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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9

2019. 5. 3. 23:32 | Posted by 호랑이!!!

 

날이 밝자마자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었다.

 

벗겨지지 않게 끈으로 질끈 묶고 잠옷 차림으로 마구간으로 달려가자 근육질의 백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일찌감치 말에게 여물을 주러 나온 마구간지기는 아라벨라가 사납기 그지없는 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쳤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가 든 칸의 문을 활짝 열었고 아라벨라의 백마는 훌쩍 뛰어나왔다.

 

오랫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인지 애교스럽게 부비는 머리에는 힘이 실려서 때로 아라벨라의 몸이 들썩 들리기까지 한다.

 

승마용 옷도 입지 않았고, 말은 사납고, 제 손으로 말이나 몰아보았을까 싶은 귀족 아가씨.

 

그러나 아라벨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날렵하게 말 위에 올랐다.

 

데일라는 한동안이나 달리지 못한 반동인지 처음 달리는 길인데도 거칠게 달려갔고 마악 저택에 채소를 가져다준 마을의 농부는 얼어붙었다가 아라벨라가 달려오자 문을 열어 그 뒤로 후다닥 숨었다.

 

백마와 아라벨라의 뒷모습은 며칠 동안 아라벨라를 지켜보았던 이들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씨가... 말을 타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목을 두드렸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뛰다보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아라벨라는 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렐리악 영지에는 평야와 숲밖에 없었으므로 산을 보는 것은 처음.

 

세상의 초기에 신성한 용이 이 거대한 대륙에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용이 발로 판 곳에는 물이 고여 연못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고 흙을 밀어낸 곳은 낮은 지대, 흙이 밀린 곳은 언덕이 되고.

 

먼 훗날 그 용이 대륙에 몸을 뉘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 등뼈를 따라 산맥이 생기고 뼈는 보석이, 마지막 숨결은 이 세상의 마나가, 몸은 거대한 산이 되었다.

 

아라벨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신성한 용의 몸

 

장소에 깃든 마력은 청량하고 공기는 시원하다.

 

얼핏 아라벨라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어진 듯 보였다.

 

데일라가 불안한 듯 투레질을 하자 아라벨라는 손을 내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하게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를 찾게 도와주세요

 

가자, 데일라.”

 

데일라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금방 산에도 적응하여 길을 올랐다.

 

처음 얼마간은 가팔랐던 길은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완만한 길로 변했고 데일라의 발도 느려졌다.

 

아라벨라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물이 솟는 작은 샘이 있어서 백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끌고 갔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물은 깨끗했기에 데일라에게도 먹이고 아라벨라도 좀 떠 마셨다.

 

할머니가 이 길로 갔겠지.

 

할머니하고는 도통 좋은 기억이 없지만 저 저택에 주인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도 저택에도 렐리악 가문에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태까지 외길이었다는 것과 산을 아무리 둘러봐도 늑대나 곰, 위험한 마수의 흔적이 없다는 것.

 

이 산보다 사람 발이 많이 닿는 아라벨라의 집 근처 평지에도 오소리나 늑대, 마수 같은 게 한 무더기는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꽤 안전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왜 할머니는 못 돌아오는 걸까.

 

아라벨라는 해가 지도록 말을 달렸다.

 

데일라는 힘차게 달렸고, 빠른 걸음으로 구릉을 지나 언덕을 넘고 장애물을 뛰어넘었고, 해가 질 즈음에는 연못가에 뻗어버렸다.

 

“...데일라.”

 

푸르르.

 

해가 지고 있어.”

 

푸르르르.

 

집에 안 가?”

 

푸힝.

 

사과 줄게. 빵도.”

 

푸힝 푸르르르륵.

 

투레질을 거칠게 하는 모습에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몸에 기대 다리를 쭉 뻗었다.

 

너무 달렸나.

 

해도 지고 배도 고프고, 이제 어떻게 돌아간다.

 

이렇게 오래 달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가지고 나오는 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 뜰 때 나와서 해 질 때에야 멈췄다.

 

돈도 없고 옷은 다 더러워지고 해어지고야 말이다.

 

길이 어렵지는 않았으니 가려 한다면 혼자서도 잘 가겠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를 여기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데일라아.”

 

그러나 데일라는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나무에 기댔다.

 

할머니의 저택으로 올 적에야 노숙을 했지만 그건 마차 안이었지.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면 스파크와 몇몇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끼어들 수도 없었으니 몰래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오늘 길은 어땠고, 오는 길의 호수가 예쁘고, 아까 보았던 나무가 어떻고 저떻고, 내일은 마을에서 쉴 수 있겠다던가, 저기 흘러가는 구름이 생긴 게 동물 같다던가, 바람이 좋다던가, 무슨 향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매일 반복되기도 했고, 같은 주제인데도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별이 있었지

 

별이랑 달이랑.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어두워진 하늘에 하나둘씩 떠오르는 하얀 별과 노란 달이 보였다.

 

멀리서 바람이 불자 숲과 나무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나무껍질과 이끼와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냄새가 나고 아라벨라는 아직은 날이 춥다는 생각을 했다.

 

데일라.”

 

푸르륵.

 

할머니는 대체 어디에 가신 걸까.”

 

푸르륵.

 

적어도 마르틴과 아라벨라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계시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아라벨라는 잠옷 자락을 끌어내려 발을 가렸다.

 

숄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잠옷이 이미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것은 둘째 치고, 바람에 날리던 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것도 다음으로 미루고... , 엉망이군.

 

하늘을 보면 여전히 달이 비친다.

 

별이 반짝이고, 나뭇잎이 팔랑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잠깐, 저거 바람?

 

아라벨라가 벌떡 일어서자 데일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굴려 쳐다보았지만 데일라가 어떤 반응을 하던 아라벨라는 홀린 듯 한 곳에 눈을 두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푸른 바람.

 

바람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아라벨라는 나뭇가지를 타고 올랐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어렵지 않게 올라서 흔들리는 나뭇잎에 손을 내밀자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무슨 가루 같은 것인지, 아라벨라는 손을 눈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으나 어떤 염료 같은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높은 나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하얗게 달빛이 내리쬐는 아래 온 숲이 검게 술렁이고, 그 안을 잘 보면 나뭇잎이 은빛으로 빛을 반사하는 사이로, 사이사이로, 녹색에 가까운 푸른 바람이 온 산을 감싸고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어느 곳은 빠르게 내리꽂히고 어떤 곳은 나지막하고 연하게 흘러가고, 어떤 곳에서는 휘몰아치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이라니.

 

그 장관에 넋을 놓았던 아라벨라를 현실로 끌고 온 것은 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이다.

 

땅으로 내려와 발에 묶었던 끈을 풀고 슬리퍼를 벗자 그렇잖아도 낡았던 슬리퍼는 꽤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발도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몰랐을 때는 신경조차 안 쓰였는데! 신발을 벗고 엉망진창인 발을 봤더니 갑자기 오만 상처가 다 아프다... 아야야...

 

꼼짝도 못하겠다며 신발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데 갑자기 옆의 풀숲이 부스럭부스럭 흔들렸고 방금 전까지 꼼짝 못 한다던 아라벨라와 데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낙트!”

 

누군가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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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어 조금 수정했습니다.

 

집사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한 문장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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