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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붉은 꽃 02

2017. 1. 24. 23:10 | Posted by 호랑이!!!

 

한스 델러웨이는 별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 매달린 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자비롭다.

 

태양은 너무나 눈이 아파 볼 수 없으며 달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은 별밖에 없다.

 

오늘은 유달리 별이 많이 뜬 밤이라 감사하며 창틀에 턱을 괴고 별을 보는데 옆에 슬금슬금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랑의 요정이니 뭐니 지껄였던 악마.

 

"...시온?"

 

"안녕하신가,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중인가?"

 

"그렇지. 너라는 악마는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러자 시온은 그 앞, 허공에 떠서 하늘을 천천히 가리켰다.

 

"별로 짠 그물을 밤하늘에 펼쳐 고귀한 영혼을 거둘 생각을 하지."

 

"뱀의 혀로군."

 

창에서 새어나오는 난로의 불빛, 배경으로는 수많은 별들과 달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그것들에 둘러싸인 시온을 보며, 한스는 문득 시온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채찍을 찾았다.

 

"...주여..."

 

잠시나마 사특한 혀에 마음을 빼앗길 뻔 했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스스로의 등을 내리치니 악마는 놀라 손에서 채찍을 앗는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Christo)!”

 

신의 이름에 몸을 움찔했지만 시온은 한스 델러웨이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가 몸부림칠수록 시온의 안은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자네 같은 악마와 이야기하면 내 영혼이 병들 것이야!”

 

“...그럼 이야기하지 말게나.”

 

뻔히 대화를 시켜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스 델려웨이는 악마의 손에 들린 채찍에 손을 뻗었다.

 

시온은 채찍을 더 뒤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네.”

 

정결하지 못한 악마 따위가 내 몸에 손대지 말아!”

 

어쩔 수 없지.

 

시온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채찍은 시온의 손에 들려 있었고 한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자네가 사라진다면 차분해질 수 있을 것 같네.”

 

짧은 한숨이 시온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은 금세 모양 좋게 올라붙었고 시온의 손 안에서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채찍은 한 바퀴 춤을 추다 이내 사라졌다.

 

마을에 내려가 본 적 없는데. 함께 구경을 가지 않겠나?”

 

그런 데 쓸 시간은 없다.”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악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쁜 짓을 할 테니까.”

 

만약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여전히 강직한 표정으로 시온을 노려보고 있다.

 

시온은 품에서 은으로 만든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 정도는 볼 수 있나?”

 

“...”

 

짧은 바늘이 I, 긴 바늘이 XII를 가리킬 때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유리판을 한스가 볼 수 있도록 그의 손 위에 얹고, 시온은 손가락으로 짧은 바늘과 긴 바늘과 숫자판을 가리켰다.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네.”

 

하얗고, 가느다랗고, 길쭉한 시온의 손이 회중시계의 뚜껑에 얹혀 느리게 한스의 손을 향해 내려갔다.

 

마치 손깍지를 낀 것처럼 가까워진 그 찰나, 시온은 어딘가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한스 델러웨이의 손바닥 위에 얹힌 은시계만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