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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8

2018. 5. 19. 00:20 | Posted by 호랑이!!!

 

헨리 제임스 헤일로, 통칭 얀은 서재로 돌아와 가장자리에 금박이 들어가 화려한 편지지를 찾았다. 옆에는 짙푸른 봉투를 하나 놓고 황금색 초와 용이 새겨진 도장을 꺼내놓고 펜을 들었는데 다니엘이 잠시 짐을 챙기러 간 잠깐 사이에 쓰려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래서 저희는 세이렌의 설득을 실패했습니다. 이 일은 여기서 그만...”

오빠!”

문이 쾅 열렸다. 그 너머에 있던 것은 로잘린 레이첼 헤일로, 자신이 만들어낸 듯한 켄타우로스의 등에 타고 있었다.

로즈, 집 안에서는...”

켄타우로스를 만들지 않는다, 알지만!”

그리고 숙녀는...”

오빠 또 나만 두고 가려고!”

얀은 방금까지 쓰던 편지를 손으로 덮었다. 켄타우로스는 로즈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고 로즈는 얀에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다니엘 오빠가 말해줘쪄! 플로라 공주님한테 갈 거라고!”

만약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귀찮음에서 해방되고, 로즈한테도 널 놓고 가려는 게 아니고 그냥 안 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 여행 안 가도 되고, 그 끔찍한 마차도 안 타도 되고. 그렇지만 나중에 또 여왕님이 어떻게든 가라고 보낼 수도 있고, 공주님도 점검차 한 번은 보러 가야 하기는 하고. ... 하면서 머리를 굴리는데 듀크 단이 돌아왔다.

준비 다 됐다.”

아니, 그게.”

!”

로즈의 손에 분필이 들려 있다.

“...다 같이 가자.”

켄타우로스는 희미한 유황 냄새를 내더니 익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판달루치아를 보던 얀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둘이 친해졌군.”

아니야!”

그렇지?”

헬렌은 갔나?”

그 인간은 몇 시간 전에 갔다.”

크게 한숨을 쉬더니 얀은 금박이 있는 편지지를 물에 담갔다. 책상 서랍을 열어 꺼내놓았던 짙푸른 편지봉투를 정리하고 새로 골라서 꺼내면 아까 꺼내두었던 것 못잖게 진한 청록색 봉투와 은박이 들어간 편지지가 책상 위에 오른다. 시험 삼아 펜을 몇 번 긋고 얀은 글을 써내려갔다.

플로라 폰 우드 공주님께. 헨리 제임스 헤일로 자작이 인사드립니다. 연락을 몇 주 전에 드리는 것이 예의임을 알고 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급박하게 서신을 보내오니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 몇 가지 인삿말을 더하고 잘 접어 봉투에 넣은 뒤 인장을 눌러 찍은 뒤 고개를 들자 얀은 방 안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야호! 플로라 공주님한테 간다!”

드디어 할 마음이 들었나보군!”

또 무언가 기뻐하려는 판달루치아를 툭툭 건드리고 얀은 편지를 내밀었다.

뭐야?”

이걸 플로라 공주님한테 배달. 위치는 그린 영지. 까만 눈에 녹색 머리카락인 사람이니 찾기는 쉬울 거다.”

귀찮은 녀석. 판달루치아는 입모양으로 투덜거리더니 편지를 쥐었다. 문을 열고, 나가서 닫았는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문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유황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다들 분주하게 짐을 싼다 어쩐다 해서 다음날 아침 로즈는 잠을 못 잔 티가 나는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마차 앞에 섰다. 그리고 또 날아다니는 마차를 타는 끔찍한 시간을 보냈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자그마한 궁의 앞에 내리게 되었다.

여기에 공주님이 계신다고?”

단이 궁을 보자마자 한 첫 번째 말이다. 벽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고 물감이며 은을 녹인 것으로 기둥에 무늬도 넣은 데다 둥그스름한 지붕에도 장식을 한 것인지 가장 높을 때의 태양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온 벽과 물건에 새며 나무, 사슴들이 우아하게 양각되어 있고 사용한 재료도 전부 내외국을 따지지 않은 고급품들. 이 정도의 건물은 과연 공주라는 사람이 가질 만한 물건이기는 한데. 너무 작지 않나.

잘 왔다, 오랜만이구나 모두들.”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얀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고 단도 후다닥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면 그 곳에 있는 사람은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듯 흘러내린 순한 인상의 사람이다. 놀랍게도 장식은커녕 레이스 한 자락도 달리지 않은 간소한 옷차림인데다 발은 맨발이었지만 가장 눈을 끄는 것은 플로라를 태운 커다란 사슴이다. 사슴이 무릎을 굽히자 플로라는 미끄러지듯 땅에 내려섰고 몇 번 박수를 치자 너구리가 바구니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원래라면 테이블에서 차를 마셔야겠으나 이 집에는 부릴 사람이 없으니 부디 이것으로 만족해다오.”

바구니 안에서 나온 것은 널찍한 천이었는데 새들이 귀퉁이를 물어 풀밭에 넓게 펼쳤고 깨끗해 보이는 접시와 찻잔이 그 위에 놓였다. 플로라는 손수 찻주전자를 잡았다가 파득 놀라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 뜨거워!”

괜찮아요?”

로즈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그 안에서는 녹색 동그라미가 있는 간호모를 쓴 간호사가 솟아났다. 간호사가 플로라의 손을 찬물로 식혀주는 동안 로즈의 메이드가 사람들에게 차를 따르고 간식을 꺼냈다. 얀은 플로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플로라의 곁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너구리며 저만치 떨어져서 지켜보는 대형 동물로 시선을 옮겼다가 생긋 웃었다.

좋아 보이는군요, 공주님.”

얀 오빠, 공주님은 지금 손가락을 다쳐, , 다구요!”

그 말에 플로라는 하얀 찻잔을 잡은 로즈를 내려다보았다.

로즈는 내 모습이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하다니, 어디가요?”

플로라가 얀에게로 시선을 보내자 얀은 미소띈 얼굴을 한 번 기울였다.

로즈는 어렸으니까요.”

로즈도 잘 컸군.”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성공을 축하하는 말과 격려를 건네려는 찰나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숨기려들지 않는 가죽 날개와 한 쌍의 뿔이 돋은 잘생긴 얼굴은 낯익은 것.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걸맞지 않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곤 하는 그 얼굴은, 로즈를 보자마자 활짝 밝아졌다. 아이답게.

어서와, 로즈!”

여긴 판의 집이 아니에요.”

로즈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플로라의 옆에 있던 너구리는 로즈가 내미는 비스킷을 찻물에 담가 씻고, 또 받아 씻고, 씻고 있었는데 플로라가 헛기침을 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즈, .”

?”

숲에 가면 꽃이랑 딸기가 많이 있으니까 가서 놀다가 오렴.”

플로라는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메이드가 가지고 온 작은 바구니에 과자와 차 한 병을 담은 것을 내밀자 로즈와 판은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갔다.

저 둘만 가기에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사라진 쪽을 보던 단이 묻자 마악 차 한 모금을 마신 플로라는 잔을 내렸다.

이 숲에 있는 한 괜찮아.”

나는 이 숲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있느니라, 하고 말하는데 얀이 손을 들었다.

그럼 이제 온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얀과 단은 설명했다. 세이렌의 부탁, 푸른 아이들, 여왕님의 명령이며 모든 것을. 그 이야기를 들은 플로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

플로라 공주님.”

가기 싫다.”

왕족의 반열에 오르셨는데 한 번은 가셔야지요.”

사람은 싫다, 귀족은 더더욱 싫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단은 그들의 주위에 기척이 늘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척은 호의적이지 않는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아서 습관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 하자 얀이 그 손을 눌렀다.

우드는 이미 나를 버렸다. 나는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만 사는 것이 소원일 뿐,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아니하다.”

우드의 사람들을 나쁘게 보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이렌과 여왕님을 생각해주십사 합니다.”

나는 우드를 공작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더는 할 말 없다.”

원하신다면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애당초 가족 때문에 괴로워본 적 없는 자가 가족 때문에 괴로워지는 마음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다니엘은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옆의 헨리는 케이크에 포크를 꽂아 넣을 뿐 조금도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기에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다니엘 자신뿐인 것 같다.

우드 공작, 공작의 남편, 그들의 아들과 딸을 모두 치우면 됩니까?”

헨리,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돼.”

나는 진지하다니까. 공주님의 문제가 그걸로 해결된다면 나쁘지 않잖은가?”

안돼와 돼 뿐인 말을 하는데 플로라가 손을 저었다.

조용히 좀 해 보아라. 누구 하나는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나.”

어째서 살려두려고 하시는 겁니까?”

공작의 다른 귀찮은 일을 떠맡아야 하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플로라는 오히려 안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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