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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물

2017. 12. 17. 13:40 | Posted by 호랑이!!!

“...언제 오셨습니까?”

 

종이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A는 붓으로 글을 적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납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내가 하지 말라 일렀다.”

 

A는 용포를 입은 B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려 글을 적기 시작했다.

 

왕이 올 때마다 일손을 멈췄다가는 할당된 양의 반도 시간 내에는 못 할 터이다.

 

이놈, 무례하다.”

 

저 바쁘거든요.”

 

짐이 더 바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서 일을 하시지요.”

 

바깥으로 손짓하자 이제는 왕의 방문에도 익숙해진 시동이 차며 과자를 내어 왔다.

 

과자가 도착하자 A는 과일이 들어간 향 좋은 것부터 집었다.

 

오독오독 깨물면서 한 장을 다 쓰고 다음 것을 집어먹으면서 다음 장을 내놓는데 B의 손이 과자 접시로 가는 것을 발견했다.

 

안됩니다. 좀 기다리셔야지요.”

 

너 저번처럼 과자 한 접시를 다 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아 들켰나.

 

A는 쳇, 혀를 차면서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처음 만났을 때는 참 귀여웠는데.”

 

B가 투덜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A의 심정으로는 남는 것이 후회밖에 없었다.

 

고관대작이었다는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날 즈음에 은퇴해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지방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원래 출세에 뜻이 없었고, 한양에 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한양이며 궁궐, 임금님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면서 꾸역꾸역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를 했다! 행복해했고!

 

지나치게 행복하고 감격해서는, 임금님이 고개를 들어 보라하던 그 한마디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왕의 용안을 봐 버렸다.

 

그리고 왕은 그때부터 자기가 재미있다며 심심하면 찾아오게 되었다.

 

감동도 한두번이지, 이제와서는 왕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

 

처음 뵈었던 당시라면 제가 많이 순진했지요.”

 

지금은 순진하지 않다 말이냐.”

 

생각보다 아버지의 기질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냐, 거 안되었구나.”

 

다음 종이를 꺼내던 AB의 다음 말에 고개를 홱 들었다.

 

품계를 높여줄까 했는데.”

 

B는 동그랗게 커진 A의 눈에 웃음을 참느라 과자를 집어 깨물었다.

 

진짜입니까.”

 

왕은 함부로 농을 치지 않는다.”

 

AB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B에게 따갑도록 꽂히고 있었다.

 

B는 상에 턱을 괴더니 A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 아버지 말고 할아버지를 닮아서 오랫동안 내 옆에 있거라.”

 

동그랗게 눈을 뜬 A의 얼굴 앞으로 향긋한 차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B가 혹시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보려는 듯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빤히 본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A가 입을 열었다.

 

저의 할아버지도 아십니까?”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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