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찻잔 속의 인어

2018. 3. 1. 01:12 | Posted by 호랑이!!!

이 곳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나무의 향이 풍겼다.

 

A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바랜 녹색으로 뒤덮인 이 의자에는 두툼하고 넓은 팔걸이가 둘 있었는데, 한 쪽에는 과일이 얹힌 크림 케이크 조각이, 한 쪽에는 진한 색 차가 가득한 찻잔이 올라가 있다.

 

일렁이는 촛불은 책의 페이지를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였고 특별히 불그스름한 색이 페이지에 덧씌워질 때마다 책 속의 세계는 한 겹 더 감성적이고 온화하게 변했다.

 

한참이나 책에 빠져 있는데 벽난로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A는 읽던 책을 덮고 커다란 장작을 꺼져가는 불 위에 얹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다시 불은 환해졌고 배부른 불도마뱀은 비늘을 번들거리며 수북해진 재 속에 앞발을 담근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A는 화목한 가족이 커다란 푸딩을 먹는 대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포크를 들었다가, 케이크 위를 장식한 체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절인 체리를 받아든 요정은 신이 나서 화분 쪽으로 달려갔고 마침내 A의 독서가 끝났다.

 

따뜻하고 포근한 여운에 허우적거리다가 이제는 다 식었을 찻잔을 집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 마실 거니?”

 

밤바다와 같은 빛 비늘이 있는 인어가 찻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너는 언제 여기 들어왔어?”

 

바다로 가는 길이었는데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이 차가 마음에 드니까 마시지 않으면 좋겠어.”

 

A는 찻잔을 책상 한구석에 두고 커다란 컵에 물을 부었다.

 

마시지 않을게. 난 물을 마시면 되니까.”

 

물을 마시고, A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언제나 소란스러운 길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차들은 스치기만 해도 다치게 할 것처럼 지나쳐가고, 사람들은 웃음은커녕 말마디 하나도 건네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쳐간다.

 

A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붉은 색, 하얀 색 줄무늬 보도블럭이 지느러미처럼 나 있었고 걸음을 뗄 때마다 붉은 벽돌에서는 붉은 물고기가 튀어나와 하얀 모래 같은 보도블럭 위에서 퍼덕이다 다시 붉은 벽돌 속으로 되돌아갔다.

 

파닥, 파닥.

 

펄떡이는 소리.

 

그러다 붉은 빛에 고개를 들면 무채색으로 자란 고층 건물을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와아- 해가 진다.”

 

여기랑 저기랑 하늘 색이 달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A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 아이들 #5  (0) 2018.03.26
마법사들 2  (0) 2018.03.17
마법사들  (0) 2018.02.12
동양물  (0) 2017.12.17
유령도서관  (0) 2017.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