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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7

2019. 6. 27. 17:35 | Posted by 호랑이!!!

 

그렇게 수색은 종료되었다.

 

슈체른이 마르틴과 아라벨라를 데려다 주었고 삐는 마르틴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렐리악 저택으로 돌아왔다.

 

옥상에 내려서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집사, 프루던스가 달려와서 아라벨라나 마르틴, 심지어 슈체른까지 본체만체하고 바실리를 안고 뛰어갔다.

 

저 녀석 하여간 침착하지 못하고.”

 

슈체른이 뒷머리를 벅벅 긁는데 마르틴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씀을.”

 

어린 인간이 예의바르게 군다고 어색해하는 것이 여실하다.

 

아라벨라는 항상 느긋하게 굴던 슈체른이 말을 주저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체른.”

 

뭡니까.”

 

할머니 찾는데 도움도 주셨고 삐도 걱정될 텐데 며칠 여기 묵는 건 어때?”

 

무사한 거 봤으니까 됐...”

 

마르틴이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주 기대어린 눈으로.

 

그러니까...”

 

머리에는 삐를 얹고.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르틴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더니 슈체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여기 아래쪽에 손님방이 있어요. 저택이 작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방이 네 개나 있더라구요.”

 

네 개나?”

 

슈체른이 손을 잡고 내려왔다.

 

잠깐, 저런 옷 괜찮은가?

 

현재 주로 입는 옷들은 풍성하거나 살갗을 최대한 많이 가리는 종류의 옷들이다.

 

그러나 슈체른의 옷은 팔다리가 거의 그대로 드러났고 색도 하얀색 한 가지 뿐인데다 헐렁하고 현재 기준으로는 수수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슈체른을 마당에서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널찍한 옥상에서 데려가는 건데 누구라고 말하지? 사용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 손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툭툭 쳤다.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 으으음... 그냥... 할머니 찾는데 도움을 준 손님이라고 하면...”

 

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귀한 몸이기는 하니까 귀족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 그런데 마차도 없고 어떻게 왔다고 하지? 순간이동? 시종도 없이?

 

복잡해지는 머리에 아라벨라는 이마를 짚고 슈체른에게도 지혜를 좀 빌려달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마르틴이 벌컥 문을 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 잠까-”

 

옥상 아래는 3층이고, 바실리의 방과 가까웠는데 평소라면 아무도 없었던 그 복도에 지금은 사람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뜨거운 물을 들고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깨끗한 수건을 몇 개나 쌓아서 전달하고 말을 전하러 뛰어내려가는 사람이나 약, , 꽃 같은 것들이 쉴새없이 날라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 이 쪽을 한 번씩 보고 지나갔다.

 

아라벨라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다녀오셨어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 도련님!”

 

지금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주인님께 약과 여러 처치를 한 후-”

 

오랜만입니다 슈체른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죄송한데 급해서요-”

 

차와 과자를-”

 

“-준비해 드릴까요?”

 

사람들이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들어갔다 줄줄이 나오면서 한 마디씩을 한다.

 

마르틴은 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복도 가장자리로 걸어서 2층으로 빠져나갔다.

 

그 다음은 슈체른과 삐, 다음은 아라벨라.

 

겨우 한 층 차이인데 2층은 퍽 조용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의 방으로 슈체른을 질질 끌고 갔다.

 

이 집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였어?!”

 

가끔 바실리를 데려다줄 때 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할대로 취해 걸음을 걷지 못한다던가.”

 

할머니가?”

 

5-60년 쯤 전에? 이후로도 자주 왔고...”

 

얼마 전 일처럼 이야기하더니 오륙십년 전이란다.

 

저 자주는 얼마나 자주일까,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자주는 아닐 것이다.

 

얼마나요?”

 

슈체른의 어깨에서 마르틴의 머리 위로 삐가 퍼덕퍼덕 내려앉았다.

 

열흘에 한 번?”

 

자주 왔네.”

 

셋은 아라벨라의 방 옆의 빈 방 문을 열었다.

 

이 방을 쓰면 되겠네. 빈 거니까.”

 

비었군요.”

 

슈체른은 방 문을 열더니 무언가 귀한 것을 본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나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래, 이젠 비었군요...”

 

슈체른은 마르틴의 손을 잡더니 방 안으로 이끌었다.

 

춤은 출 줄 압니까?”

 

, 니요!?”

 

잠깐 번쩍하는가 싶더니 슈체른은 마르틴과 비슷한 나잇대의 아이로 변했다.

 

마르틴의 발을 제 발 위에 얹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것은 자세가 완벽한 왈츠다.

 

그 귀에 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아라벨라는 문에 등을 기댔다.

 

예전에, 바실리가 마르틴과 비슷한 키였을 때 자주 추고는 했었습니다. 아바트는 언제나 춤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고 그게 나는 아니었으니... 대신 아바트의 아이나 손주들과는 자주 추었습니다.”

 

한 명이 지치면 다음 아이가 오고, 그 아이가 지치면 다시 다음 아이가 오고.

 

끝없이 춤을 추다 보면 마침내 아바트가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리고 슈체른의 입이 다물렸다.

 

천천히 춤이 멈추자 마르틴이 뒷걸음질로 슈체른의 발 위에서 내려왔다.

 

“...역시 머물지는 못하겠습니다. 바실리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지요.”

 

슈체른은 몇 번이나 방 안을 돌아보면서도 결국 밖으로 발을 옮겼다.

 

마르틴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차 드실래요? 삐는 뭘 먹이면 돼요? 그동안은 있지요, 소시지나 햄이나 달걀 같은 거 먹였는데 그러면 돼요?”

 

슈체른은 마르틴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걷어낸 듯 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고요? 낙트가 그런 걸 먹었다고? 그런 걸 먹이다니, 이제 큰일이 났습니다!”

 

네에!? 큰일?!”

 

슈체른의 행동이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마르틴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채소도 먹이고 과일도 가끔 먹였어요! 그리고... 그리고 사탕도 조금-”

 

뭐어어? 그거 정말 큰일입니다. 더 큰일이 났어요!”

 

어린 용들은 대개 신선한 날고기와 우유를 먹고 자란다.

 

요리가 아닌 그런 식재료를 먹이는 것은 어린 용들의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서도 아니다.

 

용들이 탐내는 유일한 사치품인(물론 금과 보석류나 기타 귀한 것들은 제외하고) 음식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달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 농담같은 일의 선례를 계속 들어왔던 터라 아라벨라는 그들의 뒤에서 슈체른이 마르틴에게 겁을 주는 모습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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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6

2019. 6. 22. 00:28 | Posted by 호랑이!!!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누나 뭐 하나 궁금해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달려들어 머리에서 목덜미, , 몸 할 것 없이 냄새를 맡았다.

 

“...낙트?”

 

그러자 마르틴의 품에서 작게 삐익, 소리가 났다.

 

살짝 열린 가방 안에서 날개달린 작은 이 나와 가죽 날개를 퍼덕이면서 슈체른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을 감싸고 팔을 잡고 삑 삐익 우는 소리를 내서 자칫했다면 뱀이 슈체른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슈체른은 기쁜 듯이 뱀을 안았고 뱀은 슈체른이 검은 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몸에 감겼다.

 

아아 우리 아가, 이다지도 우리를 가슴 졸이게 하다니 혼을 내야겠습니다.”

 

삐가 낙트예요?”

 

?”

 

그제야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름은 낙트입니다. 이 산에 사는 용족 중 막내이고 불과 얼마 전에 성체가 된 어린 용의 첫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이 애도 용이니 날러 가야지!’라며 바실리와 함께 날아가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사라져서 그만.”

 

슈체른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깊은 한숨이었다.

 

삐익

 

바실리스크가 아니었구나, 하며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듣자하니 마르틴 당신이 우리 아가를 돌보아주었다고 하는군요. 이 일에 대하여서는 부디 보답하게 해 주십시오.”

 

별말씀을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슈체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이가 마르틴은 라고 불러주어도 좋다고 합니다.”

 

삐익, 하고 삐가 울었다.

 

아라벨라는 잘 모르겠지만, 슈체른과 마르틴은 삐가 엄청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면서 잠시 난리가 났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삐는 슈체른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가 어느 쪽을 쳐다보더니 푸드덕 아래로 내려섰다.

 

낙트가 이쪽이라고 합니다.”

 

조그만 뱀은... 아니, 낙트는 조그마한 발로 직접 땅에 내려가더니 토끼들이나 지나다닐 정도로 낮은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낙트, 그런 데 들어가면 안 보이니까 이리 오십시오.”

 

저어, 당신은 삐... 아니아니, 낙트와 어떤 관계 되시나요?”

 

애기 이모 됩니다.”

 

슈체른은 한 손에 소풍바구니를 들고 있었으므로 아라벨라는 낙트를 어깨 위에 올렸다.

 

낮은 수풀을 헤치고 슈체른이 제일 먼저, 그 다음이 아라벨라, 마지막으로 마르틴이 밟힌 풀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잠시만요, 이모라고요? 삐의?”

 

이 모습은 여러분과 활동하기 편하니까 임시로 변한 모습이고.”

 

무슨 당연한 것을 물어보고 있냐는 듯, 어린아이에게 빨간색과 노란색을 더하면 주황색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듯 슈체른이 마르틴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 모습은 크기나 모습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 쪽? 정말로?”

 

삐는 잎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굴 앞에 서더니 날개를 바쁘게 퍼덕였다.

 

태어난 지 두 달이라고 했던가, 제대로 날지는 못하지만 대신 빠르게 달릴 수 있어서 아차한 사이에 굴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풀을 치우자 드러난 굴은 사냥개라도 지나갈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랬지만 아무래도 사람이라면 체구가 작아도 드나들기 힘들 것 같았다.

 

저는 지나갈 수 있어요.”

 

눈치를 보다 마르틴이 손을 들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마르틴이라면 어떻게든 지나갈 것 같기는 했지만 아라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안돼.”

 

저도 갈 수 있습니다.”

 

슈체른이 말하더니 다음 순간 슈체른이 있던 자리에는 윤기나는 검은 뱀 한 마리가 혀를 내민다.

 

그렇지만 아라벨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젓더니 슈체른이 용 모습일 때 몸에 감는 길다란 검은 끈을 쥐었다.

 

무슨 일 있으면 두 번 잡아당길 테니까 당겨줘.”

 

아라벨라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는 굴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조그마한 마도구로 앞을 밝히며 기어가다보니 삐가 퍼덕 퍼덕 날갯짓을 했다.

 

얼만큼을 더 기어갔더니 갑자기 땅이 아래로 훅 꺼져서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며 앞으로 굴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라고 셀 수 없을 만큼 구르고 또 구르더니 마침내 푹신한 흙더미에 몸이 떨어졌다.

 

“...부러질 뻔 했네.”

 

아라벨라는 목을 주무르며 손에 꽉 쥔 마도구를 켰고 창백한 불빛이 굴 안을 비추며 빛에 약한 벌레들을 내쫓는다.

 

이리저리 손전등을 휘두르자 벽에서 사사삭 기어가는 것들에 약한 현기증이 느껴져서 아라벨라는 꾹 참고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에 집중했지만 머리카락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머리를 빗는 손가락에 착 달라붙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 무언가는 벽에 맞고도 툭 떨어져 바사삭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아라벨라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냈다.

 

!!! 이 망할! 기어가는 버러지만도 못한!”

 

못 참았다.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만큼은 꽉 누르면서 아라벨라는 젖은 개처럼 머리를 푸르르르륵 털었다.

 

 

재촉하듯 삐 소리가 나서 빛을 아래로 향했더니 삐가 아라벨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더 가야해?”

 

삐익.

 

고개를 젓는다.

 

삐는 바위 위로 기어오르더니 조그만 앞발로 삭삭 긁는 시늉을 했다.

 

바위?

 

아라벨라는 조금 더 가까이로 다가갔다.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러운 천 뭉치였다.

 

손에 잡히는 부분을 당겼더니 풀어지더니 아라벨라 앞으로 굴러떨어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시체를 한여름에 일주일 묵혔다면 이런 냄새가 났을까 싶은 지독함에 아라벨라는 헛구역질을 하고 손수건을 코와 입 앞에 대었다.

 

정말 싫다

 

손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손이 움직인다니 아라벨라는 더더욱 기절할 것 같았다.

 

벌레나 두더지 같은 것이 시체를 건드리면 죽은 줄 알았던 시체의 몸이 들썩거리면서 움직인다는 글을 예전에 읽은 적 있었기에, 저 손을 건드렸다가 피부 아래까지 파먹은 벌레들이 얇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상상이 저절로 되었다.

 

“..., 그으...”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는 제발, 이라는 표정으로 삐를 보았지만 삐가 낸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 나가서 슈체른보고 여기 굴을 넓혀 달라고 할 수 있어?”

 

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안 있어 검은 용 모양 슈체른이 굴을 넓히며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기어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걸어서 나올 수 있었고, 아직 해는 쨍쨍했다.

 

몸을 감싼 천뭉치는 누군가의 망토였다.

 

마르틴은 도시락 가방에서 바닥에 까는 용도로 쓰던 하얀 천을 꺼내고 아라벨라는 그 사람을 감싼 망토를 벗겼다.

 

펄럭펄럭 요란하게 천이 흩날렸다가 떨어지고.

 

아라벨라는 흰 천을 두르려다 그 사람의 얼굴로 잡아당겨진 듯 시선을 향했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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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5

2019. 6. 18. 20:18 | Posted by 호랑이!!!

 

물 위로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라벨라가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기를 바란 것 같았다.

 

사실은 꽤 효과적이어서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상체를 홱 기울였더니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예리한 날이 가죽옷 위를 긁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목숨이 위험하다.

 

저 사람은 적의에 가득차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칼은 길고 날카롭고, 조그만 봉투 따는 칼도 베이면 아프지만.

 

이상하게도 아라벨라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손을 씻느라고 벗어두었던 장갑을 억지로 끼자 젖은 손은 가죽 안에 낑겨 힘겹게 들어갔다.

 

아라벨라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의외로 침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뒤로 물러서서 아라벨라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칼은커녕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 때는 아라벨라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날이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것이 똑똑히 들렸고 아라벨라는 장갑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칼의 옆면을 쳐냈다.

 

가죽이 굉장히 튼튼한걸.

 

칼날을 그대로 맞아도 별로 다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라벨라는 다시 날아드는 칼날을 쳐냈다.

 

.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당장이라도 달음박질을 하고 싶지만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처음으로 말을 타고 넓은 벌판을 달렸을 때.

 

그 때와 닮은 감각.

 

카앙.

 

세 번이나 칼날을 쳐내고 그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그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물어뜯을 차례.

 

손을 쓰는 게 훨씬 쉽지만, 아라벨라의 팔 힘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칼을 휘두르느라 그가 벌린 거리만큼 앞으로 나서고.

 

아라벨라는 다리를 들어올렸고 무릎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다리 사이를 세차게 가격했다.

 

달걀이라도 있었다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을만한 힘으로.

 

검은 형체가 아라벨라의 앞에 풀썩 무너지고 옆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아라벨라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은 겨우 한 대를 때리려고 이렇게 뛰지 않을 테지.

 

유효하게 들어간 공격은 아라벨라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렐리악의 해츨링.”

 

흥분한 머리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아라벨라가 손을 든 순간 들린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 대는 때렸을 것이다.

 

“...나 그렇게 어리지 않은데.”

 

종류를 불문하고 그렇게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해츨링 뿐입니다.”

 

슈체른이 손을 들자 반짝반짝하게 닦인 거울이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뺨은 장밋빛으로 상기되었고 눈은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반짝이는데다 운동량에 비해 숨이 거칠다.

 

무엇보다도.

 

아라벨라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해츨링 시절을 벗어나려면 앞으로 이백년은 더 지나야 할테니 멀기도 했고.”

 

이백년은 너무 멀어.”

 

괜찮습니다, 눈 깜짝하면 금방이니까.”

 

슈체른의 손짓에 거울이 사라지고 대신 아라벨라가 때려눕힌 검은 옷의 사람이 들어올려졌다.

 

살아있네?”

 

검은 혀가 슈체른의 입가를 핥았다.

 

인간 안 먹은지 오래 됐지...”

 

안돼.”

 

농담입니다.”

 

시원스럽게 잘생겼던 슈체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이런 걸 잔뜩 주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뚝 뚝 떨어져 쌓였다.

 

하나, , , .

 

아라벨라가 잡은 사람까지 다섯.

 

죽었어?”

 

아직. 죽으려고 하고는 있지만요.”

 

보시겠습니까? 라면서 슈체른이 손을 움직이자 불길하게 뿌드득 소리가 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사람의 입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나왔다.

 

점심 먹고 시작할까요, 먹기 전에 시작할까요?”

 

, 고문을?”

 

아니 무슨 험악한 소리를, 이라며 슈체른이 손사래를 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정 싫지는 않아 보였지만.

 

기억을 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몸수색도. 고문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고.”

 

그 전에, 잠깐 이야기 해봐도 돼?”

 

물론입니다.”

 

사람의 몸을 감싸던 마력이 내려가자 그 사람은 오래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라벨라는 그 사람 앞에 섰다.

 

“...그렇다.”

 

나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다. 렐리악 백작의 적자.”

 

그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안다.”

 

날 죽일 이유가 없잖아. 렐리악은 어떤 귀족 가문과도 척지지 않았고 특별히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지도 않은걸.”

 

인간에게는 그렇겠지.”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정말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터라 아라벨라는 의아해졌다.

 

그럼 정령이나 엘프나 노움이나 드워프한테는?”

 

“...”

 

농담은 아닌데.”

 

그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노려보았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날 죽이러 온 거 맞아? ? 시킨 건 누구지?”

 

그런 것에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사람은 혀를 내밀었다.

 

깨문다!라고 생각한 순간 슈체른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입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가 났지만 슈체른은 아파보이기는커녕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까요?”

 

대화로 끝나면 좋을 텐데. 내가 정말 평화롭고 안온하게 살아와서 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검은 옷의 사람이 외칠 뻔 했다.

 

무슨 가문 아가씨가 발길질을 하냔 말야?!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때렸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조금만 더 일찍 빠졌어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하지만 슈체른은 시간을 들여 망설이다 손가락을 빼었고 아라벨라를 잠시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포섭을 해 보겠습니다. 거기 당신, 금은보화를 주고 외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 말하겠습니까?”

 

슈체른은 품에 손을 넣고 뒤적이더니 아이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박힌 목걸이를 꺼냈다. 색 옅은 푸른 보석이 주르르 박힌 것이 세 줄이나 되고 갈래갈래 떨어져서 술처럼 보이는 줄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 있다.

 

눈이 목걸이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흔들리고 있군요.”

 

, 그런 것 따위! 우리 용묘간부들은 쉽게 가질 수...!”

 

“...용묘?”

 

그러자 그 사람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별로 흔한 이름은 아닌걸. 정보 길드는 정통 보라매 사냥꾼 연합이잖아. 암살자 길드는 제일 큰 데가 암석 어쩌고였으니 저런 이름이면 더 눈에 띌 텐데.”

 

그 사람은 다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슈체른이 저지했다.

 

젠장,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한 건지 알아!?”

 

그 사람이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슈체른도 아라벨라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알 게 뭡니까.”

 

알 게 뭐람.”

 

아라벨라는 슈체른이 그 사람을 잡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두른 로브를 확 펼쳐서 살펴보았다.

 

조그마한 암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아라벨라의 얼굴이 그려진 종잇조각도 하나 나오고 돈주머니도 나오고 아예 로브를 찢어버리자 안에 입은 옷이 드러난다.

 

튼튼한 천옷에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고 그 천 옷의 등에 용이 그려진 것은 인상적이다.

 

렐리악의 용이 날개를 펼친 비룡이라면 이 사람의 옷은 날개는 없는 용이었는데 머리가 아래로 가고 몸통이 위로 향해서 잘못 붙이기라도 한 건가 했다.

 

이거 떼 줘.”

 

분부대로.”

 

슈체른은 손톱을 세우더니 다른 준비도 없이 문양을 옷에서 뜯어냈다.

 

그 사람은 파르르 떨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날 이렇게 모욕하다니!”

 

아까까지 죽으려고 했으면서 뭘 이 정도로 모욕이라는지.

 

“...귀족이지? 당신.”

 

사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아라벨라이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잘 안다.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다, 문장에다, 그 형식에 얼마나 멋을 부려놓았는지 자기네들 모임 이름을 용묘라고 해 놓았다.

 

왜 귀족이 암살자 흉내를 내고 있어?”

 

, , 흉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 같으니!”

 

뻐억, 소리가 나고 그 사람은 끄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죄 없는 자의 목숨을 그대 욕심으로 노린 죄, 자기 방어를 쉽게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노린 것하며 신체 말단부터 조각내 고통 속에 죽게 해도 그 입은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어야 한다. 뻔뻔하게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죄를 통감하게 해주마.”

 

슈체른의 눈은 동자가 뾰족하게 갈라져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라벨라는 차마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라벨라 뿐인지, 그 사람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 렐리악의 여자는 이미 인간의 성인식을 치렀다, 그리고 죄가 많아! 뻔뻔한 것은 그대들이며 겨우 고통 따위는 나를 꺾을 수 없다!”

 

그래?”

 

슈체른은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피가 튈지도 모르니 조금만 뒤로 가 계십시오. 시장하신다면 먼저 도시락이라도.”

 

아라벨라는 뒤로 물러나 연못가에 앉았다.

 

주먹과 발톱이 아주 잠시동안 난무하고 그 사람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겨우 고통 따위로는 꺾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치고는 포기가 빠른걸.”

 

, 수만... 아가브....”

 

뼈는 안 부러진 거 같은데 이는 부러졌나보다.

 

누가 죽이라고 보냈어?”

 

나뉴... 그거.... 여기에...”

 

그 사람은 자기 품 속을 손짓발짓으로 가리켰고, 아까는 별 거 발견 못했는데 이상하다며 슈체른이 목을 죄는 마력을 풀어주자 스스로 품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면서 윽, 소리를 냈다.

 

사아... 으어어...! 사려...! 아파...! 흐어어 아퍼!”

 

급하게 옷을 들춰 보니 조그만 칼로 가슴을 찔렀다.

 

그야 칼로 찌르면 아프겠지.

 

자기 스스로 찔러 놓고도 살려달라고 웅얼거리던 그 사람은 일 분도 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 또다시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몸을 홱 틀었더니, 거기에서 나온 것은.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항복이라는 시늉을 하는 마르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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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4

2019. 6. 14. 00:38 | Posted by 호랑이!!!

 

이제 물러가라.”

 

사피야 다르데니아는 한때 눈처럼 하얀 카펫 위에 가을 하늘같이 옅은 푸른색 침대를 두고 겨울가지처럼 꾸민 화장대와 책상, 사피야만을 위한 책꽂이에 가장 좋아하는 책과 장인들이 만든 인형, 장식품을 늘어놓았다.

 

각 벽마다 새가 앉은 모양의 가지를 꽂아 거기에 등불을 걸었던 네모난 방의 천장은 안쪽을 둥글게 깎고 금을 발라 테를 둘렀으며 가운데에는 진한 푸른색을 칠해 붉은색으로 물고기와 꽃을 그렸다.

 

창틀에 걸어둔 레이스 커튼이 풍성하게 흩날리면 파도치는 것처럼 보였던 천장의 연못은 사피야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방에서 사피야는 천사였으며, 그 천사는 하늘이나 구름에 연못을 내려다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때로 그 자리에 사람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도 함께했었다.

 

자신만을 위한 방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때는 몰랐지.

 

같은 백작이라고는 하나 다르데니아 저택은 렐리악의 세 배는 되었다.

 

사피야 렐리악은 개인 방이 없었고, 낮이면 시녀들과 지내는데다 밤이면 셰필라가 찾아왔기에 개인 시간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님, 천이 이제야 배달왔는데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종들은 사피야가 한때 평민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데니아 백작가라는 것을 알아 별 말 없이 지시를 따랐고, 일부 사피야를 좋게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지만 사피야는 어렵지 않게 복종시켰다.

 

어련히 잘 하였겠니. 무슨 일 있으면 돌려보낼 테니 잠깐 거기 두어라.”

 

결혼식을 올린 후 바쁘게 감사 편지를 쓰고 신전과 왕실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전부 사피야의 몫이었다.

 

그 후로는 저택의 재산에 관해 외워야 했고 그 다음에는 바꾸는 커튼, 이불, 불을 밝힐 기름이나 식재료나 장작에 관한 것들이 사피야에게 몰려왔다.

 

결혼하자마자 마르틴을 떼 놓은 것에 대하여 원망도 있었으나 이렇게 일이 몰리니 지금은 마르틴이 옆에 없는 게 다행이다.

 

그렇게 일하여 두 주만에 일 전반을 끝내고 사피야는 의자에 늘어졌다.

 

이 곳은 저택의 도서실.

 

다른 방하고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은데다 장서 수도 적다.

 

책꽂이로 가려지는 소파는 그나마 사피야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옷에 화장이 눌리지 않게 조심한 사피야는 책을 훑어보았다.

 

청소는 주기적으로 하지만 몇 번 펼쳐보지 않은 티가 난다.

 

“.....?”

 

역사서 한 질.

 

언어 책이 다섯 권.

 

종교에 관한 책 세 권.

 

음악에 관한 책이 세 권.

 

예의범절에 관한 책이 세 권.

 

마법과 마나에 관한 책이 두 권.

 

금전을 다루는 일에 관한 책 한 권.

 

왕국의 다양한 법에 관한 책이 한 권.

 

대륙의 다양한 일을 기록한 책이 또 한 권.

 

다 합해서 쉰 권이나 될까 하는 책은 너무나도 적다.

 

아무리 책이 사치품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지나치잖아.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귀족의 품격에 관한 일이다.

 

렐리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죽이나 비단천에 글을 쓴 것도 몇 개는 있음직하건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 연습을 할 만한 책이나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용도로 쓰는 얇은 책은커녕 성인의 흥미를 위한 잡기 책이나 소설책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피야, 뭐 하고 있소.”

 

들리는 소리에 사피야는 책꽂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을 때는 그가 정말 천사같았지.

 

사피야가 웃자 셰필라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책이 있나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옛날에 셰필라 당신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하고.”

 

그건 이 저택에 없어.”

 

어머나, 정말요?”

 

손이 잡혔다.

 

셰필라의 팔이 사피야의 허리에 감겼다.

 

이 저택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온 거라서. 게다가 서재를 한 번 정리했거든.”

 

그럼 아라벨라는요?”

 

그 애는 여기서 컸지만. 사피야, 계속 말 할건가?”

 

짙은 색 드레스 자락이 손짓에 올라갔다.

 

결혼한 날의 밤 셰필라는 그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평민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잊지 않고 구해 온 것이라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직도 그 더럽고 좁은 집에서 흙탕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사피야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사피야가 처음으로 마음과 몸을 허락한 상대였다.

 

게다가 잊지 않았고, 아직 미워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바실리 아비에스 렐리악을 찾으러 다닌지 일곱 날이 되었다.

 

“...이 넓은 데를 다 돌아다녔네...”

 

산 위를 날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땅 위를 달리면서 아라벨라와 슈체른은 꽤 친해졌다.

 

첫날에는 금방 지쳐하던 당신이 갈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기, 일반적인 인간들은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지친다고.”

 

당신 참 인간처럼 자랐나 봅니다.”

 

그야 인간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 참.

 

아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용이랬지.

 

아라벨라는 입 밖으로 말하는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해가 지면 데려다주고 해가 뜨면 데려갔으니 해 있는 동안, 적게 잡아도 12시간은 계속 걸은 셈이다.

 

그나마 저 용이 거추장스러운 짐에서부터 덥다고 벗은 겉옷까지 다 들어주니 망정이지 이러저러한 장비까지 아라벨라가 들어야 했다면 진작 포기하고 기사단이나 꾸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 나 배고팠어.”

 

연못에 손을 담그다 말고 아라벨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슈체른은 씨익 웃더니 점심 먹기 좋은 곳을 알아보겠다며 인간 모습에서 날개만 꺼내 날아올랐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정화해준다는 무슨 가루를 조금 넣고 마력을 불어넣자 물병이 손 안에서 흔들렸다.

 

가죽 물병인데도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있어 멈추었고 아라벨라는 물병을 허리에 찬 뒤 연못 위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며칠의 외출 때문에 그을려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얼음처럼 색소가 옅었고 훨씬 반짝였다.

 

게다가 근육이 붙어서인지 더 단단해 보였고, 아라벨라는 가죽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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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평화로운 오후

2019. 6. 11. 21:34 | Posted by 호랑이!!!

에잇.”

 

!”

 

크나트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율리안이 제 앞을 지나갈 때를 노려 팔을 뻗어 낚아챘다.

 

남의 무릎 위에 주저앉게 된 율리안은 움찔하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뭡니까? 대낮부터!”

 

뭐긴, 모처럼 주말인데 좀 친해져볼까 해서지.”

 

율리안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대부분 저 인간이 호감을 표현하는 끝은 몸으로였고, 절반 정도는 침대에서였으니까.

 

나머지 절반의 절반 정도는 소파에서나 차에서이고.

 

어제 그렇게 해 놓고 말입니까? 당신 정말-”

 

친해지자는 데에서 섹스부터 떠올리다니 역시 내 몸만 보는 거지? 흑흑.

 

거구의 남자가 애처로운 척 우는 시늉을 하니 눈에 힘이 들어간다.

 

저 남자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영화라도 볼까?”

 

됐습니다.”

 

그럼 음악을 틀까?”

 

됐습니다.”

 

뭘 했으면 좋겠어?”

 

지금은 당신이 절 놔주는 겁니다.”

 

그러나 몸에 두른 팔은 풀리지 않는다.

 

그럼 이대로 있을까? 수다도 좋지.”

 

율리안은 체념의 한숨을 쉬었고 몸에 두른 팔에는 힘이 조금 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년과도 같은 5분이 지났다.

 

율리안은 저쪽 방에 둔 운동기구나 책상 위의 책을 떠올렸다.

 

뭔가 집중할 것이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자신이 깔고 앉은 것이 남의 허벅지라는 것이고, 운동복과 면바지 너머로 무언가가 하나 더 느껴지기 때문인(것이 더 컸다) 일이다.

 

보고 느끼고 맛본-율리안은 그런 천박한 표현을 떠올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것이 한참이니 크기나 촉감에 있어서는 잘 기억하고 있었고 비록 off상태더라도 자신의 몸 아래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율리안은 크나트를 흘끔 보았다가 은근슬쩍 몸을 빼려 했지만 감긴 팔이 막았다.

 

놔주십시오.”

 

-잃어.”

 

이 젊은 신부님은 참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크나트가 생각했다.

 

분명 지금은 긴장을 했는데, 겁을 먹었나 싶다가도 그의 평소 행실을 떠올리면 그건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내 내가 뭘 어쨌다고.

 

평소에 얼마나 젠틀하게 대했는데 이렇게나 긴장을 한담.

 

목덜미에 입김을 훅 불자 파드득 몸이 떤다.

 

무어라고 하기 전에 이마를 그의 등에 기댔더니 얼굴 아래에서 근육이 긴장해 서는 것이 느껴졌다.

 

뭘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까 처음에는 말이다, 적어도.

 

하지만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나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그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마 이것은 자신이 다분히 사회적인 사람이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크나트는 이마를 기댄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벌리고.

 

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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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3

2019. 6. 7. 23:47 | Posted by 호랑이!!!

 

솟아오를 때는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며 잎사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데일라를 타면서 익숙해졌지만 몸을 아래가 아닌 뒤로 당기는 중력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눈을 떠, 렐리악의 어린 용]

 

웃음기어린 목소리에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산이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도 보였다.

 

바람에 깎인 거대한 절벽과 하늘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래 보이고 그 사이로 사슴이 뛰어가거나 하늘에 새가 날아간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그저 흙 쌓인 언덕일 뿐 렐리악 백작주택이 있는 곳의 평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높이 올라와서 보니 높낮이가 있고 정말 산의 모양이 등뼈 같았다.

 

흐르는 녹색 바람은 기분 좋게 아라벨라를 감싸고 머리 위로는 태양만 있을 뿐이라.

 

이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아라벨라는 감동적이기까지 한 경관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어때?]

 

다시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다.

 

바람에 눈이 말랐기 때문인지 눈가가 젖었고 눈물이 고였다가 눈꺼풀을 깜박이자 툭 떨어졌다.

 

손 아래에서 슈체른이 웃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몸 아래에서도.

 

으악!? 아니, 꺄악!? 탔어?!”

 

[그래, 탔단다. 렐리악의 어린 용아]

 

슈체른은 깔깔 웃으면서 날개를 쭉 폈다.

 

[떨어지기 싫으면 꽉 잡는 게 좋을 거야]

 

아까보다 더요?

 

아라벨라는 질린 얼굴로 끈을 꽉 쥐었고 슈체른이 날개를 세우자 속도가 정말로 빨라져서 얼굴에 바람이 마구 부딪혔다.

 

으아아아아아아...!”

 

 

 

 

 

 

 

 

마르틴은 어두운 방을 싫어한다.

 

사피야와 살았을 적의 집은 초 하나를 사기가 어려워서 해가 지기 무섭게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야 했다.

 

이삭을 줍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물을 떠 오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사피야는 단 한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기에, 마르틴은 겨울에 천으로 틀어막아야 하는 창문 앞에서 나무껍질 책을 읽었다.

 

사피야는 마르틴이 태어나고 나서 집 밖으로 거의 외출하지 않았기에, 마르틴도 자연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자랄 기회가 없는 눈치로도 사피야가 자신을 내보내지 않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신전에 가서 신관들에게 고대어를 물어보거나 더 가끔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짧은 외국어로 관심을 끌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을 빼면, 마르틴은 바깥에서 놀 수도 없었다.

 

마르틴은 사피야를 사랑하니까.

 

비록 마르틴이 아는 가족은 사피야와 자신 뿐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 보았던 가족들의 행동과 사피야의 태도는 달랐기에.

 

마르틴은 사랑받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벽 틈이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으면서도.

 

빛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머나먼 곳의 사막이나 끝없는 바다, 구름 위에 있다는 신들의 나라를 탐험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도.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의 웃음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막대를 들고 칼싸움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비치는 해가 얼마나 찬란한지, 달이 얼마나 우아한지, 그 아래에서 뛰놀고 흙을 밟고 풀을 뜯고 나무에 기어오르고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고 띄워보내면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하면서도.

 

사피야가 자신을 싫어할까봐 그런 상상을 하는 모든 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다렸다.

 

사피야가 말해준 아버지는 먼 곳의 높은 사람인데 아버지가 자신들을 데려가면 봄날의 딸기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고 몸도 아프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신이 행복할 거라고 했었으니까.

 

신전의 유리창에 그려진 천사처럼 잘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던 셰필라를 보았을 때에는 기대만큼 실망했었지만, 대신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만났다.

 

어머니가 말해주지 않았던 가족은 첫날에 어머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왕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늠름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화를 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에 마르틴은 감탄했다.

 

너무 넓어서 식당이 아니라 마을 광장처럼 느껴지는 곳에 나와있는 자신을 보고서도 화내지 않았고.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난을!

 

이후로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동생이 되었다.

 

가방 속의 뱀에 대한 것을 공유하고 침대 위에서 뛰었고, 아라벨라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예절을 배우고 자세를 고치고 억지로 지식을 우겨넣었다.

 

그랬는데.

 

“...또 혼자 남겨졌어.”

 

작은 창문이 있을 뿐 다른 광원이 없는 복도는 검게 보일 만큼 어둡다.

 

순간 예전의 그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털다시피 내젓는다.

 

생각하지 마.

 

다른 생각을 해.

 

복도는 검게 보이는 그대로이고, 자신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덮어야 해.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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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2019. 6. 6. 19:10 | Posted by 호랑이!!!

에췻!”

 

따뜻한 울다하에 집이 있기는 하지만 페드와 라레타는 종종 커르다스에 방문하고는 했고, 급격한 온도차를 겪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페드 역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 기침을 하고 열이 올라 있던 라레타를 간호한 것 때문에 옮은 모양.

 

라레타가 아프다고 했을 때는 어렵잖게 했던 각종 죽이나 수프에서부터 사탕, 초콜릿, 약을 만드는 것은 물론 청소를 하거나 환기를 하거나 하는 일조차도 다 귀찮다.

 

하지만 페드는 몸을 일으켰다.

 

아픈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자신의 재채기에 귀가 쫑긋한 라레타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 주고 저녁으로 먹을 양배추말이 소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기침 한 거야?”

 

재채기입니다.”

 

이 작은 미코테가 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얼굴 빨간데.”

 

사막의 독뿔 도마뱀도, 바다의 해적도, 숲의 멧돼지도, 사람도 위험한데.

 

“...요리 불이 세서.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데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데, 아닌 거 같은데, 라고 하면서도 라레타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서 페드를 지켜보았는데 꼬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보아하니 영 수상쩍게 여기는 모양이다.

 

얼굴을 씻고 온다는 핑계로 화장실로 빠져 거울을 보니 정말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원래 피부색이 진하니까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다보니 알 수 있는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라레타에게 먹이고 남았던 약병을 꺼냈다.

 

쓴 약을 마시고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약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치질을 한 번 더.

 

찬물로 몸을 식히고 나갔더니 요리는 마악 완성되었다.

 

“...역시 얼굴이 빨간데.”

 

, 접시 좀 꺼내주겠습니까? 예쁜 걸로. 수저도 좀 놓아 주고. 꽃도 꽂을까요? 무슨 꽃이 좋습니까?”

 

! ...숟가락 먼저? 접시...”

 

어느 걸 먼저 하느냐 안절부절 하다가 라레타는 접시부터 꺼내러 우다다 달려갔다.

 

휴우.

 

식사 도중에 또 기침을 하기는 했지만 사레 들린 것 뿐이라며 훌륭하게 넘긴 페드는 뿌듯한 마음으로 디저트를 듬뿍 꺼냈다.

 

타닥타닥 백색 소음처럼 타오르는 벽난로는 따뜻한 온기를 집 안에 퍼뜨렸고 장작과 함께 넣은 라벤더 줄기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향기를 뿜어냈다.

 

다녀왔습니다-”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라면 조심히 다니라고 벌컥 성을 냈겠지만, 자칫했으면 잠에 빠졌을 뻔 한 페드로서는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

 

거대한 집사 바리톤은 페드와 눈이 마주치자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는 시늉을 했지만 그렇다고 그 덩치가 작아지거나, 정말로 조용해지지는 않을 거 아닌가.

 

“...되었으니 문만 좀 열어놓으십시오. 환기를 하게.”

 

저 주인이 웬일로 유하게 굴지?

 

어리둥절해진 바리톤은 보송보송 건강한 모습으로 과자를 입에 문 라레타를 보자 오늘은 기분이 좀 좋은가보다- 정도로 납득하며 페드 앞에 오늘의 획득물을 꺼냈다.

 

이거는 바다초롱이고-”

 

그렇군.”

 

이거는 알라그 금화고-”

 

그렇군.”

 

주인님은 아프고-”

 

그렇지. ...?”

 

감기 걸린 거 아닙니까? 얼굴도 빨갛고 숨소리도 다르고-”

 

페드는 집사 급료로 바리톤을 걷어차 쫓아냈다.

 

역시 아픈 거지!”

 

“...아닙니다.”

 

축 늘어진 눈가로 라레타를 올려다보자 라레타는 페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걱정 마, 내가 끝내주게 보살펴 줄테니까!”

 

“...라가요...?”

 

라레타는 페드를 침대에 밀쳐 눕혔다.

 

아니, 잠깐. 아프지 않습-”

 

그리고 요란하게 재채기 한 번.

 

마실 거 가지고 올게! 약은? 밥은? 맞아, 밥은 먹었지?”

 

그러니까 수프 끓여 올게! 이거 먼저 먹어!

 

라며 입에 꽂아 준 것은 감기약이었다.

 

뭣도 모르고 삼켜버린 덕분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런 것은 괜찮으니까, 신경을...”

 

옮기면 안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급격하게 잠이 온다.

 

밀어내는 것인지 이리 오라는 것인지, 허우적거리던 손에 옷깃이 잡혔다.

 

정신을 차려야...

 

...차려야 하는데...

 

라가 나가지 않게 하려면.

 

“...정신을...”

 

차려야, 까지 생각하자 불이 꺼지듯 의식이 사라졌다.

 

 

 

 

 

 

 

꿈을 꾸었다면 악몽이었겠지만, 페드는 눈을 떴다.

 

희미한 의식이 잡히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자 방금 전까지 잠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의식이 또렷했다.

 

몸을 침대 밖으로 꺼내자 고용했던 상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익은 금발은 보이지 않았기에 페드는 자신의 차림도, 표정도 가다듬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넘어 한 번에 두세칸씩 훌쩍 뛰어넘으면서.

 

그리고 위층은 아주 조용했다.

 

넓은 옷자락에 걸린 촛대가 쓰러지거나 꼬리가 바닥을 건드리거나, 나무나 천에 걸린 귀가 퍼득퍼득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리톤이 열어둔 그대로 문이 열려있어서.

 

....!”

 

페드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나갈 뻔 했다.

 

등 뒤에서 아주 작게 바스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뛰쳐나갈 뻔 했지만.

 

부스럭 소리에 발이 멈추었고 페드의 몸이 마법서만 뒤적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홱 돌았다.

 

몇 권인가 고른 책 더미 옆에 하얗고 동그란 천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는 눈에 익은 금색 머리카락이 정전기로 천에 붙어 흔들거렸다.

 

“...”

 

손을 내리자 다시 얇은 이불이 라레타를 덮었다.

 

페드는 자신의 손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던 걸까.

 

얇은 가운이 구겨질 정도로 손에 꽉 쥐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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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2

2019. 6. 3. 21:17 | Posted by 호랑이!!!

 

산 어귀에 다다르면 언제 올지 알았다는 듯 슈체른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올라가지 않을 높은 바위 위에서 새까만 머리를 나부끼는 차림은 여전히 백 년 전쯤의 것이다.

 

슈체른은 휙 뛰어내려서 질색하는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풍 바구니를 앗았다.

 

보자 보자... , 이 계절에 야채까지 들었군요? 그리고 과일이랑, 햄도 좋습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고... 프루던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런담?”

 

그 사람은 도시락의 호화스러움에 한참이나 찬사를 보내다가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탐욕이 뚝뚝 떨어진다.

 

그 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비록 당신이 더 어리지만 주인의 가족이니 그 아이가 실수를 하더라도 후한 마음으로 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것은 탐욕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산으로 갈까요?”

 

좋습니다.”

 

산에 오르자 전날은 달밤이 되어야 보였던 푸른 바람이 벌써부터 보였다.

 

부드러운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고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거나 빨리 밀어내다가 문득 슈체른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손을 내렸다.

 

뭘 하는지 알아차렸을까? 하며 옆으로 돌아보니 슈체른은 흐뭇하다는 듯한... 아니,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꽤나 호의적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아라벨라가 산 바람을 처음 맞았는데 좋아한다던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거겠지.

 

바실리는 원래부터 잘 돌아다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산의 모든 곳곳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지, 어디에 바실리가 좋아하는 딸기가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등... 그런데 이번에는 바실리가 기척을 없애주는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어서-”

 

저는 할머니에 대해 잘 몰라요.”

 

아라벨라는 툭 내뱉었다.

 

할머니를 왜 바실리라고 부르는 건가요?”

 

바실리를 바실리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할머니는 왜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었지요?”

 

이 산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답해줄 건가요?”

 

모른다고 대답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슈체른은 아라벨라가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예요?”

 

앞서 걸어가던 슈체른은 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아보자 아라벨라는 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든 것은 단도인 듯 했다.

 

“...좀 얌전한 줄 알았더니.”

 

렐리악 치고는, 하고 덧붙이는 슈체른은 말투와는 다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 뒤로 물러서십시오 렐리악의 어린 용.”

 

바실리가 아직 알려주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모르고 살게 두지는 않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며 슈체른은 아라벨라에게 도시락 바구니를 떠넘겼다.

 

아라벨라는 무거운 바구니를 옆의 바위 위에 얹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라는 말은 지금까지 더러운 것이 묻으니 조심하십시오라던가 꼴도 보기 싫으니 저리 꺼져라라는 말과 동일했다.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뒤로 돌아 도망치는 것이었으나 이번만은 말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경계와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슈체른은 빙글빙글 웃는다.

 

눈을 감아주십시오. 이제부터 심오하고 우아한 마법의 증거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이 세상의 모든 지고지순한 정수!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자의 증거! 자아 여러분께-비록 아가씨 한 분 뿐이지만- 소개하노니!”

 

얌전히 눈을 감기는 했지만 말이 현란해질수록 아라벨라는 품 속의 단도를 꽉 쥐었다.

 

살짝 실눈을 떠 볼까, 하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눈을 더 질끈 감았고, 슈체른이 부디 눈을 떠 주십시오, 라고 과장된 어투로 이야기했을 때에는 바람이 가라앉았다.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마차 몇 대 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용이 비늘을 반짝이며 아라벨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비늘과 검은 눈동자의 용은 몸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발을 가졌지만 그 발은 누군가를 해치기보다는 땅과 풀숲을 헤치는데 쓸 법한 모양이다.

 

모양을 보고는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슴, 때로 곰, 인간, , 고양이, 쥐 같은 동물과는 달라. 겨우 마차 몇 대 만큼의 크기였으나 그가 고개를 들면 거대하고 오래 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나 상냥하고,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마치 거대한 바위, 깎아지른 벼랑들, 고대의 언어가 새겨진 거대한 돌 앞에 선 것 같았다.

 

푸른 빛을 띤 바람이 용의 몸을 타고 흐르고 갑주 같은 비늘이 덮인 코가 아라벨라를 건드리자 아라벨라는 정신을 차렸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

 

슈체른이 웃었다.

 

땅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은 소리에 아라벨라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보는 것은 처음입니까? 정말로?]

 

그러다 아라벨라는 그 형태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3.. 그림에 있던... 호숫가의 그...?”

 

그림에는 거대한 바위처럼 나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것에서는 틀려 본 적이 없었기에.

 

그리고 슈체른은 긍정하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바트와 그린 그 그림을 본 모양입니다]

 

당신과 많이 닮았지, 돌개바람 같은 아이였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검은 눈은 얼핏 깊어졌지만 아라벨라가 무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림에 있던 사람들은 그럼... 용의 친구였나요?”

 

[우리는 동지에 더 가깝습니다]

 

동지?”

 

[그런 것은 나중에. 이제는 출발하지 않으면 곧 밤이 될 것입니다]

 

아라벨라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시나요?”

 

길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크기로는 몇 걸음 걸으면 산이 다 무너질 것 같다.

 

꼬리까지 흔들리면 주위의 나무고 바위고 다 무너지겠지.

 

의아한 목소리로 올려다보니 다시 심연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걸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요?]

 

뛸 건가요?”

 

그리고 우렁차게 터져나온 웃음소리는 거대한 바람처럼 쏟아졌고 거기에 직격으로 맞은 아라벨라는 쓰러질 것 같았다.

 

슈체른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바구니에 거대한 발톱을 둘 넣더니 익숙하게 뒤적였고 그 안에서는 바구니에 다는 끈이라고 생각했던 길다랗고 검은 끈이 나왔다.

 

슈체른은 그 끈을 몸에 둘렀고 잘 맞게 조인 다음 아라벨라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검고 탁하게 빛을 반사하는 비늘이 움직임에 따라 흘러가듯 움직이고 몸에 비하면 작다고는 하지만 아라벨라보다는 커다란 가죽 날개가 접혔다가 펴졌다.

 

책에서나 읽었던 거대하고 위대한, 신의 의지라고도 불리우는 몸.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선 이 산도 신성한 용의 몸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라벨라는 발을 디디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거대한 검은 용은 입을 열었다.

 

[야 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꼬리가 등을 툭 밀자 아라벨라는 앞으로 휘청이다 검은 끈을 잡았다.

 

슈체른의 몸이 낮아졌고.

 

튕겨 오르듯이 구부린 발을 펴자 쏘아 올린 듯 빠르게 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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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11

2019. 5. 29. 14:2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등에서 잠들었고, 깨었더니 아침이었다.

 

뱃속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와 배에 손을 얹었더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하루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차가운 시냇물 몇 모금뿐이라는 것도.

 

아침식사 시간이었기에 1층으로 내려가자 이스트를 넣어 동그랗게 부풀린 빵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에 곁들일 꿀과 갓 만든 버터도.

 

그리고 베이컨이나 소시지.

 

과일도 달게 조린 것과 신선한 것 두 가지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손질한 과일은 이 계절이면 푹 익어서 달고 부드럽겠지.

 

자르는 것에는 이도 필요없다.

 

혀로 꾹 누르기만 해도 그 연약한 것은 으깨져 달콤한 물이 되리라.

 

변하지 않는 메뉴이건만 기대에 가득차서 아라벨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무릎에 핸드백을 얹은 마르틴이 화들짝 놀랐다가 휴우 한숨을 쉬며 다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조그맣고 반들거리는 머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아라벨라를 알아보았는지 머리를 쏙 내밀고 삐이, 울었다.

 

마르틴은 소시지 조각을 뱀(같은 것)에게 먹이고 있었다.

 

소금기 있는 걸 먹여도 되나?”

 

잘 먹고 있어. 물도. 있지, 삐가 물 마실 때 있잖아, 막 볼이 이렇게-”

 

? 삐라고?”

 

아라벨라는 마틴의 건너편에 앉으려다 귀를 의심했다.

 

삐 하고 우니까 삐.”

 

“...마틴, 너 말 한 마리 있지?”

 

.”

 

3살짜리, 까만색과 하얀색이 들어간 순한 암말.

 

이름을 뭐라고 지었어?”

 

까맣고 하야니까 체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아라벨라는 자리에 앉아 동그란 빵을 비틀어 찢었다.

 

손안에서 껍질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고체라기보다는 액체처럼 보이는 버터는 나이프 위에서부터 가장자리가 흐물흐물 녹아 진득하게 빵 위에 듬뿍 얹힌다.

 

거기에 절인 베리류를 시럽째로 푹 떠서 얹고 한입 가득 깨물자 버터가 바깥으로 밀려나와 뺨에 묻었지만 맛이 환상적이었다.

 

접시에 소시지와 베이컨, 스크램블드 에그를 한 무더기나 가져와서 마르틴의 뱀은 접시 위의 마지막 소시지를 아라벨라가 자르는 순간 자그맣게 삐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육즙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기름진 소시지가 아라벨라의 포크에 꿰뚫려 입 안으로 사라질.... 뻔 했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뽑아 내밀자 마르틴의 뱀은 잽싸게 목을 뻗어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시지를 낚아챘다.

 

쳐든 입 사이로 머리만큼이나 굵은 소시지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라벨라는 물을 한 잔 가득 들이켰다.

 

그런 아라벨라의 기세에 마르틴은 겨우 설탕에 절인 나무딸기를 조금씩 먹을 뿐, 조금 덜어준 고기는 다 뱀 입으로 간다.

 

자기 배가 차고 나니 그런 게 보여 아라벨라는 부끄러워하며 계란을 듬뿍 떠서 마르틴의 접시에다 올려주었다.

 

“...나 혼자 다 먹다니 부끄럽네.”

 

누나는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얼마나 배고팠겠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문이 열렸고 마르틴의 뱀은 후다닥 가방 속으로, 마르틴은 몸으로 가방을 가렸다가 조심스럽게 찰칵, 걸쇠를 닫아 테이블보 아래로 숨긴다.

 

들어온 사람은 프루던스였다.

 

아가씨, 언제쯤 나가려 하십니까?”

 

아침 먹었으니까 이제 곧.”

 

튼튼한 신발을 가져왔으니 발에 맞으신지 신겨드리겠습니다.”

 

프루던스가 가져온 것은 아라벨라가 3층에서 본 적 있는 가죽신이다.

 

3층에서 보았을 때는 철편이 붙어 있었지만 아라벨라가 걸을 것을 생각하여 떼놓은 모양으로 아라벨라의 발에 딱 맞았다.

 

잘 맞으시는군요. 이 사이즈로 갖바치에게 주문을 넣어두겠습니다. 장식이나 재질, 모양에 있어 주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가벼운 걸로.”

 

알겠습니다.”

 

프루던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렸다.

 

,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무게가 좀 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을 조금 쌌습니다. 만약 늦어질 것 같으시면 안에 조그만 폭죽을 넣어두었으니 둥근 구멍을 위로 하고 마력을 조금 불어넣어 사용해주십시오.”

 

그런 게 여기에 있어?”

 

국경이나 변방에서 위급 시에나 사용한다는 물건은 듣기만 했지 보는 건 또 처음인데 집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종종 주인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발을 뻗자 익숙하게 신발이 신겨진다.

 

누군가 신었다는 신발은 부드러워서 발목 부근을 끈으로 다시 조정해주자 아주 편했다.

 

누나, 어디 가?”

 

산에.”

 

아까까지는 뱃속이 조이도록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터질 것 같다.

 

포만의 행복감에 우선하여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과 먹어 불러진 배가 신경쓰여 아라벨라는 집사가 가져다준 바구니를 당겨 안았다.

 

묵직했다.

 

살짝 덮개를 열어보니 그 안은 절인 과일과 야채가 병째로 몇 개나 들어있고 둥근 치즈가 자르지도 않은 것이 통째로 하나, 빵도 몇 덩어리나 있다.

 

베이컨도 햄도 소시지도 줄줄이 들어서 나들이용 도시락이 아니라 사냥 나간 병사 한 부대를 먹이는 용도인 것 같다.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남은 것은 슈체른에게 주고 오십시오.”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마르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슈체른은 누구야?”

 

어제 만난 사람.”

 

이것은 답이 되지 못했나 보다.

 

이것밖에 모르는데도.

 

그러나 마르틴은 포기하지 않고, 지나쳐 가려는 아라벨라의 소매를 잡았다.

 

나도 갈래. 아니, 나도, 가면 안돼? ?”

 

아라벨라는 신성한 용의 몸을 떠올렸다.

 

평지와는 전혀 달랐지.

 

게다가 그 이세계 같이 어찔한 풍경은 자신도 겨우 적응할 정도였다.

 

다음에 가자.”

 

마르틴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언제?”

 

글쎄? 그건 보고.”

 

?”

 

그러니까 이 집안에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좀 오래 안계신 것 같은데, 걱정은 안 되지만 일단 한 번 찾아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있잖아. 우리가 귀족이기는 하지만 이 집안 주인도 아니고, 이걸 얘기하면 고용인들이 다 떠나버릴까? 그리고 아버지가 일단은 렐리악 백작이라고는 하지만 전대에 비해서는 힘도 약하고. 위엄도 책임감도 우아함도 아무것도 없는데 할머니까지 없어지면 백작이 아니라 남작이나 자작까지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걸 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바뀐 신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에게, 배울 게 많아서, 대우가 달라져서, 행복보다는 책임을 느끼고 나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피야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될까? 이미 이 어깨에는 짐이 이만큼이나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해서 짐이 더 늘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하지?

 

“...다음에 말해 줄게.”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떼어냈다.

 

몸에 걸칠 것이라고는 셰필라가 보내준 레이스 무더기밖에 없었기에 아라벨라는 3층으로 갔고, 이번에는 프루던스도 말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리지는 않았지만 말리고 싶은 것인지 무슨 더 할 말이 있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을 뒤로하고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경갑 상의를 고르자 프루던스는 손수 내려주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할 게 뻔하니 원.

 

프루던스.”

 

, 아가씨.”

 

할머니는 왜 날 싫어해?”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이 뒤로 왜 싫어하지 않는지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이 무겁나.

 

마르틴은?”

 

주인님께서는 아직 마르틴 도련님을 만나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싫어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벨라가 잠옷을 휙 벗어던졌지만 프루던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중드는 것이 익숙하다고 한들 조금은 놀랐으면 했는데.

 

그래야 자기도 모를 말실수도 좀 할 테고.

 

아라벨라는 옷을 벗어던졌고 장식물 중 하나를 떨어뜨려 깨기도 했고 몰래 돌아선 집사 뒤에서 큰 소리를 내어 놀래키는 것은 생각만 해 보았으나 여전히 익숙하고 침착한 손길이 가죽 갑옷을 입혀줄 뿐이다.

 

있지, 프루던스.”

 

, 아가씨.”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자 잘 갖추어진 옷 덕분에 몸이 가볍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왜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물어보면서도 또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 돌아온 답은 조금 달랐다.

 

셰필라님은 모르니까요.”

 

왜 몰라? 렐리악 백작인데?”

 

그야 셰필라님은... .”

 

프루던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 것 같다.

 

지금 백작이고 가주인데 어째서 모르지? 할머니만 알고 아빠는 몰라? ?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가 말하면 안된대? 아빠에 대해서?”

 

덥썩 어깨가 잡히고 프루던스는 난감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가감없이 나름대로의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라벨라는 신이 나서 잡은 어깨를 흔들었으나 프루던스는 어지러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주인님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했는데 조금 더 말해줘도 좋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프루던스! 나 싫어하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 좋아해?”

 

우아하고 당차고 모든 귀족의 귀감 같은 아가씨를 존경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한 점도 없다.

 

당황했을 때나 목소리에 조금 고저가 있었을 뿐이지 평이하고 지루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에 아라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더 캐보려고 했지만 집사는 다시 완전한 철가면을 되찾았고 어렵지 않게 아라벨라를 저택에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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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9

2019. 5. 22. 10:03 | Posted by 호랑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티엔은 일주일 치의 방값을 더 지불했다.

 

재단에 연락했더니 당장 달려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마틴이 애써서 진정시켰고 하랑은 약에 적응했는지 약 전에 죽이라도 먼저 먹었다.

 

티엔과 마틴은 우편으로 받은 서류를 처리하거나 전화기에 매달렸고.

 

그렇게 첫 히트가 일어난 후 사흘이 지나고 하랑의 열이 가라앉았다.

 

하랑의 뱀, , , 호랑이는 며칠 아픈 하랑의 곁에 있는가 싶더니 몸이 나아진 것 같자 새로운 환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티엔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방바닥에서 작은 동물의 뒷덜미를 집어 치우는 것 같은 행동을 간혹 했다.

 

하루이틀은 그러려니 했지만 그게 사흘이 되자 티엔은 하랑의 방문을 열어젖혔고 잘만 자던 하랑은 난데없는 방문에 억지로 눈을 비벼 떴다.

 

뭐요?”

 

나가라.”

 

남의 방에 와서 갑자기 축객령이라니?

 

뭘 잘못 들었나?

 

하랑은 다시 물었다.

 

뭐요?”

 

나가라고 했다.”

 

이 양반이 미쳤나, 뜬금없이 왜 와서 이런담.

 

자신이 마틴 형도 아니고, 아니, 마틴 형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이렇게 다짜고짜인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말도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뭐요.”

 

시비같은 어투에 티엔도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나가-”

 

정티엔, 그렇게 말하면 남이 어떻게 알아요?”

 

동년배라고 종종 홀든네 첫째를 만나더니 말투까지 옮았나, 하고 마틴이 운을 떼었다.

 

요즘 티엔이 허공에 손질을 해서...”

 

“...네 개나 쥐나 뱀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 때문이다. 바다 바다 했으니 나갔다 와라.”

 

... 혼자?”

 

그래.” “저랑?”

 

티엔과 마틴이 동시에 말하더니 힐끗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랑.” “혼자-”

 

또 동시에 말한다.

 

뭐냐.” “뭐예요.”

 

또 동시에.

 

이건 또 무슨 코미디인지 생각하다가 하랑은 작은 가방에 주섬주섬 노란 부적을 넣었다.

 

우리 애들이랑 갔다 올게.”

 

나도 같이 간다.”

 

, 저도!”

 

저 양반들 일이 급한 거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야 저 사람들이 감당할 일이고.

 

좀 있자니 둘이 뭔가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하랑으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호텔 밖에 발을 디디자 쨍한 햇볕이 피부에 닿았고 방 안에서보다 강렬하게 바다 냄새가 난다.

 

이미 붉은 개들은 자기들끼리 뒤엉키고 장난치며 바다로 달려갔고 거대한 호랑이는 머리에 쥐를 얹고 발을 옮겼다.

 

은근슬쩍 다리에 감기는 청사도 모른척하며 하랑이 발을 옮기자 넓은 바다가 눈에 담겼다.

 

겨우 이런 것에 더는 설레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랑은 달려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하랑, 안된다!”

 

하랑 군, 준비운동! 준비운동!”