릭벨져] 릭 생일 축하해!

2016. 12. 13. 21:10 | Posted by 호랑이!!!

늘상 이 곳은 공기가 무겁고 눅눅했다.

 

알지 못했지만.

 

빛은 어렴풋하고, 때문에 차가웠다.

 

알지 못하지만.

 

그나마 빛이 드는 곳.

 

공간의 가운데.

 

그 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한때 우주의 별을 바라보던 눈은 빛조차 알지 못하게 되고.

 

한때 어디든지 걷던 발은 이 곳에 못 박힌 채로.

 

이 곳은 그럭저럭 넓다고 할만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갇힌 것처럼 좁게만 느껴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지만.

 

신도여.”

 

그 좁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이어 다른 사람 또한 들어왔다.

 

뒤이어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였고.

 

공간 안으로 두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 뛰쳐들어왔다.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침입자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일어나라, 나가야 한다!”

 

어딜 간단 말이냐.”

 

가느다란 줄기의 빛으로도 그 사람은 반짝였다.

 

머리카락도, 그리고 파랗게 타오르는 안광도.

 

침입자를 바라보며 아직도 앉아있는 그는, 문득 들짐승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단어조차 인식의 검은 물 아래로 끌려들어가 사라질 즈음 그가 교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도여.”

 

그는 교주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 반응을 하자, 그는 팔을 들어 침입자를 가리켰다.

 

이제 그 침입자는 그를 따라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잡혀 있었다.

 

아마도 그 침입자가 자신을 잡아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도망쳤겠지.

 

그러나 어째서일까, 침입자는 여전히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교주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없애라, 나를 위해.”

 

교주님을 기쁘게 해야 돼.

 

우주와 이 곳을 연결하면, 불이 끓는 화산과 이 곳을 연결하면, 저 차가운 심해 어딘가와 이 곳을 연결하면 사람 하나는 손쉽게 죽일 수 있다.

 

그는 팔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지나치게 가벼운 팔을.

 

, 톰슨!”

 

침입자는 사람의 이름 같은 비명을 질렀고, 때문인지 교주가 웃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는 자신이 교주를 기쁘게 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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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아주 간만에, 다른 곳에 파 둔 함정에서 사냥감을 찾았다.

 

어린, 아니, 젊은 인간.

 

손에는 총이 있고 허리춤에는 덫이 있다.

 

사냥꾼이구나.

 

그 사람은 마틴을 보자 도와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 그리고 덫 버려요.”

 

철컥, 철컥, 묵직한 것이 떨어졌다.

 

그 사람은 물건을 땅에 버리면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늑대! 이 숲에 늑대가 있었어! 아주 커다란, 한 마리에 족히 수백 파운드는 나갈 거야!”

 

달빛이 비치면 음영이 더욱 뚜렷해진다.

 

인간의 눈에도, 그리고 뱀파이어의 눈에도.

 

마틴은 그 사람을 끌어올려서 진정하라는 듯 등을 토닥거렸다.

 

그 사람의 심장 소리가 마틴의 몸을 타고 흘러 마치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틴은 등을 토닥이다가, 입을 벌려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두근.

 

갑작스럽게 빨라졌다가 천천히, 천천히, 소리가 느려지고 천천히 천천하게 소리가 작아져 마침내는 멎는다.

 

마틴은 심장이 이렇게 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평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강가의 나룻배에 누워 손끝을 강물에 담근 채, 시체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런.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자 옆에서 늑대 한 마리가 정신을 차리라는 듯 손을 물었다.

 

.”

 

피를 빨아낸 시체의 옷과 물건을 분리하고 몸을 던져 주었다.

 

먹어.”

 

귀중품, 이건 팔고, 저것도 팔고.

 

그 가운데 탄피에 끈을 꿴 목걸이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돌려 보자 달빛에 탁한 색을 내비친다.

 

마음에 들어.

 

방 하나의 진열장에 던져둘 것이 생겼다.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떼의 늑대들은 뼈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먼저 갈게, 얘들아.”

 

 

[크로X딘X딘] 여우 생일 축하해 1

2016. 12. 5. 20:43 | Posted by 호랑이!!!

딘은 모텔 문을 열었다.

 

새미는 진작에 먼저 들어갔고, 자신은 술집에서 탐문을 계속하다 왔으니 아마도 자고 있겠지.

 

때문에 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문을 열고 어두운 방을 대비해서 핸드폰을 켜 두는데 열쇠로 문을 열었더니 안이 밝다.

 

새미,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들어서자마자 본 것은 침대에 앉아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모르는 사람, 하나는 좀 나이가 든....?

 

나한테 형이 있나?

 

딘은 잠시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젓고 손을 내저었다.

 

실례, 제가 방을 잘못...”

 

?”

 

그 둘 중에서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이 부르자, 딘은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실례지만, 아는 사이? ...이신지.”

 

, . 저것 봐, 이거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니.”

 

그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이 쪽으로 걸어왔다.

 

똑같아. 머리, 얼굴, , 전부가... 하지만 좀 더 어리고 풋풋한 무언가가 있군.”

 

얼굴은 안 똑같아.”

 

마치 무언가를 검사하는 듯 살펴보던 사람은 난데없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크라울리라고 한단다.”

 

그리고 지금 꼬마 다람쥐라고 부른 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다음은 침대에 여전히 앉아 있는, 자신과 닮은 사람 차례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 사람은 씩 웃어 보였다.

 

안녕, 옛날의 나?”

 

자신을 크라울리라고 소개한 사람은 방금 딘이 지나온 모텔 문을 만져보고 있었는데 무언가 알 것 같냐는 다른 사람의 물음에 고개를 양쪽으로 기울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을 꺼냈다.

 

옛날에 붙어먹던 천사들이 한 실수 중 하나 같은걸.”

 

그쪽 일 처리가 납득이 되지 않기는 하지.”

 

그제야 좀 상황이 파악이 될 것 같아 딘은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거, 천사들이 날 미래로 보냈다?”

 

가끔 자기 멋대로 보내고는 하잖아, 그 천사들.”

 

피곤했으므로, 딘은 안락의자에 털석 앉았다.

 

침대가 둘이면 미래의 나랑 같이 자던가... 어라? 침대가 하나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도 저 둘은 한 침대에서 앉아있었지.

 

저기.”

 

딘이 부르자 그 둘은 동시에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스쿼럴? 미니 버전?”

 

모르는, 그러니까 크라울리라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의 자신은 묘하게 오싹하게 느껴졌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그러자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딘을 돌아보았다.

 

뭘까?”

 

그러게, 뭘까?”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크라울리의 핸드폰이었다.

 

액정에는 둘이 웃으면서 술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친구?”

 

그리고 둘을 위해 방도 잡고 침대도 같이 쓰는 사이지. 비록 나는 그 침대에다 여자를 끌어들이지만.”

 

딘은 미래의 딘이 하는 소리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샘은 매일 임팔라 행이겠군, 디저트로 샐러드라도 가져다 줘야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멈추게 한 것은 미래의 딘이다.

 

? 새미가 여기서 왜 나와?”

 

왜냐니. 새미, , 이 둘이 스컬리와 멀더잖아.”

 

멀더는 새 파트너를 찾았단다 꼬마야.”

 

미래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혼란한 딘을 구해준 것은 크라울리였다.

 

그보다, 내 힘으로 원래 시간대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필요한가?”

 

당연하지!”

 

어떤 댓가든?”

 

“...그건 일단 들어보고...”

 

그 대답에 크라울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영혼 고문.”

 

제정신이야?”

 

지옥의 기사 퇴치는 어때?”

 

지옥의 기사가 존재한다고?”

 

지옥의 혼란함을 해결해달라고 한다면?”

 

너 대체 뭔데?”

 

... 그렇지, 영혼은 어떨까.”

 

딘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권총을 더듬었으나, 없다! 임팔라에 두고 왔나봐!

 

대신 소금 주머니를 꺼내 앞에다 좍 뿌렸다.

 

대체 미래의 나는 뭐랑 어울리는 건데!”

 

스포일러란다 작은 다람쥐야.”

 

크라울리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요는, 그래서. 나한테 값을 지불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세상은 준만큼 받는 법이야, 나는 네 사이드킥도, 봉사자도 아니니까 넌-.”

 

이걸로 하자, 며 크라울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커다란 딘은 딘의 뒷덜미를 잡아다 침대로 끌어당겼다.

 

별안간 그의 다리 사이에 앉게 된 딘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쉽지 않았다.

 

,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것 기억하지? 악마에게 바치는 공물은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피, 눈물, 죽음, 그리고...”

 

처녀?”

 

크라울리가 다가왔다.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에 이런 클래식한 공물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지만, 뭐 어쩌겠어. 세상은 공짜가 없는 법이니까.”

 

딘의 다리를 벌리도록 해, .

 

그러자 딘을 붙들고 있는 딘 쪽이 웃음소리를 내더니 다리를 벌렸다.

 

“...스쿼럴, 깜찍하기도 하지.”

 

“딘 대신, D·D는 어떨까.”

 

Different Dean.

 

Developed Dean.

 

Damaged Dean.

 

딘은 크라울리의 손짓 한 번에 다리가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벨트가 딸각거리며 풀리는 한켠으로 더 낮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Demon Dean.”

 

 

[다이토마] 마녀AU로 전에 쓰던거 발견

2016. 12. 2. 19:05 | Posted by 호랑이!!!

intro

마녀의 이동 도구는 기본적으로 가사일에 도움이 되는도구이다.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 예로부터 여자로 한정되었고, 옛날에는 사람이 몸을 실을만한 가사도구가 청소용구인 빗자루(때로 흰염소, 솥단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이동수단은 청소용구가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빗자루를 잘 쓰지 않으니까 모임에 참가하여 확인해도 진공청소기 투성이다. 가끔 로봇 청소기도 보이기는 하지만 타기 힘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마녀들 사이에서 익스트림 스포츠 대용인 것 같다.

이렇듯, 마녀들도 현대 사회에 발맞추어 변화하는데, 이는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몇백년 전까지는 십대 초반에 독립하고는 했지만 현대에는 성인이 되면서 독립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Prol

 

토마스 스티븐슨의 특기 분야는 내지는 얼음마법이다.

 

본디 마녀의 독립은 마녀의 특기 분야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이래서야 큰일이다.

 

요즘은 누구라도 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고 인공눈까지도 만들고 있으니까.

 

인건비와 기계의 비용을 비교해도 자신이 더 싸다고는 할 수 없을뿐더러 기계 대신 써달라고 말하기에도 영 마뜩찮다.

 

자신이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이 기뻐해주는 것이야 좋지만 영 충족감이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 토마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같은 동아리 선배인 이글 홀든이었다.

 

이글은 척척 다가와 토마스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걸쳤다.

 

너 방 남냐?”

 

?”

 

, 그동안 큰형이랑 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형이 자꾸 구박하잖아! 확 나와버리려고.”

 

네에?!”

 

그런 이유로 집을 나온단 말이야?

 

토마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방 없어? 컴퓨터랑 TV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데. 일주일만... 아니, 사흘도 좋으니까 재워줘!”

 

제 방이라도 좋다면야...”

 

토마스는 수락했다.

 

그리고 토마스의 방에 들어와서 이글은 필터 없는 감상을 첫 마디로 삼았다.

 

폐가?”

 

무슨 말이예요! 이래봬도 제가 2년째 살고 있는 방이라구요.”

 

춥고, 좁고, 어둡다.

 

듣자하니 부엌의 스토브도 영 시원찮은 모양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방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으로 이 집은 못 살 집이다.

 

야아아옹

 

이글은 고양이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없는 듯한 검은 고양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 피터. 집 잘 보고 있었어?”

 

토마스가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코를 살짝 가져다 대어 코인사를 하고는 이글 쪽으로 다가갔다.

 

피터, 그 쪽은 이글 선배야. 몇 번 얘기했지? 선배, 그 쪽은 피터예요.”

 

안녕 야옹아~”

 

피터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 이글은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아니, 걔 말고. 토마스 스티븐슨. , . 걔네 집에 와 봤는데 집이 끝내주는 폐가거든?”

 

여기까지만 해도 토마스는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고, 당장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아, 얘랑 살아.”

 

이글 선배!?”

 

그런 걸 맘대로 정하면 어떡해요!

 

토마스가 외쳤지만 이글은 태평하게 그 형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서야 느긋하게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형이 너 만나보자는데?”

 

, 생각해봐.

 

형이 사는 저쪽 동네는 네가 다니는 단과대학과도 가깝고, 집 근처에 장보기 좋은 마트도 하나 있어. 방은 넓고 깨끗하고 동네 치안도 좋고, 관리도 잘 해준다고? 그야 여기보단 비싸지만, 둘이서 나눠 내는 거잖아. 지금 내는 거랑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야...

 

...에 기초한 이글의 설득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만나는 보겠다고 해 버렸다.

 

토마스의 대답을 듣자 이글은 만족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갔고, 요란스레 씻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야?’

 

피터가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꼬리는 책상 아래로 늘어졌고, 불쾌하다는 듯 탁탁 서랍을 쳤다.

 

뭐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나 외에.

 

피터는 책상을 꼬리로 찰싹 때렸다.

 

진짜 할 생각이야?’

 

일단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피터는 불만스럽다는 듯 낮게 우우- 소리를 냈다.

 

토마스는 무어라 하려다 이글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오자 드라이어를 찾아 내밀었다.

 

다음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이글은 일어나기 싫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토요일인걸요, 더 주무세요.”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난 토마스는 피터 밥을 챙긴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운지 오래였고 분주하게 움직인 다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 교재를 펼쳤다.

 

안돼, 벌써 열한 시 반인걸.”

 

그렇네요.”

 

벌써 점심때구나.

 

꼭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글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형이 열두시에 나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그걸 왜 지금 말해요!”

 

토마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원래도 아무것도 없던 방안을 청소하겠다며 청소기를 들었다.

 

“...그런데 선배, 선배네 형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예요?”

 

너랑 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잔소리를 빼면 조용한 편인데 형이 너한테 잔소리를 할 리도 없고. 배려심? 있는 편이지. 책임감도 강하고...

 

무엇보다! 맨날 야근하니까 술 마시고 놀다가 느지막느지막 들어와도 돼! 말이 룸메이트지 주말에나 만나는 주말부부나 다름없다고~”

 

나름 객관적인 정보니까 믿어도 돼!라며 이글은 팽개쳐둔 옷을 입었다.

 

오른쪽 양말까지 다 신은 순간,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 누구세요-”

 

문을 열자, 거기에는 더없이 이글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이글이 여기 있다 들었다만.”

 

형아~ 나 보고 싶었어?”

 

하나도 안 닮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지만 안 닮았다!

 

이글이 토마스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 않았고, 이글은 그게 또 익숙하다는 듯 소개를 시작해서 토마스를 당황시켰다.

 

토마스, 이 쪽은 우리 잔소리쟁이에 구박쟁이 다이무스 형이야. 절대 안 웃어.”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글.”

 

이글은 못 들은체 하고 토마스의 뺨을 꾸욱 찔렀다.

 

얘는 토마스 스티븐슨. 어때, 귀엽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목례로 인사를 마치고 그는 고양이용 간식 캔을 내밀었다.

 

고양이를 키운다기에 사 봤다.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무스 형.”

 

뭐냐.”

 

나 피자 먹고싶어.”

 

가서 먹을거냐 주문할거냐.”

 

역시 형은 상냥해.

 

양손으로 손가락 총 빵야빵야에 윙크라니, 막내는 정말 애교가 많구나.

 

토마스는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