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크더건/율리안] 시장

2019. 3. 7. 23:49 | Posted by 호랑이!!!

차도 있는데 굳이 기차라니.

 

꽃무늬 장바구니를 든 크나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객실은 나름의 운치가 있기는 하겠으나 여행도 아니고 이동수단으로서는 그다지 선호할만한 물건이 되지 못 했다.

 

그 와중에 율리안은 종이와 펜을 꺼내 리스트를 확인하려해서 크나트는 그의 눈을 가렸다.

 

이런 곳에서 글 읽으면 눈 나빠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넣을 겁니다.”

 

아까 두 번이나 확인했잖아 자기야.”

 

누가 당신 자기입니까, 눈 가리지 말고 치우십시오.

 

누가 우리 자기긴 정원의 밤에 핀-.

 

장미라고 했다가는 화낼 겁니다.

 

등의 말을 하다 보니 두 정거정이 지나 내릴 곳이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음에도 타기 전에는 말끔한 거리이던 장소가 내리고 나서는 포장된 도로에조차 풀이 건강하게 자랐다.

 

천 바구니에 손가락을 끼워 달랑거리며 내리자 율리안은 우선 리스트부터 확인했다.

 

우선 버터 파는 곳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집 것은 인기가 많아 금방 떨어질 거라고 하니 좀 뛰어야 할 겁니다.”

 

꽤 커다란 장이지만 시골이었기에 잘생기고 낯선 젊은이는 시선이 가는 모양이다.

 

종이로 싼 버터만 겨우 한 덩이 고른 율리안은 마셔보라며 받은 신선한 우유에 양젖까지 들고 찡그린 듯 난감한 표정으로 크나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 키스해줄까?”

 

그거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말!

 

크나트는 율리안이 짐을 건넬 때마다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노려보는 율리안과 눈이 마주칠 때면 윙크를 날렸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율리안은 손에 든 우유를 벌컥 마셨다.

 

“...”

 

맛있나보군

 

생각보다 맛있었기에 할 말을 잃다니 황당한 일이다.

 

율리안이 빈 종이컵만 쳐다보자 크나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달링?”

 

이건...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하고 율리안은 양젖이 담긴 컵에도 입술을 대었다.

 

그다지 익숙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맛이 있다.

 

풍미가 진하고 고소하고 단맛도 나는데다 가공하지 않아서 젓기 전의 크림처럼 무게감까지 있다.

 

양젖, 우유는 원래 이런 맛인가.

 

리스트에는 없었지만 때마침 집에 있는 우유도 다 마셔가니 한 병 정도는... 하고 돌아 본 순간 율리안은 커다란 병으로 두 개나 산 크나트를 보고야 말았다.

 

그만큼이나?!”

 

제정신이냐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표정을 짓는데도 이 뻔뻔한 남자는 기어이 우유 꾸러미와 돈을 교환하고야 만다.

 

자기가 이거 맛있다며.”

 

그렇, 아니, 자기라고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밖에서!

 

파르륵 떨자 크나트는 우리 자기랑 작은 다툼이 있었어요같은 표정으로 상인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우유와 버터를 판 그 사람은 저쪽에 꽃을 길러 파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크나트는 율리안의 말은 듣지도 않고 휭하니 꽃을 사러 갔다.

 

황급히 말리러 가기 전에 애써 잘 마셨다고 인사를 건네니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뭘 숨기려 들고 그랴. 둘이 여행 왔어?”

 

말리러 가야 하는데.

 

뿌리치고 가기에는 상인의 눈이 반짝인다.

 

율리안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가... 여행은 아닙니다. 이제 여기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는데 여기 장터가 선다고 추천을 받아서...”

 

전 직장에서 만난거라 만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오래 만나서 떠날 때도 놓쳐버렸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율리안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자신이 또 떠날 때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대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 만한 말을 하고 떠나려고 했건만 마음과는 달리 입을 열수록 질문과 청중이 늘어나서 벌써 다섯 명, 이제 여섯명, 일곱... 의자까지 끌고 귀를 기울이는 저 영감님까지 세면 여덟 명...

 

율리안은 도망이 가고 싶어졌다.

 

 

 

 

 

 

 

이후 크나트가 튤립과 프리지아 다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번 보는 것으로 율리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차린 그는 율리안을 구하는 것보다는 청중 사이에 들어가서 듣는 것을 택했고 얼마 안 가 율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율리안이 기가 막혀하자 크나트는 숙련된 솜씨로, 납치라고밖에 못 할 짓으로 율리안을 빼내더니 먹이고 시장을 구경시켜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탄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집에 가자마자 뭐든 해먹어야겠어.”

 

계란하며 우유는 상하기도 쉬운데 그러게 이 남자는 왜 이 시간까지 자길 끌고 다녔냔 말이다.

 

빨갛고 노란 꽃다발을 안은 자신은 또 얼마나 시선을 끌었는지.

 

덜컹거리는 기차에 타니 몸은 둘째치고 마음이 편해졌다.

 

저녁때라 그런가 사람도 없어서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크나트는 율리안을 빤히 보다가 따라 다리를 쭉 뻗더니 마주보는 건너편 의자에 발을 올렸다.

 

그러면 안됩니다.”

 

잔소리는.”

 

“”공중도덕이라는 게 있습니다.

 

크나트는 납득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누구한테 그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어?”

 

당신 아닙니까.”

 

가끔은 어겨도 될 텐데 말이야.”

 

그런 게 어디있습니까, 그런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딱딱거리던 율리안은 30분 뒤 좁은 기차안 화장실에서 크나트와 함께 나왔다.

 

“...공중 도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