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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5

2019. 6. 18. 20:18 | Posted by 호랑이!!!

 

물 위로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라벨라가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기를 바란 것 같았다.

 

사실은 꽤 효과적이어서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상체를 홱 기울였더니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예리한 날이 가죽옷 위를 긁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목숨이 위험하다.

 

저 사람은 적의에 가득차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칼은 길고 날카롭고, 조그만 봉투 따는 칼도 베이면 아프지만.

 

이상하게도 아라벨라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손을 씻느라고 벗어두었던 장갑을 억지로 끼자 젖은 손은 가죽 안에 낑겨 힘겹게 들어갔다.

 

아라벨라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의외로 침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뒤로 물러서서 아라벨라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칼은커녕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 때는 아라벨라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날이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것이 똑똑히 들렸고 아라벨라는 장갑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칼의 옆면을 쳐냈다.

 

가죽이 굉장히 튼튼한걸.

 

칼날을 그대로 맞아도 별로 다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라벨라는 다시 날아드는 칼날을 쳐냈다.

 

.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당장이라도 달음박질을 하고 싶지만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처음으로 말을 타고 넓은 벌판을 달렸을 때.

 

그 때와 닮은 감각.

 

카앙.

 

세 번이나 칼날을 쳐내고 그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그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물어뜯을 차례.

 

손을 쓰는 게 훨씬 쉽지만, 아라벨라의 팔 힘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칼을 휘두르느라 그가 벌린 거리만큼 앞으로 나서고.

 

아라벨라는 다리를 들어올렸고 무릎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다리 사이를 세차게 가격했다.

 

달걀이라도 있었다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을만한 힘으로.

 

검은 형체가 아라벨라의 앞에 풀썩 무너지고 옆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아라벨라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은 겨우 한 대를 때리려고 이렇게 뛰지 않을 테지.

 

유효하게 들어간 공격은 아라벨라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렐리악의 해츨링.”

 

흥분한 머리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아라벨라가 손을 든 순간 들린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 대는 때렸을 것이다.

 

“...나 그렇게 어리지 않은데.”

 

종류를 불문하고 그렇게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해츨링 뿐입니다.”

 

슈체른이 손을 들자 반짝반짝하게 닦인 거울이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뺨은 장밋빛으로 상기되었고 눈은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반짝이는데다 운동량에 비해 숨이 거칠다.

 

무엇보다도.

 

아라벨라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해츨링 시절을 벗어나려면 앞으로 이백년은 더 지나야 할테니 멀기도 했고.”

 

이백년은 너무 멀어.”

 

괜찮습니다, 눈 깜짝하면 금방이니까.”

 

슈체른의 손짓에 거울이 사라지고 대신 아라벨라가 때려눕힌 검은 옷의 사람이 들어올려졌다.

 

살아있네?”

 

검은 혀가 슈체른의 입가를 핥았다.

 

인간 안 먹은지 오래 됐지...”

 

안돼.”

 

농담입니다.”

 

시원스럽게 잘생겼던 슈체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이런 걸 잔뜩 주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뚝 뚝 떨어져 쌓였다.

 

하나, , , .

 

아라벨라가 잡은 사람까지 다섯.

 

죽었어?”

 

아직. 죽으려고 하고는 있지만요.”

 

보시겠습니까? 라면서 슈체른이 손을 움직이자 불길하게 뿌드득 소리가 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사람의 입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나왔다.

 

점심 먹고 시작할까요, 먹기 전에 시작할까요?”

 

, 고문을?”

 

아니 무슨 험악한 소리를, 이라며 슈체른이 손사래를 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정 싫지는 않아 보였지만.

 

기억을 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몸수색도. 고문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고.”

 

그 전에, 잠깐 이야기 해봐도 돼?”

 

물론입니다.”

 

사람의 몸을 감싸던 마력이 내려가자 그 사람은 오래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라벨라는 그 사람 앞에 섰다.

 

“...그렇다.”

 

나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다. 렐리악 백작의 적자.”

 

그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안다.”

 

날 죽일 이유가 없잖아. 렐리악은 어떤 귀족 가문과도 척지지 않았고 특별히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지도 않은걸.”

 

인간에게는 그렇겠지.”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정말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터라 아라벨라는 의아해졌다.

 

그럼 정령이나 엘프나 노움이나 드워프한테는?”

 

“...”

 

농담은 아닌데.”

 

그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노려보았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날 죽이러 온 거 맞아? ? 시킨 건 누구지?”

 

그런 것에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사람은 혀를 내밀었다.

 

깨문다!라고 생각한 순간 슈체른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입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가 났지만 슈체른은 아파보이기는커녕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까요?”

 

대화로 끝나면 좋을 텐데. 내가 정말 평화롭고 안온하게 살아와서 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검은 옷의 사람이 외칠 뻔 했다.

 

무슨 가문 아가씨가 발길질을 하냔 말야?!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때렸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조금만 더 일찍 빠졌어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하지만 슈체른은 시간을 들여 망설이다 손가락을 빼었고 아라벨라를 잠시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포섭을 해 보겠습니다. 거기 당신, 금은보화를 주고 외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 말하겠습니까?”

 

슈체른은 품에 손을 넣고 뒤적이더니 아이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박힌 목걸이를 꺼냈다. 색 옅은 푸른 보석이 주르르 박힌 것이 세 줄이나 되고 갈래갈래 떨어져서 술처럼 보이는 줄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 있다.

 

눈이 목걸이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흔들리고 있군요.”

 

, 그런 것 따위! 우리 용묘간부들은 쉽게 가질 수...!”

 

“...용묘?”

 

그러자 그 사람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별로 흔한 이름은 아닌걸. 정보 길드는 정통 보라매 사냥꾼 연합이잖아. 암살자 길드는 제일 큰 데가 암석 어쩌고였으니 저런 이름이면 더 눈에 띌 텐데.”

 

그 사람은 다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슈체른이 저지했다.

 

젠장,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한 건지 알아!?”

 

그 사람이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슈체른도 아라벨라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알 게 뭡니까.”

 

알 게 뭐람.”

 

아라벨라는 슈체른이 그 사람을 잡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두른 로브를 확 펼쳐서 살펴보았다.

 

조그마한 암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아라벨라의 얼굴이 그려진 종잇조각도 하나 나오고 돈주머니도 나오고 아예 로브를 찢어버리자 안에 입은 옷이 드러난다.

 

튼튼한 천옷에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고 그 천 옷의 등에 용이 그려진 것은 인상적이다.

 

렐리악의 용이 날개를 펼친 비룡이라면 이 사람의 옷은 날개는 없는 용이었는데 머리가 아래로 가고 몸통이 위로 향해서 잘못 붙이기라도 한 건가 했다.

 

이거 떼 줘.”

 

분부대로.”

 

슈체른은 손톱을 세우더니 다른 준비도 없이 문양을 옷에서 뜯어냈다.

 

그 사람은 파르르 떨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날 이렇게 모욕하다니!”

 

아까까지 죽으려고 했으면서 뭘 이 정도로 모욕이라는지.

 

“...귀족이지? 당신.”

 

사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아라벨라이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잘 안다.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다, 문장에다, 그 형식에 얼마나 멋을 부려놓았는지 자기네들 모임 이름을 용묘라고 해 놓았다.

 

왜 귀족이 암살자 흉내를 내고 있어?”

 

, , 흉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 같으니!”

 

뻐억, 소리가 나고 그 사람은 끄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죄 없는 자의 목숨을 그대 욕심으로 노린 죄, 자기 방어를 쉽게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노린 것하며 신체 말단부터 조각내 고통 속에 죽게 해도 그 입은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어야 한다. 뻔뻔하게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죄를 통감하게 해주마.”

 

슈체른의 눈은 동자가 뾰족하게 갈라져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라벨라는 차마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라벨라 뿐인지, 그 사람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 렐리악의 여자는 이미 인간의 성인식을 치렀다, 그리고 죄가 많아! 뻔뻔한 것은 그대들이며 겨우 고통 따위는 나를 꺾을 수 없다!”

 

그래?”

 

슈체른은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피가 튈지도 모르니 조금만 뒤로 가 계십시오. 시장하신다면 먼저 도시락이라도.”

 

아라벨라는 뒤로 물러나 연못가에 앉았다.

 

주먹과 발톱이 아주 잠시동안 난무하고 그 사람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겨우 고통 따위로는 꺾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치고는 포기가 빠른걸.”

 

, 수만... 아가브....”

 

뼈는 안 부러진 거 같은데 이는 부러졌나보다.

 

누가 죽이라고 보냈어?”

 

나뉴... 그거.... 여기에...”

 

그 사람은 자기 품 속을 손짓발짓으로 가리켰고, 아까는 별 거 발견 못했는데 이상하다며 슈체른이 목을 죄는 마력을 풀어주자 스스로 품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면서 윽, 소리를 냈다.

 

사아... 으어어...! 사려...! 아파...! 흐어어 아퍼!”

 

급하게 옷을 들춰 보니 조그만 칼로 가슴을 찔렀다.

 

그야 칼로 찌르면 아프겠지.

 

자기 스스로 찔러 놓고도 살려달라고 웅얼거리던 그 사람은 일 분도 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 또다시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몸을 홱 틀었더니, 거기에서 나온 것은.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항복이라는 시늉을 하는 마르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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