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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붉은 꽃

2017. 1. 19. 15:59 | Posted by 호랑이!!!

붉은 머리는 길러 묶고 얇은 테 안경 너머의 눈은 요사스러운 보랏빛으로 빛난다.

 

속설에 붉은 머리 사람은 죽어 뱀파이어로 깨어난다던가.

 

하지만 난 이제 뱀파이어도 아닌 악마인걸.

 

시온은 이제 기억도 희미한 옛날일에 머리를 저었다.

 

시온, 나이는 미상.

 

모든 악마들이 그러하듯 재미난 일에 집착하여 살기로 맹세한 그가 꼽은 재미난 일은 남녀 상열지사였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 이루어지는 가장 뻔한 이야기로, 둥글게 굽은 염소뿔을 숨기고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가 "나는 사랑의 요정이야"라며 그들의 사랑을 돕기도 한다.

 

그 정념을 눈치채지 못하게 빨아먹으며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 중간에 변덕이 들거나 하면 그 짝사랑하는 가엾은 사람을 악마 특유의 화술로 살살 꼬드겨 사랑을 집착으로 바꿔 버리고 음침한 마음으로 포식한 뒤 내버려 둬 버린다.

 

그럼 조력자가 사라져 당황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에 눈 먼 이들은 사랑하던 이를 찾아가 법을 어기는 짓을 하기 일쑤였고 체포되면 옥살이를 하거나, 심한 경우 사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온은 숨겨두었던 염소뿔과 꼬리, 딱딱한 발굽을 꺼내어 손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발굽으로는 따가닥닥 소리를 내며 춤을 추곤 했다.

 

아무튼 시온에 관한 대체적인 설명은 여기서 끝.

 

그 시온은 최근 포식과 재미와 미식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발단은 안면을 익힌 다른 불순한 종족의 출신들과 얘기를 하며 일어난 일이다.

 

원래 각자 관심사가 다르다 보니 악마들은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는 이상 서로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우연히 미식에 관한 얘기가 나왔더란다.

 

최근 로맨스에도 시들해진 터라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제법 재미난 얘기가 나왔다.

 

'성직자가 악마에게 키스할 때 나오는 그것은 어떤 미식에도 뒤지지 않는다더라'

 

누군가에게선가 자신은 벌써 여덟이 넘는 성직자를 맛보았다는 자랑이 나왔고 하나둘 허세 섞인 자랑이 나오며 결국에는 싸움이 났다.

 

"나도 맛보고 싶어졌네, 성직자 말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 아직도 먹어보질 못했냐는 얘기가 나오고 근처의 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난 저기 검은 머리가 좋겠어."

 

"저는 저기 후드를 쓴 사람"

 

구미가 당기는 사람이 없어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딱딱하고 진지한 표정, 금발과 푸른 눈의 성직자.

 

근엄한 표정이 성기사래도 믿으련만.

 

"난 저게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너무 힘든 걸 고르는 거 아냐?”

 

힘든 게 맛도 있는 법이지.”

 

걱정은 입에 발릴 정도만, 그리고 다들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인사도 없이 흩어졌고 시온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그 방으로 찾아갔다.

 

"실례하오-"

 

"누구냐."

 

"내 이름은 시온, 사랑의 요정이지."

 

"요정? 사랑의 일은 천사의 소관이다."

 

예상했던 답이라 시온은 숨겨두었던 뿔과 발굽, 꼬리를 드러내었다.

 

그러자 대번에 성직자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악마!"

 

"반갑소 성직자 양반. , 뿔은 숨겨두도록 하지. 뿔이 있으면 모자를 쓸 수 없으니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새로 산 실크햇에 비단과 담비털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사람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왜 왔냐며 썩 꺼지라고 소리쳤다.

 

"사랑의 요정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한눈에 반했을지도 몰라."

 

시온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것도 신의 어린 양인 당신에게 말이야.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지 않소?"

 

"헛소리 마라. 너희같은 타락한 영혼에게 사랑 같은 고귀한 감정이 들 리 없다."

 

하지만 말이야, 하고 시온이 입을 떼었다.

 

"방금 유쾌한 친구들과 얘기를 하는데 내 눈이 성직자 무리에 가 멎더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성직자를 보는 순간 내 미간은 찌푸려졌으니."

 

라며 미간을 팍 찌푸려 보이고는.

 

과장된 몸동작으로 마치 무대 배우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찬양하듯 손을 성직자에게 뻗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는 순간 내 눈이 멈추었어.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 말을 붙여보고 싶고 어떤 사람인가 호기심이 일었지. 그리고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뿔도 꼬리도 숨겼지. , 나는 그대가 두려워할까 심지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잖아?"

 

그러니 말해보시오, 성직자 양반.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이오?"

 

성직자, 한스 델러웨이는 악마와 말을 섞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만 한 마디 붙여도 이단으로 사형당할 터인데 말마디도 아닌 이런 유혹이라니 절대로 안될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표정과 연기에 능숙한 사기꾼으로, 저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올해로 서른줄에 접어드는 한스 델러웨이는 당연하겠지만 악마를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그 간절한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대화를 이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저녁때에 말 한두마디 붙이는 것 정도라면."

 

그러자 겉모습만으로는 스물이 될까 말까, 얼굴에 솜털까지 난 이 악마는 활짝 웃으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약조하지. 일곱 일의 밤을 지내고 그대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오면 나는 떠날 것이오."

 

그러곤 잔뜩 들떠선 그를 밀어 침대에 앉히곤 자신은 의자를 빼어 거꾸로 앉곤 반짝반짝 빛나는 기묘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아? 미래와 과거의 비밀? 사람들 마음속에 숨은 정열을 깨우는 법? 사랑의 묘약을 제조하는 방법? 뭐든 내가 아는 것이라면 가르쳐줄 수 있소."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상스러운 내용이군."

 

"악마에게서 기품을 찾는 일이 이상한 것이지, 우리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럼 어떤 대화가 좋을까. 한때 유행했다던 토론은 어떨까? 바늘 한 개의 끝 위에는 몇 마리의 천사가 춤출 수 있게?"

 

"불경한 입으로 천사를 감히 동물처럼 칭하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내자 악마의 보랏빛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화나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느니 주섬주섬 변명을 집어삼키곤 뒷걸음질 친다.

 

"내가 흥미를 가질 주제네! 악마를 죽여버릴 방법을 가지고 오게! 물론 그 재료도 빼먹으면 안 되겠지!"

 

한 번 소리를 지르며 다가갈 때마다 그 보랏빛 눈동자는 덜덜 떨리고 급기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 열린 창문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애당초 악마 따위와 말을 섞는 게 아니었어.

 

한스 델러웨이는 성경을 집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울 것 같은 어린 젊은이의 보라색 눈동자가 남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