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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X딘X딘] 여우 생일 축하해 1

2016. 12. 5. 20:43 | Posted by 호랑이!!!

딘은 모텔 문을 열었다.

 

새미는 진작에 먼저 들어갔고, 자신은 술집에서 탐문을 계속하다 왔으니 아마도 자고 있겠지.

 

때문에 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문을 열고 어두운 방을 대비해서 핸드폰을 켜 두는데 열쇠로 문을 열었더니 안이 밝다.

 

새미,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들어서자마자 본 것은 침대에 앉아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모르는 사람, 하나는 좀 나이가 든....?

 

나한테 형이 있나?

 

딘은 잠시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젓고 손을 내저었다.

 

실례, 제가 방을 잘못...”

 

?”

 

그 둘 중에서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이 부르자, 딘은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실례지만, 아는 사이? ...이신지.”

 

, . 저것 봐, 이거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니.”

 

그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이 쪽으로 걸어왔다.

 

똑같아. 머리, 얼굴, , 전부가... 하지만 좀 더 어리고 풋풋한 무언가가 있군.”

 

얼굴은 안 똑같아.”

 

마치 무언가를 검사하는 듯 살펴보던 사람은 난데없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크라울리라고 한단다.”

 

그리고 지금 꼬마 다람쥐라고 부른 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다음은 침대에 여전히 앉아 있는, 자신과 닮은 사람 차례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그 사람은 씩 웃어 보였다.

 

안녕, 옛날의 나?”

 

자신을 크라울리라고 소개한 사람은 방금 딘이 지나온 모텔 문을 만져보고 있었는데 무언가 알 것 같냐는 다른 사람의 물음에 고개를 양쪽으로 기울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을 꺼냈다.

 

옛날에 붙어먹던 천사들이 한 실수 중 하나 같은걸.”

 

그쪽 일 처리가 납득이 되지 않기는 하지.”

 

그제야 좀 상황이 파악이 될 것 같아 딘은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거, 천사들이 날 미래로 보냈다?”

 

가끔 자기 멋대로 보내고는 하잖아, 그 천사들.”

 

피곤했으므로, 딘은 안락의자에 털석 앉았다.

 

침대가 둘이면 미래의 나랑 같이 자던가... 어라? 침대가 하나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도 저 둘은 한 침대에서 앉아있었지.

 

저기.”

 

딘이 부르자 그 둘은 동시에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스쿼럴? 미니 버전?”

 

모르는, 그러니까 크라울리라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래의 자신은 묘하게 오싹하게 느껴졌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그러자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딘을 돌아보았다.

 

뭘까?”

 

그러게, 뭘까?”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크라울리의 핸드폰이었다.

 

액정에는 둘이 웃으면서 술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친구?”

 

그리고 둘을 위해 방도 잡고 침대도 같이 쓰는 사이지. 비록 나는 그 침대에다 여자를 끌어들이지만.”

 

딘은 미래의 딘이 하는 소리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샘은 매일 임팔라 행이겠군, 디저트로 샐러드라도 가져다 줘야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멈추게 한 것은 미래의 딘이다.

 

? 새미가 여기서 왜 나와?”

 

왜냐니. 새미, , 이 둘이 스컬리와 멀더잖아.”

 

멀더는 새 파트너를 찾았단다 꼬마야.”

 

미래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혼란한 딘을 구해준 것은 크라울리였다.

 

그보다, 내 힘으로 원래 시간대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필요한가?”

 

당연하지!”

 

어떤 댓가든?”

 

“...그건 일단 들어보고...”

 

그 대답에 크라울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머리를 기울였다.

 

영혼 고문.”

 

제정신이야?”

 

지옥의 기사 퇴치는 어때?”

 

지옥의 기사가 존재한다고?”

 

지옥의 혼란함을 해결해달라고 한다면?”

 

너 대체 뭔데?”

 

... 그렇지, 영혼은 어떨까.”

 

딘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권총을 더듬었으나, 없다! 임팔라에 두고 왔나봐!

 

대신 소금 주머니를 꺼내 앞에다 좍 뿌렸다.

 

대체 미래의 나는 뭐랑 어울리는 건데!”

 

스포일러란다 작은 다람쥐야.”

 

크라울리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요는, 그래서. 나한테 값을 지불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세상은 준만큼 받는 법이야, 나는 네 사이드킥도, 봉사자도 아니니까 넌-.”

 

이걸로 하자, 며 크라울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커다란 딘은 딘의 뒷덜미를 잡아다 침대로 끌어당겼다.

 

별안간 그의 다리 사이에 앉게 된 딘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쉽지 않았다.

 

,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것 기억하지? 악마에게 바치는 공물은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피, 눈물, 죽음, 그리고...”

 

처녀?”

 

크라울리가 다가왔다.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에 이런 클래식한 공물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지만, 뭐 어쩌겠어. 세상은 공짜가 없는 법이니까.”

 

딘의 다리를 벌리도록 해, .

 

그러자 딘을 붙들고 있는 딘 쪽이 웃음소리를 내더니 다리를 벌렸다.

 

“...스쿼럴, 깜찍하기도 하지.”

 

“딘 대신, D·D는 어떨까.”

 

Different Dean.

 

Developed Dean.

 

Damaged Dean.

 

딘은 크라울리의 손짓 한 번에 다리가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벨트가 딸각거리며 풀리는 한켠으로 더 낮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Demon Dean.”

 

 

[다이토마] 마녀AU로 전에 쓰던거 발견

2016. 12. 2. 19:05 | Posted by 호랑이!!!

intro

마녀의 이동 도구는 기본적으로 가사일에 도움이 되는도구이다.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 예로부터 여자로 한정되었고, 옛날에는 사람이 몸을 실을만한 가사도구가 청소용구인 빗자루(때로 흰염소, 솥단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이동수단은 청소용구가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빗자루를 잘 쓰지 않으니까 모임에 참가하여 확인해도 진공청소기 투성이다. 가끔 로봇 청소기도 보이기는 하지만 타기 힘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마녀들 사이에서 익스트림 스포츠 대용인 것 같다.

이렇듯, 마녀들도 현대 사회에 발맞추어 변화하는데, 이는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몇백년 전까지는 십대 초반에 독립하고는 했지만 현대에는 성인이 되면서 독립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Prol

 

토마스 스티븐슨의 특기 분야는 내지는 얼음마법이다.

 

본디 마녀의 독립은 마녀의 특기 분야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이래서야 큰일이다.

 

요즘은 누구라도 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고 인공눈까지도 만들고 있으니까.

 

인건비와 기계의 비용을 비교해도 자신이 더 싸다고는 할 수 없을뿐더러 기계 대신 써달라고 말하기에도 영 마뜩찮다.

 

자신이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이 기뻐해주는 것이야 좋지만 영 충족감이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 토마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같은 동아리 선배인 이글 홀든이었다.

 

이글은 척척 다가와 토마스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걸쳤다.

 

너 방 남냐?”

 

?”

 

, 그동안 큰형이랑 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형이 자꾸 구박하잖아! 확 나와버리려고.”

 

네에?!”

 

그런 이유로 집을 나온단 말이야?

 

토마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방 없어? 컴퓨터랑 TV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데. 일주일만... 아니, 사흘도 좋으니까 재워줘!”

 

제 방이라도 좋다면야...”

 

토마스는 수락했다.

 

그리고 토마스의 방에 들어와서 이글은 필터 없는 감상을 첫 마디로 삼았다.

 

폐가?”

 

무슨 말이예요! 이래봬도 제가 2년째 살고 있는 방이라구요.”

 

춥고, 좁고, 어둡다.

 

듣자하니 부엌의 스토브도 영 시원찮은 모양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방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으로 이 집은 못 살 집이다.

 

야아아옹

 

이글은 고양이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없는 듯한 검은 고양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 피터. 집 잘 보고 있었어?”

 

토마스가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코를 살짝 가져다 대어 코인사를 하고는 이글 쪽으로 다가갔다.

 

피터, 그 쪽은 이글 선배야. 몇 번 얘기했지? 선배, 그 쪽은 피터예요.”

 

안녕 야옹아~”

 

피터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 이글은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아니, 걔 말고. 토마스 스티븐슨. , . 걔네 집에 와 봤는데 집이 끝내주는 폐가거든?”

 

여기까지만 해도 토마스는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고, 당장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아, 얘랑 살아.”

 

이글 선배!?”

 

그런 걸 맘대로 정하면 어떡해요!

 

토마스가 외쳤지만 이글은 태평하게 그 형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서야 느긋하게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형이 너 만나보자는데?”

 

, 생각해봐.

 

형이 사는 저쪽 동네는 네가 다니는 단과대학과도 가깝고, 집 근처에 장보기 좋은 마트도 하나 있어. 방은 넓고 깨끗하고 동네 치안도 좋고, 관리도 잘 해준다고? 그야 여기보단 비싸지만, 둘이서 나눠 내는 거잖아. 지금 내는 거랑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야...

 

...에 기초한 이글의 설득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만나는 보겠다고 해 버렸다.

 

토마스의 대답을 듣자 이글은 만족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갔고, 요란스레 씻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야?’

 

피터가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꼬리는 책상 아래로 늘어졌고, 불쾌하다는 듯 탁탁 서랍을 쳤다.

 

뭐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나 외에.

 

피터는 책상을 꼬리로 찰싹 때렸다.

 

진짜 할 생각이야?’

 

일단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피터는 불만스럽다는 듯 낮게 우우- 소리를 냈다.

 

토마스는 무어라 하려다 이글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오자 드라이어를 찾아 내밀었다.

 

다음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이글은 일어나기 싫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토요일인걸요, 더 주무세요.”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난 토마스는 피터 밥을 챙긴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운지 오래였고 분주하게 움직인 다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 교재를 펼쳤다.

 

안돼, 벌써 열한 시 반인걸.”

 

그렇네요.”

 

벌써 점심때구나.

 

꼭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글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형이 열두시에 나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그걸 왜 지금 말해요!”

 

토마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원래도 아무것도 없던 방안을 청소하겠다며 청소기를 들었다.

 

“...그런데 선배, 선배네 형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예요?”

 

너랑 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잔소리를 빼면 조용한 편인데 형이 너한테 잔소리를 할 리도 없고. 배려심? 있는 편이지. 책임감도 강하고...

 

무엇보다! 맨날 야근하니까 술 마시고 놀다가 느지막느지막 들어와도 돼! 말이 룸메이트지 주말에나 만나는 주말부부나 다름없다고~”

 

나름 객관적인 정보니까 믿어도 돼!라며 이글은 팽개쳐둔 옷을 입었다.

 

오른쪽 양말까지 다 신은 순간,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 누구세요-”

 

문을 열자, 거기에는 더없이 이글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이글이 여기 있다 들었다만.”

 

형아~ 나 보고 싶었어?”

 

하나도 안 닮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지만 안 닮았다!

 

이글이 토마스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 않았고, 이글은 그게 또 익숙하다는 듯 소개를 시작해서 토마스를 당황시켰다.

 

토마스, 이 쪽은 우리 잔소리쟁이에 구박쟁이 다이무스 형이야. 절대 안 웃어.”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글.”

 

이글은 못 들은체 하고 토마스의 뺨을 꾸욱 찔렀다.

 

얘는 토마스 스티븐슨. 어때, 귀엽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목례로 인사를 마치고 그는 고양이용 간식 캔을 내밀었다.

 

고양이를 키운다기에 사 봤다.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무스 형.”

 

뭐냐.”

 

나 피자 먹고싶어.”

 

가서 먹을거냐 주문할거냐.”

 

역시 형은 상냥해.

 

양손으로 손가락 총 빵야빵야에 윙크라니, 막내는 정말 애교가 많구나.

 

토마스는 감탄했다.

 

 

[커미션 10]

2016. 11. 2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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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9] 쿠로오

2016. 11. 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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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다와 바람 (파랑을 듣고)

2016. 10. 25. 06:06 | Posted by 호랑이!!!

발이 물 속에 빠졌다.

 

처음에 발목까지 오던 물은 어느샌가 내 다리를 휘감아 무릎까지 왔고, 조금 더 지나니 허리까지 왔다.

 

이 곳은 작은 바위조차 솟아나지 않은 바다의 한복판.

 

물 밖으로 발을 꺼내려고 했지만 바다는 나를 삼키지도, 뱉지도 않은 채 그저 물고만 있다.

 

나는 물결을 밟으려던 것을 포기하고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머리카락 아래로 거대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검푸른색 바다는 하얗게 부서지는 색의 추억으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눈앞이 하얗게만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빛.

 

내 무거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 아래 해파리가 온갖 색으로 떠오르고 유달리 커다란 물결이 올 때마다 펄쩍 뛰어넘던 나와, 너와, 우리.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바다도 끝없이 푸르고.

 

마치 이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던 날들.

 

그 때를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 물고기가 만들어낸 작은 파도를 발견하고 무심코 뛰어넘었다.

 

무심코, 이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너를 찾았다.

 

너는 이제 여기 없는데.

 

누군가 만들어낸 파도가 여러 겹 다가와 부딪혔다.

 

작은 물고기의 파도를 뛰어넘은 나의 발이 그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그 물은 나를 휘감았다.

 

.

 

복사뼈.

 

종아리.

 

이 검푸르게 넓고 깊은 바다에 내가 가라앉는다.

 

마치 끌려가듯이.

 

한 때 세상의 중심에는 우리가 있었는데.

 

나는 이제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가라앉는다.

 

 

 

 

 

 

 

 

 

내 손 옆으로 잔물결이 일었다.

 

아주 가볍고 부드러워서 알아차리지 못할 뻔한.

 

내 손 옆에 하얀 깃털이 떠 있었다.

 

잔물결이 일었다.

 

잔물결이 일었다.

 

잔물결이 또 일었다.

 

네가 아닐까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하얀 깃털이 쥐였다.

 

깃털 하나.

 

깃털 둘.

 

하얀 깃털 작은 다발.

 

네가 아닐까봐, 라는 말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검푸른 물 속에서 뛰쳐나왔다.

 

햇살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바다에서 가장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이하랑] 기우제

2016. 10. 18. 18:14 | Posted by 호랑이!!!

하랑은 손을 들었다.

 

붉은 색으로 물들인 넓은 소매가 하늘 가득하게 펼쳐졌다가 땅으로 가라앉았다.

 

앞으로 펼친 병풍도 화려하고 그 앞의 제사상도 딴에는 화려하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꽹과리며 북이며 요란하다.

 

알록달록 물들인 천을 나풀거리는 하랑까지 그야말로 눈도 귀도 소란한 가운데 하랑의 눈빛만은 이질적으로 고요했다.

 

신령님, 신령님

 

비를 내려주십사

 

농작물이 풍족하게

 

올해 배는 곯지 않도록

 

비야 비야 내려라.

 

비야 내려라.

 

그런 소원을 뒤로하고 하랑이는 다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그 눈 아프도록 짙게 물들인 소매가 하늘을 덮었다가 다시 가라앉자 멀리서 구름 무리가 나타났다.

 

커다란 구름 무리.

 

사람들은 그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하랑의 눈에는 그 구름을 몰고 오는 이무기가 똑똑히 보였다.

 

소매가 더욱 화려하게 춤추었다.

 

돌풍이다

 

비구름을 몰고 오는 돌풍이다!”

 

그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점점 바람이 강해지더니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굵은 빗방울 하나가 땅에 닿는 것 하나를 기점으로 폭풍이라고 할 정도의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지지대를 세우러 가자

 

논일은 우리가 할 테니 당신들은 그저 있으소

 

사람들은 바삐 걷고 뛰었다.

 

그 가운데 하랑이는 뛰고 돌고 손을 들어 소매를 휘날렸다.

 

이 돌풍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는 병풍 뒤로 거대한 호랑이가 이무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꽹과리가 울었다.

 

호랑이가 이를 드러내었다.

 

바람이 일순 멎었다.

 

하랑의 손짓에 악기가 멎자 이무기가 구슬을 움키고 비가 거세게 내렸다.

 

다시, 음악소리가 커졌다.

 

 

 

 

 

 

 

 

 

비는 정확히 마을 사람들이 원하던 만큼 내렸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적당히.

 

비가 멎고 나서야 하랑이는 춤을 멈추었다.

 

비가 아닌 땀에 젖어서.

 

그리고 누군가는 지쳤다는 것이 역력한 그의 눈만은 마치 싸움이라도 한바탕 한 것처럼 흥분으로 번뜩이더라고 말하였다.

 

 

[심바스카] 책상 뒤

2016. 10. 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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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바스카] 애박님 그림을 보고 연성한 글

2016. 10. 2. 05:10 | Posted by 호랑이!!!

제일 처음에 보았던 것은 아주 작은 아기 때였다.

 

제대로 눈도 못 뜨고 꼬물꼬물 배냇짓 하던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 다음에는 바빠서 한참이나 얼굴을 보지 못했다가, 형님이 가족 모임에 얼굴을 비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에 간신히 짬을 내어 왔었던 때였다.

 

그 전에는 깡깡거리는 어린 것들이 그득했었던 모임에는 이제 청년 티를 내는 아이들이 제법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알아볼 리가 만무하니 사라비라던가, 아는 얼굴 위주로 인사를 하고 잠깐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꽤나 의기양양한 꼬마가 알짱댔었지.

 

빌어먹을.

 

스카는 책상 위를 손으로 짚으며 딱 한 마디를 씹어 삼켰다.

 

심바, 삼촌을 만났구나

 

나직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 귀에 쟁쟁했다.

 

그 뒤로 누가 어쨌더라 저쨌더라 내가 뭘 어쨌더라 걔가 어쨌더라 하는 지루한 생각에 빠지려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분명 자신의 손은 책상 위를 짚고 있는데 옷의 단추가 후두두 풀려서 벗겨진다.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유독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는.

 

네 생각을 좀 했다.”

 

잘생겼다는 거? 잘 컸다던가?”

 

아직은 한참 어리다는 점.”

 

스카는 뒤로 돌았다.

 

허리에 감기는 팔이 옛날에 보았던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계속 어리게 있어주었으면 하지만

 

아마도 사라비가 매주었을 심바의 넥타이는 그와 잘 어울리는 갈색이다.

 

스카는 그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삼촌.”

 

뭐냐.”

 

능숙하게 다려둔 정장은 구겨져 있었다.

 

재주껏 물을 뿌리고 털어 편다고 해도 누군가는 알아차리겠지.

 

혀를 차면서 스카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넥타이 매 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넥타이를 못 매?”

 

그러면서도 스카는 손을 뻗었고, 손에는 넥타이가 잡혔다.

 

셔츠 깃을 세우게 하고 한 바퀴 휙 둘러서 넥타이를 매주는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Khan

 

있지 삼촌.”

 

스카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지만 심바의 손이 더 빨랐다.

 

엄지손가락이 액정 위를 긋자 붉은 줄이 길게 남았다.

 

아빠가 그랬는데, 나중에 내가 이 가족 모임을 이끌게 될 거래.”

 

아무리 아닌 척 점잔을 빼지만 스카는 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항상, 어릴 적부터 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짓는 표정.

 

예를 들자면 자존심 같은 것에 스크래치가 생기기 직전에 짓는 그런 것.

 

호랑이들 같은 개인주의자들하고 어울리는 것보다는 나랑 있는 쪽이 더 유익하지 않아?”

 

핸드폰 이리 주렴, 심바.”

 

삼촌.”

 

스카는 그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네가 크면 다 이해하게 될 거란다.”

 

난 이미 다 컸어.”

 

.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그 뺨을 꼬집어 흔들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이 더더욱 찡그려졌다.

 

무파사한테는 갔다고 해.”

 

저녁 때는 시간 비울 거지?”

 

일이 일찍 끝나면 생각해 보지.”

 

마지막으로 잘 빗어내린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 놓고.

 

스카는 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번 뒤돌아보고는 방에서 나갔다.

 

흡족하게.

 

 




, 나는 네게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만나는 것을 낮밤을 가려가며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오늘 만난 것은 꽤 이상스럽다고 카스티엘이 생각했다.

 

아무리 자는 시간이 적다고 해도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살고 있으니 이 시간이면 딘은 대개 잠을 자는데.

 

그래? ?”

 

글세, 나는 지금... 네 영혼이... 매우...”

 

딘은 양 손을 얼굴 옆으로 올려서 두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악마스럽다고?”

 

저 웃음은 카스티엘에게 익숙했다.

 

딘은 자주 웃었고 저런 즐겁다는 웃음도 적잖게 보았으니까.

 

하지만.

 

딘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나?

 

, 나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그냥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

 

, 그것은 잘못된 거다.”

 

딘은 카스티엘의 어깨를 잡았다.

 

? 뭐가 잘못되었는데?”

 

네 영혼이...”

 

코앞에서 딘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나 웃음으로 폐를 비워내던 딘은 숨을 헐떡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알게 뭐야!”

 

.”

 

“‘그런 말은 옳지 않다라고 하려고? ?”

 

딘은 어깨를 꽉 쥐었다가, 카스티엘을 밀쳤다.

 

옳지 않은 일! 살라는 대로 살다가, 옳은 일을 하려다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좀 봐!”

 

딘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다가가, 카스티엘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날 좀 봐.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다가, 샘을 열심히 지키려다가, 천국도 지키고 이 땅도 지키고 세계를 지키려다 어떻게 되었는지 좀 보라고. 어때? 한 인간의 영혼까지 착취한 보람이 느껴져?”

 

천국은... 우리는 그런 게-”

 

아니겠지 물론! ‘신의 말씀을 따라서 세계를 어쩌고저쩌고’”

 

카스티엘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딘이 야단스럽게 손을 팔랑거렸다.

 

내가 힘들 때 뭐 하고 있었어?

 

나 역시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했었다.

 

도울 힘이 있었음에도 모른 척 하고 있었지.

 

그럴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신의 의도에 어긋난다.

 

그래서, 그게 힘든 줄 몰랐다?”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다.”

 

개소리.

 

카스티엘의 멱살이 잡혀 들렸다.

 

너는 알고 있었어!!!”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가.

 

카스티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앞에 딘이 웃고 있었다.

 

왜 나에게 온 것인가?”

 

오다니, 내가?”

 

우리는 그냥 길 가다가 마주친거야, 라고 말하며 딘은 카스티엘을 밀쳤다.

 

이번에는 카스티엘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

 

카스티엘은 우리라는 말이 딘과 카스티엘 만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

 

나와 가자. 내가 도와주겠다.”

 

그래서 애써 불렀고.

 

그러나 딘은 카스티엘의 손을 잡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카스티엘은 볼 수 있었다.

 

저 뒤.

 

어둠 속.

 

언제부터 서 있었던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하나의 인영을.

 

이미 새 친구가 생겼어.”

 

익숙하다는 듯이 크라울리의 손이 딘의 허리에 감겼다.

 

파이를 안주로 술이나 진탕 마시면서 영화나 볼까?”

 

먼저 가 있어. 난 이 가엾은 천사를 위로하도록 하지.”

 

크라울리는 주저앉은 카스티엘 앞으로 다가갔다.

 

주저없이 멀어지는 발소리를 좇던 눈이 크라울리에게 향했다.

 

카인의 낙인은?”

 

매일 약간의 피로 달래고 있어, 나쁘지 않지.”

 

이것 봐, 우리 매일 이렇게 재미나게 지낸다고.

 

이 날은 작은 다람쥐가 술집에서 노래 부른 날, 이 날은 당구 친 날, 볼링도 치고...

 

너희가 지운 짐은 이제 없어.”

 

그것은 짐이 아니다.”

 

태초에 한 짐승이 신에게 불편을 말했다.

 

저희의 등에 짐이 있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가느다란 두 다리로 땅을 기며 무거운 짐까지 떠안아야 합니까?

 

그러자 신이 말했다.

 

그것은 짐이 아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라.

 

그것은 날개다.”

 

몸보다 무거운 날개는 짐이지.”

 

그럼 이만 가 볼게, 우리 침대는 스쿼럴 혼자 쓰기는 너무 작거든.

 

크라울리가 이죽거렸다.

 

 

[커미션 7(편지)] 다나

2016. 9. 24.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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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6(편지)] 까미유

2016. 9. 1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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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

 

.”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

 

?”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홀든의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검을 받는다.

 

그 검은 지금까지 썼던 목검이나 가검, 혹은 날을 무디게 만든 예식용 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홀든의 이름 아래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글 홀든이 검을 받을 때 반대했다.

 

이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글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한 젊은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위의 두 형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다이무스는,

 

네가 그만한 무게를 보여주지 않아서다. 어른스럽게 굴어라

 

벨져는,

 

남들이 널 판단하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선택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글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벨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참 이글에게 검을 주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한 안으로 들어가서 대뜸 가장 무겁고 긴 검을 채어 나왔다.

 

왜 하필 가장 길고 무거운 검이었나.”

 

이글은 남들이 말하는 종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경써본 적 없었지만, 다이무스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답군.”

 

그래서 다이무스가 짧게 뱉은 마지막 말에는 상처받았었나 보다.

 

아니, 상처 같은 거창한 것 말고, 그냥 한 대 맞은 정도

 

...라고 이글은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글이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수많은 검이었다.

 

전부 홀든을 위해 만들어지는 고급품의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특기에 맞게 홈이 더 패어있다던가, 모양이 다르거나, 날이 셋 달리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가장 이글의 눈을 끈 것은 검집에 날개가 음각되어 가죽끈과 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을 끈 것은 검신이 두텁고 무게감이 강한 짧은 검.

 

어쩌면 그것이 이글에게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글은 그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을 집었다.

 

그는 절대로 벨져처럼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살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옆에 나란히 서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길고 무거운 검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검을 쉽게 잘 다룬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처음에는 검이었던 것은 계속 바뀌었다.

 

형을 따라 영국으로 간다면, 다른 세력에서 나 자신을 증명한다면, 나 혼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목표가 바뀔수록 마음 역시 바뀌어갔다.

 

 

 

 

 

 

어느 날 이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본가로 가자.”

 

“...얼씨구, 그 말을 왜-애 벨져 형이 할까나...?”

 

벨져는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망나니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말끔한 집이군.

 

덧붙여 집 안에서 셔츠는 고사하고 속옷이나 걸칠까 싶던 녀석은 의외로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서 네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축하? 무슨 축하? 아버지... 하암, 승진이라도 하셨어? 아니면 어머니? 아니면 삼촌들이나 뭐 문하생이 어디 나가서 훈장이라도 따 왔대...?”

 

태평한 척 하품을 하는 저 머릿속에서는 아마 최근 신문이나 벨져 자신, 혹은 다이무스 형의 태도에서 본가와 관련된 무언가가 없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 형인가? 그 형 요즘 외출하고 출장이 잦더라니.”

 

그래.”

 

, 축하는 축하고. 어차피 트와일라잇으로 돌아올 거 아냐. 난 됐어.”

 

벨져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글에게 어떤 말을 해야 데려갈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훈장이라던가, 어디에서 공적을 세우거나 하는 시시한 일이 아니다.”

 

! 하하하하, 형이 그런 말을 하니 되게 웃기네!”

 

이 웃음은 꽤나 진심이다.

 

이글은 폭소를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탁탁 털었다.

 

그럼 뭔데?”

 

결혼이다.”

 

벨져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들었는데 말이야, ?”

 

상대는 아버지 아는 분의 막내딸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양질의 결합인데 그 상대가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더군.”

 

“...5분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바깥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이글이 들어가고, 안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딴에는 제 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저 안쪽에서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지.

 

정확히 4분하고 45초가 지나고 이글이 뛰어나왔다.

 

벨져와 이글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용하군.”

 

뭐가?”

 

그런 여자랑 형은 어울리지 않아, 못해도 3일이면 형에게 질려서 결혼을 후회할 걸, 형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왜 하필 다이무스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형은 성실하니 마음이 없더라도 가정에 충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을 떠난 너나 기사단에 뼈를 묻을 나와 결혼할 수는 없잖느냐. ...라고 할 거잖아.”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다들 이글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하고 우려를 표했기에 이글은 축하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고, 행사를 하고, 연회를 즐기고, 그 모든 일이 끝나 쉴 즈음은 밤이었다.

 

이글은 방을 나섰다.

 

갑주도 없고, 장갑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맨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문을 열자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탄야의 독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운 것이 열린 문으로 흘러넘쳐서 이글은 잠시지만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다이무스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형의 일인데, 와야지.”

 

다이무스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간혹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서류나 편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술병이 놓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잔은 없고,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잔은?”

 

마시다보니 필요 없어져서 씻으라고 내놓았다.”

 

이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방이 어둡다.

 

이글은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

 

선물은 없어. 그야~ 나 형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도 나한테 집 얘기는 해주지도 않고~”

 

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잖느냐.”

 

아하하, 그랬나?”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이글이 웃을 때마다, 다이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청소한지 오래된 물건을 건드리듯 무거움이 피어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있잖아, .”

 

뭐냐.”

 

사람이 결혼하면, 어른스러움이 늘어나는 걸까.”

 

다이무스는 그 말에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나도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데, 그럴 리 없겠지.”

 

형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고?”

 

나는?이라고 이글은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다이무스가 이어 말했다.

 

너는... 그렇게나 다 큰 것 같은데.”

 

“...내가, 어른 같아?”

 

가장 무겁고 긴 검을 휘두르고,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내고 있으니.”

 

다이무스는 이글 쪽으로 새 병을 내밀었다.

 

마실 테냐.”

 

이글은 그 병을 받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시다가.

 

...아니, 사실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대화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글이 입을 열었다.

 

몇 년이나 망설인 말이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을.

 

다이무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만약에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바뀌었을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더라면.

 

다이무스는 몇 가지 가능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영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가 말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무거운 향에 익사하고 싶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글의 발은 움직였고,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에서 맑은 바람이 꽃과 풀의 향기와 탄산수에 넣는 레몬의 향을 싣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공기다.

 

차라리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낸다는 내가 형에게 묶여서 말조차 하지 못해.”

 

차라리 어리다고 해줘.

 

결혼하지 말라고 울면서 떼쓰게 해줘.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이글은 코와 입을 눌러 숨을 참았다.

 

 

 

[루드빅X탄야] 연구소(선비님 썰 기반)

2016. 8. 21. 23:30 | Posted by 호랑이!!!

연구소장 탄야는 처음부터 루드빅이 싫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프로일라인.”

 

루드빅이 자신의 손을 끌어 입술 앞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탄야는 냉랭하게 내려다보며 손을 빼었다.

 

저런 경박함이라니 어이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군. 이런 연구실보다는 어디 무대 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탄야의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다른 연구원이 와서 그녀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어디 유명한 대학 교수의 추천을 받았음, 성적 우수, 수재, 등등.

 

이 파일은 루드비히 와일드에 대해 추천받았을 때에도 읽었던 것이다.

 

글을 읽으며 수식어만 놓고 보았을 때, 탄야가 기대했던 것은 백의가 잘 어울리며 단정한 차림에 수수한 인상의 남자였다.

 

약간의 취향을 곁들이자면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준수한 용모... 정도.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어떤가?

 

겉에 걸친 저것은 아무리 봐도 가죽옷이다.

 

그나마도 맨가슴이 훤히 드러난.

 

단정? 가슴이 드러났다니까!

 

심지어 몸에 저게 뭐야, 문신? 목에는 초커?

 

아무리 그런 것을 요새 젊은 애들(루드비히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행이라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눈두덩에 저건 노란 섀도우다.

 

자신도 진한 화장에 노출이 있는 옷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탄야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루드빅을 훑어보았다.

 

아래로... 아래로...

 

세상에, 지금 속옷도 안 입은 거야!?

 

 

 

 

 

 

 

 

 

어떻습니까?”

 

뭐가 어때.”

 

안경을 써 봤거든요. 이런 것이 취향이라고 하길래.”

 

탄야는 루드빅이 검은색 반-무테 안경을 치켜올리자 지나가던 라이샌더를 끌어당겼다.

 

이쪽이 내 취향이거든?”

 

탄야 선생님?”

 

사랑스럽게 구불거리는 금발, 동글동글 귀여운 파란 눈, 그리고 그 위에 걸친 것은 빨간색 뿔테 안경.

 

말랑말랑한 볼을 주물거리는 탄야에게 그만해달라고 말하려던 라이샌더는 그 커다란 신입 연구원이 일부러 허리를 숙여 자기에게 눈높이를 맞추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흐으으응...”

 

턱을 잡고 이쪽, 저쪽, 머리를 숙이게 했다가 들게 했다가...

 

루드빅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라이샌더는 탄야가 서류를 받아주자마자 인사도 없이 도망쳤다.

 

같은 금발에, 눈 색이야 뭐 그렇다 치고... 다른 거라면 이것밖에 없군요.”

 

루드빅은 라이샌더가 쓰고 있던 빨간 뿔테안경을 들어올렸다.

 

그건 또 언제 낚아챈거야?”

 

아까?”

 

루드빅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빨간 뿔테 안경을 코에 걸쳐 보았다.

 

아까 그 애도 그렇게 시력이 나쁘지는 않군요.”

 

유리에 흐릿하게 비치는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루드빅은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탄야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역시 본판이 괜찮으니 뭘 써도 그럴싸...”

 

당장 돌려줘.”

 

루드빅은 어깨를 으쓱했다.

 

탄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서류 주고. 가서, 안경 돌려주고.”

 

네 네, 여기 실험 보고서입니다.”

 

탄야는 보고서를 받자마자 표지부터 넘겨 보았다.

 

일부러 까다로운 실험을 넘겨주었는데, 과연 수재라는 말만은 진짜인지 실험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쓰인 보고서가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때, 합격점입니까?”

 

탄야가 흘긋 쳐다보자, 루드빅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보고서군.”

 

그러면...”

 

루드빅은 탄야의 손을 잡았다.

 

손이 천천히 입가로 가다가 멈추었다.

 

상은?”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댔다가는 해고당할 줄 알아.”

 

꼭 돈일 필요는 없는데.”

 

루드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탄야는 손을 홱 비틀어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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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라이화클] 서커스의 숙소에서 2

2016. 7. 26. 03:59 | Posted by 호랑이!!!

라이샌더는 안고 있던 꽃다발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오늘도 땀과 화장을 씻고 하얀 와이셔츠, 갈색 반바지를 입을 즈음이면 문이 열리고 

루드빅이 들어왔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루드빅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가 라이샌더의 머리에 대고 탈탈 털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와이셔츠에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앞의 거울을 통해서 흘긋 보았지만 라이샌더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그렇게 활짝 웃던 아이가.


그렇다고 가엾게 여길 수는 없지만


루드빅은 여느 때처럼 라이샌더를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데려다 놓고 혹시나 누가 문을 열거나, 방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 문간에 기대섰다.


5분 정도.


갑자기 화이트 클라프가 루드빅을 손짓하여 불렀다.


뭡니까.”


자네도 끼지 않겠나?”


저 말입니까?”


내가 왜 자네에게 그 키워드를 알려줬다고 생각하지?”


루드빅은 화이트 클라프를 쳐다보았다가 그의 무릎에 앉아서 헐떡이는 라이샌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가리개를 하고, 입었던 갈색 반바지는 진즉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처음부터 크다 싶었던 하얀 와이셔츠는 어깨가 드러나도록 흘러내릴 것을 손으로 쥐어 막고 있었다.


어차피 화이트가 손을 놓으라고 하면 바로 놓아 버릴 것이면서.


저것은 오기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일까.


루드빅은 그들이 있는 침대 위로 가 앉으며 생각했다.


라이샌더, 그대로 허리를 숙여라.”


화이트 클라프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의 말에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침대를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해야 했으므로, 쥐고 있던 옷깃을 놓아 벌어진 사이로 발갛게 익은 몸이 보였다.

 

아무런 감흥 없이,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내려다보았다.


지퍼를 열어드려라.”


라이샌더는 시키는 대로 바지의 벨트며 지퍼를 풀었다.


입에 물어.”


화이트 클라프가 명령하면 라이샌더는 실행한다.


꽤나 열심이지만 아직은 서투름에,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 아래에서, 작은 머리통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손으로 쥐고... 굳이 입에 다 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침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졌을 때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했습니다.”


쓰다듬어 준다고 해서 단박에 긴장이 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루드빅이 보지 못한 것을 화이트 클라프가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도록 꽉 쥔 손이 조금 풀린 것을.


그 일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도구 외의 방면으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아이는 내 것이고, 루드빅은 이 아이에게 아무런 감정을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시간이 지난 뒤 라이샌더의 몸에는, 더 정확히 말해 화이트 클라프의 손이 닿은 허리와 손목과 허벅지에는 불그스름한 손자국이 남았다.

 

여태껏 남아본 적 없던 것이.

 

 

 

 

 

 

 

 

 

루드빅은 옷만 겨우 주워 입은 라이샌더를 안고 복도를 걸어갔다.

 

라이샌더를 방으로 옮긴 후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청소할 사람을 부르는 것도 루드빅이 할 일이었다.

 

저벅, 저벅.

 

품에 안겨서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 걸음소리가 오늘따라 느리게 난다고 생각했다.

 

라이샌더.”

 

이름이 불리자 라이샌더가 고개를 들었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방을 나온 뒤 풀어지려던 몸이 그 말에 다시금 굳어간다.

 

품 속에 안긴 것이 꼬물거리더니 손가락이 나와 눈을 가린 천을 당겨 벗었다.

 

왜요?”

 

그건 답이 될 수 없는데요.”

 

라이샌더는 입을 닫아버렸다.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젖은 옷가지를 벗겨 주느라 새파란 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샌더는 잠시 쭈뼛거리면서 루드빅 쪽을 보다가 수건조차 가져가지 않고 욕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억지로 열지는 않겠지만, 문에 손을 대어 보니 묵직한 것이 걸렸다.

 

어린아이가 두려워할 때 그러는 것처럼 문 앞에 누군가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았다.

 

루드빅은 닫힌 문의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잠금쇠조차 없는 문이니까, 손을 대어 밀기만 하면 열린다.

 

하지만 고작 그런 질문에 그렇게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

 

루드빅이 라이샌더의 옷을 가져가려고 할 때, 문 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라요.”

 

루드빅은 방에서 나가려다 멈추고 주머니를 뒤졌다.

 

별다른 것이...

 

, 있다.

 

꽃다발을 사고 남은 잔돈이 거슬렸었지.

 

루드빅은 작은 사탕을 꽃다발이 있는 책상 위에 놓고 방을 나서다가 문득 우스워졌다.

 

저 애한테 뭘 하고 싶은 거지? 친절이라도 베풀고 싶은 건가?

 

겨우 몸 한 번 섞었다고?

 

이것도 일종의 충동이겠거니 하며 루드빅은 세탁물 바구니에 옷가지를 던져 넣었다.

 

 

[샘이랑 딘 나옴] 담배, 향수, 침대

2016. 7. 22. 23:41 | Posted by 호랑이!!!

제대로 청소를 안 했나 봐. 담배 냄새가 나.”

 

샘은 모텔로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동네에 하나뿐이라는 이 모텔은 값만 비쌌지 안쪽은 좁고 불만을 제기할 곳이 수두룩했다.

 

딘은 쉬고 싶다며 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바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이만큼 오래됐으면 좀 바꾸라고...”

 

간접흡연으로 죽을 지경이야.”

 

죽음의 원인이 악마도, 괴물도, 알 수 없는 사고사도 아니고 간접흡연이라니.”

 

딘은 낄낄거리면서 이불을 들고 몇 번 털었다.

 

잠자리에서 까다롭게 굴지 않고, 굴어본 적도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오늘 이 곳은 좀 너무했다.

 

나갈까? 이런 곳에서 자느니 차라리 차에서 자는 게 더 낫겠어.”

 

씻을 곳은 필요하잖아. 침대랑, 텔레비전이랑, 전기 통하는 콘센트도.”

 

투덜거리는 모양에 고개를 젓다가 샘은 테이블에 놓인 화장품을 하나 들었다.

 

이것 봐, 남성용 스킨은 있어.”

 

남성용 향수겠지. 난 그런 거 안 발라.”

 

딘은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까딱까딱 강조하는 표현을 하고는 팩 돌아섰다.

 

덧붙여서 그거, 향만 강한 싸구려야.”

 

손바닥에 스킨을 착 착 뿌려서 얼굴에 바르려던 샘 윈체스터는 딘의 말에 언제나처럼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하려는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촤악.

 

노트북을 켜서 영화라도 보려고 했던 딘은 목덜미에 닿는 차갑고 향긋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머리를 푸르르 털고는 샘을 팩 노려보았다.

 

형도 좀 발라봐, 피부에 좋을걸.”

 

샘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빙그레 웃었고 딘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너 지금 실수한거야.”

 

글쎄, 난 모르겠는데.”

 

딘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남성용 스킨을 집었다.

 

어라, 남성용?

 

어이, 너 나한테 뭐 뿌렸어?”

 

그러자 샘은 방긋방긋 웃는 표정으로 부렸던 스킨통을 들어 보였다.

 

여성용 토너.”

 

좋아, 네가 먼저 시작한거야.”

 

딘은 손에 남성용 화장수를 덜어 샘에게 확 뿌리듯이 손을 휘둘렀다.

 

샘도 손에다가 여성용 화장수를 덜어서 딘에게 뿌려댔다.

 

이 바보같은 짓은 장장 삼십분이 지나서야 멈추었는데, 그것도 딘의 손에 든 화장수 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서였다.

 

, 머리 말린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젖었어.”

 

형한테서 좋은 향이 나.”

 

너한테서는 냄새 나.”

 

딘은 입에까지 들어간 것 같다며 퉤퉤거렸다.

 

우리 방금 좀 애같이 놀았던 것 같아.”

 

좀이 아니고 많이.”

 

딘은 한 번 더 씻을 거라며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샘은 다음은 나! 라고 하고는 텔레비전을 틀며 침대에 누웠다.

 

샘의 침대도 몸을 누였더니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샘한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미션 5] 나가

2016. 7. 2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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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리퍼맥] 단어 파레트

2016. 7. 16. 05:32 | Posted by 호랑이!!!

캐붕 있을듯 세계관 오류 있을듯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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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때마다 하나씩 세워두는 탄피가 미끄러진 손에 부딪혀 구르다가 빈 병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내었다.

 

하나, , ... 일곱, 여덟... 열셋, 열넷...?

 

얼마나 마셔댄거야.

 

리퍼는 습관적으로 가면의 눈구멍을 더듬으려다가 자신이 지금은 가면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몽롱하다.

 

하늘에 뜬 달이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한낱 반사되는 빛 무리로 보일 만큼... 취했군...”

 

아 그건 나이가 들어서...”

 

때렸다.

 

배은망덕한 놈.”

 

리퍼는 미간을 모으더니 자신이 세워두었던 탄피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탄피는 도미노처럼 하나가 쓰러지자 잇달아 우르르 무너져버렸다.

 

“66번 국도에서 널 줍는 게 아니었어.”

 

맥크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탄피를 쳐 우르르 넘어뜨렸다.

 

탄피는 누구 것이 누구 것인지 모르도록 섞여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나무로 만든 좌식 탁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동안 작은 잔 안에 술이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는 이어 병을 따서 마시는 소리로 바뀌었다.

 

병나발 부는 거냐.”

 

이것도 다-아 어디어디의 미스터 레예스에게 배운 거라고.”

 

리퍼는 눈을 흘겼다.

 

처음 술 마셨을 때는 마시던 거랑 맛이 다르다, 쓰다, 향이 강하니 뭐니 하면서 불평 불만에 작은 잔에만 따라 마셨었지. 그때는 좀 어린애다웠는데.”

 

그래서 더 굴린 거지? 귀엽다, 면서.”

 

“...내 학생이니까 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 어린애는 어느샌가 성년의 날을 거치고 성인이 되어...

 

라고 이어 떠들던 맥크리는 말을 멈추었다.

 

취했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난 아직도 나의 레예스 씨가 좋아.”

 

취했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마지막으로 의미 없는 말을 나누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리퍼는 마시던 도수 센 아일랜드 술병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 취했다. 내가 이겼어.”

 

야호! 라면서 휘파람까지 불어대는 모습을 보다가 맥크리는 눈을 감았다.

 

“...네가 날 따라올 줄 알았다.”

 

어느 즈음인지는 특별히 입에 올리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

 

의견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둘로 갈라졌을 때.

 

맥크리는 다음 술병의 뚜껑을 열어 입가에 대고 기울였다.

 

?”

 

리퍼는 괜스레 상을 더듬어 잡히는 안주를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몸을 확 일으켰다.

 

난 레예스 씨의 학생이니까?”

 

리퍼는.

 

리퍼라고 불리는 사람은 한쪽으로 무언가를 깨물고는 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러다 얼굴이 삐뚤어져라고 놀리곤 했던 버릇이다.

 

맥크리가 시가를 깨무는 것과 같은.

 

그 사람은 맥크리의 어깨를 잡았다.

 

가끔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할 때 나오던 버릇이다.

 

사람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던데 어쩌면 이렇게나 그대로인지.

 

맥크리는 고개를 비틀었다.

 

챙 넓은 모자가 리퍼의 이마에 부딪혔다.

 

네놈은........... 내 거였으니까.”

 

어린애는 언젠가 자라기 마련이야.”

 

맥크리는 하하 웃었다.

 

. 레예스 씨.”

 

네놈이 나이 들었다고 해서-”

 

맥크리는 리퍼의 입을 막았다.

 

아직 둘만 남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어.

 

어른끼리 하는 거 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