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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8

2019. 7. 3. 16:41 | Posted by 호랑이!!!

 

바실리를 데려온 후 사흘째 되는 날 오후, 프루던스가 아라벨라를 찾아왔다.

 

아라벨라 아가씨, 바실리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라벨라는 품이 넉넉한 옷에 굽이 없는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프루던스의 말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갔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 가운만 하나 걸치시고 와주십시오.”

 

프루던스는 금색 술이 달린 짙은 녹색 가운을 아라벨라의 어깨에 걸치고는 앞장섰다.

 

계단을 오르고, 프루던스는 언젠가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던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도록 해.”

 

놀랄 만큼 명확한 발음에 깨끗한 목소리는 어릴 적 아라벨라가 들은 그대로였다.

 

딱 한번이었지만.’

 

아라벨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환자를 위한 방이 되어서인지 방 안은 빈틈없이 하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책상 가장자리에는 푹신한 천을 대 놓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촛대가 있었고 사용하기 위해 꺼내놓은 초가 몇 개 나와서 책 옆을 뒹굴었다.

 

아라벨라는 한쪽 발을 뒤로 빼어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어릴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네가 나를 구했다지.”

 

고압적인 말투와 눈빛이 쏟아졌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할머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일찍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실리는 아라벨라 옆에 선 프루던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라벨라에게 의자를. 그리고 마실 것도.”

 

하얀 천을 댄 나무 의자를 밀어 주고 프루던스는 방에서 나갔다.

 

바실리는 베개를 등 뒤에 하나 더 넣어 꼿꼿한 자세로 아라벨라를 마주했다.

 

아라벨라, 영지는 어떻게 하고 온 것이냐.”

 

영지는 아버지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셰필라를 말하는 모양이군. 그 녀석은 영 변변찮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에멜라가 죽었다지.”

 

아라벨라는 고개를 들어 바실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그렇더군. 듣기로는 셰필라가 새 부인을 들였다고 하더구나.”

 

그렇습니다.”

 

둘 사이에서 난 것이 그 까만머리 꼬마고. 내가 십 년쯤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농담도.

 

아라벨라는 재미있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농담에 뚱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언장은 있었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제 너는 서른 즈음 되었고?”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뭐라고.”

 

바실리의 입 끝이 아래를 향한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허락이 떨어지면 프루던스가 차와 과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프루던스. 내가 사라진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 한 달이라니, 그럼 저 밖에 커다란 애는 누구 애냔 말이야!”

 

셰필라님과 새 부인 사피야님의 자식입니다.”

 

그 한 달 새 저만큼 커지지는 않았을 거고!”

 

아라벨라는 찻잔을 받았다.

 

오래 되었습니다. 장부에 빈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적으로 후원한 것 같습니다.”

 

누가!”

 

“...아버지가요.”

 

망할 창부 같으니! 감언이설로 살살 꼬드겨서...!”

 

프루던스가 헛기침을 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보고 계십니다.”

 

“......후우...”

 

바실리는 약차를 벌컥 마셨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에 이어 과자까지 입에 툭 던져 넣었다.

 

아라벨라.”

 

, 할머님.”

 

그동안 많이 배웠나?”

 

, 할머님. 그간 프루던스가 가정교사를 붙여 주어서 예법도 배웠고 자수도 놓고 외국어도...”

 

“....그럼 에멜라는 뭘 가르쳤지?”

 

승마술과 경제에 관한 것, 정치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꽃꽂이나...”

 

리본 고르는 일 따위를 배웠다는 거군. 네게 필요한 건 하나도 안 가르쳤어.”

 

아라벨라의 시선에 힘이 실렸다.

 

바실리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고개를 들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에멜라가 네 출생에 대해 특별히 한 이야기는 없더냐.”

 

렐리악은 오래 이어져 온 백작가였고 특별한 일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더 낮아지거나 더 높아지는 일 없이 이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지는 들었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 가지를 약속하면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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