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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트랑 율리안이랑

2020. 5. 25. 01:17 | Posted by 호랑이!!!

아침 6.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푹신한 침대 안에서 퀸타페드가 눈을 떴다.

 

이불 안쪽에는 언약자가 저에게 등을 붙인 채 동그랗게 말려 새근새근 자고 있고 이불 위며 발치, 머리맡에는 언약자를 닮은 꼬마친구들이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파묻혀있다.

 

진한 감동을 받은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퀸타페드는 몸을 부르르 떨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가벼운 운동을 한 후 더운 울다하임을 감안해서 찬물로 몸을 씻었다.

 

7.

 

목욕물은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로 데워둔다. 아침을 준비하다보면 식을 테니까.

 

과일은 씻어 자르고 계란은 반숙으로, 베이컨을 굽고 잘게 자르다보면 시간이 훅 사라졌다.

 

신선한 우유까지 준비하면 맛있는 냄새에 침대 쪽이 부스럭부스럭 잠 깨는 소리가 들렸다.

 

깼습니까?”

 

으으으응.”

 

, .”

 

-.”

 

입에 조그만 별사탕을 물려주자 눈은 여전히 감겨 있지만 입은 오물오물 움직여서 까작까작 씹는 소리가 난다.

 

목욕하면서 아침 먹을까요?”

 

으응...”

 

잠투정을 하는지 끼잉 소리를 내는 라레타를 안아들자 조그만 인형들도 꼬물락꼬물락 움직이더니 한데 모여 다시 잔다.

 

귀여워.

 

이 심장 멎는 귀여움을 계속 보고도 싶었으나 퀸타페드의 품 안에는 먹이고 씻기고 입혀야 할 라레타가 있었기에 비정한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김이 오르는 따끈따끈한 물에 옷을 벗겨 라레타를 내려놓자 라레타는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

 

-.”

 

수란을 자르자 노른자가 흘러내렸다.

 

베이컨과 함께 입에 넣어주자 다시 다물려고 하지 않길래 볼을 콕 찔렀더니 귀가 파득파득 움직이고 입이 다물어져 우물거린다.

 

만지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지 않고 살짝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입을 벌리라고 알아들은 것인지 아-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녹색 포도알을 물려 주었고 차갑게 식혀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이 삐죽 찡그려졌지만 아작아작 잘 깨문다.

 

그렇게 계란, 채소, 베이컨, 과일을 먹이다 이제 되었겠지 싶은 마음에 마실 것을 권했다.

 

우유 마시겠습니까?”

 

.”

 

이것만큼은 누워서 마실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졸린 기색이었지만 따뜻한 물로 얼굴을 씻으며 일어나 앉는다.

 

나만큼 라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응에 퀸타페드는 꿀을 섞은 우유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달걀? 아니면 베이컨?”

 

둘 다 먹을래.”

 

- 하고 입을 벌리면 다시 달걀과 베이컨이 들어간다.

 

또 샐러드, 그리고 과일 순서로 입에 넣어주자 얼만큼 먹고 질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몇 시예요?”

 

이제... 9시군요.”

 

어쩐지 졸리더라... 하암.”

 

오늘은 외출하기로 했잖습니까. 기억나지요?”

 

안 나요.”

 

이제 몸 닦을까요?”

 

쪼끔만 더 있다가.”

 

그러면서 다시 눈을 감는다.

 

 

 

 

 

 

 

 

아침 6.

 

크나트는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전날 꽤 오래 뭘 했더니 몸이 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래저래 체위를 바꿔가면서 했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는 부족하구만.

 

바닥에 떨어뜨린 속옷을 주워 입고 하우스 메이트 비슷한 사람의 정신건강을 위해 추리닝 바지도 입어준 채 운동기구가 가득한 지하실로 갔다.

 

창고를 얼른 하나 지어야 할 텐데.

 

크나트에게는 이 지하실을 어메이징한 플레이룸으로 바꾸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으나 율리안이 쓰는 손님방에 운동기구를 놓기에는 그 방이 너무 작기 때문에 현재 무기한 연기 중이었다.

 

널찍하게 운동기구를 놓으려면 일단 땅부터 다지고, 그 위에 시멘트를 붓고, 벽을 쌓고... 저 쪽 마당에 뭘 묻어둔 게 있었던가? 없었겠지?

 

그나마 마당 넓은 집이라서 다행이다.

 

어릴 때는 방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집에 무슨 마당이 쓸데없이 넓으냐고 불만이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조금은 쓸모가 있군.

 

잠깐 러닝머신을 뛰고 땀을 닦아낸 뒤 첫 번째 근육운동기구에 앉았더니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당연하다지만 율리안이다.

 

몇 모금 정도가 빈 페트병을 들고 달랑달랑 걸어내려온 율리안은 우선 스트레칭부터 했고 몸이 쑤시지도 않는지 쭉쭉 뻗는 것에 크나트는 말을 걸었다.

 

굿 모닝. 도와줄까?”

 

“...됐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뻐근해 보이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고 율리안의 표정이 말했다.

 

당신 손이 닿는 건 밤이면 충분합니다.”

 

“...호오.”

 

율리안은 자신의 말이 또 저 인간에게 뭔가 상상할 거리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피하며 재빨리 러닝 머신에 올랐다.

 

별달리 말을 걸지는 않고, 크나트는 자기 운동이나 하다가 이제 뭉친 근육이 다 풀렸다 싶어지자 운동기구에서 내려와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 좀 떠다 줄까, 달링?”

 

저는... .. 달링이... ...”

 

어쩐지 저 가 한숨처럼 들린다.

 

개의치 않고 크나트는 대답을 기다렸다.

 

“...부탁드립니다.”

 

크나트는 계단을 올라가 일단 물병에 물을 가득 따라놓았다.

 

털썩, 하고 마당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얼른 나갔더니 옆집 사람도 신문을 가지러 나온 것인지 신문을 줍다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그렇군요, 이제 봄이 오려는가 봅니다.”

 

이탈리아는 대개 따뜻하니 특별히 봄이 온다고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렇게 맑게 개인 하늘을 보면 다시 일년이 시작하는구나 싶어져요. 이제 좀 있으면 아이들도 다시 방학을 맞아 돌아올 거고, 또 새로 학기 시작하는 데에 필요하다면서 연필이며 옷이며를 실어 나르겠지요. 우리 애는 지금 영국에 있는데 저번에 왔을 때는...”

 

크나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만 가보고 싶다는 무언의 표시를 했음에도 이웃의 수다는 멈출 줄 몰랐고 크나트는 시계 대신 옆집 사람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그리고 그 때 가게에 갔더니 점원이 애 옷을 보고 그러는 거예요, ‘아주 스코틀랜드 인이 다 됐네!’ 그러더니...”

 

내가 신문을 왜 가지러 나왔지.

 

10분이 지나고 인내심에 한계가 온 크나트는 옆집 사람의 말을 끊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 애 물을 줘야 해서요.”

 

다음에는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나오지 말아야겠다.

 

다시 고양이를 들였나요? 옛날에는 있었다고 어머님이 그러던데, 아주 예쁜 황갈색 고양이랑 까맣고 하얀 고양이랑 회색 고양이 말이에요. 아침마다 우유나 버터 조각을 주면 아주 행복하게 핥다 가더라고 얼마나 그러는지! 제가 말이에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데 항상 저만 보면 아주-”

 

아니지, 아예 신문 구독을 취소해버리자.

 

좋은 하루 되십시오.”

 

신문사를 태워버리자.

 

집 안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크나트는 거칠게 신문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아니 물론 사람과 교류하는 건 좋아하지만 지금은 바쁘다니까!

 

우리 애 물 줘야 한다고! ..., !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려던 크나트는 일어나 물병으로 달려갔다.

 

미지근한 물이 찰랑찰랑한 물병을 쥐고 내려갔더니 율리안이 아까 그대로의 상태로 러닝머신을 달리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놔두고 갔던 물병 안 물의 수위 정도일까.

 

여기 물.”

 

감사- 하아, 합니다.”

 

거의 빈 물병을 들고 다시 올라가서 씻어놓고 크나트는 자기 몸도 씻어두러 갔다.

 

 

 

 

 

 

 

 

 

 

아침 11.

 

오늘은 뭘 입힌다.

 

퀸타페드는 라레타의 몸을 말려주고 머리도 말려주고 빗질도 꼬리 끝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속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한바탕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잘 넘어갔고(비록 라레타의 몸을 한 번 더 씻겨야 했지만) 이제 난제는 라레타에게 어떤 옷을 입히느냐다.

 

우선은 부드럽고 편한 재질의 옷을 안에 입혀야겠지, 울다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따뜻한 동네라고 하였으니까 얇아야 할 거고... 그렇지만 비공정을 탄다면 서늘할 테니 톡톡한 옷이 좋겠다.

 

가장자리에 하얀 털도 대고... 그러면 몽글몽글하니 미코테가 더 귀엽게 보일 터.

 

아니면 아예 안은 얇은 옷을 입혀서- ...하지만 비공정을 타고 가는 동안 의자에 눕기라도 하면 옷이 다 구겨질 텐데.

 

옷을 벗겨놓고 맨 위에 코트만 두르게 할까.

 

아니면 역시 초승달 옷?

 

안에 입을 옷을... 저번에 멜빵바지도 참 귀여웠었지.

 

이것도 귀엽고 저것도 귀엽고.

 

뭐든 다 잘 입으니 뭐가 편한지 알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입히기에는 퀸타페드의 장인정신이 용납지 않았으니.

 

삼십분을 더 고민하던 것은 등 뒤로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닿으면서 사라졌다.

 

뭐야, 뭐 해요?”

 

등에 냉큼 매달리는 미코테가 다치지 않도록 팔을 잡아 목 쪽으로 가까이 당기면서 일어서자 달랑달랑 흔들리는 발이 제 종아리나 허벅지를 건드렸다.

 

옷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동을 해야 하니 이 트렌치 코트와 아오자이...”

 

나 가운 입을래요.”

 

라레타가 옷 사이에서 상앗빛으로 보드라운 알라미고 가운을 꺼냈다.

 

“...중에서 역시 그 가운이 제일 라랑 잘 어울립니다. 역시 고르는 건 라한테 맡겨야겠어요. 제일 좋은 선택입니다.”

 

보지 않아도 보송보송하게 빗질을 끝낸 꼬리가 신나서 치켜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요? 역시 내가 고르는 게 제일이지?”

 

이래봬도 좋은 물건은 많이 봤으니까요! 뭐가 좋고 나쁜지는 한눈에도 알아본다구!

 

우쭐우쭐 즐거워하는 모습에 페드는 여름용 색안경이라도 구해서 쓰고 다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가면이라던가, 뭐든지 가릴 수 있는 걸로.

 

보석이라던가 좋은 비단을 쓰면 좀 좋은 사람으로 보일까?

 

 

 

 

 

 

 

 

 

 

아침 10.

 

크나트는 씻고, 머리를 말린 채 뒤집개로 프라이팬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발랄한 멜로디의 민요나 흥얼거리면서 넓적한 접시 위에 말랑말랑하게 익힌 프렌치 토스트와 통통한 소시지와 반숙으로 익힌 달걀을 얹고 껍질을 벗긴 토마토를 한데 놓았다.

 

치즈를 좀 넣을까 말까.

 

미간을 찡그리면서까지 고민하며 크나트는 한 접시의 프렌치 토스트에만 설탕을 한 숟갈 얹었다.

 

이봐 달링! 예쁜 신부님? 섹시한 신부님-!”

 

지금쯤이면 씻고 있으려나? 아니면 옷을 입고 있나.

 

어느 쪽이든 잘 안 들릴 테니 세레나데를 부르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외의 곳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크나트는 펄쩍 뛰어올랐다.

 

‘-렇게 부르지- -십시오-’

 

허니? 아직 운동하고 있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하려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오자 아직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게 보인다.

 

조금만 더.... 하아, 하고 가겠습니다.”

 

조금만이 얼마나 조금만일까.

 

지하실 벽에 못을 박기 싫어서 시계 거는 것도 미뤄뒀는데 아무래도 조만간에 하나 걸어놔야 할 것 같다.

 

런던 시계탑에 걸린 것만큼 큰 걸 러닝머신 바로 앞에다 걸어두면 저번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몇 시간이나...

 

잠시 크나트는 음란한 상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겉모양만은 멀쩡해서 율리안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크나트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손목시계를 가져왔습니다. 정말 조금만 더 하다가 올라가겠습니다.”

 

그렇다면야.

 

크나트는 다시 계단을 올라와 한 사람 몫의 음식에 덮개를 씌워두고 먼저 사용한 접시를 씻고 양치질을 하고 옷장 문을 열어 옷을 골랐다.

 

짙은 회색 수트에 반짝이는 금속 단추를 달고 넥타이는 남색... 아니면 초록색? 이 노란색은 사 놓고 한 번도 안 썼군.

 

모처럼 격식을 내려놔도 좋을 자리이니 무늬가 들어간 것도 좋겠지.

 

하얀 줄무늬가 하나, 둘 들어간 것은 무난하게 잘 어울리고.

 

체크 무늬는 대체 어쩌다가 이 옷장에 들어온 거람?

 

이 가로 줄무늬는 누구 선물을 주려고 샀던 것 같은데 결국 주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했군.

 

조만간에 대대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넥타이를 죄 꺼내자 생각보다 많았고, 왜 골고루 안 썼는지 고민하기에는 바리에이션이 지나쳤다.

 

은색 줄이 들어간 것과 치즈 무늬가 들어간 것 중 어느 것으로 할 지 고민하다 잠시 정지한 크나트는 회중시계부터 단추에 달았다.

 

...그러고 보니 선인장도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고양이 무늬는 나중에 율리안에게 주자.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넥타이 몇 개를 골라들고 시계를 보니 깜짝 놀랄 만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 후다닥 율리안의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씻고 있나? 하지만 화장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 문을 두드렸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벌써 나간 거야!?

 

내가 너무 늦어서!?

 

! 차 열쇠!

 

차 열쇠 어디있지!?

 

카운터에 올려둔 바구니를 뒤적였지만 열쇠 대신 동전이나 명함, 클립이나 쿠폰 같은 것들이 손가락에 달그락거렸다.

 

옷장 서랍 위? 없고!

 

침대 옆에!? 없어!

 

어제 입었던 재킷... ! 여기! 이거!

 

주머니를 뜯어내다시피 벌리고 열쇠를 끄집어내 집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찰나 크나트의 귀에 기계소리가 걸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크나트는 고르던 넥타이를 그대로 움켜쥐고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달링 슈거?”

 

“..., 하아... 그것도... 접니까.....?”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12.

 

퀸타페드는 비공정에 올랐다.

 

다리 아프지 않습니까? 목이 마르지는 않아요? 별사탕을 좀... 아니, 안 가져왔구나.”

 

별사탕은 나오는 길에 꼬마친구 라레타들에게 전부 주어버렸다.

 

조르르륵 붙어 서서 어디가? 데려가? 언제 와? 빨리 와? 하면서 종알거리는 것에 발이 묶여서 늦어지자 가면서 먹이려고 했던 별사탕 봉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많아! 반짝반짝해! 올록볼록해! 데굴데굴해! 하는 것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미간에 힘이 꽉 들어간다.

 

그리고 그 새 자리를 찾아낸 라레타는 으쓱거리며 퀸타페드를 당겨 자리에 앉혔다.

 

역시 형이 있어야겠지? 라는 것을 잔뜩 뽐내면서.

 

멋지다 내가 정신을 딴 데 팔아도 형이 다 챙겨준다!고 했더니 꼬리털이 한껏 보들보들해졌다.

 

멋진 미코테 꼬리털을 빗어줘도 됩니까?”

 

어쩔 수 없지! 퀴니니까 허락해주는 거예요!”

 

빗을 착 꺼내들고 그새 헝클어진 털을 빗어주자 반질반질해진다.

 

너무 좋아.

 

퀸타페드는 이왕 빗을 꺼낸 김에 머리털까지 빗어주기로 결심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부드러운 털이 사르르 벌어졌다가 가지런하게 내려앉는다.

 

머리에 쓴 모자부터 목의 리본, 반지, 가운, 반지르르한 머리털과 꼬리털.

 

집에 놔둔 꽃향기가 배어서 은은하게 향이 난다.

 

너무 예뻐 내 미코테.

 

여기서 무릎 꿇으면 안 되겠지.

 

그러면 눈에 띌 텐데 누가 봤다가 반해버리면 안 되잖아.

 

왜 비공정에는 개인실이 없는 거야.

 

빛의 전사의 이름으로 개인 비공정을 만들고 싶다.

 

마법 종류만도 네 가지나 되면서 왜 투명해지는 망토는 안 만드는 건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 필요할 거란 말이야.

 

퀸타페드는 알 수 없는 원망을 하며 라레타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뭐야? 추워요? 하는 게 너무너무 귀엽다.

 

꽉 끌어안아 버리고 싶다.

 

라레타는 왜 작고 가녀리고 연약한 사람이라서...

 

퀸타페드는 슬펐다.

 

그리고 비늘 달린 꼬리가 라레타의 허리에 감기자 라레타는 퀴니가 추운가!? 라며 장갑을 꼬리 끝에 씌워 주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약속이고 뭐고 같이 커르다스 서부고지의 오로라나 보러 갈까.

 

-”

 

하고 입을 떼는 순간, 우렁차게 방송이 흘러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두고 가시는 물건이 없는지 잘 확인을-”

 

도착했대요!”

 

라레타는 퀸타페드의 소매를 당겼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할 걸.

 

퀸타페드는 겉옷이며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공정에서 내려 걷고, 작은 기차를 타자 라레타는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퀴니 이것봐요, 금속으로 만든 뱀 같아! 이거, 이거 뭐라고 불러요? 기차? 타 본 적 있어요?”

 

한 번 있습니다. 이것은 좀 작군요.”

 

그리고 유령도 없고, 뚜껑도 있군.

 

저번에는 어디에 이동하기 위해 기차에 탔다기보다는 다른 일 때문에 탔었기 때문에 퀸타페드도 창문에 딱 달라붙었다.

 

평화로운 들판과 산이 보이고 강과 꽃이 지나가고 양떼도 있다.

 

내린 역도 자그마해서 역무원이 한 명, 매점에 한 명 있을 뿐.

 

그리다니아예요?”

 

그런가 봅니다.”

 

라레타에게 젤리를 한 봉지 들려주고 퀸타페드는 노란 튤립과 프리지아를 샀다.

 

이건 못 본 꽃인데 씨앗을 얻을 수 있을까.

 

얻어 간다면 아마 푸푸차님이 기특해하시겠지.

 

역에서 나와 걷다가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을 발견했다.

 

둘은 안으로 들어갔고, 방으로 안내받아 가자 두 사람이 있었다.

 

잘 찾아오네? 여기야 여기.”

 

잘 계셨습니까.”

 

두 분은 잘 지냈습니까 리비오 씨, 스호르 씨.”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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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만년필이다

2020. 4. 23. 00:18 | Posted by 호랑이!!!

수현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는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우는 것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거나 아버지의 친척뿐이었다.

 

저 사람들이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지.

 

사실 수현은 처음부터 장례식에 반대했었다.

 

장례를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랬을 때도 가장 짧고 초라한 것을 은근히 내밀었지만 사흘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이기지는 못했다.

 

하기는 일생 내내 그랬지.

 

“누나.”

 

현수의 양말에 있는 노란 곰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상주 나한테 주라.”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현수의 입에서는 열릴 때마다 소주 냄새가 났다.

 

“어른들이 그래도 상주는 남자가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큰아버지가 그 소리 하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랑, 고모랑 큰엄마도.”

 

그리고 또, 하면서 누가 거기 있었는지 떠올려보는 현수를 보며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학교 가야 하잖아. 낮에도 있어야지, 상주 하려면.”

 

“어, 그런가?”

 

“어른들이 준다고 다 받아 마시지 말고 가서 자라.”

 

“으응.”

 

현수가 자러 가는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현이 이름을 좀 기다렸다 주는 건데.”

 

수현이와 현수의 사이에는 자그마치 팔 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억지로 공을 차게 하는 것 외에 첫 팔 년은 수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 팔 년은 갑작스럽게 길어진 양갈래 머리와 꽃무늬 치마가 생겼고, 그때부터 이름에 대한 불만어린 한숨소리가 늘어났다.

 

머리를 털고 수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좀 잤어? 밥은 먹었고?’

 

‘오늘 피자 먹으려고 했는데 참고 너 오면 맛있는 거 먹기로 함’

 

아영이었다.

 

수현의 머릿속에서 한숨소리가 날아갔다.

 

 

 

 

 

 

 

 

다음날은 발인이었다.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까지 한 다음 친척들이 밥을 한 끼 하자는 것을 거절한 다음에야 수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자고 싶었지만 입출금 내역을 정리해야 했기에 책상 앞에 앉아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아버지는 핸드폰이 있는데도 굳이 종이와 펜을 쓰는 수현을 보고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는 이름자도 인색하던 아버지가 보여준 모처럼의 관심에 퍽 기뻤었지.

 

장례를 치렀기 때문인지 기묘하게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잡은 펜이 아버지가 선뜻 건네준 얼마 안 되는 물건이라 더 그런지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 펜대에 금색 테가 들어간 것은 짙푸른 잉크를 컨버터로 채워 쓰는 만년필로, 대학에 들어가 기말고사에서 1등을 하자 받은 것이다.

 

그 때는 이 펜이 아주 고급품처럼, 아주 보물처럼 느껴졌다.

 

수현의 눈이 펜꽂이로 향했다.

 

검은 만년필을 받고 난 이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펜들은 가격도 색도 가지각색으로 투명한 유리몸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푸른색 얼음같은 몸체를 가졌거나 청록색 장식이 반짝였다.

 

“수현이 왔어?”

 

방문이 열리고 아영이가 다가왔다.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

 

아영이가 팔을 벌려 수현을 안았다.

 

한때는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고는 했던 이 자세는 이제 꽤 편안해서 아영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몸을 기대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려지고는 했다.

 

지금처럼.

 

“이거 너 줄게.”

 

팔을 풀고, 수현은 펜꽂이에서 검푸른 만년필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남색 잉크, 회색 잉크, 펄이 들어간 잉크들, 밝고 파란 잉크, 금속 느낌이 나는 잉크를 한아름 안겨주자 아영이는 잉크와 수현을 번갈아보았다.

 

“갑자기? 이걸 다?!”

 

“당분간 만년필은 쳐다도 안 보려고.”

 

수현은 서랍을 열고 펜꽂이에서 만년필 한 움큼을 꺼내 그 안에다 처박았다.

 

“하지만 잉크는 아까우니까. 상하면 안 되고.”

 

“잘 쓸게!”

 

아영이는 수현의 펜과 잉크를 받아들었다.

 

정리부터 하겠다며 가지만, 아영이는 그걸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기만 할 것이다.

 

그걸 두고 정리를 한 거라며 우길 것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부터 칠이 벗겨진 낡은 펜이 생기 없이 빛을 반사했다.

 

“이거 줄 테니까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

 

무슨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수현은 펜을 부숴 버리는 대신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일도, 아직 자신에게 상처를 남겨 숨 쉬고 볼 때마다 피를 흘리게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자신이 울고 화를 내던 모든 일이 이제 자신의 마음에 작은 스크래치조차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극복하면 좋았겠지만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언젠가는 흉터가 되고 잊혀졌다가 돌아보면 또 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나중에도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내가 만년필을 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까지 그러지는 않겠지.

 

수현은 낡은 만년필을 망설이다가 서랍을 열고, 넣고, 닫았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나 면 먹고싶어!”

 

“어 나 며칠동안 국이랑 밥만 먹었더니 그건 좀.”

 

“국물이 싫은 거지? 내가 만들 테니까 비빔면은 어때?”

 

“계란 삶아서 넣자,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만년필을 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물 좀 올려줘, 얼음도 넣을까?”

 

만년필은 만년필일 뿐이니까.

 

 

[드레+해리] 클리셰 범벅

2020. 2. 29. 00:26 | Posted by 호랑이!!!

해리는 눈을 떴다.

 

콧잔등에 익숙하게 얹히는 무게는 자신이 아직 안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무언가 어색한 감각이 들지만 어두운 것은 익숙한 일이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머리를 박아서 터무니없이 작은 곳에 갇혔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손을 휘저어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좁은 공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좁고, 어두운 공간.

 

체념한 듯 눈을 감은 해리는 갑자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

 

버논 이모부일까? 해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모부가 할 만한 짓이라고 해 봐야 자신의 벽장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두들리가 계단 위에서 펄쩍펄쩍 뛰게 두는 정도일 거니까.

 

무언가 둔탁하고 큰 소리가 났다.

 

해리는 손에 걸리는 작은 막대를 달각달각 흔들었다.

 

할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

 

봄바르다!”

 

알 수 없는 고함과 함께 쾅,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와 갑작스레 흩날리는 먼지에, 해리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깨끗하게 깎인 잔디밭.

 

새하얀 대리석 파편이 날리고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에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스카치테이프로 고정시킨 안경을 옷자락으로 문질러 닦자 너무나도 놀란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고 단정한 모습은 마치 버논 이모부를 떠올리게 했지만 무언가가 다르단 말이지.

 

그 사람은 구덩이 위에서 해리를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눈과 떨리는 눈.

 

저 사람도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군.

 

아마도 자신이 뭔가를 또 잘못했겠지.

 

이상한 마법을 썼다던가,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던가.

 

그렇기에 애써 일어설 생각도 안 했는데 그 사람은 손수 이 구덩이 안까지 내려와서 해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뒤돌아 살펴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듯... 그러니까 자신이 본 것 중에서는 드물게 긍정적인 의도처럼 살펴보더니 떨리는 손으로 들어올렸다.

 

포터.”

 

, 선생님(sir).”

 

해리 포터?”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버논 이모부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에 허연 먼지가 묻었다.

 

어색하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든 해리는 이 사람의 얼굴이 원래 이렇게 창백한지 아니면 놀라서 이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꽉 잡으렴.”

 

해리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사람은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널찍하게 잘 깎인 잔디밭.

 

꽃향기.

 

새하얗게 조각된 대리석.

 

그 모든 것이 있는 공동묘지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크나트는 젤라토를 들고 교정을 어슬렁거렸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퍽 낯설고 그 사람들이 죄다 제 또래라는 것은 더더욱 낯이 설다.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에 안경을 낀 사람이 제 앞으로 지나가자 크나트는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인상을 콱 찌푸렸다.

 

염병.”

 

그 늙-만 아니면!

 

그리고 크나트는 무심코 생각한 늙다리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자기 취향은 자기 또래 사람이거나 한두 살 어린 쪽인데.

 

아니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야하다고 생각한 거야? ?

 

절대로 내 취향이 아닌데!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젤라토가 담긴 과자 콘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영감탱? 영감? 아저씨? 아무튼 늙 어쩌구 저쩌구는 빼고.

 

이름을 듣기는 한 거 같은데 뭐였지.

 

“-스호르 교수님.”

 

움찔.

 

크나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후다닥 대리석 기둥 뒤에 숨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교수님, 이걸 해석해봤는데요 문법이-”

 

이 부분은-”

 

질문 같은 거 하지 마라.

 

빨리 꺼져.

 

크나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을 진지하게 노려보았다.

 

빨리 꺼져라 빨리 꺼져, 꺼져꺼져꺼져꺼져.

 

그 진지한 사념에 손에 들린 젤라토가(어린아이에게 빼앗은 것이다)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크나트는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을 째려보았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잠시 고개를 들었고, 크나트랑 눈이 따악 마주쳤다.

 

그 사람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왜 나를 노려보지?’

 

그다지 필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 사람은 라틴어 수업은 물론 대다수 수업에서 1등을 차지하는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 똑똑한 학생은 교수님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녹음하면서도 저 노려보는 사람과 자신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날 노려볼 이유가 없지

 

와작.

 

크나트의 손에서 젤라토가 찌그러지며 바짓단을 더럽혔다.

 

, 차가!”

 

상처 있는 손을 거칠게 탁 털자 핑크색 깜찍한 덩어리들은 풀숲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녹아내렸다.

 

그리고 똑똑한 학생은 문득 떠오르는 그럴싸한 가설에 교수님의 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스호르 교수님, 저 사람과는 아는 사이인가요?”

 

율리안은 돌아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질척질척하게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외에는.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겨우 외운 학생들 몇 명 외에도.

 

누구랑 말입니까?”

 

어라? 어디 갔지?”

 

학생은 별 일 아닌가보다 하고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한편, 저 먼 곳의 기둥 뒤에서는 운동량에 비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크나트가 있었다.

 

가뜩이나 불량스럽게 차려입은 정장이라 매었다기보다는 걸쳤다는 말이 올바를 넥타이임에도 잡아당기자 손 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다.

 

달짝한 냄새가 나는 손을 재질에 비해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 옷에다 마구 문지르자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비쌌을 옷의 품격이 한 단계는 더 내려갔다.

 

에잇, !”

 

애당초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라고 시작하는 불평을 하려는 찰나 크나트는 몸이 굳었다.

 

짙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녹색빛이 자신을 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

 

멈춰버린 것 같은 사람들을 두고 시간이 또 흐르고.

 

마침내 크나트가 움직였다.

 

안 따라왔어!”

 

율리안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달짝지근한 딸기 냄새가 풍겼다.

 

안 물어봤습니다.”

 

덩치 크고, 목소리 크고, 성격도 나빠 보이고.

 

게다가 힘도 세어서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무서워해 본 적 없을 것 같이 생긴 젊은이인데.

 

자신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때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따라온 것 같군요.”

 

, 아니라니까!”

 

율리안은 일부러 힘을 주어 한 발짝 탁, 소리 나게 발을 디뎠다.

 

움찔, 하고 큰 덩치가 놀란다.

 

미끄러진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어 올리면서 다시 발을 세게 콱, 디디려고 하는데 발 아래 단단한 구두가 밟혔다.

 

"...이봐 스호르 교수님."

 

실수인 척 뒤로 발을 빼려던 율리안은 흉흉한 녹색 눈을 보고서 직감했다.

 

잡아먹힌다고.

 

 

 

어느 화장품 요정의 엔딩

2020. 1. 10. 23:08 | Posted by 호랑이!!!

거짓말이지...?”

 

나는 멍하니 팩트의 요정을 올려다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난생 처음 사 본 팩트에서 나타난 내 작은 요정은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와 접점이 생기도록 도와주었고 화장으로 내가 더 예뻐지게 도와주었으며, 더 날씬해지는 방법과 더 또렷한 눈매와 더 나은 몸매를 얻게 도와주었다.

 

공부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피부가 나빠진다며 일찍 자라고도 알려주었고 시험지 풀이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면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가 피자와 치킨, 친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흔들릴 때마다 샐러드를 한 번 더 내밀며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비록 성적은 떨어지고 정말 친한 친구들은 멀어졌지만 같이 밥 먹고 과제할 친구는 많았고, 더 이상 단거리 달리기에 11초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옷을 골라도 내 몸에 맞았고 심지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선배와 사귀게 되었었고.

 

작은 성과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내 요정.

 

요정은 지금까지 무엇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별을 정복할 수 있어.”

 

요정은 기괴하게 깔깔 웃어젖히더니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고개를 홱 숙였다.

 

“100. 그 이전부터 하던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거든.”

 

? 어떻게?

 

전쟁? ? 환경오염?”

 

바보 아냐? 내가 지금까지 네 옆에서 뭘 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원반이 보였다.

 

하얗고 푸른 구름 사이에서 그것은 종말을 알리는 무언가처럼 땅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널찍한 화장대에 가득한 립스틱, 틴트, 립쿠션, 립글로즈,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프라이머...

 

겨우 저런 걸로?”

 

겨우?”

 

요정은 작은 창을 만들었다.

 

그 창 위에는 여러 뉴스 기사와 잡지, 신문 같은 것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천연+기능화장품으로 1030 女心 잡을 것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욕심이 없다

 

정규직 진입 비율은 9:1”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 17%에 불과...”

 

댓글도 드문드문 보였다.

 

요정은 그 옆에 작은 창을 하나 더 만들었다.

 

너도 곧 활용 될 테니까 보여줄게. 이 수치는 우리의 힘이야.”

 

한 쪽에서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가 잠시 흔들리더니 20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었다.

 

우리는 작지. 지능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걸 전부 활용할 생각을 하거든. 우리 모두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

 

작은 창이 하나 더 생겼다.

 

180 정복할 수 없음

150 주의 요망

130 안전

 

이건 너희 수치야.”

 

우선 점수가 50 올라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크기 점수라고 했다.

 

그 점수는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80... 100... 117... 125... 128.... 130...

 

느려지는 속도에 애가 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속도라면 180은 안 되겠지만, 제발...

 

그러나 숫자는 135에서 그쳤다.

 

“...이것밖에 안 돼?”

 

허망한 말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내 요정이 깔깔 웃었다.

 

이만하면 많은 거지!”

 

한 쪽은 다른 한 쪽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 그 쪽을 깎아내리고 괴롭히는 데 열정을 쏟고 있고, 한 쪽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꾸미는 데에 불필요하게 신경쓰잖아?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수술하면 마치 고장난 물건을 대하듯이 고쳤다고 하고!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진 거 알겠어?

 

고등학생 때까지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했다며? 지금 네 성적은 어때? 만족스러워?

 

네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느껴져?

 

아니겠지.”

 

요정이 웃었다.

 

눈가에 그은 선이 짝짝이인지 아닌지, 나시를 나같은 몸에 입어도 되는지, 화장품을 잘 안 쓰게 되면 괜히 돈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네가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지.

 

A는 거울을 보았다.

 

요정은 멋대로 떠들었다.

 

거울 위에는 수많은 플라스틱들이 반짝거렸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 빛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얼마 전까지라면 예쁘다고 했을 그러한 장면이다.

 

사실은 지금도 예쁘다고 느끼고는 있어.

 

하지만 그 감동은.

 

내가 잘만 하면 얼굴과 미래, 주위까지 바꾸어줄 거라고 믿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는 예전만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기이함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의외로 외계인의 말이었다.

 

“...네가 그대로였다면, 저 수치에 1이 더해졌을 텐데 말이야!”

 

“1? 10도 아니고 1?”

 

“70억 중에서 한 사람이 1이라는 숫자를 더 올릴 수 있다면 대단한 거지.”

 

나는 숫자를 돌아보았다.

 

135

 

70억 명이 모여서 만든 135라는 숫자에 내가 1을 더하는 인간일 수 있었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이제 너도, 사람들도 다 다시 활용될-”

 

찌익.

 

내 칼이 외계인의 날개를 찢었다.

 

눈썹을 다듬을 때 썼던 칼이 날개를 뚫고 벽에 박혔다.

 

이 절망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상하게 내 의식이 또렷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멀어졌던 친구 중 하나였다.

 

여보세요?”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너 괜찮아? 너 자취방이 나랑 가깝지, 내가 갈까?]

 

아냐, 아냐, 내가 찾아갈게.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다 가방을 찾았다.

 

핸드폰과 작은 지갑 하나만 넣어도 꽉 차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가방이라 이걸 멜 때면 쿠션과 립스틱과 또 무슨 자질구레한 물건들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야 했다.

 

가방을 뒤집어 안을 비우고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외계인을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제대로 주머니가 달린 운동복 바지에 핸드폰을 밀어 넣고 A는 집을 나섰다.

 

이 세상의 어디에선가 띵, 소리가 나며 1351이 더해졌다.

 

.

.

 

.

.

.

 

.

.

.

.

 

그리고 그 소리는 몇 번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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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휴가

2019. 12. 23. 14:33 | Posted by 호랑이!!!

율리안은 팔을 더욱 길게 뻗었다.

 

손 끝이 잠긴 바닷물은 따뜻해서 나른한 기분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하얀 눈도 내리고 길도 얼고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의 목 깃을 세우고도 한없이 웅크려 다닐 텐데.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보내는 12월이라니.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뻗자 쟁반 위의 푹 익은 과일과 치즈가 닿았고 샴페인이 담긴 글라스의 단단한 다리가 만져진다.

 

파도가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타원형으로 둥그스름한 포도알은 이리로 데굴데굴 굴러갔다가 또 저리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저 음흉한 남자까지도 느긋한 기분인지, 평소라면 몇 번쯤 손을 댔을 법도 한데 오늘은 겨우 태닝 오일만 제 몸에 문지르고 갔다.

 

율리안은 포도알을 입에 물었다.

 

자신의 입에는 지나치게 달고 무른 것이 향긋하게 터지며 태양빛에 데워진 열기를 퍼뜨린다.

 

배 위에서 나른하게 엎드려 있자, 크나트는 챙 넓은 여름용 모자를 얼굴에 덮어주고 갔다.

 

끊임없이 나직한 파도 소리가 들리고 향긋한 과일 향을 맡으며 있자니 이 곳이 지상낙원일까 싶어진다.

 

이미 이대로 몇 시간이나 지나버렸는데... 일어나서 뭐든 해야 하는데... 책이라도 읽거나...

 

하지만 머릿속이 평온하게 잠들어버려서 도무지... 도무지 일어날수가... 아아아..... 이것도 다 저 흉악한 자의 농간임이 분명...

 

물고기가 툭툭 건드리고 가는지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살살 저어서 쫓았지만 잠시 사라질 뿐 이내 다시 다가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다.

 

손가락을 물고기들한테 잠시 맡겼다가 잠을 애매하게 쫓는 것처럼 느껴지자 아예 물 밖으로 뺐다.

 

바닷물에 젖은 손가락은 약하게 당기는 느낌을 주며 말랐다.

 

아마 소금기 때문일 테지, 아니면 물 때문이거나.

 

율리안은 무심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느껴지는 짠맛에 몸을 일으키고 샴페인을 마셨다.

 

샴페인에서는 약하게 단맛이 났는데 입안의 소금기와 합쳐지니 얼마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손끝을 물에 참방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가면 입가를 타고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다시 샴페인.

 

소금물.

 

샴페인.

 

달링, 이상한 거 먹지 마.”

 

지지야 지지.

 

크나트는 어린 아이에게 하듯 얼렀다.

 

그 목소리조차 반쯤 잠든 채 하는 것 같아서 율리안은 눈도 뜨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 의미가 알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지 알지 못한 채.

 

크나트의 손이 율리안의 안주 접시를 더듬다가 치즈와 포도 한 움큼을 가져갔다.

 

팽팽하게 부푼 포도 껍질이 툭 툭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처럼 따뜻한 바람이 잎 넓은 나무를 흔들었다.

 

크나트는 눈을 떴다가 어느샌가 해가 지고 있자 몸을 일으켰다.

 

한 상자 가져왔던 술은 벌써 한 켠이 다 비어 있었고, 그래서 크나트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두 상자는 더 보내달라고 했다.

 

샴페인-은 이미 충분히 마셨으니 부드러운 맛의 와인으로.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맛을 모르니까 적당히 추천을 받거나-

 

이런 때 할아버지가 그랬었지.

 

여차하면 제일 비싼 것으로 사면 된다고.

 

먼저 일어난다? 달링은?”

 

조금만 더 있다가...”

 

먼저 갈테니 이따 부르면 와야 해.”

 

다시 율리안의 손이 흔들렸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크나트는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섬으로 발을 딛자 푹신하고 깨끗한 모래에 발이 푹 들어갔다.

 

잘 말린 나무 토막이 안으로 굴러들어간다.

 

둥글둥글하고 커다란 덩어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쌓이고 크나트는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3

 

2

 

1

 

Fire!

 

자그마한 성냥개비가 안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불이 후루루 일어나며 그릴을 벌겋게 데우고 크나트는 미리 준비한 고깃 덩어리를 불 위에 척 척 얹었다.

 

큼지막한 것이 익으며 육즙을 뚝 뚝 떨어뜨렸고 그 때마다 아래에서는 치이익 소리가 났지만 이내 물기는 증발하여 소리 역시 사라진다.

 

고기 외에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무엇이든 얹고 잘 손질한 흰 살 생선 한 토막도 위에 얹혔다.

 

껍질이 파삭하게 오그라들며 생선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아스파라거스, 피망, 양파 썬 것도 얹고 마늘도 후두둑 올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인가 어두워진 하늘에 연기가 어른어른 올라간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공기 속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지고.

 

크나트는 율리안을 불렀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2세즈] 뜻밖의 수출품

2019. 12. 13. 19:26 | Posted by 호랑이!!!

빵도리 안녕!”

 

안녕! 놀러왔어!”

 

아르카디아는 누가 감히 그런 이름으로! 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시종도 없이 에샤드카와 일레하 쌍둥이가 양 손에 커다란 상자를 안고 들어오더니 방 가운데 앉았다.

 

여간한 아이라면-혹은 어른이라도- 들 수 없는 무게의 상자는 땅에 내려놓자 묵직하게 흔들려서 아르카디아는 기대어린 눈으로 냅다 바닥에 쪼르르 뛰어갔다.

 

쌍둥이는 고작 몇 년 새에 또 훌쩍 커버린 아르카디아의 손을 잡고 바닥에 앉혔다.

 

이거 내 거야?”

 

, 이건 네 거야.”

 

아빠랑 아빠랑 일레하가 만들었어! 그래서 가져오는 건 내가 했다?”

 

상자를 열면 에셀리온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커다란 나뭇잎의 잎맥만이 엷게 남아서 눈가에 대어도 건너편이 훤히 비쳐 보인다.

 

그리고 과일을 듬뿍 사용한 과자, 향이 나는 나무와 비단천을 사용하여 만든 장난감, 무엇이 자라는지 모를 커다란 화분은 도자기였고 빵돌이는 모르는 무슨무슨 기법을 사용하여 새겨진 그림은 거대한 용과 과일 나무다.

 

거기에 깃털이랑 가죽이랑 육식동물의 이빨 같은 것이 나왔고 에샤드카는 내가 찾은 거야! 라며 활짝 웃었다.

 

호기심어린 손이 상자를 휘젓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은 금방이라, 아르카디아는 일레하가 에샤드카를 쓰다듬는 것과도 같이 손에 묻은 흙을 벨벳 바지에다 문질러 닦았다.

 

세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그러시면 안된다며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에는 셋뿐이었고 또 혈기왕성하였기에 엎치락뒤치락 장난질까지 쳐서 우아하게 지어진 반바지는 회생 불가로 보일 정도로 온갖 이물질이 묻고 구겨졌다.

 

으아아아!”

 

좀 더 괴로워해.”

 

이 정도는 괜찮지?”

 

그리고 쌍둥이 둘에게 깔려버린 빵돌이는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위에서 일레하는 히죽히죽 웃으며 빵돌이를 내려다보았고 에샤드카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주어 무게를 분산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다 돌연 빵돌이의 발이 웬 상자를 걷어차 균형을 잃은 에샤드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야야야...”

 

나 방금 뭐 찼는데? 걷어찼는데?”

 

빵돌이가 벌떡 일어나자 일레하는 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에샤의 옆으로 구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걷어찬 물건은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일레하의 능력으로 눈에 띄지 않게 들여온 상자는 빵돌이도 들 수 있었고 흔들었더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도 내 거야?”

 

아빠 방에서 몰래 갖고 왔어.”

 

상자는 귀한 것, 좋은 것을 다 보고 자란 세 황자의 눈에도 귀해 보였다.

 

백단목을 말리고 잘라 만든 모양은 얼핏 수수해 보였으나 장인의 손길로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잠금쇠의 모양은 잘 보았더니 긴 꼬리를 가진 용인데다 엷게 신성한 문양이 새겨져서 아이들 손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 종류로.

 

어른의 물건이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일레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 아이는 선물상자를 열어볼 때보다 가까이 둘러앉아서 몸을 기울였다.

 

외국으로 수출도 잘 안 하고, 성인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줄 수 없게 금지된 과자가 있어.”

 

그런 게 있어?”

 

거기에 에샤드카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정말 달콤한 맛이 나는데 딸기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과일의 맛도 안 나. 심지어는 꿀도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말이야. 폐하 아빠한테 올라온 보고를 몰래 봤어. 이걸 먹으면 잠을 안 자도 힘이 나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몸이 따끈따끈해지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한 번 본 글도 줄줄 외울 수 있대.”

 

약 아니야? 정말 과자야?”

 

나 그거 본 적 있어. 새까맣고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무지무지 좋은 냄새가 났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은 물건이니까 우리한테는 안 주는 것 같아. 폐하 아빠랑 아빠는 매일 밤 새니까 매일 먹는 게 아닐까?”

 

세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범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으로 일레하는 상자에 손을 대었다.

 

“...연다.”

 

아이들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용의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상자의 뚜껑은 가볍게 들렸고 천천히 일레하가 여는 것을 견디지 못한 빵돌이가 홱 열어젖혔다.

 

뚜껑이 넘어가며, 안의 조그만 상자들이 빛에 요란하게 반짝였다.

 

검은 바탕에 금색 띠를 두른 것, 은으로 무늬를 양각으로 음각으로 새긴 것들, 자개 장식이 달린 것, 진주나 산호가 박힌 것, 금과 은을 녹여 그림을 그린 것까지 호사스러운 작은 상자들이 정갈한 위에는 몇 겹으로 접힌 서신이 있다.

 

북쪽의 자비로운 빛, 생명의 지배자, 모든 풍요로움을 누리시는 분(...중략) 에셀리온 폐하께.

 

남의 편지는 보면 안 돼. 나중에 갖다드리자.”

 

우리는 지금 남의 상자를 가지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일 없이 다시 상자로 눈을 돌린다.

 

으리으리하다-”

 

얼른 열어보자.”

 

아이들은 제각기 하나씩 들고 상자를 열었다.

 

 

 

 

 

 

 

 

 

 

 

 

 

 

 

 

 

 

 

 

 

 

 

신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인간을 모두어 기르니 그 자는 대륙의 황제가 되었다.

 

그 신화는 사실이고 황제의 자부심이었기에 집무실이며 너른 복도의 벽에는 황제에 대한 이야기와 신에 대한 그림과 조각이 있었다.

 

웅장함은 그 사람을 닮아서,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다가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깨진 접시와 사과를 건너뛰고 다가온 아르데스는 팔을 높게 든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이상한 가죽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즙액 같은 것.

 

인공적인 손길이 틀림없이 들어갔을 거대한 진주 다발.

 

길쭉하고 매끈한 몸체가 투명하여 유리나 보석인가 싶었으나 흔들었더니 고무처럼 탄력 있게 움직이는 것.

 

아르데스는 심호흡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썼느냐.”

 

그 안에는 여간해서 듣지 못했던 아르데스의 당황이 묻어 있었다.

 

우리 엄청 나쁜 일 했나봐.

 

엄청 큰일 났나 봐.

 

아이들은 움츠러들었다.

 

썼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말 하라 재촉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비죽비죽 비어지는 입술에 울먹이기까지 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끅, , ! !”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레하가 사으쟈를-”

“-아빠 방에으흑!”

잘못택.... 으흐어엉!”

 

잠깐, 울지 마라.”

 

사으, , 아아아아!”

으앙-”

무서어!!!”

 

괜찮아, 괜찮다니까!”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아르데스는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겠다 혼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야 했다.

 

간신히 달래고 황제의 몸으로 손수 마실 것을 가져오니 아이들은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면서 울음을 그쳤다.

 

다시 물어보겠다. 썼느냐.”

 

시무룩해진 에샤드카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

 

네라고?!”

 

에샤드카가 덜그럭 움직임을 멈추자 아르데스는 급히 목소리를 낮춰 아니다, 혼내는 거 아니다, 갑자기 목에 삑사리가 난 것 뿐이다 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이를 달래는 아르데스의 눈에, 일레하의 입가가 눈에 들어왔다.

 

울면서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저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기에는...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끈적끈적한 액이 흘러나온 가죽 주머니가.

 

아르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 그 액을 손가락에 비볐다.

 

“......이건 다 무엇이더냐.”

 

과자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게 들어있었어요.”

 

아빠 방에 있길래 가져와봤어요.”

 

먹어봤는데 안 달아요. 이상한 맛 나요.”

 

빵돌이가 상자를 밀어주었다.

 

너희들, 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남의 물건을 막-”

 

찬란한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달그락.

 

딸깍, 찰그락, 딸깍딸깍.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사라락.

 

출렁출렁 끈적끈적 미끈미끈.

 

“...?”

 

“..., 막 들어가고 하면 안 되지. 막 가져가거나 열어보거나 그러는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빵돌이 너도 삼촌 물건을 가지고 놀면-”

 

딸깍.

 

위이이이-

 

딸깍!!!!!

 

덜그럭덜그럭덜그럭덜그럭!

 

놀면-?”

 

“...무슨 물건인지 먼저 물어보고 허락을 구한 다음에 했어야지. !”

 

상자는 아쉬운 듯한 손길로 닫혔다.

 

아이들은 상자 뚜껑에 가려져 아르데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래 보였다.

 

나중에 삼촌이 편지 한 장 써 줄테니까 가져가라.”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에샤드카가 아르데스의 팔에 꽉 매달렸다.

 

아빠랑 아빠한테 말하지 말아주세요!”

 

일레하는 머뭇거리다가 어깨에 매달렸다.

 

아르카디아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아르데스의 다리를 잡았다.

 

세 명 정도야 매달려도 꿈쩍 않았지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혼내라고 쓰는 편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서야 아르데스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빠.”

 

삼촌-”

 

땅에 내려서면서 아이들이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상하게도 호기심 같은 것이 아이들의 눈에 담겨 있었다.

 

여기서 뭔가 더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나? 하는 의아함에 아르데스는 왜 그러느냐 하는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저 상자에 있는 거 뭐예요?”

 

금방 후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이어 도망갈 길을 찾다가.

 

아이들이 그 흉한 것들을 쥐고 사람들한테 물어볼 상상을 했더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르데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 그거 곰방대다.”

 

곰방대?”

 

아르카디아가 물었다.

 

담뱃대?”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샤드카는 무어라고 묻는 대신에, 상자 중 하나를 꺼내 탱글탱글 신기한 감촉인 것을 찾아 아르데스에게 내밀었다.

 

한번 써 봐요-”

 

눈을 질끈 감고 아르데스는 손을 뻗어 대충 밀어냈다.

 

나는...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

 

아빠도 흡연자 아닌데, 하는 어린 조카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르데스는 나라 어딘가의 화산을 폭발시켰다.

 

물건 간수 잘 하란 말이다, 에셀리온!!!

 

 

 

물론, 물건은 사마낙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아르데스가 이를 알 리는 없었다.

 

 

아라벨라 30

2019. 10. 13. 19:33 | Posted by 호랑이!!!

 

새벽.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오른편에는 사나기가 몸 선이 비치는 잠옷을 입은 채로 얇은 이불을 몸에 감고 누워 있고 왼편에는 슈체른이 마찬가지로 몸 선이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자기 직전까지 공주가 내려준 잠옷을 입고 엎치락 뒤치락 장난을 쳤으니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자신도 그렇게 장난을 치고 놀았건만 왜 이 시간에 일어난 거지?

 

아라벨라는 밖을 내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떠 있고,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

 

겉옷만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어째서인지 아라벨라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온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를 화나게 하고 잠재울 수 있는 무언가가.

 

높이 자란 나무가 뽑힐 것처럼 흔들리며 땅이 같이 움썩거리고 누군가 잡아당기고 미는 것처럼 구름이 움직인다.

 

그 구름에 가리우고 드러나며 촛불처럼 흔들리는 달빛에.

 

아라벨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마치 산에서 보았던 것처럼.

 

흐르고 멈추는 무언가가 아라벨라와 나무들과 구름과 모든 것들을 둘러싸고 빛났다.

 

손으로 막으면 막히고, 헤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것은 비처럼 창문과 모든 물건들을 타고 흘렀다.

 

몸에 쏟아지는 이 거친 바람을 맞으며 아라벨라는 눈가를 문질렀다.

 

바람이 거칠어지며 더 자세하게 느껴졌다.

 

떠나야 한다.

 

짝을 잃은 거대한 것이 온다.

 

하지만 어디로?

 

그것은 분명 아라벨라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커다란 침대의 한 쪽에는 편안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사나기 공주와 아무튼 튼튼해 보이는 잠옷을 입은 슈체른이 누워 있었다.

 

“...꿈인가?”

 

뭐가 말입니까?”

 

으악, 깜짝이야. 언제 깼어?”

 

깨신 것 같기에 같이 깼습니다.”

 

으으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세찬 바람은 간 데 없고 산들바람이 지나가는지 나무 이파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햇살은 따스하고 맑게 세상에 빛을 내리고 있었다.

 

진짜 꿈인가.

 

아라벨라는 기지개를 쭉 켜고는 다시 침대 위로 풀썩 떨어졌다.

 

일어난 김에 씻으십시오. 옷도 입고.”

 

“...잠을 설친 것 같아.”

 

안 피곤한 거 다 아니까 일어나시지요.”

 

아라벨라는 쳇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어떻게 알아? 그런 걸.”

 

그야 어제는 바람이 충만했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람, 하고 뒤돌아보았지만 슈체른은 이미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나간 차였다.

 

아라벨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나기 공주도 일어났고 셋은 사나기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에는 이미 아라벨라 나이 또래에서부터 마르틴보다 한두살이나 많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이 주르르 앉아 있었다.

 

길쭉한 테이블에는 문양이 다른 은접시가 늘어섰고 접시마다는 샌드위치나 케이크, 귀한 과일이 담뿍 놓여있었다.

 

심지어는 주전자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도 모를 단지가 제각각으로 몇개나 놓여있었고 아라벨라는 그 중 하나를 살짝 열어보았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흑색 설탕을 보았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아가씨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기를 맞았다.

 

응접실 문이 닫히고 잠겼는지 딸깍 소리가 나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지 미동도 없었다.

 

불쾌할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은 경계심을 숨기지 않아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 앞에 섰다.

 

그럼 이 모임에 처음 온 이를 소개해주어야겠지. 다들. 이 쪽은 렐리악의 아라벨라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라벨라가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일부는 인사를 해 주었고 일부는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만 있어 사나기가 일일히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카샤 백작, 아폴리칸 자작 영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 말리우 백작 영애, 루일라 후작, 덱스터 공작 영애, 라크 백작.

 

사나기는 그들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았었기에.

 

그것도 악명이.

 

카샤 백작은 사치가 심하고 남자를 좋아하고, 아폴리칸 자작 영애는 입을 벌리면 커다란 뻐드렁니가 보였고 딜라크로탄 남작 영애는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고, 말리우 백작 영애는 뚱뚱하고, 루일라 후작은 유행에 뒤떨어진데다 다리를 절고, 덱스터 공작 영애는 이상한 취미가 있고 분위기를 못 읽고, 라크 백작은 어린애를 좋아하고 잔인하다고 했지.

 

공작 영애가 손을 들었다.

 

바실리님과는 무슨 사이이지?”

 

제 할머니 되십니다. 왕궁에 오기 직전까지 할머니 댁에 있었습니다.”

 

에일라, 그 사람이야. 옛날에 렐리악 백작의 결혼식 때 바지 입었던.”

 

말리우 영애가 속삭이자 덱스터 공작 영애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더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럼 아라벨라가 여기 있는 거,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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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가르드 드레이크/에셀리온]

2019. 9. 25. 02:40 | Posted by 호랑이!!!

폐에하아 한 가정에서도 안주인이 없다면 그 가정은 엉망이 되기 마련인데 어이하여 이 황실에 내궁의 주인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무릇 안이 실하지 못하면 겉이 번듯하더라도 이내 병이 들기 마련이오니-”

 

저에게 나이 서른 된 조카가 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의 집이란-”

 

에셀리온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명절의 친척 같은 놈들.

 

꽃 만난 벌떼마냥 모여들어 붕붕붕 시끄럽기도 하다.

 

애가 있으니까 후사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결혼을 물고 늘어지냐.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해?”

 

신하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쟁쟁거리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붉은 천옷에 가죽으로 만든 갑주.

 

언젠가 잡았다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

 

전시가 아님에도 언제나 등에 지고 다니는 거대한 도끼.

 

붉은 색 화장은 대개 그 같은 사람이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언제나 눈가에 칠해 놓았다.

 

지금 폐하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직언을 올리는 중입니다.”

 

결혼하라고.”

 

사마낙은 그들이 올려놓은 듯한 길쭉한 두루마리 종이를 들어올렸다.

 

그러합니다. 사마낙님께서도 폐하를 위하신다면... 아니 무슨 짓입니까!”

 

참방.

 

횃대를 끌 때 사용하는 물동이에 두루마리가 처넣어졌다.

 

두루마리를 젓기까지하자 잉크의 검정인지 재의 검정인지 모를 것으로 물이 새까매졌다.

 

너네 조카 나이 서른 처먹고 끼니 못 챙기고 청소 못 하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결혼하면 다 나아진다니 결혼이 무슨 만병통치약이야? 그럼 결혼한 자네는 왜 안 고쳐졌나? 그 지-”

 

그만 그만.”

 

에셀리온이 다급히 손을 젓자 뒷말은 사라졌다.

 

자기 병명을 듣지 못한 신하는 희끗희끗하게 센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다가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말을 하고 홱 뒤돌았다.

 

아이고 어찌 그리 급히 가십니까 소리를 하며 그 무리도 새끼오리처럼 조르르 나가고 방이 비자 사마낙은 나머지 두루마리도 다 물동이에 집어넣었다.

 

백 세가 다 되어가건만 아직 머리가 새까만 사마낙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간 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서른일 때는 혼자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사람도 잡고 동물도 잡고 옷도 만들었는데 요오즘 젊은 것들은 배때지가 불러서...”

 

그 때는 그럴 때이긴 했지.

 

그건 됐고, 같이 저녁 먹어도 될까?”

 

그렇잖아도 네 사람 분 차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데리러 온 거라며 사마낙이 말했다.

 

여간한 거리였지만 둘은 걷는 것을 택했고 용기사를 위해 지어진 궁전 정원에 들어갔을 때 이 계절에 피었을 리 없는 꽃을 발견했다.

 

심지어는 사마낙이 나섰던 아침에도 없었던 꽃이다.

 

거긴 독이 있어.”

 

에셀리온이 꽃에 손을 뻗는 사마낙을 말렸다.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사마낙은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쉿- 소리를 냈다.

 

손바닥을 펴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자 에셀리온은 더 걸으려다 멈췄다.

 

망토자락을 걷어 어깨에 걸치자 풀숲을 걷는데도 놀라울 만큼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몇 걸음을 가던 사마낙은 두껍게 자란 나무 뒤로 홱 손을 뻗어 아이 두 명을 찾아냈다.

 

“...에샤드카.”

 

평소라면 냉큼 손을 뻗어 안기거나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할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다니.

 

일레하?”

 

아픈가? 다쳤나? 왜 이러지?

 

“...이제 움직여도 될까?”

 

이리 오십시오.”

 

애들이 자라면서 좌절이나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건 영 신경이 쓰이는구나.

 

에셀리온이 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왜 울었어?”

 

울었어?

 

사마낙이 무릎을 굽히자 망토가 떨어지며 털썩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따개비처럼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까지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방으로 가버리고 시종 하나가 가벼운 먹을 것과 술을 한 병 가지고 왔는데 사마낙은 시종이 상차림을 하는 동안 질문을 건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아까 재무와 교육 기관의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일레하님과 에샤드카님과 만나셨습니다.”

 

그랬겠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사마낙은 도끼를 잡았다.

 

그 놈들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머리를 갈라 알아봐야-”

 

안돼. 아직은.”

 

에셀리온이 말하자 사마낙의 인상이 팍 구겨졌지만 도끼는 다시 얌전히 제 자리에 놓였다.

 

두 분의 혈통에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누구 씨냐 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에셀리온이 짐작했다.

 

내가 누구나 지나치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모양이지.

 

조만간에 한 번 관료 체제를 확 바꿔야 정신을 차리려나.

 

황제 폐하.”

 

내 새끼로는 부족하다 그거지.

 

사마낙은 희번득하게 뜬 눈으로 에셀리온을 불렀다.

 

저희, 서로를 위해 작은 협정을 맺는 것은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