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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4

2019. 3. 16. 01:34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가씨.”

 

아라벨라는 높이가 한 뼘이나 되는 힐 위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시녀들이 급하게 마르틴의 짐을 쌌지만 작은 가방 하나는 꼭 자기가 들겠다고 우겨 아주 작은 가방을 손에 쥔 모습에 겨우 인상이 펴질 뻔 했지만 집사가 내민 보석 박힌 손가방에 다시 우그러졌다.

 

뭐야. 됐어.”

 

숙녀라면 마땅히 드셔야 합니다.”

 

됐어, 저기 짐마차에 같이 넣어둬.”

 

이것은 들고 가셔야 합니다. 안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말에 아라벨라는 가방을 받았다.

 

씹기만 하면 입안 청소를 해준다는 무슨 구취제가 한 병 들어 있고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과 자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 있고, 입술 위에 덧바를 수 있는 분홍색 물감이랑 은칠한 장미 장식 거울이 또 하나.

 

“...이게 무슨 꼭 필요한 물건인데?”

 

무릇 숙녀라면 부끄러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 때를 대비해서 드리는 물건입니다.”

 

양파나 마늘을 먹고 나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입술 위에 칠한 물감이 옅어질 때가 있다고 말을 시작한 집사는 이후로 아가씨가 사용하는 손수건에 관한 이야기와 사용법을 서른 가지나 말하려고 했다.

 

날 십 년이 넘게 보았으면 알 텐데, 그거 안 쓸 거라는 걸.”

 

아가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우아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가씨의 의무이며, 물감을 칠하고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아가씨의 권리라는 것을요.”

 

짜증나.”

 

숙녀는 그런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마차에 타라며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이 손을 내밀었다.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라벨라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을 쥐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깥에서는 셰필라 백작의 말이 들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차할 때는 네가 누나를 지켜 줘야 한다. 알겠지? 네가 누나 보호자가 되는 거야.”

 

풀 사박이는 소리가 나더니 사피야가 가벼운 남색 드레스에 은회색 천을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은장식이 달린 신발이 이슬이 맺힌 풀 위를 밟자 향긋한 향기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준비는 다 되었니?”

 

아라벨라는 코 끝을 찡그렸다.

 

마르틴이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나고 마차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잘 다녀오렴, 아라벨라.”

 

다녀올게요 엄마!”

 

마르틴이 고개를 반짝 내밀었다.

 

난생 처음으로 아들과 떨어지는 사피야 렐리악은 의연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그 뺨을 쓸어 주었다.

 

누나 말 잘 듣고,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잘 다녀오렴.”

 

!”

 

마차는 최소한의 사람에게서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사람들이 밟아 단단해진 길 위에서 마차는 부드럽게 달그락거렸지만 쿠션을 잔뜩 댄 마차 안은 약간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자 대장장이 일을 하는 크룰탄과 눈이 마주쳐 웃는 낯으로 손은 흔들었지만, 아라벨라의 머릿속은 할머니에 대한 일로 가득차 있었다.

 

아라벨라는 할머니를 네 살 때 딱 한 번 만났다.

 

할머니는 녹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틀어 올려서 얇고 번들거리는 하얀 가죽 같은 것으로 고정했고, 시선을 받은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 비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아라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새까만 말 위로 날아올랐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장면을 떠올렸더니 왠지 몸이 근질거려서 창밖으로 몸을 빼었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얼룩무늬 말을 탄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젠장.”

 

저는 스파크입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깥으로 몸을 내밀면 위험하니 부디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데일라도 혹시 여기 있어?”

 

데일라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야 말, 하얀색이고 갈기는 짧아. 마구를 구름 무늬로 장식했어.”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내민 손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파크는 잠시 앞뒤로 다녀오더니 데일라가 앞에서 마차를 끌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아라벨라는 다시금 말을 타고 싶어져서 끙끙거렸다.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곳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로, 왕국과 왕국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의 끝에 자리하는데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닷새나 걸렸고 그나마도 아가씨를 노숙하게 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에 며칠은 밤을 새서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아라벨라를 잠시 밖에 나오게 해줄 리가 만무했고,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구경할 시간 역시 주지 않았다.

 

한 번은 창문으로 몰래 나갈까 했지만 금세 스파크에게 들켰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이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라벨라는 엿새째의 저녁에 마차 안에 쿠션을 깔고 그 위를 구르는 것으로 힘을 발산했다.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 아가씨.”

 

노크 소리가 났다.

 

이번 여행에서 총 책임을 맡은 기사와 렐리악 가문의 상징인 용 문양이 새겨진 장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는 스파크만 남겨두고 렐리악 전 백작님의 집사에게 이 마차를 인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아래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기사는 마르틴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일렀습니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는 동안 식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둑한 해에 역광으로 새까만 잎사귀를 바람이 흔들었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몰면 마을은 점점 더 작아지고 멀어졌고 장난치다 지쳐 잠든 마르틴의 발이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달랑거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고 벌써 이틀이나 신은 힐은 걷지도 않았는데 발을 아프게 했다.

 

지나치게 평화롭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는데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뭇잎과 가지가 요란하게 부딪히고 꺾이면서 나는 소리가.

 

마차 천장을 쳐다보는데 불쑥 무언가가 나무 천장을 뚫었다.

 

나무가 거꾸로 자라나듯 천장에서 솟아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도련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지는 해에 안이 더 똑똑히 보였다.

 

부러지고 꺾어진 나무.

 

진액을 뚝뚝 흘리고 풋내가 진동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피 냄새 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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