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아라벨라 7

2019. 4. 15. 23:52 | Posted by 호랑이!!!

 

우아하게 넓은 챙에 초록색 이국의 새에게서 얻은 길고 넓은 깃털을 꽂고 진한 녹색 리본이며 레이스, 프릴을 달아 화려한 그 모자는 진짜 꽃까지 얹은 것도 모자라 옆과 뒤에 커다란 꽃다발을 수놓은 주름천을 층층히 달았는데.

 

둘둘 말아 천으로 된 몽둥이마냥 들었더니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레이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라벨라는 손을 들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그 자작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악!”

 

비욘 자작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두 대.

 

, , 다섯, 여섯 번 휘두를 때마다 모자에 달아둔 꽃이 조각나 하늘에 흩어졌다.

 

주름을 잡아 단 천은 뜯어져 펄럭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구슬은 끈이 끊어지고 달아두었던 깃털은 주인을 찾아가겠다는 듯 떠올랐다가 불어온 미풍에 힘없이 날려갔다.

 

모자가 작살이 난 것에 비하면 비욘 자작은 타격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 한 쪽에 멍이라도 들었다면 좀 좋으련만 머리나 좀 흐트러지고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것이 전부.

 

정신계 공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우그러진 모자를 우아하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가기 꺼려진다는 말을 그렇게나 알아듣지 못하시다니 저야말로 곤란합니다."

 

"......."

 

비욘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나에게 창피를 주다니!"

 

"제정신입니까? 지금까지 싫다고 한 건 뭐라고 알아듣고?"

 

그러다 비욘 자작은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런다고 당신이 가시 달린 장미처럼 보일 것 같습니까?"

 

"꽃 같은 건 되었습니다."

 

아라벨라는 궁금했다며 말을 꺼냈다.

 

"얼굴도 그냥 그렇고, 고매한 정신 같은 것도 없고, 당신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지도 않고, 방금의 행동으로 어떤 사람인지 바닥도 본 것 같은데.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꽃으로 보이고 싶겠습니까?"

 

"아니, 그럼 여자 취급 말고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말입니까?"

 

그 말에는 어이가 없어진다.

 

"왜 당신은 여자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레이디 퍼스트니 하면서 남자가 문 열어 주는 건 그렇게나 좋아할 거면서...!"

 

지금까지 아라벨라를 빤히 보던 집사 프루던스가 비욘 자작과 아라벨라 사이에 섰다.

 

"흥분하셨습니다."

 

"비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자 아라벨라의 교육을 맡은 부인들은 아라벨라를 자신들의 가장 뒤로 밀고 눈을 가려 주었다.

 

프루던스는 어떻게든 그 자작을 조용히 시켜서 데리고 나갔고, 다른 고용인들이 다가와 어질러진 티 테이블을 치우고 새 차와 과자를 꺼냈다.

 

"레이디 아라벨라는..."

 

부인이 입을 열자 아라벨라는 마음이 찔려 레몬을 띄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통찰력이 있군요."

 

"거절을 했다손 쳐도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예요."

 

아라벨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자세를 교정해주는 부인은 부채를 접어 아라벨라의 고개를 살짝 내려주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아라벨라가 입을 열었다.

 

모자를 망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먼저 말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평소라면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라고 했을 부인도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라벨라가 내려다보자 마르틴은 시무룩하기가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못해서 미안해, 누나.”

 

네가 뭐가 미안해.”

 

아라벨라는 깜짝 놀랐다.

 

백작님이 나보고 누나를 잘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잠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마.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아! 지켜도 내가 지켜줘야지.”

 

그러나 마르틴은 그 말을 듣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더니 싫다는 말을 더듬더듬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라벨라는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부인들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며 마르틴을 안아들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비욘 자작은 더 이상 이 저택에 오지 못할 겁니다.”

 

집사 프루던스는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접시에 잘 구운 사슴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넓은 테이블에 아라벨라와 마르틴 뿐인데도 접시 위에는 꽤 많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라벨라 아가씨의 예의범절과 자세를 가르쳐주시던 남작 부인께서도 앞으로는 오지 않으실 겁니다.”

 

이 말에 아라벨라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를 나이프로 푹 찔렀다.

 

, 두 분께 마을의 의상실에서 주문한 슬리퍼가 도착하였습니다.”

 

프루던스의 말에 고용인이 황금색 리본으로 묶은 납작한 상자를 두 개 가져다주었고 아라벨라는 끈 한 쪽을 잡아당겨 상자를 열었다.

 

눈이 퉁퉁 부은 마르틴에게도 상자가 두어 개 배달되었다.

 

마르틴 도련님의 승마 교사를 어서 구하겠습니다.”

 

마르틴이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눈만 굴려서 집사를 쳐다보았고 붉은 머리의 집사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둘의 접시에 푹 쪄서 소스를 얹은 채소들을 덜었다.

 

왜 그래, 마르틴?”

 

어어? 아니, 아아니.... 아무것도....”

 

아가씨께도 새 선생님을 구해드려야겠군요. 당분간은 일정이 없으니 편히 쉬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말 타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마르틴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집사를 불렀다.

 

저어기, 할머니는... 한 번도 못 뵈었는데요.... 저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바쁘십니다.”

 

프루던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두 조각 더 올렸다.

 

도련님께서는 조금 더 영양을 섭취하셔야겠습니다.”

 

시무룩하게 마르틴은 칼로 고기를 잘랐다.

 

이제는 귀족이 된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사람을 부르거나 부리는 일에는 영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자세만은 손댈 데 없었으니, 저건 사피야의 작품이겠지.

 

사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마르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르틴. 이따 내 방에 잠깐 와.”

 

어브...”

 

마르틴은 뭔가 말하려다가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련님, 입에 음식을 물고 말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미안해요...”

 

프루던스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세지도 않고 덥썩덥썩 집어 올렸다.

 

저에게 사과하시면 아니됩니다. 저는 한낱 집사이고 도련님께서는 백작 집안의 분이십니다. 도련님께서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렐리악 가의 이름이... 겨우 이런 걸로는 더럽혀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못된 사람들이 도련님을 우습게 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집사 인상이 나빠서 그래.”

 

제가요?”

 

프루던스는 아라벨라 쪽을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낯뜨겁습니다만, 이래봬도 목재도령 대회의 3연 우승을 할 만큼은-”

 

목재도령은 또 뭔데?”

 

이 근처의 특산품은 튼튼한 목재라 홍보차 미남미녀 대회를 여는데 미남은 도령, 미녀는 아가씨라고 합니다.”

 

그런 소릴 자기 입으로 하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잘생긴 건 별개로 인상이 나빠.”

 

삐쭉 올라간 노란 눈이며 굳이 웃지 않으면 아래로 처진 채인 입꼬리는 일주일 내내 웃지도 않았다.

 

웃어 봐.”

 

그러자 방긋 웃기는 하지만 올라간 눈꼬리는 별로 완화되지 않는다.

 

별로네.”

 

, 지만 미남인걸...”

 

미남이랑은 별개로 인상이 사나워. 너도 덜덜 떨고 있잖아.”

 

아안, 떨었어! 아니거든!”

 

바실리스크인지 뭔지 모를 물건이 든 가방은 잘도 옮겼으면서.

 

마르틴은 비쭉 입을 내밀었다.

 

요리사가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에 아라벨라와 마르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자리를 치우는 모습을 힐끗 보고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아라벨라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렇게 신경쓰여?”

 

쪼오끔...”

 

왜일까? 마르틴이 평민으로 자라서? 하지만 셰필라 렐리악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데.

 

게다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자꾸만 집사가 있는 쪽을 힐끗힐끗 본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9  (0) 2019.05.03
아라벨라 8  (0) 2019.04.28
아라벨라 6  (0) 2019.04.12
아라벨라 5  (0) 2019.04.01
아라벨라 4  (0) 201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