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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6

2019. 4. 12. 11:22 | Posted by 호랑이!!!

 

몸을 씻겨 주겠다고 하면 곤란하므로, 아라벨라는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거기에 카트까지 세워두었다.

 

박을 말려 칠을 한 그릇에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미지근해지자 핸드백을 열었다.

 

닫아두었던 곳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겼고 조심스럽게 비늘 달린 몸체를 들어 그릇에 담그자 까맣던 몸에서 조금씩 마른 피가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담가 두고 기다렸더니 비늘 사이에 엉긴 피나 이파리 같은 것들이 조금씩 불어서 당기거나 손톱으로 살짝 긁는 것만으로도 씻긴다.

 

바실리스크가 아닌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의 특징인 깃털이 없고, 날개의 모양이나 크기도 책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흔한 동물인 뱀이나 박쥐도 아닌 것 같으니.

 

잘 씻겨놓고 수건으로 감싸놓자 다시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라벨라는 뱀을 돌돌 말아 다시 핸드백에 담아두고 자신도 씻기로 했다.

 

보송보송하고 따끈해져서 욕실에서 나오자 맨발에 따뜻하게 카펫이 느껴졌다.

 

그나마 마차 안에 있을 때는 힐도 벗어두었는데 발바닥으로 카펫을 밟고 마룻바닥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으로 느껴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침대 옆에 무언가가 비친다.

 

노란색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조그만 슬리퍼였다.

 

작은 등불로도 그 슬리퍼가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무어라고 하는 대신 핸드백을 침대 위에 올리고 자신도 그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라벨라의 일과는 눈에 띄게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으로 과일이나 좀 집어먹고 나면 외출복에 가까운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졌고 초청한 가정교사에게 역사나 음악이나 작문에 자수 같은 것을 쉴 새 없이 교육받은 다음에는 자세를 교정하는 기괴한 철통을 몸에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서 있거나 지시하는 움직임을 해야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던가, 이미 배운 내용을 또 배워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항상 해 왔던 일이니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만.

 

언제고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붉은 머리의 집사가 서 있었다.

 

게다가 할머님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언제 한 번은 3층으로 몰래 올라갔지만 집사에게 들켜 2층으로 쫓겨났다.

 

프루덴스.”

 

아라벨라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머리의 젊은 남자는 아라벨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3층의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할머니께서는. 마르틴은 만나셨나?”

 

아닙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지금 그저 일이 있으셔서 짬을 내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라벨라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지 내의 승마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친 자부심을 느끼는 어느 남작이 마르틴에게 마구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우리 수업도 할머니께서 짜신 건가?”

 

선생님을 초청한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수업이 시작하고 거의 매일, 둘은 바빴고, 수업시간 사이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아라벨라가 마르틴의 방을 찾아갔더니 한참 이른 시간인데도 지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지.

 

사피야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마르틴은 그 어머니의 유전자를 아낌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귀여운 동생이 누나누나 하면서 오니까, 새삼 자신이 연장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연장자로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잘 크게 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는데 말이다.

 

챙겨주고 조언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는 일단 만날 시간이 나야 할 거 아닌가.

 

식사시간 외에 티타임이 있기는 했지만 티타임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의 일환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꽃을 넣은 차를 마시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남자들이 우르르 보였다.

 

저건 일단 마르틴이고, 시중 들어주는 고용인이 두어 명 있고, 옆에서 외국어로 된 시를 읽어주는 교사가 한 명,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승마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은 차를 마시려다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으악 눈 마주쳤어.

 

왜 저렇게 웃는거지?

 

기분 나빠라.

 

어머나 비욘 자작에게 관심이 있나요?”

 

아니오.”

 

왜 이 상황을 보고 제가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이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웃은 건 제가 아니라 저 준우승남이고 제 무표정과 저 기분 나쁜 웃음 사이에서 뭘 보시고 관심이라는 많은 의미를 포함한 단어를 떠올리셨는지.

 

라는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쑤셔넣으며 아라벨라가 뻣뻣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단지 마르틴이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비욘 자작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작위를 손에 넣었고 바이언드 백작의 조카이니 백작이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호기심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이 사람, 이미 내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전제로 말하고 있구나.

 

아라벨라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다는 것을 말하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자수 교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싱숭생숭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 사랑이 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 시집을 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해댔다.

 

교사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아까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쳤던 비욘 자작이라는 사람이 여성들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남성 테이블의 사람들이 이 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

 

무슨 내기에 넘어가는지 넘어가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 아라벨라는 찻잔을 꽉 쥐었다.

 

평소라면 레이디의 교양과 몸가짐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가 한 마디쯤 할 법했으나 그 사람도 아라벨라가 남자 앞이라 긴장한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레이디 아라벨라, 마르틴 도련님과 산책을 하려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지.

 

아라벨라는 당신이 빠져 준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말할 뻔했으나 일말의 선량한 마음이 입을 다물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다음에 수업이 있습니다.”

 

아무리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저 사람은 한낱 자작이고 아라벨라는 백작의 딸이다.

 

마르틴만 아니라면 다음 백작위는 아라벨라의 것이었고 지금도 백작의 후계자이니 준백작이나 다름없는데도 다가오다니.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사람이라고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날씨가 더워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양산을 들어 드리지요. 정원 안쪽으로 산책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걸어 보았는데 잘 꾸며진 연못이 있더군요."

 

이 집은 제 할머니 댁인데 산속에서 연못을 발견했다~ 투로 이야기해봤자...

 

"이 이후에 수업이 있기에 곤란합니다."

 

"잠깐이라면 봐 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그 사람은 기어이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라 이르더니 남작 부인이 내민 모자를 들어다 아라벨라의 머리 위에 푹 눌러 씌웠다.

 

마르틴은 무슨 일인지 몰라하다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여기서 아라벨라나 마르틴을 도와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자를 쓰셨고 이제 양산을 가져오니 이제 가로막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자꾸 내빼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아라벨라는 머리에 쓴 모자를 고쳐 쓰다가 그 말에 벗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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