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
“...라.”
“...”
“...라...”
집사 바리톤은 주인인 페드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놀다가 아무거나 주워가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무리하게 일을 맡기거나 장비도 그럭저럭 괜찮고 보기에도 좋은 것으로 맞춰주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잘 모르지만 흑와단의 나름 높으신 분이라고 하는데다 비술서만 들면 어디 가서 죽어 오지도 않았고 과묵하니 보기 멋있는 사람이었다.
왜 ‘었다’라고 말하느냐면, 커르다스산 게 두 마리가 든 양동이를 들고 하늘잔마루의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페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불 뭉치에 말을 거는 페드가.
“...주인님?”
그러나 페드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대답은커녕 시선도 주지 않는다.
“...라, 왜 화가 났습니까?”
너는 왜 이불에 말을 거는 건데?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낀다지만 이불까지 언약자분으로 보이는 정도의 콩깍지는 어디서 끼어 오는 걸까.
왜 이러는 걸까.
“주인님.”
무례하지만 어깨를 잡았는데 페드는 그제야 저를 한 번 보더니 저리 가라는 듯 손을 젓는다.
아니, 왜!?
바리톤은 이불에 대고 말을 거는 주인을 쳐다보다 양동이를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이 내가 은퇴하는 날인가보다.
바리톤은 두 사람 분 식사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차려진 식탁 위의 음식을 보았다.
전채로는 완두콩 수프에 파리풀 샐러드, 에메랄드 수프가 있고 메인으로는 피피라 피라 찜, 코카트리스 미트볼, 미코테식 꼬지도 몇 개나 있는데다 디저트로는 마도사 모양 쿠키, 초콜릿, 바바루아, 마롱글라세, 사과가 들어간 플로냐르드에 마실 것으로는 차가운 과실주와 얼린 칵테일에 요리사가 본직이라는 주인님이 만들기 귀찮다고 딱 한 번 만들어보았다는 코코아까지 있다.
차갑게 식은 것을 보아하니 만들어진지 몇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손을 댄 흔적조차 없잖아? 왜?
방 안을 둘러다보던 바리톤은 더 심상찮은 것을 보았다.
먼지 앉는다고 뚜껑도 못 열게 하던 피아노는 뚜껑이 열려 있고 악보도 펼쳐져 있다!
잘 보니까 라님이 좋아하던 물건이랑 음식이 온 방안에 있잖아!? 게다가 꽃병의 꽃들도 신선하고 갓 채집한 것들로 새로 싹 바뀌어있고!?
“...라,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시오, 응?”
바리톤은 대답 없는 이불뭉치에 대고 말을 거는 주인을 보다가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틀림없다.
저 몹쓸 주인이 즐거운 던전이니 뭐니 하면서 꾀어내어서 최소 네 명이서 가야 하는 곳에 또 두 명이서 갔거나 둘이서 공격적인 마물을 잡았을 거다.
비술서만 들면 무적이라는 저 주인이야 아무 문제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 겨우 갈론드제 옷을 모으기 시작하는 라님은... 라님은 아마.....
키 크고 험상궂게 생겼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아우라, 바리톤은 왈칵 치밀어오르는 눈가를 닦을 생각도 않고 주저앉아 바닥을 내리쳤다.
“라님!!!!”
“깜짝이야! 뭔데요?”
“라님!?”
“치지 마십시오, 아랫집에서 올라옵니다.”
“아니,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왜긴요, 난 원래 여기 있었는걸?”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소리 지르면 옆집에서 항의가....”
“난 계속 여기에...”
바리톤은 진정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라님이 어째서 여기에!!!!!!!!”
페드는 옆집과 아랫집, 윗집 사람들이 몰려온 것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집사 소리였습니다, 집사가 전사냐고요? 아니오, 어부입니다, 그래요 놀랍지요, 타이탄 심핵을 뽑아올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마 그 쪽으로 재능이 있는가봅니다 등의 소리가 들리고 바리톤은 라가 건네는 차가운 과실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두 분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퀴니가, 내가 싫대.”
그리고 페드는 다시 방 안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대해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싫대.”
“누가요?”
“퀴니가.”
“누구를?”
“나를.”
바리톤은 일단 진정을 위해 접시를 찾아 식탁 위에 가득한 코카트리스 미트볼을 덜었다.
질긴 고기를 먹기 쉽도록 으깨서 한 입 크기로 동그랗고 솜씨 좋게 빚은 미트볼은 토마토소스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고 맛도 좋다.
차가운 과실주나 이제는 녹은 칵테일을 번갈아 마시며 배를 채운 바리톤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나 보이기도 하는 주인의 언약자를 바라보았다.
모험하러 나왔지만 위험도 고난도 싫어하는 미코테를 위해 방 안에 양 깔개와 털실바구니를 놔주고 벽난로를 설치해주었는데? 음악이나 연주라면 쥐뿔만큼도 몰라서 다른 거 다 하는 동안 음유시인에는 손도 안 댄 아우라가 방 안에 하프시코드와 악보대를 놨는데? 마물 잡으러 가자는 말도 던전에 가자는 말도 다 무시하고 미코테 옆에 붙어있기도 하고? 둘이 만난 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풀을 캐거나 캔 풀로 천을 대량생산하던 아우라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좋아라 하는데?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새벽에서 보내는 연락도 전부 차단해버리고 어디 간다 싶으면 쪼르르 따라가는 저 아우라가?
그게 싫어하는 거면 이 세상에 사랑은 없고 이 에오르제아의 발렌티온 이벤트도 분홍색 염료를 팔기 위한 상술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당사자가 아니지.
바리톤은 무슨 일이냐고 다시 라에게 물어보았다.
“퀴니가.”
주인님이.
“내가.”
라님이.
“안 예쁘대.”
“예?”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장터게시판 앞에서 어느 옷을 입혀줄까 어느 염료가 예쁠까 하던 저 인간이?
설마 커플끼리 장난으로 ‘못나니~♡’하는 그걸 오해한 건 아니겠지.
페드가 들었다면 ‘나는 장난으로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겠지만 아쉽게도 페드는 아직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뭐 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야-”
어젯밤이라면 어부 집사인 자신과 소환사 집사인 테너가 각기 먼 곳으로 집사수행을 떠났던 때다.
“....해서 퀴니가 ‘라는 섹시하다기보단 귀엽죠’라고 했어요!”
“그게 왜...?”
“내가 안 섹시하대! 안 예쁘대!”
아니 그게 그 얘기가 아닌데.
장난으로 커플끼리 아기멧돼지니 하는 별명을 붙이는 수준까지도 못 간다.
왠지 눈앞이 흐릿하다.
“바리톤.”
“예, 주인님.”
“이거 갖고 어디 수행이라도 다녀오십시오.”
페드는 집사 급료 두 닢을 내밀었고 바리톤은 마롱글라세 몇 개를 들고 후다닥 방에서 나갔다.
“라.”
“...”
라는 팩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에 떨어졌던 이불도 얼굴까지 돌돌 감아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쪽으로 쫑긋 세운 귀랑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정도.
“저 보지 않을 겁니까?”
“...”
페드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이것까지는 되도록 안 꺼내려고 했는데.
“...형.”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귀는 더 쫑긋하게 서고 이불이 단박에 내려가서 반짝거리는 눈이 나타났다가 자신과 마주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안 돼, 안 돼, 못 올려요. 안 돼.”
“싫어, 올릴래!”
안 돼와 돼만 반복되는 한차례의 다툼이 끝나고 라는 귀 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페드는 의자를 끌어당기고, 손톱과 비늘에 마구 긁혀 아까보다 후줄근해진 이불에 대고 말을 했다.
아까 집사랑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습니다.
“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불이 조금 내려갔다.
“제일 섹시하고.”
이불이 조금 더 내려갔다.
제일 실력 좋은 모험가! 제일가는 음유시인! 희망의 빛! 최고의 미코테!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라를 휘감은 이불이 조금씩 내려갔다.
조금씩 내려가던 이불이 마침내 바닥에 떨어졌을 때 페드는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는 저를 봐 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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