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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1

2019. 5. 29. 14:2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등에서 잠들었고, 깨었더니 아침이었다.

 

뱃속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와 배에 손을 얹었더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하루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차가운 시냇물 몇 모금뿐이라는 것도.

 

아침식사 시간이었기에 1층으로 내려가자 이스트를 넣어 동그랗게 부풀린 빵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에 곁들일 꿀과 갓 만든 버터도.

 

그리고 베이컨이나 소시지.

 

과일도 달게 조린 것과 신선한 것 두 가지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손질한 과일은 이 계절이면 푹 익어서 달고 부드럽겠지.

 

자르는 것에는 이도 필요없다.

 

혀로 꾹 누르기만 해도 그 연약한 것은 으깨져 달콤한 물이 되리라.

 

변하지 않는 메뉴이건만 기대에 가득차서 아라벨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무릎에 핸드백을 얹은 마르틴이 화들짝 놀랐다가 휴우 한숨을 쉬며 다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조그맣고 반들거리는 머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아라벨라를 알아보았는지 머리를 쏙 내밀고 삐이, 울었다.

 

마르틴은 소시지 조각을 뱀(같은 것)에게 먹이고 있었다.

 

소금기 있는 걸 먹여도 되나?”

 

잘 먹고 있어. 물도. 있지, 삐가 물 마실 때 있잖아, 막 볼이 이렇게-”

 

? 삐라고?”

 

아라벨라는 마틴의 건너편에 앉으려다 귀를 의심했다.

 

삐 하고 우니까 삐.”

 

“...마틴, 너 말 한 마리 있지?”

 

.”

 

3살짜리, 까만색과 하얀색이 들어간 순한 암말.

 

이름을 뭐라고 지었어?”

 

까맣고 하야니까 체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아라벨라는 자리에 앉아 동그란 빵을 비틀어 찢었다.

 

손안에서 껍질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고체라기보다는 액체처럼 보이는 버터는 나이프 위에서부터 가장자리가 흐물흐물 녹아 진득하게 빵 위에 듬뿍 얹힌다.

 

거기에 절인 베리류를 시럽째로 푹 떠서 얹고 한입 가득 깨물자 버터가 바깥으로 밀려나와 뺨에 묻었지만 맛이 환상적이었다.

 

접시에 소시지와 베이컨, 스크램블드 에그를 한 무더기나 가져와서 마르틴의 뱀은 접시 위의 마지막 소시지를 아라벨라가 자르는 순간 자그맣게 삐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육즙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기름진 소시지가 아라벨라의 포크에 꿰뚫려 입 안으로 사라질.... 뻔 했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뽑아 내밀자 마르틴의 뱀은 잽싸게 목을 뻗어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시지를 낚아챘다.

 

쳐든 입 사이로 머리만큼이나 굵은 소시지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라벨라는 물을 한 잔 가득 들이켰다.

 

그런 아라벨라의 기세에 마르틴은 겨우 설탕에 절인 나무딸기를 조금씩 먹을 뿐, 조금 덜어준 고기는 다 뱀 입으로 간다.

 

자기 배가 차고 나니 그런 게 보여 아라벨라는 부끄러워하며 계란을 듬뿍 떠서 마르틴의 접시에다 올려주었다.

 

“...나 혼자 다 먹다니 부끄럽네.”

 

누나는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얼마나 배고팠겠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문이 열렸고 마르틴의 뱀은 후다닥 가방 속으로, 마르틴은 몸으로 가방을 가렸다가 조심스럽게 찰칵, 걸쇠를 닫아 테이블보 아래로 숨긴다.

 

들어온 사람은 프루던스였다.

 

아가씨, 언제쯤 나가려 하십니까?”

 

아침 먹었으니까 이제 곧.”

 

튼튼한 신발을 가져왔으니 발에 맞으신지 신겨드리겠습니다.”

 

프루던스가 가져온 것은 아라벨라가 3층에서 본 적 있는 가죽신이다.

 

3층에서 보았을 때는 철편이 붙어 있었지만 아라벨라가 걸을 것을 생각하여 떼놓은 모양으로 아라벨라의 발에 딱 맞았다.

 

잘 맞으시는군요. 이 사이즈로 갖바치에게 주문을 넣어두겠습니다. 장식이나 재질, 모양에 있어 주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가벼운 걸로.”

 

알겠습니다.”

 

프루던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렸다.

 

,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무게가 좀 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을 조금 쌌습니다. 만약 늦어질 것 같으시면 안에 조그만 폭죽을 넣어두었으니 둥근 구멍을 위로 하고 마력을 조금 불어넣어 사용해주십시오.”

 

그런 게 여기에 있어?”

 

국경이나 변방에서 위급 시에나 사용한다는 물건은 듣기만 했지 보는 건 또 처음인데 집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종종 주인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발을 뻗자 익숙하게 신발이 신겨진다.

 

누군가 신었다는 신발은 부드러워서 발목 부근을 끈으로 다시 조정해주자 아주 편했다.

 

누나, 어디 가?”

 

산에.”

 

아까까지는 뱃속이 조이도록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터질 것 같다.

 

포만의 행복감에 우선하여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과 먹어 불러진 배가 신경쓰여 아라벨라는 집사가 가져다준 바구니를 당겨 안았다.

 

묵직했다.

 

살짝 덮개를 열어보니 그 안은 절인 과일과 야채가 병째로 몇 개나 들어있고 둥근 치즈가 자르지도 않은 것이 통째로 하나, 빵도 몇 덩어리나 있다.

 

베이컨도 햄도 소시지도 줄줄이 들어서 나들이용 도시락이 아니라 사냥 나간 병사 한 부대를 먹이는 용도인 것 같다.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남은 것은 슈체른에게 주고 오십시오.”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마르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슈체른은 누구야?”

 

어제 만난 사람.”

 

이것은 답이 되지 못했나 보다.

 

이것밖에 모르는데도.

 

그러나 마르틴은 포기하지 않고, 지나쳐 가려는 아라벨라의 소매를 잡았다.

 

나도 갈래. 아니, 나도, 가면 안돼? ?”

 

아라벨라는 신성한 용의 몸을 떠올렸다.

 

평지와는 전혀 달랐지.

 

게다가 그 이세계 같이 어찔한 풍경은 자신도 겨우 적응할 정도였다.

 

다음에 가자.”

 

마르틴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언제?”

 

글쎄? 그건 보고.”

 

?”

 

그러니까 이 집안에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좀 오래 안계신 것 같은데, 걱정은 안 되지만 일단 한 번 찾아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있잖아. 우리가 귀족이기는 하지만 이 집안 주인도 아니고, 이걸 얘기하면 고용인들이 다 떠나버릴까? 그리고 아버지가 일단은 렐리악 백작이라고는 하지만 전대에 비해서는 힘도 약하고. 위엄도 책임감도 우아함도 아무것도 없는데 할머니까지 없어지면 백작이 아니라 남작이나 자작까지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걸 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바뀐 신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에게, 배울 게 많아서, 대우가 달라져서, 행복보다는 책임을 느끼고 나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피야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될까? 이미 이 어깨에는 짐이 이만큼이나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해서 짐이 더 늘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하지?

 

“...다음에 말해 줄게.”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떼어냈다.

 

몸에 걸칠 것이라고는 셰필라가 보내준 레이스 무더기밖에 없었기에 아라벨라는 3층으로 갔고, 이번에는 프루던스도 말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리지는 않았지만 말리고 싶은 것인지 무슨 더 할 말이 있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을 뒤로하고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경갑 상의를 고르자 프루던스는 손수 내려주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할 게 뻔하니 원.

 

프루던스.”

 

, 아가씨.”

 

할머니는 왜 날 싫어해?”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이 뒤로 왜 싫어하지 않는지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이 무겁나.

 

마르틴은?”

 

주인님께서는 아직 마르틴 도련님을 만나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싫어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벨라가 잠옷을 휙 벗어던졌지만 프루던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중드는 것이 익숙하다고 한들 조금은 놀랐으면 했는데.

 

그래야 자기도 모를 말실수도 좀 할 테고.

 

아라벨라는 옷을 벗어던졌고 장식물 중 하나를 떨어뜨려 깨기도 했고 몰래 돌아선 집사 뒤에서 큰 소리를 내어 놀래키는 것은 생각만 해 보았으나 여전히 익숙하고 침착한 손길이 가죽 갑옷을 입혀줄 뿐이다.

 

있지, 프루던스.”

 

, 아가씨.”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자 잘 갖추어진 옷 덕분에 몸이 가볍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왜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물어보면서도 또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 돌아온 답은 조금 달랐다.

 

셰필라님은 모르니까요.”

 

왜 몰라? 렐리악 백작인데?”

 

그야 셰필라님은... .”

 

프루던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 것 같다.

 

지금 백작이고 가주인데 어째서 모르지? 할머니만 알고 아빠는 몰라? ?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가 말하면 안된대? 아빠에 대해서?”

 

덥썩 어깨가 잡히고 프루던스는 난감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가감없이 나름대로의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라벨라는 신이 나서 잡은 어깨를 흔들었으나 프루던스는 어지러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주인님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했는데 조금 더 말해줘도 좋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프루던스! 나 싫어하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 좋아해?”

 

우아하고 당차고 모든 귀족의 귀감 같은 아가씨를 존경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한 점도 없다.

 

당황했을 때나 목소리에 조금 고저가 있었을 뿐이지 평이하고 지루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에 아라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더 캐보려고 했지만 집사는 다시 완전한 철가면을 되찾았고 어렵지 않게 아라벨라를 저택에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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