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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4

2019. 6. 14. 00:38 | Posted by 호랑이!!!

 

이제 물러가라.”

 

사피야 다르데니아는 한때 눈처럼 하얀 카펫 위에 가을 하늘같이 옅은 푸른색 침대를 두고 겨울가지처럼 꾸민 화장대와 책상, 사피야만을 위한 책꽂이에 가장 좋아하는 책과 장인들이 만든 인형, 장식품을 늘어놓았다.

 

각 벽마다 새가 앉은 모양의 가지를 꽂아 거기에 등불을 걸었던 네모난 방의 천장은 안쪽을 둥글게 깎고 금을 발라 테를 둘렀으며 가운데에는 진한 푸른색을 칠해 붉은색으로 물고기와 꽃을 그렸다.

 

창틀에 걸어둔 레이스 커튼이 풍성하게 흩날리면 파도치는 것처럼 보였던 천장의 연못은 사피야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방에서 사피야는 천사였으며, 그 천사는 하늘이나 구름에 연못을 내려다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때로 그 자리에 사람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도 함께했었다.

 

자신만을 위한 방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때는 몰랐지.

 

같은 백작이라고는 하나 다르데니아 저택은 렐리악의 세 배는 되었다.

 

사피야 렐리악은 개인 방이 없었고, 낮이면 시녀들과 지내는데다 밤이면 셰필라가 찾아왔기에 개인 시간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님, 천이 이제야 배달왔는데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종들은 사피야가 한때 평민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데니아 백작가라는 것을 알아 별 말 없이 지시를 따랐고, 일부 사피야를 좋게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지만 사피야는 어렵지 않게 복종시켰다.

 

어련히 잘 하였겠니. 무슨 일 있으면 돌려보낼 테니 잠깐 거기 두어라.”

 

결혼식을 올린 후 바쁘게 감사 편지를 쓰고 신전과 왕실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전부 사피야의 몫이었다.

 

그 후로는 저택의 재산에 관해 외워야 했고 그 다음에는 바꾸는 커튼, 이불, 불을 밝힐 기름이나 식재료나 장작에 관한 것들이 사피야에게 몰려왔다.

 

결혼하자마자 마르틴을 떼 놓은 것에 대하여 원망도 있었으나 이렇게 일이 몰리니 지금은 마르틴이 옆에 없는 게 다행이다.

 

그렇게 일하여 두 주만에 일 전반을 끝내고 사피야는 의자에 늘어졌다.

 

이 곳은 저택의 도서실.

 

다른 방하고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은데다 장서 수도 적다.

 

책꽂이로 가려지는 소파는 그나마 사피야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옷에 화장이 눌리지 않게 조심한 사피야는 책을 훑어보았다.

 

청소는 주기적으로 하지만 몇 번 펼쳐보지 않은 티가 난다.

 

“.....?”

 

역사서 한 질.

 

언어 책이 다섯 권.

 

종교에 관한 책 세 권.

 

음악에 관한 책이 세 권.

 

예의범절에 관한 책이 세 권.

 

마법과 마나에 관한 책이 두 권.

 

금전을 다루는 일에 관한 책 한 권.

 

왕국의 다양한 법에 관한 책이 한 권.

 

대륙의 다양한 일을 기록한 책이 또 한 권.

 

다 합해서 쉰 권이나 될까 하는 책은 너무나도 적다.

 

아무리 책이 사치품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지나치잖아.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귀족의 품격에 관한 일이다.

 

렐리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죽이나 비단천에 글을 쓴 것도 몇 개는 있음직하건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 연습을 할 만한 책이나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용도로 쓰는 얇은 책은커녕 성인의 흥미를 위한 잡기 책이나 소설책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피야, 뭐 하고 있소.”

 

들리는 소리에 사피야는 책꽂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을 때는 그가 정말 천사같았지.

 

사피야가 웃자 셰필라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책이 있나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옛날에 셰필라 당신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하고.”

 

그건 이 저택에 없어.”

 

어머나, 정말요?”

 

손이 잡혔다.

 

셰필라의 팔이 사피야의 허리에 감겼다.

 

이 저택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온 거라서. 게다가 서재를 한 번 정리했거든.”

 

그럼 아라벨라는요?”

 

그 애는 여기서 컸지만. 사피야, 계속 말 할건가?”

 

짙은 색 드레스 자락이 손짓에 올라갔다.

 

결혼한 날의 밤 셰필라는 그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평민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잊지 않고 구해 온 것이라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직도 그 더럽고 좁은 집에서 흙탕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사피야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사피야가 처음으로 마음과 몸을 허락한 상대였다.

 

게다가 잊지 않았고, 아직 미워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바실리 아비에스 렐리악을 찾으러 다닌지 일곱 날이 되었다.

 

“...이 넓은 데를 다 돌아다녔네...”

 

산 위를 날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땅 위를 달리면서 아라벨라와 슈체른은 꽤 친해졌다.

 

첫날에는 금방 지쳐하던 당신이 갈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기, 일반적인 인간들은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지친다고.”

 

당신 참 인간처럼 자랐나 봅니다.”

 

그야 인간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 참.

 

아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용이랬지.

 

아라벨라는 입 밖으로 말하는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해가 지면 데려다주고 해가 뜨면 데려갔으니 해 있는 동안, 적게 잡아도 12시간은 계속 걸은 셈이다.

 

그나마 저 용이 거추장스러운 짐에서부터 덥다고 벗은 겉옷까지 다 들어주니 망정이지 이러저러한 장비까지 아라벨라가 들어야 했다면 진작 포기하고 기사단이나 꾸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 나 배고팠어.”

 

연못에 손을 담그다 말고 아라벨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슈체른은 씨익 웃더니 점심 먹기 좋은 곳을 알아보겠다며 인간 모습에서 날개만 꺼내 날아올랐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정화해준다는 무슨 가루를 조금 넣고 마력을 불어넣자 물병이 손 안에서 흔들렸다.

 

가죽 물병인데도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있어 멈추었고 아라벨라는 물병을 허리에 찬 뒤 연못 위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며칠의 외출 때문에 그을려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얼음처럼 색소가 옅었고 훨씬 반짝였다.

 

게다가 근육이 붙어서인지 더 단단해 보였고, 아라벨라는 가죽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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